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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
한반도내에서 최초로 구석기시대가 발견된 것이 50년 이상 되었고 석장리와 굴포리유적 발견만 해도 이미 30년이 되어가고 있다. 그간 다른 일반 한국고고학과 마찬가지로 구석기연구도 량적 그리고 질적인 팽창을 해왔다. 유적의 수효도 이제 수 십곳을 헤아리게 되었고 전국각지에서 구석기문화가 발견되고 있으며 동굴유적·야외유적 그리고 바위그늘유적 등의 다양한 종류의 유적이 드러났으며 동물뼈가 공반된 유적 그리고 고인류가 드러난 유적 등도 발견되었다. 연구인원도 초창기의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그들의 제3세대가 나와서 활약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간 구석기고고학은 70년대부터 연구를 종합화한 몇 편의 논문과 회고형식의 논문에 의해서 업적을 평가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고고학 전반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학사가 발표된 적은 없다. 그것은 한국고고학의 전반에 걸쳐서 역사가 길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석기연구에 있어서 ’80년대에 급격히 성장하여 한편으로는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방법론을 시도하려는 노력과 아울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초창기 이후의 여러 경향이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구석기자료의 현황파악의 토대 위에서 그간의 발전과정을 복원하여 보고 문제점과 앞으로 방향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동관진 유적이 발견된 것은 50년 이전의 일이지만 이후 1960년대까지 별다른 구석기연구 성과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서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하여 현재 30년 가까이 되었는데 후일, 아마 100년이나 500년 후에 구석기연구사를 쓴다고 하면 이 30년은 아주 초창기에 넣어야 할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이 30년사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상 이 시기내에서 중요한 사건 또는 연구경향의 전기를 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하여야 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중요한 사건을 보면 1960년 초의 새로운 구석기 유적의 발견, 1972년대 초의 덕천 승리산유적에서 최초의 고인류화석의 발견 그리고 1978년에 있은 전곡리유적의 발견일 것이며 추가한다면 1980년대 초에 있은 북한의 용곡동유적에서 중부홍적세 고인류의 출현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사건 이외에 학문적 경향에서 뚜렷한 구획을 긋는 사건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80년대 들어서 여러가지의 시도가 나타나지만 아직도 방법론적인 미성숙으로 학사적인 경향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서 우선 임의로 10년 간격으로 학문적 성과와 업적과 경향에 대해서 요약하고 ’80년대의 성과를 요약하면서 구석기 학계의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업적에 대한 평가와 아울러 앞으로 전개되어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평가를 하는 중에 제시된 필자의 견해는 전적으로 학문적인 발전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제언들로서 이제까지 구석기연구를 이끌어 온 선학의 업적 자체를 부인하고자 하는 뜻은 전혀 없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국사관논총 제19집 > 구석기시대 연구사(배기동) > Ⅱ. 1962년 이전
1. 시대 개요
한반도내 구석기연구에 있어서 1960년대 이전은 한마디로 여명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있어서 일본학자에 의해서 동관진유적이 발견된 외에는 연구에 큰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동관진 유적의 발견은 한반도내에 구석기유적의 존재를 드러낸 최초의 구석기 고고학적인 사건으로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관진 유적 발견 이후 1962년 굴포리유적이 조사될 때까지는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에 대한 인식은 고고학에 있어서 유보된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동관진 유적의 조사
동관진 유적은 1930년대 초, 즉 1933년과 1934년에 조사되었는데, 당시 도구나카 시게야스(덕영중강) 교수가 이끄는 제일차만몽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33년에 있은 1차조사는 모리 다케오(삼위삼) 박사에(당시 경성제국대학의 예과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음) 의해 이루어졌다.
원래 유적은 1932년 7월에 철도공사를 하던 중 종성군 남산면 상삼봉 일대에서 코뿔소의 뼈가 발견된다고 하는 보고가 있어서 모리 교수가 1933년에 답사하여 들소종의 뼈와 코뿔소의 코뼈를 채집하였다. 그리고 동관진역의 동북편에 있는 연대봉에서도 동물뼈가 출토되고 있다는 제보를 들은 모리 교수는 이 곳도 발굴조사한 바 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35년에 지질학잡지에 이 조사의 결과를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하였다(삼, 1935). 이것이 한반도에 있어서 홍적세 유물에 대한 첫보고이다. 이후 1935년 7월과 8월에 걸쳐 만몽학술조사의 일환으로 모리 교수가 학술조사단의 단장인 와세다대학 도구나가(덕영) 교수와 함께 발굴조사하였다. 이 발굴조사의 결과를 두 사람의 공동명으로 1939년에 제일차만몽학술조사연구보고의 지질학부에 발표하였는데 이 보고문에는 주로 동물상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시 1940년에 인류학부에 나오라(직량) 교수에 의해 〈조선동관진발굴구석기시대ノ유물〉이라는 제하에 고고학적인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 보고서가 발표하기 직전에 덕영중강 교수는 죽었는데 아마도 이 분석적 연구는 직량 교수 독자적으로 한 듯하다. 덕영 교수와 직량 교수는 만주의 고향둔유적에서도 공동연구를 한 바 있다.
동관진의 연대봉유적의 층위는 6개의 층위로 기록되어 있다. 표토층에서는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전모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홍적세유물은 표토로부터 제2층과 3층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아래 연결된 제2황토층과 두 사력층에서는 유물이 보고되지 않았다. 제2층인 제1황토층은 2.0∼3.5m의 두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층의 밑부분에서 동물뼈와 함께 구석기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층에서 발견된 동물로는 하이에나·털코끼리·코뿔소·사슴·들소·젖소·양·말 등이 있으며 골각기와 함께 흑요석기도 2점이 채집되었다. 제3층인 흑색황토층에서는 제2층보다도 훨씬 적은 수의 동물뼈가 출토되었고, 땅쥐·다람쥐 그리고 말사슴의 뿔이 출토되었다.
동관진유적에서는 6목 10과 14속 17종, 아종의 동물이 알려져 있는데 이중 동관진하이에나·하이에나·큰뿔사슴·첫소·털코뿔소·옛털코끼리 등이 절멸된 것으로 약 35%의 절멸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연구에 있어서 작은 짐승들에 대한 분석이 미흡하여 사멸종의 구성이 더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이융조, 1977). 동관진 유적에서 나타난 동물상에서 털코끼리·옛털코끼리·생토끼·땅쥐·큰 갈낱쥐 등은 추운 시기의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동물들을 근거로 하여 이 유적이 후기충적세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최무장, 1981, 1986). 원 조사자들인 덕영 교수나 직량 교수도 동관진 동물상과 이보다 앞서 발굴된 고향둔 동물상과 비교하여 늦은 중홍적세 말엽 또는 후기 홍적세로 보고 있다.
고고학적인 유물은 직량 교수의 보고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가공변형을 주장하고 있지만 본문중에서 제시된 골각유물들이 동물 즉 식육류 또는 설치류동물의 이빨자국에 의한 변형과 뚜렷이 구별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당시 유적형성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직량, 1940). 고고유물 중에는 2점의 흑요석이 포함되어 있는데 1935년 조사시 삼위삼 교수에 의해 발굴된 것으로 1점은 격지이며 또 다른 1점은 박편조각(snapped piece)로 보인다(이융조 교수는 이것을 ‘긁개’로 분류하고 있으나 가공이 없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석편으로 보았다). 이 흑요석제는 아마도 백두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점의 석기로 석기문화의 전통을 논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석기 이외에 뿔로 만든 것 5점과 뼈로 만든 것 4점의 골각기를 다루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인공의 흔적이 틀림없는 유물이라고 하나 재론의 여지가 없는 바는 아니다. 최근의 유적형성학 또는 합석형성에 대한 연구에서 동물에 의한 변형을 포함하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변형과 시적인 변형의 구별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골각기중에는 창끝모양, 뚜지개모양, 깎개모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동관진유물은 당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막 구석기연구의 여명기에 발견된 것으로서 직량·삼위삼 등의 연구자 자신들이 주장하듯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유적으로서의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당시 직량 교수는 이미 1931년에 일본의 병고현 명석시에 있는 경신세석력층에서 ‘일본원인’이라고 불리는 고인류화석을 발견한 바 있으며 고고학유물의 서술에서 보듯이 당시로는 상당한 구석기지식의 소유자로 보이는데 동관진유적을 한반도내의 최초의 구석기유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도내의 구석기유물의 존재는 이후 매원미치(1946) 또는 등전량책(1942) 등의 일본 관학파의 학자들에 의해서 무시당하게 되었다. 동관진유적은 1958년에 금정학 선생에 의해서 재조명을 받게 되고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구석기유적이 드러나게 됨에 재인식을 받게 되는 것이다(금, 1958).
국사관논총 제19집 > 구석기시대 연구사(배기동) > Ⅲ. 1962년부터 1970년까지
1. 시대 개요
이 시기가 1962년에서 시작되는 것은 이 해에 본격적인 구석기공작(Paleolithic Stone Industry) 주 001001 문화(Culture)라는 말은 구석기연구에 있어서는 타당성이 결여되어 근래에는 공작(Industry)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닫기이 발견됨으로써 구석기연구가 새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동안 남한과 북한에서 몇 개소의 중요한 홍적세유적이 발견되었는데 1960년대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의 보고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되고 또한 1972년에 평북 덕천에서 고인류화석이 한반도내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하나의 획을 그을 수 있기 때문에 1971년까지를 한 시기로 설정하였다. 물론 석장리유적 발굴에 대한 보고는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발견된 중요한 유적으로는 1962년에 굴포리유적이 북한에서 발견되었고 1963년에는 석장리유적이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또 다시 1964년에는 굴포리부근 부포리에서 후기구석기 또는 중석기문화층이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 유적들에서는 거의 모두 석기들만이 출토되었는데 1966년에 평남 상원 검은모루(흑우리)에서는 석기와 함께 동물골들이 석회암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동물골은 1961년에 함북 장덕리에서 맘모스의 뼈가 화분들과 함께 니탄층에서 노출되었으나 이는 순수히 홍적세 후기의 환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비인공유적이었다. 1967년에는 공주 석장리의 맞은편의 마암리에 있는 동굴에서도 타제석기가 보고된 바 있었다(김원용, 1967). 1969년에는 북한의 해상과 청청암의 두 개의 석회암동굴에서 동물골들이 발굴되었다. 한편 서울의 면목동에서도 석영암제의 타제석기들이 채집되었다(황, 1970).
이 시기 동안에는 한반도 내에 보다 확실히 홍적세기간 동안 인류의 서식을 알 수 있는 석기공작들 뿐 아니라,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동물골과 화분 등이 채집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대한 학사적인 관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유적발견의 여파로 구석기문화 부존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으며 한반도의 문화사의 시점이 홍적세로 올라간다고 하는 사실이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62년에 북한에서는 도유호 교수가 《문화유산》이라는 잡지에 〈빙하기란 무엇인가〉 또는 〈인류의 기원〉 등의 제목으로 구석기인류의 자료를 소개하고 있음으로 보아 이 분야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62년에서 1972년 사이에는 구석기연구의 시작이니 만큼 구석기유적 발굴보고서가 론자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발굴된 자료, 즉 석기와 동물골의 감정과 해석을 위한 여러가지의 시도가 발굴보고서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러니와 이 과정에서 연구사적으로 중요한 사항의 하나는 구석기관계 고고학용어의 제정과 사용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이 구석기용어의 문제는 90년대 오늘날까지 미해결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으나 이 당시 구석기연구의 새로운 시작으로 외래용어의 한글화 내지 우리말화가 불가피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67년 손보기 교수가 최초로 석장리발굴을 보고하면서 구석기 명칭들을 한글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손, 1967). 그리고 1968년과 1973년에 서양식용어에 대응하는 한글식의 용어를 제시한 바 있다(손, 1968, 1973). 이 용어의 한글화작업은 구석기문화 연구의 보편화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구체적인 석기의 형태에 대한 정의가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정확하게 두 용어체계 간에 호환성이 있는지의 여부에 문제점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광범위한 지역문화 연구에 있어서 지역간에 용어를 대비하여 개념상의 혼돈이 없도록 하여야 하는 번거로움도 또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이다.
주 001
: 문화(Culture)라는 말은 구석기연구에 있어서는 타당성이 결여되어 근래에는 공작(Industry)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2. 주요 유적
1) 굴포리견적
함북 웅기군 서포항동에 있던 신석기시대 조개무지를 조사하던 중 1962년에 신석기문화층 아래에 이보다 더 오래된 문화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1963년 4월 10일에서 26일까지 제1차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7월과 8월에 제2차, 그리고 1964년 6월과 7월에 제3차 조사가 있었다. 이 발굴의 성과에 대한 보고는 1963년 고고민속에 실린 것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보고가 있었는데(《고고민속》 63-2, 64-2, 65-1), 원래의 조사자는 도유호 교수와 김용남 교수였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으나, 1972년에 김용간과 서국태에 의해 종합보고 성격의 《서포항원시유적발굴보고》가 작성되었다.
굴포리유적에서는 신석기문화층 아래에 2개의 구석기문화층이 발견되었는데, 7개의 층위 중 바닥으로부터 두번째와 세번째층이다. 바닥에서 두번째층에서 출토된 석기문화를 굴포문화 Ⅰ기(Coulporién Ⅰ)로 부르고 있으며 세번째층의 것을 Ⅱ기로 명명하였다(도, 1964). 굴포문화 Ⅰ기에 해당하는 층위에서는 커다란 돌(분암) 무지들로 이루어진 유구와 함께 석기들이 드러났다. 이 유구는 서북동남방향으로 11.5×8m 크기의 범위내에 분암괴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 중 동북부에 있는 것은 크기가 1m가 넘는 것이 있다. 이 석괴는 상면이 평편하고 옆으로 많은 양의 석기가 출토되어 석기제작에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분암석괴군은 나무가지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눌러 놓았던 막돌로 보기도 한다.
Ⅰ기층에서는 1점의 거정화강암제 석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영암으로 석기를 제작하였는데 대석타법과 직접타법이 사용되고 있다. 찍개류 이외에도 석핵과 석편이 다수 채집되었는데 석기 중에는 석도로 불리는 급경사인부의 긁개도 존재하고 있다. 편용흔이 있는 인부도 보고되었으며 또한 석기에는 뚜렷한 박리흔이 남아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석기는 수 차의 박편에 의해 변형되어 있으나 뚜렷한 가공이 보이는 보다 정형적인 석기는 보이지 않는다.
제2기층의 석기는 대리석, 각혈암 그리고 석영암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긁개·찍개·밀개·격지 그리고 부정형식재 등이 출토되었다. 직접타법 이외에도 간접타법에 의해서 석기를 제작하였다고 보고 있는데 일부의 석기 중에는 가압법에 의해 가공된 것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제2문화층과 관련하여 굴포리에서 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는 부포리 덕산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들도 이제 2기층과 동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부포리 유적은 1964년 6월과 7월에 지표조사되었는데 각혈암 또는 부싯돌(쳐트종류?)로 만든 긁개·돌칼·석핵 그리고 부정형석재 등이 채집되었다. 긁개에는 삼각형·타원형 또는 부정형의 모양이 있으며 대다수 외면가공을 하고 있으며 석기 중에는 얇은 박편에 날을 정교하게 가공하고 있다. 보고자는 오리그러시안―솔루뜨리안식의 가압박리법(눌러떼기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도유, 1964). 그래서 이 부포리문화와 굴포리 2기층의 문화를 동시대로 보고 후기구석기시대로 추정하였다.
종합보고에 의하면 굴포리문화 1기층에서 출토된 석핵은 다면체에 가까운 모양으로 프리즘형의 박리흔을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긴 박편을 만들고 있다는 점과 일개의 석핵에서 1∼2매의 박편을 떼어낸 점에서 구석기시대 중기로 보고 약 10만년전이라는 연대를 제시하였다(금·서, 1972). 이 연대는 유럽의 최고의 기법인 클락토니안(Clactonian) 기법에 보이는 뚜렷한 타격흔이 보이지 않는다든가 석기를 천력으로 만들지 않고 또한 소형이라는 점에서 정촌과 주구점의 것과 구분하려 하였으며 보다 발전된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르봘르와(Levallois) 기법이 이 석기문화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제2기층의 문화는 보다 정교한 가압법으로 가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발전된 후기구석기문화로 3∼4만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북한고고학의 분류에 의하면 부포리유적은 중석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다(조선원시유적·유물도감·원시편, 1988).
굴포리유적은 해방 이후 최초로 한반도내에서 구석기가 발견된 곳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또한 구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층위가 중루되어 있다는 점과 구석기문화에서도 2개의 다른 문화층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인 가치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제1기 문화층에서 드러난 막돌천막집자리도 구석기유적에서 보기 힘든 유구로 당시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층위의 기술과 해석 그리고 석기의 형태적 분류와 기술적 리해에 있어서 불완전함이 보고문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추정에 무리함이 보이지마는 구석기연구의 시작인 점에서 수용되어져야 할 것이며 앞으로 연구에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석장리유적
석장리는 공주읍 서편 금강의 북안에 있는 마을로 1963년 미국인 고고학자 A. Mohr가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재학하고 있던 정영화 교수와 함께 금강일대를 조사하던 중 타제석기를 채집함으로써 구석기유적의 존재 가능성이 제시되고 이듬해인 1964년부터 연세대사학과 손보기 교수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은 1972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이후에도 1974년까지 조사가 계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손 외, 1982). 조사의 내용과 문화적 양상에 대하여서는 아직 정식 보고서가 제시된 바 없으나, 1967년 이래 《력사학보》와 《한국사연구》 등의 잡지와 저서에 여러차례 소개되어 있다. 대부분의 보고문은 1967년에서 197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적은 해발 13m에서 17m 사이의 단안단구상 지형에서 발견되었는데 조사시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현재의 강수면에서 대략 6∼7m 정도의 높이에 있다. 초기의 보고문에 의하면 해발 표고 14.40m 단구와 13.80m의 단구로 서술되어 있으나 이는 경작에 의해 변형된 지표의 높이 차이로 보인다. 석장리유적은 2개지구로 구분되었는데 제1지구가 하류인 서쪽에 있고 제2지구는 제1지구에서 동쪽으로 13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상의 경작물의 존재로 제2지구부터 발굴되었는데, 1964년에서 1966년까지의 경과를 보면 가장 깊은 곳이 표토에서 7.5m까지 내려간 결과 해발 12m 단구가 있는 지점에서 8개의 문화층을 확인하였다고 보고되었다(손, 1967). 1967년에서 1969년에도 조사가 진행되어 표토로부터 10m 깊이에까지 총 27개의 층위가 노출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2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었다(손, 1968, 1973). 제1지구에 대한 조사도 1967년부터 시작되어 특히 1969년에서 1972년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서 후기 구석기문화층과 함께 주거지로 보이는 유적이 드러났다.
석장리유적 발굴의 보고문들에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층위가 묘사되어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으나 현재 대체로 27개층위 12개문화층으로 구분한 1972년과 1973년 《한국사》에 수록된 보고문이 비교적 완전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층위는 제2지구의 ‘해발 12m 단구’에서 드러난 것으로 제1지구와는 1967년 이래의 조사에서 후기구석기시대의 주거지층하의 제Ⅳ층(력층)이 제2지구의 제일석층, 즉 제6층인 제11문화층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어서(손, 1973) 결국 제1지구에서 ‘새기개·긁개문화층’은 제2지구에서 제5층 즉 제12문화층과 통하는 것으로 되는 셈이다. 층위는 바닥의 암반풍화층을 제외하고는 각력층·모래층·점토층(염토층) 그리고 모래의 염토의 혼합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손보기(1968) 교수는 퇴적물의 구성에 따라 기후와 유적환경을 복원하여 각력은 추운 기후하에 그리고 고운모래층은 간빙기의 홍수퇴적으로 보고 또한 염토층은 따뜻한 기후하에 호수속에 형성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퇴적물은 동일한 기후하에서도, 퇴적환경이 다르게 되면 다른 퇴적물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으며, 유적이 있는 곳이 장군봉에서 흘러내려 온 산자락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류로의 위치의 근원에 따라 퇴적물의 립자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각력은 부근의 산록에서 흘러내려와 쌓여진 것일 가능성이 많으며 이는 추운 기후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실제 유적에서 석기 이외에 화석동물골들이 출토된 바 없어서 기후의 부원은 어려운 실정이다. 1973년 보고문에 제1호 주거지에서 꽃가루가 검출되었다고 하고(p. 22) 또한 동물의 털이 채집되었다고 하는데(p. 26), 이들의 존재에 대한 해석은 이 유적의 형성과정에서 자연훼손(natural disturbance)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이후에라야 구석기시대 당시 유적과 직접 관련지워서 생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손보기 교수는 일련의 보고문들에서 제1문화층에서 제6문화층까지를 전기구석기시대, 제7문화층에서 제9문화층까지를 중기구석기시대, 그리고 제10문화층에서 제12문화층까지를 후기구석기시대로 구분하였다(손, 1972, 1978∼1987). 그래서 석장리 1층이 45만년 전, 6층이 12만년 전, 7층이 7만년 전, 10층이 3.2만년 그리고 12층이 1.5만년 전으로 편년하여 약 45만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퇴적층으로 보고 있다(손, 1988). 그래서 석장리 유적의 편년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차례의 논란이 있었다(정, 1976, Clark, 1982, 배, 1980). 논란의 초점은 후기 또는 중기구석기이전의 석기문화층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는데, 하부층에서 출토된 석기들이 인위적으로 가공되었던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이의가 여러차례 제기되었으며 이것은 석장리층위 이해에 있어서의 문제점과 함께 석장리문화 리해에 해결되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층위의 해석에 있어서 하부에 내려가서는 아주 좁은 공간에서 층위를 확인하여 27개층이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나, 홍수 또는 강물에 의해 퇴적되는 경우에 지점에 따라 많은 층위변화가 있게 되고 좁은 포인트 바성의 퇴적 등은 극히 국지적인 양상을 띌 수 있기 때문에 극히 좁은 구역에서 드러난 지질학적인 층위구분이 바로 문화적인 시기 구분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는 보다 대규모의 단면층위 발굴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문화층에서 드러난 유물의 내용이 극히 소량으로 드러나고 있는 곳도 있어서 문화구분 자체에도 무리가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또 설명되지 않으면 안될 부분이 이 지점에 어떻게 50만년 동안의 퇴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이며 금강의 발달과정 속에서 이 지점의 퇴적층 형성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층위 27에서 15층 사이에서 발견된 제1문화층인 외날찍개문화층에서부터 제6문화층인 우뚝잡이 긁개·자르개 문화층까지가 전기구석기로 분류되었다(손, 1972, 1973). 이 층들은 극히 좁은 면적이 발굴되었는데 27층에서는 1m×1.5m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석기들로는 주먹도끼·찍개·찌르개·긁개·주먹괭이·자르개·깎개·양쪽찍개·은본·밀개·주먹대패·뚜르개·톱니날·홈날 그리고 망치돌 등이 발견되었다. 석기의 총수는 정확하지는 않으나―왜냐하면 15층과 15a층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이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1972년 보고)―모두 246점 이상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석기들을 기능적으로 세분하여 분류하였으나 실제 2차가공이 이루어진 것이 드물어서 현재로서는 인공품과 자연품의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 전기 구석기로 분류한 석기들을 ① 사냥·도살용 ② 부엌·조리용 ③ 일반 연장용 ④ 석기제작용 연장 ⑤ 나머지 부스러기 ⑥ 새겨진 유물로 분류하고 있다(손, 1972, p. 2). 이러한 기능적인 분류는 제시된 기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제시될 수 없기 때문에 문화이해에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으로 80년대 현황의 석기론에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중기 구석기문화층으로는 제13층, 즉 제7문화층에서부터 제10층, 즉 제9문화층인 자갈돌·찍개문화층까지 3개의 층위가 포함되었다. 제13층에서 드러난 석기들은 도합 6점으로 극히 적은 숫자이다. 찌르개·긁개문화층(제12층)에서는 사용된 석기만 267점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다목적 석기의 수효가 줄고 보다 세분화된 기능을 가진 석기가 늘고 있으며 제작기법은 정촌 또는 굴포리 석기공작과 통하는 점이 있다고 보았다(손, 1972, p. 32). 실제 보고서에 의하면 이 두 중기구석기문화층은 아래의 전기구석기공작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않음에도 중기로 분류된 이유가 명확히 제시되고 있지 않다. 중기구석기로 최상층인 제9문화층, 즉 자갈돌·찍개문화층에서는 뚜렷한 가공이 보이는 석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석기제작에는 주로 반암자갈이 사용되었으며 클락론수법 이외에 르봘르와기법을 언급하고 있으며, 르봘르와지수가 14.9라고 보고하고 있다(손, 1967, 1972). 그리고 석기가공기법에서 프랑스의 라 끼나(La Quina)기의 것을 많이 닮았다고 하여 중기구석기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르봘르와 기법의 시도된 예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아니하여 어느 석기가 이 기법으로 제작된 지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박편흔의 모양과 석기의 두께 등으로 볼 때 석기의 제작기술이 실제 그 정도로 발달한 것인지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후기구석기문화는 3개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0문화층 가파른 긁개·찌르개 문화층, 제11문화층 긁개·찌르개문화층 그리고 제12문화층 돌날·몸돌문화층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보고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돌날·몸돌문화층과 동시대 또는 이후로 보이는 새기개·밀개문화층의 집자리가 제1지구에서 발견되었다(손, 1972, 1973), 그런데 제10, 11, 그리고 12문화층에서 발굴된 석기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보고문이 없는데 《한국사》(1972년 간)에 간략히 언급되었을 뿐이다. 가파른 긁개·찌르개문화층에서는 대석법(모두 떼기)에 의한 큰 박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긁개·찌르개문화층에서는 많은 모룻돌과 함께 박편들을 이용하여 제작한 석기들과 함께 많은 양의 석기부스러기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석재로 석영 이외에 흑운모 또는 혈암류를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돌날·몸돌문화층은 제2지구에서는 가장 지표에 가까운 문화층인데 극히 소량의 유물―도합 4점?―이 출토되었는데, 이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 제1지구의 층에서는 수정새기개·흑요석제 밀개·류문암 새기개 등이 출토되었고, 특히 새기개가 40% 이상 출토되었다(손 1973, p. 39). 주 002002 유물에 대한 기술내용이 제1지구의 새기개·밀개층으로 보이나 확실한 언급이 없으며 1970년의 새기개·밀개문화층에 대한 보고에는 흑요석제밀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층위의 서술(손, 1970, 1973)에 따르면 제2지구의 제12문화층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닫기
이 새기개·밀개문화층에서는 석재가 다양해지고 특히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데 적합한 고운 입자의 석재를 선택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며 보고자에 따르면 오리그내시안 수법의 석기가 보인다고 한다(손, 1970). 그리고 시베리아의 후기구석기와도 통한다고 보고 있다. 1973년 보고문에 나타난 석인석핵, 엄지손가락 모양의 밀개(Thumb-nale end-scraper)와 세잎 석인에 제작한 밀개 등이 이 시기의 석기공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제1지구에서 발견된 주거지도 이 문화층에 속한다고 보인다. 집자리는 남쪽으로 약간 경사져 있는데 남북간에 약 130㎝의 높이 차이가 있다. 주거지의 크기는 대략 8m 사방의 크기로 남쪽 끝을 향하여 좁아지면서 여러 종류의 석기들이 분포하고 있다. 주거지의 남쪽 끝에 동측으로 치우쳐 있는 2개의 대형석괴를 손보기 교수는 주거지의 문(문)돌로 보고 있다. 문에 가까이에 타원형(115×105㎝) 크기의 구역내에 목탄과 회가 섞여서 나왔는데 로지로 보인다. 주거지의 중심 가까운 지점들에서 몇 개의 주공이 보고되었다.
이 주거지 부근과 내부에서 2,758점의 유물이 보고되었다(손, 1973). 유물들은 경사면을 따라 V자형을 이루면서 분포되어 드러났다. 석기는 석영·거정화강암·화강편마암 등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는데 소량으로 채집된 석재 중에 흑요석제석기가 7점 채집되었고 이 중에는 석인석핵도 포함되어 있다. 주먹도끼·찍개·긁개·밀개·자르개·돌날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외에도 새기개·뚜르개·톱니날·홈날·주먹대패·주먹괭이 등이 채집되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는 배모양의 밀개라고 부르는 석인석핵류일 것이다.
특기할 사항으로 주거지내에서 예술품 및 동물의 털이 출토되었다는 보고이다. 여러 종류의 동물―멧돼지·사냥개·고래·거북 등―을 상징하는 돌들이 가공되지 아니한 채로 또는 약간의 변형이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보고된 바 있다 이러한 판단에는 아직 형상이나 가공의 의도가 객관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어서 납득키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머리카락의 존재 역시 고고학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으로 대부분의 유기물이 이미 없어진지 오래된 유구내에서 머리털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것이 유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보기 이전에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이 앞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3) 면목동구석기유적
서울시 동부인 면목동의 산록부에 1967년에 댁지조성 중 발견된 유적으로 100㎡ 범위내에서 석영맥암제로 만든 석기 327점이 적갈색점토층 속에서 발견되었다(황용, 1970, 1973). 대부분의 석기들은 클락토니아 기법과 유사한 기법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또한 중국의 주구점·정촌유적에서 보이는 유사클락토니안타격법·대석법, 그리고 량단타법 등도 보인다고 보고되었으며 무스테리안기의 특징적인 조정타면을 이용한 석기제작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황, 1970). 그리고 판상의 석영암의 측면을 가공하여 첨두를 가진 석기를 제작한 기법도 보인다고 하였다. 전반적으로 긁개류가 아시아의 다른 석기문화보다도 많이 나타나고 또한 찍개류도 높은(31%)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으며, 이는 석장리유적의 제6문화층의 석영맥암석기문화와 통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조수대문화·굴포리문화와 함께 아시아의 찍개류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애초에 연대는 30,000년 전으로 추정하는 후기 구석기문화의 하나로 보았다.
퇴적상황과 층위의 지질학적인 형성과정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었음은 이 문화의 시간적인 위치설정에 한계가 되었지만, 1960년대에 한강유역에서의 구석기문화의 출현은 이후의 구석기문화발견 가능성을 예고해 주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유적의 연구는 당시 유럽·덴마크에서 구석기연구를 하고 돌아온 황룡혼 교수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본격적인 구석기고고학을 배운 고고학자에 의한 연구조사였음도 의의가 있는 일이다.
4) 상원 검원모루(상원 흑진리)유적
이 유적은 부근 상원강의 제방공사를 위해 채토작업을 하던 중 드러난 석회암동굴유적으로 1966년 4월부터 조사가 시작되어 1970년까지 진행되었으며, 1차 보고가 1969년에 이루어졌고 종합보고는 1974년에 금신규와 김교경에 의해 제시되었다. 동서방향으로 대략 30m 정도 길이로 뻗어 있는 동굴은 모두 5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퇴적층의 두께는 지점에 따라 다르지만 제일 두꺼운 곳이 약 2.5m 정도에 달한다. 가장 완전한 층위가 남아 있는 제3구역의 층위를 보면 5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닥에서부터
제Ⅰ층 : 고운 모래가 흡입된 력층으로 화석이 발견되었고 30㎝ 정도의 두께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낮은 곳은 170㎝로 나타나고 3지구에서 있다.
제Ⅱ층 : 사질함력층으로 황색을 띠고 있다. 점토도 섞여서 나타나는데 화석은 드러나지 않았다.
제Ⅲ층 : 적갈색의 아주 고운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는 층이다. 동물뼈화석이 드러나고 있다. 두께는 20㎝에서 24㎝ 정도.
제Ⅳ층 : 약 50㎝ 정도의 두께로 나타나는데 적갈색 자갈포함층으로 화석이 많이 드러났다.
제Ⅴ층 : 약 10㎝에서 20㎝ 정도의 두께이다. 종유석이 섞여서 나타난다.
5개의 층위는 제2, 3구에서는 전층이 다 나타나고 있으나 1구와 4구에서는 Ⅲ층과 Ⅳ층이 남아 있다. 그런데 제5구는 제1구의 서남쪽에 1969년 이후의 발굴에서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의 4개의 구역과 층위의 관련성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석기는 1차보고(1969)에 제시되었던 것으로 제4구역의 제4층에서 동물뼈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여러 크기의 석영괴와 함께 드러났으며, 이러한 석영괴는 제3구역에서도 보이고 있다. 석회암 또는 석영암을 재료로 하고 있는데 가공된 석기는 모두 청회색규질석회암을 사용하고 있다. 주먹도끼형 석기·제형석기·뾰족끝석기 그리고 쪼각석기(박편석기) 등이 나타났는데 석재의 일부에 몇 차례의 타격으로 변형을 가하여 이용한 것들이다. 내리쳐깨기(대석타법)와 때려내기(직접타법)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2차 가공을 보이는 것은 극히 적다고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석기들은 기법이 대단히 원시적이어서 실제 보고서들도 자연으로 생긴 변형과 구분이 어렵다고 하고 있다(《조선고고학 개요》, 1979). 가공된 것 이외에도 석영암 또는 석회암괴가 동물골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는 마모의 흔적이 뚜렷한 것이 다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어떤 지점에서는 커다란 석영암이 8개가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석괴들은 석기제작이나 동물골의 가공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고학연구소, 1969). 보고자들은 석기가 대단히 조잡하고 매우 간단한 가공에 의해서 만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직접타격이 어느 정도 발전한 결과 나타나는 박편중심의 석기공작인 굴포리문화Ⅰ기보다도 오랜 것이며 나타난 석기중에는 소안문화나 주구점과 암하에서 나타나는 석기와 유사한 것들이 있어서(후등, 1976) 인류발전의 아주 이른 시기의 석기문화로 보고 있다. 그래서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기문화로 북한학자들은 보고 있다(김용간, 1984).
주 002
: 유물에 대한 기술내용이 제1지구의 새기개·밀개층으로 보이나 확실한 언급이 없으며 1970년의 새기개·밀개문화층에 대한 보고에는 흑요석제밀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층위의 서술(손, 1970, 1973)에 따르면 제2지구의 제12문화층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국사관논총 제19집 > 구석기시대 연구사(배기동) > Ⅳ. 1970년대 : 1971년에서 1980년까지
1. 시대 개요
이 시기는 한국구석기문화 연구에 있어서 1960년대의 초창기에 이어지는 하나의 형성기 또는 확립기로 보아야 될 것이다. 이 시기의 시작으로는 덕천 승리산동굴이 1971년에 발견됨으로써 한반도내에서 최초로 화석인류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학사적으로 1960년대 구석기유적 발견에 이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의 끝은 뚜렷이 1980년대와 구분되어지는 고고학적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 들어가서는 이 1970년대와는 다른 분위기의 구석기고고학이 전개되었고, 또한 ’70년대 말에 대규모의 석기산포지일 뿐 아니라 동아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문화가 전곡리에서 발견되어 한반도 내에 구석기문화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이 1970년대를 따로 설정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우선 이 시기에 있어서 가장 큰 발견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덕천승리산유적에서 발견된 소위 신인과 구인에 해당하는 화석인류이다. 이 유적 이외에도 북한에서는 1977년에 평양의 대현동에서 화석인류가 발견된 바 있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내 구석기 주인공들의 실체를 확인한 셈이 되었다. 1970년대 전반에 제주도의 빌레못동굴 유적이 발견되었고, 제천의 점말동굴이 발견되어 손보기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런데 덕천승리산유적과 더불어 ’70년대 최대의 성과는 전곡리유적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빌레못동굴에서는 수점의 석기가 조사자에 의해 제시된 바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의의는 홍적세 동안 제주도의 환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동물자료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며 절멸동물의 존재는 앞으로 한반도와 중국남부지역에 있어서 해안선의 변화와 동물의 이동에 대해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제천의 점말동굴에서도 석기의 존재가 주장되고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직 알 길이 없고 주로 동물골 또는 화분자료와 형성환경에 관한 자료가 보고된 바 있다. 이 지점은 빌레못동굴에 이은 남한지방에서 대규모의 화석동물골이 발견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중부석회암지대에 대량의 화석유적의 존재를 예견케 하는 유적이었다. 이 유적발굴은 1975년에 《한국사연구》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주로 동물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에도 1975년에 또 다시 연구보고가 있었으나(손, 1975) 본격적인 종합보고로 볼 수 있는 것은 1980년에 아주 간소한 3권의 책자로 제시되었다. 이 유적에서 앞서 언급한 석기의 존재유무, 예술품의 진위문제 그리고 골기의 타당성 등과 함께 년대관에 있어서 여러 차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홍적세연구에 있어서 본격적인 화석골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전곡리유적은 1978년에 미군병사에 의해 발견되어 그 해 《진단학보》에 채집된 석기의 내용과 층위에 대하여 예보적인 성격의 보고문이 발표되었는데(김과 정, 1978),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서구식의 아슐리안형 석기문화로 알려져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던 유적이다. 1979년도에 2차례에 걸친 발굴을 시작하여 1986년까지 서울대학교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1970년대 후반동안 예보적 성격의 몇 편의 글들과 발굴략보성의 소논문이 있으되 본격적인 연구보고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발표되었다.
’70년대에 제시된 구석기관계론문들을 살펴보면 초반에는 1960년대에 이루어진 발견 또는 발굴조사에 대한 연구보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석장리유적발굴에 대한 다수의 논문이 발표되었고(손, 1970, 1971, 1972, 1973a·b·c, 그리고 1974) 상원 검은모루(김과 김, 1974) 또한 해상과 청청암유적(김, 1974)도 이 시기에 정식 보고되었다.
연구방법에서도 주요한 몇 가지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석장리에서는 구석기 연구에는 최초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년대측정이 이루어져(Yang, 1970, 1972) 구석기 편년에 중대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또한 용어와 분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손 교수는 석장리발굴시에 체득한 경험을 토대로 논문 중에 새로운 용어들을 제시한 바 있었다(손, 1968). 그런데 7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구석기연구의 대가인 프랑스와 보르드 교수하에 수업한 바 있는 정영화 교수가 프랑스의 구석기용어와 분류체계를 토대로 교과서적인 시스템을 시리즈의 논문으로 발표하였다(정, 1976, 1978). 그러나 이 방법론의 기초는 후일 국립박물관에서 표준용어를 제정하기 위하여 이용된 바 있지만 각 학자의 견해가 불완전하게 개진되어 아직도 공통용어가 정해진 바가 없다.
또 한가지 1960년대에 없었던 새로운 사실로는 구석기연구사적인 논문이 수 편 제시된 바 있는데 《회고와 전망》이라는 제하로 발표된 바 있다(정, 1976; 황, 1979). 이는 곧 이제 어느 정도 구석기유적의 수나 자료 그리고 역사가 깊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당시까지 알려진 자료를 종합화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즉, 구석기문화시대가 본격적으로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손, 1974), 아마도 중·고교 교과서에 구석기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으로 생각된다.
한반도내 구석기문화가 국제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70년대 들어서의 한 경향이다. 이미 1969년 소련인 학자에 의해서 굴포리문화가 소개되었고(Larichev, 1969), 국내학자에 의한 외국어론문에 의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황룡혼 교수는 1973년에 일문으로 한국구석기문화 전반을 소개하였는데 이에는 석장리·굴포리, 그리고 면목동에서 발굴된 구석기문화가 포함되어 있다. 손보기 교수는 1973년 후기 구석기시대 주거지에 대한 영문 보고 이외에도 1974년, 1975년, 그리고 1978년에 한국구석기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발표함으로써 구석기연구성과를 국제적으로 인식시키는데 중대한 공헌을 한 바 있었다. 1974년에 발간된 체스터·챠드 교수의 《Northeast Asia in Prehistory》에서도 굴포리유적과 함께 석장리가 언급되고 있어서 한반도 중에서 구석기문화에 대한 외국학계의 인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70년대 들어서 몇 소장학자의 출현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 중 하나이다. 정영화 교수나 최무장 교수들은 프랑스에서 구석기연구 후 귀국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손보기 교수의 제자들 그룹인 최복규·이융조 그리고 박희현 등의 소장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구석기연구학자의 수효가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구석기연구의 시야를 넓히는데 큰 공헌을 한 바 있었다.
2. 주요유적
이 시기 동안 발견된 유적들로 덕천 승리산동굴유적·제주 빌레못동굴·제천 점말동굴유적·평양 승호리 화천동유적·대현동유적 등이 있다. 그러나 화천동유적과 대현동유적에 대한 조사결과는 1985년에 가서야 발표되어 1980년대의 업적 속에서 평가될 것이다.
1) 덕천 승리산동굴유적
이 유적은 대동강상류지방인 덕천군에 있는 승리산에서 발견되었다. 승리산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데 여러 개의 동굴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승리산은 대동강의 두 지류 사이에 위치하며 현재 지표 위 7m 높이에 있다. 유적은 원래 1971년에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발굴은 1972∼73년에 이루어졌는데 1978년에 보고서가 발간되었고 1979년에는 유적의 연대에 관한 보고서가 따로 제시되었다(김교경, 1979).
동굴은 62.2m의 길이를 갖고 있는데 고고학적인 퇴적은 동굴입구에서 40m 들어간 지점까지 펼쳐져 있었다. 퇴적층의 구조는 지점에 따라 차이가 많은데 류수에 의해 퇴적되는 동안 류실과 재퇴적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동굴의 입구에서는 6개의 층위가 드러났으나 입구에서 8m와 10m 사이에서는 바닥으로부터 2, 3, 5, 6층은 사라지고 4층만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14m지점으로부터는 새로운 2개의 층이 드러났는데 이 중에 황갈색모래찰흙층 속에서 화석이 대량 채집되었고 북한학자들은 이를 ‘기본화석층’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외에도 제4층과 5층에서도 동물화석이 채집되었는데, 이 층들이 ‘구석기시대 아래층’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덕천인’인골이 출토된 부분이다. 이 층들은 동물화석의 구성에 의거하여 조사자들은 중부경신세말에서 후기경신세초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고학연구소, 1972/3, p.7). 반면에 기본화석층은 이보다 늦은 상부홍적세 중엽 또는 말엽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동물화석은 보고문에 기본화석층에서 출토된 것만 제시되었는데 168마리 분의 908점의 화석을 분류하여 25속 31종의 동물을 밝혀내었다. 이 중에서 11종이 절멸종으로 전체에서 36% 정도에 이른다. 기본화석층의 아래쪽에 있는 제4층에서도 하이에나·말·코뿔소 그리고 사슴류의 동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나 상세한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체로 제7층에서 출토된 것과 공통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2개의 어금니와 하나의 편갑골이 제4층에서 드러난 인류화석들이다. 이 화석들은 고형의 호모 사피엔스로 보이며 ‘덕천인’으로 명명되었다. 제7층에서도 체질상 완전히 현대인으로 진화한 인류가 출토되었는데 ‘승리산인’으로 부르고 있다.
2) 제주도 빌레못동굴유적
북제주군 애월면 어음 2리에 위치하고 있는 용암동굴로 1973년에 발견되었다. 3개의 퇴적층 중에 제2층과 3층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제2층에서는 곰(Brown bear)과 사슴의 뼈가 채집된 바 있다. 두 층에서 도합 150점의 석기가 채집되었는데 이 중에는 긁개·칼·첨기·부리형직기·홈날·톱니날·찍개 그리고 박편도끼 등이 포함되어 있다(정, 1974, 1986). 석기들은 모두 현무암에 직접 타격법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정, 1986). 석기는 대부분이 심하게 구르거나 풍화가 심한 상태이며 박편석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2차 가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석기의 일반적인 양상으로 볼 때 중기구석기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정, 1986). 이 유적의 발견은 제주도에서도 구석기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고 상부홍적세 동안 대륙과 남해안의 련륙에 의한 동물과 인류의 이동경로를 알 수 있게 해 준 의의가 있다. 그러나 동물골, 특히 곰(Brown bear)의 절멸 연대가 불확실하고 유적의 형성연대를 보여 주는 적극적인 증거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이 유적의 해석에 문제로 남아 있다.
3) 제천 점말동굴유적
충북 제원군 송학면 포전리 용두산자락에 있는 석회암동굴로 1973년 6월에 손보기 교수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후 동년 11월에서부터 80년까지 8차례의 발굴이 연세대박물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동굴은 석회암 fissure(손보기 교수의 용어로는 ‘틈굴’)의 일종으로 내부의 폭이 2∼3m 정도이며 입구에서 12∼13m까지 퇴적층이 쌓여 있는데 굴은 점차 좁아져서 다른 틈굴들과 연결되고 있다.
모두 7개의 층위가 노출되었는데 제일 위의 층은 충적세 때 퇴적된 것이다(손 외, 1980). 이 층위는 주로 퇴적물의 구성내용에 따라서 선정된 것이다. 제3층은 5개의 소층위로 구분되었고 다른 층, 즉 제1층·4층·5층 그리고 6층은 각각 2개씩의 소층위로 설정되었다. 바닥층은 분급도가 불량한 력층으로 사태퇴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력층을 석회마루가 덮고 있으며, 다시 이 위에 분급이 잘 되어 있는 백색의 모래가 1m가 넘게 덮혀져 있는데 부근의 하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제3층의 상부에 있는 층들은 바람에 의해서 동굴내로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
동물뼈들은 제3층부터 출토되고 있는데 이 층들은 중부홍적세 이 후에 퇴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제5층에서 곰의 이빨에서(우라늄시리즈연대측정법으로) 연대는 66,000+30,000/-18,000이며, 이보다 아래 층인 제4층에서 출토된 호랑이뼈로 측정된 연대는 4만년전으로 알려져 있다. 얻어진 절대년대는 상하가 뒤바뀌어 있으나 제4층은 마지막 간빙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제5층은 마지막 빙하기(Würm)의 초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손, 1980, 1987). 제6층에서는 13,700±700년의 탄소연대가 얻어진 바 있으나 시료의 오염으로 인한 젊은 연대라고 보고 Würm Ⅲ 또는 Ⅳ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적어도 Würm Ⅲ기 후반이나 Ⅳ기에는 해당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손, 1978, 1980; 손 외, 1980).
점말동굴에서는 45종의 동물의 잔존물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16종, 즉 35.5%가 이미 절멸된 것들이다. 동물의 구성에 있어서 제4층과 6층 사이에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으며, 제3층에서는 매카크원숭이·하이에나·코뿔소 그리고 물소가 발견되었다. 매카크원숭이 등의 동물은 제Ⅲ층이 그 뒤에 이루어진 층위보다도 훨씬 따뜻한 기후하에서 형성되었던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보고문에서는 현생인류의 뼈가 언급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출토상황이나 인골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많은 수의 뼈도구(골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고 보고 되었으나(손, 1974, 1980), 이 유물에 대한 인공물의 여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골기나 뼈예술품의 경우 식육류나 설치류동물에 의한 변형과 구분되기 어려우며, 또한 석회암락석에 의한 퇴적골의 변형을 상정할 수 있어서 이러한 자연요인에 의한 변형과 뚜렷이 구분되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유적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여하튼 점말동굴은 당시까지 북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었던 홍적세 동물화석유적이 남한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남한강의 중상류를 중심으로 한 석회암지대에서도 이와 유사한 근물화석이 출토될 수 있을 동굴의 존재를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에서 여러 동굴유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4) 청청암동굴유적
상원 검은모루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석회암동굴유적이다. 이 유적은 비교적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원강방향으로 나 있는 2개의 입구가 있다. 남쪽 입구는 현재의 강바닥보다도 12m 정도 높으며 다른 쪽, 즉 동쪽으로 나 있는 입구는 현재의 강바닥보다도 약간 높은 편이다. 동굴의 크기는 보고문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폭이 4m를 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굴내에는 천정까지 퇴적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나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천정과 벽의 윗부분 곳곳에는 뼈조각이나 퇴적물 부스러기들이 붙어 있다. 6개의 층이 발견되었는데 상부의 4개층에서 뼈화석들이 출토되었다. 최하부의 2개층은 모래가 자갈로 구성된 수성퇴적층으로 전혀 석회암괴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화석도 전혀 출토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짧은 기간내에 이루어진 퇴적으로 보인다. 화석들은 대부분이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퇴적에서만 보이는데, 각 층에서 화석이 드러나지 않는 점토층퇴적과 화석포함부분 사이에는 아주 고운 모래층이 개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화석골들은 부식이 심하고 조각난 것들이 많아서 일부는 종이나 부위판별이 어려운 정도이었다. 동물은 7종이 확인되었는데 이중에 5는 우제류이다. 이 동물종에는 현재 절멸된 것도 없고 또한 추운 기후하에 사는 것도 없다. 한편 물사슴(Hydropotes innermis Swinhoe)는 현재 양자강 남쪽이나 우리나라에 사는 현생종들 보다도 훨씬 큰 편이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출토된 동물의 크기가 주우코우티엔유적에서 출토된 것들과 흡사하다고 하여 북한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의 연대를 중부홍적세중기라고 주장하고 있다(금, 1974, p. 46). 그리고 우제류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사실도 제시된 연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5) 해상동굴유적
이 석회암동굴유적은 황해도 평산 해상에 있는데 례성강의 지류인 해상강변에 있다. 현재의 해상강은 동굴보다도 24∼25m 아래에 있다. 대부분의 동굴 내 퇴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아마도 수 미터의 두께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남아 있었던 퇴식물을 보면 하부에는 모래와 자갈로 구성되어 있으나 모래점토와 실트성점토가 그 위를 덮고 있다. 대체로 퇴적물의 구성입자는 상부로 갈수록 점점 더 고와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퇴적층에서 드러난 동물들은 설치류 1종, 식육류 5종 그리고 6종의 우제류로 구성되어 있다. 유일하게 보이는 절멸종은 동굴곰(Ursus spelaeus)인데 이 종은 적어도 홍적세말엽까지는 한반도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 유적에서 드러난 사슴과(Cervidae) 6동물의 백분비로 볼 때 검은모루나 청청암동굴보다도 뒤에 생긴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금, 1974). 그리고 또한 이 유적에서 발견된 거록은 현재 동북부의 고원지대에 현존하고 있는데 아마도 후기 빙하기 동안 추운 기후속에서 한반도 종주산맥을 타고 황해도지방으로 남하하였다고 보고 있다. 현재로서 유적의 형성시기를 제시할 만한 자료는 없으나 화석의 구성으로 볼 때 상부홍적세후반이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진다.
3. 주요 론저와 경향
1970년대에서도 대다수의 논문 또는 저술이 발굴조사에 관한 것이었으나 유적의 환경에 대한 고찰이나 문화내용의 비교연구도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발굴조사에 관한 논문들은 유적의 설명에서 논의될 예정이어서 여기서는 연구논저에 대한 내용을 학사적인 입장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황용훈 교수의 《한반도구석기문화개관》(1972)은 일문으로 발표되었는데, 구석기문화를 최초로 종합개관한 논문으로 의의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당시까지 한반도내에 발견된 유적인 석장리·동관진·굴포리·면목동·마암리유적을 아시아의 구석기문화전통과 비교하여 다루었는데, 이 유적들이 모두 후기 구석기유적이며 북아시아 후기 구석기전통과 아시아의 타제석기전통으로 구분하여 파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보다 세련된 석인기법 또는 소형석기 위주의 석기문화와 불규칙하고 비교적 원시적인 양상을 보이는 석기문화 등의 2가지 전통으로 대비한 이 이론은 당시 극히 제한되고 불완전한 자료에서 출발한 탓으로 문화전통의 연결에 있어서 무리가 있었던 것도 보이지만 석기문화를 보다 종합적으로 계통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나온 최복규의 논문(1973)도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를 비교연구한 것으로, 굴포리와 석장리의 석기들을 동북아의 후기 구석기문화들에 보이는 것과 비교하였는데, 한반도의 후기구석기문화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서해가 노출된 사이에 흘러들어 온 것이며 주구점의 석기문화가 그 조형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역시 미비한 자료를 가지고 전체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노력의 하나로서 시도 자체에 학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최복규 교수는 또한 석장리의 최상층에 나타나는 배모양 밀개와 돌날 몸돌의 존재 등과 함께 굴포리의 흑요석제 석기 2점을 토대로 동아시아 북부 시베리아지역과 연결되는 중석기문화의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였다(1974). 최근에 몇 지점에서 세석인이 무토기층에서 출토된 예가 새로이 나타나서 중석기의 가능성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한편 손보기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내는 《한국사》 고대편에 구석기문화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최초로 한국사의 시작을 구석기에서 시작한다고 인식하게 된 사건이라고 하겠다. 손 교수는 이 논문에서 석장리의 구석기문화를 전기·중기 그리고 후기 구석기문화로 구분하였는 바, 당시까지의 혼란스러운 보고의 내용을 비교적 간결하게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연대추정과 석기판정의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 정영화 교수에 의해서 처음으로 구석기문화 연구에 대한 회고가 이루어졌다. 정 교수는 《력사학보》에 기고한 글에서(1976) 당시까지 남한지역에 있어서 주요한 유적인 석장리와 점말동굴유적의 발굴과 그 성과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앞으로 구석기 연구의 방법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이 두 유적의 층위해석의 오류들, 동물화석의 판정과 이해, 그리고 석기유물의 편년의 문제, 인공품·예술품의 해석의 문제 등 당시 연구가 안고 있던 제반의 문제점을 열거하며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정통의 구석기연구를 한 고고학자로서 한국구석기연구의 지침서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 교수는 70년대 초에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서구의 여러 방법론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몇 편의 석기의 분류방식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는데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분류체계를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정 교수는 1976년과 1978년 두 차례에 걸쳐서 각각 전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구석기 문화의 분류체계를 소개하고 번역이 가능한 용어에 대해서는 한글 또는 한자로 병기하였는데 이는 본격적인 서구구석기연구방법론의 소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분류와 용어는 이미 손보기 교수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손, 1969, 1972), 정 교수는 명확하게 정의된 용어를 소개함으로써 이후의 용어의 설정과 사용에 중대한 기초를 제공한 셈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황, 1978). 그런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석기문화의 종류와 양이 적어서 한반도내의 특수한 양상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 교수의 구석기연구의 방법론적인 발전에 있어서 또 다른 공헌으로는 프랑스와 보르드 교수가 쓴 구석기시대 개설서의 번역소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정, 1979). 이 책은 후일 최무장(1981) 교수에 의해서도 번역본이 출판되지만 구석기연구의 교과서 같은 책으로 구석기문화의 일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최무장 교수도 70년대 중반에 프랑스유학에서 귀국하여 중기구석기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한편(1978), 한반도 내의 지점에서 확인된 4기층을 소개한 바 있다(1977).
북한에서는 70년대에 여러 구석기지점의 발굴보고서가 간행되었던 한편으로(발굴항 참조) 북한지역의 구석기자료를 토대로 구석기문화의 발전단계를 고인류의 진화와 관련지워서 설명하는 개설서가 출판되었다(사회과학출판사, 1977). 최초의 구석기개설서라는 점과 문화의 복원을 시도한 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지만, 고인류의 행위와 당시 사회를 무리하게 사회진화이론에 맞추어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석기문화해석에 북한고고학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은 이융조 교수가 처음으로 한국구석기문화 연구사를 《한국사론》 Ⅰ(1977)에 기고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구석기연구의 략사 및 각 유적의 발굴에 있어서 성과가 요약되어 있으며 필자의 평도 함께 있어서 명실공히 학사적인 논문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국사관논총 제19집 > 구석기시대 연구사(배기동) > Ⅴ. 1980년대 : 1981년에서 1990년까지
1. 시대 개요
1970년대와 80년대 사이에 구석기고고학에 있어서 뚜렷이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논저의 양과 질적인 면에서 그리고 발견된 유적의 성격으로 볼 때 80년대는 한국구석기고고학에 있어서 성장기 또는 발전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먼저 이 시기에 이루어진 유적발견과 발굴을 보면 무엇보다도 전곡리구석기유적 발굴을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유적은 1978년에 발견된 후 1979년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발굴조사되었는데 유적에서 채집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류석기들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 동아시아 구석기연구자들이 흥분한 바 있으며 세계구석기문화연구에 하나의 전기가 된 중요한 자료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발견되어 80년대에 들어서 보고된 유적으로 내부지방의 석회암지대인 청원의 두루봉 제2굴 및 제9굴이 있는데 이 유적들은 70년대 초 제천의 점말동굴 이래 대규모의 동물화석이 발견되어 큰 주목을 끌었으며 한반도의 홍적세 환경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동물골에도 인공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킨 바 있으며, 또한 인공석기의 존재도 제시되었으나 아직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들은 80년대 후반에 유적 형성학의 도입에 자극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말에 기획된 충주댐수몰지구발굴조사는 남한강을 따라 여러 지점에서 구석기문화를 83년과 84년에 실시된 발굴에서 노출시킨 바 있다. 수양개 후기구석기유적에서는 배모양밀개라고 부르는 석인석핵과 함께 후기구석기유물이 채집되었으며, 또한 석기제작장으로 보이는 곳이 발견되어 후기구석기시대의 석기제작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유물들로 평가되고 있다. 제원의 창내에서도 후기구석기유물들이 노출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당시의 주거지로 보이는 유구가 있다고 주장되고 있는데 타당성여부에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명오리에서도 중기 또는 후기구석기유물이 채집되었다. 충주댐수몰지구에서 드러난 가장 중요한 구석기유적은 단양의 금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원시형 주먹도끼와 함께 다량의 동물뼈들이 여러 층위에서 출토되었다. 남한지역에서 동물골과 석기가 동반된 유적이 주장된 바 있으나 논란의 여지없이 중부홍적세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이 유적을 최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해안에서도 중부홍적세로 보이는 유적이 이선복 교수에 의해 심곡리와 도화리에서 발견되었다. 80년대 중반에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현지조사하였던 이 유적들은 동해안지역에서도 시대가 중부홍적세로 올라갈 수 있는 구석기유적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선복 교수는 89년도 전남지방의 옥과에서도 후기구석기를 찾아서 발굴한 바 있다. 이는 임불리에서 출토된 후기구석기유물과 함께 남한의 최남부에서도 후기구석기유물이 출토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어서 동해안과 더불어 한반도 전역이 홍적세 동안 고인류의 서식지였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진행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외에도 전곡리구석기문화가 위치한 한탄강·임진강유역 일대에 강을 따라 발달된 강안대지―현무암대지를 따라 많은 지점에서 석기가 발견되었으며, 남계리와 금파리유적은 1989년에 시굴 조사된 바 있다. 특히 금파리유적에서는 수혈속에 다량의 구석기가 집중된 양상을 띠는 유구가 노출되어 야외주거지로 추정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석기제작소로 보이는 유구가 있어서 이 일대에 인류서식의 빈도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앞으로 임진강하류에서의 홍적세인류의 생존방식을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88년에 이융조 교수에 의해 홍수굴에서(완전한 어린 아이의) 인골을 발견한 바 있으나 국내외 논란이 많은데, 이외에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홍적세인류로는 단양 상시동굴에서 발견된 인류화석을 꼽을 수 있다. 상시동굴에서는 이 현생인류(Homo sapiens sapiens)의 뼈 뿐 아니라 많은 량의 뼈도 출토되었으며 일부는 골기로 판정하고 있으나 문제가 있다.
북한지역에서도 중요한 유적들이 80년대에 들어와서 발견되거나 보고되었다. 평양부근 상원의 용곡리 동굴유적은 80년에 예비조사와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10여 개 체분의 인류화석이 석기류와 동물뼈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고인류화석은 고형의 신인(archaic Homo sapiens)로 보여지는데 이 동굴유적내 뼈 위에 붙어 있던 석회암으로 열형광법에 의해 년대측정결과가 40만∼50만년 전으로 나와서 주목되고 있다. 여하튼 자료의 질과 양에 있어서 한반도 구석기유적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적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가 기대되고 있다. 또한 동 유적보고서는 이제까지 북한에서 간행된 어떤 보고서보다도 체제가 잡혀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의 만달리유적은 1981년에 보고되었는데 이 유적에서도 인류화석이 후기구석기―즉, 흑요석제 석인석핵류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만달인으로 명명되었다. 상원의 독재굴, 평양 승호구역의 제3호동굴, 함남의 온정리동굴유적 등 외에도 다수의 동굴유적이 조사보고 되었다.
이 시기의 논저에서 보이는 커다란 흐름으로 우선 연구성과의 종합화하려는 노력을 들 수 있겠다. 70년대 말에 정신문화연구원이 기획하였던 공동연구결과가 81년에 《한국구석기문화연구》란 제하로 발간된 이후, 1983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론 시리즈 중 한국선사문화연구의 성과를 종합하는 기획 중에 구석기부분을 포함시켜서 한국의 고고학특집으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1986년에는 한국고고학회가 《한국고고학보》 19호를 홍적세 및 구석기연구의 특집호로 출판하였다. 이외에도 연구성과를 종합화하려는 고찰 또는 새로운 시각에 의해 비판적인 논문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자료의 질적·양적인 팽창에 힘입어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이 해석하려는 노력에 의해서 구석기문화에 대한 단행본저술도 발간되었는데 최무장 교수의 《한국의 구기기문화》(1986), 손보기 교수의 《한국구석기연구의 길잡이》(1988), 그리고 리선복 교수의 《동북아시아 구석기연구》(1989)가 그것들이다.
소장학자의 수도 많이 늘어나서 이들에 의한 논문도 다수 발표되었다. 또한 구석기문화를 주제로 한 학위논문도 나타났는데, 우선 국내에서 석사학위청구 논문으로 배기동(1980), 이기길(1984) 그리고 김한식(1985) 등이 전곡리구석기문화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전곡리구석기유적은 배기동의 박사학위론문주제가 되었다(1988). 79년에 발굴에 참여한 바 있던 리선복은 아리조나주립대학(Arizona State University, Tempe)에서 구석기관계론문으로 학위를 받았고 이 역시 전곡리유적의 지질과 문화가 주된 내용인 셈이다. 최삼용(1984)과 조태섭(1986)은 점말 용굴의 뼈화석을 분석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로도 화석형성학관계론문을 발표하고 있다(1989). 70년대까지의 논문에서는 전혀 생각지 않던 화석·유적형성학을 도입하여 유물해석에 새로운 방법론을 보여 준 것이다. 공수진(1987)은 금굴의 석기문화를 연구하여 그리고 홍현선(1987)은 제3호 상시바위그늘의 문화연구로 각각 학위를 받았다. 이들보다 연세대 사학과 선배가 되는 박희현은 제원창내유적을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1989). 이러한 80년대에 등장한 소장학자그룹은 앞으로 한국구석기 고고학의 장래 수 십년간 주역으로써 커다란 영향력을 보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80년대 들어서 두드러지는 구석기연구자의 활동으로 영어론문의 발표회수가 늘었고 또한 국제적인 잡지에 기고하거나 저명한 학회에 발표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선복 교수는 세계유수의 인류학잡지인 《Current Anthropology》에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 관한 글을 기고하여 당시까지 국내에도 전곡리발견으로 팽배해 있던 모비우스 학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동아시아구석기문화 전통에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여 세계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최무장 교수와 배기동은 각각 프랑스의 가장 오래된 인류학잡지인 《L’Anthropologie》에 기고하여 한국구석기연구의 현황을 소개한 바 있으며(1987), 이 외에도 80년대에 치루어진 구석기관계의 국제학회에서 연구성과를 보고한 바 있다. 그래서 한국의 구석기문화가 세계 고고학자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여 웬만한 고고학 개론서에 전곡리와 검은모루 또는 석장리 등의 유적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2. 주요 유적
1) 전곡리
경기도 한탄강의 대지에서 1978년에 G. Bwen이라는 미군병사에 의해서 처음 확인되었다. 아슐리안형의 석기문화로 알려져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유적이다. 1979년 이후 6차례의 조사를 거쳤으며 보고서(1983) 이외에도 그간 수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석기유물은 현무암대지 위에 퇴적된 적색점토 및 사질토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퇴적물은 현무암반형성 이후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를 흐르고 있을 때 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퇴적물의 년대는 현재 논란이 있으대 현무암의 분출년대가 대략 30만년으로 알려져 있어서 현무암의 침식상황으로 추정하건대 대지형성 이후에 오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퇴적물의 열형광법(TL Dating methods)에 의해 5만년 전후로 주장하고 있으나(이선 1986) 전곡리에서 발견되는 퇴적물에서 얻어진 TL년대는 신빙성이 극히 낮을 뿐 아니라 현무암 연대를 기초로 한 지형 발전과정으로 비추어 도저히 25만년 동안 강이 대지 위에 존재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대략 20만년 전의 유적으로 보인다(배, 1988, 1989).
석기 중에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 가로달도끼, 뾰족끝도끼, 찍개, 다각면원구, 긁개, 석핵, 모암 등 여러 종류가 발견되었는 바 일반적으로 2차 가공된 것이 극히 적으며 정형화된 양식을 보이는 것도 극히 적은 편이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류들도 본격적인 유럽·아프리카의 아슐리안에 비해서는 비교적 간단하며 거칠며 큼직한 박편가공으로 제작하였다. 그래서 최초에 아슐리안형으로 주장되었는데 제작기법에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문화에서 보이는 대형석기류와 유사하다는 것이 지적된 바 있다(배, 1980; Clark, 1983; 황, 1983).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형식적인 유사성을 연대의 추정의 근거로 삼고 있는 듯한 인상인데 직접 전파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상고안문화와 동일한 환경이 존재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연대추정의 자료로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전곡리유적의 발견으로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발달한 현무암대지 위 또는 부근지점에서 구석기유적의 분포가능성이 예견되었는데 실제 여러 지점에서 발견되기 시작하였다(배, 1983, 1988). 이 중에서 남계리유적은 1989년에 최무장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전곡리의 지층구조와 유사하며 대신 두터운 미사층이 발견되었으며 훼손된 유적 일부에서 주먹도끼 등을 포함한 규암제 석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금파리유적은 문산과 적성 사이 임진강변의 현무암대지 위에 발견된 유적이다. 이 일대 북측에 있는 장파리에서는 유물의 산포가 일찍 확인된 바 있다(이선, 1988). 1989년과 90년에 실시된 발굴에서 이 지점의 층위는 현무암반 위에 두터운 모래층이 덮혀 있고 이 위에 적색점토가 1m 내외의 두께로 놓여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 위에 적색점토층이 뚜렷이 경계를 이루며 갈색점토층이 지표 가까이에서 드러났는데 이 층에서 대량의 유물이 집중된 양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타원형의 견혈형상의 유구가 드러났으며 이 속에 유물집중면이 드러났는데 일종의 야외주거지로 추정된 바 있다.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 등을 비롯한 비교적 잘 다듬어진 석기유물들과 함께 이 유적의 유구는 앞으로 한탄강―임진강유역의 고인류의 생활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 만달리동굴유적
평양부근에 있는 석회암동굴유적으로 1979년에 발견되어 1980년까지 조사되었다. 1981년에 처음으로 김교경에 의해 보고되었는데 이후 1985년에 정식으로 보고가 이루어졌으며 1987년에 석기에 관한 서국태의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 유적내에는 크게 3개의 층위군으로 구분되는 퇴적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최상층에 있는 것은 신석기문화층으로 인골을 포함하여 석기·골각기와 토기등이 출토되었다. 중간층군은 후기구석기문화층으로 구분되었는데 고인류화석, 석기 그리고 동물화석 등이 출토되었다. 최하층군은 동굴내의 내부에만 존재하였으며 동물뼈들이 존재하였고, 특히 완전한 개체의 하이에나의 뼈가 발견되었다.
인골은 후기구석기문화층의 바닥에서 출토되었는데 25재∼30재 정도의 남자의 뼈로 눈두덩이가 약간 불룩하고 봉합선이 단순하여 정수리 부위에 불룩이 올라와 있으며 두터운 턱뼈 등 여러 점에서 고형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현생인류이며 Homo sapiens로 분류하여 ‘만달인’으로 명명하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13점으로 9점이 흑요석이며 규암과 함께 쐐기형의 석인석핵을 만드는데 이용하고 있다. 가압법과 간접타격법이 박편제작에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골각기들 중에는 석기의 손잡이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뿔이 포함되어 있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높은 비율을 보이는 사슴과 짐승의 존재로 보아서 대략 20,000년 전후로 후기구석기문화층의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상부홍적세층으로 명명된 바닥층군은 드러난 동물의 33%가 절멸종으로 승리산동굴과 비슷한 정도이며 동관진유적보다 앞서고 있으며 또한 동물중에 매카크(Macaca)원숭이와 코뿔소(Rhinoceros)가 포함되어 있어서 시기가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 수양개유적
수양개유적은 남한강의 중류에 위치하는데 충주댐 수몰지구발굴의 일부로 조사되었다. 유적은 합수지점의 사이에 발달한 단구퇴적 속에서 드러났다. 1983년에 최초의 보고문(이융, 1983)과 1984년 정식보고문(이융, 1984)이 발표되었는데 남한지역의 최고의 후기구석기유적임이 드러났다. 특히 유적에서 나타난 다양하고 풍부한 석인석핵의 존재는 후기구석기 제작기법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이며 기법적 분석이 보고자인 리륭조 교수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1989).
수양개유적은 10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석기는 주로 Ⅳ층과 Ⅴ층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후기구석기들은 Ⅳ층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후기구석기 중에서 석인석핵류 이하에 유경식 타제석기도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석기제작장으로 보이는 곳에 출토된 석기들 중에 조합되는 것도 있다. 양면가공의 주먹도끼도 포함되어 있고 유럽의 Auriguacian형의 긁개도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채집된 목탄·화분에 대한 분석적인 보고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이융, 1987a, b), 이러한 시도는 당연히 하여야 할 것이나 해석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야외유적은 복합적인 형성요인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유기물질들이 혼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과거 이내의 시간범위에서 살았던 식물의 잔존물은 흔히 유적의 환경해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4) 창내유적
창내유적도 수양개유적과 같이 충주댐 수몰지구발굴의 하나로 조사되었다. 남한강의 합수지점에 생성된 퇴적 속에서 후기구석기시대유물이 드러났다. 5천여점의 석기유물 중에는 원시형 주먹도끼류, 찍개류, 다각면 완구, 주먹찌르개 등의 대형석기와 함께 긴 석인식 박편에 제작된 끝긁개(end scraper)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끝긁개류는 비교적 정교한 2차가공을 보이고 있다. 유물 중에는 흑요석제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 기원이 주목되고 있다. 발굴자인 박희현 교수는 시베리아의 레나강 유역이나 중국 오르도스지방의 후기구석기와 연결시키고 있다(박, 1989).
5) 상시바위그늘유적
이 유적에 대한 보고는 1984년에 이루어졌는데 제1바위그늘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이후 홍현선씨가 제3바위그늘에 대하여 석사논문을 제출한 바 있다. 제1바위그늘은 15㎡의 크기로 11개층이 현재까지 2.69m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다. 2천점이 넘은 동물뼈들이 채집되었는데 314개체분으로 밝혀졌다. 반수 이상의 동물뼈는 지표에서 제2층에서 채집되었고 7∼9층에서 비교적 다량의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고인류화석은 제5층에서 발견되었다. 고인류의 화석은 두개골행과 이빨, 편갑골, 그리고 다리뼈 등으로 호모·사피엔스로 분류되었는데 ‘상시인’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남한지역에서 나온 최초의 홍적세인류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적에서는 몇 건의 절대 연대가 얻어졌는데, 유적 내의 퇴적물은 5만년 전에서 상부홍적세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6) 금굴유적
이 유적은 원래 1967년에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1983년과 84년 충주댐수몰지구발굴의 일부로 발굴조사되었다. 이 유적은 남한지역에서 처음으로 대량의 석기가 동물골과 함께 출토된 유적이다. 동굴내부의 퇴적물들은 현재 대략 6m 정도 낮은 남한강에 의해서 운반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8개의 층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한 유물들은 점토성분이 많은 층에서 출토되었다.
고고학유물들은 Ⅷ, Ⅶ, Ⅵ층, Ⅱ층 그리고 최상층에서 발견되었다. Ⅱ층에서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Ⅱ층의 하부에서 발견된 것들은 후기구석기시대로 보이는데 보고자에 의하면 소형석기와 조정타격면을 가진 석핵이 증가한다고 한다. 긁개, 첨두기, 톱날석기 그리고 조각도 등이 채집되었다. Ⅷ층, Ⅶ층과 Ⅳ층에서 드러난 유물들은 전기구석기문화로 분류되었는데 Ⅷ층의 연대를 중부홍적세초기(대락 70만∼60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손, 1987).
양면가공 주먹도끼, 외면가공 주먹도끼, 찍개, 그리고 다각면 원구 등의 대형 석기군이 석기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 일반적으로 Ⅶ층에서 제한된 가공기법을 보이는 등의 보다 원시적인 특성을 보이다가 상층으로 갈수록 비교적 정제된 형태를 보이는데 제Ⅳ층에서는 양면가공 주먹도끼를 포함하여 상당히 가공이 된 석기들이 있다. 이 금굴출토석기에 대해서는 1987년에 공수진씨에 의해 분석이 이루어진 바 있다.
동물뼈들은 Ⅷ, Ⅶ, Ⅳ층과 Ⅱ층의 하부에서 발견되었는데 Ⅳ층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49종의 동물이 확인되었는데 이 중에는 날짐승과 연체류동물도 포함되어 있다(손, 1984, 1985). 이 Ⅳ층에서 출토된 동물들 중에는 Macaca, 쌍코뿔소, 사자 등 더운 기후에 사는 것과 브란티갈밭쥐과 동굴곰과 같이 추운 기후에 사는 짐승이 혼재하고 있다. 아직 왜 그러한 종적 구성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제Ⅳ층내에서 형성의 시기가 달랐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이융, 1986, p. 41).
7) 두루봉 제2굴
두루봉 제2굴은 1976년에 발견되어 78년까지 발굴되었다. 두루봉 정상에서 약 20m 아래에 있는데 36개의 층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제7층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어 보고자는 ‘문화층’으로 부르고 있다(이융, 1981). 이 층은 두께 15㎝ 정도되는 염토층으로 석기, 짐승화석, 뼈연모 등이 집중되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원래는 26종의 동물이 보고되었으나(1981) 46종으로 늘어났으며(이융, 1986), 여러 동물뼈출토유적 중 가장 많은 종이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코뿔소, 큰원숭이와 제주달팽이 등 난대성 대지 아열대성 동물의 존재로 간빙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특히 큰원숭이(Macaca robustus)의 존재로 미루어 중부홍적세의 따뜻한 시기로 보고 있다(이융, 1981, 1986). 그러나 두루봉 2굴의 사멸종은 11종(23. 9%)로 낮아서 중부홍적세로 알려진 검은모루유적보다도 훨씬 낮음에도 유의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 5천 8백점 이상의 문화유물이 제7층에서 채집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부분은 골기로 알려져 있으며 몇 점의 석기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석기나 골기나 인공이 가해진 적극적인 증거의 부족으로 제시된 것들이 진짜 문화유물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남아 있다. 그리고 예술품의 존재도 언급되어 있는데 골기나 예술품이든지 간에 이러한 것이 자연적으로 또는 다른 동물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만큼 이러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8) 두루봉 9굴
두루봉 2굴의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발견되었는데 1977년과 78년에 발굴되었다. 제2굴보다도 약 20m 정도 아래에 있다. 4개의 층위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상부의 2개 층에서 동물골들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최상층인 제Ⅳ층에서 출토되었고, Ⅲ층의 것들도 Ⅳ층의 바닥면 가까운 데서 출토되어 유물이 상부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색토층이라고 부르는 제3층에서는 4종의 동물만이 발견되었고 제4층에서 31종의 동물이 확인되었다. 이 중 젖먹이동물 중에는 큰 꽃사슴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체로 볼 때 사멸종이 대략 32% 정도 차지하고 있다. 이 퇴적층의 형성연대를 사자와 원숭이 등의 따뜻한 기후에 사는 동물이 출토됨으로써 간빙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황색토층의 상면에서 추운 기후에 살고 있던 옛비단털쥐가 출토됨으로써 추운 기후에서 따뜻한 기후로 바뀌는 시기의 것이라고 하여 리스빙기에서 리스·뷰름간빙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해석하고 있다(손, 1983, p. 20; 박, 1983; 이융조, 1986).
이 동굴에서도 석기와 골기들이 다수 보고되었다. 석기들은 대다수 석회석 또는 종유석, 거정화강암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가공이 뚜렷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뼈연모에 대해서도 보고서에 제시된 유물들은 식육류가 씹어서 생긴 부스러기 또는 송곳니자국이 뼈연모 가장자리에 보이고 있어서 인공품의 결정에 주의가 요한다. 그리고 뼈예술품으로 제시된 것 중에는 식물의 뿌리흔으로 보이는 것과 또한 설치류 동물의 이빨자국으로 보이는 것이 있어서 앞으로도 논란이 지속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9) 대현동 동굴유적
평양의 력포구에 있는 이 석회암동굴유적은 1977년에 발견되었는데 1979년에 간략한 보고문이 있었고, 정식보고서는 1986년에 다른 동굴유적보고와 함께 제시되었다. 이 동굴은 좁아서 틈굴(fissure)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한데 동굴의 내부에는 천정까지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동물화석은 석회암각력이 포함되어 있는 적색점토층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이 중간층의 상부에서 7∼8세 정도 아이의 두개골 파편들이 20㎝ 정도 반경범위내에서 발견되었는데 ‘력포인’으로 명명되었다. 이 력포인은 Homo sapiens로 분류되었는데 두개골 용적이 1400cc 정도에 이르고 두개골의 천정 높은 등의 진보된 형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앞이마가 낮고 코가 넓고 눈두덩이가 불룩한 등의 고전적인 요소도 갖고 있다. 이 유적의 동물뼈들의 조합상은 중부흥적세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2종의 동물들 중에서 반정도가 절멸하였는데 이는 검은모루유적보다도 낮으나 승리산동굴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다. 그리고 비버나 말 등의 동물의 뼈의 형태가 상부홍적세유적에서 나오는 것보다는 검은모루에 나오는 것들과 가깝다. 그런데 여기에서 출토된 바 있는 털코뿔소, 하이에나 그리고 들소 등의 등물은 비교적 시대가 내려오는 동물들임을 유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물들은 추운 지역에 사는 동물들이지만, 코뿔소나 물소 등의 존재는 따뜻한 기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유적의 환경복원에 어려움이 있다. 보고자는 여러 상이한 환경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적의 형성과정에서 기원지가 다른 것들이 섞여들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10) 화천동 동굴
평양에서 동편으로 60㎞ 떨어진 곳에 있는 석회암동굴로 9개의 틈굴로 되어 있다. 이 중 몇 군데에서만 동물뼈가 발견되었는데 제2호굴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폭 4∼5m에 17m 길이를 가진 동굴 내부에 바닥에서 천정까지 21m에 이르는 퇴적이 있었다. 이 퇴적물은 4개의 단위로 구분되었는데 부근의 화천천이 범람하였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강자갈들이 보이고 또한 얇은 층이 퇴적물의 곳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동물화석들은 퇴적의 아랫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뼈가 가장 많이 출토된 제4층에서는 석회암각력이 많이 나왔다는 점도 유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동물뼈들이 완전한 개체가 많이 출토되어서 이 동굴은 아마도 자연함정(함정, sinkhole) 같이 보아진다. 제3호굴의 것을 포함하여 4마리의 완전한 개체의 코뿔소가 드러났는데 이 외에도 사슴뼈 역시 완전한 개체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동물들이 함정에 빠졌다고 보는 또 하나의 이유로는 하이에나가 없고 말과 큰사슴 등의 흔한 동물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김신, 1986, p. 157). 22개종의 동물이 확인되었는데 이 중 2점만이 절멸종인데 조사자는 고형의 짐승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동굴이 승리산동굴보다 오래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11) 상무룡리유적
파로호퇴수지역에서 발견된 이 유적은 1987년에서 89년까지 3차에 걸려 조사되었다. 지표에서부터 3천점 이상의 유물이 채집되고 발굴에서도 2천점 이상의 유물이 수거되었다. 발굴에서 드러난 층위를 보면 4개의 층 중 지표에 3번째와 4번째 층에서 석기가 드러났다. 3번째 층, 즉 제1문화층을 후기구석기시대로 그리고 제4층, 즉 제2문화층은 후기구석기로 보아서 2∼5만년 전 그리고 7∼12만년 전으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
석기 중에는 대부분 석영으로 제작되었으나 흑요석·반암·규장암 그리고 판암 등이 섞여 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백두산에서 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석기 중에는 주먹도끼·찍개·찌르개·사냥돌·긁개·밀개·자르개·주먹까뀌·새기개·톱날 등의 석기와 함께 돌망치·모룻돌·몸돌·격지, 그리고 부스러기 등의 석기들이 채집되었다. 발굴된 유구 중에는 모룻돌과 격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석기제작장이 있었다.
이 유적은 흑요석제석기의 존재로 이미 그 중요성이 잘 알려져 있으나 한강상류 산악지대에 이러한 석기문화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우리나라 홍적새 동안 인류의 생존방식 이해에 중요한 시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2) 용곡동 동굴유적
평양으로부터 동남쪽 45㎞지점으로 상원 용곡리에 있는 석회암동굴유적이다. 1980년과 1981년에 걸쳐서 발굴이 실시되었다. 동굴내에는 13개의 층이 21m 두께로 퇴적되어 있는데 바닥으로부터 제8층이 제1문화층이며 제12층이 제5문화층에 해당된다.
제1문화층에서는 14점의 석기와 함께 558점의 동물뼈화석이 채집되었다. 석기는 전체적으로 불정형으로 찍개·다각면원구·박편된 천석 등이다. 이 층에서 출토된 동물화석은 가장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이 중에는 큰쌍코뿔소가 포함되어 있다. 제2문화층에서는 석기 21점 외에 골기도 2점 포함되어 있는데 석기는 불정형의 석핵·긁개·찍개 그리고 양면가공석기로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며 1층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동물뼈는 엄청나게 많아서 모두 5천점 이상이 채집되었는데 곰·하이에나·큰쌍코뿔이·물소·산양, 그리고 복작노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층에서는 3군데의 불땐 자리와 인류화석 4점이 발견되었다. 이 인류화석 중 7호 머리뼈화석은 35세 정도의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앞머리부위에 화살융기가 잔존하고 있고 눈두덩이가 두드러지고 앞머리뼈가 곡선을 그리고 옆머리가 아직 덜 발달되는 등의 고형적인 요소가 다수 남아 있으나 두뇌의 용량이 l,450cc이며, 기타 쟈바나 주구점의 직립 원인과 비교하였을 때 훨씬 발달한 모습을 띠고 있어서 고형의 Homo sapiens 로 보여진다. 3개의 턱뼈화석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제2문화층에서는 3개의 머리뼈와 함께 턱뼈 그리고 여러 점의 머리 이외 신체부위화석이 출토되었다. 제3문화층에서는 석기에서 눌러떼기의 기법이 보인다고 하는데 소형화한 첨두기가 두드러진 형식이며, 이외에도 골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화층에서도 동물화석과 함께 인골이 출토되었으며 또한 불땐 자리도 남아 있었다. 제4문화층은 20점의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격지 석기가 대부분이며 뼈조각품도 보인다. 이 곳에서도 동물화석과 함께 인류화석 14점이 출토 되었으며 불땐 자리도 노출되었다. 제5문화층은 신석기문화층이다. 용곡동의 동물상은 유제류가 전체의 85.6%를 차지하고 있는데 동물의 구성에 있어서 주구점 1지점·13지점 그리고 상원 검은모루의 것과 공통종이 다수 있어서 상한을 중부경신세의 중기로 보고 있으며, 또한 정촌이나 동관진 동물상보다는 이른 것이며 덕천 승리산동굴과 어느 정도 공통성이 있으나 용곡말이 승리산동굴에서 보이는 말보다도 앞선다는 점에서 상부갱신세 이전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용곡동에서 나온 동물상은 당시의 기후가 상당히 더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화분·포자의 분석에서도 최하층에서 제10층까지 아열대성 식물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제8층과 9층에서 채집된 석순과 화석에 붙어있는 석순을 이용하여 열형광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6개의 연대가 얻어졌는데 40만∼50만년 전으로 나타났다. 이 연대는 보고자가 추정하고 있는 동물상의 연대와 대개 맞아 떨어지는데 이와 공체된 인골은 40∼50만년 전의 사람인 북경원인보다도 훨씬 발달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앞으로 이 연대의 신뢰도에 대하여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주요 논저와 연구현황
80년대 들어서 구석기관계의 논저는 80년대 이전에 출간된 총수보다도 훨씬 많은 150여 편에 이르고 있다. 물론 많은 수가 유적의 발굴보고의 내용을 담고 있으나 80년대에 들어서 많은 양의 연구논저들이 등장하였다. 이에는 석사논문도 다수 있으며, 박사논문도 이미 국내에서 2편이 있으며 국외에서도 2편이 있어서 전체적인 론문의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80년대의 논리에 대한 분석을 몇 가지 분야를 나누어서 정리하여 현재 한국구석기문화연구가 어느 정도 발달하여 있는가의 관점에서 평가하여 보고자 한다.
1) 고인류화석
현재까지 고인류화석은 주로 북한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남한지역에서는 단양의 상시리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된 것과 최근에 홍수굴에서 어린아이의 인골이 후기구석기인으로 보고된 바 있다. 북한지역에서는 최근에 보고된 용곡인, 덕천 승리산동굴의 덕천인과 승리 산인 또한 력포인과 만달인이 있다. 현재로 가장 오래된 인골은 용곡인으로 유적의 연대가 중부홍적세로 알려져 있다. 승리산인과 만달인은 후기구석기 말엽에 살았던 고인류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고인류의 이해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로 보이는 점은 이러한 일련의 화석인류들을 현재 한국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고인류의 분석시 흔히 현대조선인과 비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 가장 오래된 용곡동인골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인의 특징과 연결시켜 은연 중 진화의 맥을 찾고 있다. 인류는 항상 이동하며 또한 항상 유전자의 전입이 개방되어 있다. 유전자가 일정비율 남아서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유입되어진 것보다도 더 많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고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유전자의 전입이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어떠한 형질을 가지고 수 천세대 떨어진 인류와 직접 연결짓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들어서서도 용곡인과 상시인 등이 새로운 화석인류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화석의 절대 다수가 모자랄 뿐 아니라 형태학적 비교방법론의 결여로 고인류의 진화단계의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도의 전문화한 용어인 형질인류학의 Oesteological 용어들이 개념의 제시없이 한글화한 채 사용됨으로써 이해의 혼란이 있다.
2) 석기·골기문화에 대한 연구들
80년대에 있어서 구석기문화유물에 관한 논저들에 보이는 몇 가지의 경향을 언급하고 연구사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여 보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80년대에 보이는 경향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석기문화전통에 대한 이해의 고양을 들 수 있다. 70년대까지 석장리의 문화전통의 계보를 흔히 동북중국, 즉 주구점석기문화를 들었다. 그러나 70년대 말 전곡리구석기문화가 발견된 이후 문화전통의 설정에 혼란이 은연 중 있어 왔다. 동북리의 구석기문화전통과는 다르다고 주장된 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두드러진 대형석기전통은 곧 암하―정촌의 대형첨상기전통으로 연결되었고, 중국쪽에서도 주먹도끼류의 석기가 있는 유적은 이 전통으로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좌우간 전곡리의 출현으로 동아시아의 석기문화 전통을 새로이 고찰해 보려는 노력들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의 시원적인 논문은 금원룡·정영화(1979)의 논문이었을 터이지마는 80년대 초반의 Yi와 Clark(l983) 논문, 그리고 Bae(1988)와 이선복(1989)의 논문 등에 의해서 전기구석기문화전통의 리해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몇 논문들은 석기의 형태적 유사성을 문화적 계통성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여러가지 가능성의 점검을 강조한 성격의 논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후기구석기(이융조, 1989)나 중석기문화에 대하여도 한반도를 포함한 광역의 제문화의 유형을 찾아보려는 노력들이 있는데(최복, 1983a, b; 1988; 최무장, 1983) 모두 형태적인 유사성을 지적하는 정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은 앞으로 전개될 지역간 문화의 비교연구의 기초가 될 것이다.
석기와 골기문화연구에서 지적되고 넘어가야 할 사항으로 분류체계와 용어문제가 있다. 70년대에서 이 문제가 대두되어 학자들 개개간에는 나름대로 정리되어 온 셈이나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체계설립에는 아직 많은 문제점이 남아 있다. 80년대에 들어서도 이러한 문제를 다룬 논문들이 몇 편 나왔다(박영, 1983; 이기길, 1984, 1985, 1988; Chung, 1987). 이 용어와 관련지워서 한가지 지적되어야 될 일은 손보기 교수에 의해서 일찍이 개발되기 시작한 용어의 한글화작업은 손 교수의 제자들을 위시한 구석기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되고 이용되어 왔다. 그래서 처음 사용할 당시보다는 상당히 보편화되어 왔고, 이에 따르는 구석기학자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들이 사실 정확한 개념정의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르개’라고 하면 원래 ‘Cleaver’의 뜻을 따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손, 1968), 실제 적용한 석기의 형식은 전혀 다른 것임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순수히 ‘자르개’라는 것이 서구의 개념과는 별개로 설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개념이 명시되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다. 80년대에 이러한 분류·용어 사용에 있어서 하나의 변화는 이제까지 유럽용어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전곡리발견 이후 아프리카구석기 연구체계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배, 1980; 김과 배 1983; Clark 1983; 이선, 1990).
석기의 기능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이 형태와 기능에 관한 문제점은 구석기분야가 형성되고 난 이후 아직 해결되지 아니한 문제로 근래 Keeley 등의 몇 학자에 의해서 실험적 방법을 통한 석기의 기능을 확인하는 방법을 개발되기는 하였으나 이를 통하여 실제 석기의 용도를 알아내는 것은 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립자가 거친 석재의 경우에는 뾰족한 방법이 개발된 것이 없다. 거친 석기에서 흔히 시도하는 부러진 자국에 대한 연구도 자연적인 훼손과 구별에 있어서 난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에 기능적인 연구에 대한 관심(이기, 1988)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유물의 기능적인 판단과 관련하여 한국구석기고고학의 문제점은 기능을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하는 방법, 즉 사냥용·부엌용…… 등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다. 현재로서 구석기고고학자들은 석기유물의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서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석기라고 분류하는 것이 전혀 사용되지 아니한 ‘폐기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고고학자의 궁극적인 목표 중의 하나가 이러한 구체적인 기능을 밝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혀 증빙할 수 없는 행위를 석기의 명칭으로 표현하였을 경우에 고고학적인 신기루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석기사용자의 남·녀의 구분이나 왼손·오른손잡이의 구분도 과학소설에 합당한 주제일 것이지만 과학적인 론의의 대상은 되지 않는 것이다. 1960년대 말에서 시작된 석기분석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80년대 후반의 보고서에서도 보이고 있어서(예, 최복, 1988), 앞서 언급된 기능에 대한 과한적인 접근법의 도입과 비교할 때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석기문화와 함께 문화유물로 흔히 언급되고 있는 골기에 대한 보고가 늘어난 것도 80년대의 특성이다. 동물골이 다량 출토된 두루봉동굴들 이외에도 70년대에 발굴된 점말동굴의 뼈연모도 8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이 연구되었다(조태, 1986; 손, 1988). 홍적세구석기유적에서 동물골의 존재는 인간의 생존행위와 관련되어 있어서 년대 측정이나 환경복원의 목적이외에도 대단히 중요한 증거로서 특히 1970년대와 1980년 전반에 구석기시대 해석에 주요한 이슈로 등장한 바 있었다. 그런데 뼈는 석기와는 달리 인간 이외의 동물에 의해서도 운반되고 변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70년대 80년대 뼈의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이 민족지적 관찰법이나 실험고고학적인 방법들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유적형성과정에 있어서 자연적인 요소를 인공적인 요소로부터 분리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바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동물뼈가 변형된 채로 출토된 것이 상당수 나타났다. 두루봉동굴에서는 수 천점의 골기가 보고되고 있으며, 점말동굴에서도 비슷한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뼈의 변형이 주관적으로만 판단된 채 인공물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제시된 자료에서 볼 때 설치류의 행위나 식물의 뿌리에 의한 변형 또는 식육류의 이빨에 의한 변형 등이 골기로 제시된 바가 있어서 골기판정의 신빙도를 의심케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골기들이 출토된 유적들이 인공의 흔적이 불확실한 곳도 다수 있어서 보다 세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석기가 거의 출토되지 아니한 유적에서 인류에 의한 골기의 변형은 더 더욱 그 개연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인공물이 공반한다고 하더라도 뼈는 인간이 거주한 이후에 동물에 의해서 변형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좌우간 골기는 그 어떤 것이든 변형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 여러가지의 방법으로 증명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 고생물화석과 유적의 연대
한반도의 구석기유적의 연대는 사실 측정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왜냐하면 절대 연대를 추출할 수 있는 방법 또는 자료가 발견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또한 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신빙할 수 있는 정도가 14C연대측정법이든지 또는 K/Ar법 등과 같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구석기 또는 홍적세유적에서 절대연대가 제시된 유적은 5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전곡리의 경우에는 퇴적층의 연대가 아니고 바닥의 현무암층에서 드러난 연대이며 점말동굴의 연대는 뼈에서 얻어진 것인데 시료가 오염되었던지 연대의 결과가 층위와는 배치되고 있어서 수용에 주저하는 바가 되고 있다. 석장리의 경우에는 최상문화층에서 14C연대가 나왔는데 그 이전의 문화층의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석장리의 연대를 제외한 절대연대들은 모두 80년대에 들어와서 얻어진 것들이었다. 특히 용곡동 유적에서도 TL법에 의해 40만년∼50만년 사이의 연대가 6개나 나와서 연대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 유적의 중요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 바 있다. 열형광법에 의한 절대연대는 한탄강 일대의 퇴적층에서도 얻어진 바 있는데(이선, 1989) 이 연대측정법의 제한적인 조건때문에 일반퇴적층의 년대측정 결과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어서 유적의 연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절대연대의 희소성은 자연히 연대추정에 지질학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석기의 양식도 주요한 년대측정의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석기의 양식적인 변화는 한반도내의 석기유적의 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전시대를 통하여 세밀히 문화의 발전단계를 복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하며, 석재탓인지 석기제작기법의 발달이 뚜렷하지 않아서 석인석핵이 출현하거나 량질의 석재에 세밀한 가공이 있는 후기구석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석기들은 그 시대적 양상을 파악하기 힘든 정도이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중기구석기로 분류되는 유적이나 층위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서구나 아프리카에서 흔히 말하는 조정타격법에 의한 석기제작이나 2차 가공이 현격히 증가한 소형석기군의 발달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고 여러 상황에서 볼때 전기구석기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후기구석기의 문화양상으로 보기에는 미발달의 양상을 보이므로 석기문화를 중기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의 보고서에는 르봘르와기법이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사 르봘르와기법이거나 전혀 르봘르와의 의미를 적용시킬 수 없는 그저 타격면에 박편흔이 많은 정도로 보인다. 서구학자에 의하면 동북아시아, 특히 중국구석기문화에서도 르봘르와기법은 없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으며(배, 1989년 참조), 이는 동북아시아문화의 공통적인 양상의 하나로 보인다. 좌우간 석기의 형식으로 편년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있어서 실제 후기구석기와 구분하는 정도로밖에 사용될 수가 없다. 실제 이 경우에도 석기조합이 정교하지 않다고 하여 모두 후기구석기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생물화석에 의한 연대와 환경복원이 현재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고생물화석이 출토되는 유적이 드러날 때마다 고생물의 종적 구성의 비교와 아울러 종의 형태를 이웃 유적들과 비교하여 선후를 결정짓는 식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절멸종의 전체 종류에 대한 비율이 어느 정도인가가 가장 중요한 시대편년의 결정요건이었다.
고생물학적인 방법을 쓰는 데도 한계가 있다. 현재까지 절멸종의 비율이 정확하게 순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80년대에 출토된 동물상 중에서도 화천동 동굴의 동물상은 2종이 절멸종으로 확인되었는데 승리산동굴의 동물상보다도 앞선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 동물의 형태적인 변화에 대하여 아직 본격적인 자료축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여 어떤 한 종의 시간적인 형태의 변화속도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에서는 주로 주구점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교하여 고신을 결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현재 한반도에서 드러난 고생물상의 최대의 단점은 종의 변동이 시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후적으로 급격한 변동을 겪지 아니함으로써 동물의 급작스런 절멸이나 출현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반도가 남북으로 길게 되어 있어서 동물의 상하이동에 의한 생존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유적에서 출토되는 양상이 각각 다른 환경에 살고 있는 동물이 같은 층위구역내에서 동반되고 있다는 점도 또한 기후복원뿐 아니라 시대편년을 어렵게 하고 있다. 매카크원숭이·물소, 그리고 코뿔소 등도 분명히 온난 또는 아열대성 환경하에 사는 동물이지만 추운 환경에서 사는 짐승과 공반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나는 이러한 동물의 환경적응의 범위를 오늘날의 분포상황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도 고려해야 할 것이며, 즉 환경적응의 범위가 현대보다도 훨씬 광범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방향으로서 앞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은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보다 다원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의 형성요인은 항상 복합적인 것이지 하나의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현상이 오늘날 고고학자 앞에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방향의 연구는 이미 서구의 고고학에서는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동양의 석기연구에 있어서는 아직 초입의 수준이며, 앞으로 본격적인 탐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 동굴에서 발견된 동물골의 경우라 하더라도 꼭 한 시대의 동물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운반과정에서 또는 유적형성요인 자체가 복합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의 구석기학자들이 제시한 것을 보면 상원 검은모루유적이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후의 유적의 연대에 대해서는 각인각색의 연대관을 보이고 있다. 사실 상원검은모루유적에 대해서도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시대가 많이 내려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북경 고척추동물연구소 금창주 연구원과의 대화에서). 여하튼 주요한 몇 가지의 견해를 소개하여 비교하여 보면 우선 최무장 교수는 중부홍적세에 속하는 유적으로 상원유적 이외에 청청암동굴이 중부홍적세말, 점말동굴의 하부층 중 일부 Riss빙기로 제시된 층의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두루봉 2굴과 9굴을 중부홍적세에 포함시키고 있고 이 두 굴이 덕천 승리산의 하층과 동관진유적 사이에 놓았다. 최 교수는 덕천유적을 중부홍적세말에서 상부홍적세초로 보고 있다. 그런데 최 교수는 논저들에서 상부홍적세의 동물상은 간략히 설명하고 말았는데 동관진을 상부홍적세초로 추정하고 황해도의 해상동굴은 후기홍적세의 말엽에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최 교수는 중기홍적세에 포함시킨 동물상들에 포함된 따뜻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동물의 존재를 편년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이러한 동물상속에 포함된 초원성 동물이나 추운 기후하에 살고 있는 동물의 존재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더운 시기라고 하더라도 너무 광범위하게 제시된 감이 있다.
리륭조 교수는 단양 금굴의 제1, 2문화층을 중부홍적세의 따뜻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상원검은모루유적과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다. 이는 공통적인 따뜻한 환경에 살은 동물의 존재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아열대동물의 존재하는 층위의 시기를 Mindel/Riss간빙기로 보려고 하고 있다(이융, 1986). 그리고 점말동굴의 제Ⅲ층을 중기홍적세층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제Ⅳ층에서 나타난 곰 아래턱을 U/Th/Pb로 측정하여 66,000±30,000BP의 연대를 얻어서 사멸종이 35%로 덕천동물상의 사멸종 비율(36.7%)에 접근함으로써 Riss빙기로 보고 있다. 역포 대현동동굴도 역시 중기홍적세로 분류되었는데 북한의 조사자들이 이 유적의 동물형태들이 검은모루의 것과 유사한 점을 제시하여 이와 비슷한 시기로 제시한(고고학연구소, 1985) 것을 받아들여 중기홍적세의 이른 시기로 간주하고 있다. 두루봉 9굴도 중부홍적세의 유적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4종의 척추동물 중에서 2종이 절멸한 것으로 Riss빙기로 보고 있다. 두루봉동굴 제2굴에서는 큰꽃사슴의 존재과 매카크원숭이의 출현 등의 이유에서 중부홍적세시기 중 검은모루의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굴의 동물상 중 사멸종은 11%로 적게 나타나고 있는데 사멸종이 적다 하더라도 일부에서 청청암을 중기홍적세중기로 보는 견해(김교, 1974; 최무, 1980)가 있어서 이를 받아들인다면 중부홍적세로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로 앞으로 사멸종의 낮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보다 근거있는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 교수에 의해 후기홍적세로 분류된 유적은 덕천 승리산유적, 청원두루봉 9굴의 붉은 흙층, 제원 점말동굴의 Ⅳ―Ⅳ층, 단양 금굴의 3, 4문화층, 상원 청청암동굴, 평산 해상동굴, 승호 화천동굴, 단양 상시동굴, 동관진유적, 승호 만달리동굴, 화대 장덕리동굴 그리고 제주도의 빌레못동굴이다. 덕천동굴에서 ‘덕천인’이 출토된 층은 큰쌍코뿔소의 존재로 중기홍적세말과 후기홍적세초로 보는 북한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고 ‘승리산인’이 출토된 층을 후기홍적세중기에서 약 20,000년전이라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두루봉 9굴에서도 붉은 흙층에서 출토된 동물상에는 따뜻한 기후의 것과 추운 기후의 것이 혼재하고 있는데 이는 Riss빙하기에서 Riss/Würm간빙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제원 점말의 경우에는 절대연대의 범위(66,000―30,000BP)를 고려하고 옛비단털쥐의 생존시기를 고려하여 Riss/Würm간빙기에서 뷰름 Ⅱ기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단 양금굴의 3층은 쌍코뿔소·사자·짧은꼬리원숭이 등의 더운 짐승이 존재하고 있어서 리스·뷰름간빙기로, 온대성 짐승이 주류를 이루는 제4층은 마지막 빙하기에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청암동굴은 애초 북한학자들이 사감종이 없음에도 검은모루에 가까운 시기로 분류한 바 있는데 리륭조 교수도 후기홍적세 어느 시점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동관진의 연대가 해상동굴보다 늦게 분류한 북한학자의 견해에도 반대하고 있다. 또한 대현동의 동물상도 원 보고자들은 중부홍적세의 늦은 시기로 보고 있는데 리 교수는 후기홍적세의 따뜻한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손보기 교수도 최근 그의 저서(1988)에서 전유적의 편년을 시도하였는데 금굴 1층을 60∼7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았으며 검은모루가 이와 비슷한 시기로, 두루봉 9굴의 아래층을 중부홍적세 중기, 즉 24만년 전후로 배치하고 역포와 화천동유적을 20만년 전후에, 그리고 점말 3층을 중홍적세 말엽 또는 후기 초로 배열하고 있다. 여기서 금굴의 1층은 동물화석의 수가 적어서 실제 그 정도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고, 그리고 대현동유적에 대해서는 타 연구자와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으나 화천동유적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코뿔소의 존재가 있기는 하나 전체적인 화석동물의 양상이 보다 후기 홍적세로도 연결될 가능성도 있어서 이에 대한 설명이 없는 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후기 홍적세에 들어서서 손 교수는 상지 1그늘, 덕천, 해상, 고향둔, 그리고 동관진유적을 거의 동시대에, 즉 3.8만년 전후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상술한 바로 동물상의 구성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덕천을 상시유적이나 해상유적과 동시대로 본다는 것은 동물상뿐 아니라 동물의 형태적인 비교에서도 납득키 어려운 점이 있다.
한편 북한의 학자들이 보는 동물상의 편년은 언급한 바로 검은모루유적이 50∼60만년 전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중부갱신체(중부홍적세) 말엽과 상부경신세의 초엽의 유적으로 청청암과 해상 그리고 승리산을 뽑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보고된 대현동유적을 검은모루보다 약간 떨어진 시기로 보고 있다. 화천동동굴의 동물상은 후기빙하기 초엽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후기홍적세의 후반(4만―14,000BP)에 해당되는 유적으로 승리산의 상층, 동관진·만달리 등의 유적을 이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청청암과 해상의 연대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로 남한학자들의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석기문화는 앞서 년대론의 서장에서 언급한 바 대로 편년에 어려움이 많은데 현재 전기구석기로 분류되는 유적으로 북한에서는 상원검은모루석기류가 있고 남한에서는 전곡리유적과 금굴의 하층문화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석장리유적과 점말, 그리고 두루봉동굴에서 전기구석기에 해당되는 문화가 출토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석장리 하부층출토 석기의 인공품인지의 여부가 논란되고 있으며, 또한 이 층위의 형성이 중부홍적세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있다. 두루봉 2굴의 문화유물들은 대부분 골기로 보이는데 이의 인공품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고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인공의 흔적을 입증할 자료가 제시되지 아니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9굴의 골기·석기에도 마찬가지이어서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에 위한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곡리의 석기문화는 앞 항에서 대체적인 설명이 있었지만 그 연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데 석기의 형식적 판단으로 볼 때 전혀 후기나 중기적인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인 문화상은 오히려 아슐리안 초기형 또는 아프리카의 발전형 올도완형에 가까울 정도로 석기가 1차 가공에 의존하고 형식적으로 정형화한 감이 적은 편이어서 아슐리안형의 석기 존재에도 불구하고 소위 ‘1회용 즉석석기’로 표현될 정도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에 있어서 후기구석기 또는 이에 근접하는 시기의 석기문화 이전의 것들에서 형식적인 편년을 시도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문화는 발굴시작 시점을 전후하여 ‘아슐리안전통의 중기구석기’ 또는 아프리카의 아슐리안기 말엽에 해당되는 석기문화 등으로 비정되고 한편으로는 30만년 전후의 리스 빙기에 형성된 퇴적층이며 아슐리안형의 석기문화로 주장되고 있어서 시대폭이 수 십만년에 이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선복 교수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전곡리유적에 대해 여러가지의 관찰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열형광법에 의한 퇴적물의 연대인 45,000BP이다. 물론 유물포함퇴적층에서 바로 채취된 사료는 아니지마는 리 교수에 의하면 유물포함층퇴적과 동시 또는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는 퇴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열형광법에 의한 퇴적물의 연대측정은 현재로서 전혀 신뢰도가 있는 방법이 아니다. 물론 풍성기원의 퇴적물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풍성 기원은 입자가 바람에 날릴 때 태양에 의해 TL이 령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지만 현재 TL에 의한 년대측정은 어느 것이나 참고자료이지 이것에 의해서 연대결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전곡리유적의 바닥은 현무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 현무암의 마지막 퇴적이 대략 30만년 진후로 현재의 유적은 강의 현무암대지 침식속도로 비추어서 크게 시대가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보고 대략 20만년에서 30만년 사이의 퇴적일 가능성이 제시된 바 있다.
금굴유적의 하부층 석기들이 손 교수에 의해 전기구석기로 보고 있으며 연대가 중부홍적세 초에서 중엽에 이르는 시기로 편년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3문화층과 제4문화층에서 출토되는 석기들은 후기 홍적세 초기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최무장 교수는 하부층들도 중기구석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근거로 전기·중기와 후기구석기가 한 자리에서 그렇게 발견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에 동물상의 양상으로 볼 때 1층에서는 동물이 보고되지 않았고 2층에서도 소수의 동물만이 보고된 바 시대적인 추정에 신뢰도를 부여할 정도가 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된 3문화층(자연층 Ⅳ층)의 동물상에서는 절멸종의 비율과 따뜻한 기후하에 사는 동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Riss/Würm간빙기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금굴 이외에도 전기구석기로 보고된 유적으로 양양의 도화리와 강원도 명주군 심곡리가 있는데 심곡리는 1984년 이선복 교수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주먹도끼 등이 채집된 바 있다. 북한의 검은 모루유적의 석기는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물로 보고되고 있으나 유물 자체가 너무 원시적이고 변형의 상태파악이 어려운 실정이어서 인공유물 가능성에 여러 사람들이 회의를 표시하고 있어서 석기존재의 연유가 보다 명확하게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중기구석기의 존재는 아직 석기문화의 발전단계로 설정된 바가 없는데 흔히 후기적인 양식이 보이지 않는 석기문화 중에 아마도 시기적으로 후기홍적세의 전반부에 속하는 석기문화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기구석기에 속하는 석기문화로 명오리석기문화, 석장리중층문화, 굴포리하층문화, 금굴의 제3문화층, 수양개의 제5층에서 드러난 석기류 등이 중기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분명하지도 않으나 제주도 빌레못동굴에서 발굴된 석기류들이 중기로 분류되고 있다. 이외에도 중기로 언급되고 있는 유적으로 점말·두루봉 그리고 덕천 등이 꼽히고 있는데 이 지점들의 석기문화 양상은 현재로 불명하다.
후기구석기유적은 석인·석인석핵 그리고 2차 가공이 잘된 석소형석기류가 등장하는 시대가 후기빙하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지칭한다. 석장리의 상층, 만달리상층, 후기구석기층, 굴포리상층, 부포리유적, 제원 창내유적, 수양개유적, 그리고 상무룡리의 상층유적 등이 이 범주에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 사이의 선후관계는 아직도 논의된 바가 없다. 석장리의 상층과 주거지층에서는 절대연대가 3만년∼2만년이 얻어진 바 있어서 한반도내에서 석인석기문화가 이 시기 전후하여 전역에 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고인류행위와 유적형성과정에 대한 이해
60년대 처음에 석기문화가 발견되었을 때에는 석기문화 자체 또는 동물골 자체에 대한 설명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인간의 행위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유적내에서 인간의 행위의 복원 또는 사회의 복원이 시도되고 있다. 북한에서 발간된 그전의 구석기개론서와 고고학개설서에는 환경과 사회복원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시도는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류의 발전단계를 그렇게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단계에서 씨족사회가 형성되었고 그것도 모계씨족이었고……등등의 표현은 도저히 현재의 구석기고고학의 증거로는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사회복원의 시도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고 하더라도 하등의 근거가 없이 제시된 설은 그것이 가능성 있는 다원적인 가설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본질의 파악에 장애가 될 뿐일 것이다.
두루봉 9굴에서 시도된 집단의 규모복원과 유적의 사용일수추정 등은 전혀 유적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개체의 무게를 이용해서 산출한 것으로 1차적으로 그 동물들이 사람에 의해서 사냥되어 들어왔는가, 최소개체수가 바로 동물 개체수로 바로 환산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육류에 의존하였던가 등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것으로 방법론적으로 근본적인 오류가 있음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기원이 다른 동물뼈가 혼재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 동물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유적도 폐기된 후 지질적·생물학적, 그리고 물리적·화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고고학자 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후세 사람에 의해서도 재퇴적되거나 훼손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유적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그 자리에 폐기되지 않았을 수도 있음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유적내에 나타난 여러가지 요소들이 동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부정적인 모든 요인을 제거하면서 유적에서 이루어진 행위를 설명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석장리유적의 머리카락, 동물털의 존재, 또한 80년대에도 수양개유적에서 드러난 털의 존재 그리고 여러 야외유적에서 추출된 화분, 동굴유적에서 보이는 설치류동물의 뼈 등, 한반도내 구석기유적에서 새로운 설명이 있어야 할 부분들이다.
Ⅴ. 맺음말
한국 구석기고고학은 짧게는 3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60년대에는 희소한 유물 내용에도 그 싹이 트기 시작하였고, 70년대에 유물유적의 양이 중가하면서 본격적으로 그 틀을 잡아 80년대에 와서는 유적의 수효나 인적 자원이 크게 증가하였고, 수 많은 론저가 나오게 되었다. 시대로 보면 전기구석기 또는 중부홍적세에서 후기구석기말까지의 시대에 걸치는 유적이 발견되었고, 또한 후기홍적세의 ‘승리산인’과 ‘만달인’뿐 아니라 중부홍적세의 인류로 보이는 ‘용곡인’도 출현하였다. 유적도 이제 한반도의 동부와 남부에서도 발견되어서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방법론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룩하여 왔다. 석기용어의 제정과 정비, 기학의 도입으로 환경과 유적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시도, 주변지역과 문화상 비교, 그리고 민족지적인 관찰에 의한 문화상 설명시도 등으로 새로운 영역의 방법들이 추가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개발 또는 수정되어야 한 부분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앞으로 한국구석기연구의 도약을 위하여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다. 새로운 방법의 도입에 있어서 단순한 적용보다는 왜 그러한 방법을 시도해야 하는가를 충분히 생각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서구에서 개발된 방법론들의 근본적인 한계를 충분히 인식한 후에 시도하여야 진실된 과거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분야 중에는 아직도 석기의 분류체계와 용어 등의 가장 기본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80년대에 들어서 제2세대 또는 제3세대가 활약하기 시작하고 있어서 앞으로의 10년이 구석기연구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는 단계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반도 구석기 유적 분포도
부록 : 조사 및 논저 연표
1933 동관진유적조사(1933-1934) 1934 도구나가 시게야수, 《제1차 만몽학술조사연구단보고》 제2부 제1편(만주국 길림성 고향둔 제1회 발굴유물연구보문).1940 나오라 노부오, 〈조선 동관진 발굴 구석기시대의 유물〉(《제1차 만몽학술조사연구보고서》 제6부 제3편 8). 1958 김정학, 〈한국에 있어서 구석기문화의 문제〉(《고려대학교 문리논문집》 3, 1-25). 1960 김용남, 〈안가라 강 수력발전소 구역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발굴사업〉(《문화유산》 60-2).
1962 굴포리유적 발견1962 김신규, 〈함북 화대군에서 털코끼리의 유골을 발견〉(《문화유산》 2). 1962 도유호, 〈강좌, 빙하기란 무엇인가?〉(《문화유산》 62-4). 1962 도유호, 〈강좌, 인류의 기원〉(《문화유산》 62-5). 1962 로영대, 〈함북 화대군 털코끼리 발굴지에 발달한 니탄층의 포자 화분조합〉(《문화유산》 4, 49-54). 1962 박준석·최현모, 〈털코끼리가 발견된 함북 화대군 장덕리 4기층의 층서와 고지리적 환경에 대한 고찰〉(《문화유산》 4, 55-57).
1963 굴포리 유적 발굴(1963-1964) ; 석장리 유적 발굴(1963-1974, 1990). 1963 김용남, 〈강좌, 중석기시대〉(《문화유산》 63-3). 1963 김용남, 〈중석기시대〉(《고고민속》 63-3, 50). 1963 도유호, 〈학계소식, 1963년 중 고고학에서 거둔 성과〉(《고고민속》 63-3). 1963 백기하, 〈인도네시아 끄리끼란 지방에서 발견된 피테칸트로푸스 하악골에 대하여〉(《문화유산》 63-3). 1963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동에서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고고민속》 63-2). 1963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력사과학》 63-4).
1964 부포리 유적 발견1964 김원용, 〈중국 구석기시대 유물·유적의 신발견들〉(《역사학보》 25). 1964 도유호, 〈조선의 구석기시대 문화인 굴포문화에 대하여〉(《고고민속》 64-2, 3-7). 1964 도유호·김용남,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와 이른 신석기시대의 년대론에 대하여〉(《력사과학》 64-5). 1965 도유호·김용남, 〈학계소식, 굴포문화에 대한 그 후의 소식〉(《고고민속》 65-1).
1966 상원 검은모루 유적조사
1967 면목동 구석기 유적 발굴1967 김명근, 〈강좌, 지질 제4기층〉(《고고민속》 67-1). 1967 김원용, 〈공주 마암리 동굴 유적 예보〉(《역사학보》 35·36, 26-41). 1967 손보기, 〈층위를 이루는 석장리 구석기문화〉(《역사학보》 35·36, 1-25). 1968 손보기, 〈석장리의 자갈돌·찍개 문화층〉(《한국사연구》 1, 1-62). 1968 Sohn Pokey, 〈Grattoir-burin carene discovered at Sockchang-ni, Korea〉(《동방학지》 9, 215-238).
1969 평양 청암동굴 및 해상동굴 발굴조사(1969-1970) 1969 고고학연구소, 〈상원 검은모루 유적 발굴 중간보고〉(《고고민속론문집》 제1집, 1-30). 1969 손보기, 〈석장리 이외의 구석기문화의 분포 가능성〉(《백산학보》 7, 1-24). 1969 황용훈, 〈한반도 구석기문화 석기제작방법에 대한 고찰〉(《춘대논총》 1, 95-106). 1970 김신규, 〈우리나라 원시유적에서 나온 포유동물상〉(《고고민속론문집》 2). 1970 손보기, 〈석장리의 새기개·밀개 문화층〉(《한국사연구》 5, 1-46). 1970 황용훈, 〈서울 면목동 유적 발견 구석기의 형태학적 조사〉(《경희사학》 2, 15-28). 1970 Yang Kyungrin,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of Korea Radiocarbon Measurement〉 Ⅰ(《Radiocarbon》 vol. 12, no. 2, 350-352).
1971 덕천 승리산 동굴 유적 발견1971 손보기, 〈석장리의 후기구석기시대 주거지〉(《연세논총》 8, 3-20).
1972 덕천 승리산 동굴 발굴(덕천인과 승리산인)(1972-1973) 1972 김용관·서국태, 〈서포항 원시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 제4집 33-40). 1972 손보기, 〈석장리의 전기·중기 구석기문화층〉(《한국사연구》 7, 1-58). 1972 손보기, 〈한국의 구석기문화〉(《백제연구》 3). 1972 손보기, 〈반구대 암각화 구석기 흔적 짙다〉(《문화재》 7). 1972 손보기, 〈한국 구석기문화에 대한 몇 가지〉(《문화재》 6). 1972 Yaug Kyungrin,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of Korea Radiocarbon Measurement) Ⅱ(《Radiocarbon》 vol. 14, no. 2, 273-299). 1972 황용훈, 〈한반도 구석기문화의 개관(일문)〉 상(《고대문화》 24-12, 335-347). 1973 황용훈, 〈한반도 구석기문화의 개관(일문)〉 하(《고대문화》 25-1, 26-41). 1973 손보기, 〈석장리의 후기구석기시대 집자리〉(《한국사연구》 9, 3-57). 1973 손보기, 〈The Upper Paleolithic Habitation; Sockchang-ni, Korea-A Summary Report〉(《Publication of Yonsei University Museum English Series》 No. 1). 1973 손보기, 〈구석기문화〉(《한국사》 1, 9-46). 1973 최복규, 〈한국과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문화의 비교연구〉(《백산학보》 14, 5-58). 1973 박영철, 〈한국 선사시대의 자연환경연구〉(연세대학 석사학위논문).
1973 제주 빌레못 동굴조사·제천 점말 동굴조사(1973-1980) 1974 김신규와 김교경, 〈상원 검은모루 구석기시대 발굴보고〉(《고고학 자료집》 4, 3-39). 1974 김교경, 〈청청암 및 해상동굴 유적 발굴보고〉(《고고학 자료집》 4, 40-63). 1974 최복규, 〈한국에 있어서 중석기문화의 존재 가능성〉(《백산학보》 16, 1-45). 1974 박희현, 〈한국 구석기시대 생활환경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1974 손보기, 〈Paleolithic Cultures of Korea〉(《Korea Journal》 14-4, 4-14). 1974 Sohn Pokey, 〈Une habitation du paléolithique superieur de Sokchang-ni, Coreé〉(《Revue de Coreé》 6-1). 1974 손보기, 〈한국 구석기시대의 자연, 특히 점말동굴의 꽃가루분석과 기후의 추정〉(《한불연구》 1, 9-31). 1974 정영화, 〈구석기시대 혈거유적에 대하여〉(《문화인류학》 6, 51-56). 1975 손보기, 〈제천 점말동굴 발굴 중간보고〉(《한국사연구》 11, 9-53). 1975 박선주, 〈한국 선사시대의 인골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1975 박희현, 〈한국 후기 구석기시대의 생활과 환경―석장리 후기 구석기시대의 집자리를 중심으로〉(《백산학보》 18, 69-119). 1975 손보기,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과 한국 선사시대 편년문제〉(《역사학보》 68). 1975 손보기, 〈Paleolithic excavations in Korea〉(《The Traditional Culture and Society of Korea, Prehistory, ed. by R. Pearson》 30-41). 1975 손보기, 〈한국 구석기문화의 연구―한강 상류지역의 동굴 발굴과 그 연구보고〉(《한국사연구》 11, 9-53).
1976 두루봉 동굴조사 ; 2호와 9호(1976-1978) 1976 이융조, 〈새로이 발견된 구석기 전통유물의 몇 예〉(《백산학보》 20, 5-66). 1976 정영화, 〈구석기시대, 회고와 전망, 1973-1975〉(《역사학보》 72, 142-148). 1976 고도우 다다시, 〈조선반도―조선 구석기연구의 현황―〉(《일본주변의 구석기 문화(일문), 일본의 구석기문화》 제4권, 91-180). 1976 정영화, 〈구석기의 명칭 및 형태분류〉 Ⅰ(《한국고고》 3). 1976 최무장, 〈한국 선사시대의 골기〉(《문화재》 10). 1976 최무장, 〈한국 선사시대의 석기〉(《백산학보》 21).
1977 평양 승호리 화천동 유적, 평양 대현동 유적(력포인 발굴)1977 고고학연구소, 《조선의 구석기시대》.1977 이융조, 〈구석기시대〉(《한국사》 1, 국사편찬위원회).1977 최무장, 〈한국의 제4기 문화층〉(《호남문화연구》 9). 1977 최무장, 〈한국 선사시대의 동물〉(《건국대 인문과학논총》 10).
1978 전곡리 유적 발견1978 이융조, 〈한국 선사예술의 한 류형〉(《고문화》 16). 1978 고고학연구소 자연사연구실, 〈덕천 승리산 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1). 1978 정영화, 〈구석기 명칭 및 형태분류〉 Ⅱ(《영남사학》 7·8, 105-171). 1978 정영화,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영대문화》 11, 32-52). 1978 최복규, 〈한국 선사시대의 무기연구―구석기시대를 중심으로〉(《육사논문집》 18). 1978 최복규, 〈한국의 선사시대 예술과 그에 나타난 신앙의식〉(《백산학보》 24, 64-65). 1978 최무장, 《중국의 고고학》(《탐구신서》).1978 Sohn Pokey, 〈The Early Paleolithic Industries of Sokchangni, Korea〉(《Early Paleolithic in South and East Asia, ed. by I Fumiko Smith》 233-245).
1979 전곡리 유적 발굴(1979-1986), 만달리 동굴조사(1979-1980) 1979 김원용·징영화,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진단학보》 46·47, 7-47). 1979 Bowen, G., 〈Report on the stone tools from Chongokni〉(《진단학보》 46·47). 1979 이융조, 〈청원 샘골유적 대청댐 수몰지구 유적 발굴조사보고〉(《충북대학교 박물관》 7-28). 1979 김교경, 〈덕천 승리산 유적의 년대에 대하여〉(《고고민속론문집》 7집).1979 류병홍, 〈새로 발굴한 대현동 구석기시대 유적〉(《력사과학》 79-2). 1979 손보기, 〈한반도의 구석기시대 사람〉(《뿌리깊은 나무》 46). 1979 한창균, 〈점말동굴의 박쥐화석연구―한국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연세대 석사학위논문)1979 황용훈, 〈구석기시대, 회고와 전망, 1976-1978〉(《역사학보》 84, 212-225). 1979 Whang Yonghoon. 〈Brief survey of newly discovered Jongok-ni handaxe culture〉(《Korea Journal》 19-6). 1979 Lee Yungjo, 〈An approach to the human ‘face’ sculpture of the prehistoric period)(《Korea Journal》 vol 19, No. 5, 4-9).
1980 단양 상시동굴조사(1980-1981); 룡곡동굴조사(1980-1981) 1980 박영철, 《점말 용굴의 자연환경, 점말 용굴 발굴보고》(연세대학교 박물관).1980 손보기, 《점말 용굴 발굴, 점말 용굴 발굴보고》(연세대학교 박물관).1980 이융조, 《한국 선사문화의 연구》(평민사).1980 이융조, 〈청원 두루봉의 구석기문화―2굴의 예보적 고찰을 중심으로―〉(《충북대학교 논문집》 19, 107-124). 1980 정영화, 〈한국 구석기문화의 연구〉(《인류학연구》 1, 55-88). 1980 배기동,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의 비교분석적 연구〉(서울대 고고학과 석사논문).1980 배기동, 〈전곡리 구석기유적 발굴개보〉(《한국고고학연보》 7). 1980 최무장, 〈The Paleolithic Age in Korea〉(《학술지》 24, 건국대 학술연구원).1981 이융조, 〈청원 두루봉 구석기문화 중간보고서〉(《충북대학교 박물관》).1981 이융조, 《한국의 선사문화―그 분석 연구―》(탐구당).1981 이융조, 〈한국 구석기문화 이해의 몇 가지 문제〉(《한국사연구》 35). 1981 최무장, 《구석기시대》(탐구신서).1981 김교경, 〈새로 발견된 만달리 동굴 유적〉(《력사과학》 31-4). 1981 김용남,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류화석과 조선사람의 기원문제의 해명〉(《력사과학》 81-4). 1981 손보기, 〈단양상시 유적 발굴 중간보고〉(《한국고대사의 재조명》, 충북대학교 문화재연구회편, 3-5). 1981 최무장, 《한국의 구석기문화, 한국구석기문화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5-48). 1981 김원용, 〈서론〉(《한국구석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14). 1981 정영화, 〈전곡리유적〉(《한국구석기 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도판 96). 1981 한창균, 《점말용굴 천정 벽면의 복원에 대한 연구》(연세대 박물관).1981 나까야마 교다까·네마야마 겐기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있어서 구석기연구의 성과(일문)〉(1)(《고고학저널》 195, 15-20).
1982 단양 금굴조사, 수양개, 창내 및 명오리유적 발굴(1982-1983) 1982 Choi Mou-Chang, 〈Report of the Third Excavation in Cheon-kok Paleolithic Site(전곡리, 구석기유적 제3차 발굴보고서)〉(《건국대학교 인문과학논총》 14, 207-239). 1982 이융조, 〈고구려영토내의 구석기문화〉(《동방학지》 30, 1-89). 1982 Clark, J.D., 〈Report on a visit to Paleolithic sites in Korea〉(《문화재》 15, 134-140). 1982 손보기, 한병삼과 이융조, 〈한국석기시대의 문화〉(《현상과 인식》 166-167). 1982 Lee Yungjo, 〈Paleolithic and Mesolithic Cultures in Korea;An Overview〉(《Kora Journal》 22-3, 43). 1982 정영화, 〈한국의 구석기문화〉(《한국인과 한국문화》, 심설당).1982 나까야마 교다까·네마야마 겐기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있어서 구석기연구의 성과(일문)〉 2(《고고학저널》 210, 54-57). 1982 쎄리자와 조수께, 〈한반도의 전기구석기―전곡리유적의 발굴결과를 보고〉(《고고학저널》 199, 30-35). 1983 Sohn Pokey, 〈Paleoenvironment of Middle and Upper Pleistocene Korea〉(《Paper presented at the conference on the Paleoenvironment of East Asia from the Mid-Tertiary》, Hong Kong). 1983 손보기, 〈체질인류학적 고찰〉(《한국민족의 원류》, 국사편찬위원회, 17-18). 1983 박영철, 〈구석기시대 타제석기의 분류에 관하여〉 1(《인문논총》 8, 경북대학교 인문대학).1983 박희현, 〈충북 제원군 창내유적의 문화성격―1982년도 발굴결과를 중심으로〉(《호서문화논총》 2, 청주사범대학 호서문화연구소).1983 이융조, 《청원 두루봉 제2굴 구석기문화의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논문).1983 이융조, 〈청원 두루봉 제2굴 구석기 사회복원에 관한 연구〉(《한국사연구》 42, 1-36). 1983 이융조, 〈한국홍적세의 자연환경연구〉(《동방학지》 38). 1983 Lee Yungjo, 〈Progress report on the Paleolithic culture of Turubong No. 2 cave at Chongwon, Korea〉(《Korea Journal》 23-8, 22-9). 1983 손보기, 《청원 두루봉 9굴 발굴보고, 두루봉 9굴 살림터》.1983 Yi Seonbok and G. A. Clark, 〈Observations on the Lower Paleolithic of Northeast Asia〉(《Current Anthropology》 24-2, 181-202). 1983 충북대학교 박물관, 〈두루봉 구석기문화유적 분석결과보고〉, 《월악산지표조사보고서》.1983 김원용 외, 《전곡리》(문화재연구소).김원용과 배기동, 서울대학교 조사.정영화, 영남대학교조사.황용훈, 경희대학교조사.최무장, 건국대학교조사.박동원, 〈유적의 고환경 및 지형조사〉.이상만, 〈유적의 지질학적 조사〉.장남기, 〈유적의 생물환경조사〉·이선복, 〈유적의 지질고고적 성격〉.고지마 미노루, 〈현무암의 연대측정〉.배기동, 〈부근 유적조사〉.1983 정영화, 〈전곡리발굴조사―S1W2, TR-E, S1W0를 중심으로―〉(《고문화》 23). 1983 Chung Yunghwa, 〈Classification et definition des outils de type archaic dans le paleolithique superieur〉(《한국학사학회지》 5-1). 1983 한창균, 〈제4기의 지질 및 자연환경〉(《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박희현, 〈동물상과 식물상〉(《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손보기, 〈인종과 주거지〉(《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손보기, 〈예술과 신앙〉(《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최무장, 〈구석기문화의 비교(중국과의 비교)〉(《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최무장, 〈제원 명오리지구 유적 발굴약보고〉(《1983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약보고서》, 충북대학교 박물관편, 31-44). 1983 최무장, 〈전곡리 구석기유적 출토 대형석기〉(《Korea Journal》 5-1, 37-48). 1983 최무장, 〈Some heavy-duty tools in Chongok Paleolithic site〉(《한국과학사회 학회지》 5-1). 1983 최무장, 〈중국구석기에 대한 일고찰〉(《건국대학교 인문과학논총》 15). 1983 이융조, 〈단양 수양개유적 발굴 약 보고서〉(《1983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충북대학교 박물관 편, 45-66). 1983 이융조, 〈편년〉(《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최복규, 〈중석기문화〉(《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하).1983 최복규, 《한국과 그 주변지역의 중석기문화》(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1983 최복규, 〈구석기문화의 비교 Ⅰ―동북아와의 비교―〉(《한국사론》 12; 한국의 고고학 Ⅰ, 상).1983 배기동,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류 석기의 성격에 대하여〉(《고문화》 22,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23). 1983 배기동, 〈회고―한국고고학 40년 : 구석기시대〉(《한국고고학년보》 10, 서울대박물관).1983 나까야마 교다까·네마야마 겐기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있어서 구석기연구의 성과(일문)〉(3)(《고고학 저널》 216, 21-25).
1984 승호 3호 동굴조사(1984); 온정리동굴조사(1984) 1984 손보기, 《상시그늘 옛살림터》(연세대학교 선사연구실).1984 이기길, 〈전곡리 석기의 만듬새와 쓰임새 분석〉(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1984 최삼용, 〈점말 용굴 사슴과 화석의 연구〉(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1984 이융조, 《한국의 구석기문화》(탐구당).1984 이융조, 〈단양 수양개 구석기유적 발굴조사보고〉(《충주댐 수몰지구 문화 유적 발굴조사 종합 보고서》, 충북대학교 박물관 편, 101-186). 1984 손보기, 〈단양 도담리지구 유적발굴조사 보고〉(《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충북대학교 박물관 편, 15-100). 1984 박영철, 〈몇몇 구석기유적에 대한의견〉(《역사학보》 101). 1984 박영철, 〈두루봉 2굴 출토 뼈연모의 전자현미경관찰〉(《한국의 구석기문화》 2, 탐구당).1984 박희현, 〈제원 사기리 후기구석기유적 발굴조사보고〉(《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충북대학교 박물관 편).1984 정영화 역, 《구석기시대》(영남대 출판부).1984 김용간, 《조선의 구석기시대》.1984 이선복, 〈동부 시베리아 후기구석기문화 연대론에 대한 소고〉(《윤무병박사 회갑기념논총》).1984 이선복, 〈동북 아시아 후기구석기와 신대륙으로의 간이이주에 대한 소고〉(《한국고고학보》 16). 1984 Yi Seonbok, 〈Geoarchaeological Observations of Chongokni, Korea〉(《Korea Journal》 24-9). 1984 최무장, 〈중국의 구석기시대의 포유동물〉(《건국대 인문과학논총》 16). 1985 손보기, 《우리 조상의 중기홍적세 생활상에 관한 복원연구》(국립과학관).1985 손보기, 〈단양 도담리지구 유적발굴조사보고〉(《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연장발굴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 박물관).1985 이융조, 〈단양 수양개유적발굴조사보고〉(《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발굴조사 연장보고서》(충북대학교 박물관).1985 이기길,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연구―지표석기를 중심으로〉(《고문화》 27). 1985 김신규, 김교경, 백기하, 장우진과 서국태, 〈평양부근 동굴유적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4). 1985 최무장, 〈중국 후기구석기시대의 소석기와 중석기시대 문화관계〉(《건국대 인문과학논총》 17). 1985 최복규, 〈한국중석기시대의 자연환경〉(《강원사학》 1).
1986 굴재덕동굴조사(1986-1987) 1986 정영화, 〈한국의 구석기〉(《한국고고학보》 19, 63-103). 1986 최무장, 〈한국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한국고고학보》 19, 5-18). 1986 이융조, 〈한국구석기시대의 동물상〉(《한국고고학보》 19, 19-62). 1986 권이구, 〈한국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에 대한 형질인류학적 고찰〉(《한국고고학보》 19, 105-127). 1986 이융조, 〈한국구석기문화에서의 두루봉문화〉(《역사학보》 109). 1986 충북대학교 박물관, 《한국구석기문화전》.1986 박희현, 〈창내의 후기구석기문화〉(《박물관휘보》 1, 서울시립대 박물관).1986 최삼용·한창균,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짐승잡이 예〉(《박물관기요》 2, 15-36). 1985 조태섭, 〈점말 용굴의 뼈연모연구〉(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1986 박문숙, 〈한국 후기 홍적세의 자연환경 연구―수양개, 창내유적의 꽃가루분석을 중심으로〉(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1986 김용간, 〈화북의 구석기 전기문화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86-2). 1986 장우진, 〈최근 인류발생시기에 대한 학계의 논쟁점〉(《조선고고연구》 86-3). 1986 〈최근 년간 조선고고학연구에서 이룩한 주요 성과〉(《조선고고연구》 86-1). 1986 과학백과사전 출판사, 《인류진화발달사》.1986 전제현·윤진·김근식과 류정길, 《용곡동굴유적》.1986 김신규,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포유동물상〉(《조선고고연구》 86-2). 1986 최무장,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출토 구석기〉(《건국대 인문과학논총》 18). 1986 Yi Seonbok, 〈Pleistocene stratigraphy and Lower Paleolithic archaeology of Northeast Asia〉(《아시아문화》 1, 179-249). 1986 Yi Seonbok, 《Lower and Middle Paleolithic of Northeast Asia: A Geoarchaeological Review》(Ph. D. Dissertation. Arizona State University, Tempe). 1986 한창균, 〈프랑스 후기 구석기시대의 사회와 예술〉(《박물관기요》 1).
1987 파로호유적조사(1987-1988) 1987 김신규, 〈승호 제3호 동굴에서 새로 알려진 만달 짧은 턱 히에나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87-4). 1987 소식, 〈쏘련 원동지방의 구석기시대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87-1). 1987 Chung Younghwa, 〈L’outillege Archaique dans le Magdalenian〉(《삼불 김원용교수 정년퇴임기념 논총》 1, 768-782). 1987 Bae Kidong, 〈Lindustrie Lithique de Site Paleolithique Ancien de Chongokni, Coreé〉(《L’anthropologie》 91-3, 787-796). 1987 Choi Mouchang, 〈Paleolithique de Coreé〉(《L’anthropologie》 91-3). 1987 Bae Kidong, 〈On the Date of the Chongokni Industry on the Basis of the Geological Process of the Hanian River Basin〉(《삼불 김원용교수 정년퇴임기념 논총》 1, 783-798). 1987 이융조, 〈단양 수양개 후기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연구 1―숯자료를 중심으로―〉(《우인 김용덕박사 정년기념 사학논총》).1987 이융조, 〈한국구석기유적과 식물상의 분석연구〉(《동방학지》 54·55·56,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87 채희국, 〈구석기시대 연구에서 주체를 세울 데 대한 당의 현명한 방침〉(《조선고고연구》 87-1). 1987 리상우, 〈제4기 층서구분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의 문제〉(《조선고고연구》 87-3). 1987 최복규, 〈금강산댐 수몰지역과 문화유적조사〉(《평화의 댐 조사보고서》).1987 서국태, 〈만달리동굴유적의 석기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87-2). 1987 공수진, 〈금굴 구석기격지의 분석연구〉(연세대 대학원 석사논문).1987 홍현선, 〈상시 3바위그늘의 문화연구〉(연세대 대학원 석사논문).1987 시구마 고우헤이, 〈조선반도 구석기연구의 신동향(일문)〉(《고고학저널》 283, 18-23).
1988 《조선원시유물도감, 원시편》.1988 이선복, 〈구석기시대〉(《한국고고학보》 21, 25-34). 1988 김원용, 〈한국고고학의 성과와 과제〉(《한국고고학보》 21, 5-23). 1988 Bae Kidong, 《The Siginificance of the Chongokni Paleolithic Stone Industry in the Paleolithic Tradition of East Asia》(Ph. D. dissertation in the Department of Anthrop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1988 Sohn Pokey, 〈Bone tools of Yonggul cave at Chonnal, Korea〉(《The Paleoenvironment of East Asia from the Mid-Tertiary》 vol. Ⅲ, Center of Asian Studies, University of Hong Kong, 1124-1185). 1988 이융조, 〈청원 새굴·처녀굴의 자연환경연구―식물상의 자료를 중심으로〉(《손보기 정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 29-57). 1988 이기길, 〈구석기시대의 석기에서 관찰된 쓴 자국의 연구〉(《고문화》 32). 1988 한창균, 〈점말 용굴퇴적의 제4기 박쥐화석〉(《고문화》 33). 1988 Park, Sun-joo, 〈Current Major Aspects and Problems of the Pleistocene Study in Korea》(《손보기선생 정년퇴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1988 최복규, 〈한국과 시베리아의 중석기시대 유적과 문화〉(《손보기 정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1988 한창균, 〈전기 구석기시대 석기제작 도구의 분화〉(《손보기선생 정년퇴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1988 Sohn Songy, 〈Contribution a L’ teude des Estes Humains des Os Parietaux Decouverts a Sangsi, Coreé du Sun〉(《손보기 정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1988 이선복, 〈신발견 구석기유적 소개〉(《손보기 정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1988 박희현, 〈창내 후기 구석기문화층의 석기분석〉(《손보기 정년기념 고고인류학 논총》).1988 손보기, 《한국구석기연구의 길잡이》(연세대학교 출판부).1988 임병태·이선복, 《신평리 금평 구석기유적, 주암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5(전남대 박물관·전라남도, 23-62). 1988 이선복, 〈Quaternary geology and paleoecology of hominid occupation of Imjin basin〉(《제4기 학회지》 2-1). 1988 장우진, 〈인류진화발전과정의 기본 특성〉(《조선고고연구》 88-4). 1988 리상우, 〈평양시 상원군 중리 독재굴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88-1). 1988 리상우·류정길, 〈우리나라 제4기 하세층(구세 하부층)의 특징〉(《조선고고연구》 88-4). 1988 장우진·강명광, 〈금천동굴에서 발견된 인류화석〉(《조선고고연구》 88-4).
1989 금파리유적조사(1989-1990), 옥과유적조사1989 이선복, 《동북아시아 구석기문화의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1989 박희현, 《제원 창내 후기 구석기문화의 연구》(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청구논문).1989 이은봉, 〈구·신석기 시대의 종교신앙〉(《한민족》 1, 52-68). 1939 Bae Kidong, 〈The Development of the Hantan River basin, Korea and the Age of the Sediment on the Top of the Chongok Basalt〉(《제4기 학회지》 3-1, 87-101). 1989 Lee Yungjo, 《The Upper Paleolithic Stone Artifacts with Special Reference to Microblade Cores from Suyanggae Site, Korea. (Mimeo)》.1989 리애경, 〈금야군 온정리 굴재덕공굴에서 드러난 포유동물화석〉(《조선고고연구》 89-1). 1989 이선복, 〈구석기시대〉(《한국의 고고학》 강담사).1989 배기동, 〈홍적세환경과 석기문화〉(《상고사학보》 2, 1-14). 1989 배기동, 〈전곡리 구석기문화와 동아시아 홍적세 고인류 생존 활동〉(《학술원 논문집(인문과학 편)》 28, 대한민국 학술원, 1-31). 1989 배기동, 《전곡리 1986》(서울대 박물관).1989 배기동, 〈중국 동북부 신발견 구석기유적 4례와 연구동향〉(《박물관기요》 5, 단국대 박물관, 91-104). 1989 한창균·장명수·신숙정, 〈남한강상류의 구석기유적 예보〉(《박물관기요》 5, 단국대 박물관, 105-115). 1989 조태섭, 〈화석환경학이란 무엇인가〉(《박물관 기요》 5, 단국대 박물관, 133-148). 1989 손보기와 한창균, 〈점말 용굴유적〉(《박물관 기요》 5, 단국대 박물관, 149-172). 1989 최복규 외, 《상무룡리》(강원도, 강원대학교 박물관).최복규, 〈조사경위와 강원대학교 조사〉(13-479).황용훈과 신복순, 〈경희대학교 조사〉(482-660).손보기·한창균·홍현선·조태섭과 공수진, 〈상무룡리유적의 층위와 퇴적〉(677-752).이동영, 〈상무룡리 유적의 염토질광물분석 〉(753-757).이융조, 〈상무룡리 유적의 꽃가루분석〉(759-780).손보기, 〈상무룡리에서 발견된 흑요석의 고향에 대하여 〉(781-796).이선복, 〈파로호 퇴수지구 구석기유적의 제4기학적 성겨〉(797-817).
1990 박선주, 〈한국민족뿌리에 관한 여러 문제〉(《충북사학》 3, 1-20). 1990 손보기, 〈한민족의 형질〉(《한민족》 2, 67-103). 1990 이선복, 《옥과 구석기유적》(서울대학교 박물관).1990 한창균, 〈북한 고고학계의 구석기시대연구 동향〉(《동방학지》 65, 267-294). 1990 한창균 편, 《북한의 선사고고학 1; 구석기편》(백산문화).
국사관논총 제19집 > 청동기시대 연구사(조유전)
Ⅰ. 서
청동기시대란 인류가 처음으로 청동주조기술을 알게 되어 청동기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인류문화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되고, 그 이전의 석기시대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되게 된 시대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인류가 청동을 생산하기 전단계에 발견한 금속인 자연구리광에서 순구리를 얻어 때려서 가공한 순동물건은 석기시대의 석기제작기술과 다른 것이 없었다.
여기에 1000℃ 이상의 높은 열을 가하여 얻게 된 순구리는 매우 무른 금속이기 때문에 생산도구를 만드는 데는 부적당하고 다만 장식물의 제작 등등에만 사용되어 이때만 해도 석기시대문화에서의 본질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구리에 주석·아연 등 그밖의 금속을 사용해서 합금함으로써 순구리보다 훨씬 낮은 온도에서 녹일 수 있음과 아울러 순구리보다 훨씬 단단한 금속을 만듬으로써 여러가지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게 되어 이때부터 석기시대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를 전개시키게 된 것이 바로 청동기시대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합금에 의한 청동리기의 생산은 기술사적인 측면이나 나아가 생산에 따른 교역 및 분업·농경·지배계급의 형성에 따른 도시의 발생, 문자의 발명·사용 등의 문화사적·경제사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제반요소가 갖추어진 문화단계가 전형적인 청동기시대의 개념이다.
이와 같이 청동은 고대문명의 발달단계에 나타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슈메르문명·에집트문명·인더스문명·상문명을 낳았고 슈메르문명은 기원전 3,000년대부터 시작되고 기원전 1,600년대에 힛타이트에 의해 철의 사용이 알려지기까지 약 1,500년 동안 인류문화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청동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의도적이었던 무지에서였던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부인했고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뛰어넘는다는 주장이 지배되어 왔던 것이다. 즉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의 존재는 일제지배를 벗어난 광부 이후 1950년대 북한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소위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을 조사하게 됨으로써 청동기 시대의 주장이 대두되었다.
우리나라 고고학사에 있어서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선사고고학의 개념이 설정되었다. 아울러 시대에 따른 편년을 시도하여 구석기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석기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진입했다는 주장에서 석기와 철기가 공반해서 출토되었던 금해패총조사에서 석기와 청동기가 함께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어 금석병용시대라는 모호한 개념을 설정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주 001001 리강승, 〈청동기시대〉(《한국고고학보》 10, 1983).닫기
금해패총은 1914년·1917년 두 차례에 걸쳐 조거룡장에 의해 유물수집을 벗어나지 못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1920년 12월에 빈전경작·매원말치 등에 의해 재조사되어 1923년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내용 속에 금석병용기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되어져 광복 후에도 그대로 통용되어 왔다. 앞서 말한 대로 1950년부터 북한의 토기에서 그 개념이 부정되어졌고 남한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일제시대의 금석병용시기의 개념이 폐기되어 청동시대 개념이 설정되게 되었다.
그후 90년대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양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대한 글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청동기개시에 따른 여러가지 견해와 아울러 민족의 문제, 청동기의 생산 및 교역 등의 제문제 등 밝혀져야 할 것이 산적해 있다
본고는 지금까지 발표된 청동기시대 관계논문과 보고서를 가능한 한 소개하고 분야별 검토를 통해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가 어떻게 진단되고, 나아가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 지를 살펴봄으로써 앞으로의 이 시기 연구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주 002002 리청규, 〈광복후 남북한 청동기시대의 연구성과〉(《한국고고학보》 21, 1988).닫기
주 001
: 리강승, 〈청동기시대〉(《한국고고학보》 10, 1983).
주 002
: 리청규, 〈광복후 남북한 청동기시대의 연구성과〉(《한국고고학보》 21, 1988).
국사관논총 제19집 > 청동기시대 연구사(조유전) > Ⅱ. 시기별 연구성과
1. 일제시대
일제시대에 있어서는 청동기시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성과가 없다 하겠으나 청동유물이나 유적의 발견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알게 한다.
황해도 흑교리에서 1914년 수습된 세형동검 1, 협봉동모 1, 병두양이형동기 3, 결뉴상동기 1, 관형동기 2, 오수전 2, 토기편 수점이 수집되어 소개되었고 아울러 그곳 출토 병두양동기와 유사한 것이 평양 비행장부근에서 3개, 그리고 대동강면에서 수집된 이형령도 소개되고 있다. 주 003003 조선총독부, 《대정오년도조선고적조사보고》(1917).닫기
강화 하도리 소재 지석묘 5기를 조사하여 그 명칭에 대해 고려 리규보의 〈남행월일기〉(《동국리상국집》 권23)에 “…금마군구소위지석자속전고성인소지…”라는 언급도 하고 있다. 또 이 해에는 평안남도 평양부근 대동강변의 사동, 미림리 고방산 일대에서 석부, 석포정, 마제석족, 마제석검, 석퇴, 토제망추, 지석, 석착, 륙두석부 등이 발견되어 이를 소개하고 유사이전 유물이라 불렀다. 그리고 황해도 해주 남산유적, 평안남도 룡강 룡반리패총, 옹진 묵암동부근유적, 장연 탱석동 돌멘유적, 송화읍내부근유적, 은률 군량리 돌멘유적, 은률 금동유적이 일부 발굴조사되어 주변에서 석검·석족·석포정·토기편을 수습하고 은률 운산리 Dolmen, 안악 오리동 Dolmen유적, 봉산토성 붕괴부분에서 원수유문토기편이 수습되어 소개되었다.
경주 입실리에서 1921년 1월 11일에 발견되어 조사된 것으로 협봉동모 3, 세형동검 6, 그리스형동검 1, 청동검병 1, 그리고 동경(세문경), 소동탁 2, 소립형식동기 1, 소마탁 2종 5개, 동탁 1, 병부소령 1, 묘형령 1, 동제검병 1, 소동탁 1, 원두통형유탁동기 1개가 소개되었다. 주 004004 조거룡장, 〈평안남도 황해도 고적조사보고서〉(《대정오년도조선고적보고서》, 조선총독부, 1917).닫기
1922년에는 영천 어은동에서 일광경 등 한식경 15개, 경편 2, 동검 8, 호형대구 1, 마형대구 1, 동제원추형식금구 86, 동제와형소식금구 6, 동제구형식금구 18, 동제식금구 13, 동제록두, 소마 1, 차륜상금구 2, 환상금구 1, 이형수수 1, 소소토기편 2, 지석편 1점이 출토되어 보고되었다. 주 005005 조선총독부, 《대정십일년도조선고적보고서》(1922).닫기
전낙동강유역출토 쌍두령, 팔수형동령, 유탁이형령, 이형동령 7, 토기방추차 2 등(1920), 이밖에 경주 랭천리출토의 소동족, 강릉출토의 동족·동검의 주형(1920), 전주 초포면발견의 동검(1920), 충남 아산 둔포리의 세형동검, 협봉동모, 동시 1, 소소회색호 1(1914), 충남당진 체합리출토 동검(1922), 전상주출토 협봉동모, 세형동검이 소개되고(1920), 이왕직박물관소장 동검 중에는 전전라지방출토 1점, 강원도 발견 1, 출토불명의 동검 1, 전금해발견의 광봉동검 1(1915년 경), 수원출토 동검(1913년 경), 경주 외동 발견 동검 1(1919년 경), 목포부근 발견 동검 1(미상), 강원도 출토 동검 1(1920년 경), 대동강면 석암리 발견의 세형동검 2, 이식내행화문경 1, 이식방격T자경 1(1913), 평양 동대원리 허산유적에서 세형동검 1, 이부동호 1, 통형기 2, 동제차축두 2, 이형관상동기 2, 서양소동기 1개가 수집·소개되고(1921), 그리고 대동강면 발견의 식병부지나식동검, 동과, 동모, 협봉동모, 세형동검, 오야리 출토의 동모, 파문방격사신경(출토연대미상), 함경남도 북청 발견의 세형동검(출토연대미상), 평남발견 광봉동검(비파형동검?·출토연대미상) 등이 소개되었다. 이들을 모두 한대의 유물로 보았다. 주 006006 조선총독부, 《대정십일년도조선고적보고서》(1922).닫기 또 1927년 평남 대동군 반천리에서 세형동검편, 세문경 2점, 첨두기편이 발견·소개되었다. 주 007007 등전량책 외, 〈고조선に어ける한대の유적〉(《대정십일년도고적조사보고서》 11, 조선총독부, 1925).닫기
이 시기인 1920년 금해패총이 발굴되어 석기·골각기·소소토기와 류리제옥·화천·탄화미·토기편 등이 다량 수습되었고, 특히 화천의 발견으로 철기시대에 들어선 기원 1∼2세기 유적으로 보고 석기와 철기의 동반출토등 보아 이 유적을 금석병용기로 추정하였다. 주 008008 등전량책, 《조선고문화종감》 1(명저출판, 1973).닫기
다시 1934년 금해패총에서 상식석관, 지석묘, 옹관묘가 조사되고 옹관묘에서 관옥 3, 동착 1개가 출토되었고, 옹관 아래에서 세형동검 2개, 청동제첨두기 7개가 발견되었다. 그 밖에 이들 세종류의 무덤을 1920년 발표시 발견된 화천에 실년대를 결부시켜 역시 금석병용기로 보았다. 주 009009 빈전경작 등, 〈금해패총발굴조사보고〉(《대정구년도고적조사보고》 1, 조선총독부, 1922).닫기 1939년 평남 개천군발견의 세형동검·청동도자·석부·천하석제식옥이 있고, 주 010010 한병삼, 〈개천 룡흥리출토 청동검과 반출유물〉(《고고학》 1, 1968).닫기 대구 대봉동에 군을 이루고 있었던 지석묘를 1927년 1기, 1936년에는 파괴지석묘 5기를 포함 8기의 지석묘, 1938년에도 5기를 조사하여, 마제석검·마제석족·무문토기·단도마연토기 등이 조사된 김해 회현리 패총상의 지석묘·조합식석관·옹관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보고 이들을 동일시대의 묘제로 보았고 그 시기를 금석병용기로 보았다. 주 011011 등전량책, 〈대구 대봉정 지석묘조사〉(《소화십일년도고적조사보고》 1936).________, 〈대구 대봉정 지석묘조사 2회〉(《소화십삼년도고적조사보고》, 조선고적조사연구회, 1937).닫기
제주도 산지항공사시(1943년 경) 화천 11, 대천 50, 화포 1, 오수전 4, 내행화문경, 평록경편, 동제검심, 금구 등이 수습되어 소개되고,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1934년 세문식경, 마제석족, 마제석부 등이 출토되고, 그리고 각지발견 동과, 동모, 세형동검, 동족, 심금구, 용범, 석제 및 동제 검파두식, 다뉴세문경, 세문경용범, 방제통형금구, 䇺형병두 등이 소개되고, 주 012012 등전량책 편, 《조선고문화종감》 1(명저출판, 1973).닫기 손진태는 고인돌을 만든 목적에 따라 제단·주거·무덤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고, 주 013013 손진태, 〈조선 Dolmen고〉(《개벽》 1, 1934).닫기 한흥수는 돌멘을 무덤으로 보아 조선거석문화의 기원을 신석기에 두고 돌멘의 제단설과 가족설을 부정하고 남부돌멘과 북부돌멘을 구분하여 구조를 밝혔다. 주 014014 한흥수, 〈조선의 거석문화연구〉(《진단학보》 3, 1935).닫기
이와 같이 이 시기에는 청동기시대유물은 한대의 유물로 일본학자들은 보았고, 년대안에 있어서도 금해 패총발굴을 통해 금석병용기라는 시기로 보는 반면 한흥수는 Dolmen을 거석문화의 유산으로 보고 호석문화의 기원을 신석기시대에 두고 있어 이 기간에는 청동기시대의 존재가 부정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주 003
: 조선총독부, 《대정오년도조선고적조사보고》(1917).
주 004
: 조거룡장, 〈평안남도 황해도 고적조사보고서〉(《대정오년도조선고적보고서》, 조선총독부, 1917).
주 005
: 조선총독부, 《대정십일년도조선고적보고서》(1922).
주 006
: 조선총독부, 《대정십일년도조선고적보고서》(1922).
주 007
: 등전량책 외, 〈고조선に어ける한대の유적〉(《대정십일년도고적조사보고서》 11, 조선총독부, 1925).
주 008
: 등전량책, 《조선고문화종감》 1(명저출판, 1973).
주 009
: 빈전경작 등, 〈금해패총발굴조사보고〉(《대정구년도고적조사보고》 1, 조선총독부, 1922).
주 010
: 한병삼, 〈개천 룡흥리출토 청동검과 반출유물〉(《고고학》 1, 1968).
주 011
: 등전량책, 〈대구 대봉정 지석묘조사〉(《소화십일년도고적조사보고》 1936).________, 〈대구 대봉정 지석묘조사 2회〉(《소화십삼년도고적조사보고》, 조선고적조사연구회, 1937).
주 012
: 등전량책 편, 《조선고문화종감》 1(명저출판, 1973).
주 013
: 손진태, 〈조선 Dolmen고〉(《개벽》 1, 1934).
주 014
: 한흥수, 〈조선의 거석문화연구〉(《진단학보》 3, 1935).
2. 광부후∼1960년까지의 연구성과
이때에도 남한에 있어서 청동기시대개념이 없고 금원룡의 〈경주구정리출토 금석병용기유물에 대하여〉(《력사학보》 1, 1952)나 오태환의 〈한국금석병용기의 년대설정에 관한 소고〉(《숭대학보》 3, 1957), 〈한국적온의 연구〉(《력사보보》 13, 1960) 등에서와 같이 일본인 학자들이 주장했던 금석병용기시대의 개념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밖에 창원 성문리 지석묘, 주 015015 박경원, 〈창원군 진동면 성문리 지석묘 조사략보고〉(《력사학보》 10, 1958).닫기 제주도 지석묘, 주 016016 금철준, 〈제주도 지석묘 조사보고〉(《서울대론문집》 9, 1959).닫기 룡인 지석묘, 주 017017 전길희, 〈룡인군 구성면소재 Dolmem 조사보고〉(《리대사원》 1, 1959).닫기 영동 유전리 지석묘, 주 018018 금원룡, 〈영동 유전리 지석묘의 특이구조와 부장품〉(《력사학보》 12, 1960).______, 〈론산 양촌면 지석묘군〉(《고고미술》 1-3, 1960).닫기 경남지방 지석묘, 주 019019 금원룡, 〈경남지방 지석묘 수례〉(《고고미술》 1-1, 1960).닫기 호북지방 고인돌 등 주 020020 리홍직, 〈호북지방의 고인돌〉(《독사여적》 1960).닫기 몇 군데 지석묘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울산출토의 석기·토기, 주 021021 금원룡, 〈울산군 하상면 장현리출토의 석기·토기〉(《해원 황의돈선생고희기념사학론총》 1960).닫기 령암출토의 동모, 동제검파두식 등 주 022022 금원룡, 〈령암출토의 동모·동제검파두식〉(《고고미술》 1-4, 1960).닫기 유물소개가 있었던 기간으로 남한지방 청동기 문화연구에 획기적인 연구성과는 없었다.
주 015
: 박경원, 〈창원군 진동면 성문리 지석묘 조사략보고〉(《력사학보》 10, 1958).
주 016
: 금철준, 〈제주도 지석묘 조사보고〉(《서울대론문집》 9, 1959).
주 017
: 전길희, 〈룡인군 구성면소재 Dolmem 조사보고〉(《리대사원》 1, 1959).
주 018
: 금원룡, 〈영동 유전리 지석묘의 특이구조와 부장품〉(《력사학보》 12, 1960).______, 〈론산 양촌면 지석묘군〉(《고고미술》 1-3, 1960).
주 019
: 금원룡, 〈경남지방 지석묘 수례〉(《고고미술》 1-1, 1960).
주 020
: 리홍직, 〈호북지방의 고인돌〉(《독사여적》 1960).
주 021
: 금원룡, 〈울산군 하상면 장현리출토의 석기·토기〉(《해원 황의돈선생고희기념사학론총》 1960).
주 022
: 금원룡, 〈령암출토의 동모·동제검파두식〉(《고고미술》 1-4, 1960).
3. 1961∼1970년까지의 연구성과
60년대에 들어서자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가 금원룡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중국 료녕, 조양십이태영자묘에서 발굴된 청동단검을 우리나라 청동기와 관련시켜 기원문제를 고찰하여 그때까지 막연하게 세형동검 퇴화형으로 인식되어 왔던 료녕식동검이 오히려 세형동검의 조형이 되는 고식으로 보고 청동기의 상한을 B.C. 5∼6세기 경으로 주장했다. 그래서 이 주장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편년적 연구의 바탕이 되었다. 주 023023 금원룡, 〈십이태영자의 청동단검묘―한국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력사학보》 16, 1961).닫기
또 청동유물 특히 세형동검 자체에 의한 형식분류가 이루어졌는데, 윤무병은 그때까지 매원말치가 동검의 형태에 따라 Ⅰ·Ⅱ·Ⅲ식으로 분류하여 소위 만주식동검을 가장 늦은 시기로 본 발전서열을 주장한 것에 대해 동검의 등대에 보이는 릉각(호) 날세우기와 마연 부분의 발달 정도에 따라 세형동검을 Ⅰ·Ⅱ식으로 구분하고 료녕식동검을 1류, 세형동검을 Ⅱ식 즉 이류, 이식을 삼류로 구별하였고 Ⅱ·Ⅲ류에서는 경부를 제외한 검신을 중심으로 봉부가 길이의 2할 이하를 a, 이상을 b로 세분하여, Ⅱa식을 우리나라 세형동검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주장하였고, 이 주장은 우리나라 청동유물 편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주 024024 윤무병, 〈한국청동단검형식분류〉(《진단학보》 29·30, 1966).닫기
뿐만 아니라 출토 세문경을 종합하여 과거 일제가 다뉴세문경이라 칭한 것을 다뉴기하학문경으로 고쳐부르기를 주장한 글이 금량선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출토의 세문경을 비교 고찰하여 사류형으로 구분하고 조형경·원형경·발전경·완성경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원형경에 속하는 조문경을 석금병용전기 즉 신석기말기에 제작편년으로 보고 기원전 5세기 후반으로 완성경에 속하는 정세문경은 석금병용시대 후기 즉 중국전국시대 류망인들을 통해서 새로운 청동기를 완전히 습득한 고조선족에 의해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주 025025 금량선, 〈다뉴기하학문경 연구초〉(《숭실대학 등 합동론문집》 1, 1964).닫기
그리고 한병삼은 평남 개천 룡흥리에서 발견된 청동기 관계 일괄유물을 소개하면서 무덤은 석관묘로 보고 만주식동검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춘추말∼전국초(기원전 6∼5세기)에 해당되고 기원전 4세기 경에는 세형동검이 출현했다고 주장하고 동검은 해로을 따라 대동강 하구 쪽으로 들어왔고, 그래서 육지와 같이 계속적인 파급이 곤란해 중국 동북지방과 우리나라가 서로 다른 형태의 동검으로 발달된 요인이었다고 주장하고 룡흥리출토 동검을 기원전 5세기 경으로 추정했다. 주 026026 한병삼, 〈전개천군 용흥리출토 청동검과 반출유물〉(《고고학》 2, 1968).닫기
아울러 금원룡은 소련 연해주 이르웨스토프에서 발견된 청동일괄유물이 석관묘에서 발견됨으로써 우리나라의 동검·세문경문화가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까지 분포하고 있음을 소개했고, 주 027027 금원룡, 〈연해주출토의 동검·세문경류 일괄유물〉(《문화재》 3, 1967).닫기 그는 또한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세형동검의 자루가 조형안테나식이여서 이 안테나식은 중부유럽의 청동기시대말기부터 즉 기원전 8∼9세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해 동으로 전파하는 과정에서 스키타이족에 의해 받아지고 시베리아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국식 세형동검과 합해졌다는 견해를 피력하여 중국제품이라고 주장하는 일본학자의 견해에 반대하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주 028028 금원룡,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의 문제〉(《백산학보》 8, 1970).닫기
이밖에 청동유물조사로서는 대구에서 발견된 청동부·동부·동검, 주 029029 윤무병, 〈대구발견의 청동부〉(《고고미술》 5·6·7, 1964).금재원·윤무병, 〈대구 만촌동출토의 동과·동검〉(《진단학보》 29·30, 1966).윤용진, 〈대구시 만촌동출토 청동유물〉(《고고미술》 7-11, 1966).닫기 부여에서 발견된 동과 주 030030 한국고고학회, 〈새로 발견된 동과〉(《고고학》 2, 1969).닫기 등이 소개되었다. 그외 청동기 시대 유물로서는 공주 화월리의 석검·석족·관옥, 주 031031 금영배, 〈공주 화월리출토의 석기〉(《고고미술》 3-7, 1962).닫기 흔암리의 무문토기편, 주 032032 금원룡, 〈여주 흔암리 타제석기〉(《고고미술》 3-2, 1962).닫기 청양 대평리의 마제석검·석족, 주 033033 리은창, 〈청양 대평리출토 석기〉(《고고미술》 3-5, 1962).닫기 영일 폌계의 무문토기, 주 034034 금정기, 〈영일군 기계면출토 무문토기〉(《고고미술》 4-4, 1963).닫기 서산 대산리의 석족, 주 035035 리은창, 〈서산대산리출토석기〉(《고문화》 2, 1963).닫기 령암 월송리의 석기 및 토기, 주 036036 금원룡, 〈령암군 월송리의 석기문화〉 《진단학보》 24, 1963).닫기 대구 산격동의 석기류·토기류, 주 037037 윤용진, 〈대구시 산격동 선사유적〉(《고고미술》 4-2, 1963).닫기 천안 봉룡동의 무문토기, 부여·경주·연기출토의 청동유물, 주 038038 금원룡, 〈천안시 봉룡동출토 무문토기유적〉(《진단학보》 29·30, 1966).금재원, 〈부여·경주·연기출토 동제유물〉《진단학보》 25·26, 1964).닫기 화진포주변의 석기·토기, 주 039039 최숙경, 〈화진포 주변의 토기·석기·지석묘〉(《한국문화연구론총》 7, 1966).닫기 익산의 세문경·동검, 주 040040 금원룡, 〈익산 오금산출토 다뉴세문경과 세형동검〉(《고고미술》 8-3, 1967).닫기 대전 괴정동의 청동일괄견물, 주 041041 리은창, 〈대전시 괴정동출토 일괄유물 조사략보〉(《고고미술》 8-9, 1967).______, 〈대전 괴정동 청동기문화의 연구〉(《아세아연구》, 1968).닫기 진양 대평의 석검·홍도, 주 042042 금상조,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한들)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고고미술》 9-4, 1968).닫기 수석리의 흑도, 주 043043 금원룡, 〈수석리의 흑도소호〉(《한국고고》 1, 1967).닫기 익산 리제의 청동유물, 주 044044 금원룡, 〈익산군 리제출토 청동일괄유물》(《사학연구》 20, 1969).닫기 서산·진도출토의 유단석부, 주 045045 리은창, 〈유단석부의 이례〉(《고고미술》 9-10, 1968).닫기 홍성 팔봉리의 석기, 주 046046 최몽룡, 〈홍성군 팔봉리출토 마제석기류〉(《고고미술》 9-1, 1968).닫기 산청의 홍도 및 석기 주 047047 금영하, 〈전 산청출토 홍도와 반출석기〉(《고고미술》 106·107, 1970).닫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 기간 중 토기에 대한 연구로는 금정학의 한국무문토기의 연구가 있다. 주 048048 금정학, 〈한국무문토기문화의 연구〉(《백산학보》 3, 1967).닫기 그는 한강류역의 12개 지역에서 특이한 석기·토기 등의 유물을 통해 특히 조질무문토기를 신석기시대말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한강유역에 있어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것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금원룡은 우리나라 무문토기에 대한 지역분류시론을 발표하여 주 049049 금원룡, 〈한국무문토기 지역분류시론〉(《고고학》 1, 1968).닫기 무문토기의 기형을 심발형·화분형·태형·두형으로 나누고 압록강·두만강·대동강·남한군으로 크게 4군으로 나누고 심발형과 소위 각형토기를 가장 고식으로 보았다. 그리고 4군에 나타나는 토기가 즐문이 없는 무문토기인 점과 반월형석도·단인석부·거석문화라는 기본문화 특성들로 통일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광주 가악리(현 서울 송파구 가악동)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를 평안·황해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각형토기의 한강류역 변화형태로 보고 가악리식토기로 부르기를 주장하고 있다. 주 050050 금정학, 〈광주 가악리 유적조사보고〉(《고문화》 2, 1963).닫기
한강류역 가악·역삼·아차산출토유물을 고찰하여 이 지역의 무문토기 간의 상대편년을 림병태가 시도했다. 주 051051 림병태, 〈한강류역 무문토기의 편년〉(《리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론총》, 1969).닫기 조질무문토기를 무문토기전기, 흑도를 무문토기후기로 구분할 것을 주장했고 이 지역에서 채집된 탄소의 년대측정에 의해 가악리토기→역삼동토기(B.C. 6세기)→수석리 등의 흑도유적(B.C. 4세기)으로 편년안을 내 놓았다.
이 시기 주거지에 대한 조사로서 광주 명일리·가악리·역삼리·천안 두정리 주 052052 윤무병, 〈천안 두정리의 수혈주거지〉(《미술자료》 8, 1963).닫기·해미 휴암리 주 053053 국립박물관, 〈해미주거지〉(《미술자료》 13, 1969).닫기·강릉 포남동이 있으나 주거지내에서 출토된 유물에만 관심을 가졌고 주거지에 대한 깊은 관심은 없었다.
수석리의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집자리를 발굴하여 집의 구조가 평면말각구형에 로가 있고 땅 위에 기둥을 세워 만든 간단한 집들이어서 작은 취락으로 해석하고 출토유물을 통해 북한 지방의 유순각형토기, 홍도, 흑도 등의 존재는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각형토기문화를 연상하게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주 054054 금원룡, 〈수석리 선사시대 취락주거지 조사보고〉(《미술자료》 11, 1966).닫기 또 그는 강릉 포남동주거지를 주 055055 리란영, 〈강릉시 포남동출토 선사유물〉(《력사학보》 24, 1964).______, 〈강릉시 포남동출토 선사유물〉(《력사학보》 28, 1965).닫기 다루면서 유물의 형식, 실내에서의 생활방법 및 활등, 인구를 복원했고 아울러 석기의 제작, 주거의 폐기 등을 언급하고 석기의 부분적인 자급자족에 따른 사용, 석기원료의 소유, 석기의 저장, 실용검으로서의 이단병석검, 그리고 염기 등에 의한 자발적인 주거폐기 등을 지적하여 개개 주거지의 문화복원을 시도함으로써 청동기문화를 종합적으로 문화복원을 다루도록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주 056056 금원룡, 〈강릉 포남동 주거지문제―선사문화의 부원―〉(《력사학보》 43, 1969).닫기
이 기간동안 우리나라 지석묘에 대한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석묘의 형식과 크기에 따른 연대 추정이 림병태에 의해 발표되었다. 주 057057 림병태, 〈한국 지석묘의 형식 및 년대고찰〉(《사총》 9, 1964).닫기 그는 지금까지의 지석묘형식인 북방식 남방식분류를 외형을 면밀히 검토하여 탁자식·기반식·무지석식으로 3분하고, 다시 지하의 매장형태에 따라 보다 세분하고 지석묘의 하한년대를 기원 1세기로 보았다.
이보다 후에 국립박물관에서 7년여에 걸쳐 지석묘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를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형식·분포·연대에 관한 고찰이 이루어졌다. 주 058058 금재원·윤무병, 《한국지석묘연구》(1967).닫기 즉 지석묘를 외형상으로 보아 소위 남방식을 받침돌의 유·무에 따라 구분하고 매장구조의 뚜껑시설과 적석시설의 유·무를 통해 세분하고 조사과정에 출토된 탄소연대를 고려하여 상한을 B.C. 8세기, 하한을 세형동검문화의 남하와 연관시켜 B.C. 2세기로 주장하였다. 특히 지석묘를 대표할 수 있는 마제석검이 이때까지 청동검 등 금속기의 모방이라는 주장을 출토되는 묘제의 차이를 들어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이후 마제석검의 금속기모방설을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남방식지석묘를 북방식지석묘의 도괴된 형태가 남방식지석묘를 발생케 한 계기로 보고 그 발생시기를 B.C 100경을 중심한 시기로 보는 견해가 금원룡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다. 주 059059 금원룡, 〈남방식지석묘의 발생〉(《고고미술》 3-1, 1962).닫기 이 밖에 지석묘에 관한 연구로서는, 〈Dolmen in Korea〉, 주 060060 금원룡, 〈Dolmen in Korea〉(《Korean Research Center)) 16, 1962).닫기 〈한국 Dolmen에 관한 연구〉, 주 061061 림헌도, 〈한국 Dolmen에 관한 연구〉(《공주사대론문집》 1, 1962).닫기 〈선사시대 거석기념물의 연구〉, 주 062062 정관모, 〈선사시대 거석기념물의 연구〉(《한국고고》 1, 1967).닫기 〈한국거석제의 제문제〉, 주 063063 방선주, 〈한국거석제의 제문제〉(《사학연구》 20, 1968).닫기 〈고인돌의 문화재적 가치성〉 주 064064 송석범, 〈고인돌의 문화재적 가치성〉(《제주도》 39, 1969).닫기 등이 발표되었다.
이 기간 중에 조사된 지석묘는 룡인, 주 065065 금무룡, 〈룡인 모현면 지석묘〉(《고고미술》 2-9, 1961).닫기 시흥, 주 066066 금무룡, 〈경기 시흥군 지석묘〉(《고고미술》 2-11, 1961).닫기 대덕, 주 067067 금무룡, 〈충남 대덕군 기성면의 지석묘〉(《고고미술》 2-8, 1961).닫기 파주, 주 068068 금무룡, 〈파주 교하면의 지석〉(《고고미술》 2-1, 1961).닫기 련천, 주 069069 금무룡, 〈련천군 련천면 지석묘군〉(《고고미술》 2-5, 1961).닫기 천전리, 주 070070 금원룡, 〈춘천 천전리의 지석묘·적석묘〉(《미술자료》 4, 1961).닫기 구례, 주 071071 금원룡, 〈구례 금내리의 립석·지석묘〉(《고고미술》 2-3, 1961).닫기 담양, 주 072072 금원룡, 〈금해토기를 내는 담양 문학리의 일지석묘〉(《미술자료》 3, 1961).닫기 계성, 주 073073 금정기, 〈경남 계성면소재 지석묘〉(《고고미술》 2-2, 1961).닫기 고성, 주 074074 최숙경, 〈고성군 현내면 오대리의 지석묘〉(《고고미술》 2-12, 1965).닫기 부여, 주 075075 금무룡, 〈부여군 초촌리의 지석묘〉(《고고미술》 3-9, 1962).닫기 금해, 주 076076 금원룡, 〈금해 무계리 지석묘와 그 부장품〉(《동아문화》 1, 1963).닫기 서산지방, 주 077077 리은창, 〈서산지방의 선사유적조사〉(《고고미술》 3-9, 1963).닫기 호서지방, 주 078078 리은창, 〈호남지방의 선사유적조사〉(《고고미술》 4-8, 1963).닫기 서산 인지, 주 079079 리은창, 〈서산 인지면 선사유적보고〉(《고문화》 3, 1964).닫기 제주도, 주 080080 송석범, 〈제주도의 고인돌 소고〉(《제주도》 13, 1964).닫기 부산, 주 081081 박상헌, 〈부산 감천동 지석묘〉(《고고미술》 7-1, 1966).닫기 금산, 주 082082 리은창, 〈금산지방의 지석묘조사〉(《고고미술》 7-8, 1966).닫기 영종도, 주 083083 최숙경, 〈영종도 운남리 지석묘〉(《김애마박사리대근속40주년기념론문집》 1966).닫기 화진포, 주 084084 최숙경, 〈화진포주변의 토기, 석기, 지석묘〉(《한국문화연구론총》 7, 1966),닫기 홍성, 주 085085 리은창, 〈홍성 대평리 지석묘 조사〉(《고고미술》 8-12, 1987).닫기 순천, 주 086086 임효재, 〈순천지방의 지석묘군〉(《고고미술》 8-12, 1967).닫기 기좌도, 주 087087 임효재, 〈기좌도 지석묘군〉(《한국고고》 1, 1967).닫기 곽지리, 주 088088 최몽룡, 〈곽지리 지석묘 답사보고〉(《문리대학보》 13-1·2, 1967).닫기 우석대학교구내, 주 089089 금기웅, 〈한국지석묘소사〉(《우석대학》 1, 1968).닫기 북한강류역 주 090090 조동걸, 〈북한강류역의 고인돌〉(《춘천교대론문집》 8, 1970).닫기 등으로 대부분 지석묘의 존재와 분포조사에 국한된 현황자료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밖에 립석이 몇 예 알려졌다.
또한 청동검의 용범이 유일하게 소개되었고, 주 091091 금재원, 〈룡인출토 동검용범〉(《리춘녕박사송수기념론총》 1968).닫기 국립박물관에서 《청동유물도록》을 간행해 자료 소개가 이루어졌다. 주 092092 국립박물관, 《청동유물도록》(1968).닫기
한편 석검에 관한 연구로서 금량선은 일제시 유광교일에 의해 분류된 한국마제석검의 유경식, 유병식, 무경무병식, 류엽식으로서 4분법을 유경식, 유병식, 무경무병식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석검의 조형이 세형동검뿐 아니라 동과·동모, 그리고 중국동검·일반동철돌두석기 등도 형식에 따라 함께 조형으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주 093093 금량선, 〈재고를 요하는 마장석검의 형식분류와 조형고정의 문제〉(《고문화》 1, 1962).닫기
그리고 우리나라 도작에 관한 북방설과 남방설이 금원룡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반월형석도와 유구석부의 존재 및 분포를 따라 우리나라의 도작전파가 화북을 통한 북로설과 바다를 통한 남로설의 가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도작농경에 대한 고고학적 계기를 마련했다. 주 094094 금원룡, 〈한국칭작기원에 대한 일고찰〉(《진단학보》 25·26·27, 1964).닫기 한편 그는 문화재관리국 소장의 유구석부의 사용법에 대해서 굴지구·목공구·박피구 등의 가능성을 판단했다. 주 095095 금원룡, 〈문화재관리국소장 유구석부류〉(《리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론총》, 1969).닫기
주 023
: 금원룡, 〈십이태영자의 청동단검묘―한국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력사학보》 16, 1961).
주 024
: 윤무병, 〈한국청동단검형식분류〉(《진단학보》 29·30, 1966).
주 025
: 금량선, 〈다뉴기하학문경 연구초〉(《숭실대학 등 합동론문집》 1, 1964).
주 026
: 한병삼, 〈전개천군 용흥리출토 청동검과 반출유물〉(《고고학》 2, 1968).
주 027
: 금원룡, 〈연해주출토의 동검·세문경류 일괄유물〉(《문화재》 3, 1967).
주 028
: 금원룡,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의 문제〉(《백산학보》 8, 1970).
주 029
: 윤무병, 〈대구발견의 청동부〉(《고고미술》 5·6·7, 1964).금재원·윤무병, 〈대구 만촌동출토의 동과·동검〉(《진단학보》 29·30, 1966).윤용진, 〈대구시 만촌동출토 청동유물〉(《고고미술》 7-11, 1966).
주 030
: 한국고고학회, 〈새로 발견된 동과〉(《고고학》 2, 1969).
주 031
: 금영배, 〈공주 화월리출토의 석기〉(《고고미술》 3-7, 1962).
주 032
: 금원룡, 〈여주 흔암리 타제석기〉(《고고미술》 3-2, 1962).
주 033
: 리은창, 〈청양 대평리출토 석기〉(《고고미술》 3-5, 1962).
주 034
: 금정기, 〈영일군 기계면출토 무문토기〉(《고고미술》 4-4, 1963).
주 035
: 리은창, 〈서산대산리출토석기〉(《고문화》 2, 1963).
주 036
: 금원룡, 〈령암군 월송리의 석기문화〉 《진단학보》 24, 1963).
주 037
: 윤용진, 〈대구시 산격동 선사유적〉(《고고미술》 4-2, 1963).
주 038
: 금원룡, 〈천안시 봉룡동출토 무문토기유적〉(《진단학보》 29·30, 1966).금재원, 〈부여·경주·연기출토 동제유물〉《진단학보》 25·26, 1964).
주 039
: 최숙경, 〈화진포 주변의 토기·석기·지석묘〉(《한국문화연구론총》 7, 1966).
주 040
: 금원룡, 〈익산 오금산출토 다뉴세문경과 세형동검〉(《고고미술》 8-3, 1967).
주 041
: 리은창, 〈대전시 괴정동출토 일괄유물 조사략보〉(《고고미술》 8-9, 1967).______, 〈대전 괴정동 청동기문화의 연구〉(《아세아연구》, 1968).
주 042
: 금상조,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한들)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고고미술》 9-4, 1968).
주 043
: 금원룡, 〈수석리의 흑도소호〉(《한국고고》 1, 1967).
주 044
: 금원룡, 〈익산군 리제출토 청동일괄유물》(《사학연구》 20, 1969).
주 045
: 리은창, 〈유단석부의 이례〉(《고고미술》 9-10, 1968).
주 046
: 최몽룡, 〈홍성군 팔봉리출토 마제석기류〉(《고고미술》 9-1, 1968).
주 047
: 금영하, 〈전 산청출토 홍도와 반출석기〉(《고고미술》 106·107, 1970).
주 048
: 금정학, 〈한국무문토기문화의 연구〉(《백산학보》 3, 1967).
주 049
: 금원룡, 〈한국무문토기 지역분류시론〉(《고고학》 1, 1968).
주 050
: 금정학, 〈광주 가악리 유적조사보고〉(《고문화》 2, 1963).
주 051
: 림병태, 〈한강류역 무문토기의 편년〉(《리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론총》, 1969).
주 052
: 윤무병, 〈천안 두정리의 수혈주거지〉(《미술자료》 8, 1963).
주 053
: 국립박물관, 〈해미주거지〉(《미술자료》 13, 1969).
주 054
: 금원룡, 〈수석리 선사시대 취락주거지 조사보고〉(《미술자료》 11, 1966).
주 055
: 리란영, 〈강릉시 포남동출토 선사유물〉(《력사학보》 24, 1964).______, 〈강릉시 포남동출토 선사유물〉(《력사학보》 28, 1965).
주 056
: 금원룡, 〈강릉 포남동 주거지문제―선사문화의 부원―〉(《력사학보》 43, 1969).
주 057
: 림병태, 〈한국 지석묘의 형식 및 년대고찰〉(《사총》 9, 1964).
주 058
: 금재원·윤무병, 《한국지석묘연구》(1967).
주 059
: 금원룡, 〈남방식지석묘의 발생〉(《고고미술》 3-1, 1962).
주 060
: 금원룡, 〈Dolmen in Korea〉(《Korean Research Center)) 16, 1962).
주 061
: 림헌도, 〈한국 Dolmen에 관한 연구〉(《공주사대론문집》 1, 1962).
주 062
: 정관모, 〈선사시대 거석기념물의 연구〉(《한국고고》 1, 1967).
주 063
: 방선주, 〈한국거석제의 제문제〉(《사학연구》 20, 1968).
주 064
: 송석범, 〈고인돌의 문화재적 가치성〉(《제주도》 39, 1969).
주 065
: 금무룡, 〈룡인 모현면 지석묘〉(《고고미술》 2-9, 1961).
주 066
: 금무룡, 〈경기 시흥군 지석묘〉(《고고미술》 2-11, 1961).
주 067
: 금무룡, 〈충남 대덕군 기성면의 지석묘〉(《고고미술》 2-8, 1961).
주 068
: 금무룡, 〈파주 교하면의 지석〉(《고고미술》 2-1, 1961).
주 069
: 금무룡, 〈련천군 련천면 지석묘군〉(《고고미술》 2-5, 1961).
주 070
: 금원룡, 〈춘천 천전리의 지석묘·적석묘〉(《미술자료》 4, 1961).
주 071
: 금원룡, 〈구례 금내리의 립석·지석묘〉(《고고미술》 2-3, 1961).
주 072
: 금원룡, 〈금해토기를 내는 담양 문학리의 일지석묘〉(《미술자료》 3, 1961).
주 073
: 금정기, 〈경남 계성면소재 지석묘〉(《고고미술》 2-2, 1961).
주 074
: 최숙경, 〈고성군 현내면 오대리의 지석묘〉(《고고미술》 2-12, 1965).
주 075
: 금무룡, 〈부여군 초촌리의 지석묘〉(《고고미술》 3-9, 1962).
주 076
: 금원룡, 〈금해 무계리 지석묘와 그 부장품〉(《동아문화》 1, 1963).
주 077
: 리은창, 〈서산지방의 선사유적조사〉(《고고미술》 3-9, 1963).
주 078
: 리은창, 〈호남지방의 선사유적조사〉(《고고미술》 4-8, 1963).
주 079
: 리은창, 〈서산 인지면 선사유적보고〉(《고문화》 3, 1964).
주 080
: 송석범, 〈제주도의 고인돌 소고〉(《제주도》 13, 1964).
주 081
: 박상헌, 〈부산 감천동 지석묘〉(《고고미술》 7-1, 1966).
주 082
: 리은창, 〈금산지방의 지석묘조사〉(《고고미술》 7-8, 1966).
주 083
: 최숙경, 〈영종도 운남리 지석묘〉(《김애마박사리대근속40주년기념론문집》 1966).
주 084
: 최숙경, 〈화진포주변의 토기, 석기, 지석묘〉(《한국문화연구론총》 7, 1966),
주 085
: 리은창, 〈홍성 대평리 지석묘 조사〉(《고고미술》 8-12, 1987).
주 086
: 임효재, 〈순천지방의 지석묘군〉(《고고미술》 8-12, 1967).
주 087
: 임효재, 〈기좌도 지석묘군〉(《한국고고》 1, 1967).
주 088
: 최몽룡, 〈곽지리 지석묘 답사보고〉(《문리대학보》 13-1·2, 1967).
주 089
: 금기웅, 〈한국지석묘소사〉(《우석대학》 1, 1968).
주 090
: 조동걸, 〈북한강류역의 고인돌〉(《춘천교대론문집》 8, 1970).
주 091
: 금재원, 〈룡인출토 동검용범〉(《리춘녕박사송수기념론총》 1968).
주 092
: 국립박물관, 《청동유물도록》(1968).
주 093
: 금량선, 〈재고를 요하는 마장석검의 형식분류와 조형고정의 문제〉(《고문화》 1, 1962).
주 094
: 금원룡, 〈한국칭작기원에 대한 일고찰〉(《진단학보》 25·26·27, 1964).
주 095
: 금원룡, 〈문화재관리국소장 유구석부류〉(《리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론총》, 1969).
4. 1971∼1980년까지의 연구성과
우리나라 지석묘에서 표식적으로 출토되는 마제석검의 기원에 관한 연구가 금원룡에 의해 시도되었다. 주 096096 금원룡, 〈한국마제석검 기원에 관한 일고찰〉(《백산학보》 10, 1971).닫기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 오르도스동검을 모방한 유병마제석검으로 보고 료녕식동검이 유병석검의 제작을 조장하면서 세형동검으로 변화·발달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윤덕향은 한반도내에서 출토된 석검를 유경식·일단병식·이단병식의 세형식으로 구분되나 각 형식 사이에는 시간적 선후관계가 미약하고 오히려 지역적 기능적인 차이로 보았다. 그래서 유경식석검은 대동강류역의 각형토기와 함께 서북지방의 특성으로 보았고 아울러 실용과 부장용으로 구분했다. 일단병식은 부장용, 이단병식은 실용으로 상정했고, 석검의 조형도 일반병식의 경우 ordos검의 모방으로 보고 이단병식은 기본적으로 일단병식과 같으나 단이라는 요소는 만주식이나 도씨검의 영향으로 보았으며 유경식의 경우 만주식동검의 영향도 있다고 주장했다. 주 097097 윤덕향, 〈한반도 마제석검의 일고찰〉(서울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77).닫기
또한 전영래는 전북지방에서 출토된 마제석검을 분석하여 전북지방 출토 유병식석검을 모두 6류형으로 분류하였고 무단유병식검은 중국식동검 중 파이프형 원통병식을 번안한 방제품으로 보고 시원적으로는 오히려 한반도남서해안지방에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무단병석검의 제작상한은 기원전 5세기를 넘지 못한다고 보았다. 주 098098 전영래, 〈전북지방 마장석검출토례와 몇가지 문제제기〉(《고고학》 5·6, 1977).닫기 이 밖에 청동기시대의 석기로서 유구석부를 들고 이를 정리해서 발표한 글이 나왔다. 주 099099 로혁진, 〈유구석부의 연구〉(서울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0).닫기
한국에 있어서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만주식동검이 유입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청동기 제작이 시작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로서, 따라서 만주식동검 유입기로서 B.C. 4세기 경에 시작하여 세형동검시기를 B.C. 4세기 말∼3세기 초 경에 시작되어 B.C. 2세기 중엽까지로 보고 Ⅱ식세형동검시기를 B.C. 2세기 후반부터 A.D. 1세기 말 경으로보는 주장이 윤무병에 의해 제기되었다. 주 100100 윤무병, 〈한국청동유물의 연구〉(《백산학보》 12, 1972).닫기 그는 다시 우리나라 세형동검의 형식을 Ⅰ·Ⅱ식으로 분류하여 이 두가지 식이 나타나는 시대로 한국청동기시대를 구분하여 Ⅰ기를 B.C. 700년대부터 료녕식동검의 류입시기, Ⅱ기를 B.C. 300년대부터 세형동검·동제무기·국산화시기, Ⅲ기를 B.C. 100년대부터 청동기와 철기의 혼용기로 나누어 앞서의 주장을 수정·발표하였다. 주 101101 윤무병, 〈한국청동기시대의 문화〉(《고고미술》 129·130, 1976).닫기
금정배는 그 때까지 청동기문화의 제설을 모아 리론면으로 한국청동문화를 Karasuk 문화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상한을 기원전 10세기이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주 102102 금정배, 〈한국청동기문화의 사적고찰〉(《한국사연구》 1971).닫기 다시 청동기문화의 한반도 유입을 자신이 설정한 예맥Ⅱ기, 즉 기원전 1300년 이후라는 수정설을 제기했다. 주 103103 금정배, 〈Bronze Artifacts in Korea and their culture-Historical significance)(Rechard pearson ed., 《The traditional culture and society of Korea prehistory》, 1975).닫기 그리고 또 다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기원에 관해 우리나라 석관묘나 료녕식동검의 분포가 료녕지방, 남만주, 한반도에 걸쳐 있으므로 종족상으로는 동일민족인 예맥족으로 보아야 하고 묘제상으로는 석퇴묘인 점을 들어 시베리아 Karasuk 문화와 연결, 한국청동기문화의 기원을 료녕지방이나 중국에 두는 것을 비판하고 청동기시대년대의 상한을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올리고 료녕지방의 청동기문화를 예맥족의 청동기문화Ⅰ기로, 거기서 발달된 한반도의 세형동검문화를 Ⅱ기로 나누었다. 주 104104 금정배, 《한국민족문화의 기원》(고대출판부, 1974).______, 〈한국청동기문화의 기원에 관한 소고〉 《고문화》 17, 1979).닫기
금원룡은 무주출토로 전하는 료녕식동검을 검토하고 료녕성 남산근촌출토 동검과 주 105105 금원룡, 〈중국에서의 신출 고고자료 이종〉(《고고미술》 121·122, 1974).닫기 비교하여 자신이 이미 1961년에 십이태영자출토례에서 주장했던 한국청동기시대의 상한을 기원전 5∼600년에서 2∼300년을 더 올릴 수 있다고 수정견해를 밝히고 있다. 주 106106 금원룡, 〈전무주출토 료녕식동검에 대하여〉(《진단학보》 38, 1974).닫기 아울러 부여 송국리 석퇴묘에서 료녕식동검의 출토례를 보고 남한에서의 청동기시대 존재가능성을 진단하고 개시년대를 기원전 9세기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오게 되었다. 주 107107 금영배·안승주, 〈부여 송국리 료녕식동검출토 석관묘〉(《백제문화》 7-8, 1975).닫기
또 한반도 청동기류입에 대해서 금정학은 중국과학원에서 발굴한 남산근석곽묘를 분석하여 청동기시대의 경우 료녕지방과 한반도는 같은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한 것으로서 료녕지방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른 비파형동검의 출현은 기원전 10세기로 보고, 청동기시대 기원전 10세기 이래 요령지방에는 대체로 조선족계의 동이족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 청동기문화는 조선족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한반도만을 생각한다면 요령지방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천년전기초엽으로 잡고 그 하한을 대체로 1세기로 추정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주 108108 금정학, 〈한국청동기문화의 편년〉(《한국고고학연구회》 1978).______, 《한국청동기시대의 연구》(부산대학교박사학위론문 1971).닫기
이에 대해 전영래 역시 남산근유적을 분석하여 한국청동기의 유입시기는 기원전 6세기 전반을 결코 넘을 수 없고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제작이 시작되었다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주 109109 전영래, 〈한국청동기문화의 년대상한문제〉(《전북유적조사보고》 8, 1978).닫기 그리고 그는 동검이나 거울을 분류의 기초로 삼아 그 문양을 집성하여 한반도의 청동기를 4기로 구분했다. 주 110110 전영래, 〈한국청동기문화의 계보와 편년〉(《전북유적조사보고》 7, 1977).닫기 또한 완주 상림리출토 도씨검의 고찰을 통해 마제석검의 조형을 이 도씨검에서 구하고 상한년대를 도씨검의 발생 연대인 기원전 6세기로 보고 아울러 그 분포가 화중지방에 집중하고 있음을 들어 화중·화남과의 문화교류를 상정해서 쌀의 전래도 그 경로로 통해 들어 왔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주 111111 전영래, 〈완주 상림리출토 중국식동검에 대하여〉(《전북유적조사보고》 6, 1976).닫기
한편으로는 한국식동검은 모양이 마제석검과 상이함으로 조형―모방한 관계가 아니고 마제석검의 조형을 비파형동검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금영하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동검의 형식을 외형에 따라 분류하지 않고 출토지방에 따라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련화리식이 고식이고 여기서 괴정동식과 남성리식으로 발전, 대곡리식을 거쳐 만촌동식과 상일동식이 된다고 하였고 편년도 청동기의 국산화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제안하였다. 주 112112 금영하, 〈한국식동검 형식분류시론〉(《동양문화연구》 1977).______, 〈한국식동검의 기원문제〉(《대구사학》 15·16, 1978).______, 〈한국식동검 분류재론〉(《한국사연구》 20, 1978).______, 〈한국식동검 분류삼론〉(《고고미술》 138·139, 1978).닫기
한편, 한반도 청동기문화를 조명하는데 있어서 료녕지방의 청동기문화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되어 있어 그기에 맞추어 요령지방의 하가점상층문화와 료녕동검문화의 청동유물을 비교하여 연대·민족문제 등을 리강승이 다루었다. 주 113113 리강승, 〈료녕지방의 청동기문화〉(《한국고고학보》 5, 1979).닫기
그는 종족적으로 하가점상층문화와 료녕동검문화는 문화전통이 다른 별개의 문화임을 밝히고 하가점상층문화는 오르도스청동기문화의 한 지방형식으로 중원의 청동기문화를 받아 독자적 문화를 발달시켰고 료녕동검문화의 성격을 기마적인 반면 하가점은 차마적인 만남임을 밝히고 연대는 하가점상층문화가 서주말∼전국말, 료녕동검문화는 춘추초∼전국말로 비정하여 요령문화가 약간 늦게 시작됨을 지적하고 료녕동검문화가 예맥이나 동이족의 문화라는 주장에 대해 구분을 요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문토기문화기에 해당되는 수혈주거지를 망라하여 당시의 주거의 평면형태·로의 위치·저장공·출입시설·기둥구멍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금정기의 글이 있는데, 그는 특히 면적을 계산하여 당시 주거의 표준적인 면적이 20㎡으로 추정하고 성인 1인이 차지하는 면적은 5㎡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주 114114 금정기, 〈한국수혈주거지고〉(《고고학》 3, 1974).닫기 이 밖에 흔암리무문토기주거지가 연차적으로 계속 조사되었는데, 이 주거지에서는 공렬토기·변형각형토기·홍도가 출토되어 동북계통과 서북계통의 문화가 한강유역에서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주 115115 서울대박물관, 《흔암리주거지》 1-Ⅳ(1978).닫기 광주 송암동에서도 주거지조사를 통해 원형주거지와 방형주거지를 확인하고 실년대를 서기전 3∼1세기로 편년하고 묘제는 지석묘로 보았다. 주 116116 최몽룡, 〈광주 송암동주거지발굴조사보고〉(《한국고고학보》 4, 1978).닫기 그리고 진양 대평리에서는 지금까지 평면 규모가 가장 큰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거지내부에서 출토된 홍도·공렬토기·석기 등을 통해 공렬토기문화가 경남내륙 깊숙이 분포하고 있어 동북계전통으로 보고 있는 공렬토기문화의 전파경로를 밝히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주 117117 조유전, 〈경남지방의 선사문화연구〉(《고고학》 5·6, 1979).닫기 이 밖에 순수무문토기연구를 통해 홍도가 두만강류역에서 시작되어 동해안·한강·락동강류역으로 퍼진다는 주장을 안춘배가 발표했다. 주 118118 안춘배, 〈남강상류의 선사문화〉(《백산학보》 23, 백산학회).닫기
국립박물관에서 1975년부터 ’78년까지 4차에 걸쳐 부여 송국리유적을 발굴조사하여 주거지 20개소, 석관묘·옹관묘 등을 확인했는데 종합적인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유적의 연대를 기원전 6세기를 넘지 않고 하한을 기원전 4세기 이하로 내려오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주 119119 국립중앙박물관, 《송국리》 Ⅰ(1979).닫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묘제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석관묘에 대한 연구가 리종선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는 석관묘의 개념·석관묘문화의 전통·분포와 양상·한국석관묘의 특수성·구조와 반출유물 등을 분석하여 한국석관묘는 구조상으로 보아 Minusinsk 지방의 Andronous기에 시원을 둔 Karasuk석관묘가 동진하여, 몽고·열하지방을 거쳐 흘러 들어온 동북아세아석관문화의 일지방형식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 흐름을 열하에서 료녕성지방을 거쳐 들어 온 소위 「비파형동검문화」와 길림에서 두만강지역을 통하여 들어 온 석기류를 기초로 하는 두 가지 성격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부장된 유물의 성격에 따라 전자는 세형동검 등을 반출하는 석관묘에로 그 전통이 연결되고 후자는 선행하는 지석묘문화와 접촉하여 통합형석관묘를 낳게 한 요인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120120 리종선, 〈한국석관묘의 연구〉(《한국고고학보》 1, 1976).닫기 이밖에 진양 대평리지석묘시굴을 통해 지석묘가 주로 하고 석관묘가 딸린 무덤의 한 유형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여 당산에서도 석관묘가 조사되었다. 주 121121 강인구, 〈부여 당산의 석관묘〉(《력사학보》 88, 1980).닫기
이 기간 중 지석묘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연구가 임세권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 122122 임세권, 〈한반도 고인돌의 종합적 검토〉(《백산학보》 20, 1976).닫기 그는 지석묘가 한반도 내에서 존속한 기간이 신석기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까지이고 묘제나 사회적 배경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지석묘가 청동기시대에만 국한된 것으로 알려진 묘제가 상한과 하한이 한 단계씩 오르고 내리는 주장이라 할 것이다. 주 123123 위와 같음.닫기 또한 그는 용어상 문제에 있어서도 들린형·놓인형 등 지석묘의 형식분류를 순수 우리말로 사용하고 있다.
이밖에 최몽룡은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109기의 지석묘를 모두 망라하여 외형의 형식을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구별하고 선후관계 역시 이 순서를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존속 기간을 기원전 5∼4세기부터 서력기원전후까지로 추정하였다. 주 124124 최몽룡, 〈전남지방소재 지석묘의 형식과 분류〉(《력사학보》 78, 1978).닫기 이것은 어느 특정지방의 집중적인 조사연구로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이 기간중 지석묘조사로서는 호서지방의 지석묘, 주 125125 리은창, 〈호서지방의 지석묘조사〉(《월간문화재》 12. 1971).______, 〈호서지방의 지석묘조사〉(《월간문화재》 2, 1972).______, 〈호서지방의 지석묘조사〉(《월간문화재》 4, 1972).닫기 팔당댐 수몰지구인 남한강류역 및 소양댐 수몰지구의 대대적인 지석묘발굴, 주 126126 문화재관리국, 《팔당·소양댐 수몰지구유적종합조사보고》(1974).닫기 안동댐 수몰지구의 지석묘발굴, 주 127127 문화재관리국, 《안동댐 수몰지구유적발굴보고》(1974).닫기 대청댐 수몰지구의 지석묘발굴, 주 128128 충남대·충북대, 《대청댐수몰지구유적발굴보고서》(1978·1979).닫기 반월지구 신시가지 조성지역내의 지석묘발굴, 주 129129 반월지구유적발굴조사단, 《반월지구유적발굴보고》(1978).닫기 영산강댐으로 인한 수몰지구 내의 지석묘발굴, 주 130130 전라남도, 《영산강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서》(1976).닫기 대구 칠성동지석묘, 주 131131 윤용진, 〈대구 칠성동 지석묘조사〉(《대구사학》 12·13, 1977).닫기 대덕 내동리지석묘, 주 132132 지건길, 〈대덕 내동리 지석묘유적발굴보고〉(《백제연구》 8, 1977).닫기 영천 룡산동지석묘, 주 133133 윤용진, 《영천 룡산동 지석묘 발굴조사보고서》(영천군, 1978).닫기 완천 덕천리 및 장수 삼봉리지석묘, 주 134134 전영래, 〈완주 덕천리 지석묘군〉(《전북유적조사보고》 10, 1979).닫기 론산 신기리지석묘, 달성 장천동지석묘 등 주 135135 강인구, 〈론산 신기리의 지석묘〉(《고고미술》 148, 1980).______, 〈달성 장천동의 지석묘〉(《한국사연구》 28, 1980).닫기 많은 지석묘가 발굴조사되어 지역별 지석묘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횡산장삼랑이 수집한 경기도지방의 유물을 통해 시간적·공간적 관련·계통·서열을 고찰한 리백규의 연구가 있는데, 그는 말기즐문토기·공렬토기·각형토기·홍도가 반출되는 A군과 점토대토기·우각형파수토기·흑도·고배형토기가 통합하는 B군으로 나누고 A군은 기원전 7∼5세기 중엽, B군은 기원전 1세기∼5세기이후의 연대순으로 구분하고 있다. 주 136136 리백규, 〈경기도출토 무문토기·마제석검〉(《고고학》 3, 1974).닫기
또 우리나라 무문토기를 발형·옹형·호형·완형·두형·시루형으로 나누고 다시 세분한 뒤 표면처리에 의해 분류하고 압록강·청천강·평남·황해·함북·남한 등으로 지역편년을 시도한 글이 발표되었다. 주 137137 윤무병, 〈무문토기 형식분류시고〉(《진단학보》 39, 1975).닫기 이외에도 강릉지방과 춘천지방의 무문토기가 소개되었고, 주 138138 백홍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고고미술》 133, 1977).임세권, 〈춘천시 온의동 무문토기유적〉(《사총》 21·22, 1977).닫기 제주도에서 조사된 무문토기를 검토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고 제주도의 무문토기문화는 경남해안을 통해 지석묘 묘제를 가진 무문토기인들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이주해 와 공렬토기·구순부각목토기·구순부각목빗질토기·점토대토기·흑색마연토기등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있다. 주 139139 리백규, 〈제주도 무문토기에 대한 일고찰〉(《고고학》 5·6, 1979).닫기
고령 량전동의 바위에 조각된 암각화를 통해 청동기시대의 농경인들이 태양신을 신앙하면서 주술적인 회화를 상징적인 기호로 표시하여 제단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새롭게 제기되었다. 주 140140 리은창, 〈고령 량전동 암화조사략보〉(《고고미술》 112, 1971).닫기 울주 천전리 암각화 및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가 조사되어 이들의 그림이 선사시대에 해당되나, 특히 반구대의 암각화의 내용은 사람·고래 또는 물고기·사슴·호랑이·멧돼지·곰·여우·토끼 등 짐승 120여개, 고래잡이 배와 어부·사냥광경등·기타 명칭불명 동물등 모두 150여점으로 북유럽이나 신석기시대 사냥예술과 직결되는 내용으로 보고 B.C. 3000년대의 신석기시대중기에 비정하는 견해를 피력했고, 주 141141 문명대, 〈울산의 선사시대 암벽각화〉(《문화재》 7, 1973).닫기 한반도 암각화의 제작과 형식분류를 시도하여 기법상으로 Ⅰ∼Ⅶ기법으로 나누고 Ⅲ기법이 청동기시대기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제작된다는 주장을 황룡혼이 하고 있다. 주 142142 황룡혼, 〈한반도 선사시대 암각화의 제작기술과 형식분류〉(《고고미술》 127, 1975).닫기
이에 대해 금원룡은 이 암화는 수렵·어로의 성공과 대상동물들의 번식·풍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위령을 기원·구원하는 수렵경제사회의 소산으로 보고 그림의 구획을 5구로 나누고 시간적 순서로 작성된 것을 밝히고 대곡리인들은 처음 해수사냥을 주로 하고 산수사냥을 부로 하였으나, 도중 어느 단계부터 산수사냥으로 주력을 전환한 것으로 해석하고 아울러 해→산으로의 전환을 해면후퇴 같은 리유로 바다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암화의 년대는 노·외양선의 존재 그리고 천전리 암화 등과의 비교고찰로 철기를 동반하는 청동기후기부터 원삼국시대초 실년대로 B.C. 300∼A.D. 100년 경 약 4세기 동안에 걸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주 143143 금원룡,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서〉(《한국고고학보》 9, 1980).닫기 그리고 지석묘개석상에 나타난 cup형 mark에 대한 주장이 있고, 주 144144 황룡혼, 〈한국선사시대 성혈고〉(《지역개발론문집》 5, 1974).닫기 고인돌사회의 의식에 대한 글이 발표되기도 했다. 주 145145 이융조, 〈한국고인돌사회와 그 의식〉(《동방학지》 23·24, 1980).닫기
한국과 중국의 선사시대 농경구를 소개하면서 한국청동기시대의 농기구에는 반월형석도·유구석부·유단석부·석서·석초·석겸·곰배괭이·돌보습·년석·석제톱·석족·청동부를 들고 가축으로는 개·돼지·소가 있었다는 글이 있다. 주 146146 최무장, 〈한·중 선사시대의 농구〉(《백산학보》 24, 1978).닫기 농경문이 조각된 청동유물의 앞·뒷면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따비로 밭을 가는 단계를 지나 이제 누경으로 넘어선 시대의 유물임을 지적하고 나무위에 앉은새들은 중국사서인 《위지》 동이전에 나타나는 소도와 연결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아울러 새조각은 제를 지낼 때 신을 부르는 것으로 본 문헌과 고고학적인 유물을 연관시켜 해석한 글도 나왔다. 주 147147 한병삼, 〈선사시대 농경문청동기에 대하여〉(《고고미술》 112, 1971).닫기 그리고 이와 아울러 한국농경기원에 관한 연구와 청동기시대의 북한문화를 다룬 글이 발표되기도 했으며, 주 148148 금기웅, 〈고고학상으로 본 청동기시대의 북한〉(《북한》 1974).닫기 우리나라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일본지석묘에 대한 글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주 149149 침봉근, 〈일본지석묘의 일고찰〉(《부산사학》 3, 1979).닫기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금까지 청동기시대연구를 총정리한 《한국사》 Ⅰ(국사편찬위원회, 1973)을 발간했으며 금원룡은 《한국의 고분》(교양국사총서, 1974)을 저술하여 청동기시대의 묘제를 정리하였으며, 한영삼은 《토기와 청동기》(교양국사총서, 1974)를 발표하였다. 이 기간에는 유적발굴조사에서 얻어진 목탄시료를 통해 연대측정이 이루어져 청동기시대 년대추정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여주 흔암리 7호주거지에서 채집된 목탄편의 탄소년대가 B.C. 570으로 나타났고 이어 흔암리주거지에서 출토된 쌀·보리·조·수수 등 탄화곡물은 B.C. 7C 이전으로 년대가 검출됨으로써 쌀의 전래가 B.C. 7세기 이전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주 150150 서울대박물관, 《흔암리주거지》(1973·1974).닫기 또 상자포리지석묘발굴에서 얻어진 탄소년대는 B.C. 220이 나왔으며, 주 151151 문화재관리국, 《팔당·소양댐 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1974).닫기 춘성군 내평리 말각방형수혈주거지에서 얻어진 탄소년대는 B.C. 640이 얻어졌으며, 주 152152 위와 같음.닫기 송국리 주거지에서 채집된 목탄편은 B.C. 7∼6세기로 나타나 C14의 년대측정자료가 추가되기도 했다. 주 153153 국립중앙박물관, 《송국리》 Ⅰ(1979).닫기
이 밖에 한국동과에 대한 형식분류가 시도되었고, 주 154154 최몽룡, 〈한국동과에 대하여〉(《문리대학보》 18, 1971).닫기 화순출토 세문경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출토 세문경에 대한 검토가 있었으며 주 155155 금원룡, 〈화순출토세문경〉(《문화재》 6, 1972).닫기 따라서 다뉴기하문경에 대한 연구도 있었다. 또 세형동검의 용도에 대한 검토도 있었다. 주 156156 금동호, 〈세형동검의 용도〉(《우헌 정중환박사 환력기념론문집》, 1974).닫기 금해출토 이형동검·동모, 주 157157 윤무병, 〈금해출토의 이형동검 동모〉(《류홍렬박사회갑기념론총》, 1971).닫기 대전지방 청동기유물, 주 158158 성주탁, 〈대전지방출토 청동제유물〉(《백제연구》 5, 1974).닫기 부여 송국리·아산 백암리·청원 비하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유물, 주 159159 한국고고학회, 〈부여 송국리, 아산 백암리, 청원 비하리출토 일괄유물〉(《고고학》 3, 1974).닫기 련산 청동리출토 동검, 주 160160 공주사대 백제문화연구소, 〈련산 청동리출토 동검〉(《백제문화》 9, 1976).닫기 횡성 강림리출토 일괄유물, 주 161161 리강승, 〈횡성 강림리출토 일괄유물〉(《고고학》 4, 1977).닫기 남성리석퇴묘유물, 주 162162 한병삼·이건무, 〈남성리 석관묘〉(《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10, 1977).닫기 례산 동서리 석관묘출토 일괄유물, 주 163163 지건길, 〈례산 동서리 석관묘출토 청동일괄유물〉(《백제연구》 7, 1978).닫기 론산 원봉리지석묘출토유물, 주 164164 지건길, 〈론산 원봉리 지석묘와 출토유물〉(《고고미술》 136·137, 1978).닫기 고고 송룡리출토 동검, 주 165165 전영래, 〈고창 송룡리출토 동검일례〉(《전북유적조사보고》 10, 1979).닫기 백령도 출토 흑도장경호, 주 166166 한국고고학회, 〈백령도출토 흑도장경호〉(《고고학》 3, 1974).닫기 익산 다송리 청동유물, 주 167167 전영래, 〈익산 다송리 청동유물출토묘〉(《전북유적조사보고》, 1975).닫기 공주출토 중국식동모, 공주 봉안출토 동과·동검, 주 168168 전영래, 〈공주출토 중국식동모〉(《전북유적조사보고》 7, 1977).닫기 전상주출토 이형청동기, 주 169169 윤무병, 〈전상주지방출토의 이형청동기〉(《고고미술》 146·147, 1980).닫기 경남지방 청동유물, 주 170170 침봉근, 〈경남지방출토 청동유물의 신례〉(《부산사학》 4, 1980).닫기 원성 궁촌리와 린제 월학리, 주 171171 한영희, 〈원성군 궁촌리출토 일괄유물〉과 〈린제군 월학리출토 일괄유물〉(《고고학》 4, 1977).닫기 부여 비당리, 주 172172 리규산, 〈부여군 비당리 선사분묘〉(《고고학》 4, 1977).리백규, 〈양주군 인창리유적―횡산자료―〉(《고고미술》 129·130, 1976).______, 〈양주군 지금리유적―횡산자료 3-》(《고고학》 4, 1977).닫기 양주 지금리, 양주군 인창리, 주 173173 리백규·고승태, 〈양주군 교문리 유적―횡산자료 2-〉(《고고미술》 131, 1976).닫기 양주 교문리, 공주 탄천, 주 174174 금영배, 〈공주 탄천 선사유적〉(《고고미술》 136·137, 1978).닫기 서울 월곡동, 주 175175 리백규, 〈서울 월곡동유적―횡산자료 4―〉(《고고미술》 138·139, 1978).닫기 강릉 초당동, 주 176176 백홍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고고미술》 133, 1977).닫기 등에서 출토된 청동유물에 대한 소개가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기한 연구들 이외에도, 이 기간 중 최말기인 80년에 춘천 중도에서 채집된 유물소개(임세권, 춘천중도의 선사문화)인도네시아의 거석문화를 분석하여 우리나라 거석문화와의 연관성을 찾고자 한 글(김병모, 자바도의 거석문화), 한강류역무문토기를 지표채집하여 발표한 글(리건무 등, 한강류역지표조사보고)이 소개되었다.
주 096
: 금원룡, 〈한국마제석검 기원에 관한 일고찰〉(《백산학보》 10, 1971).
주 097
: 윤덕향, 〈한반도 마제석검의 일고찰〉(서울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77).
주 098
: 전영래, 〈전북지방 마장석검출토례와 몇가지 문제제기〉(《고고학》 5·6, 1977).
주 099
: 로혁진, 〈유구석부의 연구〉(서울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0).
주 100
: 윤무병, 〈한국청동유물의 연구〉(《백산학보》 12, 1972).
주 101
: 윤무병, 〈한국청동기시대의 문화〉(《고고미술》 129·130, 1976).
주 102
: 금정배, 〈한국청동기문화의 사적고찰〉(《한국사연구》 1971).
주 103
: 금정배, 〈Bronze Artifacts in Korea and their culture-Historical significance)(Rechard pearson ed., 《The traditional culture and society of Korea prehistory》, 1975).
주 104
: 금정배, 《한국민족문화의 기원》(고대출판부, 1974).______, 〈한국청동기문화의 기원에 관한 소고〉 《고문화》 17, 1979).
주 105
: 금원룡, 〈중국에서의 신출 고고자료 이종〉(《고고미술》 121·122, 1974).
주 106
: 금원룡, 〈전무주출토 료녕식동검에 대하여〉(《진단학보》 38, 1974).
주 107
: 금영배·안승주, 〈부여 송국리 료녕식동검출토 석관묘〉(《백제문화》 7-8, 1975).
주 108
: 금정학, 〈한국청동기문화의 편년〉(《한국고고학연구회》 1978).______, 《한국청동기시대의 연구》(부산대학교박사학위론문 1971).
주 109
: 전영래, 〈한국청동기문화의 년대상한문제〉(《전북유적조사보고》 8, 1978).
주 110
: 전영래, 〈한국청동기문화의 계보와 편년〉(《전북유적조사보고》 7, 1977).
주 111
: 전영래, 〈완주 상림리출토 중국식동검에 대하여〉(《전북유적조사보고》 6, 1976).
주 112
: 금영하, 〈한국식동검 형식분류시론〉(《동양문화연구》 1977).______, 〈한국식동검의 기원문제〉(《대구사학》 15·16, 1978).______, 〈한국식동검 분류재론〉(《한국사연구》 20, 1978).______, 〈한국식동검 분류삼론〉(《고고미술》 138·139, 1978).
주 113
: 리강승, 〈료녕지방의 청동기문화〉(《한국고고학보》 5, 1979).
주 114
: 금정기, 〈한국수혈주거지고〉(《고고학》 3, 1974).
주 115
: 서울대박물관, 《흔암리주거지》 1-Ⅳ(1978).
주 116
: 최몽룡, 〈광주 송암동주거지발굴조사보고〉(《한국고고학보》 4, 1978).
주 117
: 조유전, 〈경남지방의 선사문화연구〉(《고고학》 5·6, 1979).
주 118
: 안춘배, 〈남강상류의 선사문화〉(《백산학보》 23, 백산학회).
주 119
: 국립중앙박물관, 《송국리》 Ⅰ(1979).
주 120
: 리종선, 〈한국석관묘의 연구〉(《한국고고학보》 1, 1976).
주 121
: 강인구, 〈부여 당산의 석관묘〉(《력사학보》 88, 1980).
주 122
: 임세권, 〈한반도 고인돌의 종합적 검토〉(《백산학보》 20, 1976).
주 123
: 위와 같음.
주 124
: 최몽룡, 〈전남지방소재 지석묘의 형식과 분류〉(《력사학보》 78, 1978).
주 125
: 리은창, 〈호서지방의 지석묘조사〉(《월간문화재》 12. 1971).______, 〈호서지방의 지석묘조사〉(《월간문화재》 2, 1972).______, 〈호서지방의 지석묘조사〉(《월간문화재》 4, 1972).
주 126
: 문화재관리국, 《팔당·소양댐 수몰지구유적종합조사보고》(1974).
주 127
: 문화재관리국, 《안동댐 수몰지구유적발굴보고》(1974).
주 128
: 충남대·충북대, 《대청댐수몰지구유적발굴보고서》(1978·1979).
주 129
: 반월지구유적발굴조사단, 《반월지구유적발굴보고》(1978).
주 130
: 전라남도, 《영산강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서》(1976).
주 131
: 윤용진, 〈대구 칠성동 지석묘조사〉(《대구사학》 12·13, 1977).
주 132
: 지건길, 〈대덕 내동리 지석묘유적발굴보고〉(《백제연구》 8, 1977).
주 133
: 윤용진, 《영천 룡산동 지석묘 발굴조사보고서》(영천군, 1978).
주 134
: 전영래, 〈완주 덕천리 지석묘군〉(《전북유적조사보고》 10, 1979).
주 135
: 강인구, 〈론산 신기리의 지석묘〉(《고고미술》 148, 1980).______, 〈달성 장천동의 지석묘〉(《한국사연구》 28, 1980).
주 136
: 리백규, 〈경기도출토 무문토기·마제석검〉(《고고학》 3, 1974).
주 137
: 윤무병, 〈무문토기 형식분류시고〉(《진단학보》 39, 1975).
주 138
: 백홍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고고미술》 133, 1977).임세권, 〈춘천시 온의동 무문토기유적〉(《사총》 21·22, 1977).
주 139
: 리백규, 〈제주도 무문토기에 대한 일고찰〉(《고고학》 5·6, 1979).
주 140
: 리은창, 〈고령 량전동 암화조사략보〉(《고고미술》 112, 1971).
주 141
: 문명대, 〈울산의 선사시대 암벽각화〉(《문화재》 7, 1973).
주 142
: 황룡혼, 〈한반도 선사시대 암각화의 제작기술과 형식분류〉(《고고미술》 127, 1975).
주 143
: 금원룡,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서〉(《한국고고학보》 9, 1980).
주 144
: 황룡혼, 〈한국선사시대 성혈고〉(《지역개발론문집》 5, 1974).
주 145
: 이융조, 〈한국고인돌사회와 그 의식〉(《동방학지》 23·24, 1980).
주 146
: 최무장, 〈한·중 선사시대의 농구〉(《백산학보》 24, 1978).
주 147
: 한병삼, 〈선사시대 농경문청동기에 대하여〉(《고고미술》 112, 1971).
주 148
: 금기웅, 〈고고학상으로 본 청동기시대의 북한〉(《북한》 1974).
주 149
: 침봉근, 〈일본지석묘의 일고찰〉(《부산사학》 3, 1979).
주 150
: 서울대박물관, 《흔암리주거지》(1973·1974).
주 151
: 문화재관리국, 《팔당·소양댐 수몰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1974).
주 152
: 위와 같음.
주 153
: 국립중앙박물관, 《송국리》 Ⅰ(1979).
주 154
: 최몽룡, 〈한국동과에 대하여〉(《문리대학보》 18, 1971).
주 155
: 금원룡, 〈화순출토세문경〉(《문화재》 6, 1972).
주 156
: 금동호, 〈세형동검의 용도〉(《우헌 정중환박사 환력기념론문집》, 1974).
주 157
: 윤무병, 〈금해출토의 이형동검 동모〉(《류홍렬박사회갑기념론총》, 1971).
주 158
: 성주탁, 〈대전지방출토 청동제유물〉(《백제연구》 5, 1974).
주 159
: 한국고고학회, 〈부여 송국리, 아산 백암리, 청원 비하리출토 일괄유물〉(《고고학》 3, 1974).
주 160
: 공주사대 백제문화연구소, 〈련산 청동리출토 동검〉(《백제문화》 9, 1976).
주 161
: 리강승, 〈횡성 강림리출토 일괄유물〉(《고고학》 4, 1977).
주 162
: 한병삼·이건무, 〈남성리 석관묘〉(《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10, 1977).
주 163
: 지건길, 〈례산 동서리 석관묘출토 청동일괄유물〉(《백제연구》 7, 1978).
주 164
: 지건길, 〈론산 원봉리 지석묘와 출토유물〉(《고고미술》 136·137, 1978).
주 165
: 전영래, 〈고창 송룡리출토 동검일례〉(《전북유적조사보고》 10, 1979).
주 166
: 한국고고학회, 〈백령도출토 흑도장경호〉(《고고학》 3, 1974).
주 167
: 전영래, 〈익산 다송리 청동유물출토묘〉(《전북유적조사보고》, 1975).
주 168
: 전영래, 〈공주출토 중국식동모〉(《전북유적조사보고》 7, 1977).
주 169
: 윤무병, 〈전상주지방출토의 이형청동기〉(《고고미술》 146·147, 1980).
주 170
: 침봉근, 〈경남지방출토 청동유물의 신례〉(《부산사학》 4, 1980).
주 171
: 한영희, 〈원성군 궁촌리출토 일괄유물〉과 〈린제군 월학리출토 일괄유물〉(《고고학》 4, 1977).
주 172
: 리규산, 〈부여군 비당리 선사분묘〉(《고고학》 4, 1977).리백규, 〈양주군 인창리유적―횡산자료―〉(《고고미술》 129·130, 1976).______, 〈양주군 지금리유적―횡산자료 3-》(《고고학》 4, 1977).
주 173
: 리백규·고승태, 〈양주군 교문리 유적―횡산자료 2-〉(《고고미술》 131, 1976).
주 174
: 금영배, 〈공주 탄천 선사유적〉(《고고미술》 136·137, 1978).
주 175
: 리백규, 〈서울 월곡동유적―횡산자료 4―〉(《고고미술》 138·139, 1978).
주 176
: 백홍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고고미술》 133, 1977).
5. 1981∼1990년까지의 연구성과
이 기간중 청동기문화에 대해 논한 것으로는, 김정배가 청동기문화에서 비파형동검문화의 담당주민이 예맥족이고 석관묘의 계통으로 보아 우리나라 청동기개시연대를 기원전 10세기 경으로 역사의 실체는 고조선시대로 주장하고 있다. 주 177177 금정배, 〈청동기문화〉(《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1, 1987).닫기 그리고 단군신화와 무속문화가 중앙·북Asia 특히 바이칼호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바리데기무가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사실이며 우리사회의 무당·당굿·서낭당 등 당이란 말은 일련의 주술, 흔히 샤마니즘이라 부르는 문화복합체로 단군도 당이란 말과 연결됨을 주장 단군은 농경사회로 청동단검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고 단군의 기본상을 사제 즉, 왕으로 본 견해가 발표되었다. 주 178178 정경희, 〈단군사회와 청동기문화〉(《한국학보》 23, 1981).닫기
농경문화의 각 중요지에 각각 읍락국가가 형성되고 이러한 농업생산력과 읍락국가를 배경으로 하여 청동기 문화가 발달되었고, 한반도의 세형동검은 료녕지방의 비파형동검이 전하여 발전했다고 주장하여 담당민족은 조선족으로 영역은 서쪽으로 중국 하북성 동북부으로부더 동쪽으로는 만주, 한반도에 걸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 시야를 넓혀서 중국 동북지방의 청동유적·유물을 분석하여 한국민족이 하나의 민족단위로 형성된 것은 지역적으로 요동지방으로 문화적으로 청동기문화이며 전작농경문화가 서기전 3,000년 후반에서 2,000년 전반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만주지방까지 퍼져 있어 이를 바탕으로 요령지방에서는 목축과 농경의 생산단계에 들어가 초기적 국가를 형성했고 려순 려대시에서 발견된 강상·루상묘와 조양십이태영자유적 등으로 미루어 청동기시대 이래에 강대한 국가권력이 형성되었으며, 루상유적의 하한을 기원전 3세기에 두고 이러한 유적들을 고조선에 비정하고 고조선에 속한 시대는 청동기시대전기부터 후기까지 다시 말해 서기전 10∼3세기 경까지로 주장하고 있다. 주 179179 금정학, 〈고고학상으로 본 강역〉(《정신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여름).닫기
또 중국동북지방에 분포하는 토광묘·적석묘·지석묘·대개석묘.석관묘·옹관묘를 분석하여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위만조선까지의 활동지역을 찾아야 한다고 하고, 그 주활동지는 대릉하와 료하동류·그리고 료동반도를 연결하는 어느 곳으로 추정해야 하며 시기적으로 홍산문화기로부터 하가점문화기와 서포산문화기를 포함하여 전국시대까지 즉 B.C. 3000년 경부터 B.C. 3세기까지의 기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 있다. 주 180180 금정학, 〈고고학상으로 본 고조선〉(《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보고론총 87-1, 1987).닫기 료녕지방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다루면서 비파형동검과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다룬 글이 발표되었다. 주 181181 강인구, 〈중국 동북지방의 고분〉(《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보고론총 87-1, 1987).닫기
청동기시대에 관한 종합된 저서로서 〈청동기문화〉(《한국사론》 13)이 있으며 이 저서에는 침봉근의 〈묘제(지석묘)〉, 금원룡의 〈예술과 신앙〉, 금정학의 〈경제생활 및 청동기의 전개〉, 윤덕향의 〈석기〉, 전영래의 〈석기의 비교〉, 윤세영의 〈옹관묘〉, 리청규의 〈편년〉, 리형구·전영래의 〈문화비교〉, 임세권의 〈적석총〉, 지건길의 〈석관묘〉, 조유전의 〈토기전개〉, 최몽룡의 〈주거생활〉, 최무장의 〈석기비교〉, 로혁진의 〈홍도·흑도연구〉가 깊이 있게 다루어져 있다. 그 밖에 한병삼이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에 대한 개관를 썼다. 주 182182 한병삼,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국보》, 1983).닫기 로혁진도 강원도의 청동기문화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주 183183 로혁진, 〈청동기문화〉(《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닫기 그리고 윤무병은 지금까지 자신의 청동기에 관한 연구를 모아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주 184184 윤무병, 《한국청동기문화연구》(1987).닫기 침봉근도 청동기의 종류·지석묘 마제석검·도작농경 등 청동기전반에 관한 글을 쓰고 청동기의 상한을 기원전 700년, 하한을 기원전후로 주장하고 있다. 주 185185 침봉근, 《한국청동기문화의 리해》(동아대학교출판부, 1990).닫기
이 기간중 지석묘에 관한 연구를 들면, 한반도의 거석기념물을 동아시아지방에서 발견되는 거석기념물과 비교해 종류와 형식·민속학적·신화학적 의미를 분석한 금병모는 립석은 사람이 죽은 후에 기념하기 위한 종말론적 세계관의 표현으로 보았고, 묘제의 경우 발견되는 유물상으로 모아 석관묘는 북방시베리아 계통으로 지석묘는 북위 45° 이남의 남방계로 보았다. 그리하여 지석묘와 석관묘의 축조자들은 원래는 전통이 다른 경제패턴에다 세계관도 다른 사회를 구성한 것이 정복 또는 혼인 등과 같은 사회 간의 결함으로 지석묘와 석관묘가 공동묘처럼 나타난다고 보았고, 지석묘사회는 정착농업경제에 기초한 씨족부락단위사회로 원시신앙이 존재하는 즉 지석묘는 란생신앙, 적석묘는 천손강하신앙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국의 거석기념물 가운데 립석과 지석묘는 남방문화로 주장하고 거석숭배신앙을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들어와 벼농사를 소개함으로써 원주민에게 새로운 도작농경이 이루어져 경제혁명을 불러 일으켜 인구의 증가, 사회의 팽창을 가져왔다는 새로운 설을 주장했다. 주 186186 금병모, 〈한국거석문화 원류에 관한 연구〉(《한국고고학보》 10·11, 1981).닫기
또 우리나라의 지석묘를 편년별로 탁자식지석묘·개석식지석묘·기반식지석묘로 외형상 크게 삼분하고 이들을 일본지석묘형식과 대조하여 일본에 전파된 초기지석묘는 개석식지석묘말기, 기반식지석묘초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남부지방에서 일본 구주지방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실년대는 기원전 4세기말로 추정한 견해를 침봉근이 발표했다. 주 187187 침봉근, 〈한·일지석묘의 관계〉(《한국고고학보》 10·11, 1981).닫기
또 지건길은 한반도와 중국의 화북지방, 일본의 구주지방 등 동북아시아 일원에 분포한 지석묘를 검토하여, 매장주체의 구조적 성격에 따라 남방식·북방식의 이대류형으로 구분하고 남방식을 다시 판석형·할석형·혼축형·토광형·옹관형의 5대 기본류형으로 구분하여 형식분류를 시도하였다. 주 188188 지건길,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형식학적 고찰〉(《한국고고학보》 12, 1982).닫기 그리고 그는 한 지역 내 또는 한 묘군 내에 있는 지석묘의 크기 차이는 피장자의 신분차이로 보았는데, 지금까지 소수의 지배계급들만 위한 묘제라는데 반박하고 무리를 이루고 있는 지석묘군을 관찰하여 강의 흐름이나 산맥의 방향에 따라 일렬 또는 수렬을 이루고 있음을 밝히고, 그것은 자연숭배사상과 결부되는 산세나 수세와 관련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주 189189 지건길, 〈지석묘사회의 부원에 관한 일고찰〉(《리화사학연구》 13·14, 1983).닫기 그리고 프랑스 브르따뉴지방의 거석묘를 소개하고 우리나라 거석문화와의 유사성과 상이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주 190190 지건길, 〈거석문화의 동과 서〉(《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Ⅰ, 일지사, 1987).닫기
고인돌의 무덤방이 물의 흐름과 나란하여, 역시 고인돌사회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데 동의하고 상한연대를 신석기시대중기로 보는 견해를 박희현이 내 놓았다. 주 191191 박희현, 〈한국고인돌문화에 대한 고찰〉(《한국사연구》 46, 1983).닫기 이 밖에 오상탁의 〈한국지석묘에 대한 일고찰〉이 발표되었다. 주 192192 오상탁, 〈한국지석묘에 대한 일고찰〉(령남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6).닫기
그리고 중국 료동반도의 고인돌의 분포상을 살펴보고 분석하여 한반도의 고인돌과 같은 계통임을 밝히고 따라서 발해 연안지구인 료동반도, 산동반도, 한반도의 고인돌은 자력발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고조선시대 문화령역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193193 리향구, 〈발해연안지구 료동반도의 고인돌무덤연구〉(《정신문화연구》 32, 1987).닫기 또 동북 Asia 지석묘를 상석과 하부구조에 따라 접지형과 리지형으로 대별하고 다시 접지형을 A·B로, 리지형을 지상묘실형·지하묘실형 등 C·D·E·F로하여 모두 6형식으로 구분하여 형식적인 측면에서 선후관계를 밝혔고, 동북아시아의 지석묘년대에 관해서도 중국 지석묘의 경우 상한을 신석기시대만기 즉 1000년 B·P, 하한은 청동기시대말기·춘추시대라는 자료에 의해 북한의 경우 청동기시대상한을 기원전 2000년으로, 하한을 기원전 1000년으로 보고 있어 의문점이 있다는 점만 밝혔을 뿐 연대관의 피력은 없었다. 주 194194 금정희,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연구〉(《숭실사학》 8, 1988).닫기
한편 지역적인 지석묘연구로서 나주 판촌리, 광주 충효리지석묘조사를 한 최몽룡은 이들 지석묘의 축조가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족장사회(chiefdom)로서 무덤을 어린아이로 묻을 수 있는 세습신분제를 갖춘 계급사회로 보았고, 아울러 지석묘의 수가 공동묘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경제적인 기반을 갖추었거나 지배가족의 공동묘로 주장했다. 주 195195 최몽룡, 〈전남지방지석묘사회와 계급발생〉(《한국사연구》 35, 1981).닫기 그는 또 전남지석묘가 청동기말기부터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축조되어 왔으나 주로 초기철기시대에 해당되고 실년대는 기원전 주 196196 위와 같음.닫기 4∼5세기에서 서력기원전후로 주장하기도 했다. 주 197197 최몽룡, 〈전남지방 지석묘사회 편년〉(《진단학보》 54·55, 1982).닫기
그리고 전남지방의 지석묘를 외형상 크게 남·북방식으로 대별하고 남방식을 상석형태에 따라 괴석형·장타원형·장방형·판석형으로, 하부구조는 지석·적석·뚜껑돌·묘실로 구분하고 전남지방 지석묘분포를 17개 지역군으로 나누어 이 지석묘가 마한사회와의 관계, 마한의 성립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한 글이 발표되었다. 주 198198 리영문, 〈전남지방 지석묘의 특성〉(《한국고고학보》 20, 1987).______, 〈전남지방 마한소국 비정지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향토문화》 10, 1989).닫기
제원 황석리에서 발굴조사된 고인돌을 검토하여 기원전 9세기부터 4세기대까지 존속했을 것으로 보고 고인돌축조의 선후관계뿐 아니라 황석리가 주변고인돌유적의 중심위치에 있었으며 북부지방의 문화를 남부지방으로 전파하는 중간지대로서의 기능을 한 것으로 주장하고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남성임을 밝혀내고 지위는 지배자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붉은 흙, 붉은간토기의 존재는 영생을 기원하는 내세관으로 주장하고 있는 글도 있다. 주 199199 우장문, 〈제원 황석리 고인돌문화의 고찰〉(《백산학보》 34, 1987).______, 〈한반도 고인돌문화에 대한 고찰〉(고려대석사학위논문, 1986).이융조, 〈황석리 고인돌문화의 묻기 방법에 관한 고찰〉(《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기요》, 1988).닫기
한반도 금강과 남한강유역의 고인돌을 다루면서 고인돌의 기원에 관한 전파론보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들어 자생설에 동의하고 고인돌의 성격을 당시 사회의 의식용인 제단고인돌과 무덤인 무덤고인돌로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상한을 중기신석기시대에 동의하고 하한을 김해식토기가 나오는 시기 즉 철기시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고인돌이 좁은 곳에 여러 기가 있고 덮개돌 밑에 깔린 돌이 쭉 이어져 있는 곳은 가족무덤으로 해석하고 지석묘사회는 족장사회(chiefdom) 이전의 사회로 보았다. 주 200200 하문식, 〈금강과 남한강유역의 고인돌문화의 비교연구〉(《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론총》, 1988).닫기
또 금호강류역의 지석묘유적과 출토견물을 분석하여 지석묘를 개석식과 기반식 두형식으로 분류하고 다시 기반식은 무묘실형과 다묘실형으로 개석식을 단묘실형·다묘실형·무묘실형으로 세분한 형식으로 나누고 개인묘와 가족묘로 구분해 냈다. 그리고 시기를 기원전 3세기 초에서 기원전 2세기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주 201201 금약수, 〈금호강류역의 지석묘연구〉(령남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4).닫기
이 밖에 발굴 및 조사된 지석묘는, 중도, 주 202202 로혁진·최은주, 〈중도지석묘발굴보고〉(《중도발굴조사보고서》, 1982).닫기 강원도 동해안, 주 203203 백홍기, 〈강원도 동해안지방의 지석묘〉(《고고미술》 156, 1982).닫기 동복댐 수몰지구, 주 204204 전남대박물관, 《동복댐수몰지구지석묘발굴조사보고서》(1982).닫기 제원 황석리, 광의리, 계산리, 중원 주 205205 충청북도, 《’82충주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1982).닫기 지동리, 명서리, 주 206206 위와 같음.닫기 강진 영복리, 칠량 대구면, 주 207207 광주박물관, 《강진 영복리지석묘발굴조사보고서》(1983).닫기 신안 압해도, 주 208208 리영문, 〈신안 압해도 선사문화〉(《향토문화》 7, 1982).닫기 금해 내동, 주 209209 금정학, 〈금해 내동 지석묘조사개보〉(《부산당감동고분군》, 1983).닫기 무주 사천리, 주 210210 전영래, 〈무주 사천리 지석묘조사〉(《전북유적조사보고》 14, 전주시립박물관, 1983).닫기 고창 아산, 주 211211 전주시립박물관, 《고창·아산지구 지석묘발굴보고서》(1984).닫기 고흥 장천제, 주 212212 광주박물관, 《고흥 장천제 지석묘조사》(1984).닫기 령암 청룡리, 장천리, 주 213213 목포대박물관, 《령암 청룡리·장천리지석묘군》(1984).최성락, 〈령암 청룡리·장천리 지석묘발굴조사개보〉(《한국고고학년보》 12, 1985).닫기 제주 애월읍, 주 214214 이청규, 〈제주도 지석묘연구〉(《탐라문화》 4, 1984).닫기 광명시, 주 215215 한양대박물관, 《광명시 철산동 지석묘》(1975).닫기 한강유역, 주 216216 리형구, 〈한강유역 서울 원지동 지석묘연구〉(《한국사학》 8, 1986).닫기 신매리, 주 217217 한림대박물관, 《신매리 지석묘·주거지발굴보고서》(1986).닫기 오봉리, 신평리, 대곡리, 월산리, 절산리, 죽산리, 우산리, 덕봉리, 봉갑리, 사수리, 류평리, 복교리, 덕산리, 평천리, 주 218218 전남대박물관, 《주암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1)》 Ⅱ(1987, 1988).닫기 산청 강루리, 주 219219 조유전, 〈남강류역의 선사문화연구(1)〉(《한국고고학보》 20, 1987).닫기 충남 서해안, 주 220220 리남석, 〈충남 서해안 고인돌 2례〉(《백제문화》 17, 1987).닫기 보성 죽산리, 주 221221 리영문, 〈보성 죽산리유적의 특성〉(《단국대학교박물관기요》 4, 1988).닫기 승주 구산리, 주 222222 리영문, 〈승주 구산리유적과 출토유물〉(《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 1988).닫기 거창·섬천지역, 주 223223 림효택, 〈거창 대야·무릉·월평리 섬천 역평리 지석묘발굴조사개보〉(《령남고고학》 3, 1987).______, 《거창·섬천 큰돌무덤》(동의대학교학술총서 1, 1987).닫기 시흥, 주 224224 임효재·하문식·조상기, 〈시흥 삼리지석묘발굴조사개보〉(《판교―구리, 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1988).닫기 임자도 주 225225 최몽룡, 〈임자도의 선사문화〉(《고문화》 20, 1982).닫기 등이 있다.
전남지방의 지석묘 밀집분포지역을 검토 분석하여 마한소국으로 비정된 11개지역 중 장성과 악안을 제외하고 모두 지석묘 밀집지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내어 이들 지역의 지석묘는 적게는 200∼300기, 많게는 600∼800기 정도나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렇게 볼 때 마한소국과 지석묘사회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지석묘축조집단과의 직접관련여부보다 지석묘사회에서 계승·발전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 226226 리영문, 〈전남지방 마한소국 비정지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향토문화》 8, 1989).닫기
북한강상류에 분포하는 고인돌유적을 이 지역에서 무덤주체부인 무덤방에 돌무지가 있는 고인돌의 분포권, 이들이 있는 위치의 지세조사, 그리고 재료의 문제를 중심으로 구조·계통적인 관점에서 돌무지무덤과 탁자식고인돌이 서로 하나로 묶여진 형식으로 보고 이를 적석부가지석묘라 이름하기를 주장했다. 주 227227 로혁진, 〈적석부가지석묘의 형식과 분포〉(《한림대학론문집》, 1987).닫기
이 밖에 지석묘 중에는 무덤이라기보다는 제의를 행한 제단고인돌로 보려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주 228228 서성훈 외 《고흥·장수 지석묘조사》(광주박물관학술총서 6, 1984).이융조 외, 〈우산리 곡천고인돌〉(《주암댐 수몰지역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Ⅱ, 1988).이융조 외, 〈한국고인돌의 다른유형에 관한 연구〉(《동방학지》, 1988).닫기
한국지석묘의 기원을 신석기시대에 있다고 주장한 글, 주 229229 박희현, 〈한국고인돌문화에 대한 일고찰〉(《한국사연구》 46, 1984).닫기 우리나라 고인돌의 형식을 판자돌고인돌·바둑판고인돌·구덩고인돌 등 3류형으로 분류하고 우리나라 자생설과 남한강류역이 금강류역보다 더 보편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주 230230 하문식, 〈우리나라 고인돌문화의 연구〉(연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5).닫기
황석리 고인돌의 발굴조사를 통해 고인돌의 묻기방법과 장례의식에 관한 연구로 홑무덤의 바로펴묻기가 기본이었고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모두 어린아이에서 30대 초에 이르는 남성으로 보았다. 주 231231 이융조·우종윤, 〈황석리 고인돌문화의 묻기방법에 관한 고찰〉(《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기요》, 1988).닫기
거창 대야리 4기, 무릉리 93기, 월평리 3기, 합천 역평리 16기를 발굴조사하여 구조해석, 부장품의 특징, 립지와 분포상태를 밝히고 지석묘를 큰돌무덤으로 고쳐 부르기를 주장했다. 주 232232 동의대학교박물관, 《거창·섬천 큰돌무덤》(1987).닫기 중도의 고인돌 3기가 발굴되었고, 주 233233 국립중앙박물관, 《중도》―진전보고 Ⅴ-(1984).닫기 기타 지석묘의 발굴 및 조사된 것을 보면, 령암 장천리, 주 234234 최성락, 《령암 장천리주거지》Ⅱ (목포대학박물관학술총서 7, 1987).닫기 충북지역, 주 235235 이융조 외, 〈중원지방에서 새로이 찾은 고인돌유적〉, Ⅰ (《호서문화연구》 7, 1988).닫기 안동 수곡동의 지석묘, 주 236236 윤용진, 〈안동수몰지구발굴개보〉(《령남고고학》 4, 1987).닫기 승주 구산리 지석묘, 주 237237 리영문, 〈승주 구산리유적과 출토유물〉(《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닫기 주거지, 진도·조도 지석묘·선돌 지표조사, 주 238238 최성락, 《조도의 유적·유물》(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소, 1984).닫기 제주 영광지석묘군의 지표조사, 주 239239 리청규, 〈제주도 지석묘에 대항 연구〉(《탐라문화》 4, 1984).닫기 용인 주북리·근삼리·맹리·왕산리의 고인돌과 사암리·창리·신원리의 선돌, 이 지역 출토 석검·석촉·거푸집이 소개되었다. 주 240240 국립 중앙박물관, 《신암리》 Ⅰ (1988).닫기 여주 석우리, 외사리 고인돌 및 석우리 선돌이 소개되고 교리출토 마제석검이 소개되었다. 주 241241 국립중앙박물관, 《신암리》Ⅱ (1989)닫기 산청 강루리·경호강유역의 지석묘 6기를 발굴한 내용의 소개, 주 242242 조유전, 〈남강유역의 선사문화〉 Ⅰ(《한국고고학보》 20, 1987).닫기 고창 성송면일대 지석묘 90여기에 대한 소개, 주 243243 금학휘, 〈고창군 성송면일대 선사유적조사보고〉(《향토문화유적조사》 3, 1983).닫기 강원도 고성군, 동해시, 강릉시 등지에서 새로 발견된 지석묘 23기 소개, 주 244244 백홍기, 〈강원도 동해안지방의 지석묘〉(《고고미술》 156, 1982).닫기 제원 계산리 B.C. 지석묘 3기, 주 245245 황용훈, 《충주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종합보고》(1984).닫기 제원 양평리 D지구 지석묘 2기, 주 246246 최몽룡 외, 위의 책.닫기 제원 황석리 B지구 지석묘 9기, 주 247247 이융조 외, 위의 책.닫기 제원 사기리 A지구 지석묘, 주 248248 박희현 외, 위의 책.닫기 제원 황석리 A지구 립석, 주 249249 이융조 외, 위의 책.닫기 제원 함암리지구 지석묘 9기, 주 250250 리동복 외, 위의 책.닫기 제원하천리 C지구 지석묘 2기, 주 251251 김병모 외, 위의 책.닫기 제원 하천리 D지구 지석묘 및 석곽, 주 252252 김병모 외, 위의 책.닫기 중원 무릉동 B지구 립석 2기, 주 253253 최몽룡 외, 위의 책.닫기 중원 지동리 A지구 지석묘 1기 등의 주 254254 황용훈, 위의 책.닫기 소개한 글이 있다.
무문토기시대의 묘제를 지석묘·석상분·토광묘·옹관묘로 구분설명하여 일본학자들이 주장한 우리나라의 지석묘를 개석식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북쪽에서는 북방식, 남쪽에서는 남방식으로 발달하였다는 주장을 반대하고 우리나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북방식→개석식→남방식으로 발전한다는 설을 주장하면서 일본 구주지방의 지석묘 하부구조로 나타나는 토광이나 옹관이 우리나라의 경우 지석묘보다도 후대에 축조된 별개의 무덤이 일본에서 다 통합됨을 들고 이것은 일본 지석묘가 우리나라 남방식지석묘보다 후대에 해당됨을 증명하는 것으로 손병헌은 보았다. 주 255255 손병헌, 〈한국선사시대의 무덤〉(《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Ⅰ, 1987).닫기
의창 신촌리에서 20여기의 석관묘 및 등석석관을 발굴조사하여 특히 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적색마연소호를 5종류로 나누어 변화순서를 말하고 이 토기가 이 지방에 있어서는 무문토기시대전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글이 있다. 주 256256 최종규·안재호, 《신촌리 분묘군》(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제15책).______, 《중도》―진전보고 Ⅳ―(부록 2)(1983).닫기
부여 남산리에서 토광묘내 마제석검이 출토됨으로써 토광묘도 송국리시기의 분묘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주 257257 윤무병, 〈공천군 탄천면 남산리 선사시대분묘군〉(《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닫기 송국리석관년대를 점토대·흑도·우각형파수단계보다 앞서나 공렬토기·각형토기·구록선각토기·홍도단계보다는 늦다는 년대관을 제시했다. 주 258258 금영하, 〈송국리 석관묘년대고〉(《력사교육론집》 2, 경북대학교, 1981).닫기 또한 석관묘와 석곽묘 그리고 특수형태의 무덤이 조사·소개되었다. 주 259259 단국대학교박물관, 《소곡리 신월의 청동기시대의 무덤》(1988).닫기
이 기간 중 토기에 대한 연구로, 우리나라 각형토기에 관련된 유적을 종합적으로 검토·분석하여, 각형토기를 전형과 변형으로 구분되고 기형은 옹·호·소형장경호의 3종으로 구분되고 각형토기의 조합출토상으로 청천강 이남 한강 이북지역을 Ⅰ군으로 한강류역을 Ⅱ군으로 청천강류역을 Ⅲ군으로 구분하고 분묘는 석관묘·남방식지석묘, 북방식지석묘로서 그 중 북방식지석묘가 가장 늦은 형식으로 보았고, 석기가 다양하며 청동기·골기는 소량으로 기본생활용구가 되지 못함을 주장하고 실연대는 조기(B.C. 10∼9세기), 전기(B.C. 8∼7세기), 중기(B.C. 6∼5세기), 후기(B.C. 4∼3세기)로 편년하였다. 주 260260 한영조, 〈각형토기고〉(《한국고고학보》 14·15, 1982).닫기
흔암리유적에서 출토된 무문토기를 검토·분석한 이백규는 구멍토기, 골아가리(구순각목), 붉은토기(홍도)가 서북한의 팽이토기를 받아들어 지역양식화하였고, 잡곡농사는 동북한 벼농사는 서북한으로부터의 전래이며 실년대를 기원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까지로 주장했다. 주 261261 리백규, 〈흔암리출토유물에 대해서〉(《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닫기 그는 나아가 한강류역 무문토기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동북한·서북한의 민패토기(무문토기)가 한강유역에 도착하여 양자가 섞이지 않은 유적의 시기를 A군, 이를 다시 Ⅰ∼Ⅲ기로 나누고, 동북계와 서북계가 결합 또는 공존하는 시기를 B군, 이들 토기가 소멸하는 시기를 C군, 덧띠토기·세형동검 공존기를 D군으로 편년하였다. 주 262262 리백규, 〈한강류역 전반기 민무늬토기의 편년에 대하여〉(《령남고고학》 2, 1986).닫기
전남지방의 무문토기문화의 유적을 먼저 무문토기와 석기류만 공반되는 유적을 Ⅰ기, 다음 청동기가 출토되거나 후기무문토기가 발견되는 유적을 Ⅱ기, 끝으로 철기가 공반되는 유적을 Ⅲ기로 구분하고 Ⅰ기는 지석묘인이 아직 청동기를 사용하지 못한 단계로 충청도지방의 무문토기문화가 남하하여 형성되고 일부는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파급되어 가는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가 충청도지방을 거쳐 파급된 시기로 이 시기는 다시 지석묘사회에서 석곽묘사회로 교체되고 있음을 보고, Ⅱ기는 새로운 철기 문화가 류입되어 옹관묘와 토광묘가 유존했고 실년대는 B.C 5세기에서 B.C. 2세기까지로 주장하고 있다. 주 263263 최성락, 〈전남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성격〉(《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1987).닫기
평창읍의 평창강유역에서 채집된 공렬토기·홍도·골아가리토기·석검·석도 등을 소개하고 이를 검토하여 남한강 최상류의 공렬토기 유적임을 밝히고 동북한에서 남한강상류를 타고 남부지방으로 퍼졌다고 주장했다. 주 264264 임세권, 〈평창강유역의 무문토기문화〉(《령남고고학》 1, 1986).닫기
서북한의 팽이토기·동북지방의 화분형토기에서 점토대토기 및 신창리 옹관토기에 이르는 우리나라 무문토기 전체를 분석·검토하여 발생에서 변천의 계보와 과정을 고찰한 림병태는 무문토기문화를 발생기·전기·중기·후기의 4기로 구분하고 무문토기는 료하류역 신석기인들이 그들의 즐문토기제작법에 앙소토기와 룡산토기의 기법을 가미함으로서 생겼다고 주장하고 그 초기형식이 서북한지방과 두만강류역에서 각각 특성을 지닌 팽이형과 화분형으로 나타나고 이들 토기가 다시 요하유역에서 일어나는 청동검문화의 충격을 받고 미송리토기를 다시 이차 농경문화의 물결로 팽이토기문화와 화분형토기문화의 결합을 가져오고 이 결합에서 공렬토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주 265265 림병태, 〈한국 무문토기의 연구〉(《한국사학》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닫기
우리나라 남한지방 발견의 무문토기와 공렬토기 집중분석하여 남한지방의 무문토기문화를 가악동유형, 역삼동유형, 흔암리유형, 송국리유형, 수석리 연암산유형, 군곡리 일륵도 유형 등 6개유형으로 나누고 시기적으로 무문토기시대를 초기·전기·중기·후기·말기의 5단계로 구분하여 초기를 B.C. 10∼8세기로, 말기를 B.C. 1∼A.D. 1세기로 편년하여 남한 지방에 있어 무문토기시대는 비파형―세형동검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이전과 그 이후의 한대철기문화유입기를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 266266 리청규, 〈남한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전개와 공렬토기문화의 위치〉(《한국상고사학보》 1, 1988).닫기 또 제주도 상모리의 무문토기을 집중분석하여 1단계에서 4단계까지의 변형을 시도하고 유적의 상한연대를 B.C. 500년을 넘지 않고 하한을 B.C. 100년 전후로 보았다. 주 267267 리청규, 〈청주도 상모리 무문토기에 대한 일고찰〉(《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제주도·제주대학교박물관, 《상모리유적》(1990).닫기
북한강에서 한강상류에 이르는 한강류역의 20개 무문토기유적을 자료로 하는 한강무문토기문화의 성격을 고찰한 것으로, 이 지역에의 무문토기류입은 북한강상류로부터가 아니고 임진강 하류를 통한 것이고 거기서 다시 북한강으로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주 268268 최무장, 〈한강류역의 무문토기〉(《한국고고학보》 14·15, 1983)닫기 종말기무문토기가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삼천포 늑도유적, 해남 군곡리패총, 춘천 중도유적을 들고 이 종말기 무문토기는 명실상부한 철기문화로 성격되어지는 토기문화라고 주장하였다. 주 269269 정징원·신경철, 〈종말기 무문토기에 관한 연구〉(《한국고고학보》 20, 1987).닫기
우리나라 출토 가지무늬토기에 대한 분포·형식·편년·성격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리건무는 이 토기의 조형으로 본 홍도를 Ⅰ∼Ⅳ군의 형식으로 분류하고 동시에 가지무늬토기도 4류형으로 분류하여 홍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밝히고 신앙과 관계되는 특수용기로 기원전 5세기∼기원 4세기 말까지 약 200여 연 간의 년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 270270 리건무, 〈채문토기고〉(《령남고고학》 2, 1986).닫기
양평 지석묘 2호 출토의 홍도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무문토기와는 달리 석영이 장석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섞여 있음을 밝혀 내고 홍도의 표면에 마연도 주칠은 먼저 그릇을 구운 다음 준비된 주칠을 바르거나 그 속에 담근 다음 꺼내 말린 후 마연한 결과임을 밝혔고, 홍도는 573°C 이하에서 구웠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주 271271 최몽룡·윤동석 외, 〈충북 제원 양평리·도화리출토 홍도 및 철제품의 과학적 분석〉(《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최몽룡·박양진, 〈여주 흔암리토기의 과학적 분석〉(《고문화》 25, 1984)닫기 황석리출토의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를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이러한 토기가 부장용이라는데 이견을 발표한 글이 있다. 주 272272 이융조·신숙정, 〈제원 황석리유적층토의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의 고찰〉(《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닫기
점토대토기출토 유적을 소개하고 Ⅰ식과 Ⅱ식으로 형식분류한 후, Ⅰ식의 상한을 B.C. 4세기∼B.C. 2세기 중으로, Ⅱ식의 상한은 B.C. 2세기∼B.C 1세기 중에서 기원전후로 편년하고 침양에서 료동반도를 거쳐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전래되어 제주도와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본 점토대토기에 관한 종합적 연구가 있다. 주 273273 한상인, 〈점토대토기 문화성격의 일고찰〉(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81).닫기 낙동강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하아동유적출토 유물들을 소개하고 이 유적이 여주 흔암리유적과 깊은 연관성관계를 갖는 것으로 추정하고 안동지방은 중부지방의 무문토기문화가 남한강상류를 통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남부지방으로 전파되는데 중계역할을 담당한 지역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주 274274 임세권, 〈낙동강상류지역의 무문토기연구〉(《사학연구》 34, 1982).닫기
한편 고조선의 족속문제와 위치를 추적해 보기 위해서 동북아시아의 비과형청동문화의 지역적 특성을 살펴본 후 미송리형토기의 분포와 지역성·문화적 특성을 검토·분석하여, 미송리형토기의 사용집단은 고조선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고, 그 활동무대는 요하 이동과 한반도 서북일대로 비정될 수 있겠다. 이후 연의 문화영향 때문에 요동일대의 주민들은 동으로 밀려 대동강일대에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어 이것이 후대의 고조선의 중심지역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주 275275 송호정, 〈고조선의 위치와 족속문제에 관한 고찰〉(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90).닫기
한반도출토 유구석부를 종합 분석하여 이 석부는 중국앙소신석기문화의 adze형 목공구전통에서 도작과 함께 한반도 서부로 유입되어 유구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초기형Ⅰ식과 후기형Ⅱ식으로 구분하여 Ⅰ식은 부두와 인부의 폭이 같고 부신신면은 거의 절두삼각형으로 후기무문토기단계에 해당되고 Ⅱ식은 인부폭이 약간 넓어지고 부신단면은 측벽이 약간 외만된 것으로 세형동검·점토대토기단계로 보았고 두 기본형식으로 나누어지는 후기는 신석기단계로 보았다. 특히 작업과정에 형식학적 편년의 결함을 수학방식을 대입해서 논했다. 주 276276 로혁진, 〈유구석부에 대한 일고찰〉(《력사학보》 89, 1981)닫기
우리나라 발견의 마제석족를 종합적으로 검토·분석하여 시기적·공간적·기능적 의의와 관련시켜 고찰하고 무문토기전기에는 실용품으로 부장하였음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주 277277 최성락, 〈한국마제석족의 고찰〉(《한고고학보》 12, 1982).닫기
삼각형석도의 발생과 전파를 송국리유적의 성립과 진파에 의거해서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도작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더 효과적인 수획구가 요구되어 효과적인 구조의 량인석도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렇게 발생한 삼각형석도는 전북·전남을 거쳐 경남 해안지방까지 전파되었고, 그 실연대를 B.C. 6∼4세기에서 금해기까지라고 본 글이 있다. 주 278278 금상면, 〈삼각형석도의 일연구〉(령남대석사학위론문, 1985).닫기
우리나라 삼각형석도를 종합분석하여 이 석도에는 반월형·직고형도 있기 때문에 특징적인 교인이 이들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송국리기인 B.C. 6세기 경에 반월형석도에서 교인방법이 출현되고 이어서 사용손모에 의해 직인과 변인의 이부로 형성되는 직호형으로 거기서 다시 직인의 삼각형으로 변화, 원삼국시대에 와서 소멸되었다고 주장했다. 주 279279 최인선, 〈한국교인석도에 대한 고찰〉(《전남문화》 3, 전남대학교, 1985).닫기
또 반월형석도는 삼각형석도를 제외하고 모두 료동지방에서 출현한 어형이 주류이며 이것이 대동강류역과 송화강류역의 장주형석도의 조형이 되고 동북지방의 장방형·어형·즐형석도는 료동·료서로부터의 영향이 작용했고 중남한지방에서는 장주형에서 단주형, 삼각형으로 변화했다는 주장이 있다. 주 280280 안승모, 〈기국반월형석도의 연구〉(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85).닫기
우리나라 마제석족을 심·단·절·검신의 혈구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Ⅰ∼Ⅴ형식으로 분류한 글이 있고, 주 281281 금창호, 〈유병식석검 분류시론〉(《력사교육론집》 2, 1981).닫기 산청 묵곡리출토 석검과 석족을 소개하면서 기왕의 석검에 관한 제설을 검토하여 이 묵곡리 마제석검을 기원전 5세기 전후로 편년하고 마제석검과 석촉이 청동기문화가 서부경남지역에 파급되는 시기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282282 안춘배, 〈산청 묵곡리출토 마제석검에 대한 고찰〉(《고문화》 22, 1983).닫기
경남 각지출토(비발굴)의 마제석검 23개를 자료소개하고 일단병을 3형식(호가 검신추에 함께 있는 것, 검신에만 있는 것, 둘 다 없는 것), 이단병을 2형식(자루중앙 패어진 부분이 자루를 돌고 있는 것, 자루 좌우량쪽에만 있는 것)으로 구분, 그 년대를 각각 B.C. 4∼2세기, B.C. 6∼3세기 B.C. 6세기말, B.C. 5∼2세기, B.C. 3세기로 편년하였다. 주 283283 정성희, 〈경남지방출토 마제석검연구〉(《고고력사학지》) 1, 동아대박물관, 1985).닫기 동아시아 마제석검를 한반도계의 화남계로 나누고 한반도계를 북방계와 남방계로 구분하여 동아시아의 농경문화의 전파경로를 추구한 글이 있다. 주 284284 전영래, 〈동아시아 마제석검연구 서설〉(《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닫기 그 외 강원도지방출토의 마제석부를 소개한 글이 있다. 주 285285 노혁진, 〈강원지방의 마제석부〉(《한림대론문집》 2, 1984).닫기
이 기간 중 청동유물에 대한 연구로서는, 완주 여의리출토 다뉴경, 익산 평장리출토 세형동검·동모·동과, 그리고 전한경을 소개하면서, 전영래는 금강류역에서 출토된 청동유물들을 종합분석하여 금강류역문화권을 일본청동기문화의 원류를 규명하는 관건으로 보았고, 이 금강유역의 청동기는 위만의 준왕이 망명 남주하면서 함께 들어 온 기술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았으며, 아울러 한지역을 석권하면서 영산강·낙동강 및 북구주지방까지도 활발히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북지방이나 동북지방에 역수출하는 공급센타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했고, 주 286286 전영래, 〈금강류역 청동기문화망 신자료〉(《마한·백제문화》 10, 1987).닫기 그는 또 금강류역의 청동기유적·유물을 검토·분석하여 청동기문화단계를 4단계로 나누고 사서에 기록된 준왕의 남천류입을 금강구로 주장하면서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형식은 남한지방의 선행형식이고 대동·재녕강류역문화권과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특히 이 지역 내의 동·철산지를 들어 증명된다고 하고 있다. 주 287287 전영래, 〈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마한백제문화》 6, 1983).닫기 청동기시대의 세형동검시기의 유적·유물을 종합직으로 분석·검토하여 Ⅰ∼Ⅴ군으로 분류·구분하고 동검·동모를 세분하여 Ⅰ군은 BⅠ식세형동검, 조문경, 석관묘, 홍도, 마제석검으로 특징짓고 실년대를 B.C. 4세기 말 이전으로, Ⅱ군을 BⅡ식세형동검, 세문경, 석관묘, 흑도·점토대토기로 특징지어 B.C. 4세기 말 3세기 초 이후로, Ⅲ군을 토광묘, 옹관묘성행, BⅡ식·CⅠ식검, 세문경, 동모AⅡ식, 동검AⅠ·AⅡ식, 유견동부를 이 시기로 보고 B.C. 2세기 초를 상한으로 하고, Ⅳ군을 서북한의 경우 세문경소멸, CⅠ식검, 동과소멸, 철제무기 발달, 완전철기농공구가 생산하는 단계로, B.C. 100년 경을 상한으로 남한의 경우, BⅡ식검·세문경유속·토광묘시기로 보고, 마지막으로 Ⅴ군은 CⅡ식검, AⅢ식동모, 방제경 생산시기로 편년했다. 주 288288 리청규, 〈세형동검시기 유적·유물에 대한 고찰〉(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81).______, 〈세형동검의 형식분류 및 그 변천에 대하여〉(《한국고고학보》 13, 1982).닫기
경남지방 17개 유적의 모든 청동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유적을 4개 년대군으로 구분하고 실년대를 기원전 4세기전후에서 기원 1세기까지 편년하고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를 지적했다. 주 289289 정징원, 〈경남지방의 청동기유적과 유물〉(《한국고고학보》 12, 1982).닫기 대구 평리동출토의 청동일괄유물을 분석검토한 윤용진은 이들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1세기 전반으로 보고 특히 광봉과의 유존을 일본역수입으로 보는 견해를 발표했다. 주 290290 윤용진, 〈한국청동기문화연구〉(《한국고고학보》 10·11, 1981).닫기
전익산출토 원형유문청동기의 제작기법·문양구성·문양의 모티브(motive) 등에 초점을 두어 타동기와 비교·검토하여 한국청동기문화의 획기적 계보 등에 초점을 관찰하여 문화의 전통성을 고찰한 이건무는 이 청동기가 검파형동기, 방패형동기·동경 등의 이형청동기류와 맥을 같이 하는 청동의기의 하나임을 밝히고 원형청동기에 보이는 십자문양 등은 태양 의미의 샤마니즘으로 보았고, 그러한 이형동기의 특수한 단위문양들이 한반도 이외지역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한반도 내에서 복합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그 실년대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로 편년했다. 주 291291 리건무, 〈전익산출토 원형유문청동기(《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닫기
함평 초포리에서 청동일괄적물이 출토된 유적을 조사하여 이 무덤이 석관묘보다 목관묘일 가능성을 주장했고 년대를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전 2세기 전반으로 편년했다. 주 292292 리건무·서성훈, 《함평초포리유적》(1988).닫기
부여 구봉리에서 일괄출토된 청동유물을 조사분석하여 석관묘계통으로 보고 유물은 B.C. 3세기 후반∼2세기 초로 편년하고 있다. 주 293293 리강승, 〈부여 구봉리출토 청동기 일괄유물〉(《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Ⅰ, 1987).정재훈, 〈부여구봉리 청동기〉(《한국고고학보》 13, 1986).닫기 땜질된 청동기를 관찰하여 청동기수리을 위한 방편인 땜질에 대해 이 방법은 료녕식동검문화류입기부터 청동기가 제작된 금해기에 걸쳐 있었으며 청동기제작기술이 가장 뛰어난 시기에는 땜질이 거의 보이지 않고 땜질의 기법으로 일반적으로 톱니바퀴 형상, 반원형의 귀(이) 형상, 원두은장이음땜질 방법이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주 294294 리건무, 〈청동유물의 땜질기법〉(《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Ⅰ, 1987).닫기
이 밖에 청동유물의 소개와 아울러 각기의 고찰을 시도한 것으로, 삼천포 륵도출토의 세토동검·동모 등 일괄유물, 남해 소초도, 고성 초지리출토의 세형동검, 금해 례안리출토의 세형동검, 합천 림북리출토의 세형동검·전경북 영천출토의 세형동검·동모, 주 295295 침봉근, 〈동아대학교박물관소장 청동유물 신례〉(《고문화》 20, 1982).닫기 전대전 괴정동출토 동모·령과 등 일괄견물, 전금해 명법동출토 동모, 주 296296 지봉근, 〈본교박물관의 청동기 수례에 대하여〉(《고고력사학지》, 동아대학교박물관, 1987).닫기 충남대박물관 소장의 세형동검과 일광경, 주 297297 리강승, 〈한경과 반출한 세형동검의 일례(《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닫기 화순 대곡리석곽묘출토의 세문경·세형동검·동부·팔두령·쌍두령 등 일괄유물, 주 298298 조유전, 〈전남 화순 청동유물 일괄출토유적(위의 책, 1984).닫기 월성 죽동리출토의 세형동검·동모·동과·검파형두식·간두령 등 일괄유물이 있고, 주 299299 한병삼, 〈월성 죽동리출토 청동기 일괄유물〉(《삼불금원룡교수회갑기념론총》, 1987).닫기 청동용범자료소개가 있었다. 주 300300 림병태, 〈령암출토 청동용범에 대하여〉(위의 책, 1987).닫기 우리나라 세형동검은 비파형동검에서 파생되었다는 종래의 설을 반대하고 금강과 안성천 사이의 남한지역에서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고 원형을 소도에 근원을 둔 무구인 종물의례구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주장과 이들 청동무구는 초기농경 사회의 제주인 천군의 소속물로서 샤먼의 무구일 가능성을 말하고 솟대의 유형이 청동기시대에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301301 정명호, 〈세형동검과 검파형동기의 조형상의 의미해석〉(《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론총》, 1988).닫기 의기에 관한 글로서는, 청동의기의 용도와 문화성립배경·주민의 종교의식과 더불어 문헌기록과 관련하여 고찰한 글이 있다. 세형동검은 력사 속의 진국시대에 해당되고 청동의기는 진국이 준왕남분의 영향을 직접받아 먼저 제정이 분리된 지역의 것으로 동일문화권은 세형동검, 점토대토기·흑색토기장경호가 반출하는 금강류역에 해당하고 준왕계 이주민보다 먼저 연의 세력이 확대될 때 이루어져 류이민의 이주지역도 동일한 지역으로 보았다. 유이민에 의해 지금까지 제정일치사회가 새로운 정치적 통치자와 제사장으로 구별되어 제사장은 청동기적 요소가 강한 소도의 제정의식을 주관, 토착세력을 대변하게 되었다는 주장이고 이 청동의기와 방패형동기·검파형동기가 소도에 치장된 것으로 보았다. 주 302302 가재복, 〈한국 청동의기의 연구〉(숭전대학교석토학위론문, 1982)닫기
한반도 출토의 소위 이형동기를 종합적으로 검토분석하여 이들이 샤마니즘적인 요소를 가진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주장하고 이들이 한국식동검문화기에 출현하고 남부지역에서만 출토됨을 말했다. 이들 의기를 방패형·검파형·라팔형·견갑형·원형유문동기·동령류로 분류하고 동령류는 다시 팔주령·쌍두령·간두령·병부동령 등으로 세분했다. 그리고 이들이 출토되는 유적을 3개군으로 나누고 시기적으로 A→B→C군으로 서열을 잡았으며 각 군으로 대표되는 3기로의 구분 가능성을 말하고 Ⅰ기는 한국식동검문화의 성립기, Ⅱ기는 발전기, Ⅲ기는 쇠퇴기로 보았다. 그리고 실년대는 A군유적을 기원전 4세기 초∼기원전 4세기 말, B군유적을 기원전 3세기 초∼기원전 2세기 초, C군유적을 기원전 2세기 전반∼기원전 1세기 중엽으로 주장했다. 주 303303 리건무, 〈한국 청동의기의 연구〉(한양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7).닫기
한반도 청동기시대 동물의장의 자생설을 부정하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개발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한국청동기 의장의 특성을 의기의장과 동물의장의 계승으로 선주한 의기의장에 후래한 동물의장이 수용되며 이 동물의장은 유목권의 파토스를 상실하는 한편, 농경권의 토착민속과 연관된 주제선정을 삼고, 의기의장이 샤마니즘과 연관, 동물의장이 토테미즘과 관계되었다는 증거는 없음을 밝히고 한국미술의 북방계에서 중국계로의 방향전환을 주장했다. 주 304304 강무현, 〈한국 청동기의장의 연구〉(홍익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2).닫기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선사시대 수혈주거지를 총괄하여 종합적으로 분석·고찰한 것으로 건축학에 접근하고 있고, 수혈주거지를 평면적으로 원형·타원형·방형·장방형의 4형으로 분류하고 그 자체가 발전서렬임을 주장하고 립면에서는 수혈과 반수혈로 나누되 후대 깊이에 의해 구별하던 것을 처마 끝의 지표와의 분리 여하에 따라 즉 지표 위에 나타나는 벽체의 유무로서 수혈·반수혈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305305 림영진, 〈움집의 분류와 변천〉(《한국고고학보》 17·18, 1985).닫기
수원 려기산에서 발견된 무문토기와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주거지로서 무문토기주거지가 뚜렷이 구분되고 있음을 밝혔다. 무문토기주거지는 중부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장방형수혈주거지로서 주거지에서는 공렬토기·가락식토기·유경식석촉·무경석촉 등이 출토되고 볍씨자국있는 토기편도 수습되어 이 유적은 무문토기중기부터 벼농사가 성행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306306 림병태, 〈수원 서둔동 주거지 발굴조사보고〉(《한국고고학보》 9, 1982).닫기
보녕 교성리에서 무문토기시대주거지 9기를 발굴조사하여 주거지 내에서 토기를 제작할 때 사용한 흙덩이가 출토되었고, 주거양상과 출토유물을 검토하여 무문토기후기 즉 기원전 3세기 단계의 집터로 추정했다. 주 307307 국립부여박물관, 《보녕 교성리 집자리》(1987).닫기 말각사각형의 무문토기지를 발굴하여 공렬사선문토기·타제편평석부 등 출토유물을 분석하여 주변의 명일동, 가락동·오석리·흔암리 등지의 무문토기인들과 접촉하면서 같은 문화권의 생활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글이 있다. 주 308308 윤세영, 〈미사리 주거지〉(《사총》 25, 고려대학교사학회, 1981).닫기
흔암리에서 발굴조사된 주거지와 토기·석기 등 유물을 분석하여 12개의 탄소년대측정치간의 차이가 1,000년으로 나타나 그 차이가 심해 절대 연대로 설정할 수 없고 다만 유물에 따른 상대편년으로 중심년대를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보았으며, 또 집자리면적의 크기에서 이 시기에 이곳에는 단혼적인 소가족 또는 일부일처제적 소가족제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무문토기와 홍도의 바탕흙을 분석하여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주 309309 최몽룡, 〈여주 흔암리 선사취락지의 성격〉(《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1987).최몽룡·박양진, 〈흔암리 선사취락지〉(《정신문화연구》, 1984).______, 〈흔암리 토기의 과학적 분석〉(《고문화》 25, 1984).최몽룡 외 〈흔암리출토 토기류〉 Ⅰ(《변태섭박사회갑기념사학론총》, 1985).______ 외, 〈흔암리출토 토기류〉 Ⅱ(《고문화》 26, 1985).닫기
합천수몰지구 내의 저포지구내에서 발굴된 주거지 7기를 통해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실년대를 무문토기시대전기로 보았다. 주 310310 부산대학교, 《섬천 저포리 E지구유적》(1987).안재호 외, 〈섬천 저포리 E유적발굴개보〉(《령남고고학》 3, 1987).닫기 승주 대곡리에서 무문토기시대 주거지 27기를 발굴 조사하고 분석·검토하여 이들 문화적 기반이 한 제국의 성장과도 결부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주 311311 최몽룡, 〈대곡리 주거지〉(《문화재》 20, 1987).닫기 합천 봉계리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 11기와 함께 청동기주거지 2기가 조사되어 청동기주거지에서는 공렬토기·홍도·반월도·지석·석족 등이 출토되어 빠른 시기의 무문토기주거지로 보았다. 주 312312 침봉근, 〈섬천 봉계리 선사유적〉(《령남고고학》 5, 1988).닫기
대구 월성동에서 구멍무늬토기와 변형팽이토기, 마제석검, 숫돌 등이 출토된 주거지 2기가 조사되었고, 주 313313 리백규, 〈대구 월성동 선사주거지발굴조사〉(《령남고고학》 5, 1988).닫기 거창 대야리에서 청동기시대주거지 30여 기가 발굴조사되어 주거지 내에서 무문토기·홍도·마제석검·반월형석도·유구석부·환상석부·합인석부·지석 등이 출토되어 이를 종합하여 특징있는 유물들을 기왕의 출토된 유적과 비교하였으나 연대관을 정확히 피력하지 않았다. 주 314314 동의대학교박물관, 《대야리 주거지》 Ⅰ·Ⅱ(1988·1989). 림효택, 〈거창 대야리유적 발굴조사개보〉(《령남고고학》 5, 1988).닫기
양양 가평주거지발굴을 통해 주거지 내에서 무문토기와 금해식토기가 공반되고 있음을 밝히고 이 유적을 초기철기시대 주거지로 보았다. 주 315315 강릉대박물관, 《양양군 가평리 주거지 발굴조사보고》 Ⅰ(1984).닫기 파주 식현리의 주거지를 조사하여 방형집자리 1기와 출토석기를 검토하여 B.C. 6세기로 추정한 글이 있다. 주 316316 추연식, 〈파주 식현리 무문사기 주거지유적〉(《경남사학》 3, 1986).닫기 령암 장천리 주거지발굴에서 지석묘 4기와 주거지 10기가 조사되어 주거지에서는 수혈주거지와 고상가옥지를 확인하고 수혈을 원형내지 타원형으로서 로지나 출입시설이 없음을 밝히고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기군·토기군 등과 지석묘조사에서 나타나는 구조들을 분석하여 송국리유적연대를 기준으로 이곳의 지석묘를 B.C. 300∼200년으로 편년하고 이 주거지인들의 묘제를 지석묘로 보았다. 주 317317 최성락, 《령암 장천리 주거지》 Ⅰ·Ⅱ(1986).닫기
중도에서 무문토기주거지와 초기철기시대주거지가 발굴조사되어 무문토기시대주거지를 후기로서 기원전 4∼3세기로 보았다. 주 318318 국립중앙박물관, 《중도》 진전보고 Ⅰ―Ⅴ(I980∼1985).닫기 둔내에서 주거지가 발굴조사되어 주거지내에서 무문토기와 금해토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음을 들어 이 주거지의 년대를 초기철기시대인 A.D. 1∼2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주 319319 강원대박물관, 《둔내》(1984).닫기 청주 내곡동에서 조사된 주거지는 그 립지가 구릉의 정상에 위치하고 집터를 돌아가면서 깊은 호가 마련된 독특한 형태임을 밝혀내고 유구와 출토유물을 검토하여 이 주거지는 민무늬토기문화가 북쪽에서 한강유역으로 전파된 때인 기원전 8∼9세기 전후시기로 편년하고 있다. 주 320320 차용걸, 〈청주 내곡동유적 발굴조사보고〉(《중부고속도로문화유적발굴보고서》, 1986).닫기
부여 송국리에서 79년 이후 계속하여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굴되어 특히 우진각지붕형태의 불탄 서까래도 발견되어 당시 주거형태복원에 중요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대관은 1차 조사시와 변동이 없다. 주 321321 국립부여박물관, 《송국리》 Ⅱ·Ⅲ(1986〜1987).닫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집터의 구조와 지역적 특성, 그리고 복원을 시도한 윤기준은, 평면장방형이 84.1%의 주류를 이루고, 움깊이는 평균 53.0㎝로 나타나며, 화덕자리를 갖춘 집자리는 66%에 해당됨을 밝히고, 부여 송국리 55∼56호, 춘성 내평리주거지, 진양 대평리주거지, 송림 석탄리주거지, 강계 공귀리 5호 주거지, 서울 역삼동주거지 등등의 복원도를 제시하였다. 주 322322 윤기준, 〈우리나라 청동기집터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32, 1985).닫기
이밖에 청원 내수리에서 주거지와 산포지를 발굴하여 보고했고, 주 323323 조유전 외, 〈청원 내수리 무문토기 산포지 발굴조사보고〉(《문화재》 18, 1985).닫기 춘천 신매리에서 지석묘 5기와 주거지 2기가 발굴·보고되었다. 주 324324 한림대박물관, 《신매리 지석묘·주거지 발굴조사보고서》(1986).닫기
청주 향정·외북동의 주거지 1기, 주 325325 윤무병, 〈청주 향정·외북동유적 발굴조사보고〉(《중부고속소로문화유적조사보고서》, 1986).닫기 서산 대로리에서 청동기시대 고지성 움집발견, 주 326326 한영희, 〈서산 대로리 움집터유적〉(《중도》―진전보고 Ⅴ, 1984).닫기 의창 신촌리에서 파괴주거지 2기가 발굴조사되고, 주 327327 최종규·안재호, 〈신촌리 분묘군〉(《중도)〉―진전보고 Ⅳ-부록 2, 1983).닫기 제원 계산리 B지구 주거지 3기, 주 328328 황용훈, 《충주댐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종합보고》(1984).닫기 제원 양평리 B지구 주거지 1기, 주 329329 최몽룡·임영진, 앞의 책.닫기 제원 광의리 A지구 주거지 2기 및 지석묘, 주 330330 황용훈, 앞의 책.닫기 제원 명오리 B지구 무문토기시대 도구제작장소, 주 331331 최무장, 앞의 책.닫기 제원 하천리 D지구 주거지 3기, 주 332332 김병모 등, 앞의 책.닫기 중원 지동리 A지구 주거지 2기가 주 333333 황용훈, 앞의 책.닫기 발굴조사되어 보고되었다.
이 기간중 청동기시대 조각 등 예술에 관한 연구를 보면 금양옥이 물상문양과 기하학적 문양을 분석하여 유물에 나타나는 새는 농경과 연관을 가지며 새신앙을 가진 종족의 생활이 농업을 위주로 한다는 점과 한반도 신석기인인 고아시아족의 신앙형태가 곰신앙이라면 알타이족의 신앙형태는 새신앙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와 함께 청동기유물에 그려진 기하문인 번개문양, 삼각형거치문, 와문 등은 원시미술에서 모두 비나 생산과 연결되므로 역시 농경문화를 가진 종족의 신앙특성을 나타내며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사슴과 새신앙은 시베리아의 북방민족과 연결됨을 알 수 있고 특히 Baikal 호와 북몽고지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 334334 금양옥, 〈한반도 청동기시대 문양의 연구〉(《한국고고학보》 10·11, 1981).닫기
울주 천전리의 암벽조각을 제작한 민족은 신석기시대내지 그 후손 또는 청동기시대초기인들일 가능성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확신하는 주장과 또 대곡리암벽조각은 상대편년으로 신석기말기에서 청동기시대후기 이후로 년대를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이 견적들을 4차에 걸쳐 면밀히 조사하여 분석한 결과이다. 주 335335 황수영·문명대, 《반귀대 암벽조각》(동국대학교, 1985).닫기 여기에 대해 평면그림과 선그림을 분석하여 평면그림에는 물짐승과 뭍짐승이 거의 같은 비율로, 선그림은 물짐승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평면그림에 비하여 선그림이 사납고 큰 짐승을 표현했고 선그림이 평면그림보다 후에 그려진 것으로 평면그림집단은 고대숭배신앙의 결과로서, 이들 평면그림은 신석기시대 후기에 앞서 그려졌고, 선그림은 신석기시대후기로 편년하고 있다. 주 336336 정동찬, 〈울주 대곡리 선사바위그림〉(《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론총》, 1988).______, 〈우리나라 선사바위그림 연구〉(연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7).닫기
동북아시아의 선사시대 암각화만을 다루면서 우리나라 선사시대 암각화의 분포·류형·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몽고초원지대와 만주·연해주에 걸쳐 분포해 있던 고아시아족의 신석기문화에서는 암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청동기시대에 와 조각되면서, 청동기시대후기에 와서는 수렵·어로·목축의 광경이 암각화에 나타나 이 유형의 암각화는 타이가지역, 몽고지역, 아무르―우수리지역, 내몽고, 한반도, 중국의 일부지역을 막론하고 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것은 동북아시아지역 유목민과 연관되는 청동기문화가 후기에 와서는 동북아시아 전지역에서 공통적 동질문화현상으로 정착된 것을 말해 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암각화는 아무르―우수리강 유역의 암각화와는 구분되는 타이가지역과 몽고지역 암각화와 연관되는 유형의 암각기법임을 밝혔다. 주 337337 황용훈, 《동북아시아의 암각화))(민음사, 1987).닫기 그리고 바위그림이 안동 수곡동에서 발견되어 소개하면서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그림의 내용으로 보아 제천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장대는 꽂았던 흔적이 솟대사상과의 관련을 주장하고 있다. 주 338338 임세권, 〈안동군 임동면 한들마을의 바위그림〉(《령남고고학》 5, 1988).닫기
울주 천전리암각화를 검토하고 이 암각화를 신석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주 339339 박영희, 〈울주 천전리 암각화의 제작시기에 대하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닫기 울주 대곡리의 암각화를 분석하여 이들 암각화가 청동기시대 보다 앞선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주장한 글도 있다. 주 340340 이기길, 〈울주 대곡리 바위새긴 그림〉(《서울시립대학휘보》 제1호, 1986).닫기
고고학적·민족학적 입장에서 바위구멍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면서, 바위구멍이 생산과 풍요를 빌며 아들을 바라는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한편 현존하는 바위구멍들이 고인돌 축조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의 어린이들의 놀이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편년설정이나 의미해석 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 341341 이필영·한창균, 〈바위구멍해석에 관한 시론〉(《사학지》 21, 1987).닫기
이밖에 선사시대의 미술로서 암벽조각, 토기와 석기, 금속공예, 건축을 다룬 글도 있다. 주 342342 대한민국예술원, 〈한국예사〉Ⅱ (《한국미술사》, 1984).342) 금원룡, 〈한국 선사시대의 신상에 대해서〉(《력사학보》 94·95, 1982).닫기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석골·토제인상을 퉁구스족의 조신목상처럼 샤마니즘에 입각한 조상신·생산신·수호신으로 보고 그 전통이 고구려의 목추, 고려시대의 부여신, 고등신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한 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농경구를 검토·분석하여 청동기시대는 따비농사로 쌀을 비롯 오곡을 생산했고 실연대는 B.C. 1300∼300년으로 편년했다. 주 343343 길경택, 〈한국선사시대의 농경과 농구의 발달에 관한 연구〉(《고문화》 27, 1975).닫기
충북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29기의 선돌을 조사하여 선돌의 성격을 기념비적 존재에서 고인돌과 분리되어 남녀를 뜻하는 쌍석으로 되고 마지막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변했다고 주장하고 구별을 외형상으로 나타난 특징을 따라 남·녀로 구분을 시도했고 위치상으로 보아 강물에 연한 것을 농업족으로서의 풍수사상을 반영한다고 관찰하였다. 주 344344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에서의 선돌의 성격〉(《동방학지》 46·48, 1985).닫기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큰돌문화는 기원을 농업생활로의 전환이 되는 신석기로 보아야 하는데 동의하고 청동기시대의 발생 소멸이 거석문화와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원시국가 이전의 년장자나 현자가 지배하는 족장사회(chiefdom)로 볼 때 노동력과 의식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믿음을 제공하기 위해 선돌 등의 숭배사상물을 축조했을 가능성을 진단하고 이 선돌이 역사시대로 들어서면서 전환과정에 솟대·장승·돌탑·미륵 등으로 파생되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주 345345 한규량, 〈한국 선돌의 기능변화에 대한 연구〉(《백산학보》 28, 1984).닫기
세형동검문화단계의 량대 문화중심지인 고조선 사회와 진국사회의 경제적토대를 살펴보면서, 농업생산력의 증대현상을 추출하고 무역의 전개가능성을 타진하여, 서북지방은 목제경기구의 점진적 개발을 통해 휴경기간을 단축시키고 더욱 토지의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전체적인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나가고, 서남부지방은 기후와 토양적 특성을 살려 벼농사재배를 확대시켜 나갔음을 밝혔으며, 한편 자원의 불균등한 분포가 교역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피력한 논문이 있다. 주 346346 리현혜,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종합적 화경〉(《한국사연구》 56, 1987).닫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묘제와 부장품을 검토하여 고인돌·돌널무덤·비파형동검단계를 청동기전기로 보고 계급형성의 초기단계이고 경제적으로 자급자족단계로 보았고 널무덤·변형돌무덤·독무덤단계를 후기로 보아 이 시기를 군장사회로 보았다. 주 347347 리남석, 〈청동기시대 한반도 사회발전단계문제〉(《백제문화》 16, 1985).닫기 선사시대 방추차를 검토하여 청동기시대에 와서 원반형으로 정착되고 방추차가 부장된 지석묘는 녀자묘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주 348348 최태촌, 〈한반도출토 방추차에 관한 연구〉1(《정신문화연구》, 여름호, 1985).닫기
선사곡옥에 대해 이들은 무문토기류와 마제석기 특히 청동기무기류 등과 공반하여 석관묘에서 많이 출토됨을 밝혀내고 한강 이남지역에 동검·동경과 일괄 세트로서 출토되는 례는 주술적 의기를 소유한 권력자로서 특정집단의 소산으로 추정하고 선사곡옥의 연대는 대체로 B.C. 500∼B.C. 300∼200까지 쓰였다고 주장했다. 주 349349 리인숙, 〈한국 선사곡옥에 관한 소고〉(《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집》 1, 1987).닫기 우리나라 도작연구사의 회고부터 시작한 우리나라 도작기원에 관해 총정리한 것으로 화남에서 건너왔다는 설은 장립형미의 불재화남특유의 승문·인문회도의 불재 등으로 부정적이고, 일본의 주방정량의 “조(속)만을 재배하던 한국무문토기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야생도를 발견하고 도작을 시작했다”는 일본도자생설은 농경기술상, 고고학적 맥락상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화남지방에서 시작된 장립형벼(indica)가 화중·화북지방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단립형(japonica)으로 개량되고 그것이 마제석기·홍도·공렬토기를 공반하는 한국무문토기문화권에 늦어도 B.C. 7세기 이전에 전래하였고, 그것이 다시 지석묘와 함께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결론했다. 그래서 벼가 화중이북지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고, 거기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북방설을 다시 한번 주장했다. 주 350350 침봉근, 〈한국도작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부산사학》 6, 1982).닫기 또 일본의 미생문화는 우리나라 도작농경을 행하여 미를 주식으로 하고 무문토기 및 마제석기를 일반생활용구로 하여 지석묘 묘제를 사용하던 우리나라 남부의 일부인들이 대마도를 징검다리로 하고 일본 구주에 이주하여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발표했다. 주 351351 침봉근, 〈미생문화를 토대로 통하여 본 한·일문화의 교류관계〉(《한국사론》 16, 국사편찬위원회, 1986).닫기
경기도 강화군 우도에서 신석기 토기 겉면과 조각사이에 끼어진 볍씨자국과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뜰에서 채집된 민토기 밑바닥의 볍씨자국이 새로이 발견되어 이들의 분석결과 인도형임이 밝혀지게 되어 우리나라 벼농사가 신석기후기에 이미 인도형이 들어와 있었음을 지적하고, 지금까지 신석기후기부터 청동기시대에 재배된 볍씨의 종은 일본형만 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주 352352 손보기, 〈우리나라 벼농사의 새로운 사실〉(《동방학지》 54·55·56, 1987).닫기
기타 청동기시대의 유물자료를 소개한 것으로, 대구 반야월지구 지상유물채집을 통해 이 일대가 지석묘축조시기부터 삼국시대초기까지 정착했음을 증명하는 유적들로 보았다. 주 353353 윤용진, 〈대구 반야월지구유적조사〉(《령남고고학》 2, 1986).닫기
진양 대평리출토의 가지무늬토기·붉은 간토기·돌촉·돌검, 진양 덕오리출토의 돌검을 소개하고 분석하여 이 시기를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1세기 경까지로 보았다. 주 354354 한영희, 〈국립진주박물관신수품(1984〜85) 소개〉(《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1987).닫기 대구 월성동채집의 토기류·석기류, 주 355355 윤용진, 〈대구시 월성동 선사유적〉(《령남고고학》 1, 1986).닫기 보성 죽산리 지석묘 및 추정주거지출토 유물, 주 356356 이영문, 〈보성 죽산리유적의 성격〉(《박물관기요》, 단국대학교, 1988).닫기 전라지방, 주 357357 이영문, 〈전남지방 지석묘출토 유물〉(《제12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88).닫기 신안 압해도, 주 358358 ______, 〈신안 압해도의 선사문화〉(《향토문화》 7, 1982).닫기 청동기시대 유물을 소개하고 간단히 고찰한 글로 밀양 남전리 개석식지석묘에서 출토된 단도마연토기·마제석검, 의창 평성리유적출토 유물, 주 359359 침봉근, 〈밀양 남전리와 의창 평성리유적출토 유물〉(《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닫기 중도 출토의 무문토기, 주 360360 강원대박물관, 《중도발굴보고서》(1982).최복규 외, 〈중도에서 발견된 선사유물의 연구〉(《강원대인문학연구》 17, 1982).닫기 장흥 중산리출토 무문토기, 주 361361 최몽룡·이영문, 〈장흥 중산리 무문토기유적〉(《고고미술》 153, 1982).닫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 주 362362 백홍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금해식토기〉(《강원대박물관, 1984).닫기 제주도 광령리출토 석기, 주 363363 리청규, 〈광령리출토 석기와 금해식토기〉(《제주도연구》 1, 1984).닫기 제주도출토 석기, 주 364364 이청규, 〈제주도 일괄출토 석기의 한 례〉(《제주사학》 2, 1986).닫기 대구 월성동 무문토기류, 주 365365 윤용진, 〈대구시 월성동 선사유적〉(《령남고고학》 1, 1986).닫기 이 밖에 동래출토 무문토기, 주 366366 신경철, 〈동래 온천동출토 무문토기〉(《가야통신》 10, 1984).닫기 양산출토 무문토기 주 367367 안재호, 〈량산의 순지리 신평유적출토 무문토기〉(《가야통신》 10, 1984).닫기 등이 있다.
주 177
: 금정배, 〈청동기문화〉(《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1, 1987).
주 178
: 정경희, 〈단군사회와 청동기문화〉(《한국학보》 23, 1981).
주 179
: 금정학, 〈고고학상으로 본 강역〉(《정신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여름).
주 180
: 금정학, 〈고고학상으로 본 고조선〉(《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보고론총 87-1, 1987).
주 181
: 강인구, 〈중국 동북지방의 고분〉(《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보고론총 87-1, 1987).
주 182
: 한병삼,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국보》, 1983).
주 183
: 로혁진, 〈청동기문화〉(《강원도의 선사문화》, 1986).
주 184
: 윤무병, 《한국청동기문화연구》(1987).
주 185
: 침봉근, 《한국청동기문화의 리해》(동아대학교출판부, 1990).
주 186
: 금병모, 〈한국거석문화 원류에 관한 연구〉(《한국고고학보》 10·11, 1981).
주 187
: 침봉근, 〈한·일지석묘의 관계〉(《한국고고학보》 10·11, 1981).
주 188
: 지건길,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형식학적 고찰〉(《한국고고학보》 12, 1982).
주 189
: 지건길, 〈지석묘사회의 부원에 관한 일고찰〉(《리화사학연구》 13·14, 1983).
주 190
: 지건길, 〈거석문화의 동과 서〉(《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Ⅰ, 일지사, 1987).
주 191
: 박희현, 〈한국고인돌문화에 대한 고찰〉(《한국사연구》 46, 1983).
주 192
: 오상탁, 〈한국지석묘에 대한 일고찰〉(령남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6).
주 193
: 리향구, 〈발해연안지구 료동반도의 고인돌무덤연구〉(《정신문화연구》 32, 1987).
주 194
: 금정희,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연구〉(《숭실사학》 8, 1988).
주 195
: 최몽룡, 〈전남지방지석묘사회와 계급발생〉(《한국사연구》 35, 1981).
주 196
: 위와 같음.
주 197
: 최몽룡, 〈전남지방 지석묘사회 편년〉(《진단학보》 54·55, 1982).
주 198
: 리영문, 〈전남지방 지석묘의 특성〉(《한국고고학보》 20, 1987).______, 〈전남지방 마한소국 비정지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향토문화》 10, 1989).
주 199
: 우장문, 〈제원 황석리 고인돌문화의 고찰〉(《백산학보》 34, 1987).______, 〈한반도 고인돌문화에 대한 고찰〉(고려대석사학위논문, 1986).이융조, 〈황석리 고인돌문화의 묻기 방법에 관한 고찰〉(《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기요》, 1988).
주 200
: 하문식, 〈금강과 남한강유역의 고인돌문화의 비교연구〉(《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론총》, 1988).
주 201
: 금약수, 〈금호강류역의 지석묘연구〉(령남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4).
주 202
: 로혁진·최은주, 〈중도지석묘발굴보고〉(《중도발굴조사보고서》, 1982).
주 203
: 백홍기, 〈강원도 동해안지방의 지석묘〉(《고고미술》 156, 1982).
주 204
: 전남대박물관, 《동복댐수몰지구지석묘발굴조사보고서》(1982).
주 205
: 충청북도, 《’82충주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1982).
주 206
: 위와 같음.
주 207
: 광주박물관, 《강진 영복리지석묘발굴조사보고서》(1983).
주 208
: 리영문, 〈신안 압해도 선사문화〉(《향토문화》 7, 1982).
주 209
: 금정학, 〈금해 내동 지석묘조사개보〉(《부산당감동고분군》, 1983).
주 210
: 전영래, 〈무주 사천리 지석묘조사〉(《전북유적조사보고》 14, 전주시립박물관, 1983).
주 211
: 전주시립박물관, 《고창·아산지구 지석묘발굴보고서》(1984).
주 212
: 광주박물관, 《고흥 장천제 지석묘조사》(1984).
주 213
: 목포대박물관, 《령암 청룡리·장천리지석묘군》(1984).최성락, 〈령암 청룡리·장천리 지석묘발굴조사개보〉(《한국고고학년보》 12, 1985).
주 214
: 이청규, 〈제주도 지석묘연구〉(《탐라문화》 4, 1984).
주 215
: 한양대박물관, 《광명시 철산동 지석묘》(1975).
주 216
: 리형구, 〈한강유역 서울 원지동 지석묘연구〉(《한국사학》 8, 1986).
주 217
: 한림대박물관, 《신매리 지석묘·주거지발굴보고서》(1986).
주 218
: 전남대박물관, 《주암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1)》 Ⅱ(1987, 1988).
주 219
: 조유전, 〈남강류역의 선사문화연구(1)〉(《한국고고학보》 20, 1987).
주 220
: 리남석, 〈충남 서해안 고인돌 2례〉(《백제문화》 17, 1987).
주 221
: 리영문, 〈보성 죽산리유적의 특성〉(《단국대학교박물관기요》 4, 1988).
주 222
: 리영문, 〈승주 구산리유적과 출토유물〉(《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 1988).
주 223
: 림효택, 〈거창 대야·무릉·월평리 섬천 역평리 지석묘발굴조사개보〉(《령남고고학》 3, 1987).______, 《거창·섬천 큰돌무덤》(동의대학교학술총서 1, 1987).
주 224
: 임효재·하문식·조상기, 〈시흥 삼리지석묘발굴조사개보〉(《판교―구리, 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1988).
주 225
: 최몽룡, 〈임자도의 선사문화〉(《고문화》 20, 1982).
주 226
: 리영문, 〈전남지방 마한소국 비정지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향토문화》 8, 1989).
주 227
: 로혁진, 〈적석부가지석묘의 형식과 분포〉(《한림대학론문집》, 1987).
주 228
: 서성훈 외 《고흥·장수 지석묘조사》(광주박물관학술총서 6, 1984).이융조 외, 〈우산리 곡천고인돌〉(《주암댐 수몰지역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Ⅱ, 1988).이융조 외, 〈한국고인돌의 다른유형에 관한 연구〉(《동방학지》, 1988).
주 229
: 박희현, 〈한국고인돌문화에 대한 일고찰〉(《한국사연구》 46, 1984).
주 230
: 하문식, 〈우리나라 고인돌문화의 연구〉(연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5).
주 231
: 이융조·우종윤, 〈황석리 고인돌문화의 묻기방법에 관한 고찰〉(《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기요》, 1988).
주 232
: 동의대학교박물관, 《거창·섬천 큰돌무덤》(1987).
주 233
: 국립중앙박물관, 《중도》―진전보고 Ⅴ-(1984).
주 234
: 최성락, 《령암 장천리주거지》Ⅱ (목포대학박물관학술총서 7, 1987).
주 235
: 이융조 외, 〈중원지방에서 새로이 찾은 고인돌유적〉, Ⅰ (《호서문화연구》 7, 1988).
주 236
: 윤용진, 〈안동수몰지구발굴개보〉(《령남고고학》 4, 1987).
주 237
: 리영문, 〈승주 구산리유적과 출토유물〉(《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
주 238
: 최성락, 《조도의 유적·유물》(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소, 1984).
주 239
: 리청규, 〈제주도 지석묘에 대항 연구〉(《탐라문화》 4, 1984).
주 240
: 국립 중앙박물관, 《신암리》 Ⅰ (1988).
주 241
: 국립중앙박물관, 《신암리》Ⅱ (1989)
주 242
: 조유전, 〈남강유역의 선사문화〉 Ⅰ(《한국고고학보》 20, 1987).
주 243
: 금학휘, 〈고창군 성송면일대 선사유적조사보고〉(《향토문화유적조사》 3, 1983).
주 244
: 백홍기, 〈강원도 동해안지방의 지석묘〉(《고고미술》 156, 1982).
주 245
: 황용훈, 《충주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종합보고》(1984).
주 246
: 최몽룡 외, 위의 책.
주 247
: 이융조 외, 위의 책.
주 248
: 박희현 외, 위의 책.
주 249
: 이융조 외, 위의 책.
주 250
: 리동복 외, 위의 책.
주 251
: 김병모 외, 위의 책.
주 252
: 김병모 외, 위의 책.
주 253
: 최몽룡 외, 위의 책.
주 254
: 황용훈, 위의 책.
주 255
: 손병헌, 〈한국선사시대의 무덤〉(《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Ⅰ, 1987).
주 256
: 최종규·안재호, 《신촌리 분묘군》(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제15책).______, 《중도》―진전보고 Ⅳ―(부록 2)(1983).
주 257
: 윤무병, 〈공천군 탄천면 남산리 선사시대분묘군〉(《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
주 258
: 금영하, 〈송국리 석관묘년대고〉(《력사교육론집》 2, 경북대학교, 1981).
주 259
: 단국대학교박물관, 《소곡리 신월의 청동기시대의 무덤》(1988).
주 260
: 한영조, 〈각형토기고〉(《한국고고학보》 14·15, 1982).
주 261
: 리백규, 〈흔암리출토유물에 대해서〉(《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
주 262
: 리백규, 〈한강류역 전반기 민무늬토기의 편년에 대하여〉(《령남고고학》 2, 1986).
주 263
: 최성락, 〈전남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성격〉(《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1987).
주 264
: 임세권, 〈평창강유역의 무문토기문화〉(《령남고고학》 1, 1986).
주 265
: 림병태, 〈한국 무문토기의 연구〉(《한국사학》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주 266
: 리청규, 〈남한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전개와 공렬토기문화의 위치〉(《한국상고사학보》 1, 1988).
주 267
: 리청규, 〈청주도 상모리 무문토기에 대한 일고찰〉(《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제주도·제주대학교박물관, 《상모리유적》(1990).
주 268
: 최무장, 〈한강류역의 무문토기〉(《한국고고학보》 14·15, 1983)
주 269
: 정징원·신경철, 〈종말기 무문토기에 관한 연구〉(《한국고고학보》 20, 1987).
주 270
: 리건무, 〈채문토기고〉(《령남고고학》 2, 1986).
주 271
: 최몽룡·윤동석 외, 〈충북 제원 양평리·도화리출토 홍도 및 철제품의 과학적 분석〉(《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최몽룡·박양진, 〈여주 흔암리토기의 과학적 분석〉(《고문화》 25, 1984)
주 272
: 이융조·신숙정, 〈제원 황석리유적층토의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의 고찰〉(《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
주 273
: 한상인, 〈점토대토기 문화성격의 일고찰〉(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81).
주 274
: 임세권, 〈낙동강상류지역의 무문토기연구〉(《사학연구》 34, 1982).
주 275
: 송호정, 〈고조선의 위치와 족속문제에 관한 고찰〉(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90).
주 276
: 로혁진, 〈유구석부에 대한 일고찰〉(《력사학보》 89, 1981)
주 277
: 최성락, 〈한국마제석족의 고찰〉(《한고고학보》 12, 1982).
주 278
: 금상면, 〈삼각형석도의 일연구〉(령남대석사학위론문, 1985).
주 279
: 최인선, 〈한국교인석도에 대한 고찰〉(《전남문화》 3, 전남대학교, 1985).
주 280
: 안승모, 〈기국반월형석도의 연구〉(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85).
주 281
: 금창호, 〈유병식석검 분류시론〉(《력사교육론집》 2, 1981).
주 282
: 안춘배, 〈산청 묵곡리출토 마제석검에 대한 고찰〉(《고문화》 22, 1983).
주 283
: 정성희, 〈경남지방출토 마제석검연구〉(《고고력사학지》) 1, 동아대박물관, 1985).
주 284
: 전영래, 〈동아시아 마제석검연구 서설〉(《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1987).
주 285
: 노혁진, 〈강원지방의 마제석부〉(《한림대론문집》 2, 1984).
주 286
: 전영래, 〈금강류역 청동기문화망 신자료〉(《마한·백제문화》 10, 1987).
주 287
: 전영래, 〈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마한백제문화》 6, 1983).
주 288
: 리청규, 〈세형동검시기 유적·유물에 대한 고찰〉(서울대석사학위론문, 1981).______, 〈세형동검의 형식분류 및 그 변천에 대하여〉(《한국고고학보》 13, 1982).
주 289
: 정징원, 〈경남지방의 청동기유적과 유물〉(《한국고고학보》 12, 1982).
주 290
: 윤용진, 〈한국청동기문화연구〉(《한국고고학보》 10·11, 1981).
주 291
: 리건무, 〈전익산출토 원형유문청동기(《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
주 292
: 리건무·서성훈, 《함평초포리유적》(1988).
주 293
: 리강승, 〈부여 구봉리출토 청동기 일괄유물〉(《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총》 Ⅰ, 1987).정재훈, 〈부여구봉리 청동기〉(《한국고고학보》 13, 1986).
주 294
: 리건무, 〈청동유물의 땜질기법〉(《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Ⅰ, 1987).
주 295
: 침봉근, 〈동아대학교박물관소장 청동유물 신례〉(《고문화》 20, 1982).
주 296
: 지봉근, 〈본교박물관의 청동기 수례에 대하여〉(《고고력사학지》, 동아대학교박물관, 1987).
주 297
: 리강승, 〈한경과 반출한 세형동검의 일례(《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
주 298
: 조유전, 〈전남 화순 청동유물 일괄출토유적(위의 책, 1984).
주 299
: 한병삼, 〈월성 죽동리출토 청동기 일괄유물〉(《삼불금원룡교수회갑기념론총》, 1987).
주 300
: 림병태, 〈령암출토 청동용범에 대하여〉(위의 책, 1987).
주 301
: 정명호, 〈세형동검과 검파형동기의 조형상의 의미해석〉(《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론총》, 1988).
주 302
: 가재복, 〈한국 청동의기의 연구〉(숭전대학교석토학위론문, 1982)
주 303
: 리건무, 〈한국 청동의기의 연구〉(한양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7).
주 304
: 강무현, 〈한국 청동기의장의 연구〉(홍익대학교석사학위론문, 1982).
주 305
: 림영진, 〈움집의 분류와 변천〉(《한국고고학보》 17·18, 1985).
주 306
: 림병태, 〈수원 서둔동 주거지 발굴조사보고〉(《한국고고학보》 9, 1982).
주 307
: 국립부여박물관, 《보녕 교성리 집자리》(1987).
주 308
: 윤세영, 〈미사리 주거지〉(《사총》 25, 고려대학교사학회, 1981).
주 309
: 최몽룡, 〈여주 흔암리 선사취락지의 성격〉(《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1987).최몽룡·박양진, 〈흔암리 선사취락지〉(《정신문화연구》, 1984).______, 〈흔암리 토기의 과학적 분석〉(《고문화》 25, 1984).최몽룡 외 〈흔암리출토 토기류〉 Ⅰ(《변태섭박사회갑기념사학론총》, 1985).______ 외, 〈흔암리출토 토기류〉 Ⅱ(《고문화》 26, 1985).
주 310
: 부산대학교, 《섬천 저포리 E지구유적》(1987).안재호 외, 〈섬천 저포리 E유적발굴개보〉(《령남고고학》 3, 1987).
주 311
: 최몽룡, 〈대곡리 주거지〉(《문화재》 20, 1987).
주 312
: 침봉근, 〈섬천 봉계리 선사유적〉(《령남고고학》 5, 1988).
주 313
: 리백규, 〈대구 월성동 선사주거지발굴조사〉(《령남고고학》 5, 1988).
주 314
: 동의대학교박물관, 《대야리 주거지》 Ⅰ·Ⅱ(1988·1989). 림효택, 〈거창 대야리유적 발굴조사개보〉(《령남고고학》 5, 1988).
주 315
: 강릉대박물관, 《양양군 가평리 주거지 발굴조사보고》 Ⅰ(1984).
주 316
: 추연식, 〈파주 식현리 무문사기 주거지유적〉(《경남사학》 3, 1986).
주 317
: 최성락, 《령암 장천리 주거지》 Ⅰ·Ⅱ(1986).
주 318
: 국립중앙박물관, 《중도》 진전보고 Ⅰ―Ⅴ(I980∼1985).
주 319
: 강원대박물관, 《둔내》(1984).
주 320
: 차용걸, 〈청주 내곡동유적 발굴조사보고〉(《중부고속도로문화유적발굴보고서》, 1986).
주 321
: 국립부여박물관, 《송국리》 Ⅱ·Ⅲ(1986〜1987).
주 322
: 윤기준, 〈우리나라 청동기집터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32, 1985).
주 323
: 조유전 외, 〈청원 내수리 무문토기 산포지 발굴조사보고〉(《문화재》 18, 1985).
주 324
: 한림대박물관, 《신매리 지석묘·주거지 발굴조사보고서》(1986).
주 325
: 윤무병, 〈청주 향정·외북동유적 발굴조사보고〉(《중부고속소로문화유적조사보고서》, 1986).
주 326
: 한영희, 〈서산 대로리 움집터유적〉(《중도》―진전보고 Ⅴ, 1984).
주 327
: 최종규·안재호, 〈신촌리 분묘군〉(《중도)〉―진전보고 Ⅳ-부록 2, 1983).
주 328
: 황용훈, 《충주댐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종합보고》(1984).
주 329
: 최몽룡·임영진, 앞의 책.
주 330
: 황용훈, 앞의 책.
주 331
: 최무장, 앞의 책.
주 332
: 김병모 등, 앞의 책.
주 333
: 황용훈, 앞의 책.
주 334
: 금양옥, 〈한반도 청동기시대 문양의 연구〉(《한국고고학보》 10·11, 1981).
주 335
: 황수영·문명대, 《반귀대 암벽조각》(동국대학교, 1985).
주 336
: 정동찬, 〈울주 대곡리 선사바위그림〉(《손보기박사정년기념고고인류학론총》, 1988).______, 〈우리나라 선사바위그림 연구〉(연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7).
주 337
: 황용훈, 《동북아시아의 암각화))(민음사, 1987).
주 338
: 임세권, 〈안동군 임동면 한들마을의 바위그림〉(《령남고고학》 5, 1988).
주 339
: 박영희, 〈울주 천전리 암각화의 제작시기에 대하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4).
주 340
: 이기길, 〈울주 대곡리 바위새긴 그림〉(《서울시립대학휘보》 제1호, 1986).
주 341
: 이필영·한창균, 〈바위구멍해석에 관한 시론〉(《사학지》 21, 1987).
주 342
: 대한민국예술원, 〈한국예사〉Ⅱ (《한국미술사》, 1984).342) 금원룡, 〈한국 선사시대의 신상에 대해서〉(《력사학보》 94·95, 1982).
주 343
: 길경택, 〈한국선사시대의 농경과 농구의 발달에 관한 연구〉(《고문화》 27, 1975).
주 344
: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에서의 선돌의 성격〉(《동방학지》 46·48, 1985).
주 345
: 한규량, 〈한국 선돌의 기능변화에 대한 연구〉(《백산학보》 28, 1984).
주 346
: 리현혜,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종합적 화경〉(《한국사연구》 56, 1987).
주 347
: 리남석, 〈청동기시대 한반도 사회발전단계문제〉(《백제문화》 16, 1985).
주 348
: 최태촌, 〈한반도출토 방추차에 관한 연구〉1(《정신문화연구》, 여름호, 1985).
주 349
: 리인숙, 〈한국 선사곡옥에 관한 소고〉(《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론집》 1, 1987).
주 350
: 침봉근, 〈한국도작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부산사학》 6, 1982).
주 351
: 침봉근, 〈미생문화를 토대로 통하여 본 한·일문화의 교류관계〉(《한국사론》 16, 국사편찬위원회, 1986).
주 352
: 손보기, 〈우리나라 벼농사의 새로운 사실〉(《동방학지》 54·55·56, 1987).
주 353
: 윤용진, 〈대구 반야월지구유적조사〉(《령남고고학》 2, 1986).
주 354
: 한영희, 〈국립진주박물관신수품(1984〜85) 소개〉(《삼불금원룡교수정년퇴임론총》, 1987).
주 355
: 윤용진, 〈대구시 월성동 선사유적〉(《령남고고학》 1, 1986).
주 356
: 이영문, 〈보성 죽산리유적의 성격〉(《박물관기요》, 단국대학교, 1988).
주 357
: 이영문, 〈전남지방 지석묘출토 유물〉(《제12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88).
주 358
: ______, 〈신안 압해도의 선사문화〉(《향토문화》 7, 1982).
주 359
: 침봉근, 〈밀양 남전리와 의창 평성리유적출토 유물〉(《윤무병박사회갑기념론총》, 1984).
주 360
: 강원대박물관, 《중도발굴보고서》(1982).최복규 외, 〈중도에서 발견된 선사유물의 연구〉(《강원대인문학연구》 17, 1982).
주 361
: 최몽룡·이영문, 〈장흥 중산리 무문토기유적〉(《고고미술》 153, 1982).
주 362
: 백홍기, 《강릉 초당동출토 무문토기·금해식토기〉(《강원대박물관, 1984).
주 363
: 리청규, 〈광령리출토 석기와 금해식토기〉(《제주도연구》 1, 1984).
주 364
: 이청규, 〈제주도 일괄출토 석기의 한 례〉(《제주사학》 2, 1986).
주 365
: 윤용진, 〈대구시 월성동 선사유적〉(《령남고고학》 1, 1986).
주 366
: 신경철, 〈동래 온천동출토 무문토기〉(《가야통신》 10, 1984).
주 367
: 안재호, 〈량산의 순지리 신평유적출토 무문토기〉(《가야통신》 10, 1984).
국사관논총 제19집 > 청동기시대 연구사(조유전) > Ⅲ. 분야별 연구성과
1. 묘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는 크게 지석묘와 석관묘(석상분), 그리고 옹관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지석묘는 숫적인 면에서나 청동기문화 구명의 기여도에 있어서나 핵심적인 연구대상이라 할 수 있다. 지석묘는 소위 거석문화의 한 유형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전역에 분포한다. 지석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국내학자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오고있다.
반면, 석관묘는 대부분이 소위 남방식 지석묘 혹은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구조와 동일한 형태이며 규모가 작고 지금까지 확인된 수도 수 십기에 불과하다. 더구나 국내에서 출토되는 석관묘는 종종 지석묘와 함께 발견되며, 출토되는 부장품도 지석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와 구조상에 나타난 특성을 중심으로 몇 가지 유형의 형식분류가 이루어진 바 있을 뿐, 석관묘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옹관묘는 2차장의 성격이 짙으며, 어린이 전용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부장품이 빈약하고, 옹관묘 자체의 출토 예가 상대적으로 적다. 옹관묘에서는 소량의 철제품이나 세형동검이 출토된 바 있어 순수한 청동기시대를 벗어나 보다 늦은 시기에 나타나는 토광묘와 거의 동시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 묘제의 연구는 그 대상에 있어서 지석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외의 나머지 묘제는 양적인 빈약함으로 인해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한국 청동기시대 묘제연구사를 논함에 있어 그 중점은 자연히 지석묘에 놓이게 된다. 남한에서 해방이후 지금까지 청동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서의 시기구분을 편의상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Ⅰ기 : 해방 이후 1960년까지. 실증적인 발굴조사가 미미한, 관념적인 연구기라 할 수 있다.
Ⅱ기 : 1961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청동기시대 묘제연구의 본격적인 출발기이자 양적인 팽창기로 볼 수 있다.
Ⅲ기 :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Ⅱ기에 청동기시대의 대체적인 전모를 파악함에 힘입어 연구분야가 세분화되고 지석묘의 계보와 편년에 대한 활발한 논의로 이론이 정립되어 갔으며, 많은 구제발굴과 아울러 지석묘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과 사회복원이 시도되는 등 양적으로 성장하고 질적으로도 심화되어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위의 각 시기별 연구성과를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Ⅰ기〉
일찍이 지석묘에 대한 기록이 옛 문헌에 보이고 있기는 하나, 주 368368 리규보는 《동국리상국집》 남행일기에서, 지금의 익산군에서 지석묘를 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닫기 본격적인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것은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의 국내 풍물 소개나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에 의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주 369369 등전량책(1942).매원말치(1947).닫기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연구는 ‘청동기 시대’라는 개념조차 설정되지 않은 단계에서 행해진 것으로서, 청동기와 석기가 함께 사용된 시기라 해서 ‘금석병용기’를 설정한 사실부터가 당시 청동기문화 연구의 한계였다.
일제침략기에 한국인으로서는 손진태가 민속학적인 관점과 사회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지석묘를 해석하고 있으며 주 370370 손진태(1934).지석묘의 명칭, 분포, 구조 등을 설명하면서 제작 방법과 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닫기 한흥수도 지석묘를 거석문화의 일부로서 파악한 바 있다. 주 371371 한흥수(1935).거석문화를 고인돌, 선돌·칠성바위·돌무덤 등으로 나누고 고인돌을 형태상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량분하였다.닫기
우리나라 청동기문화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해방 이후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해방이후 50년대 말까지 청동기시대 및 지석묘에 대한 연구가 답보상태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존재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다분히 이론적이고 피상적인 연구만이 진행되었고, 주 372372 리여성(1954)은 B.C. 5C 경부터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있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논거가 없다.닫기 실질적인 조사나 발굴도 미미한 상태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나진 초도 등 활발한 발굴을 통하여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주 373373 이 시기에 북한에서 이루어진 주요 발굴로는 나진 초도(1949), 궁산리(1950), 회령 오동(1954〜1955), 금탄리(1955), 강계 공귀리(1955), 봉산 지탑리(1957), 심귀리(1958), 미송리(1959) 등이 있다.닫기 특히 공귀리 유적조사보고서를 통하여서는 각형토기유적과 거석문화의 관련성이 논의되고, 주 374374 김용간(1959).각형토기유적이 청동기시대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후 연구가 진전됨으로써 무문토기 문화=청동기시대로 인정하게 되었다.닫기 나아가 우리나라 거석문화의 기원을 동남아시아에 두는 전파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주 375375 도유호(1959).닫기
〈Ⅱ기〉
1960년대에 들어서야 남한에서도 비로소 무문토기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지석묘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1961년 신창리 옹관묘지의 발굴은 옹관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주 376376 금원룡(1964).얼마되지 않은 출토유물로 판단컨대 이 옹관묘의 실연대는 기원 전후 1∼2C 경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철편·마제석부·마제석촉·동제검파두식 등이 있다.닫기 임병태는 이전까지의 조사·연구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지석묘의 형식을 크게 3분하고, 지석묘문화에 대해 비교적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의 서술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지석묘의 형식에 있어서 남방식·북방식이라는 막연한 분류를 지양하고, 지석묘의 구조를 면밀히 검토·분석하여 탁자식·기반식·무지석식으로 3분하고, 다시 지하매장형태에 따라 세분하였다. 또한 지석묘의 하한 연대를 종래의 A.D. 4세기에서 A.D. 1세기로 올려 보았다. 주 377377 림병태(1964).닫기
한편 1960년대 초반부터 수 년에 걸쳐 국립박물관에서는 선사문화 연구 제1차 계획사업으로 80여 기의 지석묘를 지역 별로 발굴하였는 바, 이는 그때까지 지석묘를 대상으로 남한에서 실시된 학술조사사업 중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다. 파주 옥석리·교하리, 강화 삼거리, 제원 황석리 등 지석묘와 적석총, 그리고 따로 여러 개의 주거지가 발굴조사되었다. 7년여에 걸친 장기간의 집중적인 조사를 통하여 집대성한 보고서에서는 지석묘의 형식·분포 및 편년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을 함으로써, 우리나라 청동기 묘제 및 문화 구명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다. 즉 남방식 지석묘에 대한 보다 발전된 개념과 형식분류를 설정하여 남방식을 지석의 유·무로 구분하고, 다시 이를 매장구조의 뚜껑과 적석시설의 유무로 세분하였다. 또한 옥석리 주거지와 황석리 13호 지석 출토 인골의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치가 각각 B.C. 640년, B.C. 410년인 것을 고려하여 남방식 지석묘의 상한연대를 B.C. 8세기까지 올렸다. 주 378378 금재원·윤무병(1967).닫기 이 연구에서 형식의 지나친 세분과 방사성탄소연대에 대한 과신이 지적될 수 있기는 하지만, 이전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마제석검의 세형동검모방설이 뒤집어졌고, 량자는 서로 시기를 달리하는 별개문화로 보아 편년과 계통상의 오류를 시정하게 되었다.
이렇듯 해방 이후 연구·조사되어 온 지석묘의연구가 일차적으로 집대성된 시기가 1960년대 중반이다. 60년대에 우리학자들에 의해 지석묘에 대한 형식분류와 분포·종합적인 고찰이 이루어짐으로써 이전까지의 그릇된 편년관이나 왜곡된 문화양상을 바로잡아 향후 지석묘제연구에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으나, 묘제자체의 년대관에는 학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었다.
〈Ⅲ기〉
1970년대 이후 경제발전계획 및 국토종합개발사업의 추진으로 인해 대규모의 댐공사를 비롯한 토목공사가 진행됨으로써 이에 따른 유적발굴 및 보존의 문제가 대두었다. 이에 대규모의 발굴이 진행되었고, 특히 댐공사에 따른 강변 유적을 통해 종합적 문화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발굴도 실시되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의 수집뿐 아니라 고고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주 379379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양·팔당·대초·장성·대청·남강·동복·충주·임하·주암·합천댐 등의 공사가 있었다.닫기
지석묘에 대한 발굴도 수 십기, 수 백기를 한꺼번에 발굴함과 동시에 주변 주거지나 여타 관련 유구를 함께 발굴함으로써 청동기시대 문화의 종합적 양상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대규모 발굴을 통한 자료의 양적 증가가 종합적인 고찰을 가능하게 하였고, 아울러 질적인 성장을 가져와, 지석묘의 복원적 고찰과 사회연구, 지역적인 양상의 파악, 외국 지석묘와의 비교 등 연구방향이 다양해지는 것이 이 시기의 특색이라 하겠다.
이미, 북한에서는 60년대에 지석묘를 통해 청동기시대 사회관계가 연구되고 있으며, 그 기원에 있어 자생설을 주장한 바 있다. 주 380380 황기덕(1965).닫기 그러나 남한에서는 70년대 중반 이후 이전까지의 형식분류·분포 및 편년에 관한 연구에 부가하여 지석묘제를 통한 지석묘 사회의 복원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첫 시도는 양평 앙덕리 지석묘 발굴조사에서 비롯되었다. 손보기와 이융조는 앙덕리 지석묘 발굴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석묘 사회와 문화를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지석묘의 제작과정을 비롯한 사회복원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주 381381 손보기·이융조(1974).닫기 이를 한층 심화시켜 앙덕리 21호 지석묘에 대하여 매장법·축조법·석재가공법·반출석기 등에 관해 사회·경제적, 기술적인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검토·분석하여 지석묘 사회·문화를 종합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주 382382 이융조(1975).닫기 이후 지석묘 사회복원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주 383383 이융조(1980)·최몽룡(1981)·지건길(1983)·이융조·우종윤(1988) 등의 논문이 있다.닫기
또한, 청동기시대의 사회연구에 있어서 60년대 초의 부족국가설, 주 384384 금철준(1964).닫기 70년대 초의 성읍국가설 주 385385 천관우(1976)·리기백(1976).닫기 외에 70년대 말에는 신진화론적 단계론을 수용하여 지석묘사회를 족장사회로 파악하거나, 주 386386 최몽룡(1981).닫기 군장사회 이전단계로 파악하는 등 주 387387 금정배(1979).닫기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지역단위를 중심으로 한 연구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을 비롯한 전남지역, 주 388388 최몽룡(1978)·리영문(1987).닫기 금호강유역의 영남지역, 주 389389 금약수(1986).닫기 남한강과 금강유역을 비롯한 충북지역 주 390390 우종윤(1983)·하문식(1985).닫기 등에 대한 연구들이 있다.
지역적인 내용을 보면, 최몽룡은 발굴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남지방 지석묘의 형식을 분류하고, 그 지역 지석묘문화가 마한과 관계있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지석묘사회는 계급사회로서 전문기술인들이 등장하고 직업의 분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김약수는 대구·영천·경산 등 금호강 유역의 지석묘 362기를 대상으로 형식·입지·구조·유물·연대 등에 관해 문헌과 직접조사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문화양상에 대한 연구는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발굴에서 비롯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국내의 지석묘 연구자료가 축적되어 가면서 중국·일본 등 외국과의 비교연구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지건길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중국·일본을 포함한 지석묘의 새로운 형식분류를 시도하여, 판석을 지상에 세워 석실을 만들고 상석을 덮은 북방식과 매장부가 지하로 되고 상석은 적석, 작은 지석, 또는 지면에 얹히는 남방식으로 양분하고 남방식을 다시 6개 형식으로 나누었으며, 이들을 또 다시 적석의 유무에 따라 세분하였다. 주 391391 지건길(1982).닫기 김정희는 동북아시아 지석묘를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형식학적 변천의 관점에서 그 선후관계를 밝혔으며,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북부지방 지석묘의 편년을 고찰하고 양 지역 지석묘 상한연대 간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또한 지석묘의 기원을 청동기문화와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동북아시아 청동기문화는 북방아시아에서 그 기원을 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주 392392 금정희(1988).닫기 이외에도 우리나라 지석묘와 연관된 주변국가의 묘제에 대한 연구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주 393393 연구논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침봉근(1979, 1981)·리형구(1987)·금정희(1988).닫기
우리나라 지석묘에 대한 연구는 대상 자체의 수나 규모에 있어서 청동기시대묘제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있어 왔지만, 주 394394 지석묘에 대한 조사나 연구의 주된 관점은 외형상의 형식구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석묘에 대한 학자마다의 형식분류를 발표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지석묘의 형식분류
닫기 아직도 많은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다. 지석묘 연구에 관련된 용어상의 통일문제를 비롯해서 편년문제, 지석묘의 발생·전파문제, 지석묘사회와 국가형성과의 관계, 지석묘의 각 형식간 상호관계문제 등 아직까지 뚜렷하게 규명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지석묘의 연대를 살펴보더라도, 그 상한 연대를 중기 신석기 또는 후기 신석기시대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한연대로 B.C. 2세기, 기원전후한 시기, B.C. 3세기, 등 견해가 다양하다. 주 395395 학자들 간에 지석묘가 청동기시대 전기간에 걸쳐 존속한 묘제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개시와 종말에 있어서는 견해차가 다양한다.이융조(1981)·박희현(1984) 등은 중기 신석기 상한설을 주장하였으며, 윤무병(1977)·임세권(1976)은 후기 신석기 상한설을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의 김용간은 팽이형토기 주거지에 견주어 B.C. 2000년기의 신석기시대에 지석묘가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하한연대에 있어서도 B.C. 2세기설(김재원·윤무병, 1967), 기원전후설(최몽룡, 1978), B.C. 3세기설(심봉근, 1983) 등 다양하다.닫기
아울러 기원문제에 있어서도, 자생론과 전파론을 중심으로 설이 다양하다. 주 396396 자생론에 있어서 그 근거는, 우리나라 지석묘의 연대가 이웃 지역들보다 이르고, 세계 어느곳에 견주어 보아도 단위면적당 밀집도가 높다는 사실이다. 자생론을 주장한 연구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황기덕(1965)·임세권(1976)·석광준(1979).반면, 전파론에 입각한 논문들은 대개 동남아시아를 기원에 두고 있다.도유호(1959)·금정학(1974)·금병모(1981).닫기
70년대까지 우리 학계의 연구경향은 개별적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형식론과 편년론에 중점을 두었으나, 70년대 이후 사회복원 등 문화의 총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도 보다 많은 조사와 연구를 통해 지석묘를 조영한 사람들의 경제·사회조직과 정치체제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주 368
: 리규보는 《동국리상국집》 남행일기에서, 지금의 익산군에서 지석묘를 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주 369
: 등전량책(1942).매원말치(1947).
주 370
: 손진태(1934).지석묘의 명칭, 분포, 구조 등을 설명하면서 제작 방법과 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주 371
: 한흥수(1935).거석문화를 고인돌, 선돌·칠성바위·돌무덤 등으로 나누고 고인돌을 형태상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량분하였다.
주 372
: 리여성(1954)은 B.C. 5C 경부터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있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논거가 없다.
주 373
: 이 시기에 북한에서 이루어진 주요 발굴로는 나진 초도(1949), 궁산리(1950), 회령 오동(1954〜1955), 금탄리(1955), 강계 공귀리(1955), 봉산 지탑리(1957), 심귀리(1958), 미송리(1959) 등이 있다.
주 374
: 김용간(1959).각형토기유적이 청동기시대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후 연구가 진전됨으로써 무문토기 문화=청동기시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주 375
: 도유호(1959).
주 376
: 금원룡(1964).얼마되지 않은 출토유물로 판단컨대 이 옹관묘의 실연대는 기원 전후 1∼2C 경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철편·마제석부·마제석촉·동제검파두식 등이 있다.
주 377
: 림병태(1964).
주 378
: 금재원·윤무병(1967).
주 379
: 이 시기를 전후하여 소양·팔당·대초·장성·대청·남강·동복·충주·임하·주암·합천댐 등의 공사가 있었다.
주 380
: 황기덕(1965).
주 381
: 손보기·이융조(1974).
주 382
: 이융조(1975).
주 383
: 이융조(1980)·최몽룡(1981)·지건길(1983)·이융조·우종윤(1988) 등의 논문이 있다.
주 384
: 금철준(1964).
주 385
: 천관우(1976)·리기백(1976).
주 386
: 최몽룡(1981).
주 387
: 금정배(1979).
주 388
: 최몽룡(1978)·리영문(1987).
주 389
: 금약수(1986).
주 390
: 우종윤(1983)·하문식(1985).
주 391
: 지건길(1982).
주 392
: 금정희(1988).
주 393
: 연구논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침봉근(1979, 1981)·리형구(1987)·금정희(1988).
주 394
: 지석묘에 대한 조사나 연구의 주된 관점은 외형상의 형식구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석묘에 대한 학자마다의 형식분류를 발표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지석묘의 형식분류
주 395
: 학자들 간에 지석묘가 청동기시대 전기간에 걸쳐 존속한 묘제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개시와 종말에 있어서는 견해차가 다양한다.이융조(1981)·박희현(1984) 등은 중기 신석기 상한설을 주장하였으며, 윤무병(1977)·임세권(1976)은 후기 신석기 상한설을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의 김용간은 팽이형토기 주거지에 견주어 B.C. 2000년기의 신석기시대에 지석묘가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하한연대에 있어서도 B.C. 2세기설(김재원·윤무병, 1967), 기원전후설(최몽룡, 1978), B.C. 3세기설(심봉근, 1983) 등 다양하다.
주 396
: 자생론에 있어서 그 근거는, 우리나라 지석묘의 연대가 이웃 지역들보다 이르고, 세계 어느곳에 견주어 보아도 단위면적당 밀집도가 높다는 사실이다. 자생론을 주장한 연구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황기덕(1965)·임세권(1976)·석광준(1979).반면, 전파론에 입각한 논문들은 대개 동남아시아를 기원에 두고 있다.도유호(1959)·금정학(1974)·금병모(1981).
2. 유물
1) 무문토기
청동기시대의 토기로 분류되는 무문토기에는 각형토기(팽이토기)·화분형토기·발형토기·홍도·흑도·점토대토기·공렬토기 등 다양하게 알려져있다.
무문토기에 대한 연구는 북한 무문토기 유적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시작되었다. 강계시 공귀리 유적발굴 주 397397 이 외에 지탑리, 공귀리 유적 등이 있다.닫기 등을 통해 한반도 청동기시대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나아가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와의 선후관계가 밝혀지게 되었고, 남한에서는 이보다 늦어 1960년대 초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청동기시대 개념이 인정 주 398398 김원룡(1964).닫기되면서 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수석리 유적발굴 주 399399 김원룡(1960).닫기을 시작으로, 주 400400 김원룡(1960).닫기 강동구 명일동, 주 401401 김원룡(1964).닫기 송파구 가락동 등 무문토기 유적에 대한 조사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를 토대로 무문토기의 개념정리 및 편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 들어 흔암리, 송국리 및 1980년대 륵도와 군곡리 등 중요한 유적에 대한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조사가 실시되면서 청동기시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점차 진행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남한의 무문토기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세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Ⅰ기는 광복 이후에서 1960년대까지로, 청동기시대 관련 발굴이 시작되고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가 확인되어 개념이 설정된 시기로 볼 수 있다.
Ⅱ기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댐 공사 등으로 인한 수몰지구를 비롯하여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조사 진행으로 나타난 유물의 형식분류, 편년문제 등 무문토기 전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시기로 볼 수 있다.
Ⅲ기는 1980년대에서 현재까지로 무문토기 전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자연과학적인 분석 등이 이루어짐으로써, 무문토기 전반에 관한 제 문제가 정립되어 가는 시기로 볼 수 있겠다.
각 시기별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Ⅰ기〉
이 시기에 북한에서는 라진초도 주 402402 이 시기에 북한에서 조사된 무문토기유적은 다음과 같다. 라진초도(1949)·언산리(1950)·회녕오동(1954∼1955)·평양 금탄리(1955)·공귀리(1955)·풍산 지탑리(1957)·시중 심귀리(1958), 의주 미송리(1959)·녕변 세죽리(1962) 평양 정백동(1966) 등.닫기 등 무문토기문화 연구에 중요한 발굴이 많이 이루어졌다. 남한에서는 경기도 수석리 집자리를 비롯하여 몇 곳이 발굴 주 403403 이 시기에 남한에서 조사된 유적으로는 다음과 같다.경기도 수석리(1966)·강동구 명일동(1961)·송파구 가악동(1964)·파주군 옥석리·교하리(1967) 등.닫기 되었다.
수석리 유적은 남한에서 발굴조사된 최초의 주거지발굴 유적으로 점토대토기, 흑도 장경호, 파수부호형토기, 변형각형토기 등이 출토됨으로써 북한과는 다른 한강유역의 독자적인 무문토기 문화권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가락동 집자리에서 평안·황해 지방에만 국한 분포되고 있는 각형토기와는 차이가 있는 소위 가악동식토기로 이름지어진 변형각형토기가 출토되어 각형토기문화가 한강유역까지 미치고 있음을 밝히게 되었다. 주 404404 김정학(1963).닫기
역삼동 주 405405 김양선 외(1968).닫기과 파주군 옥석리·교하리 주 406406 김재원 외(1967).닫기에서는 함경도에서 보이는 공열 및 구순각목장식의 무문토기가 이 시기에 확인되었다.
이러한 발굴을 토대로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의 존재가 확인되어 이에 따른 청동기의 계통과 편년문제가 제기된 시기라 할 수 있다.
〈Ⅱ기〉
이 시기에 무문토기문화를 밝히는데 필요한 유적조사가 장기적 계획으로 이루어져 무문토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증가됨으로써 편년 및 형식분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청동기시대의 전모를 어느정도 파악하게 된 시기이다.
주요 발굴로서는 여주 흔암리, 중부지방의 특징적인 토기형식으로 송국리식 토기가 출토된 송국리유적을 비롯하여 대전 괴정동 등 주 407407 이 밖에 의산 오금산(1967)·해미 휴암리(1967∼1970)·아산 남성리(1975)·예산 동서리(1975)·광주 송암동(1976)·진양 대평리(1979) 등이 있다.닫기을 들 수 있다.
특히 흔암리에서는 공열토기와 변형각형토기, 홍도가 나와 동북계와 서북계문화가 한강유역에서 결합한 무문토기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거지에서 홍도가 발견되었고 탄화미 등 곡물이 출토되었다. 주 408408 임효재(1978).닫기
송국리에서는 평저, 약간 배부른 동체, S자로 외반한 구연을 가진 특징적인 토기 형식과 홍도, 삼각형석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금강유역의 독특한 문화상을 알게 해 주었다. 주 409409 강인구 외(1979).닫기
이 시기에 있어서 한강유역의 유적에서 출토된 무문토기를 분석·검토하여 조질무문토기문화로 정의하고 서북한의 팽이그릇문화의 변형으로 가악토기를 주장 주 410410 김정학(1967).닫기했고, 또 이지역의 무문토기를 전후기로 구분, 조질무문토기 유적을 전기로, 흑도출토 유적을 후기로 하여 가악리토기→역삼동토기→흑도유적으로 편년을 시도하고 전기는 B.C. 6세기 후기는 B.C. 4세기로 보아 최초의 토기편년관이 나오기도 했다. 주 411411 임병태(1969).닫기
그밖에 경기도지구의 무문토기를 공렬토기·홍도·각형토기를 A군으로 점토대토기·파수부호·흑도를 B군으로 하여 A군은 동북한과 서북한문화의 남한에서 일어나는 일차문화로, B군은 현지에서 토착화해서 일어나는 이차문화로 구분하고 양지역에서 공반 및 복합 양상을 고찰하여 시간과 공간서열을 시도, 주 412412 이백규(1974).닫기 A군을 B.C. 9∼5세기 중엽, B군을 B.C. 5. 세기 중엽 ∼B.C. 5세기 이후로 보았다.
한편 우리나라 무문토기에 지역적인 구분을 시도한 것도 이 시기이다. 무문토기를 심발형·화분형·호형·두형으로 형식분류하고 전체적으로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그리고 남한의 4지역군으로 나누었고, 주 413413 김원룡(1968).닫기 이에 대해 무문토기의 기형을 발형·옹형·완형·두형·시루형으로 크게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하고 표면처리에 의해 갈색·적색마연·흑색마연으로 구분한 뒤, 압록강·청천강·함북·남한지역으로 분류하여 앞의 지역군과 다소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 414414 윤무병(1975).닫기
그밖에 제주도 출토의 무문토기에 대해 그 형식과 류입경로 및 편년을 시도해 경남해안을 통해 B.C. 4세기 경 이주해 온 것으로 보고 공렬토기·구순각목토기·점토대토기·흑색마연 토기를 전기로 구분했다. 주 415415 이백규(1979).닫기 그리고 무문토기 가운데 특징있는 토기 중 홍도의 전파 경로를 함북지방에서 발생하여 북한강 상류를 통해 내륙을 따라 낙동강 상류에서 하류로 전파했고 특히 홍도의 용도가 함북지방에서는 일상용기로 사용된데 반해, 한강유역에서부터는 부장용기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주장한 글이 발표되기도 했다. 주 416416 안춘배(1979).닫기
〈Ⅲ기〉
이 기간에는 70년대에 발굴되었던 유적에 대한 보고서의 간행이 활발히 진행되고, 제주도를 비롯한 각 지역중심의 발굴이 활성화되어 지역문화권 연구가 진전되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많은 발굴 및 보고서의 간행으로 인한 새로운 자료의 증가 및 70년대 무문토기 편년 및 형식분류 등의 연구진전을 토대로 출토지에 따른 지역 군의 연구와 더불어 토기 형태에 따른 토기군 즉 홍도·흑도·점토대토기·공렬토기 등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도 진전되었다. 한편 자연과학적인 분석도 진행되어 미사리·양평리·장천리·황석리·대평리·아선운곡리·청북리·흔암리 등지의 토기분석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있어서 무문토기 개별유물에 대한 연구로 각형토기가 집중 연구되어 각형토기를 전형과 변형으로 구분하고 기형으로는 호, 옹·소형장경호의 삼종으로 나누고 이들의 조합출토상으로는 청천강이남 한강이북지역을 Ⅰ군, 한강류역을 Ⅱ군, 청천강류역을 Ⅲ군으로 구분하고, 묘제는 석관묘·남방식지석묘·북방식지석묘로서 그 중 북방식지석묘가 가장 늦은 형식으로 보았고 석기는 다양하나 청동기·골기는 소량으로 기본생활용구가 되지 못하고, 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의 경작을 들어 주장했다. 그리고 조기(B.C. 10∼9세기), 전기(B.C. 8∼7세기), 중기(B.C. 6∼5세기), 후기(B. C. 4∼3세기)로 편년을 시도했다. 주 417417 한영희(1983).닫기
소위 채문토기에 대해 채문토기의 조형을 홍도로 파악하고 이 홍도의 형태에 따라 A. B. C. D의 4형식으로 분류하고 이 채문토기도 Ⅰ∼Ⅳ류형으로 분류하여 가지무늬토기로 명칭을 바꾸어 기원을 홍도에 두고 분포는 한반도의 남부에 한정했으며 신앙과 관계되는 특수용기로 파악했으며 년대를 B.C. 5∼B.C. 4세기 말까지 약 200년 간으로 본 견해가 있고, 주 418418 이건무(1986).닫기 흑도에 대해서는 묘에 부장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요령지방 청동기 문화의 토기양식의 영향으로 무문토기 후기에 출현하여 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더불어 유행되고 중국 도질토기의 전개와 함께 소멸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주 419419 노혁진(1987).닫기
홍도의 경우 즐문토기문화기 초기인 B.C. 5,000 경부터 나타나 무문토기문화기인 B.C. 1,000∼기원전후까지 계속 사용되다 소멸된 것으로 보고 즐문토기시대는 첨저의 발형토기가 일상용기로 사용되고 무문토기시대에는 일상용과 부장용으로 구분되고 일상용기는 평저의 발형·호형·접시 등 다양하고 부장용기는 소형원저단경호가 사용되고 이것은 우리나라 서북지방을 제외한 전역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주 420420 노혁진(1987).닫기
여주 흔암리 출토 무문토기를 집중 분석하여 동북한계의 구멍토기·골아가리·붉은간토기가 서북한의 팽이토기를 받아들여 지역양식화한 것으로 주장하고 실연대를 기원전 7세기로 주장하고 주 421421 이백규(1984).닫기 또 이 유적 출토 홍도·무문토기의 성분분석이 시도되어 중요 성분의 비율이 밝혀지기도 했다. 주 422422 최몽룡(1984).닫기
이 시기에 무문토기의 전반에 관한 것으로서 무문토기를 마연토기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파악하고 그 범위가 넓은 공렬토기를 표식으로 하는 유형의 토기문화를 표지로 하여 남한지방 문무토기문화의 시·공간적 위치와 형성 변천과정을 살펴 가락동식·역삼동식·흔암리식·송국리식·수석리-연암리식·군곡리-늑도식 모두 6개식으로 나누는 작업이 이루어 졌다. 주 423423 이청규(1988).닫기
그리고 무문토기의 발생과 계보를 다루어 발생기·전기·중기·후기의 4기로 나누고 각 기마다의 특징있는 토기를 다루고 있는 글 주 424424 임병태(1986).닫기이 있고 지역적인 연구로서 한강유역의 민무늬토기를 동북한·서북한의 민패토기 문화가 한강유역에 도착하나 양자가 아직 섞이지 않는 시기를 A군으로, 동북계 구멍무늬·골아가리·고배형 토기들이 서북계 팽이토기와 결합되거나 공유되는 시기를 B군, 민패토기·구멍무늬토기·골아가리토기·붉은토기는 계속되고 팽이토기는 소멸되는 C군, 덧띠토기·세형동검이 공반되는 D군으로 구분했다. 주 425425 이백규(1986).닫기 그 밖에 우리나라 무문토기 유입경로를 지금까지 북한강 상류로부터 흔암리까지 왔다는 설을 부정하고 임진강 하류를 통해 강화도 지역, 흔암리 지역까지 파급된 후 가락리를 경유하여 북한강으로 북상했다는 설이 발표되기도 했다. 주 426426 최무장(1983).닫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무문토기연구는 유물의 편년이나 형식학적 분류 나아가 지역적인 분류 등 기초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문토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무문토기문화를 청동기시대로 일반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나 무문토기가 곧바로 청동기로시대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화사·기술사 측면에서의 제요소를 무문토기가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무문토기시대에 나타나는 유문토기라든지 무문토기 초기가 신석기시대 속한다는 주장 주 427427 윤무병(1975).닫기도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무문토기와 청동기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문화나 사회상을 파악하는 작업도 미미하다. 각 토기에 대한 용어상의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고, 토기군을 상정함에 있어서도 출토유적지명을 따서 미송리식·송국리식 등으로 부르거나, 토기 자체의 형태를 따 팽이토기·공열토기·점토대토기 등으로 불러 개념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연과학적인 분석의 도입도 미미한 상태이다.
앞으로 이들 무문토기로 분류될 수 있는 토기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연구를 시도하여 담당주체와 아울러 보다 종합적인 연구가 있어 무문토기의 실상이 확연히 드러나야 할 것이다.
2) 석기
청동기시대의 석기에 관한 연구는 마제석검·마제석철·반월형 혹은 삼각형석도·유구석부 등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마제석검의 관한 연구로, 금량선은 일제시 유광교일에 의해 분류된 한국마제석검의 유경식·유병식·무경무병식·류엽식의 4분법을 유경식·유병식·무경무병식으로만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석검의 조형이 세형동검뿐 아니라 검과·동모 그리고 중국식동검, 일반철첨두병기 등도 형식에 따라 함께 조형으로 되었다고 주장했다. 주 428428 금량선(1962).닫기
지석묘에서 표식적으로 출토되는 마제석검의 기원에 관한 연구가 금원룡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 오르도스동검을 모방한 유병식마제석검으로 보고 료녕식동검이 유병석검의 제작을 조장하면서 세형동검으로 변화·발전한 것으로 보았다. 주 429429 금원룡(1971).닫기
한편, 윤덕향은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석검를 유경식·일단병식·이단병식의 삼형식으로 구분하고, 각 형식 사이에는 시간적 선후관계가 미약하고 오히려 지역적·기능적인 면의 차이로 보았다. 그래서 유경식석검은 대동강류역의 각형토기와 함께 서북지방의 특성으로 보았고 아울러 실용과 부장용으로 구분했다. 일단병식은 부장용, 이단병식은 실용으로 상정했고, 석검의 조형도 일단병식의 경우 ordos검의 모방으로 보고 이단병식은 기본적으로 일단병식과 같으나 단이라는 요소는 만주식이나 도씨검의 영향으로 보았으며 유경식의 경우 만주식동검의 영향도 있다고 주장했다. 주 430430 윤덕향(1977).닫기
또한 전영래는 전북지방에서 출토된 마제석검을 분석하여 전북지방출토 유병식석검을 모두 6류형으로 분류하였고 무단유병식검은 중국식동검중 파이프형 원통병식을 번안한 방제품으로 보고 시원적으로는 오히려 한반도 남서해안지방에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고 무단병석검의 제작상한을 기원전 5세기초를 넘지 못한다고 보았다. 주 431431 전영래(1977).닫기
우리나라 마제석검을 심·단·절·검신의 혈구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Ⅰ∼Ⅴ형식으로 분류한 글이 있었고, 주 432432 금창호(1981).닫기 동아시아 마제석검을 한반도계와 화남계로 나누고 한반도계를 북방계와 중원계로 구분하여 동 Asia의 농경문화의 전파경로를 추구한 글이 있다. 주 433433 전영래(1987).닫기
마제석족에 관한 연구는 임세권에 의해서 시도되었는데, 우리나라 마제석촉에 관한 종합적고찰을 처음으로 시도하였으나, 주 434434 임세권(1977).닫기 자료가 종합적으로 검토되지 않았고 1977년 이전의 자료들이 누락되었으며, 형식분류가 지역적인 차이점을 언급하지 않은 점 등의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최성락은 우리나라 발견의 마제석족을 종합적으로 검토·분석하여 시간적·공간적·기능적인 측면과 관련시켜 고찰하고 무문토기전기에는 실용품으로 부장하였음을 주장하고, 이러한 주장을 통계적으로 검토하였다. 주 435435 최성락(1982).닫기
반월형석도에 관한 연구는, 먼저 금원룡이 도작전파 북로설의 근거로 반월형석도를 제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화북지방의 반월형석도가 흑도와 함께 우리나라로 들어 올 때 도작이 함께 전파된 것으로 보고 화북지방의 반월형석도와 우리나라 출토 반월형석도를 비교·분석하여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였다. 주 436436 금원룡, 〈한국도재기원에 대한 일고찰〉(《진단학보》 25·26·27, 1964).닫기
그후 안승모는 반월형석도가 삼각형석도를 제외하고 모두 료녕지방에서 출현한 어형이 주류이며 이것이 대동강류역와 송화강류역의 장주형석도의 조형이 되고 동북지방의 장방형어형·즐형석도는 료동·료서로부터의 영향이 작용했고, 중·남부지방에서는 장주형에서 단주형·삼각형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주 437437 안승모(1985).닫기
한편 삼각형석도에 관한 종합적 연구는 금상면과 최인선에 의해 행해졌다. 금상면은 삼각형석도의 발생과 전파를 송국리유적의 성립과 전파에 의거해서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도작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더 능률적인 수획구가 요구되어 효과적인 구조의 량인석도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렇게 발생한 삼각형석도는 전북·전남을 거쳐 경남 해안지방까지 전파되었으며, 그 실연대를 B.C. 6∼4세기에서 금해기까지라고 보았다. 주 438438 금상면(1985).닫기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최인선은 우리나라 삼각형석도를 종합분석하여 이 석도에는 반월형·직고형도 있기 때문에 특징적인 교인이 이들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교인석도로 개명하기를 주장하고 송국리기인 B.C. 6세기 경에 반월형석도에서 교인방법이 출현되고 이어서 사용소모에 의해 직인과 변인의 이부로 형성되는 직호형으로 거기서 다시 두 직인의 삼각형으로 변화, 원삼국시대에 와서 소멸되었다고 주장했다. 주 439439 최인선(1985).닫기
유구석부에 관한 연구도 금원룡이 도작의 전파경로를 다루면서 처음으로 행해졌다. 그는 중국의 복건·강서·광동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면서 화북지방의 산동·하남 및 동북제성에서 극소수로 출토되는 유구석부가 함경북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중국해안지대에서 해로를 통해서 우리나라 서북해안으로 전래해 왔다고 그 전파경로를 밝혔다. 주 440440 금원룡(1964).닫기
로혁진은 한반도출토 유구석부를 종합분석하여 이 석부는 중국앙소신석기문화의 adze형 목공구전통에서 도작과 함께 한반도 서부로 유입되어 유구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초기형Ⅰ식과 후기형Ⅱ식으로 구분하여 Ⅰ식은 부두와 인부의 폭이 같고 부신단면은 거의 절두삼각형으로 후기무문토기단계에 해당되고 Ⅱ식은 인부폭이 약간 넓어지고 부신단면은 측벽이 약간 외만된 것으로 세형동검·점토대토기단계로 보았고 두 기본형식으로 나누어지는 전기를 신석기단계로 보았다. 주 441441 로혁진(1981).닫기
이상 석기에 관한 연구는 특정유물의 발굴이나 지표조사를 통해 얻게 된 자료에 대한 소개와 그것에 대한 대략적인 형식분류·지역적 특성의 고려·타 지역 유물과의 비교 등의 연구와 아울러 단일유물에 대한 분석적·체계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져 묘제나 청동기연구에 필요한 비교자료로 이용될 수 있어 고무적이라 하겠다. 마제석검의 연구는 조형과 동검과의 관계 편년 등에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형편이며 형식분류와 지역적 특성들은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기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제석족의 연구는 임세권의 부분적인 연구나 최성락의 종합적 연구외에는 별로 주목되는 연구가 없는데, 석족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고, 또 시간적 추이에 따른 형태변화가 민감한 사실들로 볼 때, 좀 더 여러학자들에 의한 심층적인 연구가 요망된다 하겠다. 유구석부의 연구는 유물자체가 주는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물과 비교하여 볼 때 주의깊게 다루어졌다. 유구석부의 모든 제작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 윤용진의 글과 그 기능을 추정해 본 금원룡의 글은 그 의도에서 주목받을 수 있겠으며, 전파경로와 형식분류·편년을 종합적으로 분석·고찰한 로혁진의 논문도 단일유물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반월형석도나 삼각형석도의 연구 역시 개별유물에 대해서 분류·편년 등 기본적인 작업을 실시하고 그 기원과 발전과정 등을 추론해 나가는 등 다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들이 소개되고 있어 고무적이라 생각된다.
3) 청동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청동유물로서는 동검·경·동부·령구·기타이형동기 등이 알려져 있다. 동검에 대한 연구로는 십이태영자청동유물을 검토하여 그때까지 세형동검의 퇴화형으로 여겨왔던 료녕식동검이 오히려 세형동검의 조형이 되는 고식으로 본 금원룡은 우리나라는 비중국계 북방청동문화가 파급한 것으로 그 초입이 서기전 6∼5세기 이전으로 오르지 않는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주 442442 금원룡(1961).닫기
동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역시 십이태영자출토 료녕식동검의 다뉴경을 검토하여 세형동검을 등대의 마연정도와 하반부의 형태에 따라 1형식 2형식으로 구분하고 료녕식→1형식→2형식으로 변화하였다고 처음으로 형식학적 측면에서 편년을 시도하게 되었다. 주 443443 정찬영, 〈좁은놋단검의 형태와 그 변찬〉(《문화유산》 62-3, 1962).닫기
그후 윤무병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세형검검을 종합·분석하여 만주식동검을 Ⅰ류로, 세형동검 중 검신중축인 등대의 릉각의 결입부에 미치지 않는 것을 Ⅱ류로, 결입부이하까지 미친 것을 Ⅲ류로 구분·서열을 정하고 Ⅱ·Ⅲ류의 각류에서는 동봉의 짧은 것을 a, 긴 것을 b로 세분하고 a가 고식임을 주장하여 형식발전상의 신·고를 구분하여 발생서렬를 매겼다. 주 444444 윤무병(1966).닫기 이것은 일본인 매원말치가 분류한 Ⅰ·Ⅱ·Ⅲ류 가운데 Ⅲ류를 가장 고식으로 보고 Ⅰ류를 한 것이다. 주 445445 매원말치·등전량책, 《조선고문화종감》.닫기
그는 또 우리나라에 있어서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만주식동검이 유입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면서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청동기의 제작이 되진 않았고, 따라서 연대에 관하여 Ⅰ기를 만주식동검의 유입기를 기원전 4세기 경으로, 제Ⅱ를 Ⅰ식의 세형동검시기로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경에 시작하여 기원전 2세기 중엽까지로 보며, Ⅲ기를 Ⅱ식세형동검시기로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 후 1세기 경까지로 실년대의 편년를 세형동검연구를 통해서 계속했다. 주 446446 윤무병(1972).닫기
그는 다시 세형동검의 형식을 Ⅰ식과 Ⅱ식으로 분류하여 한국청동시대를 구분하여 Ⅰ기를 기원전 700년대부터 요령식동검의 류입시기로 Ⅱ기를 기원전 300년대부터 세형동검·동제무기 국산화시기로 Ⅲ기를 기원전 150년대부터 청동기와 철기의 혼용기로 나누어 종래 류입기보다 3∼4세기 올려 보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주 447447 윤무병(1976).닫기
완주 상림리출토 중국식동검을 분석한 전영래는 중국식동검이 우리나라 마제석검의 조형이고 따라서 석검의 연대는 중국검의 발생년대인 B.C. 6세기 이전으로 오를 수 없고 중국식동검은 화중지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청동문화는 화중에서 서남한으로 들어왔고 쌀의 도래경로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개시연대는 8세기 이전으로 오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주 448448 전영래(1976).닫기 그는 다시 다뉴경을 종합 검토하여 우리나라 청소기시대를 일본의 수야륭부의 세문경형식분류를 부분적으로 비판하여 AⅠ식을 춘추말인 B.C. 6∼B.C. 5세기 초 경으로 AⅡ식은 B.C 400년전후, AⅢ식은 B.C. 300년전후, BⅠ·BⅡ식은 B.C. 3세기, BⅢ·BⅣ식은 B.C. 200년전후, C식은 B.C. 2세기경으로 편년하고 금강 중류의 부여·익산지구의 B형식경들은 B.C. 2세기초경에 준왕남천시 가지고 내려온 대동강류역제품이고 이 때가 남한지방에 본격적인 청동방화의 이식으로 보고 CⅢ·CⅣ식은 남한에서 서북―동북한으로 각각 북상했다고 주장한 글이 전영래에 의해 발표되었다. 주 449449 전영래(1977).닫기 그는 중국 남산근청동유물을 검토하여 한국청동기의 류입기는 B.C. 6세기전반을 결코 상회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주 450450 전영래(1978).닫기
료녕지방까지 포함하여 동검의 형식을 Ⅰ식(비파형), Ⅱ식(전형세형동검), Ⅲ식 및 Ⅳ식(변형세형동검)으로 나누고 다시 각식에 따라 세분하여 ⅠA식의 상한은 B.C. 10세기보다 약간 늦고 ⅠB식은 B.C. ∼8세기로, ⅡA식은 B.C 5∼4세기, ⅡBa는 B.C. 4∼3세기로, ⅡC 전한오수전기, ⅡD는 B.C. 1세기에서 A.D. 1세기정도로 보아 결론적으로 보아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연대의 상한을 B.C. 1000년기의 초기를 하한은 B.C. 1세기 정도로 금정학은 편년했다. 주 451451 금정학, 《한국の고고학》(하출서방, 1978).닫기
한국식동검의 형식변화를 결입부에 해당되는 등대 마삭부의 상·하량단의 륭대의 존부를 기준해서 고식인 련화리식에서 괴정리식과 남성리식으로 발전하여 대곡리식을 거쳐 만촌동과 상일동식이 된다고 서렬을 매기고 그 년대상한은 B.C. 6세기 경 소멸은 기원전후로 주장했다. 주 452452 금영하(1978).닫기
료녕지방의 청동기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청동문화의 연원문제를 리강승이 다루었는데 하가점상층문화와 료녕동검문화는 전통이 다른 별개의 문화로 보았고 하가점상층문화는 오르도스청동문화바탕에 중국청동기문화가 가미된 것이고 요녕동검문화는 그 연원이 미지수임과 하가점상층문화에서는 오로도스검, 안테나식 검, 중국식 과·모, 그리고 류엽형족이 특색인 점 등을 밝혔다. 주 453453 리강승(1979).닫기
경남지방의 청동기유적과 유물을 연구한 정징원은 4개군으로 나누어 Ⅰ군은 변형요령식동검, 유경식양익촉, 일단병석검, 유경식석족, 단도마연토기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B.C. 4세기 전후로, Ⅱ군은 Ⅰ식 세형동검, 단도마연토기, 흑색마연토기를 포함하는 것으로 B.C. 2세기 전반대로, Ⅲ군은 Ⅱ식세형동검, Ⅰ류협봉동모, 동鉇를 대표하는 B.C. 2세기 말∼1세기 초로, Ⅳ군은 Ⅱ식검의 소멸, 이형청동기가 나타나는 시기로 A. D. 1세기의 중심으로 보는 편년을 내 놓았다. 주 454454 정징원(1982).닫기
세형검검시기의 유적·유물을 5군으로 구분하여 리청규는 Ⅰ군은 BⅠ식 세형동검·조문경·석관묘·지석묘·홍도·마제석검 등이 일부 존속하는 시기로 보고 B. C. 4세기 말이라 보고, Ⅱ군은 BⅡ식 세형동검·조문경·석관묘·흑도·점토대토기가 공반되는 시기를 연의 영향을 받아 동모, 동鉇가 출현하는 시기로 실년대상으로는 연세력의 진입시기인 B.C. 4세기 말∼3세기초 이후로 보고, Ⅲ군은 토광묘·옹관묘성행, BⅡ식·CⅠ식검, 세문경, 동모AⅡ식동검AⅠ식·AⅡ식, 유견석부가 특징적인 시기로 서북지방에서는 한국식차마구가 남한지방에서는 의식용 동령구가 성행하는 B.C. 2세기초를 상한으로 위만조선 성립시기로 보고, Ⅳ군은 한사군설치의 영향으로 서북한 세문경소멸, CⅠ식검·동과가 소멸하는 시기가 B.C. 100년경으로 Ⅴ군은 완전한 철기시대로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주 455455 리청규(1981).닫기
일제시대 평남 개천 룡흥리에서 출토된 청동유물일괄을 소개하고 중국출토 청동유물과 비교분석하여 만주식동검의 경우 B.C. 6∼5세기경에 들어 왔고, 세형동검은 B.C. 4세기 경에는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룡흥리유물은 B.C. 5세기 경으로 주장했다. 주 456456 한병삼(1968).닫기
무주출토라고 전하는 료녕식동검을 소개하면서 금원룡은 십이태영자출토례에서 언급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상한을 서기전 500∼600년에서 200∼300년 더 올릴 수 있다고 수정견해를 밝혔다. 주 457457 금원룡(1974).닫기 그는 또 새로 발견 소개된 침양 정가와자 청동기시대묘을 분석하여 료녕식동검의 형식발전을 조형→Ⅰa(무주·송국리식)→Ⅰb(남산근, 후목성식)→Ⅱa(십이태영자·침양식)→Ⅱb(개천룡흥리, 료녕사아보식)→한국식동검Ⅰ식으로 금원룡은 제안했다. 주 458458 금원룡(1976).닫기
부여 송국리출토 료녕식동검을 분석하여 청동기의 실년대를 기원전 9세기로 주장했다. 주 459459 안승주(1975).닫기 화순출토 일괄청동기유물을 검토하여 유물의 년대를 기원전 5∼4세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 있다. 주 460460 조유전(1984).닫기
익산출토로 전하는 이형동기를 원형유문청동기로 이름하고 이러한 이형동기를 종합검토하여 이 청동기의 문양을 시베리아 토속미술문양과도 비교하여 내구의 십자문을 샤마니즘에서의 태양의 상징이라 해석하고 년대를 B.C.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로 보았다. 주 461461 리건무(1984).닫기
그밖에 청동기에 새겨진 농경의 장면과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분석하여 따비로 밭을 가는 단계를 지나 누경이 시작되고 나무위의 새는 기록에 보이는 소도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이것은 제를 올릴 때 신을 부르는 것으로 해석했다. 주 462462 한병삼(1971).닫기
이외에 발해지역 동경을 연구하여 이들의 화학분석을 통해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이 중국 중원지방의 은허에 있고 B.C. 14∼13세기로 보고 동북아지역의 초기청동기문화의 중심지가 기자조선의 구강이 발해지구라는 주장도 발표되었다. 주 463463 리형구(1983).닫기
이상과 같이 청동유물에 대한 연구를 보면 동검의 형식변화에 따른 시기구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동검의 출자 즉 발생과 한반도 류입의 과정이 중국계냐 비중국계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체로 보아 료녕청동기문화의 계통발전이라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시각으로 되어 왔으나 중국 중원 영향이라는 새로운 시각은 청동유물의 화학분석을 통해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어 주목되며 타청동유물에 대한 적극적인 성분분석이 요망되며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주 397
: 이 외에 지탑리, 공귀리 유적 등이 있다.
주 398
: 김원룡(1964).
주 399
: 김원룡(1960).
주 400
: 김원룡(1960).
주 401
: 김원룡(1964).
주 402
: 이 시기에 북한에서 조사된 무문토기유적은 다음과 같다. 라진초도(1949)·언산리(1950)·회녕오동(1954∼1955)·평양 금탄리(1955)·공귀리(1955)·풍산 지탑리(1957)·시중 심귀리(1958), 의주 미송리(1959)·녕변 세죽리(1962) 평양 정백동(1966) 등.
주 403
: 이 시기에 남한에서 조사된 유적으로는 다음과 같다.경기도 수석리(1966)·강동구 명일동(1961)·송파구 가악동(1964)·파주군 옥석리·교하리(1967) 등.
주 404
: 김정학(1963).
주 405
: 김양선 외(1968).
주 406
: 김재원 외(1967).
주 407
: 이 밖에 의산 오금산(1967)·해미 휴암리(1967∼1970)·아산 남성리(1975)·예산 동서리(1975)·광주 송암동(1976)·진양 대평리(1979) 등이 있다.
주 408
: 임효재(1978).
주 409
: 강인구 외(1979).
주 410
: 김정학(1967).
주 411
: 임병태(1969).
주 412
: 이백규(1974).
주 413
: 김원룡(1968).
주 414
: 윤무병(1975).
주 415
: 이백규(1979).
주 416
: 안춘배(1979).
주 417
: 한영희(1983).
주 418
: 이건무(1986).
주 419
: 노혁진(1987).
주 420
: 노혁진(1987).
주 421
: 이백규(1984).
주 422
: 최몽룡(1984).
주 423
: 이청규(1988).
주 424
: 임병태(1986).
주 425
: 이백규(1986).
주 426
: 최무장(1983).
주 427
: 윤무병(1975).
주 428
: 금량선(1962).
주 429
: 금원룡(1971).
주 430
: 윤덕향(1977).
주 431
: 전영래(1977).
주 432
: 금창호(1981).
주 433
: 전영래(1987).
주 434
: 임세권(1977).
주 435
: 최성락(1982).
주 436
: 금원룡, 〈한국도재기원에 대한 일고찰〉(《진단학보》 25·26·27, 1964).
주 437
: 안승모(1985).
주 438
: 금상면(1985).
주 439
: 최인선(1985).
주 440
: 금원룡(1964).
주 441
: 로혁진(1981).
주 442
: 금원룡(1961).
주 443
: 정찬영, 〈좁은놋단검의 형태와 그 변찬〉(《문화유산》 62-3, 1962).
주 444
: 윤무병(1966).
주 445
: 매원말치·등전량책, 《조선고문화종감》.
주 446
: 윤무병(1972).
주 447
: 윤무병(1976).
주 448
: 전영래(1976).
주 449
: 전영래(1977).
주 450
: 전영래(1978).
주 451
: 금정학, 《한국の고고학》(하출서방, 1978).
주 452
: 금영하(1978).
주 453
: 리강승(1979).
주 454
: 정징원(1982).
주 455
: 리청규(1981).
주 456
: 한병삼(1968).
주 457
: 금원룡(1974).
주 458
: 금원룡(1976).
주 459
: 안승주(1975).
주 460
: 조유전(1984).
주 461
: 리건무(1984).
주 462
: 한병삼(1971).
주 463
: 리형구(1983).
3. 주거지
주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연구는 과거인의 사회생활상을 파악한다는 측면에서 밀도있게 다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 연구나 성과는 양과 질에 있어서 미미한 편이다. 강릉 포남동주거지에서 보여진 유물배치를 통해서 주거인의 생활상의 일단을 복원하여. 두 개의 로를 중심으로 남녀들이 각각 음식처리 또는 기타공작 등의 일을 하였고 벽상부의 선반같은 어깨부에는, 북측에는 물품 또는 기타 중요공구를, 기타부에는 아주 적은 것이나 그저 당장 필요한 것을 얹어 두었던 것으로 추정 복원하였다. 그리고 석기와 기타 도구들의 제작을 전문으로 한 특수직업인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반월형석도나 석족·석검 등에서 시사되듯이 농경과 수렵같은 일반적 식량획득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한 듯하다고 추정한 글이 있다. 주거지에 관한 발굴조사가 극히 부족했던 상황에서 주거생활의 복원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생활의 측면까지 파악해 보고자 한 시도는 높이 평가받아야 하겠다. 주 464464 금원룡(1969).닫기
금정기는 무문토기문화기에 해당되는 수혈주거지를 총망라하여, 집락과 주거의 립지, 주거형태, 주거면적, 수혈의 깊이, 수혈내부시설, 주거의 폐기, 유물의 분포와 주거공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는데, 특히 면적을 계산하여 당시 주거의 표준적인 면적이 20㎡로 추정하고(1인이 차지하는 면적은 5㎡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이 연구는 주거지연구에 관한 총체적 연구는 물론,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 465465 금정기(1974).닫기
금홍식은 선사시대 살림집의 구조와 발달과정을 민속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복원하였다. 주 466466 금홍식, 〈선사시대 살림집 구조에 대한 연구〉(《문화재》 11, 1977).닫기 청동기시대의 살림집의 구조와 발달과정을 가설적으로 복원 제시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지상주거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건축도구가 발명되었으며, 벽의 발생·나무의 세공이 가능해져서 가구식방법에 의한 지상주거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귀틀집·맞걸이형집·맞배집·모임지붕등집·함각지붕집 등의 복원도도 제시하였다. 집자리터의 평면형태, 기둥자리의 존재, 서까래의 출토여부 등만을 근거로 살림집을 추정·복원하던 종전의 접근방식과는 달리 민속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그 구조적 복원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만한 연구라 하겠다. 주 467467 위와 같음.닫기
최몽룡은 청동기시대의 주거생활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우선 학자에 따른 청동기시대의 편년설정을 소개하고 방사선탄소년대측정법으로 측정한 발굴주거지의 절대연대를 살펴보았다. 그런 후 주거지분포지를 도면으로써 나타내고 수혈주거지가 전국적으로 동일한 문화권을 보일 정도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지역 간의 다른 특징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단편적으로 보였던 주거지에 관한 부원들을 종합하여 살펴보았고, 아울러 주거지연구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주 468468 최몽룡(1983).닫기
림영진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움집을 평면형태, 기둥배치상태, 움·반움의 구분 등 4가지 구성요소에 따라 분류하고 대하천을 중심으로 한 각지역별 상대편년을 설정한 후, 지역별 및 시대를 통관하여 그 변천상을 살펴보았다. 청동기시대움집에 관한 부분만을 정리하면, 장방형평면이 대다수를 차지하나 방형이나 원형이 우세한 지역도 보이며, 반움집은 초기에 방형평면에서 나타나서 점차 장방형평면으로 변해 가고, 두만강류역의 동북지방은 장방맞배렬반움집, 서남부지방은 원잡 주형움집, 한강류역에서는 여러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것으로 살폈다. 그리고 내부시설의 변화를 살피면서 화덕의 경우 무문토기 말에 이르면서 두 개인 비교적 큰 집이 나타나는데, 이는 농경의 정착으로 생활이 안정되면서 점차 혈연간의 유대가 강화되면서 대가족제도가 생겨난 때문으로 보았다. 주 469469 림영진(1985).닫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집터의 구조와 지역적 특성, 복원을 시도한 윤기준은 평면장방형이 84.1%의 주류를 이루고, 움깊이는 평균 53.0㎝로 나타나며 화덕자리를 갖춘 집터는 66%에 해당됨을 밝히고, 부여 송국리 55-6호, 춘성 내평리주거지, 진양 대평리주거지, 송림 석탄리 31호 주거지, 강계 공귀리 5호 주거지 등의 복원도를 제시하였다. 주 470470 윤기준(1985).닫기
최몽룡은 흔암리주거지발굴조사를 종합분석하면서, ① 흔암리의 장축방향은 남북장축으로 일정한 규칙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대다수의 주거지가 등고선과 평행되게 축조된 사실을 입증하며, ② 주거지 면적상의 차이는 시대적 차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수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며, ③ 흔암리 각주거지의 평균인구수는 대략 4∼7명이고, 그 가족형태는 단혼적인 소가족이거나 일부일처제적인 소가족제도일 것으로 모았다. 그리고 제13호와 제14호 주거지의 경우 주거지내부의 공간을 토벽으로서 량분시킨 흔적이 있는데, 이는 동일주거지 내부에서 주거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방편이라 생각하고, 또 면적이 다소 넓은 주거지의 경우에는 주거지공간을 량분해서 남녀성별에 의한 주거공간을 구분한 것으로 생각했다. 주 471471 최몽룡(1987).닫기
이상 언급한 주거지에 관한 연구들과 주거지발굴조사를 통한 보고자의 소견 등을 종합해 볼 때, 주거지에 대한 연구는, ① 한 지역에 대한 발굴을 통하여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주거지와의 형태상의 차이점이나 지역적 특성, 구조적인 상사점과 상이점, 주거지의 사용시기, 반출유물의 특징 등을 고찰한 부분적인 연구성과, ②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주거지에 대한 형식분류를 시도하고 지역적 차이점을 고려하고 편년을 설정하는 기본적인 연구들, ③ 주거지의 입지조건, 주거지 면적상의 차이, 주거지 내의 특히 구조 등을 근거로 생활상이나 문화양상을 추정한 글들, ④ 수혈·반수혈 등의 평면형태나 깊이·기둥구멍자리·서까래의 존재여부 등등 주거지 내의 구조적인 특성을 근거로 주거의 원형을 복원하거나, 민족지적 자료를 통하여 원시시대의 가옥구조를 복원해 보고자 하는 글들이 소수 발표되었다.
주거지에 대한 충분한 발굴조사가 행해지지도 않고, 형식분류나 편년설정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양상의 복원을 시도하는 것은 개인적인 추정 이상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할 가능성이 크며, 특히 부분적인 단일유물에 근거한 생활상의 추정은 객관성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주거지의 복원적 작업들은 민속학적 자료의 충분한 수집, 건축구조적인 역학관계에 관한 기초적 지식의 습득, 다양한 발굴조사자료의 축적 등 다각적이며 총체적인 방법으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겠다.
한편, 주거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몇 기의 유구에 대한 단기간 내의 조사를 통하여 유적의 대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고, 지역적인 유적·유물의 자료들을 제공하는 부분적 발굴조사와, 특정지역을 장기간 혹은 년차적으로 조사하여 주거기간의 공·시간적 또는 기능적 관계 등을 고려하는 전체적 발굴조사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의 예로 양주군 수석리주거지, 가악동주거지, 송암동주거지, 중도주거지, 중원 하천리지구주거지, 정읍 만화리주거지 등을 들 수 있는데, 긴급 혹은 구제발굴이거나 지석묘 등 다른 유적들을 발굴조사하다 우연히 조사된다든지 하여 주거의 평면형태, 로지나 기둥자리의 유무, 출토유물의 소개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부분적인 조사인 경우가 많았다. 후자는 여주 흔암리주거지, 부여 송국리주거지, 승주 대곡리주거지 등이 대표적인데, 주거구조의 시대적 변화과정은 물론 연구자에게 사회 경제적 일면을 추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또 탄화미의 분석을 통한 실년대의 도출까지도 가능케 하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유적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생활상의 복원과 주위환경에의 적응방법 및 사회계층의 문화정도 등을 파악하는 데 있다고 볼 때, 후자와 같이 장시간에 걸쳐서 조성된 집단취락지에 대한 가능한 범위내의 전면발굴이 보다 요청된다 하겠다.
주 464
: 금원룡(1969).
주 465
: 금정기(1974).
주 466
: 금홍식, 〈선사시대 살림집 구조에 대한 연구〉(《문화재》 11, 1977).
주 467
: 위와 같음.
주 468
: 최몽룡(1983).
주 469
: 림영진(1985).
주 470
: 윤기준(1985).
주 471
: 최몽룡(1987).
4. 제사유적
제사유적의 관한 연구는 암각화와 바위구멍에 관한 연구로 대별되고, 그 외에 선사시대의 신상이나 선돌 등의 연구가 있다.
리은창은 고령 량전동의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통해 청동기시대의 농경인들이 태양신을 신앙하면서 주술적인 회화를 상징적인 기호로 표시하여 제단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주 472472 리은창(1971).닫기
울주 천전리 암각화 및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조사되어 이들의 그림이 선사시대에 해당되나 특히 반구대 암각화의 내용은 사람, 고래 또는 물고기·사슴·호랑이·맷돼지·곰·여우·토끼 등 짐승 120여 개, 고래잡이 배와 어부, 사냥광경 등 기타 명칭불명동물 등 모두 150여 점으로 북유럽이나 신석기시대 사냥예술과 직결되는 내용으로 보고 B.C. 3000년대의 신석기시대중기에 비정하는 견해를 피력했다. 주 473473 문명대(1973).닫기
한반도 암각화의 제작과 형식분류를 시도하여 기법상으로 Ⅰ∼Ⅶ기법으로 나누고 Ⅲ기법이 청동기시대후기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제작된다는 주장을 황룡혼은 하고 있다. 주 474474 황룡혼(1975).닫기 이에 대해 금원룡은 이 암화는 수령·어로의 성공과 대상동물들의 번식과 풍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위령을 기원구원하는 수렵경제사회의 소산으로 보고 그림의 구획을 5구로 나누고 시간적 순서를 작성된 것을 밝히고 대곡리인들은 처음 해수하는 사냥을 주로 하고 산수사냥을 부로 하였으나 도중에 어느 단계부터 산수사냥으로 주력을 전환한 것으로 해석하고 아울러 해→산으로의 전환은 해면후퇴같은 리유로 바다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암화의 연대는 노·외양선의 존재 그리고 천전리암화 등과의 비교 고찰로 철기를 동반하는 청동기후기부터 원삼국시대초 실년대로 B.C. 300∼A.D. 100년기 간 약 4세기 동안에 걸친 것이라 주장했다. 주 475475 금원룡(1980).닫기
울주 천전리의 암벽조각을 제작한 민족은 신석기시대내지 그후 또는 청동기시대초기인들일 가능성을 주장하고 북방민족과 친연성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확신하는 주장과 또 대곡리 암벽조각은 상대편년으로 신석기말기에서 청동기시대후기 이후로 년대를 설정하고 있는 주장이 있었다. 주 476476 황수영·문명대(1985).닫기
여기에 대해 평면그림과 선그림을 분석하여 평면그림에는 물짐승과 뭍짐승들이 거의 같은 비율로 그림은 뭍짐승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평면그림에 비하여 선그림이 사납고 큰 짐승을 표현했고 선그림이 평면그림보다 후에 그려진 것으로 평면그림집단은 고래숭배신앙의 결과로서, 이들 평면그림은 신석기시대후기에 앞서 그렸고 선그림은 신석기시대후기로 편년한 글이 정동찬에 의해 발표되었다. 주 477477 정동찬(1988).닫기
황룡혼은 동북아시아의 선사시대 암각화 전체를 다루면서 우리나라 선사시대 암각화의 류형,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몽고초원지대와 만주연해주에 걸쳐 분포해 있던 고Asia족의 신석기문화에서는 암각화를 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조각되면서 청동기문화 후기에 와서는 수렵·어로·목축의 광경이 암각화에 나타나 이 유형의 암각화는 타이가지역·몽고지역·아무르―우수리지역·내몽고·한반도·중국의 일부지역을 막론하고 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것은 동북아시아지역 유목민과 연관되는 청동기문화가 후기에 와서는 동북아시아 전지역에서 공통적 동질문화현상으로 정착된 것을 말해 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암각화는 아무르―우수리강유역의 암각화와는 구분되는 타이가지역과 몽고지역암각화와 연관되는 암각기법임을 밝혔다. 주 478478 황룡혼(1987).닫기
한편 울주 천전리암각화를 검토하고 이 암각화를 신석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울주 대곡리 암각화를 분석하여 이들 암각화가 청동기시대보다 앞선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주장한 글이 발표되어 주목되었다. 주 479479 이기길(1986).닫기
바위구멍에 관한 연구로는, 우선 황룡혼이 지석묘 개석상에 나타난 cup-mark을 성혈로 본 글이 발표되었고, 주 480480 황룡혼(1974).닫기 이어서 한창균이 고고학적·민속학적인 입장에서 생산과 풍요를 빌며 아들을 바라는 신앙의 대상이였다는 주장도 발표되었다. 주 481481 한창균(1984).닫기
금원룡은 석·골·토제인상을 퉁구스족의 조신목상처럼 샤마니즘에 입각한 조상신, 생산신수호신으로 보고 그 전통이 고구려의 목추, 고려시대의 부여신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한 글을 발표되었으며, 주 482482 금원룡(1982).닫기 이융조는 선돌의 성격을 기념비적 존재에서 고인돌과 분리되어 남녀를 뜻하는 쌍석으로 되고 마지막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변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주 483483 이융조닫기 또한 한규량은 원시국가 이전의 년장자나 현자가 지배하는 족장사회(chiefdom)로 볼 때 노동력과 의식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믿음을 제공하기 위해서 선돌 등의 숭배물을 축조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주 484484 한규량(1984).닫기
한편, 고인돌축조인들의 의식을 다룬 글들이 몇 편 발표되었다. 고인돌의 무덤방이 물의 흐름과 나란하여 고인돌사회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본 글이 있으며 주 485485 박희현(1983)닫기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남성임을 밝히고 지위는 지배자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붉은 흙, 붉은 간토기의 존재는 영생을 기원하는 내세관으로 주장한 글도 있다. 주 486486 이융조(1981).닫기
고령 량전동과 울주 대곡리·천전리 등의 암각화에 관한 연구는 그것이 신앙유적이라는데에 의견의 일치가 있으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신석기시대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기철기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어 그 시기적인 폭이 극히 큰 것이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암각화의 계통성문제, 암각화의 분석과 그 의미 등에 대한 부분적인 연구 등이 있었다. 암각화에 대한 연구는 자료가 몇 예에 불과하고, 그 편년선정도 극히 류동적이며 암각화의 해석자체도 피상적이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자료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한반도의 지역에서 보고된 암각화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분석, 암각화발견지역의 주변에 대한 정밀조사, 제작기법의 복원, 그리고 방계자료의 활용 등 초보적인 단계의 연구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기타 바위구멍이나 신돌, 고인돌축조인의 의식 등의 연구는 아직까지 개연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 472
: 리은창(1971).
주 473
: 문명대(1973).
주 474
: 황룡혼(1975).
주 475
: 금원룡(1980).
주 476
: 황수영·문명대(1985).
주 477
: 정동찬(1988).
주 478
: 황룡혼(1987).
주 479
: 이기길(1986).
주 480
: 황룡혼(1974).
주 481
: 한창균(1984).
주 482
: 금원룡(1982).
주 483
: 이융조
주 484
: 한규량(1984).
주 485
: 박희현(1983)
주 486
: 이융조(1981).
5. 사회·경제
청동기문화의 사회적 성격이나 경제발달단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들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금원룡은 강릉 포남동유적을 통하여 ① 직경 1m의 로가 2개 보고되었는데, 한 로주변에 5∼6인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다고 볼 때, 적어도 2∼3인 정도의 핵가족일 가능성이 크며, ② 4개의 년석의 존재로 미루어 소수인원의 단일 핵가족이 사용하기에 너무 많다고 보았다. 주 487487 금원룡(1969).닫기
문명대는 울주 반구대의 암벽각화에 나타난 그림들을 통해서 제작당시의 사회단계는 물가에서 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낮은 단계의 사회가 아니라 배를 타고 원양에서 고래잡이를 할 수 있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냥을 하는가 하면 그것들을 암벽에도 그릴 수 있었던 사회적인 통제내지는 통치가 이루어졌던 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단계로 보았다. 주 488488 문명대(1973).닫기
금정배는 선사학의 접근방법과 력사학의 접근방법을 이용하여 무문토기시대에 들어와서 농경을 중시하게 되었고 식량생산단계에 접근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주거지 내에서 동물의 뼈가 보고되지 않고 화살촉이 널리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가축의 사육보다는 수렵이 성행한 것 같다고 하였다. 아울러 방추차가 전국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 보아 방직기술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았다. 주 489489 금정배(1974).닫기
리륭조은 영국의 선사유적인 Stonehenge의 축조 및 운반방법을 곧바로 우리나라 지석묘에 대비시키고, 한국고인돌사회의 인구는 30만명으로 추산하면서 노동력과 토지를 개발하여 농산물의 축적을 전제로 하는 지석묘사회는 사회발전단계로 보아 족장사회(chiefdom)로 비정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주 490490 리륭조, 〈양평 양적리 고인돌문화〉(《한국의 선사문화―그 분석적 연구―》, 1981).닫기
윤용진은 삼국의 고대국가가 완성되기 전단계에 존재했던 토착사회의 형태를 다루면서 지석묘군이 수 개의 기로 나누어져서 범람원의 자연제방 위나 구릉 위에 유존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의 토착사회가 몇몇의 취락으로 분할되어 존재했으며 동등한 힘을 지닌 세력집단으로 결속되는 형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주 491491 윤용진, 〈국가형성이전의 취락형성기의 대구〉(《동양문화연구》 1, 1974).닫기
리종욱은 신라국가의 정치·사회 적 발전단계를 제1기=사로 6촌시대(B.C. 7∼2세기), 제2기=사로소국시대(B.C. 2세기 말∼A.D. 1세기 중반), 제3기=진한소국정복기(A.D. 1세기후반∼3세기말)로 구분하고, 제1기인 사로륙촌은 지석묘사회로서 chiefdom사회에 비정된다고 하였다. 주 492492 리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일조각, 1982).닫기
리남석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묘제와 부장품을 검토하여 고인돌 돌널무덤·비파형동검단계를 청동기전기로 보고 계급형성의 초기단계를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단계로 보았고 널무덤·변형돌널무덤·돌무덤단계를 후기로 보아 이 시기를 군장사회로 보았다. 주 493493 리남석(1984).닫기
최몽룡은 지석묘축조시 필요한 채석상의 기술, 운반의 규모로 보아 지석묘의 피장자는 당시의 족장이거나 또는 거기에 상응하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자나 그들의 가족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지석묘가 타원형으로 배치된 지석묘군은 적어도 피장자의 동족이거나 가족에 가까운 혈연관계집단의 공동묘임을 알 수 있다고도 하였다. 한편 유물로 볼 때 신분상의 차이없이 그대로 똑같은 비중을 지닌 중요한 부장품들이 동일한 지석묘군내의 석실들에서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것은 지석묘 축조로 보아 당시 지석묘사회에 있어서 일반부락민과 지배계층간의 두계급의 차이는 있었으나 실제 지석묘를 축조할 수 있는 지배자의 계급내에서는 성별·신분의 구별없이 일가족성원이나 그에 해당되는 혈족이 한 곳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가족의 공동묘지를 이루어 묻힌 것으로 보았다. 주 494494 리현혜(1978).닫기
세형동검문화단계의 량대문화중심지인 고조선사회와 진국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살피면서 농업생산력의 증대현상을 추출하고 교역의 전개가능성을 타진하여, 서북지방은 목제경기구의 점진적 개발을 통해 휴경기간을 단축시키고 더욱 토지의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전체적인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켜 나가고, 서북지방은 기후와 토양적 특성을 살려 벼농사재배를 확대시켜 나갔음을 밝히고 한편 자원의 불균등한 분포가 교역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주 495495 최몽룡(1987).닫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축조사회의 사회발전단계가 chiefdom사회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임을 알 수 있었다. 현재의 연구에 더하여 chiefdom사회로 규정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에 대한 검토들이 더욱 더 가하여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기타 가족제도의 파악, 식량생산단계의 추정, 지석묘축조사회의 인구추산 등의 연구들은 개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의 극복은 한 문제에 대한 분석·검토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청동기문화의 개별주제들에 대한 연구들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선상에서 풀릴 수 있는 문제라 생각된다. 따라서 자료의 집적과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개별주제에 대한 연구들이 알차게 쌓여지길 요망한다.
주 487
: 금원룡(1969).
주 488
: 문명대(1973).
주 489
: 금정배(1974).
주 490
: 리륭조, 〈양평 양적리 고인돌문화〉(《한국의 선사문화―그 분석적 연구―》, 1981).
주 491
: 윤용진, 〈국가형성이전의 취락형성기의 대구〉(《동양문화연구》 1, 1974).
주 492
: 리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일조각, 1982).
주 493
: 리남석(1984).
주 494
: 리현혜(1978).
주 495
: 최몽룡(1987).
6. 도작 및 기타
도작에 관한 연구는, 그것이 농업생산력의 수준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지석묘·반월형석도·유구석부·토기 등의 전파경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학자들에 의해서 중요한 테마로 취급되면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금원룡은 문화의 이동에는 반드시 운반인으로서 사람이 따르고 있는 것이며 토기와 석기만이 혼자서 덜렁 굴러 오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에서 반월형석도와 유구석부를 분석하여 도작의 전파경로를 추정했다. 우선 화북지방의 반월형석도가 흑도 등과 함께 우리나라로 들어 올 때 도작법이 함께 전파된 것으로 륙로를 통한 도작전파북로설을 내세웠다. 그런 한편 중국의 복건·강남·광동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면서 화북지방의 산동·하서 및 동북제성에서 극소수로 출토되는 유구석부가 함경북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중국해안지대에서 해로를 통해서 우리나라 남북해안으로 전래해 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여 서방설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쌀은 어느 한쪽으로만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서북량로로 들어 온 것이라는 절충설을 제시했다. 주 496496 금원룡(1969).닫기
금정학은 무문토기유적이 주로 구릉지대에 분포하기 때문에 이때의 농경은 화전농업이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이 시기에는 아직 화전에 의한 도작은 행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국동서해안으로부터 한국서남부에 흑도가 전래된 때에 수도재배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주 497497 금정학, 〈고고학상으로 본 한국문화의 기원〉(《한국문화인류학》 2, 1969).닫기
금정배는 반월형석도의 존재는 수도와 직접 관계를 지을 수는 없지만 벼의 재배와 깊은 연관성을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한편으로 금해패총에서 탄화미가 출토되었고 중국의 도작이 성행한 지역이 양자강이남이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삼한에 관한 기록에서 벼농사의 기록이 실린 점, 그리고 변진지방이 일본보다 우위의 문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경제생활의 안정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서 한국의 도작이 남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주 498498 금정배, 〈한국청동기문화의 사적 고찰〉(《한국사연구》 7, 1977).닫기
리춘녕은 벼농사의 전파경로에 대해서 료동반도를 거쳐서 북쪽으로 들어 왔다고 보았는데, 그 근거로 우리나라 도작법이 화북과 비슷하고 조선시대 박제가가 《북학의》에 화북종을 그만두고 강남미를 재배할 것을 건의한 사실을 들었다. 주 499499 리춘녕, 〈한국농경기원에 관한 소고〉(《민족문화연구》 7, 1977).닫기
지건길·안승모는 벼농사의 전파경로에 대한 연구사를 간략히 소개한 후 고대미가 출토된 유적이나 볍씨자국이 찍힌 토기가 출토된 유적들을 소개한 후 라주 다시면 주흥리의 영산강강안의 습원에서 채취된 벼의 화분분석에 의거해 이미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 벼가 재배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늦어도 기원전 1천년기전반에는 중남부지방에 벼농사가 정착되어 차츰 잡곡농사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청동기말기에는 중남부지방에서 정착하기 시작하여 송국리에서처럼 중남부지방에서는 본격적인 벼중심의 논농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으로 보았다. 주 500500 지건길·안승모, 〈한반도 선사시대출토 곡류와 농구〉(《한국의 농경문화》, 1983).닫기
손보기는 경기도 강화군 우도에서 신석기토기 겉면과 조각사이에 끼어진 볍씨자국과 경기도 파주군 도척면 궁뜰에서 채집된 민토기밑바닥의 볍씨자국이 새로이 발견되어 이들의 분석결과 인도형임이 밝혀지게 되어 우리나라 벼농사가 신석기후기에 이미 인도형이 들어 와 있었음을 지적하고 지금까지 신석기후기부터 청동기시대에 재배된 볍씨의 종은 일본형만 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주 501501 손보기(1987).닫기 한편 리청규는 청동기시대유적출토 탄화미의 품종을 볼 때, 단립형으로서 중국으로부터 황해를 거쳐 서북지역에 전래된 것이 확실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주 502502 리청규, 〈광복후 남북한 청동기시대의 연구성과〉(《한국고고학보》 21, 1988) p.74.닫기
침봉근은 청동기시대의 도작농경에 대한 종합적 고찰을 시도 도작농경에 대한 연구사를 일본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약술한 후, 중국·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고대미를 소개 비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나라 도작농경의 시작은 현재의 단계로서는 경기도 흔암리유적의 출토 탄화미를 최대의 표식으로 하는 B.C. 7세기 이전이라는 견해를 도출해냈다. 그리고 그 전파과정은 중국 화남지방에서 시작된 장립형의 벼가 화중·화북지방을 거쳐 점차 북상하는 동안 일단 단립형으로 개량되고 이 개량된 품종은 다시 각종 마제석기와 홍도 및 공열토기를 동반하는 우리나라 무문토기문화권에 전래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전래된 도작은 나중에 지석묘와 함께 일본의 야요이문화를 형성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북방설을 지지하였다. 한편 장립형 고대미 및 승문·인문의 회도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초기 도작유적에서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남방설을 부인하였다. 주 503503 침봉근, 《한국청동기문화의 리해》(1990).닫기
이상, 도작에 관한 연구는, 그 전파경로를 해양을 통한 남방설에 두느냐 아니면 륙로를 통한 북방설에 두느냐에 하는 시원지와 전래경로에 관한 주장들로 집약되고 있다. 그리고 주장의 근거들은 유구석부·반월형석도·흑도 등 유물을 통한 접근과, 고인돌·입석 등 묘제를 통한 접근방법, 그리고 탄화미의 품종분석을 통한 비교검토 등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도작의 전파경로문제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전파문제와 직접·간접으로 연관되어 있고, 농업생산력의 단계, 더 나아가 사회발전단계의 추정에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외에, 리건무는 땜질한 청동기를 관찰하여 청동기수리의 한 방편인 땜질에 대해 이 방법은 료녕식동검문화 류입기부터 청동기가 제작된 전기간에 걸쳐 있었으므로 청동기 제작기술이 가장 뛰어난 시기에는 땜질이 거의 보이지 않고 땜질의 기법으로 일반적으로 톱니바퀴형상, 반원형의 귀(이)형상, 원두은장이음땜방법이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리인숙은 선사곡옥에 대해 이들은 무문토기류와 마제석기 특히 청동기무기류 등과 공반하여 석관묘에서 많이 출토됨을 밝혀내고 한강이남지역에 동검·동경과 일괄세트로서 출토되는 례는 주술적 의기를 소유한 권력자로서 특정집단의 소산으로 보여지는 선사곡옥의 연대를 대체로 B.C. 500∼B.C. 300∼200까지 널리 쓰였다고 주장한 글이 발표되었다. 이밖에도 세형동검과 검파형동검의 조형상의 의미해석, 청동기시대 문양의 연구 등 새로운 주제들에 대한 조사·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지석묘 형식분류나 편년 청동기 중 세형동검·동검 등 몇몇 유물에 대한 연구, 도작의 전파경로 등 한정된 연구주제에서 벗어나 문양·곡옥·땜질기법과 같은 신선한 주제에 대한 연구들은 청동기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 깊이를 심화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기에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다각적이고 참신한 접근들이 계속 시도되길 요망해 본다.
주 496
: 금원룡(1969).
주 497
: 금정학, 〈고고학상으로 본 한국문화의 기원〉(《한국문화인류학》 2, 1969).
주 498
: 금정배, 〈한국청동기문화의 사적 고찰〉(《한국사연구》 7, 1977).
주 499
: 리춘녕, 〈한국농경기원에 관한 소고〉(《민족문화연구》 7, 1977).
주 500
: 지건길·안승모, 〈한반도 선사시대출토 곡류와 농구〉(《한국의 농경문화》, 1983).
주 501
: 손보기(1987).
주 502
: 리청규, 〈광복후 남북한 청동기시대의 연구성과〉(《한국고고학보》 21, 1988) p.74.
주 503
: 침봉근, 《한국청동기문화의 리해》(1990).
Ⅳ. 년대문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언제부터 보아야 하는가는 항상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학자에 따라 주장이 상이하여 갈피를 잡기 힘들다. 청동기시대의 개념을 주동이 시작된 단계로 거푸집·채광유적·주동유적의 발견이 따라야 하고, 주 504504 금원룡, 《한국고고학개설》(1986, 삼판).닫기 기술사적으로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 재료로 사용되던 문화사, 경제사적 측면에서 그 교역과 분업, 농경, 도시의 발생, 지배계급의 형성, 문자의 발명 등 제요소가 갖추어진 문화단계가 전형적인 청동기시대 개념이다. 주 505505 리강승(1983).닫기
그러나 기술사적인 면에서의 주조를 생각할 수 있으나 재료의 빈곤으로 생산활동이 어려 울 때에 외래의 청동기가 보편화되었다면 역시 그 사회는 청동기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의 자생이 아니라고 볼 때 선진문화의 전파가 어떤 경로로 해서 청동기문화가 받아 들여지는가의 루트에 따라 그 시기해석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소위 무문토기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느냐에 따라서도 그 연대의 폭은 발생되는 것이 절대적이다. 가령 청동기가 제작·보편화되었다면 분명히 청동기시대라 할 수 있겠으나 청동기를 소유 유무 즉 청동기의 소유는 없다 해도 당시 존재했던 모든 집단과 사람을 청동기시대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사용되었던 청동기 이외의 유물, 예컨대 무문토기의 경우, 석기들과 함께 주거지나 분묘유적 등에서 출토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주거지내에서 청동유물이 발견된 예가 없어 해석을 어렵게 하고 있다. 청동유물의 출현은 석관묘 등 묘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출토상태를 알 수 없는 채 알려져 왔기 때문에 더욱 판단을 흐리게 해왔다. 청동기를 제작할 수 있는 집단 또는 제작공장의 발견이 있어야 보다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성격을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료녕식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를 구분하여 서로 다른 문화로 보는 관점과 동일문화의 소산으로 보고 세형동검문화를 발전적 형태로 보는 관점이 다른데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령지방을 한국청동기문화권으로 포함시키는 지의 여부에 따라 청동기의 개시연대나 민족고정 등 여러가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당시 중국 동북지방은 여러 민족들의 이론이 얽혀 있는 민족고제정문가 쉬운 일은 아님은 물론 자칫하면 민족감정이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할 수 있으나, 현재의 국경개념이나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하는 객관적 태도가 요망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주 506506 위와 같음.닫기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년대관을 살펴보면 1950년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기원전 5세기 경부터 독자적인 청동문화가 존재했다는 의견을 1954년에 처음으로 북한학자가 언급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논거없이 다분히 이론적인 측면에서 시대를 설정한 발달사적인 입장에서 주장하고 있다. 주 507507 위와 같음.닫기
1960년대에 들어서 도유호는 기원전 천년기초 하한연대를 기원전 천년기종반 세형동검문화기 이전으로 하였고, 주 508508 도유호, 《조선원시고고학》(1961).닫기 김정학은 순수청동기시대를 기원전 5세기로 주장하였다. 주 509509 금정학, 〈광주 가악리 주거지 발굴보고〉(《고문화》 2, 1963).닫기 김용간은 지석묘 및 각형토기주거지의 출현을 B.C. 2000년대 말로 보고 무문토기의 연대를 B.C. 2000년기로 비정했다. 주 510510 김용강,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연대론과 관련된 몇가지 문제〉(《고고민속》 64-2, 1964).닫기
또 김용간·황기덕은 동검을 정리하여 전형적인 료녕식동검을 B.C. 8∼7세기로, 변형료녕식동검을 B.C. 7∼5세기, 세형동검초기를 B.C. 5세기 이후로 편년하기도 했다. 다시 김용간·황기덕은 우리나라 청동기를 기원전 2000년기를 상한으로 하고 비파형동검기인 기원전 1000년기 전반에 끝나는 것으로 편년하고 있다. 주 511511 김용강·황기덕, 〈기원전 천년기동안의 고조선의 문화〉(《고고민속》 67-2, 1967).닫기
이에 반해 김원룡은 중국 조양십이태영자에서 발굴된 청동단검묘를 우리나라 청동기와 관련시켜 그때까지 세형 동검의 퇴화형으로 여겨왔던 요령식동검이 오히려 세형동검의 조형이 되는 고식으로 분석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온 청동기문화는 열하·료녕지방에 존재하던 석관묘를 동반하는 비중국계 북방청동문화가 파급한 것으로 보고 그 초입이 기원전 6∼5세기 이전으로 오르지 않는다고 처음으로 편년관을 피력했다. 주 512512 금원룡(1961).닫기
1970년 대에도 청동기의 연대문제는 논란이 계속되었다. 금정배는 우리나라 청동기를 Karasuk문화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상한을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보았고, 주 513513 금정배(1971).닫기 그는 다시 우리나라 청동기의 상한문제를 역시 Karasuk문화와 연관시켜 반도 류입을 예맥 Ⅱ기 즉 기원전 1300년 이후설을 내세웠다. 주 514514 금정배(1975, 영문).닫기 그후 한국청동기문화의 기원을 료녕이나 중국에 두는 것을 비판하고 요령이나 한반도를 동일한 그 공동원으로 시베리아 Karasuk 문화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상한을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주 515515 금정배(1979).닫기
윤무병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만주식동검이 유입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청동기의 제작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에서 편년을 시도하여 Ⅰ기를 만주식동검의 류입기로 B.C. 4세기 경, Ⅱ기를 1식세형동검시기로 보고 B.C. 4세기 말∼3세기 초경에서 시작되어 B.C. 2세기 중엽까지로, Ⅲ기는 Ⅱ식세형동검시기로 B.C. 2세기 후반으로부터 A.D. 1세기 말 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주 516516 윤무병(1972).닫기
김정학은 료녕지방을 포함하여 동검의 형식을 Ⅰ∼Ⅳ식으로 나누고 다시 지역출토위치에 따라 선후를 구분하여 ⅠA·ⅠB·ⅠC, ⅡA·ⅡBa·ⅡBb·ⅡC·ⅡD로 세분하여 ⅠA의 상한을 B.C. 1000년기의 초기로 하한을 B.C. 1세기로 추정했다. 주 517517 금정학, 〈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한국고고학보》 5, 1978).닫기
김원룡은 청동기유적의 경우, 주거지로서는 각형토기·반월형석도, 그리고 세형동검아닌 동제품을 내는 일련의 유물을 말하고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는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지방의 Karasuk문화에서 발원한 것으로서 그 도착시기는 이 다음에 오는 Tagar문화와 본질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청동문화의 출현은 Tagar 문화의 남파와 관련시켜 B.C. 700∼600년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세형동검이 출현하는 시기인 서기전 300년 경까지 즉 B.C. 700∼B. C. 300경까지를 청동기 Ⅰ기로 그리고 실질적인 철기시대로 들어 온 B.C. 300∼기원전후까지를 청동기Ⅱ기로 구분·편년했다. 주 518518 금원룡(1973).닫기 그는 다시 전무주출토의 료녕식동검 2례를 료녕·남산근출토 동검과 비교하여 청동기의 상한을 B.C. 800년 경으로 수정했고, 주 519519 금원룡(1974).닫기 침양 정가와자 청동기시대묘에서 출토된 청동유물을 검토하여 청동기Ⅰ기를 B.C. 700∼B.C. 300, 청동기Ⅱ기를 B.C. 300∼0로 재편년했다. 주 520520 금원룡(1976).닫기
금영배·안승주는 부여 초촌면 송국리 석관묘에서 출토된 요령식동검을 통해 남한지방의 청동기시대 존재와 아울러 그 연대를 기원전 9세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주 521521 금영배·안승주(1975).닫기
전영래는 중국식동검이 우리나라 마제석검의 조형이고 따라서 석검의 연대는 중국검의 발생년대인 기원전 6세기 이전을 오를 수 없고 중국식동검은 화중지방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청동문화는 화중에서 서남한으로 들어왔고 그것이 또 쌀도래의 경로였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 그는 우리나라 다뉴경의 검토를 통해 청동기시대를 4기로 구분하고 Ⅰ기를 B.C. 7세기∼B.C. 300년 경으로 청동기유입기로 보고, Ⅱ기를 B.C. 300∼B.C. 190년으로 대동강유역 청동기문화개시로, Ⅲ기를 B.C. 190∼B.C. 100년 남한청동기문화생산기로, Ⅳ기를 B.C. 100∼A.D. 50년으로 한대문물 전파기로 보았다. 주 522522 전영래(1977).닫기
김영하는 한국식동검의 시원형이 토광묘보다 석관묘로 보고 우리나라 동검을 형식변화를 련화리식에서 괴정동식과 남성리식으로 나누어져 대곡리식으로 모이고 다시 대곡리식에서 상일동식과 만촌동식으로 분류된다고 주장하고 이 서렬에 따라 상한을 B.C. 6세기 경으로 소멸을 서기전후로 보았다. 주 523523 금영하(1978).닫기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1970년대의 년대관이 그대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우리나라 청동기의 기원이 중국지역이란 새로운 주장도 등장했다. 최성락은 방사성탄소년대측정법(C14Dating)에 대한 지금까지의 자료를 소개하고 이 측정년대가 안고 있는 오차문제를 부각시켜 지금까지의 측정치를 재계산하여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B.C. 1300∼B.C. 1200년의 연대를 제시했다. 주 524524 최성락, 〈방사성탄소측정 년대문제의 검토〉(《한국고고학보》 13, 1982).닫기
이청규는 세형동검시기의 유적·유물을 5군으로 분류하여 Ⅰ군을 B.C. 4세기 말이전으로, Ⅳ군을 B.C. 100년 경을 상한으로 편년했다. 주 525525 리청규(1982).닫기 정징원은 경남지방의 청동기유적과 유물을 검토하여 Ⅰ∼Ⅳ군으로 구분하고 연대를 B.C. 4세기 전후에서 A.D. 1세기 중심으로 편년하고 있다. 주 526526 정징원(1982).닫기
한영희는 우리나라 각형토기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분석·검토하여 이들을 분류하고 시기를 조기·전기·중기·후기 4기로 구분, 조기 연대를 B.C. 10∼9세기, 후기 연대를 B.C. 4∼3세기로 편년했다. 주 527527 한영희(1982).닫기
발해연안지구의 동경을 중심으로 그 기원과 전파과정을 살펴 본 리형구는 특히 이 일대의 청동기에 대한 화학분석을 비교·검토하여 우리나라 청동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종래의 주장을 반박하고 스키토-시베리아계통이라는 우리나라 기하문다뉴동경과 동물문양이 오히려 중국 중원지방의 청동기문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고 그 기원이 은허라는 사실과 이 양식의 유행은 B.C. 14∼13세기이고 동북아지역에서의 초기청동기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기자조선의 구강인 발해만지구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주 528528 리형구(1983).닫기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료녕지방 청동기를 통해서 ordos(화북수원) 그리고 다시 시베리아 Minussinsk, Scyth청동요소를 받아 결국 상한은 요령식동검의 출현기가 중국의 춘추 초기인 기원전 9∼8세기에 해당되고 넓은 의미에서 예맥족의 시원으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때부터 청동기문화로 들어갔다고 수정했다. 주 529529 금원룡, 《한국고고학개설》(1986).닫기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청동기의 개시 및 소멸년대는 1970년대나 198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주장이 평행선을 긋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 청동기의 개시연대는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는 견해와 기원전 7∼8세기 경으로, 그리고 기원전 5세기 전후로 보는 3대별할 수 있다. 그것은 순수청동기와 무문토기단계를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차이는 크게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더구나 담당 종족의 문제에 따라서도 그 차를 보여 주고 있다. 또 청동기의 유입이 료녕을 위시한 중국계로 보느냐 아니면 비중국계를 보느냐에 따라 그 연대도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기원전 1000년기 전후에 새로운 형식을 가진 농경민이 만주에서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반도로 들어와 서서히 세력을 넓혀 신석기주민과 교체되고 이 새로운 주민이 청동기를 가지고 들어 왔다고 보고 이들이 바로 예맥퉁구스로 보고 있다. 주 530530 최몽룡, 〈청동기문화〉(《한국の고고학》, 강담사, 1990).닫기
그러나 연대의 시각은 학자들의 사관상의 문제도 있겠고, 특히 김원룡이 지적했듯이 지금에 이르러 청동기 개시연대가 B.C. 1000년 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예맥족의 거주지역인 요령 지방을 염두에 두고 편년한 것으로 압록강 이남지역은 아직까지 과학적인 뒷받침이 없는 이동적 편년이라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근간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 청동기개시연대도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원이나 요령지방 나아가 시베리아지역의 청동기유적을 면밀히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하여 분석할 때 보다 집중된 연대관이 성립될 것으로 보여진다.
주 504
: 금원룡, 《한국고고학개설》(1986, 삼판).
주 505
: 리강승(1983).
주 506
: 위와 같음.
주 507
: 위와 같음.
주 508
: 도유호, 《조선원시고고학》(1961).
주 509
: 금정학, 〈광주 가악리 주거지 발굴보고〉(《고문화》 2, 1963).
주 510
: 김용강,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연대론과 관련된 몇가지 문제〉(《고고민속》 64-2, 1964).
주 511
: 김용강·황기덕, 〈기원전 천년기동안의 고조선의 문화〉(《고고민속》 67-2, 1967).
주 512
: 금원룡(1961).
주 513
: 금정배(1971).
주 514
: 금정배(1975, 영문).
주 515
: 금정배(1979).
주 516
: 윤무병(1972).
주 517
: 금정학, 〈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한국고고학보》 5, 1978).
주 518
: 금원룡(1973).
주 519
: 금원룡(1974).
주 520
: 금원룡(1976).
주 521
: 금영배·안승주(1975).
주 522
: 전영래(1977).
주 523
: 금영하(1978).
주 524
: 최성락, 〈방사성탄소측정 년대문제의 검토〉(《한국고고학보》 13, 1982).
주 525
: 리청규(1982).
주 526
: 정징원(1982).
주 527
: 한영희(1982).
주 528
: 리형구(1983).
주 529
: 금원룡, 《한국고고학개설》(1986).
주 530
: 최몽룡, 〈청동기문화〉(《한국の고고학》, 강담사, 1990).
Ⅴ. 결언
지금부터 일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한 사항을 가능한 모두 취급하여 시기별, 그리고 주제별로 검토해 보았다.
1970년대 1980년대에 이루어진 급격한 국토개발은 많은 선사유적의 파괴도 따랐으나 그에 못지 않는 긴급구제발굴의 급증으로 많은 자료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많은 분량의 조사보고서와 논문들이 발표되게 되었고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상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따랐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연구를 종합하여 그간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연구방향과 문제점을 다룬 분석적인 글이 리강승·리청규 등에 의해 발표되기도 했다. 주 531531 계강승(1983).리청규(1988).닫기 그렇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새롭게 추가할 사항이 특별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청동기시대를 논함에 있어서 항상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점을 이미 밝혀 놓은 선각들의 의견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결언에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및 문화를 논함에 있어서 항상 문제점으로 부각되는 사실은 청동기시대의 존재가 분명하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그 시작과 끝나는 시기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듭 논란이 되어 오고 있다.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주인공은 진정 누구이며 그들의 사회와 문화의 수준을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아직까지도 시원스럽게 밝혀지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의 개시 연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석기나 토기 밖에 모르던 시대에 주변에서 청동기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예를 들면 중국의 은이나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 청동문화와 같이 이미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까지 석기나 토기만 사용하고 있었다면 이때 주변이 청동기시대라 해서 우리도 함께 청동기시대로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어느 단계 어느 시기에 잡느냐에 따라서 그 개시 연대의 차이는 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청동기시대라면 자체내에서 주동이 시작되어 장인집단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겠으나 당시는 청동이란 금속자체가 귀중한 물품이고 또한 신분에 관계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소유의 한계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생산이 지극히 제한되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특수집단이 사용하기 위한 생산 또는 수입해서 사용했다면 비록 보편적이 아닐지라도 이것은 청동기시대로 보아도 될 것이다. 같은 민족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지역이나 환경 등의 차이에 의해 서로 분리된 경우 선사문화의 유입이 각기 다른 경우의 해석도 문제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 A·B집단이 어느 시기에 산맥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시기에 생활은 동일하게 움집에서 토기제작하는 집단으로 외부로부터 A집단에만 금속집단이 수입되어 들어와 일정기간 사용된다.
비로소 그후에 B집단으로 다시 들어 갔다면 A집단에서 B집단의 새로운 물질이 들어가는 기간동안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접하게 된다. A집단은 철기시대에 들어 갔으나 일정기간 B집단은 아직까지 토기시대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집단이나 지역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B집단은 토기시대로 보아야 하고 전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즉 우리라는 공동체로 본다면 철기시대가 되어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지역집단 상호 간의 문제도 연결되어야 시대설정과 아울러 개시 및 소멸이 보다 실체에 근접될 것이다.
우리나라 청동기가 독자적으로 발생·발전하지 않고 선진지역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사서에 나타나는 제씨족으로 청동기파급이 각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라도 아프리카나 미개국가가 세계사 속에서는 21세기지만 자신들의 입장에서 아직까지 미개국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시대는 첨단과학시대라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또한 우리민족은 과연 어디에 뿌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시기설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라는 개념 즉 국가와 민족의 개념에서 본다면 동일한 정치체계와 동일한 언어구사, 동일한 경제체계 등이 함께 해야 우리라는 개념이 성립될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를 들면 고조선이 우리의 뿌리라면 당시의 고조선의 영역이 차지하는 범위가 우선 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벗어난 집단과 위치는 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원칙상 청동기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근본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객관성이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다.
다음으로 생자에 의해 마련되는 무덤의 경우 세계적으로는 구석기시대에도 그 존재가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의 몇 예가 알려져 있어 주 532532 국립진주박물관·통영군, 《욕지도》(1989).닫기 신석기시대무덤의 존재가 밝혀지게 되는 계기는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덤은 그 구조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인골출토 때문에 무덤으로 보았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 지석묘 즉 고인돌로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과연 청동기시대묘제는 지석묘라는 등식의 성립이 가능한 것인가, 지석묘를 신석기 말기부터 나타나는 묘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그 기원을 신석기에 두어야 하는지, 무덤은 보수성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전통이 오래 간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실로 알려져 있지만 그 담당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지, 신석기시대의 민족이 곧 바로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민족의 연속성이 계속되었는지 의문 투성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지석묘의 형식분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주장되어 나름대로의 근거를 내세워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들이 자생이냐 아니면 새로운 문화가 들어온 것이냐, 들어 왔다면 담당자는 과연 누구이냐, 그 시기는 얼마나 계속되고 소멸되는 것인지, 그리고 지석묘의 영역은 정확히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지, 최근에는 중국 대륙의 요동·산동반도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또 크게 남방설과 북방설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서로의 주장일 뿐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견해가 거의 없고 주장만 무성한 입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일차적인 상황에서 조차 견해의 불일치는 그것이나마 사회 및 문화의 복원을 어렵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어사용에 있어서도 지석묘·고인돌·거석묘·큰돌무덤 등 각자 편리한 대로, 주장되는 대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 또한 시급히 통일시켜 사용해야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청동기시대를 B.C. 2000년대로 보고 있는데, 김원룡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만주사까지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상 그러한 연대관은 문제가 있고 우리 민족이 만주에서 살았다고 만주사가 우리 역사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시베리아문화가 들어왔다고 시베리아역사가 우리역사가 될 수 없는 이치라 할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세계사 속에 누구나 이해되고 납득이 될 수 있는 이론이 성립되고 서술되어야 한 나라의 역사가 세계사속에 자기위치를 갖게 될 것이다.
그밖에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연구에 있어서, 첫째, 무문토기에 대한 정의와 출현 및 전파, 그리고 종류에 따른 실용기와 부장품, 의식용이냐 하는 막연한 개념에서 벗어난 연구가 필요하고 그리고 주용어의 통일이 요구되며, 둘째로 청동유물만이 청동기를 대표한다는 시각에서 벗어나야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될 것이다. 셋째, 청동기시대의 편년에 있어서의 상대적인 차이에 따른 진폭을 메꾸기 위해서는 비록 탄소연대측정치에 따른 오차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은 있으나, 꾸준한 연대측정치의 자료가 증가되어야 하겠지만 이의 극복을 위한 계획적인 유적발굴이 따라야 할 것이다. 넷째, 료녕식동검·비파형동검·세형동검·한국식동검·만주식동검 좁은 놋단검 등등 용어상의 혼란을 빨리 극복해야 할 것이다.
광복 후 지금까지 우리의 손으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규명을 위한 노력과 연구가 진전되어 청동기문화의 존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로 받아 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청동기·토기·석기 등 유물의 편년이나 형식학적 분류와 같은 기초작업과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사회복원은 아직까지 요원한 현실에 처해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청동기시대에 대한 문화 및 사회복원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일면 논리의 비약이나 과도한 주장과 그에 모순 속에 빠지기 쉬운 면도 도사리고 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청동기연구는 일차적인 문제해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부터 시작으로 보아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 531
: 계강승(1983).리청규(1988).
주 532
: 국립진주박물관·통영군, 《욕지도》(1989).
[출처] 국사관논총 제19집|작성자 노원앙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