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시 모동면 백화산 아래에 자리한 옥동서원(玉洞書院)은
조선 전기 문신인 황희(1363∼145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532호(2015.11.10)로 지정되어있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20여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한 분으로서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종 13년(1518)에 백화서원으로 세운 이 서원은 숙종 41년(1715)에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정조 13년(1789)에는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옥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 외에 제물을 마련하는 전사청과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 등이 있다.
보배를 품고 이 문을 출입한다는 뜻
강당은 중앙마루와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남쪽은 착로재, 북쪽은 탁장재, 마루인 강당은 온휘당(蘊輝堂)이다.
탁장재는 "옥을 다듬어야 아름답게 문채가 드러난다"는 뜻이고
착로재는 "옥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잘 다듬어 문채가 드러난다"는 뜻
사당인 경덕사는 황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식· 황효헌 ·황맹헌· 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황희(黃喜,1363~1452)는 고려시대 개경(개성)출신으로
본관은 장수이고 초명은 수로, 자는 구부,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이다.
고려말 조선초기의 재상으로
고려시대에는 복안궁 녹사로 관직에 올랐으나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으며
조선조에는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형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부사에 이르렀다.
6조판서를 거쳐 정승 24년을 역임한 청백리였다.
사후 순충보조공신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문루는 2층 형식인데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
위층의 남쪽은 "진밀료" 북쪽은 "윤택료"
중간에는 "청월루"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진밀은 "공부를 세밀하고 상세하게 한다"는 뜻이고
윤택은 "공부를 진밀히 하여 몸과 마음을 윤택하게 한다는 뜻"
첫댓글 유네스코에 등록된 9개서원도 향사를 낮시간대로 변경하는 추세이나 옥동서원은 아직도 전일입제후
丑時에 享祀를 지내고 있읍니다
가까운곳도 아닌데 심야에 출입이 만만치 않겠습니다
정보 고맙습니다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하는 옥동서원의 위용이 대단하고,
파란만장한 세월의 흔적을 받으면서 황희 정승 큰 어른답게 500여년을 지켜온 서원 여러 건물들의 고귀한 색상이 너무나도 훌륭합니다.
안천님의 한여름에 흘린 땀방울의 댓가로 문화재가 다시 살아나는듯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건강 꼭 유의하십시요
격려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