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거쳐 한국으로 전래된 서학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피땀 위에 "한국교회"가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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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쑤저우교구장 쉬홍건 주교와 샤오헝탕본당 주임 양타오셔우 신부가 24일 샤오헝탕성당에서 개막한 ‘중국, 한국 그리고 천주교’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
복자 주문모 신부의 시복 2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 ‘중국, 한국 그리고 천주교’가 24일~6월 30일 중국 장쑤성 쿤산 쑤저우교구 샤오헝탕성당에서 열린다.
주문모 신부의 고향 본당인 샤오헝탕본당(주임 양타오셔우 신부)이 주최하고,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지원 및 자문을 맡은 이번 특별전은 한국과 중국 양국 간 문화 교류를 통해 발전해 온 천주교회사를 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 전시는 17~19세기 서양 문물과 함께 중국에 소개된 서학이 한국으로 전해져 이후 한ㆍ중 양국에 신앙으로 뿌리내리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총 7막으로 구성된 이번 특별전에는 당시 교류됐던 고문서ㆍ지도ㆍ서한 등 천주교 관련 유물 100여 점이 선보인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는 “전시가 서학의 유입 및 전래 경로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면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 서한 등 유물을 통해 주문모 신부님의 한국 사목 활동을 되짚어볼 소중한 기회도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본지는 중국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석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아쉬움을 달래며, 영상 전시인 7막을 제외한 특별전 1~6막을 지상 전시한다.
제1막 시간을 돌아보다
중국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때는 7세기 당 태종 시대였다. 당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던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돼 추방된 이들이었다.
이 선교사들이 전한 경교(景敎)는 9세기경 사라졌지만, 중국과 그리스도교 문화의 첫 만남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700여 년이 흘러 원나라 때 그리스도교가 다시 중국과 만났다. 플라노 카르피니 신부 등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교황 사절로 임명돼 몽골로 파견되면서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하지만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중국 내 그리스도교는 다시 자취를 감췄다.
▲플라노 카르피니 신부의 선교 여행로
교황 사절로 임명돼 몽골로 파견된 플라노 카르피니 신부의 선교 여행로. 여행로를 통해 원나라 당시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마르코 폴로 여행길도 그려져 있다.
제2막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명나라 말기, 예수회 소속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마태오 리치가 북경에 도착했다. 이중 마태오 리치는 중국 문화에 맞춰 천주교를 알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천문학, 역학과 함께 천주교를 ‘서학’(西學)으로 중국에 소개했다. 이에 서광계ㆍ양정균ㆍ구태소ㆍ풍응경 등의 중국 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조선도 이때 처음으로 선교사와 만났다. 조선 임금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 교류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한에는 서학을 조선에 보급하고자 하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천주실의」 : 1603년 북경에서 초판이 간행된 이후 조선, 일본, 몽고 등 한자 문화권 내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ㆍ이승훈ㆍ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신앙공동체 설립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곤여만국전도」 : 1602년에 마태오 리치가 이지조의 도움을 받아 6개의 판넬에 그린 제3판 세계지도. 부연사행(赴燕使行)으로 세 차례나 북경을 다녀온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1603년(선조 37) 북경에 갔던 이광정이 이 지도를 조선에 들여왔다고 기록돼 있다.
▲강희제의 「천주교 승인교서」 : 1692년에 강희제는 각 성의 지방 관리들에게 천주교 활동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내용의 명령을 내려 정식으로 선교사가 중국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19세기 중엽 이전 청나라 정부가 천주교의 자유로운 선교를 승인한 유일한 공식서류이며, 중국의 천주교 발전사를 이해하는 데 소중한 자료이다.
제3막 서학에서 서교로, 한국 천주교회를 꿈꾸다
서학은 서양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조선으로 전달됐다.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엮어낸 한역서학서가 전해지면서 조선 실학자들은 천진암과 주어사 등에서 강학모임을 열어 서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벽을 비롯한 강학에 참여한 조선 실학자들은 서학을 연구의 대상에서 교리로서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에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요서론」 : 천주교 교리서. 십계, 사도신경 및 주요 기도문에 대해 해설을 하고 있다. 1789년 이전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성교명징」 : 기존의 한역서학서를 바탕으로 중국 교우들의 도움을 얻어 간행한 교리서. 천주교 주요 교리를 8권 20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제4막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이승훈(베드로)은 1783년 북경 북당 성당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이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줬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는 순간이었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서울 명례방 장악원 앞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하고, 함께 교리를 익히며 신앙을 키웠다. 또 조선 신자 중 밀사를 선발해 북경에 한국 천주교회 탄생을 알리는 등 중국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상재상서 한문전사본」: 정하상 성인이 지은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이 글을 작성해 두었다가 1839년 6월 1일 체포된 다음 날에 재상 이지연에게 전달하였다.
천주교 기본 교리에 대한 설명, 호교론, 신앙의 자유를 호소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블랑 주교의 전사본이다.
▲「상재상서 한글필사본」: 한글 필사자, 한글 필사년도 미상. 상재상서의 한글필사본은 다수 있다.
제5막 순교의 꽃으로 피어난 한국 천주교회
조선 내 천주교 신자는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윤지충(바오로)이 1791년 신해년 겨울 전주 풍남문 앞에서 참수되면서 첫 순교자가 됐다.
이후 조정은 신유박해(1801)ㆍ기해박해(1839) 등 박해를 일으키면서 수많은 신자의 목숨을 끊었다.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순교하면서 조선엔 선교사가 남지 않게 됐다. 이런 소식을 들은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면서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됐다.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대목구를 설정한다는 내용의 소칙서이다.
제6막 기억과 기념 그리고 흔적
중국은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는 데 있어 중요한 교류가 이뤄지는 거점이 돼왔다. 특히 북경은 한국과 중국 간 긴밀한 요청이 오가는 중요한 장소였다.
서양에서 서학을 받아들인 중국, 중국을 통해 서학을 접하고 신앙을 키운 한국. 한국 천주교회를 이야기할 때 중국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망설임 없이 국경을 넘었던 복자 주문모 신부의 선교 열정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파견된 첫 번째 해외 선교 사제. 주 신부는 1794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해 이후 역관이었던 최인길의 집에서 머물며 신자들에게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1795년 6월 을묘박해가 일어나면서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결국 주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5월 13일 서울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후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 주문모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의 초상 : 중국인 주문모 신부(왼쪽)와 한국인 김대건 신부가 양 떼를 지키려는 사제로서 활동하고 노력한 결과는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을 통해 계속 기억됐으며, 오늘날 중국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를 묶어주는 단단한 고리가 되고 있다. 복제본으로 샤오헝탕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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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베아 주교가 생 마르탱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서한」 :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서부터 1795년 부활대축일에 미사를 봉헌한 내용 등이 수록된 서한이다.
백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