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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1. 信天함석헌
1977년 9월 18일 성경모임 명동 카톨릭회관에서 하신 말씀 (씨알의소리 1996년 2-6월호)
<본문> 하느님의 견책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시오. 그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까지 피를 흘린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하신 말씀을 잊었습니까?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에 낙심하지도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 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는 누구나 다 아버지의 견책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질책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서자이지 참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 판단대로 우리를 견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며 우리를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리 12:1∼ 11)
견책이란 말은 한문으로 이렇게 써요. "譴責". 省文社 발행 漢韓辭典 (887쪽)에는 "허물을 꾸짖고 책망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공동번역에는 여기 제목이 "하나님의 견책"이라고 나와 있는데, '견책'이라도 좋지 '견책'은 하나님이 꾸중하신 단 말. 그런데, 하나님의 '견책'보다는 역시 영어 번역 모양으로 하나님의 訓鍊이라든지 鐵鍊이라고,-- training, 아마 그것이 더 나을거예요. New English Bible두 그렇게 돼 있고. 또 이 New English Bible은 현대어로 번역해서 그거 참 대담하게 해서 좋다면 좋은 거 있는데, 문법적으로는 나도 뭐 자신은 없지만 New English Bible보다는 Standard Version이 나을거예요. 둘을 같이 참고하면 모를까.
옛날엔, 옛날 번역한 것을 보면 個個에 따라 다르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서 문법이 자꾸자꾸 밝아져 가니까, 새로 권위 있는 문법을 참작을 해서 번역하는 거니까, 근래에 번역한 것이 (아마) 좋을거에요. 이것도 아마 나온 지가 수십 년은 되는 - 해방직후 것인데 , 처음에는 미국의 학자들이 Standard Version이라고 했고 그 전에는 본래 서양서는 King James의 번역, 그건 아마 1600년대에 줬지. 한문으로는 "銃定飜譯"이라고 그러는데, King James Version, 그게 서양 사람들에겐 지금 아직도 글로는 그게 좋다고들 하면서 애용을 하지. 우린 뭐 영어 모르니까. 아주 이렇게 의식적으로 그러는 데는 James번역을 많이 아마 인용하고 그러는 거 같애요 그래도 근래 아마 이렇게 문법이 발달이 돼서 개역한 것들이 좋은데, 그 다음에 King James Authorized Version다음에, 그러고 그 책에 대해서 문법이 차차 발달해서 나온 것이 Revised Version(개역판)이 나왔지. 그래 우리나라에 요새 이렇게 새로 번역이 돼 나오기 전에 된 번역은 대개 그 개역판( Revised Version)을 참고를 해서 많이 했을꺼예요. 일본에서도 옛날에 번역이 있다가, 개역이 있을 때는 그 개역판을 보고 또 원어 두 많이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번역을 했고, 그 다음은, 이제 이건데. 이거는 이제 Standard Version이라고 그렇게 했는데 , 그 다음에도 또 있을거요 아마 그래서 될수록은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해서, 그래야 고 중요한 원어의, 요렇게 중요한 비교를 알 수 있지요. 그래, 이번 우리나라 번역에도 더러 잘 안된 점도 있어.
성경번역이란 참 어려운 거요. 종교 고전번역이 참 어려운 것이, 첫째 조건이, 성경 뿐 아니라 성경이외의 여러 가지 해박한 지식이 필요한데, 성경만 보고 성경번역을 할 수 있냐 그러면 아니란말야. 다른 지식이 많이 있어야지. 쉽게 말한다면 철학에 대한 지식, 역사, 심리학, 사회학, 동식물에 대한 것, 그런 지식도 보통지식은 있어야 그 용어도 적절한 걸 고를 수가 있고, 해석을 할 때에 그래야 바로 해석을 할 수가 있지. 옛날 사람의 지식 그것만 가지고 한다면, 자기 마음에 만족한 정도나 했지 그래 가지고는 그건 맞지 않는 점이 많이 있을거야요. 그러니까 첫째로 학식이 많아야 하는 거. 그 담엔, 또 글재주가 있어야지 같은 거래도, 같은 우리말에도 그 어느 어휘를 쓰나? 문장이 이런 거라는 건 너무 규격 모양으로 그래도 못쓰고, 또 문학적으로 아주 뭐 수련을 많이 해서 그러면 또 글이 약해지구 그래서 못쓰는 거고. 그래 글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또 어휘 수가 또 많아야 돼 우리말로도 원어를 아는 게 많아야지 맞는 원어 고르긴 참 어려워요.
그런데 한사람으로서 그런 걸 구비하기란 참 어렵단 말이야. 그런데 요새는 옛날과 달라서 개인번역이란 게 있는데, 개인번역이 도리어 이렇게 신실(信實)한 사람이 했으면 좋지요. 건 왜 그런고 하니 개인번역은 거 그 사람의 신앙의 표시니까, 자기로서의 그런 입장에 서서, 그러니까 그건 그게 일종의 한 해석 같아서 좋아요. 서양에. 독일 사람들도 그렇구 개인번역 많이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선 내가 알기로는 개인번역을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도 다하진 못했지. 고병려(高秉呂)박사 거 시작하긴 오랫는데. 무교회에선 원어성경 연구열, 독경열(讀經熱)이 왕성해. 내가 배운 쯔까모도 같은 이는 그때 시대에 세계적으로도 유수한 성경학자요. 외국어 자습을 여러 가지를 했어. 영어, 독어, 희랍, 히브리, 라틴, 이탈리아어까지 했는데, 이탈리아어는 단테를 읽기 위해서 했어요. 희랍어 성경반은 첫 시간에 알파벳을 가르쳐주고는 그 담 시간부터는 무조건 자기가 좋아하는 한 구절을 희랍어(希語)로 외어 가지고 와야 했어 그렇게 매 화요일 저녁에 한 번씩 하는 거를 1년 하니까 요한복음은 읽게 됐어요. 요한복음이 제일 쉬워. 제일 좋기도 하지만 제일 평이하고 단어가 어려운 단어가 적어 또 어미변화도 안 따로 외어가지고는 못견디리 만큼 자꾸 시켜서 암기하게 만들어. 그러니까 아주 단시일 내에 실용적으로 어학실력을 기를 수가 있어 .
물론 여기 이 우리말 성경에서 대체로 이만한 뜻이라도 거기 써 있는대로 그 뜻만 알아도 물론 좋지만 역시 원어 성경을 직접 볼 수 있으면 게서 더 이를 바야 없겠지. 그렇다고 원어번역에 있어서 이 어휘문제만 하더라도 그 비슷비슷한 말 중에 그 어느 것을 택하느냐가 참 문제야요. 가령 불교경전의 경우를 보면 ‥‥‥‥日에" 라는 게 있는데 이걸 '어느 날' 이라 하느냐 '한 날' 이라고 하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야. 한 날이라는 것과 어느 날이라는 것이 같지 않단 말이야. 그걸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겐 그렇거든. 다 아는 것 같지만 어느 하날 딱 박아서 표기하려면 보통 문제가 아니야 일단 해 놓으면 이러구 저러구 할 수가 없으니까. 자기 취미에 맞는 걸로 한다고 해선 안되거든. 그 어느 것이 더 객관성이 많으냐 하는 게 중요해. 모든 사람에게 그게 어느게 더 잘 전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공정하게 생각해서 해야겠는데 그게 어려워. 그러니까 자기는 좋아두 다른 사람에게 먹히지 않으면 소용없고 그런거니까.
같은 말은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해방 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뭐 소학교, 중학교 할 거 없이 교과서 쓴 사람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 후에 해방이 되니까 제각기 제각기 교과설 쓰는데 말이야, 그렇게 쓴다면 나두 쓰겠지만, 일반 서적은 나도 쓸 수 있겠지만, 모든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라는 것은 내 주장도 아니고 어느 사람의 주장도 아니고 조금 시대적으론 뒤떨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적어도 확정적인 그것을 잡아서 써야겠는데, 거 사사(私事)마음이 없이 그래야 쓰겠는데, 그게 남발이 된단 말이야. 거기다 교과서 사건까지 나고 돈 먹였다고 그러고 별별소리가 다 들리니, 도무지 교육자로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지. 그래 이런 거는 이 담에 자기가 글을 쓰더라도 알아 두어야 돼. 내가 내 의견 내 학설을 주장하는 거는 내가 얼마든지 그거를 내두 좋지만 학교 교과서라든지, 교회에서 쓰는 표준 되는 번역이라든지 그런 거는, 나로서의 주장은 그건 별개로 따로 놓고, -그거는 그 계제가 됐을 때는 그건 내가 주장하겠지만, 우선 일반사회에서 "네 말이 옳다" - 이렇게 판정이 될 때까지는, 그것이 아직 토론상태에 있을 때는 자기 의견을 그런데 고집할 수 없어요.
그래 여기 이런 때에는 여러 가지 있는 말 중에 어느 말을 골라서 쓸까 하는 걸 깊이 생각해야 돼 아주 무책임하게, 더구나 자기가 직접 쓰는 건 또 좋지만, 제자들 시켜서 써가지군 자기가 감수했다고 그러고 펴내는 건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어요. 이런 말하는 사람이 도리어 어리석은 그런 시대가 됐어! 글 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해 가지고 사회가 옳게 될 리가 없지. 서양, 서양에서도 독일 사람같은 이들은 학문의 권위라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건 또 너무 그래서 안된 점이 있기도 하지만, 학자의 권위, - 요샌 이것도 젊은 사감들에 의해서 많이 깨어졌지만 그래도 종교는 물론이고 다른 학문에 있어서도 권위는 있어야지. 다른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어야 돼 권위 없는 사회, 그거 도무지 못쓸 사회야요. 우리 사회 권위 없어요. 권위가 없으니까 권력밖엔 판을 치는 거 없어요. 학계는 학계에 권위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 물론 그러다 어느 시기에 가면 또 중간에 가다 그 권위가 깨지구 또 다른 거 생기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라도 그 권위가 있어서 젊은 사람이든 누구든 적어도 그때가지는 그 권위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이런 생각이 있어야 학문이 진보하면서두 좀 이렇게 질서가 있게, 중심이 있게 그렇게 나갈 수가 있어요. 제각기 사상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거는 도무지 통일이 없고. 그러니까 사회가 제대로 틀이 선 사회 같으면 그 어딘지 모르게 권위 있는 중심이 있어서 무슨 방면으로든지 아무개가 하는 말이면 거 믿을 만하다 그렇게끔 돼야겠는데. 그러니까 인도가 모두 Gandhi주의자겠어요? 반대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도 인도독립운동에 간디의 말이라 그러면 누구든지 감히 다 그걸 부인할 수가 없어. 그래, 학문에도 그래야 해요.
그런데, 우리처럼 이렇게 후진으로 따라가는 사회에선 "거 별거 없어. 여럿이 따라가는 사람이면 돼" --이럴 수 있겠지만 그 여럿이 따라가는 사람이 도덕에서도 그러냐 그러면 그렇지 않단 말이야. 사상에서도 그러냐 그러면 그렇지 않단 말이야. 그래 근래 우리 사회에 크게 불안은 도덕에서도, 학문에서도, 예술에서도 권위가 깨졌어 누가 내세웠다는 그게 권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저절로 권위를 세워서 저건 하나님이 내세운 걸로 그렇게 되는 건데, 하여간 정신적인 면에서도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옛날 사람은 "하늘이 "그러면 "하늘이 굽어보신다.--"그러면 대들던 사람도 거기 대해선 순종하리만큼 그런 양심의 권위에의 복종이 있었어. 그런 면이 있어야 세상이 돼가는 거요. 그래, 그거를, 그런 권위를 인정할 줄을 모르는 사회, 규모도 아무것도 없는 사회를 이끌어 가려니까 폭력 밖에 쓸 데 없다. 이렇게 되니 큰 걱정이야, 잘못된단 말이야. 그래 해방 후에 자연히 부득이한 일이가고 그럴 수는 있지만, 그래도 좀 교양이 있고 지혜가 좀 있는 민족이었으면 그렇겐 안됐을거요. 그런데, 그저 미국 말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그 특권이 돼서 대개 그런 사람들이 앞장을 서 가지고 아는 거 모르는 거 제각기들 번역두 해내고 되는대로 되는대로 그렇게 그랬으니 하나나 옳게 됐겠나.
그러니까, 이거는 다 상당히 인정을 하고 그러는 거니까 우리 말루 원어를 배워서 한다고 해두 다 먼저 한 거를 여러 가지로 참고 했을거요. 그래서 이제 신중히 말들을 골라서 했겠지만, 그런 걸 읽어 갈 때도 또 나름대로 "譴責"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 견책이라면 무슨 뜻이냐? -- 거 알 것 같지만 그것만이 아니고 더 좀 분명히 알자고 하면 자연히 자전도 찾고 그래야 돼 견책이 뭐냐, 또 다른 데서는 영어로는 training 이라고 그랬으니까 다르다, 그럼 거 뭐냐, 또 영어 다른 번역은 뭐냐. 그럼 그러다 마지막엔 원어는 그럼 어떻게 되었느냐? 희랍어 사전을 찾아보고 그래야지. 우리가 젊어서 역사공부 할 때의 Egypt학은 Egyptology는 당시에 났든 에집트 사람들하고 지금 사람이 그 문명이 발달하구 밝은 만큼 그렇게 언어가 그렇게 발달 돼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초에 그 애급학이 Assyriology, 앗시리아어, 충그스올로지 그런게 다 어떻게 발달했느냐 그러면 나일강에서 시작되지 않았어요? 그에 대한 이름도 몰랐다가 Napoleon원정군이 delta지방에 나갔다가 돌조각 하나를 발견했어. 그걸 보니까 세 나라 말로 돼 있는데 저희 나라 말로 썼고 희랍 말로도 썼고, 또 하나 앗시리아 말, Tunifor(?)로 썼구. 그런 걸 발견했어. 그러니까 이건 한 가지 얘기를 셋으로 썼을거다. 그래서 학자들이 그걸 놓구(希語만은 아니까)20년간을 연구해서 단어 하나를 알아내지 않았어요? 그게 이제 Egyptology 의 시작이란 말이야. 참 놀라워요. 학자들의 노력이, 그 진리 탐구열이 어디야! 누가 뭘 주길하나. 돈이 생기나. 그래서 Egyptology는 당시와 희랍보다, Egypt 문화가 더 발달됐다는 걸 알게 됐으니 얼마냐?
우리는 뭐 우리나라 옛날 이두문(吏讀文)을 제각기, 일본사람 한국사람 할 것 없이 학설이 제각기 있는데, 거기도 無私한 맘으로 학자들이 했어야 할 텐데. 누구의 파(派) 누구의 파 하는 건 순수하게 무사한 맘으로 하질 않아서 그래. 또 관리들까지 간섭을 해서, 정부의 저 할 일들이나 어서 잘 할거지 왜 그런데까지 참견을 해. 건 안되는거요. 감히 그럴 수가 없어. 이대통령 때도 한글에 손대고 그랬는데. 아직도 그런 폐풍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어원(語源), 문법, 표준어, 그런 거라도 생각이 있으면 어느 사람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무사한 맘으로 한번 밝혀보자!" 이렇게 - 참 인류에 대한 공헌이라면. 정말 그런 사람이 나야겠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고 하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건방지게 제 분야 아닌 것 두 간섭을 해서, 그래 그 학자들 썩게 만든단 맡이야. 돈 몇 푼 되는 거 주고는, 뭘 써내라 그런단 말이야. 당초에 그런게 심해지길 러시아 밑에서 심해졌는데 그래도 1차 대전 끝날 그 무렵엔 이렇게 타락은 안됐어. 이렇게 극단으로 이렇게 돼서 정치가 모든 거를 지배하게 되는, 이거 확실히 부끄러운 일인데, 이럴 수가 없어! 찬란한 서양문명의 장점 자랑거리가 있다면 합리주의인데, 물론 기독교적인 데서 본다면 합리주의만 가지고 돼? 건 안될꺼요. 지금은 합리주의 세상은 물론 아니지만. 그 합리주의의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 세례를 받고 나서 그 담에 많이 달라졌는데, 모처럼 그런 걸 받고 나서는 그걸 깨쳐 버렸단 말이야. 이게 문제야! 도리(道理)가 죽어버렸어. 지금 우리나라에서 도리가 없어. 도리가 그게 권위가 돼서 도리를 무서워하는 맘이 있어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좀 삼가기라도 하겠는데, 뭘 삼갈 줄을 몰라 "내가 이렇게 할 터인데 넌 뭘 그러느냐?" -- 그게 건방진 소리란 말이야.
그런데 그건 그렇더라도 사람의 마음에 지성이 있어서 그걸 길러가야겠는데, 다음의 세계를 길러간다는 사람들이 거기 그저 지성을 굽히고 복종해 가다니 그건 뭐요! 이거 이제 수십 년 지나면 세상이 달라지거든! 그 때 가서 이제 후회를 할꺼요. "야! - 그 때 이거 단단히 버렸더라면 좋았을걸." 그럴 거요. Galileo의 말 들으면 Galileo도 그다지 그러지는 못했다는 거야. 그래도 혼자말이라도 "그래도 지구가 돌아가는데 할 수 없지-" 그랬다는데 그만해도 그게 얼마예요. 지금, - 죽어서도 지금 말하고 있지 않아요? 그가 죽어서 하나님에게까진 못 올라가도 이성의 권위가 있지 않아요? 이성이 당최 대접을 못 받는단 말이야. "별거 없어, 잔소리 없이 따라와?" -그게 어디 얼마나 가나 보자 내가 살아서 볼 수 있을꺼야. 살아서 못보드라도 죽은 담에 가서 반드시 볼꺼다! 영원한 나라란 저기 있는 그게 참 나라지. 역사가 다 증거해서. 이 세상에 영원히 가는 권력이라는 거 없다! 거 사람들이 당장에 여기 이 "피부로 느낀다" 고 그래. 피부로 느낀다는 말부터가 틀렸어요. 피부가 마지막이냐? 피부로 느낀다는 거 고작 오죽하겠어요. 피부로 느끼는 것 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거 더 좋을텐데, "피부로 느낀다"고 그러지만 -그거 아주 인생관이 얕아진 증거예요. "피부로 느낀다, 피부로 느낀다 -."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모두 이 어려운 시대에 믿음을 가지고 나가려면 박해를 받는 거 많다! 그 전에도 많은 사람이 여럿이 죽었다. 그런 말을 한 끝에 뒤이어서 "이렇게 많은 중인들이"-, 그 증인들이라는 건 박해받고 있다가 죽은 그 사람들, 이 사람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그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여기 중요한 말은 "달려갑시다!" 예요. 그런데 달려가자면 어떤고하니 모든 짐과 끈질기게 우리 몸에 붙어 다니는 거 -여러 가지 욕심, 소위 이 육신에 붙어 다니는 거, 이러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그러는 거, 또 다른 말로 하면 죄를 벗어버리고, 그게 거기서 죄가 나오는 건데. 그것 때문에 빨리 못간단 말이야. 그것만 없으면 누구든지 가는 건데, 그래 죄를 벗어버리고, 그러니 누가 다른 사람이 방해를 해서 그러는 거 아니라, 내가 그거를 놓지 않기 때문에 그 믿음의 세계를 사람의 갈 길을 -희랍사람들은 그때 그 Olympic을 생각을 하면서 경주마당을 생각하니까. 빨리 달리려면 몸이 가벼워야지 다 벗어 버려야지 팬츠까지 벗을 순 없으니까, 그래 얽매이는 걸 벗어버려야 된다. 하늘나라에 달려가는 경우도 그렇다. 이 세상에서 좋다는 거, 요것도 못 놓고 조것도 못 놓고 그거 다 가지구 갈려니까 -피난 때 보면 잘 산대도 소용없지 않아요? 다 버리고 가야 갈 수 있지. 그거 아까워서 못 버리는 사람 잡구 있다가 죽고 말지 않아요?
"모든 끈질기게" - 끈질기게 우리 몸에 붙어 있어요. "끈질기게 우리 몸에 붙어다니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그 길을 꾸준히 갑시다"-하늘나라로, 진리의 나라로 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왜 바라보나, 우리 믿음의 길을 걸어야겠는데, 믿음이란 시작을 누가 했는고 하니 예수에게서 우리가 배워서 시작을 한 것이고, 또 목표도 그것, 요새말로 하면 우리의 목적도 수단도 예수다. 우리의 목적인 동시에 또 수단이다. 그건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이 그것이니까 "그 분은" -그 예수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적인 면을 말하고자 하는 것. "그 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진리의 나라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그 기쁨, 그걸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다" - 십자가란 참 부끄러운 것. 나라를 팔아먹은 놈, 살인 강도 만을 달아매는 형틀인데, 아주 형벌 중에 최중형인데. 거기 달렸으니 사람으로서는 제일 부끄러운 것. -그것을 상관 않으신다. 그러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의 옥좌(玉座)의 우편에 앉아 계시니라"- 이것은 세상의 그림을 가지고 설명을 하니까 이렇게 된다. 그런데 종교에서 걱정되는 건 이거야. 진리의 나라를 표시해 주기 위해서이 세상의 말을 빌어서 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사실이 돼버려 그래서 미신이 된단 말이야. 하나님의 옥좌는 무슨 옥좌가 있으며, 우편이구 좌편이구 있을 거 있나 그런데. 그게 이 세상의 말로는 옥좌다, 보좌다, 용상이다 그런 말을 하게 되는데 그런 데 붙들린단 말이야. 그거는 경전의 어쩔 수 없는 피복(被服)이 예요.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증오, 증오보다도 여기는 '반대'라고 그랬어. 반대를 받으시고 "참아내신 그 분을 생각해 보시요.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 나 같은 것은 또 이렇게 형편이 없지만, 나보다도 뭘로 보든지 우리의 믿는 거기에 대표되시는 그분을 그리워해도 보았고, 이제 그런 생각을 하면, 내 이걸 다 잊어버리고 이길 수가 있어. 그러니까 다 참을 수가 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까지 흘린 일은 없습니다"- 고생은 했지만 피 흘린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 마치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듯이 여러분에게 하신 격려의 말씀을 여러분은 잊었습니까?" "아들아"- 얘야 - 이건 잠언에 있는 말.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지람을 하실 때에 낙심하지도 말라 "이거는 "견책"이라고 해도 좋을거야요. 책망한단 그말이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에 채찍질 하신다‥‥‥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은 오기는 무엇이 왔던지간에 우리의 받는 이 어려움은 내가 무슨 살인강도이기 때문에 받는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완전히, 내가 옳은 것을 주장하고 옳은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일이 있게 된 거다 하나님의 꾸지람으로 알아라, 세상의 육신의 부모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하는 일이 있을 때는 꾸중하지 않느냐. 그러면 우리도 어려운 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신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도리어 그 우리 맘에 고마운 것이 될 수 있지 않느냐, 그래서 고통을 이기는 방법을 말하고 있어요.
지금 민주화 싸움을 하는 사람도 여기의 이 뜻을 생각하는 사람이 적어요. 다 뭔고 하니 "내가 기냐 네가 기냐?" 감정으로 하는 그 편에 많이 치우쳐요. 그러니까 그 싸움이 옳게 되지도 또 오래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 -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돼요. 이것을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깊이, "이 뜻이 무어지 ‥‥ ?" 이 세상 일이 어떻게 된 것이든지 간에 그대로 해서 이루어진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된 것으로 그렇게 아는 것이 기독교 역사관이요, 사회관이요, 인생관이요 그런 거예요. 그걸 알라 그말이야. 우리가 그렇게 안 생각한다 그런다면, 우리가 저 -그 사람을 상대해서 생각하니까 그러는거지. 하나님이 적어도, -그 점이 반대되는 점이에요 -하나님이 이 우주간의 모든 것을 통괄하는 하나의 뜻,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거긴 우리의 불평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거야요. 거긴 역사에 절대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그걸 아니 믿는다면 거 뭐 이러구 저러구 할 거가 없어! 아주 공공하게 내놓고 난 종교 안믿는다, 차라리 그러는 게 철저히 인간적인 입장에서나마라도 그게 차라리 옳을 거예요. 폭력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면 폭력을 힘껏 쓰는게 좋을 꺼야요. 이제 그건 다른 곳에서 다루겠지만, 적어도 이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겉 안 믿을 수가 없어. 이 눈앞의 당장엔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 지나온 역사를 봐서, 우리가 지나온 사건. 아주 모든 사람이 다 놀랍게, 빛나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이 다 -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믿으니까, 나도 내 무슨 확실하게 새로운 걸 가지고 거길 부정할 수 없는 게 그게 하나님이다 그 전통적인 그것으로부터 오는 그 진리 인정해야 옳은 것이고, 내가 감히 그걸 아니라고 할 자격이 없어. 그 확신 내가 모른다면 모를까, 이날까지 그런 법이 없지 않아요? 우린 이렇게 역사적인 존재니까, 그 점이 자라서 자라서 더 높은 자리에 가는거니까, 그걸 무시하고는 안돼요.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지람 하실 때에 낙심도 말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에 채찍질 하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내십시오.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는 누구나 다 아버지의 견책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견책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생아나 다름이 없고 참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가 우리를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아버지께는 더욱 더 잘 복종해서 진정한 생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신의 인간적인 아버지에 대해서두 우리가 그렇지, 그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시지 - 그러고 그걸 감당을 하거든 하물며 영적인 모든 인류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야 더구나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사실은 이 육신의 아버지가 자기도 잘못이 많이 있으면서 두 자기 아들을 보고는 잘못하면 때리고 그러는거는 자기도 모르게 우리 속에 있는 도덕적인 정신적인 법칙에 의해서 그러는 거니까 알지 못하구래도 그렇게 하는-, 그러니까, 그렇게 따져 올라가면 모든 원인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누구에게선지 모르지만 그 절대의 권위에, 거 누가 만든 거 아니야. 그렇게 믿는 건. 그걸 알아야 한다.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잠시 동안 자기 판단대로 우리를 견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익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처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우리를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거두어서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 영어번역에는 여기에 training이란 말을 썼는데, 여기 이제 훈련이라는 말이 나오긴 나왔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訓鍊", "training"이나 "단련" 그런 말이 좋다, 그러고 싶어요.
이 얘기를 왜 하는고 하니, 나는 요새 자꾸 생각을 하는 게, 뿌리라는 말을 자꾸 하게 돼. 약 2년 전에는 기도회에 가면 "우리는 뿌리파다"는 그 노래를 많이 불러요. 그 노래가 아마 흑인에게서 나온 것 같은데 -그것이 한국 상황에 들어와서 점점 달라졌어. 그래서 추가가 돼서 "정의파"다, "언론자유"라는 말도 들어오고, 그 담에 내려오다가 내용이 자꾸 달라졌어. 그래 거기 나오는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 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그 말이 참 좋은 말이 예요. 거기 그 뿌리라고 하는 말이 그게 왜 무엇 때문에 나왔는가 했는데. 저번에 박형규 목사가 설명을 하는 걸 듣고야 그걸 내가 알았어. 그걸 왜 무엇 때문에 그랬나 하는걸. 그게 그 radical이라고 하는 것-사상에 radical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사상은 극단적이어야 한다 그말이야. radical이라는 거 극단적이란 말인데. (칠판에 radical이라고 쓰시고) 요게, radical의 "rani" 요게, Radix에서 온건데 요게 본래 뿌리란 말이예요. root. 그래서. radical이라는 거 전에 그런 말 했지만 사상은 radical해야 쓴다 그 말이야. radical의 반대는 무어겠어요? 사상이 - radical이란 아주 급진적이다. 철저하다. -한문으로는 '極' 이예요.
그런데 세상에. 아주, 웃지 못 할 일이 하나 있어. 우리나라의 이게 태극기인데, 극중에서도 아주 太極이라-그래 태극기인데.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철저하지 못한 사람 없어. 그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중충-어반중- 하게. 매운 것도 아니고 짠 것도 아니고. 음식은 그렇게 맵고 짜게 먹으면서 그렇게 맵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마음은 그렇게 도무지 맥이 없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거 우리 큰 결점이예요. (칠판에 그려 놓은 것을 가리키면서) 저거는 태극기에요. 저거는 한-끝, 우리나라 말에 한-끝이라고 그래. 그건 물론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그러면, 우주의 근본이 뭐냐? 옛날 할아버지들이 우주의 근본이 뭐냐- 그럴 때면, "우주의 근본이 뭐야, 이거지." 극단으로 말하면 원이지 뭐. 뭐 완전한 거. 사람보다는 -사람이구 무엇이구 할 것 없이 우선 완전한 것일 거니까, 그렇게 표시한다면 그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원을 그려 가지구- 그래, 원불교 모양으로 이렇게 원을 그려 - 원불교의 원이 이때 시작된 거 아니예요, 원래부터 있던 거예요. 누구든지 거 생각이 나오면 자기네가 한 것처럼 다 횡령을 하니까 안 됐어. 어째서. 그게 자기네가 만든게 아닌데- 옛날 옛적부터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이거는 이제 생의, 그저 무엇인가 이런 게 있다. 그러는 거예요. 있는 건데, 있기만 하면 되나? 그래 이게 가만히 안 있고 활동을 해. 그래 그걸 자연이라구 그래. 자연이 나와. activity--- 자연이 나온다고 그럴 때에는 여기 이것(가)만 생각하게 돼. 그러니 무엇이 나온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이것을 둘로. 그러니까 태극에서 양의(兩儀)가 나온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 음양이라는 거 하나는 음(陰)이구 하나는 양(陽)이구 하는 게 그거예요.(나) 그저 이름을 음이라 양이라 붙였지, 어쨌거나 반대되는 두 구분이 있다 그 말이예요. 그 반대되는 구분이 있으려니까 가만히 있지를 못해 그래 가지고 여기서 무엇을 또 얻으려니까 가만히 안 있고 생명의 꿈틀거림을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려니까 S자가 돼. (다) 고대 우리나라의 닭이요 고려자기의 곡선이요 지붕의 곡선이요 이런 것들이 모두 이 S자로 되어 있어요. 그걸 Elongated S라고 그래.
모든 걸 S자로 표시하게 돼요, 그건 자연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 활동을 하는데 어느 물결도 굽실 굽실, 뱀도 굽실 굽실, 버리지도 굽실 굽실, 인체의 모양도 활동도 본래 S자 모양으로 그렇게 되어 있고. 활동이 모두 그래 그걸 표시한거예요. 그것이 이 그림이예요(다) .이 자연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사람은 안 그렇단 말이야.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쩌면 이 태극기를 국기로 골라 가졌는데 꿈틀거릴 줄을 당초 몰라. 죽었어 그저! 죽었어. 나도 그 생각을 못했어. 오늘 이 radical이라는 얘기하려니까 '태극기가 그거 아니야?' 그 생각이 나서 오늘 지금 하는 얘기요. 어쩌면 태극기를 기로 가졌는데 왜 그렇게 맥이 없을까.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거 - 그거 무슨 정신이 있어서 했겠어요? 그거 뭐 저 미국 가다가 할 수 없어서 남들이 다 국기 있다는데 우리도 있어야지 않나? 무엇으로 할까 그러다가 갑자기 그렸다는데 --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태극을 써온 지는 오래요. 고려시대에 유물도 나온 거 있지 않아요? 적어도 고대 시대에 있는 것 중에 태극이 들어 있어요. 반드시 뭐 그 당시에 중국의 주역이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지만 그런거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거는 우리만이 아니고 세계적으로 많이 있어요. 불교의 만(卍) 자도 무어냐. 이게 만자는 조금 빳빳해 있는 거구, 요것을 이렇게 좀 하면 역시 S자가 돼. 히틀러의 Hagen Kreuz라는 것도 이건 뒤집어썼지. 기독교의 십자가두 좋은 데서 나온거요, 그렇게 주장하는 학자도 또 있어요. 애급사람들이 가지는 여기도 십자가가 들어 있다는 거예요 임금이 손에 이렇게 자기 표시로 가지고 있는 여기에도 십자가 있다는 거. 히틀러의 하아겐 크로이츠는 열십자가에다가 불교의 만자의 반대로 그려 넣은 거 그 기본은 역시 꿈틀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꿈틀거리는 것이 다 어디서 나오느냐. 꿈틀거림에는 거기에 중심점이 있어야 한다. 생각이 비고 비어서 완전히 자기부정이 돼서, 비인다는 의식조차 없는 자리에서 극(極)에 가야 한다. (뿌리에까지 가야 한다) 어느 극이 있어야지. 어느 극에 가 닿아야 돼. 그래, 이 생각은 왜 하는고 하니 요새 자꾸 생각이, 우리 지금 우리나라의 이 민주주의 싸움이 지금 어떤고 하니 수렁에 빠졌다. 수렁에 빠졌다. 그래서 우리 저번 주일날 얘기한 게 그거예요. 수렁에 왜 빠졌는고 하니 우리가 여기서 빠져 나오겠다구 내간에 -나는 뭐 그리 열심으로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 힘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빠져들어 아마 우리가 하면 할수록 정부에선 더 극단적으로 나오니까. 그래 5년 징역이다. 10년 징역이다. 한 놈 잡아넣어라. 두 놈 잡아넣어라. 열 놈 잡아넣어라. 사건이 점점 더 생겨. 법률이 점점 더 지독해지고 압박이 더 심해져 요새 동아 지상에서 한 것 보면 점점 더 심해.
그러니 이거 뭐냐‥‥ 남을 나무랄 거 없이 우리가 반성을 해 보면 어떤고 하니. 우리는 지금 수렁에 빠져 있다 그말이야. 허우대고 있어 그래. 어디가 근본에 가닿은 데가 없어. 허공에 뜬 셈이지. 그럼 그럴수록 점점 더 빠져 들어갈 밖에 없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어느 뿌리에 가 닿아야지. 우리의 이 발가락이 한 가락만이라도 좋은데 어느 바윗돌에 가 닿기만 하면 내가 거기서 박차고 솟아나올 것 같은데. 거기가 닿는 데가 없으니까 안 된다 그 말이야, 거기 앉아서 얘기 하는 걸 들으면 다 모두 그래요. 잘 안 된다구. 그래. 내가 벌써 그 얘기를 한지가 오래지‥‥ "이거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일이다. " 라고, 말은 다 이러면 된다고 하지만 그럼 우리 고양이 목에 방울 달자 그러면 쑥 막혀 버린다 그 말이야. 왜 그런고 하니 그걸 달러 갈 놈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야.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만 하면 고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러 올 때에 달랑달랑 소리가 날거니까 우리가 다 도망가서 살수가 있는데, 그럼 좋다. 달자-. 그럼 누가 달겠느냐 그러면 한 놈도 나서는 놈이 없지 않아? 그래 그것이 밑뿌리 없는 거란 알이야. 그래서 이제 내간엔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일은 10년도 넘기 전에 벌써 달았다면 달았어. 몰라 내가 고걸 언제 그랬는지 몰라 하지만 그 다는 방법이 무언고 하니, 어느 쥐 하나가 제 목에 방울을 달고 고양이한테 가면 고양이란 놈이 그것을 집어 먹을거니까 그럼 방울이 고양이 뱃속에 들어 있을 거니까, 그럼 언제든지 우리에게 오기만 하면 소리가 날거니까 그럼 피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건. 내가 죽기 전엔 안 된다는 그 말인데. 다 모두 우리의 하는 일이 극에 간 것이 없어. 극에 간 것이 없으니까 안 된단 말이야. 그래 그러면 요새 우리가 읽던 「치허극 수정독(致慮極守靜篤)이면 만물(萬物)이 병작(竝作)하니 오이관기복(吾以觀其復)이라는 그거 알게 된다 그 말이야.(노자 제16장) '수정독' 이라. 하는 일의 생각이 극점엘 가야 돼. 빌고 빌고 빌고 하는데 마지막에 비는 그것이 철저하게 돼서. 빈다고 하는. 그것조차도 없어지는 빈다고 하는 그 생각조차도 없어지는 그런 자리엘 가야 되는데. 거기엘 가면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면. 자아를 철저히 부정해 나를 완전히 부정해야 돼, 나를 철저히 부정해서 내가 나를 부정한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리만큼 철저히 부정해 버리면 - '내가 나를 부정해야지, 나두 지금 어느 징도 부정을 하고 있지' 그렇다면 그거는 아직도 채 안 죽은거요. 그래 그전에도 얘기 했지 않아요? 뭐 저 참선한다고 그러구 하다가. 선사가 "이 자식아 죽어 봐 죽어야지 죽기 전에는 안 된다" 그러니까 그럼 내가 죽어야겠다 하고 이제 밥을 안 먹고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 선승이 '저놈이 죽긴 죽나보다'--그래 "너 죽었느냐?" 그러니까 "못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아직두 안 죽었구나" 그래서 그때사 깨달았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제 죽으련다. 내 이제 아무래도 죽는다-그건 아직도 못 죽은거란 말이야. 정말 죽었으면 그것도 없을 것 아니냐-. 그게 극(極)이라는 겁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