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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작자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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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스페인 |
분야 | 소설 |
해설자 | 안영옥(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
중세 서사시는 ‘떠돌이 가수’라고 부르는 이야기꾼들의 일인 바, 그들이 하는 일을 ‘떠돌이 가수들의 일’이라는 문학의 한 장르로 정리해, 승려들의 문학 작업인 ‘승려들의 일’과 함께, 중세 문학을 이루는 두 개의 큰 맥으로 유럽 문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중세 지식의 보고는 수도원이었고 그 수도원의 임자는 승려였는데, 이들의 문학 작업에 견주어 ‘떠돌이 가수들의 일’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들이 유럽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참으로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재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로서, 이 마을 저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락과 정보를 제공했던 그들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문학을 글이 아닌 입으로 전한 가수이자 연극배우에 앵커며 아나운서였다. 음악을 반주로 곁들이기도 하고, 목소리를 바꿔 가며 모든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혼자 소화하거나, 간단한 분장으로 청중들에게 현실감 있게 상황을 표현한, 이 탁월한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는 중세 문학의 꽃이다. 노래의 대가로 청중에게 목을 축일 술 한 잔이나 요깃거리를 살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을 요구하는 접시를 돌리고, 다음 날 듣게 될 남은 이야기에 거는 청중들의 기대가 그 접시의 무게를 결정한다.
이들은 축제 때는 물론이요, 성지순례의 기나긴 여정이나 궁정에서, 그리고 영주나 귀족들의 성에서도 노래를 했다. 아주 다양한 계층의 청중을 앞에 놓고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그들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던 것인데, 상식상 ≪엘시드의 노래≫와 같은 분량의 작품이 단 한 번의 암송으로 끝나기는 어려웠을 듯싶다. 중세 서사시 연구에 따르면 한 번에 들려줄 수 있는 양은 보통 1200에서 1300시구라고 한다. ≪엘시드의 노래≫가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1부 <엘시드의 추방>은 유실된 시작 부분의 약 50시구를 제하면 1086시구로 되어 있고, 2부 <엘시드 딸들의 결혼>은 1190시구이며, 마지막 <코르페스의 모욕>은 약 50시구가 누락되어 있는 것을 제하면 1472시구다. 청중의 집중력이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을 50분으로 잡으면, 분당 12 또는 15시구를 들려준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야기꾼들이 중세 무용 찬가를 모두 암기해서 들려주었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이 있다. 나중에 작품 끝에 보충된 18시구를 제하면, ≪엘시드의 노래≫는 총 3730시구로 되어 있는데 이를 다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문 직업인이라고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요구되는 직업이 배우다. 사실 영국이나 프랑스 극단의 배우들 중 셰익스피어나 라신의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경우, ≪롤랑의 노래≫나 ≪엘시드의 노래≫의 내용보다 더 많은 양을 외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물론 관객 앞에서 문학적으로 완벽하게 기분을 살려 가며 그 시구들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중세의 가수들은 이들보다 훨씬 자유로웠다는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정해진 텍스트가 없다 보니 그 텍스트에 충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임기응변으로 메울 수가 있었다. 무용 찬가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 또는 전설상의 내용을 이야기로 꾸민 것이기 때문에 청중들 중 상당수가 줄거리를 알고 있었다. ≪일리아드≫를 듣기 위해 모였던 그리스인들은 트로이가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롤랑의 노래≫를 듣기 위해 모인 프랑스인들은 가넬롱이 배반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내용을 왜 듣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가수들은 누구보다 그런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잘 알았고, 그래서 전체 이야기를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구성해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으며, 오락물이 다양하지 않던 시대에 이야기꾼의 등장은 축제였다는 사실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가수들은 모르는 내용을 전파하는 역할도 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세세하고 재미있게 구성해 들려주었고, 외운 부분을 잊어버릴 경우에는 앞서 사용한 표현을 반복하거나, “눈에서 눈물이 난다, 눈으로 본다” 같은 중복 강조법1)을 애용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이나 신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아킬레스는 “가벼운 발을 가진 자”이고 헤라는 “어린 암소의 눈을 가진 여신”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이러한 표현은 카드에서 어디에나 두루 쓰이는 으뜸 패와 같다. 프랑스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서는 이런 표현이 과할 정도로 많이 나오며, 스페인의 ≪엘시드의 노래≫에서도 적지 않다. 이는 전통 서사시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주인공을 수식하는 표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엘시드는 “좋은 때에 칼을 찬 시드”이고 “좋은 때에 태어난 정복자 시드”이며 “행운을 타고난 시드”다. 이러한 표현은 근본적으로 떠돌이 가수들이 만들어 낸, 장식 역할을 하는 보편화된 중세 문체의 특징이다. 이것이 이후 승려들이 주도한 텍스트 문학으로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임기응변용이기는 했지만 그 표현이 갖는 풍요로움과 운율미가 큰 몫을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보편화된 중세 문체란, 중세 유럽 서사시 어디에서나 사용되는 공통의 표현으로, 이는 모방이나 표절이 아니다.
떠돌이 가수들은 직접 청중과 대면하고 있다. 어느 순간에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자신이 흥분해야 할지, 어떤 부분에서 느긋하게 끌면서 청중의 호기심을 부추겨야 할지 너무나 잘 안다. 이야기가 끝나 갈 때 청중에게 돌리는 접시에 더 많은 돈이 모이게 하려면, 그들을 정말 즐겁게 해 주든지 혹은 감정을 고조시켜 다음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 놓든지 해야 한다.
≪엘시드의 노래≫에 대한 분명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13세기 동안 떠돌이 가수들이 그들의 기억력을 믿고 입에서 입으로, 약간의 내용상의 변경이나 가감을 해 가면서 유포된 것이라는데, 그런 구두상의 내용들이 글이 되어 나타난 것은 14세기다. 이 원고는 현재 스페인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원고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페르 아바트라는 작자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으며, 그때는 이 원고가 가수들에 의해 불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읽혔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페르 아바트가 1345년 5월에 이 책을 썼다.”(복사했다는 의미)
이 글 아래로 다음의 글이 아주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혀 있다.
“이 로망스를 읽어 줬으니,
우리에게 술이나 한잔 주시오.
돈이 없다면
저기에 선물이라도 주시면
우리에게 좋은 보답이 될 거요.”2)
내용인즉 목을 달래고 쉴 수 있도록 자기들이 읽어 준 것에 대해 술로 보상해 달라는 것이다. 또한 청중들에게 돈을 요구하는데 돈이 없으면 갖고 있던 물건으로 선물을 달라 한다.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면 읽어 주는 자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럿임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쉬면 다른 사람이 연이어 그다음을 읽어 주거나, 아니면 중세 스페인의 종교극이나 13세기 학생들이 주도했던 라틴 비극을 보면 그러하듯이, 해설을 하는 사람과 대사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엘시드의 노래 (El Cantar de Mío Cid)≫는 낡은 원고다. 14세기 페르 아바트는 떠돌이 가수들이 청중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복사한 여러 원고들 중 하나를 맡아 복사했던 전사자고, 유일하게 그의 작품만이 살아남아 현재까지 내려왔다. 원래 이 원고는 피달 후작의 소유였는데 1960년에 후안 마치 재단이 사들인 뒤 마드리드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아주 귀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이 14세기 복사본보다 먼저 복사가 된 12세기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와 비교해 보면, 낡고 초라하며 오류도 많다. 복사한 목적이 보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수들이 낭독할 때 참고로 하기 위해 베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면에서 소홀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페인 어문학자들은 페르 아바트가 전사자라면 이전의 원고가 있었으리라는 데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한다. 하지만 원본이 어떠한 것이며 어디에서 나왔고 구체적인 작품 연대가 언제인가를 밝히기에는 아직도 가정과 유동적인 자료에 근거해야만 한다. ≪엘시드의 노래≫ 작품 자체에 대한 연구와, 주인공 엘시드의 실제 삶과 그에 대해 써 놓은 1110년의 라틴어판 연대기를 통해 유추한 이론 중, 엘시드 무훈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불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론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다시 말해 카스티야의 영웅 엘시드가 무어인이나 기독교도들과 어떻게 싸웠고 전투 중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소식을 지금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하는 것처럼 떠돌이 가수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보 보고용 기사’로 전해 준 것이다. 정복자 하이메 1세가 자신의 마요르카 전투와 발렌시아 전투에 대해 읊은 카탈루냐의 무용 찬가를 연대기에 모아 놓았던 것도 이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가정과 추측의 결과 ≪엘시드의 노래≫는 1120년경에 구두로 만들어졌고 이후 1140년과 1160년 사이에 다양한 면에서 개작이 이루어졌으며, 페르 아바트가 복사한 원본은 내용이 완전히 고착된 1207년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엘시드, 본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가 살아 있었던 때이거나 그의 사후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통 시처럼 탄생되어 구두로 전파되다가, 12세기 중순 이후에 문학에 소양이 있고 당시 스페인에 널리 유포된 프랑스 서사시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인들의 손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 본다. 보관되어 온 ≪엘시드의 노래≫에 담긴 내용을 보면 법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아킬레스는 호메로스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롤랑은 자신의 업적을 노래한 ≪롤랑의 노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시드의 노래≫는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어법 및 그가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11세기 말 스페인 역사의 한순간을 서사시로 옮겨 놓았다고 할 정도로 주인공과 작품 사이의 근접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역사서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꾸며 낸 시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아주 독창적이면서 유일하게 그 두 가지를 조화롭게 아우른 작품이다. ≪엘시드의 노래≫의 줄거리를 이루는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은 이 서사시가 존재할 때 일어났던 일이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엘시드의 노래≫의 지리적,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영웅시, 서사시, 무용 찬가 등으로 불리는 작품이 그 작품을 탄생시킨 사건들이 현재성을 가질 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원한다면 바로 ≪엘시드의 노래≫를 그 예로 내놓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작가는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라는 실제 인물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될 만한 부분은 모두 생략했다. 작가는 이로써 보통의 다른 무용 찬가들과 의식적으로 차별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무용 찬가들은 주인공 영웅의 무훈들을 낱낱이 아뢰고 청중들이 알고 있는 내용까지 밝히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엘시드의 노래≫의 작가는 엘시드 생애에서 1081년과 109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만을 취해 찬가로 만들었다.
작품은 엘시드의 불운과 비참함으로 시작한다. 알폰소 왕이 부당하게 그를 추방한 것이다. 엘시드가 산초 왕을 모실 때 알폰소 왕과는 싸우기도 했지만, 산초 왕이 죽고 난 후 알폰소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청중은 엘시드가 추방되기 전의 무훈들을 이미 알고 있다. 알폰소 왕을 이겼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알폰소 왕이 엘시드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왕국 밖으로 그를 내쫓았다. 엘시드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따르는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그는 “빵을 얻기 위해(먹고살기 위해)” 무어인들과 또는 기독교인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승리로 극복되고, 비참함에서 힘 있는 자로 나아가면서 발렌시아를 정복해 그의 영광은 극에 다다른다. 군사상의 영광을 얻고 왕과 다시 화해를 하지만 이제 그 불행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가족에게로 떨어진다. 카리온 왕자들로부터 딸들이 모욕을 당한 것이다. 이런 설정을 통해 작가는 엘시드의 군사로서의 용맹과 군주에 대한 신하로서의 충성 위에 부인과 딸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고자 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톨레도 의회와 결투, 그리고 딸들을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과 결혼시킴으로써” 그의 명예는 더욱더 높아지게 된다. 그러니 “스페인의 왕들은 모두 친척”인 셈이다.
≪엘시드의 노래≫의 역사성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이론들이 많았고 지금까지도 이 작품이 ‘서사시’인지 ‘운문으로 쓴 연대기’인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가 누린 만큼의 창작의 자유를 갖지 못했다. 옥스퍼드에 소장되어 온 ≪롤랑의 노래≫는 11세기 말 프랑스 북부 지역과 영국 지역에 유포되었던 원고로, 론세스바예스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나 연대와 비교해 봤을 때 거리로는 800킬로미터, 시간으로는 약 300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그들은 스페인을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정확하지도 않은 사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청중들은 작품에 묘사된 비현실적인 이야기나 황당무계한 내용들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엘시드의 노래≫는 영웅이 죽고 난 후 약 1세기 조금 더 된 시점에 유포되었고, 그가 살았던 바로 그 지역에서 떠돌이 가수들이 그의 업적을 노래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가 청중에게 관심과 존경을 불러일으키려면 지형이나 역사적 사건을 조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무어인들을 작품에서 종종 “이교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들은 에스페르베리스, 에스크레미스, 말쿠드, 말두이트같이 이름도 괴상한 우상을 섬긴다. 그런데 사실 ≪롤랑의 노래≫를 들었던 청중들은 무어인들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조차 몰랐다. 반면 ≪엘시드의 노래≫에 등장하는, 영웅의 친구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했던 무어인들은 11∼13세기에 걸쳐 스페인 사람들이 보았던 실제 무어인들로, 역사상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세프, 파리스, 갈베, 아벵갈본이다. ≪롤랑의 노래≫는 스페인의 사라고사 지역을 산악 지대로 묘사하고 있는데, 가수들이 이처럼 엉터리 정보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스페인 청중들은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그렇다고 ≪엘시드의 노래≫가 역사적으로나 지형적으로 사실에만 근거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작품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일생을 변형시키거나 환상적으로 만들지 않는 범위 안에서 특정 순간을 취해 그의 무용을 칭송하는 노래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정보 보고용 기사’였던 것을 12세기, 여러 명의 시인들이 청중에게 감흥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첨가하면서 스페인 국민의 역사로 만들어 나갔다. 두 번에 걸친 로드리고의 추방을 한 번으로 정리하고 바르셀로나 백작이 두 번 포로가 된 것을 한 번으로 줄이고 유대인과 모래 궤짝 이야기는 창작해 냈다. 카리온 왕자들의 비겁함을 보여 주는 사자 건과 코르페스 숲에서의 모욕도 시인들이 만들어 낸 부분이다. 12세기에 글을 읽을 줄 알고 라틴어를 알았던 사람들은 엘시드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이미 다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용 찬가는 어디까지나 서민, 국민을 위한 이야기다. 따라서 그들은 확실한 것과 꾸며 낸 것을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역사적인 사실에 아름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도 용납한다. 그들에게 과거는 단지 정보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본보기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안내자로서, 또는 지침이나 자극제로서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다. 역사 대백과사전 중 1254년에 쓴 ≪역사의 거울≫이 있다. 역사는 과거 옛사람들의 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기 위한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보기 위한 거울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