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과 부활(요한복음 21:1-14)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행하실 때에 예수님이 당한 큰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그 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제자들의 배반을 감수하는 고통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지만, 그들은 결정적일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이 고통이 예수님이 당한 고통 중 가장 큰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할 때에 예수를 배반한 제자가 가룟 유다와 베드로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제자들 전부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51절에 보면 어떤 제자가 예수를 따르다가 옷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없었으면 옷도 입지 않고 도망갔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배반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입니다. 배신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배반과 배신이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시이저가 죽으면서 가장 믿었던 부르터스에게 배반당한 것을 알고 “부르터스여 너마저!”라고 신음하며 이 세상을 하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배반당하여 “아무개야, 너마저”라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 정원사요 정원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말하길 인간이 정원에 있을 때 가장 하나님께 가깝다고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이나 겟세마네 동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계셨던 정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많이 배반했던 곳이 바로 그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아담에게 다 주셨지만 그런데 그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였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그 겟세마네 동산은 바로 예수의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던 그 곳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된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한 번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인도로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 생활이 더 좋았다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려고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산에서 작업을 하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할 때에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스르며 배반하는 흐름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배반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을 잘 풀어 설명하면 인간은 믿을만한 대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인간에게 ‘믿는다.’라는 동사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성경에 사람 앞에 주로 쓴 동사는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을 분석하면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는 주로 ‘믿는다.’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믿음의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사람 앞에 ‘믿는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았을까요? 사람은 늘 어떤 것을 배반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를 한 번 보십시다. 정치를 보면 이쪽에 붙었다가 또 저쪽에 붙었다가 하면서 이당 저당으로 옮겨 다니면서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또 경제를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종업원이 주인을 배신하고 또 주인이 종업원을 배신하고 사업의 동반자가 또 다른 동반자를 배신하고 심지어 친척, 형제 자매도 서로 배신하기까지 합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형제 자매나 심지어 부모와 자식 관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관계에서 보면, 남자들은 얼마나 여자들을 배신합니까? 결혼 전에는 얼마나 감미로운 약속으로 순진한 처녀들을 설레이게 하고 소망에 부풀게 하였다가 결혼하고 나면 정반대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또 여자들은 얼마나 남자들을 배신합니까? 처녀 시절은 참으로 얌전하고 고상해서 남자들이 천사인 줄 알고 구애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정 반대의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친구들끼리는 얼마나 많이 배반합니까? 또 남편과 아내가 되어서도 부부가 부부끼리 얼마나 많이 배반합니까? 그래서 세상에는 자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배반당해서 죽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이민사회를 보면 사람에게 배반당해서 사람이 두렵다고 사람들 속에 섞이질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캐나다에서도 같은 한국 사람에게 배신당하여 한국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이 싫다며 시골에 가서 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간의 배반의 속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의 부활에 의해서 극복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의 배반을 극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가 그들의 믿음을 다시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고난과 배반 이후에는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된 속성인 배반을 이기는 힘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절대로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한 것에 대해 책임추궁을 하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진정한 부활은 바로 용서입니다. 배반의 극복은 바로 이 용서하는 신앙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은 이 용서받음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았다는 생각이 제자들에게 없었으면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배반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사람에게 배반당한 상처가 치료되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그 찢기고 찢긴 고통스런 마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주님을 다시 믿게 됨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믿게 함으로써 고통스런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닷가에 다시 나타나셔서 그들을 다시 신앙적으로 격려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1절에서부터 14절까지의 전체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를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매우 서먹서먹해 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이렇게 서먹서먹해 할까요? 그들이 예수님이 가장 어려울 때에 도움이 못되고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 이야기는 절대 하게 않으시고 그들을 신앙적으로 다시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반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제자는 아마도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세번씩이나 부인했던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켜주심과 동시에 특별히 베드로에게 집중하여 베드로의 믿음을 굳건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너는 앞으로 다시는 나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할 것이냐고 세 번 이나 물어보시면서 베드로의 무너졌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성탄절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탄생되어야 하듯이 부활의 계절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부활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리에게 피해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동시에 오직 하나님만을 믿으며 우리를 배반했던 사람들을 하겠다는 다짐이며 결심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수직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수평적으로는 인간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우리들 마음속에 충만해야 우리들은 진정한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주간에 과거의 모든 아픈 마음은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부활의 마음이 우리의 삶속에 깃들어져서 우리의 삶이 부활의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