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일제 치하 속 문을 연 신학교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됐다. 교회에서도 민족의 위기를 자각했는지 1911년 경성의 용산신학교에는 성소자가 많았다. 소신학교에 70여 명이 새로 입학해 재적 인원이 96명이나 됐다.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수였기 때문에 학교로서는 건물을 새로 지어야 했다. 그해 봄 설립된 대구교구에서도 16명이 용산신학교에 진학했다. 이 새내기들은 서상돈의 재종손 서정도와 신암공소 김승연 회장의 아들 김구정을 비롯해 거의 다 공소를 여는 데 공로가 큰 구교우집 자녀였다.
지방에서 오는 신입생들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김구정은 난생처음 기차를 탔고, 한강을 봤다. 용산역에서 내렸다. 붉은 벽돌의 학교와 성당이 13살 소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오는 대로 교장 신부에게 인사드리고 번호를 받았다. 그 번호는 학생 시절 내내 그의 표시가 될 것이었다. 동행한 부모들은 잘살라며 떠났고, 소년들은 울기에도 너무나 낯선 환경에 남겨졌다. 그들은 수십 년 후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라는 교가를 부르는 소년들의 까마득한 선배였다.
대구교구는 조선 교회 교세의 1/3을 나눠 받고 출발했다. 성직자는 주교 1명, 선교사 15명, 조선인 신부 5명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1900년부터 6년간 용산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는 신학교에 관심도 깊었지만, 사제가 부족했다. 두 교구의 주교는 용산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같이 교육하기로 합의했으나 학교 시설이 허락지 않았다.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도 없었지만 신학교 설립부터 서둘렀다. 그는 부임 직후 즉시 관할하고 있는 각 본당에 신학생 후보를 천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주교는 재학생 6명에다 신입생 16명을 보탤 수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조선인 사제가 선교할 때 조선은 마침내 가톨릭 국가가 된다고 믿었다. 그는 유럽 곳곳에 “조선인들은 아들을 바치니 신학교를 하나 지어 달라”고 호소했다. 주교는 익명의 은인으로부터 거금을 받자 서상돈이 헌납한 남산동 언덕의 땅에 학교를 세웠다. 개교 직전에 1차 대전이 시작돼 교구 소속 15명의 선교사 중 10명이 징집으로 자리를 뜨고 원조금은 줄어들어도 주교의 의지는 확고했다. 주교는 신학교 교사를 ㄴ자로 지어 70여 명을 수용할 공간을 확보하고 개강을 서둘렀다. 그는 건물이 완성되면 ㄷ자가 되리라고 메모해 뒀다.
1914년 10월 1일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서울에서 내려온 18명을 포함해 총 59명으로 문을 열었다. 용산신학교로부터 전입한 학생들은 첫 입학생들보다 높은 학년에 편성됐다. 김구정은 상급 라틴어반에 속했다. 샤르즈뵈프 신부가 신학교장, 페셀 신부가 교수 신부로 이들을 맞았다. 페셀 신부는 이듬해 줄리앙 신부와 자리바꿈했다. 1918년부터 김승연 신부가 라틴어 교수로 합류했다. 평신도 교사 홍순일도 있었다.
조선의 어두운 미래 속 치뤄진 삭발례
김구정은 1918년 2월 23일 세속을 끊고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한다는 삭발례를 받았다. 당시에는 삭발례를 받은 후부터 성직자 반열에 들고, 수단을 입을 수 있었다. 이날 수품자는 사제 1명, 부제 1명, 차부제 1명, 삭발례 9명이었다. 주재용 신부가 이때 사제로 서품됐다. 식장에는 교구 전역에서 교우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이렇게 각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조선 사회는 점점 어려워졌다. 더욱이 1919년 1월 22일 아침, 고종 황제가 68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틀 후에는 황태자로 책봉돼 11세 때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이 일본 황녀와 강제 혼인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고종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급기야 고종의 장례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대구에도 3·1 운동의 여파가 밀려왔다. 이 거족적인 애국 운동의 물결은 성 유스티노신학교에도 닿았다. 신학생은 원칙적으로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으나 면회, 편지 등은 모두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방학 때는 집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김구정 등 상급반은 자신들이 이미 사리를 파악할 나이에 나라가 일본에 점령됐다. 그들은 해마다 일본인이 늘어나고 일본 관습이 시행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젊은이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드망즈 주교도 이를 읽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들이 서울과 여러 곳에서 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고 많은 사람이 체포됐지만, 신문들이 침묵한다고 지적했다. 3월 5일 저녁 신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는데, 교장이 말렸다. 주교는 ‘학생들은 화가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를 잃는 학생이 나올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도 이 운동이 크게 확산되리라 예견했다.
성 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3월 9일 오후 약전골목의 만세 시위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시위는 3ㆍ1 운동 경상북도 조직부장이며 교회학교인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이 주도하고,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는 홍순일이 사회단체와 연락을 담당했다. 김하정의 동생인 김구정은 독립선언문 복사와 유인물 프린트를, 서정도는 태극기 수기 제작 책임을 분담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계획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져 당일 아침 두 학생은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의 책상 위에는 이들이 만든 선언문 뭉치와 태극기 다발이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주교에게 알려졌다. 주교는 순종하지 않는 신학교를 원치 않으며 또 신학생들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소요가 한 가지라도 일어난다면 즉시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겠다고 냉혹하게 말했다. 주교의 단호한 결정에 교장 신부는 학생들에게 읍소했다. “나라가 독립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희의 소명은 따로 있다. 그것은 독립되는 너희 조국 동포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그는 ‘신학교가 문을 닫아야 한다니’라며 한탄했다.
덕망 높은 새 신학교 교장 샤르즈뵈프 신부
샤르즈뵈프 신부는 뮈텔 주교가 주교로서 부임할 때 함께 입국해 용산신학교 교장, 조선교구 부주교 등으로 일하다가 1900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로 발령받았다. 그는 양국에서 교수로서나 영적 지도자로서나 탁월함을 보였다. 대구교구가 창설되자 드망즈 주교는 미래의 대구신학교 교장으로 그를 초빙했다. 그는 이상적인 신학교 건설을 구상하면서 대구에 부임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주교로 또는 대수도원장으로 천거됐으나 그때마다 사제 양성에 전념하겠다며 사양했다. 새로 개교한 신학교의 교장이 된 뒤 그가 지닌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학생들은 학칙보다도 교장 신부의 탁월한 덕성에 감복, 훈도됐고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개교 몇 년 만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학생들은 한 사람씩 교장과 대담을 했는데, 많은 학생이 교장의 곡진한 말에 감동했다. 교장 신부는 두 주동 학생에게는 “집에서 근신하고 기다리라”며 귀가시켰다. 그때 시민들의 만세 소리가 대구 시내에 울렸다. 그날 밤 교장 신부는 주교에게 ‘신학생들이 반성하고 순종했으며 주교께 사죄드리고 싶어 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4월 3일에도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 만세 참여 움직임이 있었다. 주교는 일본의 보복을 염려했다. 이미 외국인들에 대한 통제가 시작됐다.
대구의 3ㆍ1 만세 시위는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시작해 4월 28일 달성군에서 끝맺을 때까지 이어졌다. 대구에서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천주교 신자도 많았다. 해성학교 학생들은 물론, 명도회원들, 또 신학교를 떠난 옛 신학생도 있었다. 한편,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는 평소보다 40여 일 앞당겨 5월 1일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건강이 좋지 않은 교장 신부의 요청, 신학생들 사이에 일고 있는 만세 운동의 여파, 창궐하는 각기병을 가정에서 보리밥 식이요법으로 치료해 보려는 시도 등이 고려된 조치였다. 신학교에서는 이 기간 개교할 때 못다 한 한쪽 날개를 증축해서 ㄷ자 건물을 완성했다. 주교가 1년여 전부터 미국에 원조를 청해 비용을 마련해 두었던 공사였다.
학교는 넓어졌다. 3ㆍ1 운동 주동자 두 학생에게 퇴학 통지서는 오지 않았다.
연재를 시작하며
교회사는 하느님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학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소명을 한순간에 발견하고 결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면한 현실에서 자신의 소명을 꾸준히 추구해 나가다가 마침내 깨닫고 완성해 내기도 한다. 지원(志園) 김구정 선생은 눈에 보이는 재물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보이지 않는 역사를 읽어낸 분이다. 그래서 그가 읽어낸 가치를 찾아내는 일은 우리의 일상적 선택 과정에서 하나의 지혜를 주게 될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7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