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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회가 방주와 같아야 한다는 목회관이 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저와 함께하신 분들은 제가 여러 번 이 일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런 의미죠.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 세상에 피난처가 되는 방주, 그리고 세상에 희망이 되는 방주여야 한다. 이거는 제가 신학을 시작하면서 저는 20살에 시작했으니까 그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목회관입니다.
대학 시절 교회에 대해서 또 나라에 대해서 제가 고민하면서 제가 대학을 갈 때도 참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울 때였어요. 제가 80년대 학번이었으니까 그 일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이렇게 이어지는 거 보면 정말 나라를 위한 많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그때 고민하고 내린 교회에 대한 답이 교회는 방주여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방주란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한 곳에밖에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다닌 사람은 방주라는 이야기 단어를 들을 때 당연히 노아라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됩니다. 저도 교회는 방주가와 같아야 된다는 이 목회가는 노아를 생각하며 또 만든 내 마음에 새기고 다짐한 목회관입니다.
교회가 노아의 방주와 같아지려면 노아의 방주 같은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있어야 돼요. 우리는 교회가 노아의 방주와 같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고, 아마 이런 목회관을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노아의 방주 같은 모습으로 교회가 세상에 있게 하진 않아요. 노아의 방주와 같아 그처럼 교회가 방조했던 대로 목회가는 가지 짜지지만 노아의 방주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두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심판하실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뭔가 계획하실 때 하나는 항상 선하고 좋은 것만 계획하지는 않으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어떨 때는 심판도 계획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꼭 알아야 돼요.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합당한 것을 계획하신다. 물론 맞아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만은 계획하지 않으셔요. 하나님은 때로 온 인류를 향한 또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심판도 계획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님은 피조물을 심판할 계획도 세우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착각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죠. 우리가 잘못해도 참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어겨도 기다리시고 물론 이 말씀도 맞아요. 그러나 알아야 될 건 하나님은 기다리고 인내하기도 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심판도 계획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선한 계획도 가지고 계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심판하실 계획도 세우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과 삶들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왜 잘못된 생각과 또 잘못된 삶과 잘못된 행동이 왜 멈춰지지 않을까요? 목회자들로부터 해서 잘못된 생각과 사정상과 삶이 멈춰지질 않아요. 그 이유가 왜일까요? 바로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 여러분과 저를 향해 축복도 계획하시지만 반대로 심판도 계획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됩니다.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가 죄로 가득 찼던 거예요. 여러분 인간들은 그냥 자기 방향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면 다 죄를 짓는 존재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냥 두면 누구도 다 죄를 짓는 존재라는 거예요. 노아의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게 다 악했고, 당연히 마음이 생각하는 것이 악하니까 행동도 악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실 계획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계획 중에도 은혜를 입은 가정이 한 가정이 등장해요.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이 한 가정에게 은혜를 베풀어요.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를 받습니다.
정말 드문 경우죠. 왜 이 드문 일이 노아의 삶에 일어났을까요? 모두가 다 심판받는데 온 인류가 다 심판을 받는데 왜 노아와 노아의 가정만은 제외됐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오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노아의 삶 때문에 인류에게는 심판이 임했지만 노아에게는 구원의 계획이 임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심판의 계획을 세우는 중에도 어떤 사람들, 어떤 가정, 어떤 교회에 대해서는 구원의 계획도 세우신다는 거죠.
물론 오늘은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함께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심판도 작전하시지만 하나님은 구원도 작전하시다. 하나님은 심판의 계획도 세워지지만 또한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도 세우신다. 인류에게는 심판의 계획이 임했지만 노아에게는 구원의 계획이 임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삶의 차이가 만든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했지만 노아는 하나님을 감동케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류에게 심판을 계획하셨고, 하나님을 감동케 한 노아에게는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임하게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임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결정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심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노아의 삶은 은혜를 부르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노아의 삶을 보상하신 거예요.
이런 거죠. 여러분 제가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같은 흐름을 따라 사는 건 되게 쉬운 일이에요. 그러나 그 흐름을 거절하며 사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이에요.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한 세상에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의외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하나님은 노아의 이런 삶에 대해서 보상을 계획하셨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심판의 계획 아래에 있을 때 노아의 가정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개혁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죽음을 결단하고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제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건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가난할 것을 각오하고 왕따를 당할 것을 각오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각오하고 살아야 돼요. 그런 삶의 결단이 없으면 결단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노아는 그런 와중에도 살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셨고 온 인류에게 심판의 계획이 임할 때 노아의 가정에는 구원의 계획이 임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노아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방주를 건설하라는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삶과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잖아요. 왜 못할까요? 삶과 너무 거리감이 있어서 그래요. 내 삶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에는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지지 않은 하나님 말씀에 근접한 삶을 살았다면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어요.
왜요? 하나님의 명령은 대부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불합리하거나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노아가 세상의 길을 걸었고 심판받는 사람들의 길을 걸었다면 방주를 건설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좀 특별한 거였어요. 은혜를 입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어요. 그 은혜를 받고 봤더니 그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사명이었던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생각하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좀 부자가 된다. 좀 더 여유 있어진다. 좀 더 넉넉해진다. 좀 더 누리는 것이 많아진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잖아요.
근데 노아의 삶의 경우에 하나님의 은혜는 곧 사명이었어요. 하나님이 노아의 가정에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 가정에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거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평안하고 안전한 것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방주를 만드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인류 구원의 사명이 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였던 거죠. 방주를 만들어서 홍수로부터 인류를 지켜내는 것 하나님의 피조물을 지켜내는 것이 노아에게 임한 은혜인 겁니다.
이런 게 되죠. 막 은혜를 받았어요. 근데 하나님이 야 너 목회자가 되라 막 은혜를 받았어요.
그랬더니 야 너 선교해라 은혜를 받았어요. 그랬더니 야 너 가난한 사람을 도와라라고 하신 것과 같은 거예요.
오늘 본문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정말 잘 알려줘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어쨌든 지금보다 형편이 더 나아지고 누리는 것이 더 많아지고 자녀들이 더 잘 되는 것. 오늘 말씀이 말하는 은혜는 그게 아니에요. 사명을 받는 게 은혜인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사명을 오직 노아에게만 주셨기 때문인 거죠.
하나님이 노아에게 만들라고 하신 방주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배라면 반드시 갖춰야 될 것이 노아의 방주에는 없어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배가 아니라 방주를 만들라고 했어요. 배 배가 아닌 방주.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제 노아의 방주의 그림들이 많잖아요. 얘들이 그니까 배 모양으로 된 노아의 방주는 아니라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성경에도 영어로 아크로 이렇게 ark를 이렇게 아크로 번역해서 네모난 모양의 큰 상자와 같은 떠다니니까 배라고 할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배가 아니에요. 군함 항공모함 같은 배가 아닌 것입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방향 키도 없었고요. 그리고 동력 장치도 없었어요. 그냥 물 위에 떠다니는 것이 최선인 배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방향 키가 없으면 배는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오직 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최선인 것이 노아의 방주였던 겁니다. 동력 장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어떤 추진력도 없었던 거예요. 큰 스크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큰 돛이 있어서 바람을 탔던 것도 아니에요.
동력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오직 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어요. 하나님은 노아에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고 그리고 방주 안에서는 그 어떤 영향력을 방주에게 끼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어떤 영향력도 방주에게는 끼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다 단절시켜놨어요.
여러분 다 이렇게 바깥에는 역층을 이렇게 발랐기 때문에 이 고대 근동의 집을 지을 때 보통 흙벽돌로 짓잖아요. 흙벽돌로 이 흙벽돌은 그 겉부분을 흙벽돌을 쌓고 그 겉에 역청이라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아스팔트 있죠. 그거를 다 이렇게 발라서 비나 이런 것으로부터 손상을 이렇게 막아요. 이게 고대 근동 지역에는 아주 많아요. 수없이 퍼내도 퍼내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의 엽청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도 그것을 밖에서 이렇게 발랐어요. 그러니까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어떤 영향력도 노아의 방주에는 끼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가정에 임했습니다.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거였어요. 그러나 그 안에서 노아가 할 수 있는 것은 동물들을 보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어요. 오직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따라갈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주 안에서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방주라고 말씀드렸죠. 그런 의미에서 먼저 교회는 인간적인 동력 장치가 있어서는 안 돼요. 교회의 오직 유일한 동력 장치는 하나님이어야 되는 거죠. 말씀이 동력이어야 하고 기도가 동력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교회의 동력이어야 하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비전이 교회의 동력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을 의지해서 교회를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교회는 방주의 역할은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배로 이제 전락하게 되는 거죠. 방주가 아니라 배로 전락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이 왜 방주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동력을 교회가 더 밉지 못했기 때문인 거죠. 교회가 세상의 방주가 되려면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려면 오직 교회의 움직이는 동력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사람들이 교회를 움직이는 힘을 세상에서 찾아요. 그래서 교회가 방주가 아니라 군함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저도 목회를 하다 보면 우리 교회가 거대한 군함 항공모함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여러분 항공모함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얼마나 할 일이 많아요? 엄청나게 많은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도 있고요. 수많은 종류의 미사일들과 무기들을 장착하고 있어서 얼마나 공격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잖아요. 목회자들이 굳이 목회자를 비유를 안 들어도 저도 가끔 교회가 방주이기보다는 구남이기를 바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실천이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넉넉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잘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있을지도 몰라요. 실탄이 많지 않으니까 항상 조심하게 되고 실탄이 많지 않으니까 항상 긴장하게 돼요. 만약에 제 손에 실탄이 많았다면 저는 우리 목장 교회를 방주가 아니라 배나 군함으로 착각하고 그렇게 교회의 권력을 또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막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방주라는 거 군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군함이기를 기대해요. 그래서 교회는 인간적인 동력 장치가 없어야 됩니다. 또한 교회는 조향 장치나 방향 키가 있어선 안 돼요. 하나님이 교회의 방향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방향이고 하나님의 이끄심이 교회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없는 이 방주에 자꾸 조향 장치를 만들려고 애써요. 뭔가를 장치를 해서 이걸 내 생각대로 막 움직이려고 해요. 이러면 교회가 방주의 역할을 못한다는 거예요. 배의 역할은 고난의 역할은 할 수 있어도 영혼을 구원하는 영혼 구원의 역할은 교회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조정하는 교회는 쉽게 혼란스러워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세운 계획 중에 혼란스럽지 않은 게 없더라고요. 제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렇게 실천하다 이렇게 보면 정말 완벽하게 세웠던 것 같은데 곳곳에 이게 혼란스러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그 계획이 완벽한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인 거예요. 죄가 들어간 계획이고 오염이 들어간 계획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계획을 실현하면 제 생각대로 방주를 이렇게 움직이려고 해요.
그게 저의 계획인 거죠. 그러면 더 시끄럽고 더 혼란스러워져요.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에 맡길 때 이 교회라는 방주는 훨씬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강해하는 것을 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질서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질서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하는 거죠. 교회가 질서가 없는 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교회는 질서이죠. 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이끄셔야 그런 일에 여러분과 제가 순종해야 교회 안에 질서가 만들어져요.
여러분 삶이 지금 어지럽죠? 이 어지러움은 여러분과 제가 방주가 되어야만 정리가 되는 거예요. 아직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은 스스로 자기를 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의 이 배의 조향 장치를 움직이려고 하고 동력의 힘을 얻어서 배를 전진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배를 정말 멋있어요. 제가 한 번은 섬 사역을 갔다가 목사님 아드님이 좋은 이 배를 샀어요.
정말 힘들게 섬에서 목회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래서 아이들도 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또 더 이상 이렇게 살 길이 없으니까 이제 원래는 어부들도 아닌데 이제 어업을 해보겠다고 무조건 어업을 하려면 배가 있어야 되니까 이제 배를 샀어요. 그리고 이제 이 배를 이제 저희한테 이제 태워주고 싶어서 한번 타보실래요 하고 탄 적이 있었어요.
이 뒤에 동력 장치를 정말 좋은 걸 이렇게 두 개를 달아 한 개를 달아도 정말 힘이 세고 빠를 텐데 두 개를 달았어요. 정말 그 배를 타는 기분은 진짜 느끼기 어려운 거예요. 속도감부터 시작해서 너무 멋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 그런 걸 생각하는 거죠.
우리 교회가 방주가 아니라 큰 배가 돼야 된다. 군함이 돼야 된다. 근데 하나님은 교회의 모델로 방주를 제시하셨어요. 배나 군함이 아닌 방주 노아의 방주는 조양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몰되지도 않았고요. 노아의 방주는 동력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라 산에 잘 정착할 수 있었어요. 극심한 홍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침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주를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거예요.
목회의 방향과 사역의 방향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인생의 방향 또한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부모들이 다 하는 잘못된 생각 중에 하나는 내가 우리 가정을 잘 운전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보다 우리 아들을 우리 딸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내가 가장 잘 핸들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부모들의 착각인 거죠.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면 부모의 마음은 될 수는 있지만 성품으로 교회를 섬길 수는 있지만 자기가 방주는 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동력으로 자기 방향 장치로 인생을 바꿔가며 사역을 바꿔가며 우리가 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주의 모양을 군함처럼 또 배처럼 그려놓은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방주는 배가 아니라 큰 네모 모양의 구조물이에요. 그런데도 방향을 잡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요. 큰 파도 가운데 운행하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시간대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동력에 의해서 또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서 이 방주가 움직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위대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위대함을 깨닫는 것은 참 신앙생활의 영광과도 같아요. 여러분이 기도를 통해서 아니면 예배를 통해서 아니면 눈물로 교회를 섬기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라도 교회의 위대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정말 목회자나 성도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위대함과 영광을 못 깨닫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위대함은 인간을 통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통치 아래 교회가 있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군함이 아니라 방주에 올라타야 돼요.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군함에 올라타고 있다면 항공모함에 올라타고 있다면 빨리 내려오시고 방주에 다시 올라타셔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방주가 되려면 또 여러분이 방주에 올라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철저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방향이 교회의 방향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일하심이 교회의 동력이 되어야 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삽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어요. 그런데 자기가 방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해요. 나는 배워야 한다. 개여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잖아요. 동력 장치를 세게 했다가 약했다 하기도 하고, 방향도 내 마음대로 틀 수도 있고, 그니까 방주의 길을 거부하는 거죠.
지금 이 땅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어쩌면 방주의 길을 거부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여러분과 저에게 교회는 방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방주가 되려면 인간의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능력을 의지해야 됩니다. 교회가 방주가 되려면 사람이 방향과 목표를 세우지 못하게 해야 됩니다. 교회가 방주가 되려면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탁월함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하찮은 솜씨예요. 하나님의 탁월하심의 능력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하찮은 힘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하찮은 것들을 깨달아야 돼요. 내 능력이 하찮은 내 솜씨에 하찮은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 앞에 내가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군함이 용서를 더 잘 피해 갈 것 같고, 군함이 앞에 있는 장애물을 더 잘 헤쳐갈 것 같지만 아니었어요. 오히려 방주가 홍수를 더 잘 피해 다녔고,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더 잘 피해 다녔습니다.
교회는 그 동력의 근원이 하나님일 때 탁월해지는 거예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인생의 동력의 근원이 하나님 일대가 탁월해지는 것이고, 교회도 그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려면 교회의 동력이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장 선한 곳으로 교회가 갈 수 있고, 결국 궁극적으로 천국에 성도들을 다 태워서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이 구원의 방주에서 내리는 일이 결코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우리 교회나 여러분의 인생이 배나 항공 모함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면 오늘 부로 내려놓으시고 나는 우리 교회는 방주라는 생각을 반드시 가지셔야 됩니다. 방주만이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놔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노아의 방주를 아라가산에 도달하게 하셨고 거기에 새 인류를 내리게 하셔서 정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동력의 근원을 찾았던 우리의 어리석음들이 오늘 기도 중에 좀 보였으면 좋겠어요. 찬양하고 이렇게 기도 중에 내 생각대로 내 인생의 방향을 조양타를 막 돌리려고 했던 그 어리석음도 좀 우리가 보여야 돼요.
여러분 나에게는 어리석임이 보여야 하나님의 지혜가 보이잖아요. 내 솜씨에 하찮음이 보여야 하나님의 위대함이 보이잖아요. 내 결정에 어리석음이 보여야 하나님의 결정에 위대함이 우리가 보여요. 오늘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중에 이것이 보이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