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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0(주일) / 새것이 되었다고 함은 (고후5:17)
어느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최면술사가 강사로 초대되었습니다. 강사는 학생들을 상대로 최면술에 관해 설명하더니 곧바로 실습으로 들어간다며 학생들 몇을 앞으로 불러내 최면을 걸면서 ‘너희는 서로 다른 동물이 될 거다.’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에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한 아이가 마치 개라도 된 듯이 멍멍거리고 짖었습니다. 또 한 아이는 원숭이처럼 팔을 흔들며 몸을 구푸리고는 교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며, 세 번째 아이는 닭처럼 꼬꼬댁거리며 책상들 사이로 날아다니는가 하면, 다른 한 아이는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의자 밑을 기어 다녔습니다.
한참 후 최면술사가 학생들의 최면을 깨우자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최면 상태에서의 자신들의 행동을 알고 난 뒤엔 부끄러워하며 무척이나 놀라워했습니다.
저는 최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최면에 걸린 사람이 멍멍 짖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개는 아닐 겁니다.
굳이 최면이 아니더라도 꼬꼬댁거린다고 사람이 닭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최면에 걸린 순간만큼은 학생들은 누가 봐도 스스로가 개처럼 생각했고 닭처럼 행동했습니다.
도대체 최면이 뭐길래 멀쩡한 사람을 짐승처럼 되게도 만드는 걸까요?
과연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또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하는 걸까요?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입니다. 창조 이래로 있어 온 인류 가운데서나 또 앞으로 태어날 무수한 인류 가운데서 나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가지는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는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이런 무관심과 무감각에서부터 인간의 불신이 시작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우린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는 사실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2020년에 네덜란드의 한 미술관에서 코로나 여파로 잠시 휴관한 기간에 반 고흐의 작품 한 점을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도난품은 가로 57센티에 세로 25센티 정도의 비교적 작은 그림이었는데도 당시 그림의 가격이 81억 원 이상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어느 날 나름으로 열심히 그린 그림을 여러분 앞에 선보인다면 여러분은 얼마쯤에 사 주시겠습니까?
아마도 속으로는 그걸 누가 사냐 그러실 겁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가만 놔뒀으면 깨끗한 도화지이니 누구라도 사 갈 사람이라도 있을 텐데 그림에 문외한인 제가 그림이랍시고 그려놓으니 그때부턴 도화지가 휴지가 되고 쓰레기가 되고 말 뿐입니다.
이렇듯 ‘만들어진 것’은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작품이 되기도 하고 쓰레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며,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그 값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안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나를 만드셨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한번 나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설사 부모를 거역하고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둘 사이에 흐르는 혈통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혈통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가진 DNA가 같다는 말입니다. 즉 같은 DNA가 유전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만들어진 우리 사이에서도 똑같습니다.
창세기 1: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으며, 창세기 5:1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종 중 어디에 속하실까요? 하나님이 여자 형태일까요? 남자 형태일까요? 하나님은 젊으셨을까요? 늙으셨을까요?
죄송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은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과 나 사이에도 하나님의 DNA가 유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이 주는 환경이나 형편에 주눅 들지 말고 언제 어디서든 나는 하나님의 혈통이고 하나님의 DNA를 받은 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겁니다.
옛말에도 ‘피는 못 속인다’든지 ‘씨 도둑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때의 ‘피’나 ‘씨’라는 말도 모두 유전자 즉 DNA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기만 하면 나에겐 전능하신 하나님의 DNA가 있게 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DNA가 있으니 세상을 사는 동안 나에게도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DNA가 있으니 세상을 사는 동안 나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능하신 하나님의 DNA를 가진 우리는 인생에서 결코 실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DNA를 가진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패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본문이 우리에게 알게 하려는 교훈도 이런 겁니다. 보시면 본문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최면에 걸려 동물처럼 행동했던 아이들을 생각해 보시면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일순간이었을지라도 그들은 동물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최면에서 깨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서는 이전에 자신도 모르게 동물처럼 행동했던 순간들을 부끄럽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동물처럼 행동한 것이 의식적으로 연기한 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최면에 걸렸던 순간만큼은 그들은 최면술사가 그들의 생각 속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정보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짜로 개이거나 원숭이가 되었던 겁니다.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할까요?
사전에서 최면이란 단어의 뜻을 보면 ‘의도적인 암시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잠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최면을 통해 사람의 생각 속에 본래의 정체성과는 다른 거짓말 곧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다 보니 자신의 참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살 게 된 것입니다.
결국 생각 속에 주입된 ‘거짓된 정보!’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거짓된 정보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사탄은 모든 사람의 생각 속에 거짓된 정보를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에 속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에 속아 살게 됩니다. 그로 인해 불신자들인 경우에는 나에겐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게 되며, 신자라 해도 내 뜻,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매일매일을 혼자만의 힘으로 수고하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사탄의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최면을 깨고 본래의 내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티비를 보다 보니 어떤 최면술사는 ‘레드 선’하고 최면을 걸고는 다시 ‘레드 선’하고 최면을 깨웁니다.
결국 최면은 최면을 건 사람이 깨워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사탄이 저와 여러분을 향해 ‘레드 선’이라고 해줄 리도 만무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최면 좀 더 정확히는 사탄의 시험에 빠져 잠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깨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랬더니 잠들어 버린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되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들 죽었다고 결론 내린 소녀를 향해서도 ‘저가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하시며 소녀를 향해 ‘달리다굼!’ 즉 ‘깨어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자는 믿음은 이미 사탄의 최면에 걸린 것입니다. 잠들어 버린 기도로는 절대로 사탄의 최면에서 깨어날 수 없습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하나님의 DNA를 가진 존재였지만 사탄의 시험에 빠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고 죄인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에덴을 빼앗긴 채 오늘까지도 때론 실패자의 모습으로, 때론 병든 자의 모습으로, 때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등의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리 살고 있을 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그렇다면? 이때 새것이 되었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문이 말하는 ‘새것’을 ‘이전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새것이 되었다고 금방 부자가 될 것을 상상하면 안 됩니다. 무능력한 내 자신이 새것이 되었다고 당장에 슈퍼맨처럼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새것’이라는 개념은 정확하게는 ‘본래의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앞서 사람의 본래의 모습은 어떤 거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DNA를 가진 존재가 사람의 본래의 정체성입니다.
흔히들 일이 꼬이거나 잘 안 풀릴 때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들을 하는 데 믿음도 그러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가 믿음의 초심입니다. 따라서 우선은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라는 것에서부터 믿음을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진 그때부터 낡아지고 중고품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깨어질 수 있고, 망가질 수 있고, 잘못될 수 있습니다.
사람도 피조물이기에 살다 보면 인생이 깨어질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피조물이기에 깨진 걸 붙이고, 망가진 걸 고치고, 잘못된 걸 새롭게 하는 것들은 다 내 능력 밖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의 사람에게서는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만 내 인생이 깨지면 붙이시고, 망가지면 고치시고, 잘못되면 다시 잘 되게 역사하시는 분 또한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매 순간에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소망이며, 이 소망이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고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피조물로서의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돼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그의 책 야고보서 1:5절에서 말하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말씀이 피조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철칙 1호’라 생각하고 또한 믿습니다.
피조물의 특징은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신다면 또한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살 수 있고 받아야만 뭐든 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시겠다.“고. 그러므로 이제부턴 야고보 사도가 전한 말슴에서 지혜 대신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들의 단어를 넣어보세요.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이 주시리라.
물질이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이 주시리라.
건강이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이 주시리라.
실력이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이 주시리라.
이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1. 뭔가가 부족하다. 2. 하나님께 구하라. 3.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은 일종의 ’믿음의 공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다-구하자-주시리라.‘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구한 것을 받으시고 원한 걸 얻으시면 그것이 축복이고. 응답이고, 은혜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이 공식을 우리 각자의 삶에 대입해 볼진대 지금 뭔가가 부족하다. 없다. 안 된다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둘 중의 하나입니다. 1번.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거나. 2번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거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경우라면 내가 응답받지 못한 이유로는 어느 게 맞을까요?
1번도 맞고 2번도 맞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2번의 경우, 하나님이 아직 주시지 않았다면 그건 하나님의 섭리이기에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1번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나마 다시 최선을 다해 볼 수 있는 것이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현재 저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의 영역에 맡기고 우린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 즉 부족한 것을 받기 위해 힘써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믿음 공식’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이란 표현이 맞습니다. ‘부족할 때-구하면-주신다!’는 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으신다면 바라기는 여러분의 인생이 ‘부족하다.’에서 뭠춰지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 구하면.’이라는 소망이 ,‘하나님이 주신다.’라는 믿음이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에서 간혹 듣는 말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세요. 하나님과 우린 남이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DNA가 흐르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DNA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DNA가 있는 한 우리 인생은 언제든 ‘새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DNA가 나타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혹은 믿어야지 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DNA가 활성화되고 역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더이상 부끄러운 옛날로 돌아가도 좋을 존재가 아닙니다. 최면에 걸려 실패자인 양, 가난이 팔자인 양, 실패와 고난의 멍에를 운명처럼 달고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거지처럼 살아도 부자입니다. 임금의 아들은 거지처럼 살아도 왕자입니다.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혹은 내가 나를 볼 때라도 내가 어떤 존재로 평가되고 여겨지든 그건 어디까지나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니 생각일 뿐!’ 저와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든 ‘새것’ ‘새 인생’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중에 ‘나도 그 기회를 한번 가져보자.’고 하신다면 이제부터라도 ‘내게는 하나님의 DNA가 흐른다.’는 확신에서부터 믿음을 다시 시작하기를 권면 드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보며, 내 형편만 보며 ‘좋네, 나쁘네. 맘에 드네, 안 드네.’ 하는 것은 다 불평이고 불신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오직 좋으면 감사하고 나쁘면 기도하세요. 맘에 들면 더 충성하고, 맘에 안 들면 하나님께 더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후히 주시되 꾸짖지 아니하신다고.
부정하고 싶어도 이제까지 우린 다 사탄의 최면에 걸렸더랬지만 이제라도 깨어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본래의 축복과 소유와 신분을 돌려받을 것입니다. 그러라고 예수님이 오늘도 내게 오신 것이기에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의 결단으로 깨어나 이전의 실패와 고통의 삶에서 이제부터는 새것이 된 승리와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