백선엽 명예 원수 추대 퇴출 경위
박경석
백선엽 장군은 전역 후에도 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등을 역임하다기 정권이 바뀌자 무직으로 처음 한가한 시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국방장관을 찾아가 한국전쟁사가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며 새롭게 편찬할 것을 건의 하면서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차청해 전쟁기념관 4층에 사무실을 내고 출퇴근을 시작하였다.
2020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 국방부로부터 현역 중령 보좌관과 현역 사병 1명, 사무실과 사무실 관리비, 자문비 월 200만원, 운전사가 딸린 고급 에쿠스 승용차를 배정 받으며 현역 못지 않는 호사를 누렸다. 백선엽 자신의 입맛에 맞는 6.25전쟁사를 11권 시리즈로 발간을 이어갔다. 새 6.25 전쟁사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요소는 다 걷어내고 새로운 전사를 통해 '6.25의 이순신' '구국의 영웅' '한국전쟁 4대 영웅' 등 최고의 존칭으로 불리는 등극의 위치에 올라 섰다.
역대 국방장관은 그가 지도해 가며 쓴 전쟁사를 그대로 인정했고 주변에서는 명예 원수 추대 운동으로 번져 세계 군사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 했다. 미군 당국은 그를 마치 최고 영웅으로 올려 세우고 저들의 직속상관보다 더 존경을 표하면서 그를 추앙하는 듯한 형식이 이어졌다. 백선엽은 군단장, 군사령관 시절 자신의 미군 고문관을 하급자인데도 찝차 상석에 모시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당시 항간에는 백선엽을 '미국의 X' 라는 조롱이 떠돌았다.
그 문제의 새로 창간한 6.25전쟁사 1권과 2권에는 나 박경석이 전우신문 회장과 군사평론가협회 회장의 직함으로 자문위원으로 인쇄돼 있다. 그 순서도 역대 참모총장보다 상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나는 그로부터 정중하게 식사 대접 딱 한번 받은 것 밖에 없다. 은밀하게 봉투를 건넸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단 한 차례 자문한 적도 없다. 그 1권과 2권에는 자신의 민감한 시기의 기록이 있는 부분이다. 군사(軍史) 학자인 나를 끌어들여 자신의 위치를 자기가 원하는대로 영구히 확정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최근(2024년 9월 7일)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박경석 자문위원이 모두 삭제됐다. 나는 그 비열한 계책을 예측해 박경석의 명단이 있는 두 권을 확보해 놓았다.
나는 1960년대 진해 육군대학에서 '군단 방어'를 강의했고 당시 6.25한국쟁쟁 초기의 방어작전 연구 논문 실적은 내가 유일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백선엽은 나를 포용해야만 자신의 야욕을 충족할 수 있다고 판단해 집요하게 접근을 이어갔다. 나는 그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리고 그의 불순한 기도를 감시하며 상대적 논리를 대비했다.
백선엽은 불행이도 이 세상에는 '영원히 감추어질 비밀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몰라본 것이다. 그가 사후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으리라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잘못 기록된 우리나라 군사(軍史) 한 부분을 바로 잡고 싶은 충정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군사(軍史) 학자로서 육군대학에서 전공과목 '군단 방어' 를 강의할 때부터 일본군 출신 한국군 장교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몇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첫째, 일본군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친일파로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일본군 출신에 의해 6.25전쟁을 극복한 점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편 일본군 출신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독립군 소탕 부서에 자원하여 독립군 사살 작전의 지휘관으로 활약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내놓고 민족을 반역한 중죄인이기 때문이다.
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일본군 관동군사령관 지휘하의 간도특설대는 바로 조선인으로 조직된 토벌대였기 때문에 특별한 조사가 필요했다. 나는 예편 후 이 일에 몰입하면서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자료 수집에 나섰다. 그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또는 일본의 괴뢰인 만주군 장교가 조선인 병사를 지휘하면서 조선 독립운동가와 독립군 소탕작전을 펴면서 많은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특히 백선엽은 조선인 학살을 자랑하는 대담을 일본에 건너가 자행했는가 하면 각각 다른 일본어 판 회고록 두 권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 중의 동포를 죽여야 했다는 고백과 함께 일본의 천황에 대해 충성해야 하는 처지를 오히려 명예로웠다고 기술했다.
백선엽은 동생 백인엽과 함께 우리나라 군 출신 가운데 최고의 부정 축재자인 수천억 재산가로 알려져 있다. 지난 시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선인학원' 의 법인체는 바로 그들 형제의 소유였다. 그런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영웅 만들기에 몰두한 나머지 명예원수로 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집필자를 고용해 많은 저서를 통해 백선엽의 전공을 과장 또는 날조하여 최고 영웅으로 둥갑 시켰다.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은 과장 날조된 백선엽의 공적을 믿고 백선엽을 명예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국군 인사볍을 개정해야 했다. 현행법으로는 명예 원수 제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1년여에 걸친 극렬한 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채명신 장군을 위주로 내 투쟁에 동조하는 원로들이 가세하면서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임을 깨닫고 명예원수 추대를 스스로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6.25전쟁 제일의 영웅으로 불리운 사실도 그 허구가 들어나 백선엽은 자승자박의 길에 당도하게 되었다.
내가 옛 상관을 고발해야 하는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던 정의는 옛 상급자보다 절대 우위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다는 분명한 진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의 처음 의중대로 백선엽이 명예원수로 추대 되었더라면 세계 軍史學界 최대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 군사학계는 희한한 눈초리로 이 해프닝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수립 최초의 명예원수 추대라면 그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크다. 만일 독립운동과정에서 독립운동가와 독립군 토벌 작전 지휘관 경력자가 최초의 명예원수로 추대 되었다면 정부수립 자체의 이념이 결정적 모순에 직면한다. 또한 북한 인민군의 6.25 남침이 타당성을 갖는다. 일제 잔재 소탕이라는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아래 기록은 백선엽 명예 원수 추대 퇴출에 직간접으로 기여했던 원로 장군의 명단과 기여 내용이다.
명예원수 추대 퇴출에 기여한 예비역 장군
김홍일(예 육군중장. 간도특설대 존재 최초 발의)
이형근(예 육군대장, 간도특설대 확인 자료 지원)
채명신(예 육군중장, 박경석의 퇴출운동에 동참 지원)
박정인(예 육군준장. 박경석의 퇴출운동에 동참 지원)
이대용(예 육군준장. 박경석의 퇴출운동에 동참 지원)
* 이 외에 뜻을 함께한 예비역 장군은 수십명이 됨(이상 모두 한국전쟁 참전)
추가 증빙 자로 첨부
내가 월간 군사논단 전우신문 등에 백선엽 명예 원수 추대 반대 활동을 시작하자 댱시 국방장관 김태영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백선엽 장군 관련 증빙 자료 확인을 위해 담당 책임자를 보내겠으니 협조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각 "준비가 돼있다"고 받아드렸다.
다음닐 국방부 인사복지실장 육군소장과 담당 과장 육군대령이 '서울 종로구 사직동 스페이스 본 아파트 101동-210호'(당시 본인 거주처)에 방문했다. 그 모임에서 모든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 경우가 당국과의 유일한 공식 접촉이었다. 그 다음날 그들은 나의 권고로 채명신 장군을 방문했다. 그후 청와대에서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 퇴출 연락을 받았다.
일본 간도특설대 연구가 田中久弘 박사. 백선엽 자료집을 가지고 박경석 서재 방문 - (화분 앞 책뭉치)
다음 사진 - 백선엽 자료 검증하는 육군본부 軍史硏究所 所長 한설 자군 및 실무진 일행
우측으로부텨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한국전쟁연구과장 김수철 대령. 박경석 작가. 육군본부 軍史硏究所長 한설 장군.
軍史硏究員 김상규 박사
첫댓글 매우 정확하신 판단에
감탄의 박수 드립니다!
증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증거 확보를 위해 두 번에 걸쳐 일본을 방문
전문가를 찾아 교류를 시작하면서 결정적 증거를 확보 했죠
그 과정에서 일본에서 오는 손님 접대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경비도 많이 들었죠.
내가 부자인 줄 착각, 소규모 단체 관광 손님 접대까지 했어요,
잘은 모르는 병장으로 제대한 일반인입니다만 동참하신 장군들이 훌륭하신 분들이라 믿음이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