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면
용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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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리구역 : 법정리 14개 / 행정리 29개 |
인구수 : 남 1,285명/ 여 1,465명 |
가구수 : 1,304호 |
면 적 : 72.34㎢ |
읍면장 : 노희규 |
주 소 :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장흥대로 2467 |
◆ 용산면 어산리 어동마을
- 면소재지에서 북으로 1㎞,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23번 국도 8㎞지점에위치하고 마을 뒷산 범바위 밑에 확트인 준평야지역으로 북으로는 자울재정상인 장흥읍 덕제리와 서쪽으로 어산리 어서마을, 남쪽으로 접정리, 동쪽으로는 인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음.- 마을인구 : 56세대 116명(남 56, 여 60)- 이장 : 김해전 (011-9609-5640) -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의 벌국재 부근에 고려말 珍原 朴應參이 입양하였다하며 그당시 심은 나무가 현재 천연기념물 268호인 검팽나무(堂山木)이다.- 그 후 靈光金龜壽가 부산면 내안리에서 지금의 아래대미로 이주해 오고 접정에서 長興任道鎭이 입주하였으며 지금의 5반(점등)에는 조선말기 鄭內先의4대조가 순천에서 이주해 와 가마를 만들어 村前에서 출토된 粘土로 옹기를 제작하였다 하며 자울재 밑에 1910년경에 河東 정초호가 강진 작천에서 9대조 선산을 돌보기 위해 입양하였다 한다. 1870년경부터 우산형국이라해서 雨傘 또는 御傘이라 부르다가 語山鄕이 있었으므로 語山鄕 語山이라 했는데 1914년행정구역 개편시 점등을 병합하여 語山里라 하고 동편에 있은 마을을 語山里1區 語東, 서편에 있는 곳을 語山里2區 語西라 칭하고 있다. - 6.25당시 이 마을 주민은 한사람의 희생자 없이 무사하였다 한다. 주민 서로가믿고 의지하며 고자질 이간질 없이 극히 대립을 피하여 상부상조 하였기 때문임.- 1950년대 마을에 훌륭한 문장가 김효식, 김영식, 김동환씨가 서당접장을 하면서 사례비를 받지 않아 그 제자들이 사례비를 저축하여 선생의 고마움과은공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추모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 용산면 어산리 어서마을
- 장흥읍과의 거리는 남쪽으로 10㎞이며 면사무소와는 서쪽으로 1.4㎞지점이요 국도 23호선이 마을 동쪽으로 200m거리에서 연결되며 오지개발사업으로 마을 앞을 통과하여 운주리로 통한 면도 301호선이 포장되어 군내버스가 운행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인암리가 500m요 남쪽으로는 접정리가 200m요 서쪽으로는 운주리가 500m요 북으로 자울재를넘어 장흥읍 덕재리와는 2㎞로 접하고 있다.- 마을인구 : 41세대 88명(남 42, 여 46)- 이장 : 이정신 (011-607-5693) 마을뒤 주산(263m) 상봉에 바위가 있어 봉바위라 부르다가 명풍이 지나면서 바위를 가리켜 “호암(범바위)이 내려다보니 학이 날으려 하나 물이 없어 험이로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주산이 “우산형국”이라 하여 우산, 또는 어산이라 부르다가 세종지리지에 어산향이라 한 후로 어산이라 불렀으며 마을이 동서로 분구되면서 서쪽 마을을 어서로 불러오고 있다. 1972년 부터 1973년까지 새마을문고 중앙표창을 받은 바 있다.
◆ 용산면 운주리 운주마을
- 용산면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면사무소와는 2.5㎞의 거리에 있으며 면의 진산인 부용산(608m)을 주산으로 하고 그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군청과의 거리는 18.5㎞이며 입지조건은중간산지라 하겠다.- 북쪽으로 운주리 봉황마을이 1㎞지점에 있고 동으로는 면소재지인접정마을이 2㎞의 지점에 있으며 마을뒤에 큰 저수지가 있고 남쪽에오도재 저수지가 있어 용산면 수원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 마을인구 : 49세대 103명(남 48, 여 55)- 이장 : 선주봉 (010-4601-4499) 이 마을은 연꽃 뿌리 형국으로 항상 구름이 끼어 있으므로 운주동, 또는 운동이라 하였고 운주 마을은 옛날 운동과 쟁몰, 골안, 오작골 등 4개 촌락으로 형성되었으나 골안은 교통이 불편한 산골로서 주민들이 타 마을로 이동하던 중 6. 25동란으로 마을을 소개시킴으로서 폐촌이 되었다. 쟁몰은 남상천 언덕 넘어 촌락이라 하여 제골(제곡, 제궁)이라 부르며 남상천 본류를 앞에 두고 운주동과 서로 바라보고 있다.인천인 이맹장군이 임란때 장군동(장구먹)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부터 장군동이라 부르고 임산배수의 지리설에 따라 이맹장군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 부용산(608m)을 옛날에는 藥多山이라 일컬어 많은 채약인들이 무리를 지어이 산에 드나들었다. 접정에 살던 이정대가 산삼을 캐기도 하였으며 이 산에번식하고 있는 草木의 이름을 적어 놓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쇠똥구리마을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친환경농산물(쌀)을 많이 재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 용산면 운주리 봉황마을
- 이 마을은 운주리로부터 분구되어 면사무소와는 2㎞ 서쪽지점에자리하고 있으며 군청과의 거리는 16㎞이다. 금패마을은 조선중기부터 교통의 요충지로서 남면방의 치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들판에 500여년된 노거수 한그루와 대밭이 남아있을 뿐 평야지대이다.- 마을인구 : 22세대 52명(남 25, 여 27)- 이장 : 임윤삼 (011-9624-5381) 풍수지리학설상으로 한때는 바람재(풍치 280m)의 이름을 따서 풍치동이라 불렀고 봉황형국이라 봉황동으로 명명하기는 1737년 청원계안이나 1747년에 발간한 정인지에도 봉황리가 기록에 나온다. 풍수지리학설을 심봉하는 지관들은 지금도 묘지를 구하고자 고터 금방동 부근을 많이 드나들고 있다. - 이 마을은 초원이 좋아 매년 퇴비증산을 많이 한다. 1972∼1975사이에 퇴비증산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여러차례 도지사 또는 군수의 표창을 받은 바 있다.
◆ 용산면 접정리 접정마을
- 이 마을은 면소재지 마을로서 저드리마을과 신기마을, 국정, 가는골등을 합쳐 접정1구라 한다. 입지조건은 평야지이고 군청과의 거리는 남쪽 9㎞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어산리가 있고 동남쪽에용인 마을과 인암리가 있으며 서쪽에는 운주마을이 있어 인구밀집지대를 이루며 교통 또한 편리하고 맑은 남상천이 흘러 깨끗한 환경을이루고 있다.- 마을인구 : 85세대 171명(남 87, 여 84)- 이장 : 이선기 (011-9430-0966) 접정마을은 옛날부터 우렁형국이라 하여 여의천 냇물이 보안등에 부딪혀 저드리(적평)앞을 지나 외보리뜰로 흘러 중학교터를 거쳐서 인암으로 흘렀었다. 그루 큰 홍수로 여의천이 매몰되고 보 안에서 금접정을 거쳐 가는 골, 남상골 등을 지나 청수리로 흐르는 남상천이 생겼다. 이엄(1612~1664)이 배산임수의 풍수설에 따라 어산에서 저드리(적평)로 분가하여 설기하고 마을 앞에 정자수 2그루를 심고 자호를 쌍정이라 하였다. 그 후 공은 평야지의 하천을 따라 다시 정자목 2그루를 심고 마을을 성촌시키면서 마을이름을 접정이라 하였다 한다. 그 정자목이 자라 노거수가 되고 둘레가 5m나 되었으나 지난 1960년에 자연 고사하였으므로 다시 그 자리에 한그루를 심고 신가마을 뒤 들판에 1그루를 심어 쌍정을 만들고 접정이란 전통을 살리고 있다. - 문화유적 : 고인돌, 접정마을 뒤에 있는 어서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 200여m 가면 길 왼쪽 평지 논에 1기가 있다. 상석의 크기는 장축 260㎝, 단축 130㎝, 두께 55㎝로 형태는 부정형이다. 장축방향은 북동-남서이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 용산면 접정리 묵촌마을
장흥군청에서 남쪽으로 10㎞지범, 용산면사무소에서는 남쪽 1㎞지점에 자리잡은 평야지 마을이다. 용산면의 진산인 부용산(608m)의 줄기가 힘차계 뻗어 筆峯(430m)을 이루고 있어 묵촌마을의 주산인 쇠쇠봉(140m)을 이루니 묵촌마을은 쇠쇠봉 낮은 자락밑 평야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인구 : 49세대 103명(남 51, 여 52)- 이장 : 이진철 (011-627-5809) 조선조 중기 인천이씨 유(1606~1667)가 마을의 주봉인 필봉을 보고 학덕이 높은 선비가 많이 나올것이라 하여 접정에서 이주한 후 안천석(1636~1695)이 강진 칠량에서 입향하여 성촌이 되었다 하나 접정마을 성촌시기는 이엄(1612~1664)이 최초 이주한 마을이므로 1400년대에 개촌된 묵촌 이유가 접정에서 이주하여 설기했다는 설은 믿을수 없다. 풍수지리학설로는 묵촌마을 청룡등이 짧아서 어동리 옹점(옹기점)의 불길이 마을을 비추면 화를 당한다 하여 이 불빛을 막고자 청룡등 자락과 마을 어구에까지 동백림, 송림, 죽전등을 조성하였으며, 이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현재까지 문필가가 끊이지 않는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도기소가 있어 전담 짐꾼이 있었고,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직업상인들이 있었다. 도지정 문화재 : 묵촌 동백림
◆ 용산면 월송리 월림마을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8㎞, 용산면 소재지에서 남으로 2㎞ 지점에 위치하고 두 산맥사이의 평야지대이며 협곡에 늘어진 마을이지만 교통이 편리함.남으로는 산넘어 재송마을이 있고 동으로는 녹원마을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묵촌리가, 북으로는 월림천이 흘러가다가 남상천과 합류한다.또, 북쪽 마을 입로에는 장흥발 회진간 지방도 837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면도 202호선이 마을앞을 통과, 솔치를 지나서 지방도 837호선에 연결된다.- 마을인구 : 32세대 59명(남 27, 여 32)- 이장 : 이창범 (011-632-9044) 용산면의 주산인 부용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맥이 관산읍과 경계를 이루면서 북으로 뻗어내린 세 산맥 중 소손용인 마산봉을 주산으로 하여 두 산맥사이의 계곡에 자리한 평탄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좁은 계곡의 송림사이로 달(월)이 솟는 격이라 하여 월림이라 불렀다. 원래 달은 선보름엔 점점 둥구러져서 보름에 만월이 되고 후보름에는 점점 이그러진다는 이치로 전반은 성하고 후반은 쇠한다는 말이 전해온다. 30여호가 농사를 짓고 살고 있으며 직파재배(벼)를 많이 하는 곳이다.
◆ 용산면 월송리 재송마을
장흥군청에서 남쪽으로 12.5㎞, 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4.5㎞지점에 위치한 산간 오지마을이다.이 마을은 면도 202호선이 1994년말에 포장되어 현재는 군내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마을의 남쪽은 관산이요, 북쪽은 월림이며 동쪽은 원기, 서쪽은 용산면의 진산인 부용산의 준령이 뻗쳐 있다.- 마을인구 : 26세대 60명(남 33, 여 27)- 이장 : 문병갑 (010-7633-6785) 현재 재송마을과 송치마을을 합하여 용산면 월송리2구 행정리를 이루고 있다. 재송마을 터는 웃모슬이라 하여 송치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양동이라 불리우다가 화재를 입자 폐촌되고 다시 일어났다는 뜻으로 재흥이라 불렀다. 마을 주산이 암소(우)등과 같다하여 길지로 알려지면서 성촌이 되었다. 송치마을은 마을 앞에 노거송이 있고 관산으로 통하는 재(치)가 소나무(송) 사이로 넘어간다 하여 송치라 불러오고 있다. 조선백자 도요지가 있으며, 흙사랑 백자골 농원에서는 국민의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 생산을 위해 친환경 농산물 생산에 노력한결과 2007년4월 11일 채소류 인 배추외 9종을 무농약인증에 추가 등록시켜 이제 쌀외 14종의 무농약 인증을 보유 하게 되었다.
◆ 용산면 녹원리 녹원마을
면의 남쪽 1㎞지점부터 큰 골짜기 장쟁이골(長堤院)일대를 점하고 있어 남북의 거리는 5㎞에 가까우며 이 구간을 지방도 837호선이 관통하고 이 도로 연변을 따라 5개 자연마을이 거리를 두고 취락이 조성됨. - 마을인구 : 58세대 111명(남 52, 여 59)- 이장 : 정병현 (011-647-4068) 녹동마을은 앞쪽에 안태골이 있어 자손이 번성할 자리라 알려졌고 마을 뒷산에 노루가 많다하여 녹동이라 부름. 원기마을은 신증동국여지승람(1481)에 장제원(장쟁이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장제원은 장흥 벽사역 산하의 역참으로 군정과 감역이 많이 거주하였다 하여 원터(원기)라 불러왔다. 그러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봉동 마을은 용산면의 최남단에 자리한 마을로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봉동이라 부르면 한때는 다시 일어날 형국이라 하여 복흥이라고도 불렀다. 신흥과 신촌은 중심도로 연변에 군락을 이룬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청원계 면안(1734)에도 수록되었으며 관제골에는 약수터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행정리가 6∼7개 마을이 합해서 이루어졌고 마을과 마을간의 거리가 멀어 행정집행이나 협동사업이 어렵지만 분구도 원치않고 1914년에 실시한 행정구역 조정이래 마을명칭도 변경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긍지로 삼고 있다.
◆ 용산면 관지리 관지마을
군청으로부터 남쪽으로 11㎞,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2.5㎞ 지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의 서남쪽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북동쪽으로는 칠리안 큰 들을 앞에 두고 있다. 남으로는 100고지를 넘어 녹원리요, 서쪽으로는 접정리, 북으로는 인암리, 동으로는 유동마을이다.하천은 용강에서 월림, 녹원천이 남상천과 합류되고 평야지를 가로 질러 금곡천이 멀리 보인다.- 마을인구 : 52세대 110명(남 59, 여 51)- 이장 : 안선봉 (019-397-2867) 주산인 성규봉(110m)으로부터 맥이 내려와 우뚝 솟은 두류봉(말 안장봉)에서 청룡, 백호등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관지, 용두마을이 모두 속설 지명이 다르다. 즉 용마 함맥의 명지가 있다고 한다. 그레 걸맞은 지명은 말의 밥그릇(가마구시), 가마구덩이, 말의고삐(앙사리), 도루매, 고루매, 말의 굴레(늑장), 말을 비끼는(머리 빗댕이), 말의 안장봉(두류봉)등의 물명이 있으며 두류봉 밑에 불당골(불당동)과 구몽골이 있다.마을 북쪽 300m지점에 가마구덩이 바로 옆에 지와 가리(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는에 경지정리 후 없어졌다. 기와 제작의 재료인 흙, 채취, 질구덩이(버들밑들)가 있다. 관지마을은 長淵邊氏의 집성촌으로 邊應宇, 邊萬里, 邊鎭臣 등의 일문 祖孫 3세의 효행을 기리는 안동단이 있어 일향 장보의 흠모를 받고 있다.
◆ 용산면 관지리 정장마을
이 마을은 유동마을과 합하여 관지리 2구란 행정리를 이루고 있는 중산간지대의 마을로 군청으로부터 남으로 17㎞의 지점이며 용산면사무소에서 동남쪽으로 3.5㎞지점에 위치해 있다. 남으로는 승주봉 줄기의 주산(172m)이 병풍처럼 둘러있으며 북쪽 마을앞은 농경지로 구성되어 있다.유동마을은 정장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지점에 위치해 있고 속칭 "도로메"라 불리우는 뒷동산이 마을을 휘감고 있으며 마을 앞은 옥토로 평야를 이루고 있다.- 마을인구 : 40세대 83명(남 43, 여 40)- 이장 : 정종수 (010-4807-5266) 정장마을 터가 "솥"형국이라 하고 이웃 척산마을 주산이 "밥주걱"형이라 하여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속설에 "솥에서 밥을 차려간다"고 믿었으므로 예로부터 이 마을에서는 마을앞 북서쪽에 나무를 심소 척산마을의 주산이 넘어다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1768년 광산인 김복수의 호구장에 으하면 남면 正莊이라 표기되어 있고, 1819년 광산인 역사 김재기의 호구장에는 남면 正藏이라 기록되고, 1848년 역리 김재기 호구장에 南面正莊이라 기록되었다. 1734년 남면 淸源契案에는 역시 正莊이다. -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으면서, 비닐하우스 이용 딸기,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다.
◆ 용산면 상금리 상금마을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4㎞지점이며, 군청에서는 남쪽으로 16㎞ 떨어진 지점에 자리한 중산간 마을이다. 동쪽으로 가재재를 넘으면 풍길리요 남쪽은 칠리안들을 넘어 금곡천을 건너면 월정마을이며 서쪽으로는 평야지대를 건너면 금곡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된게재를 넘어 원등마을에 이른다. 이와 같이 동북은 金華山脈(210m)을 이루고 마을앞은 큰 평야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인구 : 50세대 105명(남 52, 여 53)- 이장 : 백종만 (010-5602-5541) 이 마을은 부용산 자락 필봉이 역용으로 태극처럼 생긴 형국을 지어 금화산(210m)이 아름답고 일자문산과 문필봉이 확립함에 문인달사가 배출될 것이라 하여 터를 잡았다는 설이 있다. 신기 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뜸”또는 “새터”라 하다 신기로 부른다 장흥 국악 연구회가 주최하는 시조 경창대회에서 白亨碩씨가 乙部 2등에 白錄善씨가 乙部 3등에 입상한 바 있다.
◆ 용산면 상금리 송전마을
이 마을은 송정마을과 초당마을을 합하여 상금리 2구를 이루고 있으며 면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4㎞지점에 위치하고 군청으로 부터는 남쪽으로 16㎞지점에 위 치한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인구 : 45세대 102명(남 47, 여 55)- 이장 : 최길중 (010-6822-5742) 大岩山(270m)의 난맥을 이어 받은 거북형국이라 칭하고 초당마을은 龜峯과 大將軍峰을 이어 받은 난맥으로 半月형국이라 전한다.이 마을 3면은 山으로 쌓여 있고 마을 앞은 농경지다. 예로부터 용산의 三田이라 하여 長田, 靑田, 松田을 고기(古基)라 전한다.초당마을은 마을 뒤에 將軍峰이 있는데 그 형국이 月體라 하여 달이 보름이 지나면 기울듯이 15년은 상승세를 타고 15년은 하락세로 빈부의 차가 심하여 진다고 전한다. 조선조말 龜南齊의 學堂이 있어 名聲이 높았고 學風이 흘러 마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용산면 금곡리 금곡마을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6㎞, 용산면소재지에서 2.5㎞ 동쪽에 위치한 중산간 평야지대인 순 농촌마을로서 소쿠리태처럼 동서북면이 산으로 쌓여진 살기좋은 마을이며 동쪽은 상금리, 서쪽은 인암리, 남쪽은 관지리, 북쪽은 장전리와 접하고 있다.마을진입로는 동쪽과 서쪽 두곳이 있는데 동쪽 진입로 입구에는 마을을 지티는 선돌(立石)이 있고 華山 學行碑와 靈光金氏 烈女碑가 세워져 있으며 서쪽 진입로 마을 입구에도 역시 마을을 지키는 선돌(立石)이 서있고 春溪 金容煥 行蹟碑가 서있어 後進들의 敎育과 마을환경의 미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 마을인구 : 36세대 74명(남 34, 여 40)- 이장 : 박형록 (010-7303-5257) 이조초에 진원박씨가 처음 입주성촌하여 거주하면서 洞名을 鐵溪洞(쇠끼미)이라 하였고 中宗正德2年(서기 1507)에 仁川李偶가 原從功臣으로 벼슬을 버리고 입주하여 학문을 崇上하고 비로소 洞規를 정하니 문행과 隱逸의 선비가 많았다. 그후 1578년 宣組 9年에 靈光金氏가 입촌하여 三姓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학문을 열심히 하고 농사에 종사하면서 里名을 金華라 改稱하였다. - 당산제 : 정월대보름 전날 당산나무에서 모신다.
◆ 용산면 금곡리 월정마을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2㎞,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4㎞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속칭 七里 한동의 중앙지인 평야지에 위치하여 마을 전후로 소하천이 흘러 저지대로서 홍수피해가 심하였으나 1990년 경지정리 사업을 시행 후 피해 상습지에서 탈피되고 북으로 상금, 동으로는 송전, 남으로는 정장, 서로는 관지에 접하고 있다. - 마을인구 : 13세대 28명(남 12, 여 16)- 이장 : 최길순 (010-4200-5786)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하금에서 머슴살이하던 변영쇠가 빈곤에 쪼들어 살던 중 귀봉이란 산에서 나무를 채취중 한 노승이 지나다 배가 고프니 밥이 있으면 달라기에 점심먹을 밥을 주었더니 달게 먹고 저 터를 가리키며 거기에 움막이라도 짓고 살면 부자가 된다 함으로 변영쇠는 노승의 말대로 그곳에 움막을 짓고 살자 부자가 됨으로 주위에 나무를 심어 방한방풍을 하였으며 달(월)이 떨어진 형국이라 하여 월정이라 부르게 됐다.
◆ 용산면 인암리 인암마을
면사무소로부터 동으로 300m, 장흥읍으로 부터 9㎞ 지점의 교통의 요지이며 동으로 척산, 남으로 관지, 서로는 접정, 북으로는 석동과 접하고 있는 臨水背山의 평야지이며 교통은 남과 북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마을 중심을 통하고, 하천은 舒岩川과 龍江川이 합류한 곳이다.- 마을인구 : 63세대 136명(남 57, 여 79)- 이장 : 김성진 (011-9615-5341) 1600년경 영광 김척이 부산면 내안리에서 인암을 지나다 뒷산이 왕 형국이라 하여 정착한 후 1720년경 장흥 임성이 봉황에서 분가하여 입향하였다.뒷 산세가 왕이 태어날 형국이라 하여 어인암이라 불러 오다가 도장(인) 같이 생긴 바위라 하여 마을명을 “인바우”라 하다가 인암이라 하였다. 인바우:(御印岩) 도장바우. 왕이 도장을 찍은 형국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이곳까지 潮流가 밀려와 매산이가 생산됨으로 매산바우로도 부른다.
◆ 용산면 인암리 용인마을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9㎞지점이며 용산면의 소재지에 속하고 있다. 본 마을은 인암리 서구로 1986년 7월 1일에 인암리로 부터 분구되었으며, 용산면의 행정.교통.문화.경제의 중심지에 속한다. 국도 23호선을 경계로 용산 시가지를 나누어 서쪽은 접정, 동쪽은 용인마을이다. - 마을인구 : 61세대 150명(남 68, 여 82)- 이장 : 김재훈 (017-359-8559) 고대로부터 국정이라 불러왔다. 1932년 남상, 남하가 합면되어 남면이 되면서부터 면 소재지가 되자 일약 인구가 증가하고 상가가 번창되자 1986년 7월 1일 인암리4구 “용인”마을로 분구하였다. 용산의 “용”자와 인암의 “인”자를 따서 용인마을이라 하고 국정은 접정 일부와 인암 일부를 합한 호칭이다. - 면내 최대의 상가를 이루며, 5일시장(1일, 6일)이 있는 마을임.
◆ 용산면 인암리 척산마을
- 평야지로서 척산과 석동 마을로 구성됨.- 척산마을은 장흥에서 남쪽으로 지방도 847호선을 따라 약 14㎞지점이며 면사무소와는 동쪽으로 2㎞거리이며 석동마을과는 서북쪽으로 약 1㎞지점에 있다. 마을앞 척산천변에 마을의 휴시거인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다.- 석동마을은 척산에서 1㎞ 서북으로 올라가면 칡매산(200m)과 뒤로는 함지봉(416m)을 주령으로 척산과 떨어진 곳에 적은 촌락을 이루고 있다. - 마을인구 : 39세대 82명(남 34, 여 48)- 이장 : 김영호 (011-9611-5289) 척산의 지형 형국은 노령산맥의 줄기가 남서로 뻗어 제암산(773), 사자산(669), 억불산(518), 연태봉(397)을 이루고 부용산(608)으로 다시 뻗어가는 중간인 굉춘산(384)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지맥이 함지봉(416m)을 주령으로 한 주산(243m) 척산은 작은산이라는 이름으로 도산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앞들 건너 노승봉(339m)과 필봉에 용두까지 병풍처럼 펼쳐 있고 발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으며 새벽내가 득수를 이루고 남상천이 합수하여 거북이 바다로 내려가는 자라머리 형국이다. - 입석 : 마을 입로에 선돌 1기(높이 130㎝, 폭 46㎝)가 있으며, 석동마을 입구에도 선돌 1기(높이 110㎝, 폭 70㎝)가 있다. 신앙은 없고 마을 수구맥으로 여긴다.
◆ 용산면 인암리 장전마을
지방도 837호선이 마을앞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장흥읍으로 부터 남쪽으로 13㎞지점이며, 용산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2㎞이며, 이웃마을로서는 서쪽으로 200m거리에 척산마을, 동으로는 모산마을, 북쪽으로는 산능선 너머 포곡마을, 남쪽으로는 들녘을 지나 남상천건너 능선넘어 금곡마을에 접하고 있다. 마을은 남향으로서 앞은 우리면에서 가장 큰 七里평야가 펼쳐저 있다.- 인구현황 : 32세대 60명(남 28, 여 32) - 이장 : 배종국 (011-623-5617) 장흥읍 굉춘산(389m)으로부터 함지봉(414m)으로 맥을 따라 안봉(228m)을 거쳐 고등제 고동바우를 거쳐 매바우와 엉바우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뒷 산세와 앞들을 보고 노루가 밭에 내려오는 형국이라 하여 장전이라 하였다. - 1959년부터 1983년까지 퇴비증산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15년간 중앙, 도, 군의 상(상금)을 매년받을 정도로 마을 전체가 협동합심하여 성취하는 것으로 그 명성을 놓였다. 그 맥을 이어 2005년에도 친환경흙살리기 시범마을로 지정되어 시상금 400만원을 받아 한우을 입식하였다.- 당산제 : 마을 서쪽 노거수 당산목 밑에서 정월 14일 밤에 동중 제원으로 모신다
◆ 용산면 모산리 모산마을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2㎞,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지점에 있으며 북으로는 억불산지맥을 등에 업고 남으로는 오산들 건너 이름높은 낙수골과 月山齊가, 서쪽으로는 모산제와 들이 동으로는 들넘어 계산리가 200m거리에 있다.- 인구현황 : 40세대 87명(남 40, 여 47) - 이장 : 김점엽 (011-634-2477) 고려중엽에는 세암치들에 탐진최씨, 김해김씨 등이 거주하여 촌락이 이루어져 모읍단이라 하였다. 청원계명안에는 1734~1796년까지 기록에 나오며 구전에 의하면 “세암치”에서 거부와 인물이 배출된다 해서 이곳에 촌락이 형성되었다 한다. 1938년부터 폐허가 되고 현 모산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고 뒷산에 띠가 많이 생산되어 못안(모산)이라 부른다. - 월산제 : 도지정 문화재 73호(서당)
◆ 용산면 모산리 포곡마을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6㎞,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7㎞, 지방도 837호선으로 부터 3㎞에 위치하여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 쌓여 농경지가 협소하다. 옛부터 산넘어 장흥읍과 가깝고 억불산의 봉화대의 봉수별장 봉수병이 거주하며 보행길 교통이 중요하고 억불산 및 활성안에 말 먹인것 등으로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인구현황 : 20세대 39명(남 18, 여 21) - 이장 : 이석주 (011-617-7766) 뒷산세가 암꿩이 알을 품고 있다 하여 자포실 또는 자포지라 부르며 옛터에는 건너돔과 절골에 촌락이 있었으나 전설따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풍수지리자가 이곳에 팔명당이 있다 하여 지금도 풍수객들의 출입이 빈번하다. - 산간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때 피해가 없었고 소개 소실된 가옥이 없었다고 한다.
◆ 용산면 계산리 계산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지방도 837호선을 따라 12㎞쯤 거리며 도로변 좌측은 기들이라는 평야가 있다. 좌측은 모산리 우측은 덕암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면소재지에서 남상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 인구현황 : 68세대 131명(남 64, 여 67) - 이장 : 김충엽 (011-635-4806) 장흥군의 명산인 억불산을 주축으로 주위에 적은 명산과 산맥을 이루고 억불산 정상, 남쪽으로 350m지점에 20여 정보의 광활한 자리에 활성안 또는 군마장으로 사용했다는 옛 산성이 있으며 이 성에서 남문을 통하여 내려오는 절터가 있고 기슭에 7개집단 취락이 형성돼 있다. - 조국광복과 즉시 조직된 마을 大同契가 있다.
◆ 용산면 계산리 차동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1㎞,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 지점에 위치하고 북으로 서리봉이 있다.- 인구현황 : 32세대 74명(남 34, 여 40) - 이장 : 김정진 (010-9452-5478)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뒷 주산의 명칭이 속칭 수리봉(140m)이다. 수리봉의 형국이 마치 수리새가 앉아 있는 형태와 같다. 좌우 골짜기 명칭도 좌측을 수리골, 우측을 솔게골 또는 소노골이라 칭하고 있다. - 역사유적 : 진주정씨 삼세 충효문(1950년대 건립)
◆ 용산면 덕암리 덕암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2㎞,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덕암간척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해변지대요 포구였으나 1965년 덕암간척지가 조성되자 강변지대로 탈바꿈되어 남쪽은 간척지 畓이다.- 인구현황 : 45세대 86명(남 37, 여 49) - 이장 : 김공교 (010-8299-5471) 마을뒤에 있는 “덕바우” “덕암” “벼락바우” “벽영암”에서 덕암이라 부르며 삼십포 “삼십게”의 바다개옹이 있다하여 또는 30호밖에 살 수 없다는 것과 “심향포” 절목한 제목을 바다에 담겨두면 향기가 오르고 “약”에 쓰여오고 진상, 조공품이라 하여 부른 곳이다. 이 두곳을 합하여 덕암이라 부른다. - 불교유적 : 德岩埋香碑(바위에 陰刻되어 있음), 가로,세로,높이 각 4m정도의 방형바우의 상단일부 평평한 곳에 음각되어 있었고, 靈岩 埋香碑처럼 좌측에서 우측으로 비문을 적고 있다.
◆ 용산면 덕암리 원등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12㎞,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의 거리에 있다.- 남상천하류의 기름진 평야지에 위치한 농촌으로 동으로는 과거 해상교통의 요지인 三十浦와 접하고 북으로는 대촌인 계산마을과 인접하고 남으로는 해안을 낀 풍길, 남포의 해산물 생산지를 끼고 있다. - 인구현황 : 42세대 83명(남 35, 여 48) - 이장 : 김부환 (010-6690-6557) 마을의 형국은 연못의 연꽃형국이라 전해오며 옛날 형국명에 연유하여 근래 마을 앞에 휴게정을 건립하여 연파정이라 명명하고 있다. - 1945년 광복의 기쁨으로 청년들이 활성극단을 조직 춘향전, 심청전 등 상영 수입금으로 지역사회에 협찬하기도 하였다.
◆ 용산면 풍길리 풍길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21㎞ 거리,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5㎞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인구현황 : 53세대 97명(남 44, 여 53) - 이장 : 이장흠 (011-605-5082) 구전에 의하면 약 1600년전에 용시동에 양지터와 음지터가 있었는데 양지쪽은 부유하게 살았고, 음지쪽은 빈촌으로 살았으며 농사는 원등, 기들 농사를 지었다 하며 용시동은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서 산이 갈라지고 쏘가 생기고 해서 폐촌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후 진주정씨와 김해김씨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데 노승이 지나면서 마을 이름을 풍길이라고 하여 오늘까지 전한다 - 안개봉 : 농어두와 풍길 중간지점에 있는 嶝으로 년중 안개가 많이 끼며 옛날 신선이 안개속에서 놀았다 한다.- 2007년 농촌종합개발사업대상지로 선정된 마을이기도 하다.
◆ 용산면 풍길리 두암마을
- 용산면사무소로 부터 동쪽으로 5㎞, 장흥읍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6㎞지점에 우치하여 북으로는 안양면 해창, 동으로는 안양면 장재도를 바라본 득량만, 남으로는 남포마을 서쪽으로는 원풍길리에 접하고 있다.- 1967년 풍길 간척지가 완공됨으로 국토건설단을 비롯 각처에서 모여 성촌이 된 신풍과 고대부터 취락이 형성된 두암마을과 합하여 1986년도에 행정리로서 구분되었다.- 인구현황 : 36세대 66명(남 32, 여 34) - 이장 : 고연두 (011-9072-6590) 한양에 살던 조계룡의 12대조가 기묘사화시 경기도 광주로 피신하다 1500년중엽 삼남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뒷산의 형국이 노승처럼 생긴 것을 보고 불복이 있을 것이라 하여 정착한 후 김해김씨, 평산신씨, 현풍정씨 등이 입주하여 현재에 이름 - 앞으로는 비옥한 간척지, 뒤로는 두암저수지와 위로는 동학혁명때 신호를 주고 받았다는 노승봉(339m)의 봉화대가 있다.
◆ 용산면 상발리 상발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23㎞,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9.9㎞의 거리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관산읍, 서쪽으로는 노승봉(339m) 넘어 상금리, 북은 풍길이다.- 인구현황 : 60세대 133명(남 59, 여 74) - 이장 : 김성룡 (010-4622-6506) 마 안산은 87m이나 뒤에 노승봉이 솟아 있고 능선으로 용산과 관산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예부터 구전으로 노승밑에 명당이 있다 하여 중 바랑을 마을 터라 하고 발산이라 불렀다 - 자라섬 : 무인도로 상발 동남쪽 1㎞지점에 있는 섬으로 옛날 삼신 할머니가 치마에 흙을 담아 노두를 놓고 고흥을 건너가려다 치마에 구멍이 뚫려 흙이 쏟아진것이 섬이 되었다는 구전이 있다.- 2007년 농촌종합개발사업대상지로 확정된 곳 중의 하나로 5개년간 개발에 들어간다.
◆ 용산면 상발리 남포마을
-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23㎞,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9㎞의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은 상발리, 북족은 안양 사촌리, 서쪽으로는 풍길리가 있다.- 인구현황 : 59세대 107명(남 45, 여 62) - 이장 : 김광남 (016-605-6515) 마을 좌우로는 성처럼 싸고 있고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좌측 성벽처럼 있는 도투거지산이 상발산 1, 2번지 산의 형국은 소(우)가 업드려 있는 형국으로 산윗쪽이 남산개라 하여 남산포로 불리다 군내에서는 수심이 어느곳보다 깊고 위치가 좋아 왜정시대에 군사 요충지(군량출하)로 사용하려고 모든 준비(도로개설 등)를 해두고 포구로 명명 남포라고 불리어 왔다. - 2007년도 농촌종합개발사업대상지로 선정되어 5년동안 개발에 역점을 둔다.- 영화 '축제'촬영지로도 유명하며, 소등섬 일출 또한 장관으로 매년 1월 1일이면 1,500여명이 일출을 보러 온다(마을부녀회에서 떡국, 음료 등 제공)- 또한 자연산 석화구이로 유명하여 겨울철이면 찾는 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