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파심에서 말하거니와,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누구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고향을 욕되게 하자는 데 있지 않다. 미구에 밝아올 21세기를 위하여(기실은 21세기를 위해야 하는지 마는지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는 처지에 이건 좀 과장이 된다마는) 순전히 건설적인 취지로다가 저질러보는 애(愛)공동체 의식의 발로일 뿐, 내게 다른 야심이나 특정 군상(群像)들을 폄훼하려는 못된 저의 같은 것이 있을 턱은 없다.
훗날 밀래미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귀경하자 곧 편지를 보내 청년회 임원들에게 나의 원망을 사죄한 점, 또 사촌형님께 건의해서 이씨 문중과 화해하고 정치랄 것도 없는 지역 행사나마 유감없이 지지할 수 있도록 해준 점만 봐도 알리바이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코딱지만한 동네가 선거철만 되면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한때 국회의원 서모 씨의 보좌관을 지낸 윤영춘 씨의 말대로, 그것은 일견 낡은 전통의 부박한 답습이랄 수 있었던 바, 세 개씩이나 되는 선거의 한 축은 에누리 없이 다 밀래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도지사 선거는 단독 출마로 무투표 당선이었으니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당장에 시끄러운 것은 군수 선거인데, 군내에 두루 지지층이 있고 인물도 정치인으로서 뒤지지 않을 행정관료 출신이 동네 어른들에게 떠밀려나오는 모양을 만들어 출사표를 던지고 있었다.
무소속이지만 낙하산 공천에 반발한다는 명분도 있고 함풍 이 씨라는 막강한 종친의 힘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수 경쟁에서 전라도로서는 보기 드물게 과열 선거가 예비되는 양상에 발을 맞춰서 어려서부터 농민운동에 몸 담아온 윤형종 씨도 도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농민회 조직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파평 윤 씨였으니, 함평이 함풍의 함자에 파평의 평자로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또 성장 경로가 근자에 보기 드물게 입지전적이라는 점이 시사하듯이 민주당 후보로 누가 나와도 당락이 호락호락할 것 같지가 않았다. 거대씨족이 움직이다가 자칫 그것들이 연합이라도 하는 사태로까지 치닫는다면 선거는 전혀 다른 판이 돼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군의원 선거였다. 군수나 도의원 선거는 어쨌거나 기호를 들고 나오게 되어 있으니 정당(政堂)들이 평가받는 싸움이라는 명료함이라도 있었으나 군의원 선거는 달랐다. 밀래미의 정치 지형도로 보아 전주 이 씨 문중에서 후보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씨족 경쟁이 전면화 될 것은 틀림없는 바 형님은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상급 후보들의 제휴 의사를 그야말로 적정한 수준에서 거절하여 균형 있는 관계를 유지하느라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인생에 득 될 것이라고는 없는 일에 왜 그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회의적인 마음으로 며칠을 견뎠다. 사촌형님이 펼쳐놓고 밖으로 도느라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노트 정돈 - 면민들에 대한 동리별, 성씨별, 연령별 인구분포도를 그리는 따위의 일을 마지못해 하고는 있지만 마음의 정리는 끝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상경해 버리지 않았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나는 다시 리감초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름 이중연 씨, 그가 내가 올라와야 하는 날 아침에 정확히, 나의 발목을 잡으며 점잖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날은 아마도 5월 4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밥상머리에서 사촌형님과 선거 문제로 마지막 상의를 하는 중인데, 웬 발자국 소리가 씩씩하게 다가오더니 대번에 방문을 열었다. 리감초였는데, 인사말 같은 것은 거두절미하고 대뜸 사촌형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아앗따! 성님, 나 조까 살려주쑈. 조합장 선거 땜에 출혈이 컸어라우. 지랄 같은 선거에 나가갔고는……. 그란디 천만 원만 꿔주쑈?"
속마음이야 안 그럴 줄 알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간곡할 수 있을까? 곁에 있는 나도 민망했다. 사촌형님은 어안이 벙벙해하며, "일어나소, 이 사람아"하더니 잠시 후, "근디 선거는 으쭈고 될 거 같은가?"
리감초의 부탁을 긍정적으로 접수한다는 표시였다. 리감초는 금방 기가 살아서 떠들기 시작했다.
"아앗따, 곳곳에서 난리 부루스 탱고 지루박을 쳐불고 있제만 그래도 민주당을 누가 으쭈고 이긴다우. 김대중 대통령이 있는디."
허나 사촌형님의 관심이 왜 그런 데 있겠는가?
"군의원은? 자네 문중에서도 낼 거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때 리감초의 답변에 뼈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간과해 버렸다.
"아앗따, 우리 문중에서는 무던히도 해찰해부요."
인간은 때로 섬광 같은 직관 때문에 상황을 오판한다. 이날 우리가 그랬다. 사촌형님도 돈을 꾸어줄 때는 리감초에게 최소한 선거운동원은 아닐지라도 그 못지않은 도움을 기대했음이 틀림없었다. 헌데, 점심녘도 되기 전에 낌새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마실을 갔다가 급히 돌아온 사촌형님이 불쑥, "리감초가 은제 청년회장 되아부렀드라?" 묻는데, 낯 가에 원인 모를 불안이 스쳐갔다.
"왜요?"
"고것이 군의원 출마허자는 속은 아니겄쟈?"
너무 기습적인 질문이라 나는 조금 뜨악했지만 이내 자신 있게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리감초가 돈을 꾸어서 나갈 때, 나 역시 밥상도 밀쳐버리고 배웅을 나섰는데, "아앗따, 자네 잘 온 거여. 요참에 성님 잘 도와야 쓰네 이. 요것이 겁나게 중요한 선건께" 이렇게 말한 이가 출마를 꿈꾸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설마요."
"근디 어째 니가 정리헌 것들이 다 그 쪽에 가 있대?"
군청 사료와 지도, 밀래미의 성씨분포도, 유권자 분류표, 면 단위의 각종 실태파악 자료, 농협 자료, 역대 선거 득표 현황판 등등 내가 맡은 선거자료들이 모양을 갖추기가 무섭게 죄 복사되어 돌팔이에게 넘어갔던가 보았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