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출 32:1-6)
사람은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추구합니다. 즉 평강을 원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안함을 가지는 것도 인생이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사람들이 차기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도 대부분이 경제의 안정이었습니다. 경제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경제의 안정이 곧 자신의 삶의 안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불안하면 자신의 삶도 불안해 진다고 여깁니다. 지금도 보면 경제가 불안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기퇴직을 당하고 그것이 수많은 남자들에게 불안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직장인들이 부업을 하고, 학원을 다니면서 전문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유도 결국은 자신의 삶의 안정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이와 같이 안정이 없고 불안함만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고 또 보이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하는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평강을 누려보려고 세상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자’라고 하면 꼭 ‘하나님을 보여봐라’고 따져 묻는 이유도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인간의 타락한 모습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지 못하는 그 불신앙이 우리들에게 평강을 잃어버리게 하고 대신 온갖 불안함이 몰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먼길을 떠날 때 어머니들이 호주머니에 용돈을 넉넉하게 주면서 하는 ‘수중에 돈이 있어야 힘을 잃지 않는다’는 말도 모두 보이는 것을 통해서 평강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인간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평강을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아담 때부터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여진 모든 것도 결국 눈에 보여지는 것에 매력을 느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후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보다는 눈에 보여지고 확인되어지는 믿음에 더 매력을 느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제아무리 믿음을 말해도 눈에 보여진 증거가 없으면 믿음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체험이 있고 확인되어지는 증거만 있다면 그것을 믿음의 진수로 여기면서 그러한 헛된 믿음을 쫓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람들은 간증이라는 것을 할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이나 어떤 표적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 개개인의 체험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무수한 체험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그 체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된 후부터는 그 체험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목사라는 입장에서 섣불리 체험을 말하면 그것이 신자들의 신앙의 기준이 되어버릴수가 있기 때문에 무척 조심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체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그런 체험을 나누면서 은연중에 체험적인 신앙으로 빠지게 되면 항상 체험을 기다리게 되고, 체험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은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체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꺼려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은 믿음의 대상도 증거도 아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시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보이는 것입니다. 떡, 권력, 명예 이 모두가 세상에서 삶에 안정을 줄 수 있고 사람들이 세상을 헤매면서 얻고자 애를 쓰는 것들입니다. 심지어는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그 말씀을 눈에 보이는 것을 제공하는 약속으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서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모습이 보여지면 기를 쓰고 그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신뢰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재산들도 사단이 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만족하고 보이는 재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자인데 사단은 주어진 것에 대해서 불평하게 하고, 재산을 의지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없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평강을 다시 되찾고자 모세 대신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듭니다. 그 신의 모습은 송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를 가리켜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4절)고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목이 곧은 백성’(9절)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10절).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 이름 붙였다는 것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멸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단지 자기들의 삶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그런 하나님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송아지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며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6절). 즉 희생을 단지 자기들의 평강, 자기들의 삶의 안정을 위해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진노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기의 인생을 도우셔서 안정과 평안으로 인도하실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앞으로 자기들을 인도할 하나님 아닌 송아지에게 희생을 드린 것같이 말입니다.
6절에 보면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모두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우는 것입니다. 즉 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기를 태워버리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 만족을 누리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물의 희생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먹고 마시며 뛰논다는 것은 모두 자기 즐거움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게 제사 아닌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복을 추구하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서 보여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는 또 어떠합니까?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번 수요일이 성탄절입니다. 보통 성탄절은 많은 장식을 하고 깜박이는 전구도 장식하면서 성탄절 분위기를 만들고, 그리고 성탄절 저녁에는 유년부들의 노래와 율동을 들으면서 지내곤 합니다. 그런데 은석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는 너무 썰렁하게 지내고 있다는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히려 잘됐다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과연 썰렁하게 성탄절을 보낼 때 은석교회 신자들이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겠는가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지내고 나면 흔히 하는 말이 뭡니까? ‘재미있었다’또는 ‘재미없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한 만족의 정도를 가지고 성탄절을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뛰놀며 자기 만족을 채우며 기뻐하는 날이 되버린 것입니다. 목사는 또 목사 입장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신자들에게 제공함으로 교회에 대한 만족을 느끼게 해주고 신자들이 ‘재미있었다’ ‘재미없었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에 기뻐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과연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라면 성탄절을 어떻게 지내든 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성탄절을 주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면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연약한 모습,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주님을 이해하는 마음은 없이 단지 어떤 행사나 놀이를 통해서 즐거워하고 만족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을 믿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 사랑에 불과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앙의 만족을 누리는 불신앙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이란 주님을 알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쩐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서 신자에게 기쁨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신자를 자기 교회에 재미를 느끼게 하고 붙들어 놓고자 하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이 없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라는 말에 왠지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은 아닙니까? 그 모든 것이 불신앙이며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 때문에 안심하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통해서 담대해지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고 평강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