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전2:16~22
16.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17.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18.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19.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20.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21.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설교>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기에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문자 해석입니다. 문자 해석은 문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성경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중심이 된 종교 세계를 만들어내는 해석만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해석하는 음녀는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입니다. 창녀와 같은 여자를 음녀라는 말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우리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음녀를 음란한 여자로 해석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성적인 쾌락에 빠지는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는 것을 남편이나 아내를 두고 다른 이와 관계를 맺거나 이혼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혼할 때 했던 서약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서약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경의 문자를 인간의 지식에 맞추어 해석하는 문자 해석입니다.
계 17:5절에 보면“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계 17:1절에서 말하는 큰 음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이마에 기록된 이름이 비밀,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음녀의 이름이 비밀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음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음녀와 같다면 비밀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녀의 이름을 큰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음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큰 바벨론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는 세상을 지칭합니다. 세상을 가리켜서 음녀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것을 원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음녀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나에 대해서는 항상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일에 성경은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자로 세우는 것이 말씀에 담긴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나의 나 됨을 확인하라고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계 17:3-4절에 보면“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보여준 여자는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에 열심이 없거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것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문자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한 해석입니다. 물론 말씀에 담긴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생각하는 것은‘과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지은 것은 없는지를 살핍니다. 죄지은 것이 있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가득하다는 것은 피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의 선함과 의를 내세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에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녀에 속한 우리가 다시 또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에 대한 용서와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용서, 사랑, 긍휼이 있습니다. 이 언약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짝으로 함께 하는 신랑에게서 용서와 사랑과 긍휼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음녀에게서 구원하는 지혜의 일입니다.
잠 31:29-30절에 보면“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음녀가 아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 때문에 남편으로부터‘세상에 덕행 있는 여자가 많지만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덕행 있는 행실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운 것,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 것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저주받은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증거 하는 용서와 긍휼로 그리스도의 신부 됨을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이 인정하는 곱고 아름다운 것으로 믿음을 장식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으로 옷 입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음녀와 함께 하는 것이고 18,1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명 길을 얻지 못할 사망과 스올로 기울어진 길을 가는 것일 뿐입니다.
지혜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언약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고운 것도 거짓 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됨을 알게 됩니다. 지혜가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능력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지혜로 인해서 만들어집니다.
지혜는 우리를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곱고 아름다운 선함으로 장식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흘리신 십자가의 피의 용서 아래 있는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을 아는 새로운 인간 되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인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지혜로 새롭게 된 인간은 자기의 아름다움에 관심과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피의 용서라는 하늘의 완전한 아름다움에 취할 뿐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구원받은 신자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