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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孟子, 중용中庸 2
1971.08.12. 유영모 선생
이건 손입니다. 있을 유(有)자에요. 있을 유(有)자, 몸뚱이는 다 가지고 사는데 이제는 몸뚱이 밖에 없어요. 그 가졌던 것 자기 몸뚱이를 이 손으로 떡 들어 들 때에, 왜 그걸 들고 있나요? 이건 꼭대기라는 겁니다. 점찍고 이렇게 하던지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던지 이건 다 꼭대기를 가리켜. 웃 상(上)자 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위에다가 살을 들었어요. 그 들지 않더라도 이 몸뚱이 떡 나섰어. 이거 드는 거예요. 거기서 위에서 무얼 보는가? 이것은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 광이란 빛 광(光)자 아니에요? 그럼 빛 광(光)자는 꼭대기가 이거예요. 환하게 비추는 그게 이 시옷 이거 웃 상(上)자야. 위에서 이렇게 내리 비춰요. 이렇다. 그 보일 시(示)자 그래 보여줘요. 우리 몸뚱이가 하나님을 떡 이렇게 가진 건 이 몸뚱이밖에 없습니다. 이렇다 하고 밝혀 주셔요. 그 밝혀 주시니 기다리고 그렇게 하는 게 제사 제(祭)자에요. 그래 복이라든지 재해에 대한 문제가 말끔 보여주지요. 빌 저(詛)자 빌 복(伏)자 말끔 보여주지 않아. 보이는 건 죄다 신비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사람관계를 하는 데만 나오는 거예요. 그거 몸으로 살기는 사는데 내가 소유한 이 몸뚱이를 그래서 들고서 이걸 들고 있으면 위에서 무엇이 보여 지나? 그 보이기를 기다리면 그것이 하나님께 참 사람으로 산제사를 드리면서 사는 게 됩니다. 그래 이놈은 어떤 의미로는 어떤 의미로는 나는 간단하게 삽니다. 복잡하게 하려고 안 합니다. 무엇이든 간단하게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거 간단하게 섬긴다는 겁니다. 그래 본심 마음을 생존하게 하는 거, 있을 존(存)자 아들 자(子)하는 거, 있을 존(存)자 존심, 마음을 보존하는 거 마음을 생존하는 거 그리고 마음에서 그 쏟아져 나오는 그 바탈, 천성 그걸 길러야 해요. 그 바탈에 한쪽에는 속 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혼 속 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속 알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 존심양성해가지고 하나님께 받아가지고 나온 바탈을 길러야 해요. 그럼 처음에 나올 때 선뜻 받아가지고 나온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자꾸 기릅니다. 하나님께 받아가지고 나온 영혼 그대로만 그것이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고 그 영생하는 거 아닙니다. 길러야 합니다. 속 알을 길러가지고 한자의 큰 덕(德)자 그것도 속 알이라고 해야 합니다. 덕이란 실제로 뭔지 모릅니다. 덕을 모르니까 이 사람들 덕을 보겠다는 거예요. 그럼 지덕하다고 보는데 지덕, 안 됩니다.
덕이라는 건 기르는데 남이 알게 기르지 않습니다. 남 모르 게 자꾸 기르고 또 기릅니다. 존심양성 마음을 보존하고 그 바탕을 기르고 이럴 때는 바탈이라고 하는 건 영혼이에요. 바탈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또 뭐 하나요? 그렇게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겁니다. 하느님을 섬기나요? 그렇게 다 살 것이에요. 잘 사는 거 뭔가요? 종당에는 하늘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자는 겁니다. 하늘 같이 되자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똑같이 영생의 생명을 우리가 가지고 참 원대하게 둥그렇게 돌아가는 거기에 참여해야 해요. 그래 존심양성 해가지고 사천이라 하늘을 섬긴다는 거야. 유교에서는 존심양성 사천 한다는 건 다 온전히 된다는 겁니다. 사실을 성경 가지고 사는데도 하늘이 주신 그 바탈 영혼 그걸 기르고, 기르고 길러서 하늘나라에 들어가. 몸뚱이 내버리면 그거 죽는다고 하는데 죽어서도 다시 살아. 이거 그렇게 살 거 같으면 그때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천사와 같아. 거기는 죽지도 않아. 영 돌아가며 사는 거야. 그럼 존심양성 해 가지고 사천이라는 게 대단히 귀중한 말입니다. 그럼 존심이라는 건 뭔가? 존심이라는 건 뭔가? 많이 보존해 있다. 그거 존심이라. 이 설명 잘 합니다. 이 설명하는 사람이 뭐이라고 하는 고 하니 존 이라는 것은 잡을 조(操)자 조(操) 라 그랬어. 존위 조(操)라 존 한다는 건 잡을 조(操)자, 잡는 거예요. 그래 잡을 조(操)자를 어디다 쓰냐?
체조한다. 조(操)자입니다. 체조가 뭡니까? 자기 몸뚱이를 보존하려고 보존 되도록 손질을 하는 겁니다. 손질, 그렇게 왔다가 갔는데 광주 여기 또 오니까 환해요. 그렇지 않을 때도 환한 광주인데 광주에 오니까 환하다고. 왜 그랬어요? 그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많이 손질이 되었지요. 또 이 방도 환하지 않습니까? 손질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 손질해야 환합니다. 그러니까 이 몸뚱어리 가졌는데 이 몸뚱어리가 병 안 나고 건강하게 영혼이 자라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풀어 내리는 올을 죄 받아서 쌓는 그 일을 하려면 존심을 해야 해요. 존심양성을 해야 해요. 그래 존심을 해야 한다 그 말이야. 그저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조심 잡을 조(操)자입니다. 조심한다 하면 걱정만 자꾸 한다는 그 말 도 비슷하게 되요. 그럼 잘못하다가 불면증 걸리게? 밤에 잠도 못 자게? 그게 다 아닙니다. 원 손질하는 건 체조도 정말 알면 좋은데, 체조하는 것도 몰라요. 이 몸뚱이 가지고 거저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건 손질해야 해요. 이 몸뚱이를 손질해서 살아라. 그거에요. 몸뚱이 손질을 어떻게 해요? 아 그냥 이렇게, 이렇게 이거 다 그런데 그 손질만은 안 되어요. 뜁니다. 뛰고 마라톤이나 되고 하면 그럼 아주 완전한 손질이냐? 아니에요. 이 사람 세상에 잘 타지 못한 사람입니다. 못 타고난 사람인데 내가 오늘날까지 병 없이 이렇게 사는 것은 또 일찌감치 스무 살 전에 내가 병을 많이 앓았어요.
이 사람 여덟 살 때 그 호열자까지 걸렸어요. 코레라 걸렸을 적에 그때 죽었으면 간단했지. 이 여덟 살 하고 그만 두는 건데, 이제는 여든이 넘었으니 말이야. 그 무너지는 모든 층에다 여덟층을 더 올려 쌓지 않았어요? 그럼 체조하는데 도를 정말 알아야 체조도 바로 합니다. 손질하는 겁니다. 이거 손질 안하면 못쓰게 되요. 그래 여러분 다 오늘날 체조 모두 하시고 하실 거야. 그렇지만 여러분 상당한 나이에 드셨으면 이 쭉정이 내밀어 봐요. 대개 30넘어 40 가까이 되셨으면 여기가 떠요. 떠, 착 닿지를 않아요. 그 뻐청 다리가 벌써 되었어요. 손질 안하면 그 건강이 안 되어요. 뻗청다리가 되고 말지. 쭉 뻗고 앉지를 못합니다. 겨우 이렇게 닿는데 손을 좀 이렇게 뻗어서 해보고 이거 벌써 여기 가려면 이게 들려요. 이거 가는데 왜 들려? 왜 들려? 왜 이거 넘어가지를 못해 들려. 이거 아주 못생긴 사람이야. 나는 실상 그렇지만 여든 두해가 이렇게 가도 아직 뻗청다리는 안 되었다는 거야. 그거야 내 말 잘 들어요. 착 붙으라면 붙어. 또 이것도 저기까지 가라고 하면 가요. 이거 간다고 따라가, 이리가지 않아요. 그래 고장이 없는 거지요. 아무리 튼튼한 양반도 이게 꽉 닿지를 않고 또 이렇게 하면 이런 병신이 되어가지고 뭘 성하다고 어디다가서 이야기 할 테에요? 나는 심지어 이런 소리해요. 뜀을 잘 뛰느냐? 고, 나하고 뛰어 볼래요? 그런데 먹지 말고 뛰자는 거야. 나는 이틀 사흘 안 먹고도 허기져서 길 못 걷겠다는 말 안 해요. 그건 확실히, 난 이틀 사흘 안 먹고도 길 걸어요.
본디 하나님이 내신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내신 건데, 왜 그걸 다 잊어버리고 내버리고 거저 살라고 해요? 그런 법이 없어요. 요전에 또 어디를 가 만났더니만 그 이런데 주의하는 이 인데, 이렇게 앉았다가 이렇게 들어눕더니 일어나는데 몸 하나 까딱 안하고 팔때기 하나 가만두고 쭉 뻗기만 하고 쭉 뻗기만 하고 쭉 뻗기만 하고 그리고는 종당에는 나는 조금 여기가 어디 닿아야 일어나 집니다. 그런데 이 이는 일어나는데 열 번 스무 번을 일어납니다. 대지도 않고 그럼 그 분을 내가 나는 그렇게 익혀가지고 일어나 보는데 아직 그걸 못 익혔어요. 아 그것도 좋은 겁디다. 이 누울 때도 다른 거 안 하고도 이렇게 눕는데 이게 아마 안 될 겁니다. 일어나는데 뒤척거리지 말고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게 아직 안 되어요. 조금 조금 대야하지. 그래 욕심이 그것까지 나도 할까 하는 욕심이 돋아나요. 그래 우리가 어디 가니 하니 이것의 선생님은 고양이 같은 것이 선생님이야. 떨어졌는데 난 짝 떨어져서 곱게 디디는 거 중심 잡는 거니까 중심을 잘 잡아야지. 중심을 못 잡으면 종당 할 수 없습니다. 중심 잘 잡아야 되요. 그래 중심 어디 있는지 잘 잡자는 겁니다. 비록 옷 하나를 입어도 이렇게 잡고 이렇게 잡고 이렇게 끼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끼고 그것도 어렵습니다. 그것도 어려운데 아니 무슨 그것을 해요?
그럼 어떻게 하는 고 손질을 해서 쓰면 이 몸뚱이 하나라도 내 말을 잘 들어요. 그럼 재주 손질을 하는 게 좋습니다. 이 말이야. 집안을 치우고 집안의 세간을 갖고 하는 것도 손질을 할 때 잘 손질을 다 하면 말끔하게 오래도록 그 전체를 골고루 닳도록 쓰는 거 아닙니까? 원 속내의 마음을 전심으로, 마음에다 손질을 해. 그 마음의 손질을 어떻게 할까요? 마음의 손질을, 그 몸뚱이를 손질을 하는 게 체조, 또 마음 손질하는 거, 그 이야기를 흔히 하지를 않습니다. 뜻 정(情)자에 이 손질할 손(搎)자 잡을 손(搎)자 뜻 정자에 잡을 손자 그게 있습니다. 체조가 있지만 정조가 또 있어요. 정조라는 건 대개 철학하는 사람이 심리학 이야기 할 적에 정조설이 나옵니다. 이 그건 또 뭔고 하니 유교에서 말하기를 중용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중용을 아는데 중용의 요점은 뭔고 하니 중장은 천하지대본이라. 가운데라는 건 온 천하의 그 밑바닥에, 그건 밑바닥부터 기초부터는 잘 정해 놓아야 하니까 그럼 가운데를 얻어야 합니다. 그 밑바닥이라. 터를 잘 닦아놔야 한다는 거야. 그 바닥에, 그 중용을 안 다는 것이 바닥이야. 그 중용이라는 걸 간단히 말하면 가고 오는 겁니다. 그 가고 오는 걸 우리가 아는 것 같지만 정말은 모르는 겁니다. 가고 오는 걸 정말 알면, 가는 것 없다. 오는 것 없다. 그럼 가지도 않고 오는 것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럼 여기 있다. 그거 옳은 거 같지, 그거 다 옳은 거 아닙니다. 옳은 건, 가는 게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게 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 있다는 게 거기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죄다 알아야 그 가운데를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용이 어렵다는 거예요. 쉬운 게 아닙니다. 고쳐말하면, 이렇게 되면 이건 철학이 됩니다. 하나님만 생각하자는 게 이렇게 되면 잠깐 철학이 될지도 몰라요. 가는 게 없으면 오는 게 없습니다. 오는 게 없으면 가는 거도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 있는 것 없습니다. 가는 중에 있고 오는 중에 있는 겁니다. 우리 여기 있는 거 같지요? 아까 처음에 나와 시작할 때 있던 저 밖에 하고 한량없이 멀리 떨어졌습니다. 아주 다른 이 공간에 우리가 온 겁니다. 아까는 그대로 있다는 거, 우리 여기 있어. 또 나 있는 데는 무슨 동 몇 번지라는 그게 다 대 허공을 생각안하니까 그러지. 대 허공을 생각할거 같으면 자꾸 변동되는 겁니다. 자꾸 다른 공간에 가는 겁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래 이솝우화에도 있지를 않습니까? 배를 타고 가다가 무얼 하나 톡 떨어뜨렸어. 배타고 가다가 칼을 똑 떨어 졌어. 이제 찾을 수 없게 됐어. 그런데 여기다 표를 해두면 이따가 찾자. 배 바닥 속에 표를 해둬요. 그 떨어진 데를 그거 옳습니까? 칼은 배 바닥에 떨어진 게 아니고 물속으로 떨어졌지. 거기 바로 떨어진 그 자리를, 배전에 칼로 썰어 두면 거기 찾아?
거기 찾으면 지금 찾지, 왜 이따 찾아? 이게 뭐 속이 안 다는 거예요. 간다 온다. 아는 거 그쯤 아는 거야. 그렇게 아는 거 아닙니다. 가는 게 없으면 오는 게 없어요. 그럼 오는 건 갈라고 오는 겁니다. 가는 건 오려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중간에는 가고 오는 가운데니까 가는 가운데 오는 가운데니까 나 있는 데가 가운데에요. 내가 당장 있는 데가 가운데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걸 갔다가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여기 있는 것도 없다. 그럽니다. 그거 대단히 요긴한 말이기 때문에 절에 법당에 기둥에 커다랗게 그거 써 붙인 데가 많습니다. 무공무애여의주라고 그 틀립니다. 우리를 봐요. 여기서 갈 텐데 좀 걸음 잘 못 걷는 사람을 따라가려면 아이고 너는 이다음에 가자. 지금 못 간다. 자꾸 따라가요. 그런 사람을 데리고 가면, 가요. 한참 가는데 얼마가면 어른이 가면 그 아이가 걸음 걷기가 힘이 들어요. 얼마나 왔어요? 응 많이 왔지. 아직 멀었다. 가자. 그러지만, 한 반 넘어 선 뒤에는 얼마나 왔어요? 아 꽤 왔다. 꽤왔어. 그 대답하기 얼마나 갔어요? 묻더라도 꽤왔다. 그래, 왜 걱정하는 게 가려고 걱정했는데 이때 가려고 걱정해 갔는데, 갔는데 대답은 왔다가 뭡니까? 왔다. 그 결과가 왔다고 하는 게 그렇게 할라고 하는 거야.
그 가고 오는 게 둘이 아닙니다. 천리 길 백날을 걸러 갔더라도 나중에 다 가서는 처음에 천리를 열흘도 더 넘어 왔으니, 더 가겠다 던지 이렇게 했으면 그렇게 가, 도달 했어. 아이고, 이제는 다 왔다. 가는 거 다 어디로 갔습니까? 간 게 아니야. 온 거야. 그럼 가고 오는 게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지요. 나중에 결과는 다 왔다 지, 다 갔다는 소리는 안 합니다. 기묘한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말하면 가는 중에 있습니다. 가는 가운데 있어요. 또 오는 가운데 있습니다. 어디 있느냐? 나는 그대로 있지만 배타고 가는 거 모양으로 자꾸 공간이 변합니다. 자꾸 가고 자꾸 오고 있지, 가만히 어디 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 일 모두 쫒아가지고 살기는 어디서 삽니까? 할 때, 예삽니다. 그래, 그게 제일 옳은 말입니다. 어디서 사냐고 하면 자기 사는 고을 사는 동네 사는 집에 번지 그걸 외워야 자기 있는 데를 알려줘. 그거 아니야. 유 영모는 어디 있는 겁니까? 서울 어디 몇 번지에 있다는 거, 지금 거짓말입니다. 거기 찾아가 봐요. 있나? 유 영모 없어요. 그럼 유 영모 정말 있는 건 여기 있어요. 여기, 여기 있어요. 이건 내 소유지가 되어서 여기 있나요? 요 시간 요 때에는 내가 아주 차지하고 있으라고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거야.
그래 우리 여기 있으나 여기 공간에 여기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 새벽에 나와 앉아 여기하고 거기하고 달라요. 우리 다 같지. 우리 다 이 공간에서는 다른 세계에서 온 거에요. 이런 가운데 우리가 있는데, 있다. 간다. 온다. 이것을 분간 바로하기란 극히 어렵습니다. 그럼 자기 있는 데는 가운데라 이러는 게 좋아요. 그런 게 실상 가운데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가고 오는 가는 중이요. 오는 중인, 가고 오는 데야. 가고 오는 데야. 가하고 온이 만났어. 가온, 가가 온이 만난 데. 데, 데는 가운데 잘 받아가져야 정말 바로 간다는 게 중용입니다. 그 가온 데 자기 것을 가지고 잘 써야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게 중용입니다. 중용을 모두 알 맞춰 한다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래가지고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문에 사서삼경이 제일 어려운 게 사서에 들어가는 중용이 어려워요. 그래 보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 둔 고 하니 중용을 모른다는 거야. 중용을 잘 모른다는 거야. 다른 걸 죄다 보고 알걸 알고 난 뒤에 나이도 지긋한 뒤에 맨 나중에 보라는 겁니다. 맨 나중에 보면 중용을 알 수가 있다고, 중용을 바로 알면 공자 맹자 가깝게 될 수가 있어. 바로 모르면 안 됩니다. 그 가온이라는 거, 가운데를 알 것 같으면 그것은 천하의 밑바탕이라. 중용지야는 천하지강(天下之綱) 대본이라. (끊김)
뭘 고루고루 해야 한다. 고루고루 라는 건 천하지강(天下之綱) 대본 그걸 알면 천하지 달도라. 통달 달(達)자라. 통달할 길이라. 그럼 사통팔달이라 하면 사방으로 빠진 큰길 그거 왜에 새새에 쪼개져 나가서 여덟 갈래로 나간 거 사통팔달하는 길이라면 그 달이 더 넓고 더 완전한 거 같은 생각이 가는 겁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달은 뭔고 하니 가고 오는 것은 터벅터벅 걸어서 가지만 걸어서가고 걸어서 오지만 달하는 것은 그 자기 찾아갈 길 꼭 꼭 바로 찾아가는 겁니다. 꼭 그리 찾아가는 거 끝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럼 거기 사람이 많이 있다면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서 찾아 만나야 하는 겁니다. 그럼 걸어서 정말 대본이 되면 오히려 쉽습니다. 지금 바로 잘 알아가지고 차표를 사던지 비행기 표를 사던지 사놓으면 그만이에요. 그 불안해서 가지 않습니다. 차표만 꽉 쥐고 가요. 가면 자기도 모르는데 가지요. 다 왔소. 여기 내릴 데요. 그럼 내리면 되요. 거기 뭐 하러 갔어요? 그거 타고 그렇게 소풍을 하고 그거 아니에요. 어디 가서 누구 집을 찾아가서 그 누구를 만나러 간 거야. 그럼 그 집에 들어가서 그 사람이 많아도 자기 만날 사람 그를 꼭 그 사람 만나야 해요. 딱 만나면 그게 달이야. 만날 사람 못 만나면 그 집 들어갈 것도 쓸데없어. 날라 갔던지 타고 갔던지 이제 그래도 걸어서 그 집을 찾아야지. 찾지 못하면 소용없어. 그럼 미달이야. 다하지 못해.
그럼 대궐이라는 집이 좋지요. 그러나 자기가 가 닿는 데는 자기가 걸음을 걸어서 그 집을 들어가서 그 집을 들어가 가지고도 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가 만날 사람 꼭 만나져야 합니다. 그래야 달이에요. 다른 거 다했어도 미달이면 틀렸어요. 미달이면 허행입니다. 아무것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풍(風)이라 화(火)라. 그리고 너무 그게 저 희로애락에 좋다. 화가 난다. 서럽다. 귀엽다. 이런 거, 그런데 보는 게 없어. 그러고 보니 감정이라는 게 조금도 없어. 그런 지경의 그 마음을 무어라 해? 말짱하게 그 하나도 영, 영 텅 비어 있어. 그것이 그게 원 바탈이야. 그런데 여기서 좋을 때 좋고 싫을 때 싫고 화가 날 때 화가 나고 입이 벌어져 웃음이 날 때 웃음이 나고 어떤 때 서러울 때 서럽고, 기뻐서 웃음이 나올 때 웃음이 나오고, 이렇게 제 때에 일곱 가지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 감정이 일어날 때는 그냥 내놓아서는 안 되어요. 감정이라는 건 그냥 내놓아서는 안 되어요. 감정은 다시 손질을 해야 해요. 손질을 해 내어 놓아야 해요. 감정이라는 걸 갖다가 뜻 정(情)자에다가 감정이란 뜻 정(情)자에다가 아까 잡을 조(操)자, 체조(操)라고 할 때 쓰는 잡을 조(操)자 감정을 손질을 해서 나가야 돼. 감정을 손질을 해서 나가야해. 그게 정조(情操)에요.
감정도 내 감정인데 내 감정을 내가 손질을 해서 내보내야 해요. 그건 왜 그러냐? 왜 손질을 해야하냐하면 손질을 안 하면 옆에 있는 다른 걸 방해를 해요. 원인이 화를 내 쏟아 보시오. 옆에 있는 그릇도 깨집니다. 그런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내 감정 내가 해야지. 옆텡이 그릇은 왜 깨? 그러니까 감정이라는 건, 남이 볼 때는 반드시 손질을 해야 합니다. 곱게 나가야합니다. 좋다고 할 때도 흠뻑 좋겠지만 손질해야 합니다. 손질해서 좋은 감정을 내보내야지, 좋은 감정을 손질 안하고 냈다가는 너무 좋아 기쁘다가 그대로 졸도해 죽은 사람도 있어요. 감정이라는 건 손질 안하면 망하는 겁니다. 안됩니다. 그런 걸 손질해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게 화(和)하는 겁니다. 고루 화(和)자, 손질해서 고르게 해가지고 내보내요. 그걸 꼭 해야 하는 게, 감정이라는 정(情)자에다가 아까 잡을 조(操)자 체조에 손질할 조(操)자 그걸 갔다가 하는 걸 정조라 하는 거예요. 자기 만나볼 사람들 집을 찾아가서 그 안에 들어가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 만나볼 사람 그 사람을 꼭 만나 만나가지고 꼭 그 사람에게 말할 적당한 말을 꼭 해. 그럼 그 사람의 대답을 적당한 대답을 듣고 오게 될 때 그게 달(達)이에요. 천하지강(天下之綱)대본이라. 오늘 어떻게 하다가 중용 공부를 하는 거 같이 했습니다. 그 오늘 많이 보는데 맹자강연 듣고 또 중용 강연 듣고 유교에서 이렇게 요긴한 거, 이런 것을 이렇게, 이렇게 해서 성경 보는 이도 간단간단하게 요긴한 점을 들어가지고 성경 보는데 대조를 해가지고 보면 구약 성경을 보는 유익한 일이 그만큼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더 깨닫게 하지, 유교경전 봤다고 성경을 해석해 가는 걸 오히려 흐리게 할 리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로 오늘 이 말씀 하게 된 거 우리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 이걸로 마칩니다. 찬송
또 속 알을 영혼을 기르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갖다 써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는 거, 그걸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그럽니다. 하나님 주신 기운을 가장 성하게 받아가지고 그럼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는데 그 힘이 된 힘을 가지고 우리의 받은 올을 가지고 하나님 뜻에 맞는 일을 많이 하는데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그래 성령, 양성 사천하자는 거, 성령을 써서 양성사천을, 바탕을 길러가지고 하늘을 섬긴다. 하는데 하나님의 말 숨, 숨을 갖은 너희가 말대답을 할 수 있도록 살아라. 이렇게 하는 그 명령을 그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상주(上主)라고 쓰면 한문에 성경 번역하는데 하나님 이라는 걸 귀신 신(神)자 한자 그렇게 쓰는 것도 있고 참진(眞)자에 귀신 신(神)자 진신이라고 쓴 것도 있고 또 웃상(上)자에 임금제(帝)자 상제라고 쓴 것도 있고 또 상제라는 옥황상제 이래서 우상 섬기는데 쓴 일이 있었어. 이 서양 사람이라도 동양학문을 아는 사람이라면 신자 쓰기를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상주(上主)라고 썼어. 위에계신 임이라고 해서 상주(上主)라고 썼어요. 그래 상주(上主)라고 쓴 한문 번역이 있고 그건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께 가는데 하나님의 뜻을 받아야 해요. 하나님 뜻은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 위에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하고 상관 할 적에 우리를 살려서 우리가 돌아가면서 나가면서 살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길로 나갔으면 거기서 좋은 뜻을 바라시는 게 그게 지기입니다. 지기, 우리 사람도 무슨 지기 대강 요점을 받아서 적어놓은 걸 지기서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속사람 뜻을 집어 쓴 거 그거 지기서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계신데 지기서가 있어요. 그럼 하나님의 지기, 그걸 내리는데 임금이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해요. 그 명령을 받으면 그 승명하는 겁니다. 그 명령을 받아요. 승(承)자는 받는 겁니다. 이 세상에 받는다는 글자가 어떻게 생겼냐하면 이 이렇게 합니다. 높은데 귀한 걸 받을 때는 이렇게 한손으로 받는 게 아니라 손이 있는 대로 나가야합니다. 그 손이 있는 대로 나가는 까닭에 적어도 셋을 버립니다. 그래 간단히 쓸 적에는 이렇게만 말해도 승(承)자에요. 그 원뜻은 손이 있는 대로 받아야 하니까 받들 승(承)자입니다. 내려오는 걸 받는다는 받을 승(承) 이을 승(承), 그건 뜻을 받는 걸 승지라고 그러고 명령을 받는 걸 승명 이라 그래. 그런데 옛날에 승지는 벼슬 아닙니까? 임금이 명령할 때 그 밑에 승지가 있어서 받듭니다. 그걸 받들어서 어디로 보낼 데 보내고 그걸 승지라는 벼슬이 그걸 하는데,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님 우러러보고 하나님 뜻을 알려고 하는 거, 그 어떤 의미로는 크리스챤은 하나님 앞에 승지입니다. 하나님 뜻을 받으려고 그럼 이어받는 그 사람이 이게 이을 사자입니다. 그 대를 이어서 나가는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이을 사자가 한문 다 없어진 세상이 되고 한데도 요새 쓸 적에 누구 죽었을 적에 부고 서를 쓰는데 그때 큰아들의 이름을 쓸 적에 사(司)자 그 집을 이을 아들이라, 사(司)자라고 씁니다. 그래 이을 사(司)자를 어떻게 썼느냐? 하면 그게 자세치 않습니다. 사(司)자라고 썼는데 건너긋고 입구하고 이렇게도 쓰고 이렇게 아니하고 달리하게도 써요. 여러 가지로 씁니다. 그런데 점점 한문이 자주 쓰지 않습니다. 자주 안 쓰니까 그래 서툴러서 어떻게 쓸 줄을 몰라요.
이게 원 일 사(사)자입니다. 일 사(事)자에다 아들 자(子)를 써놓은 거 그 대를 이어서 집주인이 돌아갔으니까 돌아간 대를 이어서 그 집주인 노릇할 그 아들이야. 큰아들이 사자이지. 그 사자가 거기서 쉽게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본디 나라의 것을 받더라도 그걸 받을 때에는 동네에 들어가서 정해놓은 책에 정한 그걸 갔다가 종묘 앞에서 외운 답니다. 떡 읽어요. 읽고 나서 그걸 받아요. 그 받아서 읽는 건 늘 그렇거든. 그럼 큰아들 되었으면 가장되는 아버지가 돌아갔으면 그 사자로서는 정중하게 집을 맡는, 그걸 잇는, 그래 입구는 아니에요. 이렇게 입구하고 요렇게만 하고, 그런데 이게 무어냐? 책 책(冊)자 인데 책 다른 건 모르지만 지금 세상에는 사람이 죽게 되고 그 재산을 갖다가 누구누구 주라고 그걸 써놓고 간다는 거 아닙니까? 유언서를 써놓고 간다고 그 사람이 죽은 뒤에 그걸 펴보게 되었다고 그럼 적어 놓은 거 그거 한 책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적은 유언을 이거 받아가거라 하고 명령하는 겁니다. 죽은 뒤에나 그걸 열어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잇지, 그거 없이 이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 책에 적어 놓은걸 가지고 사당 앞에 가서 그걸 읽고서 이거 제가 받습니다. 그런데 그 대를 잇는 거예요. 그래 그것이 자식이 알면 책에다 아주 적어 놓은 게 있어. 그게 유언서입니다. 유언서, 그 책을 꺼내요.
그럼 여기는 받을 사람입니다. 맡을 사(司)자 아닙니까? 받아서 맡아. 받아서 맡으려고 이 맡을 사람이 떡 나가 책을 펴서 읽습니다. 사당에서 아니하면 가정이라든지 읽는 거예요. 아 이제 보니까 과연 재산을 누구를 주고 누구를 주고 어떻게 하라고 했구나. 이렇게 되어가지고 그 후사 뒤를 잇게 되는 거야. 그렇게 간단하게 책에 적어놓은걸 한번 가져다가 읽고서 그걸 맡는다. 그런 뜻으로다 읽는다는 뜻의 글자가 되었지요. 복잡한 글자가 아니에요. 그 생각들을 안 하니까 그 자가 어떻게 읽는 자가 되었는지 생각을 안 하니까 몰라요. 이렇게도 했다가 저렇게도 했다가 갈팡질팡 하는 거예요. 이 사자는 묘한 자입니다. 옛날에는 임금이라는 글자가 여러 자인데 이게 임금 후(后)자인데 지금 뒤 후(後)자를 써서 오후라고 많이 쓰지만 임금 후자입니다. 임금 후자는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임금도 사람이야. 사람도 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일자 썼어요. 귀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의 입이 있어요. 명령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임금이에요. 임금이 한번 떡 지금 의회가 있는 세상이 되어서 혼자 앉아서 명령할 임금은 없겠지만, 맨 처음에는 임금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가지고 죄다 살림을 하니까 그래 임금의 말이 하나 떨어지면 그거 받아가지고 그대로 살게 마련이니까 그것을 받아서 살게 되는데 묘한 게 있습니다.
그걸 받는 승지가 어떠하냐? 그래 받아가지고 맡아서 그대로 할 사람인데 맡을 사(司) 그래요. 그래 맡을 사 를 어떻게 썼는가 하니 말 하는걸 뒤집었어요. 임금 자를 돌려버렸어. 여기서 낸 이걸 받아가거라. 그걸 그럼 말할 사람이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할 사람이 있고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말하는 사람하고 그 받아가지고 하는 사람하고 입구가 둘이 하나가 되고 한일자 둘이 연결되니까 한일자 하나뿐이고 이래 되요. 그러니까 대동 살림을 하지 않습니까? 대동(同)을 위해서 나라 살림을 하는 거지. 말하는 이 하고 그 말을 받아서 그대로 시행하는 이 하고 일치해요. 그럼 한 가지가 됩니다. 말하는 사람 그 말을 받들어서 일하는 사람 그 한 가지가 되요. 그럼 어떤 의미로 대동 이라는 건 대단히 좋은 말입니다. 공자의 사상도 대동사상(大同思想)이야. 강 이름 중에 대동강 이라는 이름 대단히 좋지요. 하나님의 취지를 말씀 하신 때 이 아래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령을 받들어 그대로 이 나라라든지 우리 세계라든지 이걸 받들어 하나님 뜻대로 여기 일을 시행하자는 그 뒤를 받들어 맡는 겁니다. 하나님의 큰아들 노릇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이제 그렇게 된다면 온 세상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 뜻에 그 속에 하나님 아버지 속에 하늘 아버지 뜻 속에 사람의 아들 노릇을 하는 겁니다. 예수교는 대단히 신기해. 왜? 근원은 아버지이고 우리들은 아들이에요. 아버지의 아들 노릇을 온전히 하자 이거에요. 이전에 공맹은 그저 효도를 해라. 자식들은 그저 효도를 해라. 조상을 받들어라. 그거가 본이다. 그 왜 그랬나요? 조상의, 조상의, 조상의 꼭대기 그 위에는 하나님이 계세요. 그래 종당 하나님까지 섬기라는 말 밖에 다른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효가 되어야 되는데 아주 큰 효자가 되어야 그럼 대효는 어떠하냐? 발효라고도하고 대효라고도해. 발효가 누구입니까? 임금이 대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