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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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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18 21:01
2026년 10월 19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13-21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제 형제에게 유산을 저와 나누라고 일러 주십시오.”
형제 사이가 이미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유산이 형제를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다툼의 중재를 사양하시고,
문제의 ‘뿌리’를 가리키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그러고는 한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둑질하지도, 남을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독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내 곡식… 내 재물…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온통 ‘나’뿐입니다.
그 긴 혼잣말 속에 하느님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굶주린 이웃이 담장 밖에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보십시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곧 ‘평화와 안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평화를 ‘곳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리게네스와 교부들이 즐겨 짚었듯,
문제는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재물은 나쁘지 않지만, 재물의 노예가 된 마음은 위험합니다.
곳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입니다(루카 12,33).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의 적을 정확히 짚습니다.
탐욕은 먼저 ‘형제 사이의 평화’를 깨뜨립니다(유산 다툼).
그다음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더 큰 곳간을 지어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쌓아 둔 것이 많을수록 잃을 걱정도 커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과의 평화’를 잃게 합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는 것’ ―
곧 나눔과 신뢰 안에서만 옵니다.
오늘 기억하는 북미의 순교자들(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와 동료들)은 아무것도 쌓아 두지 않고
낯선 땅에서 오래 참으며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마음속 독백에는 하느님과 이웃이 있는가?
나는 ‘곳간’에서 평화를 찾으려 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형제와 다투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인가?
주님,
모든 탐욕에서 저를 지켜 주소서.
곳간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평화를 찾게 하시고,
나눔으로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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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18. 21:00
승자와 패자를 고집하는 사고방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현실을 승패의 게임으로 규정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승자와 패자를 고집하는 사고방식
2026년 10월 18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제국적 의식(empire consciousness)의 확실한 징표라고 지적합니다:
저는 이것을 "제국적 사고"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곧 제로섬(zero-sum) 게임입니다. 제로섬 게임에서는 내가 이기려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져야만 합니다. 이 전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자주 작동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은사나 재능을 나누거나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단지 상대를 꺾어야 하는 경쟁의 장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승패의 세계관"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승패의 세계관, 제로섬 게임의 기대는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승패의 게임으로 현실을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제로섬 게임은 반드시 패자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삶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다른 이들을 반드시 패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진실일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에서 어떤 기묘한 즐거움을 찾곤 합니다. 공동체가 스포츠 팀을 향해 보여주는 열정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를 너무나 좋아하여,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적 사고는 "나는 이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 아닙니다. "나는 이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사고는 경제, 정치, 세계 정책, 소셜 미디어, 종교, 심지어 개인적 관계 속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패자가 생겨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곧바로 복음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지만, 네 복음서는 결코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 종교로 선포했을 때 크게 기뻐하고, 해방감을 느끼며 환영했습니다. 우리는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패자에서 궁극적 승자로 옮겨간 셈이었습니다.
상향식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종교들은 '위에서 아래로 지배하는 승패의 세계관'을 좋아합니다. 꼭대기를 지키고, 꼭대기가 이기도록 보장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패자가 됩니다. 은총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은총 없이는 '함께 승리하는 길', 곧 모두가 은총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는 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승패의 사고방식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이들을 훈육하는 데는 편리할지 몰라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과 세상을 그렇게 틀 지워 버리면, 결국 복음마저도 승패의 틀 안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미국 남부 복음주의권의 한 그리스도교 대학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제 공동체 안의 많은 이들이 현대 문화가 교회를 장악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큰 아이러니입니다. 사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그리스도교 제국주의의 흐름에 오히려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주변의 신자들이 언젠가 힘이 아니라 약함을, 옳음의 주장보다 사랑을 드높이는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 Aaron B.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Christianity and Empire,” Conspire 2018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8). Youtube.com.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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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10.18 20:31
들음에서 오는 믿음의 실재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부름에 담긴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마음을 엽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도 그분께서 먼저 건네시는 말씀을 듣는 데서 자라납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한 까닭입니다(로마 10,17 참조).
그런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귀로 내용을 알아듣는 것보다 깊은 일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으로 가득 찬 마음에 잠시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서둘러 찾지 않고, 지금 주님께서 내 삶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머무는 것입니다. 들음에는 마음의 가난이 필요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익숙한 말씀 앞에서도 새로운 부르심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 때, 우리 안에 오래 머무르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 말씀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주신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했고, 그들 가운데에는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함께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의 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은 주님께서 곁에 계신다는 신뢰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일이 잘 풀려야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실패와 고독, 늙음과 무력함 속에서도 이어집니다. 기도해도 마음이 메마르고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은 조용히 그 약속을 붙듭니다. “지금은 당신의 현존을 느끼기 어렵지만, 당신께서 저를 떠나지 않으셨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씀을 다시 들으면, 일상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를 기다려 준 사람의 인내에서, 아픈 몸을 살펴 주는 손길에서, 말없이 곁에 앉아 주는 형제에게서 주님의 함께하심을 알아봅니다. 때로는 내가 피하고 싶었던 사람의 아픔이 나를 멈추게 하고, 그 곁에 머물라는 부르심이 됩니다.
그래서 들음은 관계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은 만큼 형제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고, 그의 침묵 속에 담긴 외로움에도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성급히 충고하기 전에 무엇이 아픈지 듣고, 내가 해 주고 싶은 일에 앞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른 이의 곁에 머무를 용기를 얻습니다.
들음은 함께 계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믿음은 그 사랑에 나를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내가 받은 그 함께하심을 누군가의 곁에서 살아 내는 일입니다. 소란한 세상의 문을 닫고 가만히 안쪽으로 귀를 모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숨이 있습니다. 믿음은 멀리서 울리는 천둥 같은 함성이 아니라, 거친 숨을 고른 뒤에야 가 닿는 아주 연한 숨결의 떨림에서 싹틉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이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소음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스스로 옳다 여기던 수많은 변명과 내일을 향해 곤두서 있던 불안의 깃발을 내리고, 잔잔해진 수면 아래로 가만히 가라앉는 조약돌처럼 고요해지는 일입니다. 그때 세상의 번잡한 활자들 너머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공기처럼, 바람이 숲의 잎사귀를 스치듯 스며드는 그 세미한 소리를 가슴에 담을 때, 비어 있던 영혼의 자리에 비로소 믿음이라는 조용한 빛이 번져 갑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붙잡으려 손을 움켜쥐는 안간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를 품고 계신 거대한 온기 앞에 온 무게를 맡기며 스르르 힘을 빼는 평화로운 투항입니다. 들음에서 자라난 믿음은 짙은 안개를 걷어내려 애쓰는 대신,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붙드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가만히 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멀리 계신 신을 향해 아득하게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분은 저 높은 하늘의 차가운 별빛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의 틈새마다, 피로에 지쳐 내려앉은 어깨의 무게마다 이미 다정히 깃들어 계십니다. 현존은 멀리 떠나 찾아 헤매야 할 먼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맞닿는 거룩하고 따스한 그늘입니다.
아무런 말을 보태지 않아도 온전히 이해받는 품 안에서, 우리는 그저 머뭅니다. 수많은 청원과 서툰 기도를 내려놓고, 그저 우리와 함께 숨 쉬시는 그분의 호흡에 내 심장의 박동을 포갭니다. 들음은 깊은 신뢰가 되고,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안식이 되어, 함께 계시는 그 거룩한 현존 아래 우리의 오늘이 고요하고 온전하게 닻을 내립니다.
주님, 제 안의 소란을 가라앉혀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외롭고 두려운 날에도 함께 있겠다는 당신의 약속에 저를 맡기게 하소서. 오늘 제 곁에 오는 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가 홀로 견디지 않도록 제가 머물러야 할 자리를 지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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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9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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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묵상글 ( 10/18 22:00, 05:40.)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10/18 22:00 )
- 김찬선 신부님: (05:4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40 추가) .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10/18 22:00)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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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18 21:01
2026년 10월 19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13-21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제 형제에게 유산을 저와 나누라고 일러 주십시오.”
형제 사이가 이미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유산이 형제를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다툼의 중재를 사양하시고,
문제의 ‘뿌리’를 가리키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그러고는 한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둑질하지도, 남을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독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내 곡식… 내 재물…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온통 ‘나’뿐입니다.
그 긴 혼잣말 속에 하느님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굶주린 이웃이 담장 밖에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보십시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곧 ‘평화와 안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평화를 ‘곳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리게네스와 교부들이 즐겨 짚었듯,
문제는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재물은 나쁘지 않지만, 재물의 노예가 된 마음은 위험합니다.
곳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입니다(루카 12,33).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의 적을 정확히 짚습니다.
탐욕은 먼저 ‘형제 사이의 평화’를 깨뜨립니다(유산 다툼).
그다음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더 큰 곳간을 지어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쌓아 둔 것이 많을수록 잃을 걱정도 커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과의 평화’를 잃게 합니다.
참된 평화는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는 것’ ―
곧 나눔과 신뢰 안에서만 옵니다.
오늘 기억하는 북미의 순교자들(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와 동료들)은 아무것도 쌓아 두지 않고
낯선 땅에서 오래 참으며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마음속 독백에는 하느님과 이웃이 있는가?
나는 ‘곳간’에서 평화를 찾으려 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형제와 다투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인가?
주님,
모든 탐욕에서 저를 지켜 주소서.
곳간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평화를 찾게 하시고,
나눔으로 하느님 앞에 부유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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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18. 21:00
승자와 패자를 고집하는 사고방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현실을 승패의 게임으로 규정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승자와 패자를 고집하는 사고방식
2026년 10월 18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제국적 의식(empire consciousness)의 확실한 징표라고 지적합니다:
저는 이것을 "제국적 사고"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곧 제로섬(zero-sum) 게임입니다. 제로섬 게임에서는 내가 이기려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져야만 합니다. 이 전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자주 작동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은사나 재능을 나누거나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단지 상대를 꺾어야 하는 경쟁의 장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승패의 세계관"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승패의 세계관, 제로섬 게임의 기대는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승패의 게임으로 현실을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제로섬 게임은 반드시 패자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삶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다른 이들을 반드시 패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진실일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에서 어떤 기묘한 즐거움을 찾곤 합니다. 공동체가 스포츠 팀을 향해 보여주는 열정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우리의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를 너무나 좋아하여,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적 사고는 "나는 이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 아닙니다. "나는 이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사고는 경제, 정치, 세계 정책, 소셜 미디어, 종교, 심지어 개인적 관계 속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패자가 생겨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곧바로 복음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지만, 네 복음서는 결코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 종교로 선포했을 때 크게 기뻐하고, 해방감을 느끼며 환영했습니다. 우리는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패자에서 궁극적 승자로 옮겨간 셈이었습니다.
상향식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종교들은 '위에서 아래로 지배하는 승패의 세계관'을 좋아합니다. 꼭대기를 지키고, 꼭대기가 이기도록 보장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패자가 됩니다. 은총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은총 없이는 '함께 승리하는 길', 곧 모두가 은총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는 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승패의 사고방식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이들을 훈육하는 데는 편리할지 몰라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과 세상을 그렇게 틀 지워 버리면, 결국 복음마저도 승패의 틀 안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미국 남부 복음주의권의 한 그리스도교 대학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제 공동체 안의 많은 이들이 현대 문화가 교회를 장악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큰 아이러니입니다. 사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그리스도교 제국주의의 흐름에 오히려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주변의 신자들이 언젠가 힘이 아니라 약함을, 옳음의 주장보다 사랑을 드높이는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 Aaron B.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Christianity and Empire,” Conspire 2018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8). Youtube.com.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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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10.18 20:31
들음에서 오는 믿음의 실재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부름에 담긴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마음을 엽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도 그분께서 먼저 건네시는 말씀을 듣는 데서 자라납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한 까닭입니다(로마 10,17 참조).
그런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귀로 내용을 알아듣는 것보다 깊은 일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으로 가득 찬 마음에 잠시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서둘러 찾지 않고, 지금 주님께서 내 삶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머무는 것입니다. 들음에는 마음의 가난이 필요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익숙한 말씀 앞에서도 새로운 부르심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 때, 우리 안에 오래 머무르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 말씀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주신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했고, 그들 가운데에는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함께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의 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은 주님께서 곁에 계신다는 신뢰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일이 잘 풀려야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실패와 고독, 늙음과 무력함 속에서도 이어집니다. 기도해도 마음이 메마르고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은 조용히 그 약속을 붙듭니다. “지금은 당신의 현존을 느끼기 어렵지만, 당신께서 저를 떠나지 않으셨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씀을 다시 들으면, 일상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를 기다려 준 사람의 인내에서, 아픈 몸을 살펴 주는 손길에서, 말없이 곁에 앉아 주는 형제에게서 주님의 함께하심을 알아봅니다. 때로는 내가 피하고 싶었던 사람의 아픔이 나를 멈추게 하고, 그 곁에 머물라는 부르심이 됩니다.
그래서 들음은 관계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은 만큼 형제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고, 그의 침묵 속에 담긴 외로움에도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성급히 충고하기 전에 무엇이 아픈지 듣고, 내가 해 주고 싶은 일에 앞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른 이의 곁에 머무를 용기를 얻습니다.
들음은 함께 계시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믿음은 그 사랑에 나를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내가 받은 그 함께하심을 누군가의 곁에서 살아 내는 일입니다. 소란한 세상의 문을 닫고 가만히 안쪽으로 귀를 모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숨이 있습니다. 믿음은 멀리서 울리는 천둥 같은 함성이 아니라, 거친 숨을 고른 뒤에야 가 닿는 아주 연한 숨결의 떨림에서 싹틉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이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소음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스스로 옳다 여기던 수많은 변명과 내일을 향해 곤두서 있던 불안의 깃발을 내리고, 잔잔해진 수면 아래로 가만히 가라앉는 조약돌처럼 고요해지는 일입니다. 그때 세상의 번잡한 활자들 너머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공기처럼, 바람이 숲의 잎사귀를 스치듯 스며드는 그 세미한 소리를 가슴에 담을 때, 비어 있던 영혼의 자리에 비로소 믿음이라는 조용한 빛이 번져 갑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붙잡으려 손을 움켜쥐는 안간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를 품고 계신 거대한 온기 앞에 온 무게를 맡기며 스르르 힘을 빼는 평화로운 투항입니다. 들음에서 자라난 믿음은 짙은 안개를 걷어내려 애쓰는 대신,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붙드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가만히 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멀리 계신 신을 향해 아득하게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분은 저 높은 하늘의 차가운 별빛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의 틈새마다, 피로에 지쳐 내려앉은 어깨의 무게마다 이미 다정히 깃들어 계십니다. 현존은 멀리 떠나 찾아 헤매야 할 먼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맞닿는 거룩하고 따스한 그늘입니다.
아무런 말을 보태지 않아도 온전히 이해받는 품 안에서, 우리는 그저 머뭅니다. 수많은 청원과 서툰 기도를 내려놓고, 그저 우리와 함께 숨 쉬시는 그분의 호흡에 내 심장의 박동을 포갭니다. 들음은 깊은 신뢰가 되고,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안식이 되어, 함께 계시는 그 거룩한 현존 아래 우리의 오늘이 고요하고 온전하게 닻을 내립니다.
주님, 제 안의 소란을 가라앉혀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외롭고 두려운 날에도 함께 있겠다는 당신의 약속에 저를 맡기게 하소서. 오늘 제 곁에 오는 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가 홀로 견디지 않도록 제가 머물러야 할 자리를 지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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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9 05:24
- 하느님의 작품 의도와 우리의 선(善)의지가 일치하는
오늘 독서 말씀에서 ‘한때(once)’라는 말이 눈에 들어와
‘한때’ 묵상 곧 우리 인생은 너나없이 ‘한때 인생’이라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이 말은 우리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인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때는 이렇게 살았지만 저렇게 살게 되고,
한때는 저렇게 살았지만 이렇게 살게 되는 그런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나없이 다 한때 인생을 사는데
문제는 그것이 회개일지 타락일지가 문제입니다.
한때 죄 가운데 살았지만 회개하여 은총의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한때 신앙인답게 살았지만 어떤 계기로 죄 중에 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 독서는 에페소 신자들이 개과천선한 사실을 얘기합니다.
“우리도 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뜯어보면 하느님의 큰 사랑 덕분에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면 죽었던 우리는 어떤 것이고
살게 된 우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육신 생명이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된 것은 아닐 것이고,
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그런 뜻일까요?
그렇게 얕은 뜻이 아니지요.
욕망을 따라 사는 바람에 우리의 정신이 죽어있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시시 정신을 살아야 하는데 그 정신이 죽어있다가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을 보내는 올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시시 정신이란 프란치스코 지녔던 정신이고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성령에 취해 살게 했던 그 정신인데
죽어 없던 그 정신을 되살리면 우리도 성령에 따라 살게 되겠지요.
아무튼 에페소 신자들은 한때 육의 정신으로 욕망에 따라 살던 사람들인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신 사람들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진짜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금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다시 육의 정신이 들어차 욕망대로 살 수 있는 존재들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살리신 그 생명과 사랑의 삶을 계속 살라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작품답게 살아야 한다고 오금박듯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담겨있는 것이고
작가의 의도에 맞게 살려는 우리 의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하느님의 의도와 우리의 선(善)의지가 일치하는
그런 영적인 삶을 살기로 다시 마음먹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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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19. 04:52
"진정한 소유는 오직 나눔으로 증명됩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가난한 이들에게 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고 탐욕을 더 특별하게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재물을 탐하는 마음은 영적 성장에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고 탐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을 채우고자 하는 무의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실상 우리가 가진 것이 참으로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탐욕은 끝없는 구렁텅이와 같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많은 구두쇠들은 부자로 죽기 위해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참 묘한 아이러니죠?!
우리는 흔히 재물을 얼마나 모았는지로 부를 측정하지만, 성인들은 얼마나 나누어 주었는지로 부를 계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소유의 심리는 역설로 가득합니다. 재물을 쌓는 데 인생을 허비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오히려 내적으로 얼마나 빈곤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적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자에 대해 누군가가 "그는 단지 자기 재물을 지키는 수위요 열쇠지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탐욕을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가늠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돈의 액수가 받는 경우와 주는 경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액수는 같지만, 그 차이는 우리의 편향을 드러냅니다. 그 차이를 측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탐욕 지수"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요? 왜곡된 거울보다 진실한 거울을 보고 싶어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우리는 설령 추한 모습이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합니다.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좋은 쪽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진짜 성찰과 성장은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모습이 추하거나 불편하더라도, 왜곡된 환상 속에서 사는 것보다 진실을 아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포장된 자기만족은 우리를 환상 속에 가두어 둘 뿐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우리에게 '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나눔의 자유와 기쁨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행할 때만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지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소유는 오직 나눔으로 증명된다. 내어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대를 지배한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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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 말씀에서 ‘한때(once)’라는 말이 눈에 들어와
‘한때’ 묵상 곧 우리 인생은 너나없이 ‘한때 인생’이라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이 말은 우리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인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때는 이렇게 살았지만 저렇게 살게 되고,
한때는 저렇게 살았지만 이렇게 살게 되는 그런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나없이 다 한때 인생을 사는데
문제는 그것이 회개일지 타락일지가 문제입니다.
한때 죄 가운데 살았지만 회개하여 은총의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한때 신앙인답게 살았지만 어떤 계기로 죄 중에 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 독서는 에페소 신자들이 개과천선한 사실을 얘기합니다.
“우리도 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뜯어보면 하느님의 큰 사랑 덕분에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면 죽었던 우리는 어떤 것이고
살게 된 우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육신 생명이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된 것은 아닐 것이고,
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그런 뜻일까요?
그렇게 얕은 뜻이 아니지요.
욕망을 따라 사는 바람에 우리의 정신이 죽어있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시시 정신을 살아야 하는데 그 정신이 죽어있다가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을 보내는 올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시시 정신이란 프란치스코 지녔던 정신이고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성령에 취해 살게 했던 그 정신인데
죽어 없던 그 정신을 되살리면 우리도 성령에 따라 살게 되겠지요.
아무튼 에페소 신자들은 한때 육의 정신으로 욕망에 따라 살던 사람들인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신 사람들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진짜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금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다시 육의 정신이 들어차 욕망대로 살 수 있는 존재들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살리신 그 생명과 사랑의 삶을 계속 살라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작품답게 살아야 한다고 오금박듯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담겨있는 것이고
작가의 의도에 맞게 살려는 우리 의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하느님의 의도와 우리의 선(善)의지가 일치하는
그런 영적인 삶을 살기로 다시 마음먹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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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9.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19. 04:52
"진정한 소유는 오직 나눔으로 증명됩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가난한 이들에게 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고 탐욕을 더 특별하게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재물을 탐하는 마음은 영적 성장에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고 탐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을 채우고자 하는 무의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실상 우리가 가진 것이 참으로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탐욕은 끝없는 구렁텅이와 같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많은 구두쇠들은 부자로 죽기 위해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참 묘한 아이러니죠?!
우리는 흔히 재물을 얼마나 모았는지로 부를 측정하지만, 성인들은 얼마나 나누어 주었는지로 부를 계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소유의 심리는 역설로 가득합니다. 재물을 쌓는 데 인생을 허비하는 부유한 사람들은 오히려 내적으로 얼마나 빈곤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적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자에 대해 누군가가 "그는 단지 자기 재물을 지키는 수위요 열쇠지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탐욕을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가늠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돈의 액수가 받는 경우와 주는 경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액수는 같지만, 그 차이는 우리의 편향을 드러냅니다. 그 차이를 측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탐욕 지수"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요? 왜곡된 거울보다 진실한 거울을 보고 싶어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우리는 설령 추한 모습이라도 진실을 알고 싶어합니다.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좋은 쪽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진짜 성찰과 성장은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모습이 추하거나 불편하더라도, 왜곡된 환상 속에서 사는 것보다 진실을 아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포장된 자기만족은 우리를 환상 속에 가두어 둘 뿐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우리에게 '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나눔의 자유와 기쁨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행할 때만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지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소유는 오직 나눔으로 증명된다. 내어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대를 지배한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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