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7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성모 신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으로 점점 보편화되어,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냈는데, 1996년 경신성사성 교령에 따라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자식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해야 합니다.
꽃을 키우며 꽃을 피우는 일은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입니다. 작은 화분에서 일생을 살면서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우고, 뿌리를 내리는 그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인생을 보는 것 같아서 그 재미에 완전히 빠져버리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어려서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일하고, 꽃을 키우는 일에는 많은 재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기술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근무할 때는 사람들이 키우다가 거의 죽게 생긴 화분을 되살려 주는 일을 도맡기도 했었는데 그 때마다 신기한 생명의 신비를 느끼곤 하였습니다.
동양란을 키우면 새로운 촉이 나올 때 가장 신기한 기분이 듭니다. 꼭 아기를 출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 때 어미 촉은 아주 조금씩 시들어갑니다. 새끼 촉에게 영양분을 주로 공급해주느라고 자신을 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촉 근이 시들시들하고 잎 끝은 마르고 타들어갑니다. 마치 엄마가 애기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몸이 축가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돌보지 않습니다. 새끼 촉이 아주 싱싱하게 잎을 피우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새끼 촉은 이제부터 싱싱한 뿌리로 영양분을 빨아들여 어미에게 공급해 줍니다. 그래서 어미촉도 단단해지고 잎도 영양이 고르게 펴지고 색깔도 고르게 파랗게 회복합니다.
이 과정을 관찰하다보면 어버이와 자식의 그 깊은 사랑의 관계가 느껴집니다. 인생에서도 그 깊은 부모와 자식의 사랑처럼 식물에서도 그 관계가 여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난초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어버이가 어떻게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어떻게 효도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를 난초는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효도가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어서 가슴이 아픕니다. 어린 자식들을 학대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부모가 많이 있어서 경찰이 수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정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또한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이런 흉악한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효행을 실천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본을 잘못 보였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유랑하다가 하루는 몹시 울며 슬퍼하는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는 자신이 우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첫째는 젊었을 때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이요, 둘째는 섬기고 있던 군주가 사치를 좋아하고 충언을 듣지 않아 그에게서 도망쳐온 것이요, 셋째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제를 하던 친구와의 사귐을 끊은 것입니다.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樹欲靜而風不止),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안 계신 것입니다(子欲養而親不待). 그럴 생각으로 찾아가도 뵈올 수 없는 것이 부모인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마른 나무에 기대어 죽고 말았답니다. 그러므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은 봉양하고자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네.
往而不可追者年也(왕이불가추자년야) 흘러가면 쫓을 수 없는 것은 세월이요,
去而不見者親也(거이불견자친야) 나가시면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어버이이시라.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기를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키 어렵다.’라는 독일의 격언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의무처럼 생각해야 하는 일입니다. 요즘은 부모가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대하지만 그러면 효행의 다리는 끊어지고 맙니다. 부모는 정성으로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지극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효행의 기본적인 틀이 완성됩니다. 조금만 정성을 기울여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을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사회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준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지만 노년의 생활을 준비한 부모도 있고, 준비하지 못한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식들을 부양하느라고 노년을 준비하지 못한 부모를 위해서 자식들은 부모를 봉양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모든 자식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