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풀의 대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년경?~407년)'는 뛰어난 설교자이자 해설가로,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친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347년(?) 안티오키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일찍이 수사학을 배워 변호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생각을 바꾸어 372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안티오키아의 학교에 들어가서 성서 주석을 배우고 수행한 후 그곳을 떠나 4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 후 2년 동안 홀로 동굴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독파하여 마침내 성경의 모든 내용을 암기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뒤 그는 부제 서품을 받아 5년 동안 부제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다가 386년에 드디어 사제품을 받게 되는데, 당시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풀의 총대주교였던 ‘넥타리우스’의 뒤를 이어 398년에 동로마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로부터 후임 총대주교로 선임되자 그는 에페수스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 팔며 돈벌이하던 주교 6명을 면직시키고, 세속적인 욕심에 가득 차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부잣집만 골라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수도자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보내고, 병원과 학교를 늘렸으며,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등 교회 개혁에 발 벗고 나서게 됩니다. 그는 이어 평신도들도 복음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유했으며 성서 읽기에 전념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자정 활동에 대하여 당시 동로마 황후였던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는 그가 자신의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황후는 크리소스토모를 파면시키기 위해 교회 안에 있던 그의 정적들과 몇몇 험담가와 손잡고 403년부터 끊임없이 총대주교의 파면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중에는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의 수장인 ‘키릴로스’도 있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아내의 뜻에 따라 ‘느티나무골 주교회의’에 압력을 넣어 그를 실각시켜 추방하자 그의 추방에 반대하는 콘스탄티노풀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파괴하는 폭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때는 서기 404년 6월 20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되었으나 여전히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무리가 황제를 꼬드겨 그를 다시 흑해 동쪽 해안에 있는 ‘피티우스’라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고, 407년 9월 14일 그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 향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선종한 뒤 5년 후인 412년에 로마의 주교인 교황 ‘인노첸시오 1세’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438년 그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풀 사도 교회에 안치했습니다. 1626년 5월 1일 그의 유해는 다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남긴 저서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중 총 6권으로 된 「사제직」은 그의 대표 저서로, 우아한 문장과 숭고한 신학적 사상은 오늘날까지 훌륭한 고전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그 외 수도 생활에 관한 책인 「테오도로에게 권고」와 「진정한 참회」 등이 있으며 236편의 서간과 700여 편에 이르는 신약과 구약에 관한 설교집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금구(金口, 황금 입)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뛰어난 설교와 해설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형재도 웅변가와 연설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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