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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11
5월30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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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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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Kgt1VyL4JM&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7&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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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발끝부터 먼저>
공동생활의 햇수가 늘어갈수록 안타까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한 그루 거목처럼 되고 싶었는데, 한 그루 청청한 소나무처럼 되고 싶었는데, 웬만해서는 상처받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그런 삶을 꿈꿨는데...
현실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맨날 상처입고, 매일 흔들립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들과의 관계형성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선이 다른 곳에 앞서 우선 내 발끝으로 향해야 되는데, 대체로 시선은 형제들의 허물로 먼저 가게 됩니다.
형제들은 또 한두 명입니까? 시선이 이 형제에게서 저 형제에게로, 저 형제에게서 또 다른 형제에게로,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하루 일과 전체가 형제의 약점 살피기, 불평불만, ‘뒷담화’, 소모적인 논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제대로 수행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향해 ‘너나 잘 하세요!’라고 질책하십니다. 네 코가 석자면서 남의 걱정하지 말고, 너나 단단히 잘 하라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웃의 삶에 대한 적당한 관심과 형제적 나눔,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합니다. 도를 넘어서게 될 때 늘 참담한 결과가 초래됩니다. 깊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참된 예수님 추종도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영성생활도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추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발밑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과제부터 충실히 이행하고 나서, 내 약점부터 먼저 잘 처리하고 나서 형제들에게로 시선을 돌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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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을 지속하려면 의지를 주는 제삼자가 필요하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lCioz4HLxpQ
윌리엄 보드는 억만장자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큰 낙농 회사를 경영하고 있을 때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는 세계 여행을 시켰습니다. 온 세계를 알려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행 중에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모두를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앞에 썼습니다.
“남김없이”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주님을 위하여 남김없이 온전히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일 대학에 입학한 후 친구 한 명과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단둘뿐이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노숙자, 홈리스 피플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Yale hope mission)이란 단체를 세웠습니다. 4년 후 윌리엄 보드가 졸업할 때에는 이런 모임이 대학교 안에 1,000개가량 되었습니다.
대학재학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졸업하면서 이렇게 일기를 썼습니다.
“늘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에게 순종하리라.”
그리고 성경 뒤에 이렇게 썼습니다.
“후퇴 없이”
뒤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중국 간수성에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국어를 배우고,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아랍어를 배워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풍토병에 걸렸습니다. 천수막염이라는 병이었습니다. 그는 카이로에서 25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예일 대학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학생이 수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성경에서 세 문장이 발견되었습니다.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사랑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사랑은 분명 단순한 감정이나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에 대한 관심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관심을 상대에게 두기보다는, 상대가 어떠한 상태더라도 참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다잡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 이야기입니다.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양을 치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위해 먼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목적을 양들에게 두지 말고 당신께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은 둘의 행복을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랑은 감정이 위주가 되는데, 사랑의 감정은 금방 식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제삼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 제삼자가 사랑에 ‘의지’를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부가 이혼하고 싶은데, 아프신 부모님이 계신다면 그 부모님을 위해 조금 더 참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지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사라지게 됩니다. 혹은 자녀들을 위한 사랑이라면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만 참아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사랑의 의지를 죽기까지 일으켜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랑한다면 죽기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양들을 사랑하는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였습니다. 그렇게 상대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사랑할 수 있기에 양 떼를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합니다. 마치 두 기찻길의 선로가 공통된 목적지가 없다면 서로 만나버리거나 갈라져서 어떤 기차도 다닐 수 없게 됩니다. 둘이 명확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면 선로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 위에 기차가 다닐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목적을 하느님께 둡시다. 그러면 어떠한 시련도 참아내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상대도 그런 마음이라면 둘의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의지는 그 사랑을 보증해주는 제삼자를 통해 생겨납니다. 사랑이 영원하려면 그 제삼자를 영원한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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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속세의 악을 견디는 일에서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고 하신다. 요한에 관해서는 영원한 행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당신이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막 시작된 관상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 완전하게 될 것이기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디어 내는 신심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지만, 지식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채워지며 그때야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다.”는 말은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즉 지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요한은 죽었다. 외경에 보면 요한은 자신의 무덤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요한은 건강했다고 한다. 무덤이 세심하게 마련되었을 때,요한은 마치 침상에 눕듯 몸을 누이고는 곧바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죽은 듯이 보이는 상태로 누워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덤에 안장을 하고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 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오래 살아 내가 올 때까지 지상에 남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해도 너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여라.’고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들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주님께 청하며 오늘을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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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사랑받는 제자’는 1세기 말엽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본보기가 되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8절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이라는 구절에서 ‘가장 가까운’으로 번역된 그리스 말을 직역하자면 ‘가슴에 기대어’입니다. 말하자면, 사랑받는 제자의 모습이 곧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예수님처럼 살아갈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니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말로써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세상에 또다시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일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자신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행여 누군가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기뻐하거나 행복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참으로 값진 예배를 드린 것이 됩니다.
‘증거의 삶’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의 일상이 예배가 되는 길은 그리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하는 일들을 하느님 마음에 드시도록 정성을 다하여 차근차근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정성껏 하는 모든 일은 사랑받는 제자, 곧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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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으로 성서공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등장합니다. 요한은 ‘이 제자’라고 이야기됩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쓴 사람은 ‘이 제자’라는 말을 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에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을 쓴 공동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마 사도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와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는 착한목자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입니다. 나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이런 표현은 공관복음에서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은 일관되게 복음서를 쓴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죽었던 나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지혜’가 세상을 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 안에도 영지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런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여겼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서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아테네에서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한다면 우리의 삶은 ‘가브리엘행전, 요한행전, 바오로행전, 베드로행전, 안나행전, 마리아행전, 글라라행전, 리디아행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전을 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근심, 걱정은 모두 버려두고 살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봄의 아름다움을, 철쭉의 싱그러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죄인이 되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었고, 나중에는 군인들이 지키는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바오로 사도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가택연금 중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과 같습니다. 때로 시련의 비가 내리기도 하고, 고통의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고, 고독과 외로움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파도를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멀리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에 있는 꽃들은 멀리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 구름, 바람, 시냇물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미처 피지 못한 꽃도 있고, 색이 바란 꽃도 있고, 이미 시들은 꽃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비슷합니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삶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름도 있고, 점도 있고, 작은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웃도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허물과 단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꽃은 분석하고 나누고 평가하면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만나는 이웃을 평가하고, 분석하여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시적인 측면도 필요하겠지만 거시적인 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은 의로운 일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 얼굴 뵈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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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벗 나>
요한 21,20-25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베드로, 엮은이의 맺음말)
그때에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 벗 나>
길이 있고
길이 부르니
내가 따른다
걸어야 할
길이 있어
내가 걷는다
어찌
걸어야 할 길이
나만 부르겠는가
하여
길을 걷다
길과 나 사이
벗들을 만난다
함께 길을 걷다
내가 벗에게
벗이 나에게
길이 되어준다
그러다 때론
함께 걷는
벗에 홀려
길을 잃는다
나를 홀린
벗이 아니라
벗에게 홀린
내 탓이다
벗이 있으면
함께 힘차게
길을 걷고
벗이 없으면
홀로 당당하게
길을 걸으면 될 뿐
걸어야 할
길이 있고
걸어야 할
내가 있다
길과 나
사이에
함께 걷는
수많은 벗들이 있다
때로는
내가 벗에게
벗이 나에게
길이 되어줄지언정
함께 걸어야 할
단 하나의 길은
따로 있다
그 길
부르는 길
걸어야 할 길
나와 벗
서로 홀림 없이
서로 다툼 없이
묵묵히 걸을 때에
오직 그러할 때에
비로소
내가 벗에게
벗이 나에게
길 닮은 길이
되어줄 수 있다
길을 걷는다
벗 아닌 길을
나 아닌 길을
그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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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조성호 라우렌시오 신부님]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며,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구원받는 길임을 보여준 요한.
비록 덧붙여진 부분입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주는 가르침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길을 가다가 예수님 곁에 있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봅니다. 그 스스로 주님께 수장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음에도 그의 모습이 사뭇 궁금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 21)
우리는 나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이가 어떻게 될런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하면서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면 되는 것을 그래도 다른 이가 궁금합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궁금한가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죠?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 22)
당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는 ‘비교’라고 합니다. 그렇게 비교하는 사이 주님을 따르는 순수성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됩니다. 그가 팔자 걸음을 걷든, 뒤뚱거리며 걷든, 그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면, 동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나의 길을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그가 어떻게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 나와 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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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 요한의 앞날이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앞날이 어떠할지 암시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요한의 앞날에 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의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나를 따라라.”(요한 21,19)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많은 양을 돌보다가 마침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사도 요한에게 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사랑을 세상 끝 날까지 증언하고 전해야 하는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다양한 직분과 임무를 맡기십니다. 어느 신분이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지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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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이봉하 수사님]
<호기심과 침묵>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침묵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선지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꼭 선지자가 아니라도 일상 안에서 자주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침묵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침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 무지에서 오는 것,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켜야 하는 것, 정의와 선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침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하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분위기 반전을 위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오히려 침묵을 승화시킨 경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호기심을 떠나 다른 제자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다른 제자들처럼 침묵을 지켰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인간의 나약성과 침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판단은 호기심에서 출발합니다. 반대로 침묵은 사랑 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도 있고, 이웃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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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국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나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창 놀아야 할 어린이까지 이 경쟁의 무대에 올라가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각종 학원을 섭렵합니다.
신부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서울에서 어떤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1등만이 기억되고 살아남았습니다.” 이 강사는 당시 유명한 컴퓨터 잡지의 사장님이었고, 실제로 이 잡지는 업계에서 항상 1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잡지를 20년이 지난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몇 년 뒤에 폐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2등이었지만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는 잡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출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등도 기억됩니다. 또 2등도 살아남습니다. 1등만이 최고라 생각하는 경쟁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그리고 꾸준한가가 중요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반짝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 제가 그래도 어렸을 때 복사도 서고 정말 열심히 성당에 다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은요?”라고 물으니, “지금은 사는 게 바빠서 못 다닙니다. 냉담 중이죠.”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습니다.
신앙도 꾸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짝이는 1등보다, 그렇게 특출나게 보이지는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면서 꾸준히 주님과 함께 하는 이를 기억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어떻게 되겠는지를 묻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해 부러운 마음에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아니면 오지랖이 넓어 주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랬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베드로가 담대함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교회의 반석이라는 영예를 얻었고, 또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이런 영광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냐고 자신이 직접 말하지 못하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시킬 정도로 소극적이었습니다. 또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했던 그가 예수님께 다른 제자에 대해 직접 질문합니다. 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족함 투성입니다. 그래서 지금 모습은 분명히 1등이 아닙니다. 그러나 꾸준히 주님의 뜻을 따라가면서 자기 자리에 충실할 때, 우리 역시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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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기는 이제 그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어느 지역구에서 여당 의원이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지요. ‘하느님은 여당을 지지하는구나.’여당 지지자는 기뻤고, 야당 지지자는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구에서는 야당 의원이 당선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은 어느 편이세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 편이다.” 이럴 것 같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상관없이 남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쳐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것에 너무 익숙합니다. 자신의 편이 아니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며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 모습이 하느님께 틀렸다며 따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정치 성향에 흔들리지 않으며, 외적인 모습, 소유하고 있는 부, 세상의 지위에도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유일한 흔들림은 ‘사랑’ 때문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 하느님은 계속해서 흔들리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편 가르기보다 인간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완벽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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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
-성전 정화-
성전 봉헌 축일 때 마다 부르게 되는 성무일도시 다음 아름다운 시편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힘이 납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참새도 집이 있고, 제비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사와도
내게는 당신의 제단이 있나이다
만군의 주시여, 내 임금, 내 하느님이여,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84,2-5)
어제 저녁 식사 전 성령은사 제비뽑기에서 “경외敬畏; 하느님을 공경하여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모든 죄를 피하게 하는 은혜”를 뽑았습니다. 경외의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마침 오늘 성전 봉헌 축일 미사 입당송과 관련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성소에서 경외로우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시편68,36)
바로 당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은 믿는 이들의 중심이자 영혼의 고향집과 같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중 잠시 미사전례 참석차 머물렀던 곳곳의 성전에 들렸을 때의 편안함을 잊지 못합니다. 마치 어느 성전에 머물든 영혼의 고향집, 아버지의 집에 온 듯 평화로웠습니다. 영혼의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여기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 성전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수도원 성전을 찾는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말은 친정집에 온 듯이 참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요셉수도원 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바로 2006년 5월 30일 성전 봉헌 축성날입니다. 아마 수도원 역사상 가장 많은 분들이 행사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수도원인지 새삼 감격스럽게 깨달은 날입니다.
수도원 성전 역사를 간략히 살펴 보고 싶습니다. 1987년 초창기 성전은 큰 온돌방이었습니다. 온돌방 성전 제대 옆 창밖 큰 소나무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음 1990년에는 온돌 방 옆의 큰 응접실을 성전으로 개조했으며, 다음 1996년에는 건물 전체를 하나로 터 성전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가 지금처럼 앵두가 익어가던 계절이었고 미사 강론때 인용했던 시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사랑합니다”/마침내 빨간 열매로/사랑을 고백하는 앵두나무
초록빛 나뭇잎들/믿음 사이로/수줍게 살며시 얼굴 내밀고
사랑을 고백하는/빨간 앵두 열매들
부끄러워/빨갛게 물들었네-1996.5.30
신비롭게도 꼭 24년전 오늘입니다. 네 번째 2006년에는 완전히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새로 세워진 지금의 성전입니다. 비로소 수도원 역사상 처음으로 미사 전례 주례사제도 제대로 된 제대에서 서서 미사 복사와 함께 거행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체험입니다.
어제는 마침 성전 봉헌 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앞두고 꽃꽂이 차 두 자매가 방문했습니다. 꼭 소개 드리고 싶은 분들입니다. 수도원 초창기 90년대 초반부터 무려 30년이상 큰 축일 때마다 봉헌하는 마음으로 성전 꽃꽂이를 한 분들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도원 역사 이래 올해 처음으로 부활 대축일 꽃꽂이를 걸렀다가 해제되어 꽃꽂이 차 방문한 분들입니다. 마침 꽃꽂이 후 제가 좋아하는 짧은 세 편의 시를 선물했습니다.
-“사람은 꽃이다/늘 피는 꽃이다”-
-“아침은 늘 새롭다/나도 늘 새롭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에 가다니요/그냥 있으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성전 전례 은총을 상징합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성전 전례 은총을 통해 끊임없이 정화되고 성화되어 늘 피는 꽃처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시드는 일 없이 늘 새롭게 피어나는 예쁜 꽃처럼, 늘 새로운 아침처럼,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산처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 많은 분들이 수도원 근처에 거주하기를 원합니다. 문득 예전 두 차례, 에버랜드 공동체 소풍 때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진짜 ‘에버랜드ever-land’ 영원한 땅, 하늘 나라는 바로 수도원임을 말입니다. 바로 수도원이 언제 와도 늘 새롭고 그리울 수 있음은 가시적可視的 중심인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그 수도원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전 사랑으로, 성전 전례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아름다움은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성전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갈수록 세상에 갈 곳은 결국은 아버지의 집 성전뿐이요, 만나 뵐 분은 결국 아버지의 집에서의 주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휴가 안가기 수십년이 됩니다. 사실 갈 곳도 가도 싶은 곳도 없고, 만날 분도 만나고 싶은 분도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성전이 속화俗化되었을 때 예수님 역시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성화聖化시켜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거룩한 아버지의 집 성전이 속화된다면 참으로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속화된 성전에 대한 열화와 같은 의노義怒와 더불어 성전 정화淨化 행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것들은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서 제자들은 즉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연상했다 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이 그대로 성전정화로 표출된 것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예언이고,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어 우리는 날마다 ‘한몸 성전’의 일치를 견고히 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은총이 가시적 성전은 물론 공동체의 성전, 각자 존재의 성전을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감사송이 바로 이 진리를 잘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눈에 보이는 이 집을 짓게 하시어, 주님께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시며, 주님과 저희의 신비로운 결합을, 이곳에서 오묘히 드러내시고 굳건히 하시나이다. 또한 여기에서 저희를 주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시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천상 도읍 예루살렘에서 평화의 나라로 완성하시나이다.”
가시적, 불가시적 성전의 신비가, 장차 있을 천상 도읍 예루살렘의 신비가 고스란히 함축된 깊고도 풍부하고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의 생명수’가 세상을 살리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요,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성체성사, 바로 미사 ‘은총의 강물’이 흘러 세상을 살리고 풍요로운 영적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고 약이 되는 생명나무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신다. 너희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다.”(1코린3,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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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령 강림 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께서 주실 은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우리 각자를 준비시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방금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의 눈에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분 마음을 듣던 제자였지요. 평소 베드로가 그에 대해 어찌 느꼈는지 모르지만, 오늘 이 질문에서는 속내가 살짝 드러납니다.
어쩌면 동료인 그의 미래에 대한 염려일 수도 있겠고, 자신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듯 보이는 그에게 평소 느낀 열등감과 비교의식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베드로의 의중이 뭐가 되었든 예수님은 그의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잘못 받아들이면, 그동안 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이는 유기체이고 한 몸의 지체인 형제적 관계성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뜻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나 교회 공동체에서까지 비교와 키재기에 지친 우리에게 죽비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에게 맞게, 요한에게는 요한에게 맞게 달란트와 은사를 베풀어 주셨지요. 주님의 일을 수행할 몫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를 때, 베드로는 자신의 개인 소명에 맞게, 요한은 요한의 개인 소명에 맞추어 나아가면 됩니다. 이 개별성과 고유성은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와 다릅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받은 은사에 따라 고유하게 주님을 섬기면 됩니다. 사심 없이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영혼은 비슷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시기와 질투, 비교의식에서 정화되지 못한 불경한 곁눈질은 그 대상보다도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요.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끝 부분으로, 이방 지역이면서 당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이루어진 사도 바오로의 적극적인 복음 선포 활동을 서술합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사도 28,30)
황제에게 상소한 죄수 처지라 가택연금 상태이긴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큰 방해 없이 자신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곧 "모든 사람"이 선교 대상입니다. 주님께 이방인을 위한 도구로 선택받은 그는 민족이나 혈통, 율법이나 할례의 굴레를 뛰어넘어 제 몫의 은사를 완성해 갑니다.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
자기 영광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담대하다고 하지 않고 뻔뻔하다고 하지요. 이 뻔뻔함은 확실히 담대함과 질적으로 다른 기운입니다. 담대함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이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힘입니다. 바오로는 동족의 손으로 이민족에게 넘겨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자신의 소명에 매진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맞는 은사와 열매를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의 개인 소명은 교회 전체의 보편적 소명 안에서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이 고유성은 타인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지요. 다름과 다양성이 오히려 교회를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달라서 고맙고, 고유해서 아름다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저마다 제 자리에서 제 색깔과 제 향기로 주님께 영광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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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감사하는 삶은 은총의 삶이며 기쁨의 삶이기도 하다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지금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삶은 나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에서 출발한다. 14세기 영국의 뛰어난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가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nknowing)’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무지無知의 길’이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고백이 바로 영성생활이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가? 아니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이러한 무지와 나약함에 대한 고백은 우리를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일상의 삶에 집중하도록 이끄시는 성령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나는 영성적 삶을 살고 있는가 」에서
♣‘은총의 삶’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라틴계 언어에는 ‘감사와 은총’을 동의어인 ‘그라시아, Gratia’라고 합니다. 이태리어는 ‘감사합니다.’를 ‘그라시아스, gratias’라고 인사합니다. ‘감사와 기쁨’ 또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감사의 꽃이 피면,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감사와 기쁨’은 ‘기도’로 얻어지는 수확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라고 합니다.
저는 매일 감사하는 일을 노트에 적습니다. 감사할 줄 몰라 막연할 때 감사하는 일을 쓰기 시작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며, 감사할 일들이 무수히 많이 떠오릅니다. 이 또한 이적입니다. 감사할 일을 쓰는 것은 치유행위 이기도 하며 몸에 배어 습관이 될 때 ‘은총의 삶’이고 ‘덕행의 삶’이 됩니다. (집회 5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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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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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그동안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 13장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다락방 고별담화와 예수님의 기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곧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라고 하시며, 그가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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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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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OwpVxmC-Q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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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정말 중요한
관계를 놓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이 빠진
자리에는 언제나
서로를 탓하며
등돌리는
어리석음만
있을 뿐입니다.
중지될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생생한 관계입니다.
소중한 관계를
끊어지고 갈라지게
만드는 장본인 또한
우리 자신들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에
정직해지는 것이
상대를 탓하는
비겁함과 무책임에서
벗어나는 참된
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길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언제나
기도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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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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