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대 서부 철도>, 1844, 터너
어릴 적 미술시간에는 수채화를 칠할 때가 가장 어려웠다. 물을 너무 많이 섞으면 맑은 색이 나오는 대신 종이가 쭈글쭈글해지고, 물을 덜 섞으면 투명한 느낌의 색은 나오지 않아 기껏 열심히 그린 밑그림을 망치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지금 봐도 티 없이 깨끗한 수채화는 지금 봐도 그 어떤 회화보다 경외심이 든다. 그중 영국의 국민화가로 명성이 높은 터너의 그림은, 그 유명세를 모르더라도 따뜻한 색감과 맑은 느낌으로 감상자의 마음을 울리는 매력을 가졌다.

▲ <맘스베리 수도원의 폐허>, 1792, 터너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윌리엄 터너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 뽑히기도 했으며 개인 갤러리를 전부 자기 작품으로 채울 만큼 왕성한 창작활동을 선보였다. 그는 여름에 작품 소재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겨울에는 돌아와 여행지에서 그린 스케치와 머릿속 구상을 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이어나가곤 했다. 17세 때 그린 <맘스베리 수도원의 폐허>는 초기 걸작으로 손꼽히며, 원래 색보다 회색, 초록색을 더 섞어 중세의 수도원이라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강조했다. 초기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여행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대 유적으로 가득 찬 풍경을 마주함과 동시에, 17세기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의 빛과 만났다. 이후 그의 그림에서 빛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많아지는 직접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때 여행일 것이다.
프랑스의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좀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명소를 소개하는 책자나 일러스트북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터너의 수채화가 제일 인기가 많았으며, 이때의 대표작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의 픽처레스크 풍경>이라는 판화본 시리즈로 출간되기도 했다.
1825년 영국에 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되자, 사람들은 이 새로운 교통수단이 지닌 힘과 속도에 매료되었다. 일흔에 가까운 노화가 윌리엄 터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 가장 최신형 모델이었던 기차를 타고 런던 템스 강의 다리 위를 달렸다. 그는 속도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날 달리는 열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10여 분 이상이나 비 오는 열차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며 관찰하였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비, 증기, 그리고 속도-대 서부 철도(Rain, Steam, and Speed-The Great Western Railway)>이다.
이 작품은 빛과 대기,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최첨단 산업기술이 어우러진 도시의 역동적인 풍경을 포착하고 있다. 푸른색과 금색, 붉은색, 흰색 물감을 사용하여 어슴푸레한 대기와 안개, 속도감을 표현하였다. 윤곽이나 형태를 거의 완전히 용해시켜 온통 한 덩어리로 뭉쳐진 황토색 대지와 레몬빛 대기를 뚫고 검은 증기기관차가 육중한 속도로 달려오는 이 작품. 물과 불, 대기가 만나 소용돌이치는 강한 힘이 느껴진다.

▲ <국회의사당의 화재>, 1834, 터너
터너는 거대한 자연과 그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투쟁 장면(‘국회의사당의 화재’)을 주로 담았다. 불이나 폭풍우 같은 드라마틱한 주제를 좋아했던 그는 점차 빛과 대기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주제를 직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색채를 통해 감성에 호소하는 추상으로 나아갔다. 이 작품은 기존의 터너가 그리던 풍경화와 앞으로 그리게 될 추상화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비평가들은 그림 속 속도와 에너지에 대한 감각, 원근법 속에서의 시야의 확장, 그리고 빛나는 색채의 향연에 찬사를 보냈다.
작품을 모두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터너는 국가에 자기 작품을 모두 기증했으며, 지금도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빛과 대기는 프랑스의 자연주의자들과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