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명의(名醫)가 남긴 의서(醫書)
위에 논한 명의의 저서(著書)는 생략(省略)하고 아래와 같은 새로운 명의(名醫)를 위주로 소개(疏槪)하고자 한다.
허임(許任)은 자신의 집안의 병(病)을 고치기 위하여 배운 침구술(鍼灸術)이 위대한 명의(名醫)로 지금 인정되며, 자신의 독특(獨特)한 이론(理論)으로 수립(竪立)한 보사법(補瀉法) 등을 상세히 기록(記錄)하여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남긴 명저(名著)라 아니할 수 없다.
허준(許俊)은 유명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編纂)한 선조 때의 명의(名醫다.
선조의 어의(御醫)로서 공이 큰 업적(業績)을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保國崇錄大夫)의 작위(爵位)를 추서(追書)받았다.
허준은 가락국의 수로왕비 허 씨의 직계20대손 이지만 처(妾)의 몸에서 태어나 중인(中人)의 신분(身分)밖에 안 되었다. 우연히 풍류 명의(風流 名醫) 유의태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의학(醫學)을 전수((專修)받아 29세에 의과(醫科)에 급제(及第)하여 내의원(內醫院)에 근무하게 되었고, 등과(登科)한 다음 해에
어의(御醫)가 되었다
.
허준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 지금의 예로 가정요법(家庭療法)과 상식(常式) 및 처방(處方)을 모아 태산집요(泰山輯要), 언해 구급방(諺解 救急方)을 펴냈으며, 태의(太醫)인 양예수(楊禮壽)를 비록 하여 정작. 김응택.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그 유명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기 시작 하였으나 일년후 정유왜란(丁酉倭亂)이 일어나 참고서적과 의사(醫師)들이 흩어져 매우 안타가운 역사(歷史)가 있었지만 난리(亂離)가 끝난 후 선조는 궁중에 남아 있던 500여 권의 책을 허준에게 내리고 혼자서 편찬(編纂)하도록 하였다. 허준은 십년 가까이 860여 가지 문헌(文獻)을 참고 하면서 편찬(編纂)에 몰두 하다가 선조가 병(病)에 눕게 되어 허준은 온갖 정성(情性)을 다하였지만 숨을 거두고 말아 이에 등극(登極)한 광해군은 간신들이 선왕을 못 고친 허준을 역적이라는 말에 허준을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허준은 집념(執念)으로 마침내 15년만인 1610년에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完成)하여 3년 후 궁중(宮中)에서 책(冊)으로 발행(刊行)하였으며, 오늘에 이르러 일본(日本)과 중국(中國), 독일(獨逸)등지에서 번역판(飜譯版)이 나왔고, 영문판(英文版)으로도 번역(飜譯)되고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침구판(鍼灸板)이 너무 간약하게 나왔으나 욧점으로 정리되어 있으므로 침구(鍼灸) 학술(學術)에 기틀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임언국(任彦國)은 죽은 송장도 살린다는 침술(鍼術)의 신기(神技)를 가졌다하여 조정에서 그를 서울로 모셔와 치료케 하니 치료받고 낳은 자가 수만에 달하므로 왕이 의복(衣服)을 하사(下賜)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치종비방(治腫秘方). 치종지남(治腫指南)등이 있는데, 현대의 수술과
비슷한 의술(醫術)을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위에 명의(名醫)의 저술처럼 책(冊)으로 남기지는 아니 하였지만 침구(鍼灸)의 일화로써의 유명한 의술(醫術)을 남긴 명의(名醫)도 손으로 곱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4) 일본(日本)의 침구(鍼灸) 역사(歷史)
日本은 우리나라의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침(針) 철침(鐵針)과 동침(銅針), 폄석(砭石)과 골침(骨針)과 뜸(灸) 기술과 침구학(鍼灸學)을 전수(傳受)받아 많은 부작용과 실패 속에서 연구와 연구 속에 신(新)침을 만들어 부작용과 죽음을 개선하게 되었으며 또 전자기술(電子技術)의 발달에 접목(接木)시켜 양도락, 전차침(電子針), 저주파치료기(低周波 治療機),물리치료기(物理治療機) 등 여러 가지 응용 기기(器機)를 만들어 전 세계(全世界)에 전파보급(電波普及) 및 선두주자(先頭走者)로 발전 되어가고 있다. 한 예로 수천 년간 그 효능의 메커니즘의 수수께끼로만 내려오던 동양의학(東洋醫學)이 각종 첨단기기(尖端器機)의 개발로 서서히 베일에 쌓여있던 것을 벗겨내고 있다. 침구(鍼灸)와 한방약(漢方藥)으로 대표되는 동양의학(東洋醫學)은 그 치료효과(治療效果)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西洋醫學)과는 달리 치료에서 효과에 이르는 메커니즘을 과학적(科學的)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의료현장(醫療現場)에서의 본격적인 활용이 부진한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 日本은 의료전자기법(醫療電子技法)과 생물공학(生物工學)적 기법(技法) 등을 첨단기술을 써서 한방(漢方), 침구(鍼灸)의 기본개념인 증(症:병의 현상). 경혈(經穴)등에 관한 과학적(科學的) 입증(立證)에 나서고 있다. 일본과학기술청(日本科學技術廳)은 지난80년부터 대대적으로 연구에 착수(着手)하여, 최근에는 연구결과를 밝히는데 이어 동경의학부(東京醫學部)등 7개 대학(大學)과 국립 병원 의료 센터 등 9개연구소의 연구진을 동원(動員)하여 5년 만에 (1985년경) 동양의학(東洋醫學)의 신비(神秘)를 일부나마 밝혀낸 것은 앞으로 한방(漢方)의 과학적(科學的) 체계정립에 크게 기여(寄與)할 것으로 본다. 침구(鍼灸)의 효능(效能)을 알아보기 위하여 사람. 토끼. 흰쥐 등을 대상으로 한 전자현미경 실험에서 흔히 針을 놓은 부위인 경혈(經穴)은 전기(電氣)저항이 적어 전류(電流)가 잘 통하는 현상을 보였으나, 경혈(經穴)이 아닌 부위는 전류(電流)가 잘 통하지 않아 경혈(經穴)이 인체 내(人體內)의 전류(電流)의 흐름을 유도하는 맥(脈)이 되고 있음을 증명(證明)했다.
침(針)이 혈관의 피 흐름을 호전(好轉)시키는 것과, 針이 마치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첨단의학기재인 “포지트론CT”를 써서 실험하여 수용 체의 감지와 針을 놓으면 분비되는 엔도르핀이 뇌 부분에 집중되어 針의 마치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증(實證)됐다.
또 여러 가지 검진(檢診)과 실험(實驗)을 통하여 동양의학(東洋醫學)을 풀어나가는 것이 가히 현세대의 첨단침구술(尖端鍼灸術)의 정립(定立)과 학술(學術)의 선구자(先驅者) 측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여기에 반문(反問)할 자가 있을 수 없다. 일본은 나라와 각종 연구센터가 합작(合作)하여 연구개발(硏究開發)하고 있는데, 동양의학(東洋醫學)의 선두주자(先頭走者)의 자리에 왕립(王立)함을 바라보고 있어야 함이 본인(本人)으로써 무능(無能)함을 안타가워 할 뿐이다. 그러나 인류(人類)를 위하여 박수(拍手)를 보내고 쉽다.(오해(誤解)가 없이 인간(人間)을 사랑해야 할 본인(本人)으로써…….)
(5) 세계화(世界化)의 침구(鍼灸)
침구(鍼灸)는 이제 전 세계적(世界的)으로 보급(普及) 및 발전(發展)으로 공인화(公人化)되어 있다.
아직 우리나라는 침구학(鍼灸學)에 대한 인식부족(認識不足)으로 사장(死藏)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 매우 안타가운 실정(實定)이다.
우리나라가 침구술(鍼灸術)을 일본에 전수(傳受) 시켜준 나라로써 자부심은 접어두고 세계화의 침술학(鍼術學) 속에 과연 한국은 어느 위치에 있을까?
진정으로 침구인(鍼灸人)의 한 사람으로써 무어라 표현 하여야 좋을까?
전수(傳受)받은 나라는 세계화(世界化) 속에 일원(一員)으로 선구자(先驅者)적인 발전(發展)에 발전(發展)을 거듭나고 있는데, 아직도 이웃 사람을 마음 놓고 치료(治療)할 수 없는 이 나라의 실정(實情)에 목 놓아 통탄(痛歎)할 심정(心情)이다.
“鬱憤 下面 無旕 河理 愛通 河面 武旕 河理, 貴먹銀 長拰(?) 內家 治料 못海怎 李 듣地 못海 못河는 唟乙 ......” (한자 용어는 격에 맞지않음) 각설하고,
루이스 베레리오즈는 만성병과 사혈(瀉血)에 침 치료(針 治療)만큼 효과(效果) 있는 것이 없다고 주장(主張)하였고, 레파지는 중국(中國) 의학(醫學)의 역사(歷史)적 연구를, 당트르는 중국(中國) 침술론고(鍼術論告)를 발표하여 고대 중국(中國)의 침술(鍼術)부터 근래에 내려오는 침술(鍼術)까지 일목요연하게 이론(理論)에 입각(立脚)한 고증(考證)을 세계화(世界化)에 기여(寄與)하게 했다.
또 미국이란 서양의술이 발달한 나라도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시 針 마취로 수술 하는 신비를 보고, 針의 신비를 연구하라하여 의학자들이 針의 효능에
경탄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鍼術마취를 1972년5월15일에 제임스 폭스 박사가 23세 된 뉴먼 군(君)의 갑상선 비대증 수술에 실현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닥터만은 65세 종양 환자에게, 화이트박사, 디몬드박사, 로젠 박사 등이
針마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하였다.
영국의 맥의 노날드 말자크 박사는 침치료(針治療)의 학술적 이론인 “게이트 조절론”을 발표하였으며, 이탈리아 란자 박사는 고도로 발달된 서양의술의 미비점을 심오한 한의학(漢醫學)으로 보충시키기 위하여 針 치료가 필요 하다고 역설 하였다.
이토록 세계화된 침구학(鍼灸學)의 역사 속에 잠자는 우리의 침구술(鍼灸術)은 언제 깨어날까? 용천(湧泉)에 針을 찔러야 잠에서 깨어날까!
세계화 된 것은 근래의 일이지만 최초로 유럽에 소개된 것은 17세기 중국에
와 있던 기독교 선교사들이 “아큐펑트라”라고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며, 서양에선 1663년 화란인 텐 리네가 상세히 일반에게 알렸고, 1710년에는 켐퍼가
그의 “중국 견문록(中國 見聞錄)”에 이를 기록으로 알렸다.
그러다가 제대로 소개한 사람은 원(元)나라에 와 있던 프랑스 총영사이며,
상해(上海)의 국제 재판소 판사였던, 술 드 모랑이 기술을 배워 자기나라에
소개했던 것이다.
이 후에 흥미꺼리에 지나지 않던 동양의술(東洋醫術)이 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의학자들이 서양의술(西洋醫術)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동양의학(東洋醫學)으로 많이 풀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국제 침술학술 대회(國際 鍼術學術 大會)를 열어 많은 연구 발표와 임상 경험을 발표하고 있으며 1973년 서울 국제 침술학술대회가 열려 세계 공통 약호(略號)를 결정하였고, 경락(經絡) 이름도 정확한 세계 경락(經絡)으로 기호까지 정하는 수확(收穫)도 거두었다.
미국은 각 주마다 법적으로 침술사(鍼灸師)를 인정 하고 또 많은 환자를 치료하여 병원에서도 침구학(鍼灸學)을 연구 하는 의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침구학술지(鍼灸學術誌)까지 발간하면서 연구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침구술(鍼灸術)을 배우기 위하여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인 차원(次元)에서 볼 때 전문 침구술(鍼灸術)의 학교가 있습니까? 몇 군데 논(論) 하시겠지만 진정 침구술(鍼灸術)의 전당(全黨)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한의사(韓醫師) 양성으로 졸업한 침술사(鍼術師)로, 사회의 침술사(鍼灸師)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손 곱을 정도가 아닙니까!
위대한 동양의술(東洋醫術)의 선구자적인 우리나라 침구술(鍼灸術)이 세계 속의 무엇을 선도 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아니 태국 같은 나라에 까지 침구술(鍼灸術)의 전문 양성 학교가 있어 외국인을 받아 침구술(鍼灸術)과 학술에 세계 보급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배우시고자 하는 의욕 속에 애국적인 마음과 더 나아가 세계적인 침구학(鍼灸學) 박사가 되어 국위선양(國威 宣揚)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