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플라톤 전집 『뤼시스, 크라튈로스』
뤼시스
는 그 난해함과 독특함 때문에 중요성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많은 논란거리나 생각거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 작품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특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서양 지성사에서『뤼시스』는 흔히 ‘우정’이나‘사랑’이라고 번역하는 필리아(philia)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리아가 우리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덕목이라는 생각이 널리 공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주제로 삼은 학문적인, 특히 철학적인 논의는 요즈음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논의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필리아가 현대 사유에서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 데는 우선 근대 서양이 키워 온 개인주의적 성향이 한몫하는 것 같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자기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필리아라는 덕목을 거추장스럽거나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게 된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사유를 문제시하면서 ‘우리’라든지 ‘연대’, ‘형제애’등을 강조하는 경향(공동체주의등)도 현대 사유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다른 편 극단에서 보편성이나 개방성, 공공성을 중시함으로써 사적이고 특수한 관계로서의 필리아를 시야에 잡아 두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플라톤 자신이 쓴 향연과 파이드로스,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등 대작들은 모두 이 책 뤼시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것은 위의 대작들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적인 줄기들이 모두 뤼시스에 적절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그 작품들에서 개진하는 에로스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 저작에서 펼치는 필리아론은 모두 이 작품의 논의를 토대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발전된 논의들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의 대상이 된다.
뤼시스의 가치는 단지 그런‘대작’들을 이해하기 위한 발판 역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에로스와 필리아가 긴밀히 결합된 채로 다루어지고 있다. 플라톤이 왜 이 주제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를 물으면서 읽다 보면, 이 작품이 주목하여 다루고 있는 문제 자체의 폭과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개인의 독립성과 개성이 중요시되는 오늘 우리에게 친구란 무엇이고 사랑이 무슨 소용인지, 고전 고대에 에로스와 필리아는 어떻게, 그리고 왜 문제가 되었는지 『뤼시스』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 탐색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이후 에로스와 필리아에 관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펼치는 후속 논의들이 훨씬 더 분화되고 세밀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만큼 소크라테스 혹은 초기 플라톤 철학이 보여 주는 에로스와 필리아의 통합 내지 상호 연관성에 대한 의식과 관심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뤼시스를 통하지 않고는 양자간 관계 문제의 얼개와 밑그림을 온전히 들여다보기 어렵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플라톤이 에로스와 필리아라는 주제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진전시켜 가는지를 근본에서부터 확인함으로써 플라톤 철학의 정수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크라튈로스
각 사물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자연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합의나 관습에 의해서 있는가?
이 책의 부제는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로 알려져 있으며, 몇몇 학자들은 이 대화편의 주제를 ‘언어의 기원’에 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문제는 프로디코스와 프로타고라스등 기원 전 5세기 소피스트들의 큰 관심거리였으며 이들은 그 주제로 돈을 받고 강의를 했다.
‘이름의 올바름’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름의 올바름’이란 대체로 ‘어떤 이름이 올바른 이름이 되게 해 주는 것’이며, 또한 올바른 이름을 판별하는 기준, 즉‘올바른 이름의 기준’이기도 하다. ‘경건함’이란 모든 경건한 행위가 경건한 것이 되게 해 주는 것이면서, 또한 경건한 것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과도 같다.
크라튈로스에서 언어학적 논의, 언어철학적 논의, 인식론적 논의, 존재론적 논의 등을 두루 접한다. 이러한 논의의 바탕이 되는 핵심어는 ‘이름의 올바름’이고, 핵심 주제는 사물들에게 본래 적합한 이름이 있는지 묻는 것에 있다. 이와 관련해 그런 이름이 있다고 보는 자연주의적 입장과, 이름은 합의나 관습의 산물일 뿐이라고 보는 규약주의적 입장이 대립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듯이 보이지만 대립의 중재자로 드러난다. 이름의 올바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언어들의 기원을 밝히는 긴 논의가 전개되는가 하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론적 논의도 전개된다. 사물들에 대한 앎을 얻는 방법은 이름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사물 자체를 통해서인가? 소크라테스는 “이름(언어)을 아는 사람은 사물도 안다”는 크라튈로스에 맞서 사물들에 대해 아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사물들 자체를 통해서’라는 입장을 편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을 대변하고 있다면, 크라튈로스는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의 언어철학자들을 대변한다.
책 익는 마을지 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