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14 .
최근 대표팀 수비형 미드필더인 김남일-이호가 멋진 콤비를 이루면서 안정된 플레이를 보이자 예전 보다 ‘볼란치(Volante)’ 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고 또한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 대한 중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크게 강조되고 있다.
서형욱 님 컬럼(더블 볼란치, 그리고 박지성의 활용)에도 실려 있듯이 '볼란치'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게된 것은 94년 미국 월드컵 때이다. 그 대회에서 브라질의 마우로 실바-둥가 '더블 볼란치'의 활약이 없었다면 월드컵 우승은 불가능 했을 지도 모른다. 마우로 실바-둥가는 호마리오-베베토 투톱 못지않게 인상 깊은 플레이를 펼쳤다.
사실 세계 축구계에서 '볼란치'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40여년 전부터이고, 그 어원(語源)과 유래(由來)또한 참 재미나다.(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엄밀하게 말해서 볼란치는 브라질에서 시작됐고, 또 브라질 주도로 발전해온 포지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래서인지 브라질은 유독 다른 나라에 비해서 세계 클라스 볼란치를 많이 배출했다.
지토(58, 62년 월드컵 대표)-디노 사니(58년 월드컵 대표)-크로도알도(70년 월드컵 대표)-바티스타(82년 월드컵 대표)-토니뇨 세레죠(78,82년 월드컵 대표)등이 브라질 축구사에 길이 남을 볼란치들인데 이 선수들이 브라질 역대 볼란치 순위에 있어서는 오히려 마우로 실바-둥가 보다 더 앞 쪽에 랭크되어 있다. 반면에 유럽은 남미 특히 브라질에 비해서 볼란치 역사도 짧고, 그 숫자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80년대 쟌 티가나(프랑스)-쟌카를로 안토뇨니(이태리). 90년대 바케로(스페인)-디디에 데샹(프랑스)-파울로 소사(포르투갈)등이 과거(고작해야 10~20여년 전)유럽을 대표했던 볼란치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No.1은 네덜란드의 프랑크 라이카르트(현 바르셀로나 감독)가 아닌가 생각된다. 라이카르트라면 역대 브라질 어느 볼란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볼란치의 '필요 조건'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수비력. 둘째: 경기 조율 능력. 셋째: 패스 능력. 넷째: 리더쉽. 위의 네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선수가 라이카르트였다.
암스텔담 아약스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배출한 '최고의 걸작품'인 프랑크 라이카르트는 세계적으로 경애(敬愛)되는 만능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수리남 출신의 라이카르트는 18세에 프로에 데뷔했고, 요한 크루이프 감독 지도 하에 스토퍼로 성장하면서 프로 데뷔 1년여 만에 네덜란드 대표팀에 발탁이 됐다. 당시 '너무 어리지 않느냐?‘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부 있었으나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987년 경, 크루이프 감독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단기간 임대 되었다가 이 후 스페인 레알 사라고사로 팀을 옮기게 됐는데 이 때부터 라이카르트가 유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시즌 종료 후, 독일에서 열린 EURO88에서 토탈사커의 창시자인 리누스 미셸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가 우승을 차지했을 때 스포트라이트는 굴리트- 반 바스텐에게 집중됐지만 라이카르트의 공적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과의 결승전에서 라이카르트는 브로크힌의 파트너인 프로타소프를 완벽하게 봉쇄하며 2대0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EURO88에서의 맹활약을 계기로 라이카르트는 AC밀란으로 이적(88/89 시즌)하면서 굴리트, 반 바스텐과 함께 ‘네덜란드 트리오‘를 형성했고, 아울러 바레시-마르디니-안첼로티-도나도니-맛사로 등과 호흡을 맞춰 90년대 초까지 AC밀란의 황금 시대의 주역으로서 세계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 당시 아리고 사키 감독이 추구한 AC밀란의 ‘프레싱 사커'는 세계 축구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럼 여기서 그 무렵 사키 감독이 추구한 프레싱 사커의 전술과 포메이션에 대해서 간단히 짚고 넘어 가도록 하자. 사키 감독이 사용한 포메이션은 4-4-2였다. 그런데 사키의 4-4-2는 미드필드진을 다이아몬드형으로 형성하는 전형적인 남미식 포메이션이 아니라 최근 유럽에서 주류가 되어 있는, 미드필드진 4명을 횡(橫)으로 세우는 포메이션이었다. 즉, 중앙에 두 명의 볼란치를 세우는 포메이션이었는데 이 시스템은 필드의 중앙에서 볼을 돌리면서 공격 찬스를 엿보는 브라질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사키 감독이 추구한 것은 상대가 하프 라인을 넘어오기 전에 볼을 빼앗아, 즉시 속공으로 나가는 것이었는데(농구에서의 올코트 프레싱과 같다고 보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스피드와 발군의 볼 컨트롤 능력, 그리고 정밀한 패스 능력을 갖춘 볼란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키는 이 볼란치 역할을 카를로 안첼로티(현 AC밀란 감독)와 라이카르트에게 맡겼는데 안첼로티는 수비 쪽에 치우치게 하고, 라이카르트에게는 공수 연결 및 경기 조율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스토퍼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한 라이카르트는 풍부한 운동량과 고난도의 기술, 상대를 압도하는 헤딩력, 게다가 넓은 시야까지 갖춘 장점을 살려 사키 감독을 대만족 시켰다.
그 이전까지 세계 축구계에 유능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여럿 존재했지만 라이카르트 만큼 탁월한 신체적(키 189cm) 조건에 그토록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없었다. 라이카르트는 80년대를 대표했던 볼란치인 브라질의 토니뇨 세레죠(스타 클래식 6.)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되고 세련된 플레이를 구사했다. 당시 저명한 전문가들은 라이카르트를 유럽 최고의 볼란치로 칭송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AC밀란이 사키-카펠로 감독을 거치면서 80년대 말~90년대 초까지 막강 전력을 과시하며 리그 우승 및 챔피언스컵 우승 등 주요 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했는데, 그 요인은 바레시, 마르디니, 루드 굴리트, 반 바스텐 등의 세계 톱클라스 수비진과 공격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겠지만 그 중간에서 공수의 밸런스를 완벽하게 유지해준 라이카르트가 있었기에 AC밀란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이카르트는 리누스 미셸-요한 크루이프-아리고 사키 등 전설의 명장들 밑에서 플레이를 했던 행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이 세 감독의 공통점이 '프레싱 사커'인데 세 감독이 가장 중요시 했던 것도 공통적으로 ‘밸런스’였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라이카르트가 있었다.
라이카르트는 전술 이해도가 높은 걸로도 유명한 선수였다. 아약스 시절에 크루이프 감독은 스위퍼인 로날드 쿠만의 공격 가담 횟수를 늘리기 위해서 스토퍼인 라이카르트에게 공간을 만들 것을 지시 내렸는데 라이카르트가 그것을 너무도 완벽히 수행해 쿠만이 편하고 쉽게 공격에 가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쿠만까지 공격에 가담 함으로 해서 미드필더 한 사람이 더 늘어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아약스는 상대팀 보다 늘 숫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라이카르트는 어떤 방향에서도 패스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 선수들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라이카르트에게 만큼은 안심하고 패스를 할 수 있었다.
라이카르트의 또 하나 장점은 중요한 대회 및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터뜨려 줬다는 것이다. 90년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 AC밀란이 벤비카를 1대0으로 눌렀을 때 결승골을 라이카르트가 터뜨렸고, 그 해 토요타컵 대 올림피아(파라과이)戰에서도 선제골과 세번 째 골을 터뜨리면서 대회 MVP까지 수상했다.
이렇듯 세계 최고 클라스의 실력을 갖춘 라이카르트이지만 안타깝게도 월드컵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라이카르트는 월드컵에 두 차례(90, 94년)출전을 했으나 결과도 좋질 않았을 뿐더러 또한 좋은 추억도 남기질 못했다. 90년 이태리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주최국 이태리 그리고 브라질과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국으로 평가 받았다. 2년 전인 EURO88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도 충분히 노려볼만 했고 또 가능성도 있었다.
이집트, 아일랜드,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속한 네덜란드는 조별 예선 첫 게임에서 예상을 뒤엎고 복병인 이집트와 1대1 무승부를 기록하며 최악의 스타트를 끊었다. 당시 네덜란드가 이집트와 무승부를 이룰 줄은 어느 누구도 예상을 못했기에 네덜란드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어 벌어진 아일랜드戰에서도 굴리트가 한 골을 터뜨리면서 분전했으나 또 다시 1대1 무승부를 이루었다.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잉글랜드戰에서도 0대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네덜란드는 간신히 조 3위로 16강에 올랐는데 16강 상대는 '전차 군단' 서독이었다.
당시 서독은 대회 전, 우승 후보국 중 하나였지만 이태리-브라질-네덜란드 보다는 조금 낮게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대회가 시작되자 강력하고 완벽한 압박 축구를 펼치며 별 어려움 없이 16강에 진출한 상태라 네덜란드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네덜란드VS서독의 경기는 이태리 월드컵 최고의 빅카드로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승부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갈리고 말았다. 전반 중반 경에 서독의 스트라이커인 루디 푈러가 네덜란드 GK반 브레우켈렌에게 돌진하면서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 때 라이카르트와 푈러가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 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다.(수 분 전에 두 선수는 옐로우 카드를 받은 상태.)
이 신경전으로 인해 두 선수가 재차 옐로우 카드를 받으며 동시 퇴장 처분을 받았고 화가 난 라이카르트가 급기야 루디 푈러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경기 후, 라이카르트는 인터뷰에서 '루디 푈러가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했기 때문에 침을 뱉었다.‘고 말했다.)
* 문제의 그 장면
두 선수의 동시 퇴장으로 인해 피해를 본 쪽은 네덜란드였다. 클린스만의 전담 마크맨이 라이카르트였는데 마크맨이 반 아일레로 바뀌면서 클린스만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감당 하지 못했다. 결국 후반전 초반에 클린스만에게 골을 허용했고, 이 후 브레메에게도 바나나킥으로 실점 당하면서 네덜란드는 무너졌다.(종료 직전 로날드 쿠만이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0패를 모면했다.)라이카르트가 퇴장 당하면서 수비의 구멍은 물론 전체적인 팀의 밸런스가 완전히무너진 것이다.(라이카르트는 94년 미국 월드컵(당시 네덜란드 감독: 아드보카트)에도 출전을 했으나 이 때는 굴리트-반 바스텐이 없어서였는지 전혀 활약을 못했다.)
라이카르트는 AC밀란이 93년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마르세유에게 패한 후, 친정팀인 아약스에 복귀(93/94시즌)했다. 라이카르트는 아약스(당시 감독: 반 할)에서 젊은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리그 2연패에 공적했고, 특히 95년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는 전소속팀인 AC밀란과 대결에서 결승골이 된 클루이베르트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관록을 자랑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를 했다. 라이카르트는 이 대회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요한 크루이프는 라이카르트를 ‘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라고 말한다.
프랑크 라이카르트(Frank Rijkaard) 국적: 네덜란드 나이: 1962년생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볼란치)및 스토퍼(스위퍼도 가능) 신장: 189cm 소속팀: 아약스(80/88)-레알 사라고사(88)-AC밀란(88/93)-아약스(93/95)
네덜란드 대표팀 데뷔: 1981년 A매치 기록: 73시합/10골 월드컵 출전: 90년, 94년.
주요 타이틀 1988년 유럽컵 우승 1988/89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 1989년 토요타컵 우승 1989/90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 1990년 토요타컵 우승 1993/94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 1994/95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
현 바르셀로나 감독 프랑크 라이카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