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평등, gender equality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어머니 오다이는, 미즈노 가문 출신으로, 본래 미즈노 가문은 마츠다이라 가문보다 힘이 약해서 오다이의 아버지는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버지인 마츠다이라 키요야스에게 인근에서 미녀로 알아주던 자기 아내이자 오다이의 어머니인 게요인(華陽院)을 빼앗겼는데, 후에 상황이 역전되어 미즈노 가문이 마츠다이라 가문보다 강해지자 오다이가 어머니의 의붓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는 정략결혼이라서 처음에는 오다이를 싫어했지만, 오다이가 인근에서 어머니 닮아 미인이기도 했고 성품이 좋아 나중에 부부 관계가 퍽 원만해졌다. 그렇게 마츠다이라 타케치요라는 아들을 낳지만, 미즈노 가문이 마츠다이라 가문이 섬기던 이마가와 가문과 연을 끊게 되면서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미즈노 가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전국 시대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제국주의 국가가 되기 전의 일본 여성들은 인간이라기 보다 권력의 힘으로 빼앗고, 정치적으로 주고 받는 선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동반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프랑스 실존주의 소설가, 사상가로서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로 불리우며, 성적 불평등으로 인하여 여성의 올바른 권리를 주장하며 급진적인 ‘여성해방운동’을 창설하고
사회의 불의에 항의하고 행동하는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녀의 젠더적 성 평등을 최초로 주장했다.
‘성’을 의미하는 어휘조차 현대에 들어 새롭게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사회적 ‘성’을 의미하는 ‘젠더(Gender)’ 개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앤 오클리(Ann Oakley)의 <성, 젠더와 사회(Sex, Gender and Society)>(1972)에서였다.
오클리는 ‘성(sex)’을 생물학적인 차이로, 젠더(gender)를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구분하는 사회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즉 ‘젠더’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였다.
심사인당과 허난설헌은 다른 토양에서 그녀들의 예술을 완성했다.
신사임당은, 모계사회의 흔적인 남편의 처가살이 덕분에 친정에서 편안하게 그림을 그렸고, 불과 30 년후 허난설헌은 영친(榮親) 즉 시집살이를 하면서 불행하게 그녀의 시를 완성하였다.
공자의 부부유별 (夫婦有別)의 別은 남녀가 다르다는 젠더평등이다.
공자의 젠더평등(gender equality)은 2500 년이 지나, 프랑스 보부아르에 의해 다시 탄생한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남녀 평등이 다시 후퇴하였다.
남녀 평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철학적 사고와 인문학적 삶의 방식은 동양이 앞서나갔다. 그것이 동양의 근대사 이후 후퇴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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