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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들어서면 자금성(紫禁城)
세계최대의 고궁박물관으로 들어가는 南門이 天安門이다. 명(明), 청(淸)시대의 천상궁궐로서 지금은 세계 최대 고궁박물관으로 되어있다. 고려말기와 조선시대에 수많은 우리 사신들이 산 넘고 바다건너 수 천리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곳이 북경의 자금성 대문인 천안문이었다. 곡물과 국서를 가지고 천안문에서자금성까지 들어가 황제를 만난다는 것은 천신만고 보다 더 난제였으며 관문 하나 통과 할 때마다 며칠씩 기다렸다가 눈치를 보며 뇌물을 바치고 통과하여 자금성 넓은 뜰에 부복 천제를 배알하였던 역사의 현장 자금성이 지금은 관람료(약500원)만 내면 쉽게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북경의 중심부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이 성은 천안문을 들어서면 사방으로 4개의 문이 있는데 남쪽이 오문(午門), 동쪽은 동화문(東華門), 서쪽은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으로서 신무문을 나오면 경산(景山)공원이 있다. 성(城)은 남북이 1000m, 동서760m의 사각 터에 주변으로 폭 50m정도의 도랑을 파놓아 항상 물이 고여 있다. 성안은 황제가 정무를 보았던 높이 약 28m의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건물이 지금은 유물전시로 가득 차있고 주변의 70여 채 크고 작은 궁전은 9,999간이라고 한다. 대만이 본토에서 후퇴할 때 3천상자의 보물을 가지고 갔다고 하니 앞으로 중국이 통일 된다면 보물들이 얼마나 많을지 놀랍기만 하다. (유물은 총90만점이라함)
자금성의 서편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호수가 있다. 남해(南海),중해(中海),북해(北海)라고 되어있는 이 호수는 개방을 하지 않아 직접 볼 수는 없었고 그중 북해는 인공으로 조성하여 그 흙을 파서 경산공원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경산공원은 풍수지리학 상 성(城)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나 농민 출신인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황제가 목을 메 죽은 일도 있다고 하니 풍수지리가 통치능력을 앞서지는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금성의 규모와 석수들의 섬세한 수공 거대하고 웅장함에 우리는 잠시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천안문 밖으로 나오면 광장(약40만㎡)이 있는데 세계 최대의 광장으로서 여의도(38만㎡) 광장보다 약간 더 크다고 한다. 이 광장 주변에 큰 관공서가 많은데 천안문 서편 남해 주변이 현 정부 요인들이 근무하고 있는 것 같고 동쪽에 북경호텔(北京飯店)은 외국 귀빈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 광장 서쪽으로 인민대회당, 동으로 혁명박물관, 앞에는 혁명기념 탑이 있으며, 천안문 앞에는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천안문은 높이가 13m이며 성대위에 세워진 3층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등황색(橙黃色) 유리 기와로 이었으며 60개의 붉은 기둥이 받치고 있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렀으나 청대에 개축되면서 천안문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1966년 문화혁명시작,1976년과 1989년의 천안문 사태에도 정치는 건재한 것 같다. 북경과 전 중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광장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모택동 기념 당에는 모택동 사후 1년 만에 완성된 그의 시신이 붉은 깃발에 덮인채 수정관 속에 들어 있으며 일정한 기간 정해진 시간에 직접 볼 수도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신은 방부제 처리를 했기 때문에 생전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여 직접관람은 포기하였다.
자금성의 여름별궁 이화원(頤和園)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아름다운 호수 서태후가 살았던 별궁 이화원(頤和園)이 있다. 총면적 267ha인 호수는 곤명호(昆明湖)로도 불리며 서쪽으로 뻗어있는 만수산은 주변이 온통 대리석 돌 조각품으로 장식되어있다. 전체의 3/4이 호수면적이고 1/4이 산으로 되어있는데 이곳을 자금성의 여름궁전이라고 한다.
이화원은 金朝(1153년)황제가 시초로 건립한 것을 청조(淸朝) 건륭황제가 1750년에 확대건축 하였으며 천간의 낭하라 불리는 728m의 장랑(長廊)이 있고 서태후가 살았던 별궁으로 유명하다. 1894년 서태후 환갑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해군 증강용으로 영국에서 차용한 돈까지 이곳을 장식하는데 써버려 후일 청일전쟁에 패배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호수위에 떠 있는 듯한 돌배(石舟) 돌다리(石橋)와 해당화 난초 수양버들 색채 선명한 건축물과 知春亭, 17孔橋, 銅牛 등 볼만한 곳이 많고 호수위에 유람선이 수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화원 앞에 이르러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기다란 돌 벽에 살아 꿈틀거릴 듯한 용의 浮彫가 있는 곳을 지나 仁壽殿인데 이곳이 이화원의 입구이다.
길을 잃고 당황하다 : 입장할 때 인수전 앞에서 시간약속을 하고 끼리끼리 자유롭게 들어간 일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져 나중에 나는 혼자가 되고 말았다. 호수위에서 유람선을 타보자는 이도 있었으나 나는 기다리기가 지루하여 포기하고 만수산을 종횡으로 휘저어 등산 기분을 내기로 했다. 약도도 없고 방향감각도 모른채 산속으로 한참 들어가던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중국말 한마디도 통할 수 없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순간 주머니를 뒤져 나침반을 들고 입구에서 동에서 서쪽 방향이라 했으니 동쪽으로만 계속 가면 되겠다 싶어 달리다시피 빠르게 동쪽으로만 갔다. 산을 온통 한 바퀴 도는 느낌이었으나 예상했던 지점에 도착해보아도 들어올 때의 인수전이란 문은 없었다. 이제 동쪽으로는 담벼락이 막혀 더 이상 갈 수도 없었다. 담 너머로 길인지 차 소리가 들렸다. 별 수 없이 담을 따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각하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인수전 입구인 듯한 느낌이 왔다. 인수전이 보였다. 긴 한 숨을 내쉬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약속시간 5분전이었다.
명13능(陵) : 거대한 지하궁전 명 13능은 명나라 영락제에서 숭정제까지 황제 13명의 무덤을 말한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천수산(千壽山)을 향하여 한 시간가량 가면 명 13능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 내려 걸어가다 보면 길 양편에 18쌍의 석인(石人)과 석수(石獸) 등이 서 있다. 북에서부터 차례로 공신, 문신, 무관의 석상이 각각 4개씩 12개가 서있고 이어서 말, 기린, 코끼리, 낙타, 사자 등의 석상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데 높이가 3m정도이고 땅속으로 묻힌 부분도 그만큼 된다고 한다.
가장 단단한 대리석 통 돌로 만들어진 석상들의 뛰어난 조각 솜씨는 발달된 현대인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하고 부드럽게 까지 느껴졌다. 지하궁전ㅇ라는 천수산은 예전부터 경락은 물론 도벌도 금했기 때문에 숲이 우거지고 정적이 흐를 만큼 경건하고 주위가 조용하였다. 동쪽에는 용산 서쪽에는 호산으로 둘러쌓인 계곡의 도로 동쪽에 있는 비루(琵樓)는 대리석으로 되어있으며 6개의 돌기둥이 있는 거대한 작품이었다.비루에서 1km정도 위에 대홍문(大紅門)이 있는데 이는 능묘의 입구로 3개의 통로가 있고 중앙은 황제의 유체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광장의 정문에 능의 문이 있고 이 뒤로 능은전(稜恩殿)이 있었으나 청일전쟁과 1914년의 화재로 없어졌다고 하여 주춧돌만 남아있다.
명13능은 13개의 능 중에서 정능 1개만을 개방하여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지하궁전이라고 말하는 정능은 지하27m쯤 내려가서 네모난 돌덩이로 쌓아 만든 석굴 같은 현실이 나온다. 가장 작은 돌덩이 한 개의 무게만도 3톤이 넘는다는 이 지하궁전은 아취 형으로 된 천정의높이가 10m 폭이 10m에 길이가 100m쯤 되어 보이는 지하방이며 한 여름인데도 냉장고 속처럼 시원하였다. 이 안에는 황제가 생전에 쓰시던 유물과 용상을 비롯한 집기들이 돌로 깎아 제작된 것들이 많았고 커다란 화로 같은 도자기 그릇이 있었다. 그 항아리 같은 도자기에는 참기름을 가득 담아 불을 붙여 놓고 화제의 능이 봉합되어 결국 내부의 산소를 모두 태워버리게 되고 그래서 옷가지며 장식품들은 500년을 지나고도 그대로 있었다고 하나 옷은 개방하면서 공기층에 내놓아 흐물흐물 유실되어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능을 어떻게 건설 하였나 궁금하여 한자로만 되어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하루 동원인력 3만 명에 총인원 6천5백만 명이 소요되었고 6년 반이 걸려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 발굴된 장능(長陵)이 최대 규모로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영락제의 능으로 되어있는 장능의 규모가 최대이며 보존상태도 좋다고 했다. 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나머지의 능이 모두 더 높은 산꼭대기에 있다는 것이다. 능이 있는 표시로 그 위에 작은 정자가 하나씩 지어져 있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만리장성이라면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시황이 쌓았다는 세계 최대의 긴 성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나의 상식이었다. 피라미드, 피사의 사탑, 로마의 콜로세움, 영국의 스톤헨지와 함께 세계 5대 불가사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70km쯤 가면 팔달령(八達嶺)이란 고개가 있고 이곳을 지나는 만리장성의 일부를 개방하여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호텔을 비롯한 기념품 상들이 밀집되어있다. 지도상에 나타난 만리장성은 2700km쯤 되지만 실제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5000km가 넘는다고 한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에는 연(燕),조(趙),위(魏),초(楚) 등 여러 나라가 제를 모방하여 국경에 장성을 구축했고 BC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214년에 여러 성을 증축 개축하여 오늘날에 이어지는 거대한 만리장성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팔달령은 : 만리장성은 전 구간을 어디나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북경에서 가장 근접지역 팔달령(八達嶺)의 일부만을 개방하여 보여주기에 관광객이 너무 몰려들고 복잡하다. 이곳은 중국의 대명사처럼 유명한 곳이나 구름처럼 밀려드는 사람 때문에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려울정도로 복잡하나 실상은 볼 것도 없고 단순하다.
세계에서 가장거대하고 긴 역사를 가진 중국은 문화유산도 대단한 것 같다. 다만 현대의 발달된 산업 교통 정보화 시대에 약간 뒤떨어진 탓으로 있는 자원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 이었다. 1992년은 중국의 관광 진흥의해라는 구호를 내 걸고 신경을 쓰고 있는 듯 했으나 선진국의 관광객을 맞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보았다. 교통 불편과 화장실문화가 너무 불편했고 인간은 먹고 싸는 게 기본인데 음식문제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서안, 이강, 계림, 낙양 등 중국의 관광지는 평생을 돌아보아도 다 못 볼 것 같은 무궁무진한 관광 자원 부국이다. 조상들은 독재 군주 밑에서 신음하고 예술작품 창조에 평생을 몸 바쳤으나 그 문화유산으로 후손들은 편히 앉아서 수입을 올리게 된 좋은 점도 있다.
우리가 중국을 갈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2~3년밖에 안 된다. 그것도 일반관광객은 안되고 기업인들의 사업목적, 학술탐사와 친척 초대 등에 국한 되어있고 비자 받기도 상당히 까다롭다. 목적이 뚜렷해야 하고 외무부 통일원 안기부 등의 심사를 거쳐야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러나 금년에는 국교가 정상화 되었으므로 조만간 일반관광도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 되지만 아직은 정부에서 규제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과 우리의 물가가 보통 5~8배 차이가 나니 국내 관광보다도 중국 관광을 훨씬 싸게 할 수 있다는 이점으로 한꺼번에 왕창 밀려들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되기도 하나 그러나 단계적으로 서서히 가능해질 것으로 본다.
북한동포의 배고픈 이야기
연길에서 동쪽방향으로 약 30km쯤 가면 도문(道門)이 있다. 이곳은 북한 접경과 아주 가까워 건너 마을처럼 보이는 곳이 북한 땅이다. 다리 한만 건너면 북한의 온성인데 온성군의소재지로서 6층짜리 아파트도 있을 정도다. 연길 사람들은 북한 접경지에 친척들이 이산되어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겨울에 강이 얼면 모르게 건너다니면 밀 무역을 한다고 했다. 이쪽에서 무슨 일을 당하며 저쪽으로 건너 피하고 그런 지역으로 지도상으로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지금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거주를 위한 피신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중국교포인 조선족이 중국공무원의 신분으로 건너 갈 때와 민간인 신분으로 갈 때는 모든 여건에 차이가 난다하며, 공무원으로서 방문하면 식량이 별도로 더 나오는데 개인 방문일 때는 자기 먹을 것을 모두 스스로 가져가야 한다고 한다. 북한 동포들은 중국에 오기가 거의 어렵고 주로 중국 교포가 찾아가 주기를 무척 바란다고 했다. 갈 때는 필히 생필품을 많이 휴대해야 하며 특히 옷 종류를 좋아한다고 한다. 공무로 몇 번 가본 한 교포가3년 전 사사로 친지를 방문해본 이야기였다.
통행증을 휴대하고 물건 보따리를 가지고 가면 통관을 위해 무언가를 한 가지(물건) 줘야 한다고 했다. 손거울 하나만 줘도 좋아한다고 했다. 친척집이 아파트 6층이었는데 마침 저녁때라 계단을 올라가는데 정전이 된건지 어두컴컴하여 더듬거려 겨우 올라갔다한다. 그런데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여서 이유를 알아본즉 전기를 아끼라는 지시 때문에 볼일들은 해전에 다 하고 잠이 안 오면 먹 방으로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손전등 못 가져온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북한 방문때 가지고간 물품을 북한 주민들에게 아주 비싼 값으로 판다고 한다. 북한인들은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어 중국교포가 왔다하면 서로들 모여 든다고 한다. 중국서 온 친척들은 외국인 신분이니까 물건을 팔수(단속을 하는 경우는 있으나 한두 개 물건을 주면 되고) 있으나 북한인들은 일체 상행위가 금지 되어있다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산에 먹을 만한 풀도 뜯어다 먹는다고 했다. 중국공산당의 문혁 때 있었다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짐작이 갈 것 같다.
방에는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이나 빈대가 있더라고 했고, 빈대에 시달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또한 친척인 큰집을 5년 전에 찾아간 이야기는 어렸을 때 헤어진 사촌형제가 보고 싶어 친척방문을 신청하였는데 가는 길에 생활용품을 넉넉히 가지고 가 수입도 좀 올려보겠다는 생각으로 갔다고 한다. 가자마자 이웃 주민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몰려들었는데 담배를 한 갑씩 주었더니 무척 좋아 하여 사람들이 계속 밀려드니까 큰어머니께서 귀한 담배를 그렇게 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빼서 낱개로 주었다고 한다. 그 담배는 중국에서 값이 제일 싼 것인데 얼마나 들 좋아한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가지고 간 식량과 조미료는 큰 아버지인 어른과 손님인 자기 앞에만 놓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도 않았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 굶주린 시골 농민들의 생활상이 떠올라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북한사람들은 나일론 계통의 옷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그 옷감을 그들은 ‘빤짝지’ 라고 부르고 만들어진 옷을 ‘테나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북한 동포가 중국에 사는 친척에게 ‘오실 때는 빤짝지를 사오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니까 중국에 사는 친척은 종이 집에 가서 알록달록 빤짝이는 종이를 많이 사 가지고 갔는데 종이가 아니라 옷감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낭패를 당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