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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는 세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1147년의 연대기에 처음 언급된 이래 러시아 역사의 주요무대로서 자리잡아왔으며, 또한 600년 이상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구심이 되어왔다.
오늘날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정치뿐만 아니라 인구, 공업 생산성, 문화, 과학, 교육 등의 면에서도 중심적인 도시이다. 1991년 8월의 쿠데타에 의해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뒤에 소련의 공화국들이 이룬 독립국가연합에서도 많은 행정기능의 중추역할을 계속 맡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서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동쪽으로 640km, 폴란드 국경에서 960km 떨어져 있다.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모스크바 환상도로가 대략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도로 너머의 지역은 대부분이 산림-공원 지대, 즉 녹지대로 지정되어 도시개발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광활한 유럽권 러시아 평원의 가운데에서, 오카 강의 지류인 모스크바 강 유역에 있는 이 도시는 모스크바 강과 그 지류들이 이루는 드넓으면서 극히 지대가 낮은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심장부에는 모스크바 시와 그 주변지역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 주가 있다
모스크바는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서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겨울이 길고 봄은 상대적으로 짧으며 4월말부터는 기온이 크게 올라간다. 여름은 따뜻하며 그중 평균기온이 18℃인 7월이 가장 따뜻한 달이지만, 역사상 최고 기온이었던 37℃는 8월에 기록된 것이다. 여름에는 비가 자주 오며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이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가을도 봄과 마찬가지로 짧으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1950년대말까지 대기오염의 정도는 계속해서 심해졌다. 스모그에 뒤덮이기 일쑤였고 이산화황의 농도 또한 높아졌다. 이에 유해 가스 방출을 규제하자는 대규모 캠페인이 벌어졌고 주연료로 석탄 대신 천연 가스를 쓰도록 조치함으로써 이 캠페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모스크바의 지도를 펼쳐보면 대략 삼각 형태를 이루는 크렘린과 그곳 주변의 직사각형 모양의 키타이고로트 및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심원들과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선들이 동심원들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모스크바 강이 시가지 사이를 북서-남서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이런 동심원과 방사상 구조는 이 시가 성장해온 역사적 단계를 나타내며 오늘날까지 뚜렷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요새의 성벽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든 불바르노에 환상도로와 사도보예 환상도로, 그리고 더 큰 원을 그리며 있는 모스크바 소(小)환상철도, 모스크바 환상도로 등은 이 시가 계속해서 확대되어왔음을 보여준다. 1960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모스크바 순환도로가 이 시의 행정적 경계선을 이루었으나 그후로 도로 건너편에 있던 몇몇 대규모 그린벨트 지역이 이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요새화된 크렘린은 이 시의 중심이자 역사적 구심점이며 러시아와 소련의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크렘린의 총안( 원거리 무기로 성 밖의 적을 저격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창(窓)이나 구멍) 이 뚫린 붉은 벽돌벽과 20개의 탑은 15세기말에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붉은광장'으로 이어지는 스파스스카야(구세주) 탑은 주요탑 중의 하나로, 1491년 페트로 솔라리오가 건축했는데 그는 크렘린의 주요탑 대부분을 설계했다. 붉은광장 앞에 있는 또 하나의 탑인 상트니콜스카야 탑은 1491년에 세워졌으며 1806년에 재건되었다. 또다른 2개의 주요관문탑은 서쪽 벽에 있다.
크렘린 성벽 안에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와 궁전들이 있다. 대성당 광장(소보르나냐플로시차트) 주변에는 3개의 웅장한 대성당이 서 있는데, 이들은 15세기말부터 16세기초에 절정을 이루었던 러시아 교회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중 흰 돌로 지은 성모승천 대성당(우스펜스키소보르)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1475~79년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광장 건너편에 있는 성모영보 대성당(블라고베시첸스키소보르)은 1484~89년 프스코프 출신의 장인들이 만들었으며, 1547년 불에 탔으나 1562~64년 재건되었다. 1505~08년 재건된 대천사 대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되기 전까지 많은 모스크바의 공후(公侯)와 러시아 황제들의 영묘가 모셔졌던 곳이다.
광장 바로 바깥쪽에는 백색의 화려한 이반 3세 종탑이 높이 솟아 있다. 이 탑은 16세기에 건설되었으나 1812년 훼손되어 몇 년 뒤 복구되었다. 종탑 아래에는 1733~35년에 주조된 거대한 차르 종(차르 콜로콜)이 있는데 한번도 울린 적이 없다. 종 가까이에 1586년에 만든 차르 대포(차르푸슈카)가 있고 그 옆에는 17세기 중엽에 지은 12사도 대성당(소보르드베나트차티아포스톨로프)과 총대주교 관저가 있다. 대성당 광장 서쪽에는 수세기에 걸쳐 지어진 궁전들이 있다. 파세츠 궁전(그라노비타야팔라타)은 1487~91년, 그뒤에 있는 테렘 궁전은 1635~36년에 세워졌다.
테렘 궁전 안에는 나사로 부활교회(보스크레세니예라자랴) 를 비롯해 이 궁전이 세워지기 이전인 1393년 무렵부터 지어진 오래된 교회들이 있다. 파세츠 궁전과 테렘 궁전 모두 1838~49년 황실 거처로 지은 크렘린 대(大)궁전의 일부가 되었다. 1844~51년에 세운 무기 궁전(오루제이나야팔라타)은 크렘린 대궁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은 차르 시대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무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크렘린의 북동쪽 벽을 따라 무기고(1702~36), 옛 의사당 건물(1776~88), 적군(赤軍) 사관학교(1932~34), 의회(1960~61)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모스크바 시에서 벌이는 모든 의식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크라스나야플로스차트)은 크렘린 동쪽 벽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레닌 영묘는 벽 바로 밑에 있다. 붉은광장 남단에 있는 대도(代禱) 교회(포크로프스키소보르)는 복자 성바실리우스 대성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독특하고 웅장한 건축양식을 보이는 이 대성당은 이반 4세가 카잔과 아스트라한에 있던 타타르족(몽골족)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1554~60년에 세웠다.
붉은광장을 사이에 두고 크렘린 맞은편에 국영백화점(GUM)이 있고 광장 북단에는 국립역사박물관(1875~83)이 있다. 키타이고로트에는 오래된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특히 유명한 것들로는 니키트니키에 있는 삼위일체 교회(1628~34), 수태한 상트안나 교회(15세기), 예수 공현(公現) 대성당(1693~96) 등이 꼽힌다. 러시아 호텔 북면을 끼고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대귀족들이 살던 16세기의 저택, 16세기 옛 영국 대사관, 17세기의 성호 수도원을 비롯한 일련의 건물들이 보존되어 늘어서 있다.
사도보예 환상도로 안의 모스크바 중심부에는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 시의 모든 성장단계를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있다. 도심에 흩어져 있는 17세기 모스크바 바로크 시대의 훌륭한 유산들 가운데 1670~80년대에 지은 쿨리슈키의 모든 성인 대성당과 푸틴키의 예수성탄 교회(1649~52)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뒤 고전주의 시대에는 원주 홀이 딸린 옛 귀족의회 건물과 옛 대학교가 세워졌는데 이 두 건축물은 1780년대에 카자코프가 만들었다.
그밖에도 레닌 국립도서관의 일부로 쓰이는 우아한 파슈코프 극장(1785~86), 동양예술박물관의 전신인 루닌 하우스(1818~23), 한때 전시장으로 쓰였던 마네슈(승마학교, 1817), 웅장한 볼쇼이 극장(1821~24) 등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는 옛 러시아 양식의 재현과 함께 국립 트레티아코프 미술관(1906)과 야로슬라블 기차역(1902~04) 등이 세워졌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거리들이 넓혀지고 도심의 오래된 건물들을 헐은 자리에 대규모 사무실이나 아파트, 정부부서건물, 국내외 기구·조직의 본부, 호텔, 넓은 상점, 주요 문화 센터 등이 들어섰다.
모스크바 주민 가운데는 러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소련에 속했던 100개 이상의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들도 이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소수민족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은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타타르족 등이며 그밖의 소수민족으로는 카프카스 산맥에서 온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중앙 아시아 지역의 우즈베크인·투르크멘인·카자크인 등이 있다.
모스크바는 수도사들이 기록한 1147년도 연대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무역 중심지가 크렘린 동쪽지역에 들어서는 등 이 시는 곧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주요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러시아 도시와 마찬가지로 1236~40년 몽골의 대(大)침략 당시 함락당해 불탔으며, 공들은 몽골족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수모를 겪었다. 1293년에 몽골족에게 다시 약탈당했으나 곧 복구되었다. 무역·수공업이 발달하고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오래된 중심지들을 앞지르게 되었다. 또 하계와 연수육로들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았으므로 유럽권 러시아 전역에 무역로를 틀 수 있었다.
시 동쪽지역은 러시아 북쪽에 비해 토질이 좋아서 농업이 발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유한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1326년 러시아 저요회의 대교정(大敎正)이 관구를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김으로써 이 시의 권위는 매우 높아졌다. 그뒤로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왔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들에게 함락되자 제3의 로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국은 곧 블라디미르 공국을 합병했고 모스크바의 공들은 점차 주위에 있는 다른 러시아 공국들에게로 지배권을 넓혀갔다.
또한 모스크바는 몽골의 영향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진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모스크바와 몽골 간에 팽팽하게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1378년에 몽골족이 먼저 공격해왔으나 모스크바의 군대가 승리했으며, 1380년에 드미트리 공은 몽골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367년 크렘린을 확대·강화했으나 1382년 전열을 재정비하고 침략해온 몽골족을 막아내지는 못하여 결국 함락·약탈당했다. 그러나 1408년 몽골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이를 격퇴시켰다.
모스크바는 주위 공국들을 계속 흡수하여 크기나 중요도 면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1326년 크렘린 내부에 최초의 석조 건물인 성모승천 대성당이 세워졌다. 공후와 대귀족들의 저택·수도원·교회 등도 들어섰다. 성벽 밖의 크렘린 동쪽지역에 형성된 상업·수공업 구역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키타이고로트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 특히 1478년에 노브고로트를 합병한 후 모스크바는 통일된 러시아의 중심지로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대공 이반3세의 통치기간중에 크렘린의 재확장, 성모승천 대성당의 재건, 아름다운 성모영보 대성당의 건축, 대천사 대성당의 재건, 파세츠 궁전, 이반 3세 종탑 등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 영역이 계속 커짐에 따라 성벽 또한 더 바깥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크렘린과 키타이고로트를 둘러싼 반원형 지역이 형성되었고, 이 지역은 벨리고로트('하얀 도시'라는 뜻)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벽을 다시 쌓기는 했으나 재난과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1547년 2차례의 화재로 대부분의 지역이 잿더미로 변했다. 16세기 중엽 뇌제 이반 4세는 타타르족(몽골족)들의 카잔 한국(1552)과 아스트라한 한국(1556)을 정복했으나 1571년 크림 반도에서 온 타타르족에게 점령당하여 크렘린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태워졌다. 이당시의 연대기에는 20만 주민 가운데 3만 명만이 이 화재에서 살아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1년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이 더 강도가 높은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스크바의 완강한 대항에 밀려 패배했다.
이 싸움에서는 벨리고로트를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새 성벽이 큰 몫을 했다. 벨리고로트 너머로 확장된 시 영역은 처음에는 스코로돔이라고 불렸으나 후에 흙으로 된 도시라는 뜻의 젬랴노이고로트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정세가 크게 안정되면서 상업·수공업이 번창했고 특정업종이 전문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역들이 생겨났는데, 이 구역들은 오늘날 거리나 구역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차르 시대에는 황실과 황실 소속 귀족들이 부유한 상인들을 보호·후원했으며 점차 대귀족들이 키타이고로트를 장악하게 되었고 수공업자 및 상인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그결과 크렘린에서는 정치적·종교적 기능만이 행해지고 상업활동은 크렘린과 키타이고로트 사이의 붉은광장에 있는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에는 다양한 물건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점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붉은'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크라스나야라는 단어에는 '아름다운'이라는 뜻도 있는데 오늘날 붉은광장은 원래 이 뜻으로 지어졌던 이름이다.
서유럽(특히 영국과 네덜란드), 중앙 아시아, 자카프카지예, 페르시아, 흑해 연안 등의 지역들과 매우 활발하게 교역을 행했으며 주요거래품목은 모피였다. 외국 상인들은 네메츠카야슬로보다('독일인의 구역'이라는 뜻)에 거주했으며, 서적 교류가 늘어나고 1553년 인쇄소가 생김으로써 문화가 발전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 혼란시대'를 맞아 이 도시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다름없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보리스 고두노프의 통치기간중 1601~1603년 혼란시대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였다.
1605~12년 모스크바·크렘린 곳곳에서 폴란드인들과의 소규모 충돌이 자주 발생했으나 1612년 10월 폴란드인들이 항복하여 분쟁은 마감되었다.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 황제의 즉위로 로마노프 왕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평화가 다시 찾아왔고 경제도 한층 발전했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으므로 폭동과 소요가 잦았다. 장인·노동자·상인들도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남부에서 스텐카 라진이 이끈 대반란(1667~71)의 영향으로 모스크바도 동요하자 1671년 이 도시에서 라진을 처형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소요가 일어나면 러시아의 전통적 민병대 스트렐치(Streltsy)가 진압에 나섰는데 대제 표트르 1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698년에 오히려 이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대대적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빈번한 소요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꽃을 피웠다.
1687년 키타이고로트에 있는 자이코노스스파스키 수도원에 부속으로 러시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슬라브어·그리스어·라틴어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1701년 표트르 대제는 수학·항해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70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1703년 표트르 1세는 핀란드 만 연안에 상테페테부르크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712년에 '서구적'이면서 진취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새 도시로 수도를 옮겼다.
이에 귀족들뿐만 아니라 상인·장인들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갔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인구 및 건축물 증가 기세가 잠시 꺾였다. 그러나 표트르 1세가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자 새 공장들을 세우고 기업가들도 뒤따라 모스크바에 투자를 하자, 표트르 1세의 재위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수도의 지위를 잃음으로써 입은 손실을 만회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도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1755년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대학교(지금의 모스크바 M.V. 로모노소프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786년 대학교 내에 의학부가 신설되었다. 1737, 1748, 1752년에 발생한 화재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 자리에 기아코모 쿠아렝기, 바실리 바제노프, 마트베이 카자코프, 바실리 스트소프 등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훌륭한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다. 한편 공업이 발전하여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시내에 300여 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그중 1/2이상이 직물공장이었다. 1811년에는 인구가 27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그해 9월 7일 러시아 최고사령관 M.I. 쿠투조프는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길목인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에 맞서서 15시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 모스크바에서 군대와 시민들을 철수시켰다.
프랑스군은 1주일 뒤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화재가 발생하여 시가지 건물들의 2/3 이상이 파괴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유격대들이 계속해서 소규모 전투를 걸어오고 식량과 거처할 곳이 부족해지자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0월 19일 군대를 철수하여 비참한 귀로에 올랐다. 1813년 모스크바 시 건설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도심을 부분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등 대규모 재건계획을 세우고 이에 착수했다.
공업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으며 19세기말까지 계속 성장곡선을 그렸다. 1837년에 모스크바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다. 18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의 철도 개통과 함께 철도시대가 시작되고 1861년 농노 해방이 단행되자 노동인구의 유동이 현격하게 늘어났는데 특히 시골에서 이주해오는 농부들이 많아졌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철도 교통의 중추가 되었으며 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1890년대에는 중공업·금속가공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공장들이 많이 세워졌다. 1897~1915년에 인구가 2배로 늘어 198만 3,700명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에 공공단체나 부유한 개인들이 '옛 러시아' 양식과 현대양식을 골고루 흉내내어 화려한 건축물들을 세웠는데, 시청(후에 레닌 중앙박물관)·국립역사박물관·국영백화점 등이 대표적 건물들이다.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소요사태와 파업의 횟수가 늘어났으며 혁명을 꾀하는 많은 조직들이 결성되어 활동을 전개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모스크바에서 소규모 소요가 일어났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17년 모스크바 시에서 노동자 및 병사 대의원 평의회가 발족되었으나, 이 시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7일(구력 10. 25)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이 도시에서도 곧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관학교 소속 병력이 크렘린에서 얼마 동안 버텼으나 결국 11월 16일(구력 11. 3) 항복하여 볼셰비키 권력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1918년 3월에 레닌이 모스크바를 소련의 수도로 정하고 정부청사들을 옮김으로써 이 도시는 옛 지위를 다시 찾았다.
또한 1922년 12월 30일 공산당이 권력을 잡고 전(全)소련 연방 의회가 볼쇼이 극장에서 회의를 열어 소련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창설을 입법화함으로써 모스크바의 지위는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혁명 후 내란이 계속되었던 시기에는 소련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식량부족과 인구감소(1920년에 102만 7,300으로 감소), 공업 생산력 저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후 몇 년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이 정착되고 평화가 찾아오자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1928년 이래로 5개년 계획들이 진행되면서 공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모스크바의 공장들과 노동력은 소련 공업화의 발판이 되었다. 1926, 1939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1959년까지의 시 경계선 내의 인구 수는 또다시 2배로 늘어 202만 9,425명에서 418만 2,916명이 되었다. 투자는 공업부문에 우선적으로 행해졌고 주택건설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주택수는 늘지 않고 가구당 사람들의 수는 지나치게 많아져서 인구밀도가 극도로 높아졌고 생활수준은 전반적으로 낮았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사회구조를 완전히 개편하기 시작했다.
기업과 은행을 국영화하고 사유재산제를 폐지했으며, 교회재산을 압수하고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법으로 보장했다. 또한 공산당 1당 체제를 확립했으며 고도의 중앙집권을 이루어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을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1928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5개년 계획을 통하여 소련은 몇몇 경제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며 풍부한 원료·연료·동력자원 등을 활용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으며, 모스크바는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1년말 독일이 크렘린에서 40km도 채 안 떨어진 시 외곽까지 접근하자 공장과 정부기관들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해 10월 20일 독일군이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철수하지 않았던 시민들은 공중폭격을 당하면서도 전차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물을 설치하고 곳곳에 인원을 배치했다. 12월 6일 소련은 필사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독일군을 몰아내고 시를 수복했다. 종전 후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세계대전이 끝난 2년 뒤인 1947년에는 모스크바 시의 설립 800주년을 맞아 축하행사가 열렸다.
종전 후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아져서 주택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50년대에는 절정에 달했다. 1959년에는 사도보예 환상도로 안쪽의 인구밀도가 ㎢당 5만 1,000명을 넘어섰다. 흐루시초프의 집권 당시 대규모 건설사업이 이루어졌다.
대부분 단층이고 목재로 지어졌던 옛 주택들을 철거하고 크렘린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을 광범위하게 조성했다. 또한 도심 재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고층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1935년에도 대규모 개발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에 실시한 개발계획은 훨씬 규모가 컸으며, 이 계획에 따라 인접 위성도시들이 모스크바 시로 합병되었다. 한편 이 계획은 도시개발을 모스크바 환상도로 안쪽으로 제한했고 주거·공업 지역과 녹지대 등을 세심하게 배치했다. 이 계획의 시행으로 주택난을 해소하고 교통혼잡을 줄이며 도심의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데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이르자 원래 예상보다 시 성장이 초과되어 1980년대에 들어서 환상도로 바깥 부분까지 시가지를 확대하는 새 계획이 마련되었다.
심 산
상테페테부르크에서 항공기로 이동 ,모스크바 공항▼
모스크바 도심으로 이동▼
"현대차" 간판도 보인다.▼
기아차 광고▼
도심으로 진입,러시아 외무부 청사▼
우리의 명동과 같은 젊음의 거리 ,아르바트 거리▼
1831년 푸시켄이 거주했던 집▼
아침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하다.
푸쉬킨의 동상인듯.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장소 -본명은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최(Viktor Robertovich Tsoi), 예명은 초이 빅토르(Tsoi Viktor)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실행으로 소련 사회에 개혁 · 개방 분위기가 급격히 전개되자, 서방의 록 음악을 소개하여 유행시켰던 고려인 가수이다. 소련 록 음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고려인이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1962년 6월 21일에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Kzyl-Orda)에서 태어나서, 5년 뒤에 레닌그라드( 현 상트페체르부르그)로 이주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림과 조각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노래부르는 것을 즐겼다. 특히 여러 차례 당국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아마추어 록그룹을 조직하였으며, 1982년에는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록 음악이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카 정책이 시행되면서, 소련 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개방정책으로 인해 서구와 교류가 더 쉬워졌고, 당국의 간섭도 확연히 누그러졌다. 이 때 빅토르 최의 록 음악 활동은 절정에 이르러, 1988년부터 덴마크, 프랑스,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하였고, 1990년에는 일본도 방문하였다. 잦은해외 공연을 경험한 그는 소련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열정을 끊임없이 나타냈지만, 1990년 8월 15일에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Riga)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84년에 4인조 그룹의 구성원을 새로 바꾸고는 레닌그라드 록 축제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1985년에는 「밤」과 「이건 사랑이 아니지요」라는 곡을 발표하였는데, 1986년에 레닌그라드 록 축제에서 최고의 가사상을 받았다.
1987년에도 레닌그라드 록 축제에서 상을 받은 그는 「혈액형」이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이 앨범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분쟁에 관여한 소련 사회에 반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어서,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어서 1987년에는 영화 「바늘(이글라)」에도 출연하여 대중 속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이후 그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록 음악 공연을 펼치며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대조적인 사회상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였고, 프랑스에 머물며 앨범 「마지막 영웅」을 녹음하기도 하였다. 1990년에는 모스크바(Moskva) 공연을 시작으로 여름 내내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고서 라트비아 라가로 옮겨별장에서 새로운 곡을 만들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곡들은 사후에 「검은 앨범」이라는 이름으로 키노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빅토르 최는 변화를 바라는 소련의 젊은이들에게록 음악을 통해서 희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반전 메시지와 함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저항의식 등을 강조하여 소련 청년들의 마음을 크게 자극하였다. 때문에 지금도 러시아 젊은이들은 모스크바의 아르바트(Arbat) 거리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시내에 모여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담장을 지키고 있으며, 매년 8월 15일에는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열고 있다. 그가 부른 최고의 록 음악인 「혈액형」 앨범의 노래는 2010년에 번안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빅토르 최 추모의 벽(통곡의 벽)▼
푸쉬킨이 거주했던 집▼
★푸슈킨 -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며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1814년 <베스트니크 예브로피>에 운문편지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푸가초프 반란을 다룬 역사소설 <대위의 딸>과 그 반란을 역사적으로 검토한 <푸가초프 이야기> 등도 써냈다. 푸슈킨의 아버지는 유서 깊은 대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아브람 하니발의 손녀였다.
집안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푸슈킨의 외증조부는 아비시니아의 어린 군주로 콘스탄티노플에 노예로 팔렸다가 표트르 대제의 양자가 되어 그의 전투 동료로 활약했다고 한다. 푸슈킨은 외증조부의 이야기를 미완의 역사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 Arap Petra Velikogo〉(1837 출판)으로 옮겼다. 19세기초의 러시아 귀족가문에서 으레 그랬듯이 그의 부모도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여 푸슈킨과 그의 형제자매들은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기를 배웠다. 그들은 주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외할머니는 어린 푸슈킨에게 러시아어로 선조들의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한편 푸슈킨은 자유농노였던 늙은 유모 아리나 로디오노브나 야코블레바(〈예브게니 오네긴 Yevgeny Onegin〉에 타티야나의 유모로 형상화됨)로부터 러시아 민화를 들었으며, 여름이면 모스크바 근처의 할머니 영지에서 농부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홀로 시간을 보내는 조숙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종류의 책을 두루 섭렵했고 집으로 찾아오는 문필가들에게서 자극을 얻었다.
1811년 푸슈킨은 차르스코예셀로(나중에 푸슈킨으로 개칭됨)에 새로 생긴 귀족학교에 들어갔고, 재학중인 1814년 〈베스트니크 예브로피 Vestnik Evropy〉('유럽 통보')에 운문편지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초기에는 선배 낭만주의 시인인 K. N. 바튜슈코프와 V. A. 주코프스키, 그리고 파르니 자작을 비롯한 17, 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귀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최초의 원숙한 걸작으로 꼽히는 낭만주의 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yudmila〉(1820 출판)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시풍은 아리오스토와 볼테르의 설화시 형식을 빌린 것이지만, 러시아 민화를 사용해 고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삼았다.
알렉산드로 푸슈킨(1799~1837)
★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믿으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지나가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푸슈킨 동상 앞에서▼
푸시킨과 부인 나탈리아 곤자로바의 동상 앞에서 ▼
크레믈린 입구에 도착▼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