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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파운드리 회사(TSMC) 창업자 장충모(張忠謀)의 좌절과 학습:『자서전』 2020년
2020년 7월 23일
* 대만 파운드리 회사 창업자 장충모는 1931년 태어나고 홍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경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젊은 시절에 고생하지 않고 미국에 유학하고 미국 회사에 취직하여 잘 살았습니다. 대만 파운드리 회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장충모 개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그는 홍콩과 중경 지역에서 자랐기에 대만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과는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더구나 장충모는 철저히 미국 교육을 받은 미국인이기에 대만에 돌아와서 지금까지도 대만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미국의 부름에 곧바로 호응하였는지 왜 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지 등등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대만 파운드리 회사는 미국 반도체 설계 회사의 주문을 받아 제품을 생산하여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경영방법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여 성공하였습니다. 사실상 대만 사회에 미국식 회사 운영기법을 뿌리내려 성공하였다고 평가합니다.
대만 파운드리 회사에는 두 세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에 투자하여 돈을 벌자는 친중세력이 있고 둘째는 미국에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을 많이 받아 돈을 벌자는 친미세력이 있습니다. 지난 대만 총통 선거에서 대만 여론은 친미 반중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여론의 변화에 따라 대만 파운드리 회사는 미국에 120억 달러 투자를 결정하고 친미 노선을 결정하였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친미 노선으로 갈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와 회사들도 대만의 친미반중 여론을 확인한 뒤부터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반도체 산업의 협력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장충모의 자서전이 2020년 출판되었고 7월 17일에는 대만 중정대학에서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강연에서 자서전 내용을 몇 곳 읽어주며 당시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장충모는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태어났고 중경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1학년을 다닌 뒤에 취직하려고 MIT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2학년에 전학하였습니다.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박사학위 시험에서 2번 떨어져 학위를 포기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반도체를 독학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회사에 취직하여 높게 승진하였고 퇴직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좋은 시절도 좌절한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좌절한 시기에도 항상 열심히 반도체를 공부하고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좌절시기에 공부한 것이 나중에 파운드리 회사를 만든 밑천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장충모 회장이 허락한다면 초청하여 며칠 동안 머물면서 천천히 강연하여 들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항상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여야만 상대방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기업가보다도 일반인들이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인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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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 오패민(吳佩旻), 노지방(盧智芳 )
2020년 07월 17일
자료 출처 : 대만 Cheers 잡지
장충모는 대만 중정대학(中正大學) 강연회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비롯하여 어려서부터 88살까지 고생 속의 단련과 학습을 상세하고 재미있게 말하였습니다.
장충모는 연령 단계마다 학습의 중점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가정교육이 아주 중요하며 가치관, 시비, 근면, 절약 등을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갔는데 어머니가 용돈을 주시면서 장부책에 기록하라고 시켰답니다. 어느 때에는 장부 계산이 틀려서 어머니에게 크게 혼났다고 합니다.
장충모 가정은 당시에 일반 가정보다 조금 잘사는 중상(中上)이었답니다. 홍콩에서 초등학교를 다날 때는 가정부를 두었으나 일요일 오전에는 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직접 청소하라고 시키고 가정부에게 휴가를 주었다고 합니다.
8-9살부터 신문을 보았고 지금까지 습관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장충모는 나중에 미국에서 36년 동안 일하는 동안에는 중국어를 끊었고 54살에 대만에 돌아온 뒤에야 중국어를 다시 배웠다고 합니다. 현재 그의 책상에는 중국어 사전 『사해(辭海)』와 『사원(辭源)』을 펼쳐놓았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대 진주만 습격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였습니다. 장충모 가족은 홍콩을 떠나 상해로 이사하고 다시 남경, 복건성 복주(福州), 낙양, 서안, 성도로 이사 갔고 나중에 중경으로 이사 가면서 45일 동안 걸어갔다고 합니다. 일생 동안에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합니다.
중경에서 남개(南開) 중학교에 들어갔고 배우는 동안에 가장 신났던 시기라고 말합니다. 처음으로 기숙사에서 살았고 나중에 미국 하버드대학과 MIT 공과대학에 다닐 때도 학교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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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숙사 생활 :
기숙사 생활이 아주 중요한데 젊은이가 장래에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배우는 곳이 기숙사 생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18살에 비행기 타고 미국에 유학을 갔으며, 『장충모 자서전』에서 비행기 탈 때의 기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 땅을 내려다보니 홍콩이 안개 속에서 멀어지는 것이 조금 슬펐습니다. 홍콩에서 반년을 살았던 것이 정말로 꿈만 같았습니다.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알았고 꿈을 깨어나서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깨어났을 때 정말로 아주 처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후 8시 날이 어두워지고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고 있으며 하늘은 끝없이 보였습니다. 6년 전에 남개 중학교에 입학할 때의 그리움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멀리 혼자 떠난 적이 없었고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멀리 바다를 건너 낯선 외국에 가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막연하기 끝이 없는데 그때는 마음이 더욱 착잡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아주 재미있는 하버드대학 1학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2、하버드대학 1학년 :
하버드대학 1학년은 인생에서 항상 따라다니는 가장 큰 잔치였습니다.
장충모는 『자서전』에서 말한 것들을 떠올리며 말하였습니다.
“하버드대학 학생들이 우수하고 흥미도 다양하였는데, 이것이 짧은 1년 동안에 미국인들과 사귀는 장애를 없앴던 중요한 까닭이었습니다.”
“당시에 내가 일반 보통의 미국대학에 들어갔다면 대학 1학년을 운동과 사교활동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하버드대학 학생은 다양한 흥미를 가졌습니다. 기숙사 같은 방 친구들 가운데 음악을 잘하여 음악을 배우려는 학생이 있어서 함께 교향악을 들으러 가고 가극을 보러 갔습니다. 건축을 배우는 학생도 있고 예술을 배우는 학생도 있어서 휴스턴 박물관에 함께 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치를 배우는 학생은 나를 찾아와서 앞으로 중국공산당의 전망에 관하여 토론하였습니다. 물리학을 배우는 수준 높은 학생은 나에게 물리학과 수학의 어려운 문제를 잘 가르쳐주었습니다.
기숙사 한 방 친구 신클러(Sinclair)는 나를 데리고 농구장과 아이스하키장에도 가서 경기를 보았고 내에게 여자 친구 사귀는 방법도 설명해주었습니다. 친한 친구 폴만(Paulmann)은 취미가 나처럼 넓어서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가 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잘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하여 1년 동안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을 정말로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MIT 공과대학으로 전학하였습니다. MIT 공과대학 학생들의 개성이 하버드대학 학생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MIT 공과대학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아주 쫀쫀하며 타고난 재능이 넘친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의 흥미는 아주 좁은 영역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하버드대학에 비교하면 아주 재미없고 멋없는 대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MIT 공과대학의 멋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고 말하자, 청중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장충모는 헤미웨이가 파리에서 생활은 언제나 “갖고 다니는 잔치”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보낸 1학년은 언제나 갖고 다니는 잔치였고 지금도 갖고 다닌다.”고 회고하였습니다.
* 헤밍웨이 : If you are fortunate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eable feast.
많은 사람은 장충모가 하버드대학에서 MIT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로 전학간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장충모는 “하버드대학의 학부가 보통교육이고 학과를 나누지 않았고 다만 집중하는 분야(concentration area)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내가 하버드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집중 분야가 있더라도 좋은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미국에 있는 중국인들은 좋은 대학 졸업장을 얻으려고 하였고 나도 더욱 전문적인 것을 배우려고 MIT 공과대학으로 옮겼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장충모는 5년 동안을 MIT 공과대학에 다녔지만 기계공학 박사학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2살 후반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계속 머물렀던 까닭은 박사자격시험을 보려고 남았습니다. 1년에 1번이고 2번 기회가 있는데 1번 시험에서 떨어졌기에 2번 시험을 보려고 남았습니다. 그러나 2번 시험에서도 떨어져서 박사학위 받을 기회를 잃었습니다. 시험을 두 번 보았는데 모두 떨어졌습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에 심정을 말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시작한 학교공부는 여기에 와서 끝냈습니다. 나는 아픈 마음을 갖고 MIT 공과대학이 있는 찰스 강(Charles River)과 석회석 건물을 떠났습니다. 나는 MIT 공과대학을 아주 높이 100% 존경하지만 50%만 사랑합니다. 나는 교실, 실험실, 도서관 기숙사에서 5년이라는 청년시절을 보냈고 대학은 나에게 취직할 밑천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학에서 줄 수 있는 최고 학위 곧 박사 학위를 요청하였을 때 대학은 거절하고 모르는 척하였습니다.
MIT 공과대학에 박사 학위증, 서적, 실험실 등을 남겨두고 나를 나가라고 하였고 나는 아주 긴 인생길을 떠났습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반도체 길을 걸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하였으나 나는 나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장충모는 『자서전』 몇 구절을 읽어준 뒤에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비분강개하고 격앙하였는데 여러분은 박수를 쳐주지 않습니까?”
청중들은 천둥소리와 같이 크게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3、박사 학위를 포기한 뒤에 반도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는 길이 끊어진 뒤에는 반도체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빨리 독학을 시작하였습니다. 오하오주에 있는 실바니아(Sylvania) 반도체 회사에 취직한 뒤부터 날마다 3시간 동안 반도체 서적을 공부하였습니다. 물리학과 수학의 기초가 나쁘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습니다. 당시에 술을 좋아하는 동료 직원은 날마다 술을 마셨습니다. 장충모는 날마다 저녁에는 술 마시는 동료 직원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문의 70-80%를 대답해주었습니다. 다른 문제가 있으면 이튿날 더 잘하는 동료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장충모는 “나는 24-27살까지 반도체를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실바니아 반도체 회사는 엉성하였습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당시에 실바니아 사장은 “우리는 팔릴 수 있는 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제품은 팔지 못한다.”고 말하였답니다. 장충모는 특별히 강조하여 말하길 “성공하지 못한 사장님의 말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절대로 이런 길을 다시 가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하였습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27살에 택사스 인스트루먼트 회사(Texas Instruments, 1941년 설립, 1954년 트랜지스터 라디오 개발, 1960년대에 컴퓨터 집적회로를 대중화시킨 트랜지스터-트랜지스터 논리 TTL 칩의 7400 계열 개발)에 입사하여 처음 3년 동안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반도체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외에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관리를 맡았습니다. 3년 뒤에는 20여 명 기술자를 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0살 때 인스트루먼트 회사는 봉급 전액을 주고 모든 비용을 줄테니 스탠포드대학 박사 학위를 공부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봉급 전액을 주고 학비를 주는데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창피하였지요. 그러나 나는 충분히 준비하였고 한 번에 합격하였습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2년 반 동안에 박사과정을 마쳤다고 합니다.
4、인생의 절정기에서 내리막길로
장충모는 33-41살까지 8년 동안을 “가장 평온한 인생”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전세계 반도체 회사의 사장까지 진급하였고 “미국 꿈”도 실현하였습니다. 택사스 인스트루먼트 회사에서 3위까지 진급하였습니다. 회사에서 첫째는 사장 겸 CEO, 둘째는 부사장 겸 COO, 셋째는 장충모이었습니다. 직원 4만 명을 거느린 회사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가 인생에서 “잘 나가는 때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지금부터 5년 전에야 대만 파운드리 회사(TSMC) 직원이 4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오래 가지 못한다고 장충모의 41-52살까지 택사스 회사는 개혁단계에 들어서서 소비자 중심의 제품 생산을 결정하였고 반도체 사업을 희생시켰습니다. 장충모는 이 시기가 “인생의 내리막길”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암담한 심정을 갖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장충모는 “사실 진정한 내리막길은 6-7년 동안인데 아주 긴 시간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당시에 깨달았다면 아마도 더 일찍 회사를 떠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찍 떠난다고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창업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일찍 떠났다면 아마도 대만 파운드리 회사를 세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장충모는 52살 1년 동안 UMTS(Universal Mobile Telecommunication System) 회사에서 책임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새로운 일자리, 새로운 학습이며 좌절의 1년이었습니다. 취임한 뒤 곧바로 “회사의 전략을 바꾸겠다.”고 결심하였으나 결과는 회사 안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결국에는 사직하였습니다. 회사 안의 쿠데타는 회사 내부 인원들이 쫓아내려고 계획한 것이며 이사회와 시장에서 도태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그의 윗사람, 회장 이외에도 4-5명이 밀실에서 협상하여 “장충모를 쫓아내자.”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사회와 고객들은 내가 아주 잘한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날 탔던 차량 번호가 1998이었습니다. 1898년은 중국 무술정변이 일어났던 해이기에 기억하였습니다.” 이때 대만에서 좋은 소식이 날아왔으나 장충모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장충모는 54살에 대만 공업기술원 원장을 맡았지만 개혁에 실패하였습니다. 당시에 그는 3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공업기술원을 대만 전체 공업의 지식 센터를 만들어서 대만 공업 회사들이 경비를 출연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공업기술원은 몇몇 회사를 연결하여 제품 규범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직원마다 2% 실적 향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공업기술원에 있는 동안에 그는 “대만 정부, 기업, 연구기관의 문화를 배웠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미안하지만 아직도 다 배우지 못하였습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장충모는 56살에 세계적인 기업 “대만 집적회로 회사”를 창업하였고 87살에 퇴직하였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자서전을 쓰고 평생교육을 배웠습니다. 그가 걸어온 과정은 2020년 출판한 『장충모 자서전』(하책)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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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忠謀曝當年挫折:股東客戶都覺得我做得好,卻仍被迫離職
台積電創辦人張忠謀受邀到中正大學演講,暢談自己的成長經歷,娓娓道來自己從少年到88歲的磨練與學習。
整理 吳佩旻 盧智芳
2020-07-17
(本文由「Cheers雜誌」授權轉載)
在每個年齡階段,張忠謀都有學習重點。他指出,小時候的家教對他非常重要,讓他學到價值觀、是非、還有勤儉,他還記得,小學的時候去郊遊,母親會給一點零用錢,但是要他算帳。有一次他帳算得不對,被母親罵得好厲害。
張忠謀回憶,當時他們算是中上家庭,小學在香港時有佣人,可是每個禮拜天上午,父親總是要他清理家裡,讓佣人放假。
大概從8、9歲起,他就開始讀報。這個習慣一直沒斷掉。張忠謀後來在美國工作36年,把中文全斷了,54歲回到台灣,再把中文重新學起來。至今,他的書桌後面還擺著一本《辭海》、一本《辭源》。
小學6年級時,發生珍珠港事變,日本佔領香港。張忠謀舉家從香港先到上海,再從上海到南京、福州、洛陽、西安、成都、最後到重慶,走了45天,他說,這是他人生很難忘的一段旅程。
在重慶進入南開初中,是張忠謀認為在學習上最成功的階段。這是他第一次住在宿舍裡,後來到了哈佛跟MIT,也都住在學校裡。
張忠謀認為,宿舍生活非常重要,怎麼培養年輕人做未來的領袖,就是透過宿舍生活。
滿18歲時,他坐飛機去美國讀書。張忠謀念了一段他在《張忠謀自傳》中記述上飛機前的心情:
「凌空而起,悵然回顧,香港已在雲霧中。香港半年,真如一夢,夢中明知是夢,夢後回顧,只覺可笑而已。然而夢後回憶,竟有十分的淒涼味。八時天色漸暗,飛行在雲層之上,四顧茫然,六年前初入南開中學的鄉愁,又驟然來到我心。我從未離家如此之遠,也從未計畫離家如此之久,如今遠涉重洋,要到一個陌生的國家去,展望前途,渺茫之極,怎不令人感傷呢?」
他說,當時不知道,未來要面對的是非常興奮的一年,也是他88歲生活中最興奮的一年。
哈佛一年:可帶走的人生盛宴
張忠謀引述他在自傳中的敘述說:「哈佛同學的優秀而多元化,是我在短短一年中消除和美國人做朋友障礙的主要原因。」
「如果當年我是去一個普通美國大學,我相信大一學生的興趣,大部分侷限於運動和社交上。哈佛學生卻有許多不同興趣,我的室友之中,有對音樂有修養,而且預備學音樂的同學,可以和我一起去聽交響樂,觀歌劇;有學建築或藝術的同學,和我一起逛波士頓的博物館;有學政治的同學,常常找我討論今後中共的趨勢;有學物理的高材生,可以指點我物理、數學上的疑難。
我的室友辛克萊帶我去看籃球和冰上曲棍球賽,還告訴我交女友的習俗;更有我的好友柏曼,和我的興趣一樣廣泛,可以和我談天說地,並且是我的文學嚮導。
我到美國的第一年就有這樣的風雲際會,實在是很幸運的。第二年到麻省理工學院,後就發現學生的特質與哈佛很不同。麻省理工學院的學生更用功,但較拘謹,很少予人才華橫溢的感覺。而且興趣較狹窄。較諸哈佛,麻省理工學院算是一個相當乏味的學校。」
他唸完後補充:「我現在已經原諒它了。」頓時引發全場大笑。
他並引述作家海明威稱巴黎生活為一段「可帶走的盛宴」,「我在哈佛這一年,對我來說,也是『可帶走的盛宴』,到現在都帶著它。」
很多人問張忠謀後來為什麼從哈佛轉去MIT(麻省理工學院)念機械工程?張忠謀指出他真實的理由:「哈佛的undergraduate是通識教育,不分系,只有concentration area。當時我認為,假如我念完undergraduate,只有一個concentration area,會找不到好的工作,當時在美國的中國人,很需要有一個好的大學學位。我要更專一,才到MIT去。」
只是,花了5年時間,張忠謀並沒有在MIT拿到機械工程博士學位。「22歲半時,我拿到碩士。為什麼還待下去呢?因為要考博士資格試。一年一次,有兩次機會,一次考不取,還可以試第二次。可是第二次考不取,就再沒有機會了。我就是第一次考不取,又多待了一年。第二次還是考不取,」他說。
他又從書中念了一段當時心情:
「自幼就開始的學生生活,至此告一段落。我以感傷的心情揮別麻省理工,這座雄踞查理士河畔、石灰石砌成的莊嚴學府。我對她雖有10分敬,但只有5分愛。在她的教室、實驗室、圖書館、宿舍裡,我投入了5年的青年時光,她給予我就業的本錢,但當我要求她所能給予的最高學位時,她把手縮回去,她不再理我了。
讓她保留它的博士學位、她的書本、她的實驗室吧!我有很長的人生路程要走。讓我昂起頭來,開始走這條路。沒有博士學位,我要開闢出一片我自己的天地。」
唸完後,張忠謀反問台下聽眾:「那麼慷慨激昂,難道沒有掌聲鼓勵?」台下頓時響起如雷掌聲。
博士挫折後,改念半導體
既然博士之路已斷,他決心改念半導體,趕快自修。加入希凡尼亞半導體公司後,他每天晚上花3個小時讀書。雖然物理和數學的基礎不錯,但還是看不懂,當時有一位愛喝酒的同事,每天晚上都在喝酒。張忠謀每晚跑去向他請教,對方總能能答覆他70%、80%的問題。假如還有其他問題,他就隔天去問其他資深同事。
「24歲到27歲,我在學習半導體上大成功,在工作方面,希凡尼亞是非常不成功的半導體公司,」張忠謀說,到最後,當時總經理如此形容它:「賣得出的東西我們做不出,我們做得出的東西我們賣不出。」張忠謀特別強調:「這個很不成功的總經理講的這兩句話,我到現在還記得。以後我就叮囑我自己,千萬不要重蹈他的覆轍。」
27歲進入德州儀器,頭3年,他描述自己「初試啼聲」。除了繼續學半導體之外,也開始雇人,做工程主管。3年以後,已經管20幾個工程師。
30歲時,張忠謀被德儀告知,可全薪、全費去史丹福念電機博士。「德儀全薪、全費送我去,考不取不是很丟臉嗎?可是我已經有充分準備,所以一下子就考取了,」他說。只花了2年半,就念完博士。
從上山到下山
33歲到41歲的8年中,張忠謀形容自己「一帆風順」。升到「全球半導體集團總經理」,也實現了他的「美國夢」。在德儀,他是排頭3名最高收入的經理人,第一名是董事長兼CEO,第二名是總裁兼COO。他下面有4萬人。這個數字,一直到約5年前,台積電才達到4萬名員工,「這段時間可說是我人生的登山時期」。
然而好景不常,張忠謀在41歲到52歲,面臨公司改革階段,決議進入消費者產品業,犧牲半導體事業,那段時期被張忠謀稱為「人生下山」的黑暗期,之後他黯然離職。
「其實真正的下山只有6、7年,但是6、7年已經是很長的時間。」張忠謀事後回想,若當初及早想開,說不定會早些離開公司,但趁早走也不見得好,因為那時還不是創業的時機,「若當時先離開,可能現在就不會成立台積電,」。
52歲的張忠謀,曾在通用儀器公司擔任總裁一年,那段時間對他而言是新工作、新的學習,同時也是充滿挫折的一年。因為到任不久,他便下定決心「要改變公司策略」,結果卻引發「宮殿政變」,最後被迫離職。
張忠謀說,之所以稱作「宮殿政變」,是因為公司內部人員把他搞下台,而不是股東、市場淘汰。當時他的上司、董事長加上四、五個下屬展開密室協商,做出決定:「這個人請他(指張忠謀)走吧!」。然而,那時候股東、客戶都覺得他做得很好。
「離開的那天,我還記得車子牌號是1898,為什麼我記得?因為1898年是戊戌政變發生的年份。」此時台下傳來一片笑聲,張忠謀的眼神卻很淡然。
之後,張忠謀54歲擔任工業技術研究院院長,卻面臨改革失敗。當時他提出三個改革,第一,要工研院做台灣整個工業的智囊,台灣工業都該給它經費;第二,工研院應該鏈結一些公司做出典範;第三,員工要有2%的績效成長,卻都失敗了,在工研院的期間,他坦言學到最多的是「台灣政府、企業、研究機構的文化」,更直白地說:「很抱歉,到現在我還沒完全學會」。
終於在56歲,張忠謀創辦了世界級的企業台積電,直到87歲才退休。近幾年他開始寫自傳,並努力持續終身學習,關於他一路走來的過程,都將收錄在2020年出版的《張忠謀自傳下冊》。
첫댓글 평생 자기와의 도전을 멈추지 않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