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남아공 월드컵축구 때, 우루과이와 가나의 8강전 경기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루과이는 가나와 연장전까지 이어진 120분간의 경기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여 4강 진출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끝난 후에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두 팀이 1-1이 되어 연장전 마저 끝나가던 무렵, 가나에게 결정적인 프리킥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패널티 박스 오른쪽 외곽지점에서 찬 볼이 박스 안쪽으로 크로스 되었고, 양 팀 선수들이 뒤엉켜 혼전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나의 아피아 선수가 날린 회심의 헤딩 슈팅을 우루과이의 공격수 수아레즈가 두 손을 번쩍 들어 펀칭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골키퍼 외에는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규정 때문에 수아레즈는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을 당했습니다. 패널티킥 기회를 얻은 가나선수들은 팀의 4강행을 확정지을 수 있는 확실한 찬스를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패널티 키커로 나선 가나의 기안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하늘 위로 솟구쳐버린 것입니다. 결국 두 팀의 승부는 승부차기에서 가려졌는데, 무슬레라 골키퍼의 선방으로 우루과이는 가나를 누르고 4강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드카드를 받으며 쓸쓸히 퇴장했던 수아레즈는 졸지에 우루과이의 4강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일명 '수아레즈 신의 손'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 ‘신의 손’이라는 말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이 끝난 후 생겼습니다. 8강전에서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경기를 할 때,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드리블을 하다가 공이 공중에 떠오르자 교묘하게 점프를 하면서 한 손으로 공을 쳐서 골을 넣었습니다. 영국 선수들은 핸드볼 파울이라고 심판에게 항의를 했지만, 그 장면을 보지 못한 심판은 그 항의를 묵살해 버렸습니다. 결국 원 핸드 점프 슛 한방으로 영국은 8강전에서 탈락을 한 반면, 아르헨티나는 8강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중에는 우승까지 차지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자, 마라도나는 “반은 내 머리에, 반은 신의 손에 맞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에서 ‘신의 손’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이후 축구 경기에서 종종 ‘신의 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년 전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남아공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때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는 발 대신 손을 사용하여 갈라스에게 볼을 패스하였습니다. 이것은 핸들볼 반칙이 분명한데, 심판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는 바람에 경기는 계속 진행이 되었고, 갈라스는 찬스를 놓치지 않고 골을 넣었습니다. 이 골로 아일랜드는 월드컵 본선에 탈락한 반면, 프랑스는 진출했는데, 그 경기가 끝난 후 사람들은 앙리의 손을 ‘신의 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남아공 월드컵 기간 코트디부아르와 브라질의 경기에서 브라질의 루이스 파비아누가 골을 성공시킬 때, 두 번씩이나 핸드볼 반칙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그 장면을 보지 못하는 바람에 골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파비아누는 고의로 한 것은 아니라며, “엄청나게 신성한 신의 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한국에도 한 때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축구선수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 골키퍼 발레리 사리체프가 등번호 44번을 달고 44세까지 뛰다가 은퇴를 하였는데, 너무 골을 잘 막는다고 사람들은 그를 ‘신의 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인으로 귀화한 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신의 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어떠한 능력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신의 손’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은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일 뿐, ‘신의 손’이 될 수 없습니다. 마라도나나 앙리나 파비아누 같은 선수들이 신의 손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골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보지 못해서 그들이 골을 넣은 것뿐입니다. 사람의 손은 불완전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불완전한 사람의 손과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손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 19절과 20절에서 “내가 나오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 89편 13절에서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 손은 높으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11장 21절에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애굽의 바로 왕이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이적을 일으키신 강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수많은 역사를 일으키는 가장 귀한 손, 가장 위대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임하시면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8절을 보겠습니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요구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했습니다. 그것은 하반절에서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기도하고 기다리라.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고 자기 민족이 고난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수일 동안 울며,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지속적이라는 점입니다. 며칠 동안 기도하다가 중단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1장 1절에 의하면 그가 하나니로부터 고국의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입니다. 기슬르월은 요즘으로 말하면 11월입니다.
그리고 그가 언제 행동을 취했습니까? 다같이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여기 니산월은 요즘으로 말하면 3월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11월에 고국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기도를 시작한 후 3월이 되어서야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까? 4개월 동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가 4개월 이상 기도하며 기다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는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혹시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해버리는 사람은 아닙니까?
어느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에 불과 몇 센티미터를 움직이며 힘들게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무 틈새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벌레가 말했습니다. “이 느림보야! 너는 쓸데없이 힘을 쏟으며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 네가 저 나무에 올라가봐야 소용이 없어. 사과가 열리지 않았어.”그러나 달팽이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올라가면서 혼자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까지 기어오를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가 열매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서 곧바로 응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기대’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기대하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기다림을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자 친구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군대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버스가 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조급해 하지 말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옛말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물질을 드리고 봉사를 하는 것도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조급해서 멈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야훼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야훼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직장문제, 사업문제, 물질문제, 결혼문제, 건강문제, 진학문제, 자녀문제,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무엇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응답이 늦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끝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되,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2) 철저하게 준비하라.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500m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경기에서 한국의 이정수 선수가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2등으로 들어온 미국의 오노 선수가 마치 1등을 한 것처럼 성조기를 날리며 경기장을 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조차 ‘오노가 일등을 했나’ 라고 착각을 하였습니다.
카메라맨들도 누가 1등인지 갈팡질팡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체육회, 빙상협회, 그리고 벤쿠버 한인회 등, 아무도 1등을 한 선수에게 건네줄 태극기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 선수가 1등 하기를 기대했으면서, 아무도 태극기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위에 보면,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하며,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잘못된 신비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반대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는 거지, 무슨 기도를 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하면서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이성주의적인 신앙도 잘못된 신앙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소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고 준비하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도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준비하며 기다렸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마치고 기도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 느헤미야는 술잔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평소 때와 달리 느헤미야의 얼굴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물었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2절) 그 때 느헤미야는 왕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3절) 구체적으로 자기가 근심하고 있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4절)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이것저것 정신없이 마구 대답했습니까? 아닙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5절)
느헤미야는 정확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왕이 다시 묻습니다.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왕이시여,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계산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면 ‘글세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며 우물거렸습니까? 아닙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여기 ’내가 기한을 정하고‘라는 말은, 느헤미야가 얼마나 소요될 것인가를 묻는 왕에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예상소요 시간을 곧바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재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왕에게 요청까지 했습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7~8절)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고국인 유다를 들어가는데,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비자를 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자재들을 대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을까, 자재는 무엇이 얼마나 필요할까, 공사를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필요할까, 또 그 사람들을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기간이 걸릴까, 등을 생각하며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철저하게 준비하는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 사택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보통은 할 수만 있으면 사택을 교회 근처로 오게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결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자기 목사가 사택에서 교회로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자동차 안에서 설교를 준비한 후 강단에 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택이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자기 교회 목사가 설교 준비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택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자고 결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설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을 얻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한다고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서 성경도 읽어야 하고, 관련 서적도 보고 자료도 수집해야 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날짜가 잡혔으면 결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례를 누구로 할지, 결혼식은 어디에서 할지, 결혼 후에 피로연은 어디에서 할지를 정해야 합니다. 또한 청첩장도 만들고, 신혼살림도 장만하고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도 예약을 해야 합니다. 준비하지 않고 결혼할 수 없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도는 하지 않은채 공부만 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또한 본인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미래는 준비된 자의 몫”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준비된 자에게 미래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꿈이 있습니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까? 달려가야 할 비전이 있습니까?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느헤미야처럼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3) 기회를 놓치지 마라.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려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여기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는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왕비가 공식 석상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왕에게 가까이 갔을 때 왕비가 왕하고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자리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잠잠히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가 왕과 왕비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함께 앉아 있을 때, 왕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고국의 참담한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주어 느헤미야는 유다를 다녀오도록 허락을 받고 성벽 재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들까지 제공 받았습니다.
그런데 9절 상반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요구하지 않은 군대 장관과 마병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잘 살렸다는 것입니다. 왕이 기분이 좋을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가서 결국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느헤미야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이 살다가 보면,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그때 그렇게 할 걸, 그때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하고 후회를 합니다.
기회라는 말은 영어로 'opportunity‘ 인데, 원래 이 단어는 항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옛날에는 배들이 밀물 때를 기다려 항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옵 포르투(ob portu)'입니다. 즉 부두쪽으로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항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박이라는 뜻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조수가 밀려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배를 대었는데, 여기에서 영어 'opportunity‘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요, 영국 속담에 보면 “기회는 앞 머리카락만 있고, 뒷머리는 벗겨져 있다. 기회를 만나려면 앞 머리카락을 잡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회는 앞에서만 잡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 기회가 지나가버리면 다시 잡을 수 없습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흔히 부동산 투자에 성공하기 위한 비결은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성공은 타이밍에 있습니다.
첫째도 타이밍, 둘째도 타이밍, 셋째도 타이밍이라고 강조합니다. 무엇이든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두들겨야하듯, 축구나 야구나 농구 등의 스포츠 경기에서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승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글에서 처음 한국에 경부선 철도가 가설될 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난 후 일본은 조선에서 조선에서 수탈한 쌀과 물자이동과 병력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남북으로 종단하는 경부선 철도공사를 계획했습니다. 오랜 공사 끝에 1905년에 개통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공주와 부여를 지나도록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주민들이 '양반마을 앞으로 왜놈의 귀신이 지나가면 안 된다'고 극구 반대를 하는 바람에, 결국 조치원과 대전을 지나는 것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그때 철도가 놓이고 도로가 닦인 지역은 모두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반대했던 지역은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개발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공주와 부여에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합니다.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사업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용기를 내어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봉사나 전도의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봉사하고 전도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철도가 내 앞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의 기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도시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는데, 연주자보다 세계최고의 명품 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연주당일에도 신문은 연주자보다 이 바이올린 사진을 크게 실을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공연이 열리던 날 밤, 바이올리니스트는 신들린 듯이 연주를 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곡을 연주한 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올린을 의자에 사정없이 내리쳐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이 기이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이올리니스트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저의 악기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신문을 읽은 다음, 저는 전당포에 가서 10달러를 주고 이 중고 바이올린을 샀답니다. 그리고 이 낡아 빠진 악기에다가 새 줄을 갈아 끼웠습니다.
여러분, 오늘밤 제가 연주 했던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악기를 부서뜨림으로서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악기보다 제 손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연주자요, 우리는 악기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악기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별 볼일 없는 양치기라 할지라도 모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한 아이의 도시락밖에 되지 않는 5병2어도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도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며 기다리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손길, 능력의 손길, 축복의 손길을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