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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과 삼호정 옛터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전)
서울에는 용산(龍山)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용산(龍山)이란 산은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4가, 산천동와 마포구 도화동, 마포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그러나 용산이 산(山)이긴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선 산처럼 보이진 않고 하나의 언덕으로 보인다.
1. 용산의 변화
집들이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용산 남쪽 산비탈과 그 북쪽 언덕으로는 나무들만 없을 뿐이지 용산의 형상은 거의 제대로 나와 있었다. 만약, 그 집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무들을 심고 찢겨 나간 언덕 일부를 옛날 모양대로 복원했더라면 용산의 산모양은 옛날처럼 제대로 살아나 한강 경치를 즐길 좋은 명승지가 되어 관광 장소로도 크게 발돋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치가 좋았던 그 용산 산억덕은 일제 강점기 이후 무방비로 서서히 무허가 주택들로 덮여 가더니 지금은 산자락을 가득 메운 아파트 건물들①이 빼곡이 들어차 완전히 산머리를 가리고 말았다.
이 산이 그 유명한 옛날의 용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산천동 언덕이나 원효로4가의 강가 언덕 정도로나 알고 있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만 하더라도 이 산과 그 일대를 거의 모두 ‘용산’으로 불렀다. 그렇던 용산은 뒤에 한강로쪽에 용산역②이 생기고 그 곳이 상권 지역으로 발달해 가면서 ‘용산’이란 이름은 차츰 그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본래의 용산 지역과 새로운 용산 지역이 생기면서 ‘구용산(舊龍山)이니 신용산(新龍山)이니 하는 이름으로 구분지어 말해 오기도 했다.
요즘에 와서는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 주위의 너른 지역을 우선 떠올린다. 그래서 ‘용산에 산다.’고 하면 지금의 원효로4가쪽이 아닌 신용산, 즉 한강로 일대의 어디쯤 사는 것으로 알게끔 되어 버렸다.
경치가 좋았던 '용산'이란 산은 이제 우성아파트, 현대아파트, 삼성파트 등 아파트군에 묻혀 그 옛날의 정취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원래의 '용산'이었음을 '용산성당'과 그 아래 '용산신학교' 자리가 용산의 원터였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2. ‘용산’이란 이름
‘용산(龍山)’이란 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용산은 지금은 종로구, 중구, 마포구처럼 하나의 서울의 구(區)의 이름으로 또는 지역 이름으로 주로 통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북악산, 남산, 인왕산 등과 같은 하나의 산이름이었다. 따라서 ‘용산’이란 산은 둔지산(屯之山), 와우산(臥牛山), 절두산(切頭山)과 함께 한강변에 있는 산으로, 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였다.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의 기(氣)를 이어받은 인왕산(仁王山)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追慕峴)③이 되고, 거기서 한 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나아가 약현(藥峴), 만리현(萬里峴)④을 거쳐 서쪽으로 뻗어 내렸다. 효창공원을 좌측에 두고 서남쪽으로 벋어 내려가 하나의 산머리를 이루고 나서 한강가에서 마무리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한강가에서 머리를 불끈 솟군 산이 바로 용산인데, 한강물 앞에서 머리를 내밀고 물을 먹는 용(龍)의 머리 모양과 같아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3. 각광받은 용산 용머리 일대의 경치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산수의 형세가 매우 좋았던 용산 지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 위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었고, 귀인들의 별장지로 이용되기도 하였었다. 지금도 그 명칭이 남아 있는 삼호정(三湖亭), 함벽정(涵碧亭), 심원정(心遠亨) 등이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조선시대에 때 삼호정과 심원정에서 이루어지던 명사 미인들의 시회(詩會)도 꽤나 유명하였다고 한다.
용산의 자연 환경 가운데에서도 용산팔경(龍山八景)이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용산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주위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나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용산 지역에는 인가가 많지 않았다. 옛 지도나 개화기 때의 사진들을 보면, 선박이 정박하던 용산강⑤의 강변과 그 옆의 독서당(讀書堂)⑥ 인근, 선혜청(宣惠廳)의 구홀 양독을 저장하던 별고(別庫)⑦ 등이 보이는 정도였다.
한국 최초의 신자 이승훈(李承薰)⑧의 호가 ‘만천(蔓川)’인데, 이것은 그의 집이 만천과 인접해 있던 염초청(焰硝廳)⑨이 앞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지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욱천(旭川)으로도 불렸다. 복개되어 한때 농수산물시장이 되었다가 그 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사간 후에 현재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섰다.
반면에 이곳은 수운(水運)의 요충지로 인정받아 조선시대에는 수로전운소(水路轉運所)와 군량을 저장하는 군자감(軍資藍)의 강감(江藍)⑩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훈련도감의 군량미를 저장하던 별영창(別營倉) 등 중요한 창고들도 자리잡고 있어 이들을 운반하던 선박과 인마가 수시로 왕래했전 지역이었다.
성종 24년(1493)에 세워진 독서당(讀書堂)은 현재의 청암동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인가가 적고 경치가 수려했기 때문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 독서당은 용산강이 남호(南湖)로 불렸기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으로도 불리면서 인재들이 선망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때 폐지되고 말았고 개화기 이후에는 영국인과 일본인의 별장으로 전락하는 애환을 맞기도 하였다.
4. 용산 한강변의 경치
고려 때의 학자인 이인로(李仁老)⑪는 용산의 한 정자에 묵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보자.
두 물줄기 질펀히 흘러
갈라진 제비 꼬리 같고,
세 봉우리 산 아득히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만약에 다른 날
비둘기 단장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이 시에 붙인 서문이 있는데, 이를 보아도 당시의 이곳 용산의 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산봉우리들이 구비구비 서려서 그 형상이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턱에 있다.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되고, 강 건너로 먼 산이 있어 바라보노라면 묏산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李穡)⑫도 용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절벽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르고, 그 건너로 '너벌섬'⑬과 '밤섬'[栗島=율도]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관악산, 청계산 등이 보이는 산마루. 이 용산 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옛날부터 한양 일대에서 잘 알려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선 말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많은 문인들과 명사들은 용산 산비탈에 별장과 정자를 마련하고, 자주 올라와 풍류를 즐기며 시를 쓰기도 하며, 좋은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덕망 있는 대신인 남공철(南公轍)⑭은 벼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곳 강 언덕에 집터를 마련하고, 미리 귀거휴양(歸去休養)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임금이 퇴직을 허락하지 않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로 옮겼다.
용산의 술집 장막을 꿈에도 잊을 수 없어
강가에 돌아와 살고자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임금의 은택 지극하여 직책을 더디 풀어 주시니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꽃을 심었나 물어 본다.
호수 밖의 푸른 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책부터 먼저 실어 촌가로 내어 보낸다
이 해 다시 저물고, 흰 머리털만 늘어 가니
뜰 앞의 매화나무가 혼자서 또 꽃을 피우겠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임금도 이해했는지 얼마 후 그를 영의정 자리에서 '봉조하(奉朝賀)'⑮라는, 조금은 가벼운 직책으로 옮겨 준다. 그 후로 남정승은 용산의 정자로 나가 휴양할 수 있었고, 자주 이곳을 찾아와 주는 원로 대신들과 함께 심원정(心遠亭)에 올라 아름다운 용산 풍경을 즐겼다.
조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용산하일시(龍山夏日詩)〉라는 노래에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냈다.
--새남터 푸른 수림에 돛단배 다 지났구나
동작나루에 해는 저물고
--노들 서쪽 언덕엔 풀빛이 그윽한데
--밤섬 너머의 잔잔한 물결이 버들 그늘에 찰랑인다.
5. 용산팔경
용산은 용산팔경(龍山八景)으로도 유명했다. 물 가운데로 머리를 쑥 내민, 그 산마루에서 바라다보는 물가의 경치를 여덟 가지 꼽아 팔경을 정했다.
그 팔경은 다음과 같다.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만천은 만초천(蔓草川)이라고도 하는데, 예부터 덩굴풀이 많아 ‘덩굴내’라고 불러 왔다.
일부 고지도에선 이 내가 차천(車川)으로도 나온다.
한강물이 많이 불면 그 물이 이 덩굴내로 역류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냇가에 작은 갯벌이 형성되었다. 이 갯벌에선 주민들이 게를 많이 잡았다고 한다. 게가 밤이면 불빛을 보고 기어나오는 습성을 이용해 게잡이를 하느라 사람들이 불을 밝힌 것이다. 용산 산마루에서 밤에 바라보는 이 내의 게잡이 불빛들이 꽤 볼 만했을 것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그 자리에 용산 전자상가가 자리잡고 있다.
'사촌(沙村)'은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서 한강 인도교에 이르는 벌판을 말한다. 그 일부인 한강가 일대를 '새남터'?라 했는데, 이곳에서 천주교 사제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다.
지금의 '서부이촌동'이 된 이곳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용산의 노른자위가 됐지만, 옛날에는 온통 모래사장으로, 1900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이촌동 한강맨숀이 들어선 자리 근처가 그저 허허벌판이었고, 5-60채의 오두막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6?25 전까지는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으나, 뒤에 개발 바람이 불면서 모두 헐리고 고층 아파트들이 한강을 울타리치듯이 막아선 채 들어서 있다.
옛날에는 새남터 근처 마을에서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근처에 새남터 한옥 형태로 지은 새남터성당이 있다.
6. 용산의 여류문인 김금원과 삼호정 시사
한강이 휘어돌아 경치가 무척 좋았던 용산은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용산강 언덕에선 김금원, 김운초 등 미녀 시인들의 삼호정(三湖亭) 시회(詩會)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주 출신의 여인 김금원은 타고난 재질로 불과 14세에 국내 명승지들을 찾은 많은 명시를 지었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미녀들의 시 모임. 용산의 멋진 그림은 그들이 만들어 냈다.
서호(西湖)?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제일인데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노닌다네
양쪽 언덕의 봄 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강 위의 푸르고 누런 물결
석양이 흘러간다
구름이 골짜기를 덮으니
외로운 돛대 보이지 않고
꽃이 낚시터에 떨어지는데
피리소리 멀리서 들린다
가 없는 풍인(風烟)?을 남김없이 거둬들이니
비단 주머니의 밝은 빛이
난간 머리에 번쩍인다?
삼호정에서 앞강(한강)을 바라보며 지은 시 《저녁 삼호정에서 바라보며》를 보아도 그 옛날 용산 삼호정 부근 한강가의 정서를 느낌 수 있다.
청류단합경신장 (淸流端合鏡新粧)
-맑은 물은 새로 닦은 거울 같고
산학아발초학상 (山學峨髮i草學裳)
-산은 쪽진 머리 방초는 치마여라
별포래익무수조 (別浦來翊無數鳥)
-이별의 나루터엔 무수한 새 날고
방주시유불지향 (芳洲時有不知香)
-꽃다운 물가에는 알 수 없는 향기 나네
송창월입식환만 (松窓月入食還薄)
-솔 창에 달 들어오니 이불 도리어 얇아라
오엽풍번로경광 (梧葉風飜露更光)
-오동잎 바람에 펄럭이니 이슬 더욱 반짝이네
춘연추홍도시신 (春燕秋鴻都是信)
-봄 제비,가을 기러기,모두가 신의 있으니
미수초한왕회장 (未須?恨枉回腸)
-모름지기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으로 걱정하지 않네①
용산 기슭에는 심원정과 삼호정 외에 읍청루와 추흥정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 화전조약을 맺은 곳으로 유명한 심원정도 있다. 지금 용산문화원 위쪽의 심원정터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白松)이 몇 그루 남아 있었으나, 수년 전에 고사(枯死)하였다.
심원정에는 현재 오륙백 년쯤 되는 시(市) 보호수가 여러 그루 남아 있다.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조선 헌종 때의 여류시인 금원(錦園, 1817~?)은 원주 출신으로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시랑(侍郞) 김덕희(金德熙)의 소실로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경사(經史)를 통독하였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같은 시우(詩友)이며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의 《죽서집》 발문에서, “함께 후생에는 남자로 태어나 서로 창화(唱和)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길 만큼 남성위주의 양반제도에 한을 간직했다.
1830년(순조 30) 3월 남장을 하고 고향인 원주를 떠나 여러 곳을 거쳐 금강산을 구경하던 중 만난 인연으로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는 대신에 서울로 시랑(侍郞)이며 규당(奎堂) 학사인 김덕희를 찾아와 그와 인연을 맺어 소실이 되었다.②
1843년(헌종 9)27세로 문명(文名)을 떨쳐서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불렀다.
1845년(헌종 11) 남편을 따라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2년 동안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메모했으며, 이때의 여행기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③를 남겼다.
《망한양》(望漢陽. 한양을 바라보며)
한사부평사원유 (閑似浮萍事遠遊)
-한가롭기 부평초라 나그네길 일삼아
등림다일부지휴 (登臨多日不知休)
-승지 찾기 하 많은 날 쉴 줄 전연 모르네
귀심흔축동류수 (歸心欣逐東流水)
-그리는 마음 기꺼이 등류수를 따르거니
경락풍연조만수 (京落風烟早晩收)
-서울의 저 세상도 모두 쉬이 다 보리라
오랜 국내 여행 생활을 끝내고 1847년 다시 서울에 돌아와 남편의 별장인 용산(龍山) 삼호정에서 김운초(金雲楚),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瓊春) 등의 여류시인들과 시를 읊으며 여성시단을 형성하여 우수한 시와 글로 당시의 남성시단에 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④
한양에 들어와서는 풍류 문인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덕희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경 좋은 용산 언덕에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실인 금원과 함께 나와 거처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읊었다. 여기에 다시 금원의 친구인 여류 시인 김운초, 김경선, 박죽서, 김경춘 등이 자주 금원을 찾아 삼호정에 올라가서 강변 풍경을 명시로 옮겼다.
7. 관련 서적들을 통해서 본 삼호정과 김금원
삼호정과 김금원에 관한 서적들은 무척 많다.
물론, 각 서적에 실린 많은 내용들이 거의 비슷비슷하지만, “여자가 글을 알아 뭣해?”라는 인식이 깊게 깔린 조선시대에 여성들만 모여 하나의 시단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사삼들에게 작은 충격을 주고도 남는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전국을 돌며 시심을 일구며 글을 써 내려간 한 여인의 삶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감동을 안게 된다. 금원 자신이 기록한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는 금원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만하다.
《호동서락기》는 정민이 펴낸 《한국역대산수유기취편》에 수록되어 있고,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도 ‘여사 금원 찬(女士 錦園 撰) 《호동서락기》’ 필사본이 있다. 번역한 자료들도 있는데, 《(조선시대) 강원여성시문집》(l998)⑤과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 산문편》⑥ 등이 있다
전에는 주로 삼호정 시사와 관련하여 거론되었고, 금원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
김지용의 《삼호정 시단의 특성과 작품. 최초의 여류시단 형성과 시작 활동》⑦은 삼호정 시사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글로 이후 연구자들의 주요 참고 자료가 되었다.
금원이 어떤 집안이었는지, 그가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는지에 관해서는 관련 서적들을 통해서 알 길이 없다.
“19세기 중반 여성의 몸으로 여행길에 나선 이 여성은 ‘금원(錦園l’이라는 호로 알려진 인물로,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래로는 뒤에 ‘경춘(鏡春)’이라 불린 재주 많은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 말대로 한미한 집안이었는지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가 쓴 몇 줄의 글이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줄 뿐이다.”⑧
그러나 그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정서적인 면에서 남다른 면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나는 관동 봉래산 사람으로 호를 금원이라 한다. 어려서 병을 자주 앓아 부모께서 가엽게 여겨 부녀자의 일을 힘쓰게 하지 않고 글자를 가르쳐 주시니 나날이 가르침을 듣고 깨우치게 되었다. 몇 년 안 되어 경서와 사서를 대략 통달하고. 고금 문장을 본받고자 때때로 흥이 나면 꽃과 달을 읊조리며 생각하곤 했다.” ⑨
《조선의 여성들》이란 책에서는 부윤이 된 김덕희를 따라 의주로 간 금원이 김덕희가 벼슬을 물러날 때 함께 서울로 돌아와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렀다면서 삼호정 시회가 태어난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때 (금원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삼호정은 용산(지금의 원효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삼개고개)에 있던 김덕희 소유의 정자이다. 당시 용산 한강 부근은 풍광이 좋아 사대부들의 정자나 별장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가에 자리잡은 삼호정은 특히 경치가 아름다웠다.
벼슬을 그만둔 남편은 정원의 대나무를 꺾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금원은 종들에게 짧은 바지를 입게 했다. 그리고 물을 걷고 땔나무를 지고, 정원을 가꾸고 채소를 섬게 했다.
경치 좋은 한강변 김덕희와 금원의 생활은 한가롭고 평온했다. 이곳의 경치는 사시사철 아름다웠다. 날씨가 좋을 때면 금원은 동생인 경춘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 기녀로 있을 때 종종 어울리던 시인 운초(雲楚), 이웃에 사는 경산(瓊山) 등 마음이 맞는 네 친구를 삼호정으로 부르곤 했다. 봄이 오면 꽂과 새가 기분을 돋우었고 강변이라 종종 끼는 안개와 강물 위를 떠가는 구름은 젊은 날의 꿈을 떠오르게 했다. 간혹 세차게 들이치는 비바람도, 눈 내리는 정원도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었다. 금원과 친구들은 언제 모여도 반갑고 애틋하고 즐거웠다. 처지가 비슷했고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들은 모여서 거문고를 뜯고 시를 지으며 한껏 즐기다 헤어졌다.
금원의 삼십 대는 이렇게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나갔다. 남성들의 시회는 많았지만, 이렇게 여성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뒤에 사람들은 이 모임이 금원이 살던 삼호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삼호정시회’라 부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문예 의식이 고양되었던 시기에 사대부 문화에서 중인 계급이 주축을 이룬 여항 문화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의 문화가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세련되어 갔다.”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했던 당대의 특징적인 문화 현상 중의 하나로 시사 활동을 들었다.
“계급적 특권과 아울러 문화적 특권을 누렸던 상층 양반들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시사를 결성하여 시와 풍류를 즐겼다. 현대의 시 동인 모임과 비슷한 이 모임은 정치적인 입장이나 사상적인 입장에 따라 자연스러운 분파를 이루면서 서울 근처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 후기의 시사는 학문과 인생에 대한 뜻을 같이하며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고무하는 지음(知音)들이 모여 각자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문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은 지금의 회현동을 중심으로 죽란시사(竹欄詩社)를 결성하였고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등 연암 그룹은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백탑 근처에 살면서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 활발한 문화 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시사가 결성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마시며 우의를 다졌고, 시를 지어 주고받으면서 감흥과 정서를 표출하였다.”
삼호정 시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맞기도 했지만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모임은 여유 있는 양반 소실들의 그저 그런 시 모임 정도로 펌하할 수도 있지만,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임의 성격은 그리 단순치 않다고 했다.
삼호정 시사에 모인 여인들간에는 서로간의 유대가 든든했던 것 같다.
“금원, 운초, 경산의 교류는 비교적 활발했던 것 같고,죽서와 경춘은 금원과 가까우므로 이들 모임은 금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금원이 이들에 대해 내린 평가는 재화(才華)(운초),다문박식(경산),지혜(죽서),경사(經史)의 지식(경춘)으로,각자 고유의 핵심 특성을 집어내는 안목이 비상하거니와,이러한 예리함이 실경을 재현하고 구현시키는 데에 뛰어남을 보이게 된 이유일 것 같다.”⑩
《호동서락기》를 보면 삼호정 시사에 모인 이들과 이들이 여기서 경치를 즐기며 즐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때때로 옳조리고 쫓아 사를 주고받는 사람이 넷이다. 한 사람은 운초인데 성천 사람으로 연천 김상서의 소실이다. 재주가 무리들 가운데 매우 뛰어나 시로 크게 알려졌다. 늘 이곳을 찾아오곤 하는데 어떤 때는 이틀밤씩 묵기도 한다. 또 한 사람은 경산으로 황해도 문화 사람이며 화사 이상서의 소실이다. 들은 게 많아 아는 것이 많고 시를 옮는 데 으뜸인데 마침 이웃에 살고 있어서 찾아온다. 또 한 사람은 죽서인데 같은 고향 사람으로 송호 서태수의 소실이다. 재기가 빼어나고 지혜로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문장은 한유와 소동파를 사모하고, 시 또한 기이하고 고아하다.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우 경춘으로 주천 홍태수의 소실이다. 총명하고 지혜롭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널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시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서로틀 어울려 쫓아 노니 비단같은 글 두루마리가 상 위에 가득하고 뛰어난 말과 아름다운 글귀는 선반 위에 가득하다. 때때로 이를 낭독하면 낭랑하기가 금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하였다.
여성들이 가족 밖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했던 시대에 삼호정이라는 공간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사회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 모인 여성 시인들은 가정을 벗어난 공간에서 바느질이나 화전놀이가 아니라 한시를 매개로 만나 시를 통해 교감했다. 이들은 단지 비슷한 처지의 여성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주는 지음으로, 시인으로 만났다.
그러나 이렇던 삼호정 시회는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한 것 같다. 여성들로 이루어진 이 모임은 가족 사회가 오늘날보다도 더 중시되는 그 당시로서는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서가 세상을 떠나고 금원이 남편인 김덕희를 따라 다른 곳으로 가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한편에서는 여성들만의 모임인 이 시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삼호정 시사는 이들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들의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었던 공간, 그리하여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끝나지 않았던 공간이었음을 이 책에서는 경산의 회고를 통해서 적고 있다.
“내가 일찍부터 금원의 이름을 듣고는 선망하고 사모하였는데, 마침 강가 이웃에 살게 되었다. 뜻을 함께하여 모이니 무릇 다섯 사람이었는데 생각하는 것이 넓고 풍류가 넘쳐흘렀다. 이름난 정자에서 술잔 기울이며 시를 옳조리니 그 즐거움이 도도했다. 아름다운 안개비, 옥같은 눈가루는 재자(才子)의 붓끝에서 춤추는 듯하고, 붉은 꽂 푸른 풀은 시인의 입에서 모두 향기를 뿜는 듯했다. 이 모두는 마음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연스런 즐거웅으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호동서락기》 중에서
관련 서적들은 김금원에 관한 내용을 펼치면서 삼호정 이야기를 거의 빼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삼호정에서 벌어진 시회와 관련해서 같은 처지의 여인들과 끈근한 정을 맺으며 교류한 사실을 약간의 상상을 곁들이며 서술해 놓고 있다.
“그들이 ‘톰만 나면’ 모여 시회를 열었다고 했지만 며칠간 또는 일년에 몇 차례 모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시회를 열었을 때는 삼호정에 머물렀을 것으로,소실로서의 시간적 자유와 여유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삼호정에 한번에 오래 머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져서도 자주 그들의 끈끈한 정을 시로 써서 보낸 것 같다. 운초의 경우 계속하여 찾아와 혹은 며칠 밤을 묵기도 했고,반면 박죽서는 병으로 삼호정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죽서의 〈가을날 금원에게 보냄》(秋日寄錦園)의 금원 밑에는 삼호정 김시랑 소실이란 주가 붙어 있는데,이 시의 ”그리움에 흘린 눈물 동으로 흐르는 물에 뿌리니,삼호정에 흘러가서 파도를 일으키렴.“ 같은 구절이 그 예이다. 죽서가 금원의 시를 연이어 받고 쓴 시의 “벗이 나에게 두세 번 위로 편지 보내니”, “그대들 내 안부 물으니 더욱 부끄럽고” 같은 구절 역시 금원과 삼호정 시우들과의 정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⑪
삼호정 모임은 조선조 사회에서 그 모임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었을 것이나 당시에 나온 성과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금원이 일생 중에 한 일에 관해서는 전국 유람과 삼호정 시회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반면, 성장 과정과 그의 말년에 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어렸을 때 몸이 약했다는 것이 그의 성장 관련해서 나온 내용의 전부이다. 심지어 그의 출생 연도는 나와 있지만, 사망 연대가 나와 있지 않은 것이다. 관련 서적 어디를 보아도 그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금원 김씨는 1817년에 출생했고 사망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본관은 미상이며 호가 금원(錦園)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호방했다고 전해지나 어려서는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했다.⑫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음은 여러 서적들이 다 같이 밝혀 두고 있다.
그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⑬
금원은 자신이 금수(禽獸)가 되지 않고 사람이 된 것이 다행스럽고, 오랑캐 땅에 태어나지 않고 문명한 우리나라에 태어남이 다행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가 된 것은 불행하고, 부귀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한미한 가문에 태어난 것은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분수대로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옳은가.”⑭
삼호정과 김금원에 관해서는 많은 책들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책들은 거의 하나같이 금원의 특별한 삶과 그의 정서를 잘 담아 전하고 있다. 전국을 많이 유람했던 그 여류 시인은 용산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여기 머물러 정자에 올라 동료들과 함께 시를 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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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공철(南公轍)
1760(영조 36)∼1840(헌종 6) 의령남씨 자·호】 원평(元平), 사영(思穎), 금릉(金陵)
【시 호】 문헌(文獻)
【저서·작품】 《규장전운(奎章全韻)》, 《귀은당집(歸恩堂集)》,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정조실록(正祖實錄)》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학자
1760(영조 36)∼1840(헌종 6).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또는 금릉(金陵)이다.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정조 4년(1780)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1784년 그의 아버지가 정조(正祖)의 사부(師傅)였기 때문에 음보(蔭補)로 세마(洗馬)에 등용되고 이어 산청(山淸) · 임실(任實)의 현감을 지냈다. 정조 16년(179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부교리(副校理) · 규장각 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正祖)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고 김조순(金祖淳) · 심상규(沈象珪) 등과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운동(文體反正運動)에 협찬하여 뒤에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그는 한(漢) · 당(唐) · 송(宋)의 여러 글을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고 한다. 순조 즉위년(1800)에 대사성(大司成)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고, 1807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아홉 차례에 걸쳐 이조 판서를 역임했고 대제학 · 원자 좌유선(元子左諭善) ·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 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순조 17년(1817) 우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상직에 머물렀으며 1833년 영의정으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있으면서 심원정(心遠亭 : 용산구 원효로4가)에서 시인 묵객들과 남호(南湖)의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상임(金相任) · 성대중(成大中) · 이덕무(李德懋) 등과 교유하면서 독서를 좋아했고 경전의 뜻에 통달했으며 특히 구양수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다고 한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명(碑銘)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순조 때 전사자(全史字)라는 동활자(銅活字)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서울 4산(山)이 명당(明堂)자리라 하여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 투장(偸葬)하는 경우가 많아 각(各) 군영(軍營)으로 하여금 이를 색출하여 금위영(禁衛營)에 10일마다 한번씩 보고하여 조처하도록 하는 등 서울 사산(四山) 보존에 노력하기도 했다.
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순조 · 익종(翼宗)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고 저서로는 자기가 편찬한 《귀은당집(歸恩堂集)》이란 시문집(詩文集)이 있으며,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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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정(心遠亭)
원효로4가 87-2의 비탈 일대는 유서깊은 천연기념물 원효로 백송과 함께 조선시대 명사들이 한강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는 심원정(心遠亭)이 있었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선 임진왜란 때 명군과 왜군이 화전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선조 25년(1593) 정초, 이 땅에 와 곳곳에서 광폭하게 굴던 왜군은 평양과 행주에서 연패하자 통로를 이 곳으로 찾아 고니시 유끼나와(小西行長) 등이 군자감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모였고,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은 청파역 일대에 흩어져 4월 20일 물러날 때까지 여기서 명군측과 화전교섭을 벌였다. 지금 이 곳에는 비명이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剔)’라고 종서(縱書)로 음각된 비석이 서 있다. '왜명(倭明)'이라고 ‘왜’자가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 곳에 들어와 살면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비탈에는 당시의 강화비(講和碑)화 강화 체결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구전되는 백송(白松)이 있었다.
순조 때 덕망 있는 대신 남공철 정승은 벼슬 물러나 이 곳에 머물며 원로 대신들이 찾아오면 함께 오르곤 했다. "---손님 오면 작은 배에 청노새도 함게 실으면 모랫벌 가까운 이 정자에 흰 회오라기 날아와 존다. 시와 술에 삶을 맡기며 한 세상 잊는데, 이 강가에 찾아온 친구들 반갑기 이를 데 없구려. 버드나무 늘어선 십리 강둑을 무어라 멀다 하리. 선창에서 말 달리며 하룻밤 쉬어 가세나." (자료 추가 / 배우리 글)
원효로백송(元曉路白松)
천연기념물. 용산구 원효로 4가 87-2
나무 높이 10m, 흉고 둘레 2m, 점유 면적 22평으로 수령이 500년에 이른다.
본래 밑둥에서 두 줄기가 뻗었으나 한 줄기는 죽어서 베어 버렸고, 한 줄기만 동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밑에서 받침대를 받치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나마도 1980년대에 말라죽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이 곳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심원정)이 있던 터였다. 이 심원정터가 곧 군자감의 강감(江監)의 일부로서 임진왜란 때 명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강화담판을 벌였던 곳이다.
지금은 백송이 있던 곳 위에 ‘심원정지(心遠亭址)’라 새긴 비석이 서 있고, 그 뒷면에 세로로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剔)’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아마도 왜명이라고 ‘왜’자가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 곳에 들어와 살면서 덧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한 때, 이 근처의 동리는 정자 이름을 따라 심원동이라 하였다.
고종 때에는 영의정이었던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의 별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천연기념물 "서울2"호로 지정된 백송과 예닐곱 그루의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다.
http://seoul600.visitseoul.net/
http://seoul600.visitseoul.net/ (심원정지)
삼호정(三湖亭)
심원정의 작은 언덕 위, 수녀원 앞쪽으로는 삼호정(三湖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다. 이 곳은 옛날 미녀 시인들의 시회(시짓기 모임)가 자주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 태생 김금원 여류시인은 이 정자에 자주 올라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짓기를 즐기곤 했다.
"서호(西湖)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최고라오.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즐긴다오. ---양쪽 언덕의 봄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가 위의 푸른 물결 석양에 흘러가네---" (김금원)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經山集, 歸恩堂集, 金陵集
【관련항목】 강순(康純) 송계간(宋啓幹) 이인문(李寅文)
배우리
1970년부터 이름짓기 활동을 해 오면서 지금까지 1만 여 개의 이름을 지었다(하나은행, 한솔제지 등과 연예인 이름 등). 전국의 신도시 이름(위례신도시 등), 지하철 역이름(선바위역 등), 도로 이름, 공원 이름 등에도 그가 지은 이름이 상당수 있다.
1980년대 초부터는 지명 연구에 전념, 서울시 교통연수원, 연세대학교 등에서 수년간 이 분야의 강의를 해 왔다.
현재는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국토지리정보원 중앙지명위원이며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서울시 교명제정위원으로 있다.
‘고운이름 한글이름’(1984),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1994), ‘사전따로 말따로’(1994), ‘글동산 말동네’(1996),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2006)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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