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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 목요일(순례44일차) 수호천사 기념일,
탈출23,20-23 마태18,1-5.10
수호천사
오늘은 순례44일차 입니다.
한국을 떠난지도 장장 44일째이지만
매일 강론을 쓰고 미사를 드렸기에 꼭 하루 같습니다.
어제의 변화가 획기적입이다.
주님의 안배가 참 오묘합니다.
본격적인 산티아고 순례에 앞서 루르드 성모성지로부터 순례가 시작되어
마침내 파티마 성모성지에서 순례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티마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버스로 8시간 걸립니다."
예전 블라시오 아빠스님의 말을 흘려버리듯 했지만,
이젠 유력한 대안이 된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9.27일로 끝났고 9.28-10.4일까지 남은 7일이 문제였습니다.
10.5일 산티아고-마드리드로 가서 2박한후 10.7일에는 한국을 향해 출국하기로 이미 확정되었고,
일주간 여유와 더불어 상당량의 비용이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제 순례43일차, 파티마 버스 순례는 가까운 동네로의 순례가 아니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정오 12시에 출발하여 김승월 형제가 예약해준
저렴한 비용의 파티마 '크리스토 레이'호스텔에 도착하니 오후9시, 현지시간 오후8시였습니다.
시차가 1시간 차이가 날 정도의, 도보 순례 못지 않은 9시간이 걸린 장거리 지루한 버스 순례였습니다.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칼을 지나면서도 비슷한 풍광에 사람들이라 전혀 다른 나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날씨는 가을인데 여전히 푸른 초목들은 흡사 여름처럼 보였습니다.
역시 피스텔라에서 산티아고에 왔던 날처럼 버스에서 많이 졸았던 날입니다.
전날 한밤중부터 쓴 강론에다 카톡사진 전송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발견한, 석양빛을 받으며 맨발로 일몰사진을 확인하는 제모습을
담은 사진이 너무 재미있어 많은 사랑하는 분들께 전송했던 것입니다.
제 도반인 이냐시오 형제가 찍은 산티아고 주일미사 공동집전 사진에 이은,
흡사 고흐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두번째 작품으로 많은 분들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바로 저에겐 이냐시오 형제가 수호천사였음을 깨닫습니다.
형제가 아니었다면 이런 사진 작품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호천사 신심이 참 깊고 풍요롭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늘 호주머니에 천사 그림이 있는 상본을 지니고 다녔다 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1독서 탈출기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내가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을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히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수호천사는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
하느님과 깊이 연대되어 있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현존인 수호천사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잊고 지내는 지요.
신비 감각을 잃어버린 머리 좋은 바보 신자들로 가득한 오늘날 교회 같습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인 무수한 수호천사, 수호성인들 덕분에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루르드의 성모님과 산티아고의 성 야고보 사도가 저희 수호성인이자 수호천사였습니다.
아니 한국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으로 깊이 연대해준 사랑하는 모든 분들 역시
저희들의 수호천사였음을 깨닫습니다.
늘 자비로운 하느님 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수호천사 신심의 핵심입니다.
이런 신심을 빼버리면 우리 신앙은 앙상한 가지들만 남은 꼴이 될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인간 존엄성의 보루입니다.
사람마다 수호천사가 있다함은
모두가 하느님의 귀중한, 유일무이한 자녀들임을 뜻합니다.
그러니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 여김은 바로 그들의 수호천사를, 하느님을 업신여김을 의미합니다.
하여 이웃을 무시하고 멸시함이 대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파티마에 도착했으니,
루르드의 성모님의 수호천사 역할은 파티마의 성모님이 이어 받게 되었습니다.
파티마 성모님,
수호성녀 어머니 품에서 오늘 하루 편히 피정하며 산티아고 순례를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모든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저의 하느님, 천사들 앞에서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시편13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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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탈출 23,20-23
복음 마태 18,1-5.10
전화를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아마 거의 대부분이 “여보세요?”라는 말일 것입니다. 사실 요즘 휴대전화를 받으면 그 화면을 통해서 누가 내게 전화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보세요?”라고 말하면서, 누가 내게 전화했는지를 모르는 척 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부님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 신부님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신부님께서는 휴대전화기의 화면을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면서 곧바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존경하는 *** 신부님! 이 미천한 제게 어쩐 일이십니까?”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화를 받아준다면 전화 건 사람이 얼마나 기분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니 전화를 건 사람이 기분 나쁠 이유가 없지요.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이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내 주변에 기쁨과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임을 깨닫습니다.
밝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남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를 통해서 밝고 행복한 세상을 이루어질 수 있으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뻔한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들 모두가 다 뻔한 모습일 때,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또 다른 실천이 아닐까요?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상대방이 해주길 바라기보다는 먼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상대방에게 해 준다면 어떨까요? 이 편이 훨씬 쉽고, 더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저 사람은 천사표야.”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을 선으로 이끌고 악으로부터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이 역할이 단순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만이 담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도 ‘천사표’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는 또 한 명의 수호천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밝은 세상, 기쁘고 행복한 세상을 지금 당장 천사표인 나를 통해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입니다. 바로 천사표가 더욱 더 많아져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인 요즘,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관심을 받고 싶거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표시하라. 이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불가능하다(로렌스 굴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
가끔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암 걸린 것에 대해서 얼마나 불평과 원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지를 가지고 극복해나가면서 오히려 이 암이 제게 큰 도움을 주었음을 깨닫습니다. 만약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건강에 대한 소중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건강에 대한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폭음, 폭식 등을 일삼으면서 내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살았겠지요. 그런데 암에 걸리고 나니, 건강의 소중함이 얼마나 큰 지를 느끼게 되고, 건강에 좋은 식사법과 생활 습관들을 터득해서 건강을 지키고 있습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암이 치유되고 극복했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하고 싶었던 또한 불평불만으로 일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 암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도 생길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나를 위한 것이며,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언제든 또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힘차게 그리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있지요. 아픔이 있는 사람은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함부로 버리기보다는 성장의 발판으로 생각을 전환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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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천사 기념일>(2014. 10. 2. 목)(마태 18,1-5.10.)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대재난이나 대형 참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을 때에
그들의 수호천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질문은 "하느님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나?"이기도 합니다.
(또는 "그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신학자들(또는 사목자들)은
어떻게든 대답하려고(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설명이) 공감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공허한 말일 때도 많습니다.
정답은 "모른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른다는 대답만 하는 것도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정말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약성경에서는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들 탓도 아니고, 그것이 죽어야 할 이유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그 아기들을 순교자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고, 안 믿었고,
자기들이 예수님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때 그 아기들에게는 수호천사가 없었을까?
있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 요셉에게 빨리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말해 준 천사는
왜 그 아기들의 부모들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비슷한 질문을 계속 해 봅니다.
'토빗기'의 여주인공 '사라'는
'아스모대오스' 라는 악귀 때문에 결혼할 때마다 신랑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신랑이 일곱 명이나 됩니다.
'사라'는 나중에 토비야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지만,
이유도 모른 채 죽은 그 일곱 명의 신랑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욥기'를 보면,
하느님과 사탄이 욥을 두고 내기를 하는 바람에
욥이 모든 것을 잃었다가 나중에 다시 원상 복구되는데,
처음에 죽은 욥의 아들 일곱과 딸 셋,
그리고 욥의 머슴들은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욥' 자신은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더 잘 깨닫고 믿게 되었지만,
죽은 아들들과 딸들과 머슴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아예 없었지 않은가?
'요나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요나를 니네베에 보내서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으면서도
그 도시를 심판하지 않으신 이유가 나옵니다.
"...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니네베는 어른들의 죄를 보면 심판해야 할 도시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도시에 있는 어린이 십이만 명과 수많은 짐승들이 가엾어서
그 도시를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수가 십이만 명이 아니라 한 명뿐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하느님인데 인간 역사를 보면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어린이들이 너무 많고, 지금도 많습니다.
어른들의 죄 때문에 무죄한 어린이들이 죽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죽음을 보고만 계실까?
수호천사가 있다면 최소한 어린이들은 지켜 주어야 하지 않은가?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비극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처럼 자신의 모든 고난이 하느님의 섭리였다고
나중에라도 깨닫게 되면 다행한 일인데, 그래도 요셉은 죽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어버리면 섭리를 깨달을 기회도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서는 그것을 깨닫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 깨달음을 지상의 부모에게 전해 줄 수가 없으니...)
수호천사 기념일 강론으로
"하느님은 수호천사를 통해서, 또는 직접,
우리를 항상 보살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자." 라고 말하면 간단한데...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큰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이 무슨 도움이 될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울어 주던 여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한다는 말씀은
죄가 없어도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이 없게 하려면 전부 다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려면
질문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특정 죄인 한두 명만 탓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ㅡ 수호천사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 서로를 도울 때
비로소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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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멕시코에서 이적해 온 하비에르 에르난데스란 공격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등 뒤의 이름에는 에르난데스가 아닌 ‘치차리토’란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치차리토는 에르난데스의 이름이 아닙니다. 14살 때부터 친구였던 미구엘 치차리토의 이름이었습니다. 둘은 열심히 노력해서 빅클럽에서 함께 뛰자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치차리토보다는 에르난데스가 더 빠르게 성장했고 맨유라는 빅클럽에 들어왔지만,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던 치차리토는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에르난데스가 팀 동료들과 파티를 하고 있는데 미구엘이 에르난데스에게 술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약간은 미구엘을 무시하게 된 에르난데스가 나중에 하자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3일 뒤 에르난데스는 미구엘의 사고소식을 듣습니다. 4일이 더 지나고서야 멕시코로 날아갈 수 있었던 에르난데스는 병실로 들어가 다리가 잘린 미구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혼자 술을 마시려 들어갔던 술집이 마피아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도망가는 미구엘이 마약에 취한 줄 알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이 다리를 총으로 쏘았던 것입니다. 둘은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 이후 에르난데스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대신 친구 이름인 치차리토를 새기고 경기를 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치차리토에게 로봇다리를 선물하였고 지금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2010년 맨유 첫 출전 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너와 함께 뛸 수 있어서 기쁘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먼저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앞길을 닦고 길을 인도하게 하시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는 그 천사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천사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어서” 그 천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천사는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파견된 자는 파견한 자의 이름을 지닙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합니다. 이름을 지닌다는 말은 그 안에 파견하신 분을 품고 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줄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천사는 이후에 교회를 이끄실 하느님의 파견자에 대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셔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니시고 파견된 천사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따라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분을 파견하신 분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견된 이의 말을 잘 따라야하는 이유는 파견된 이가 파견하신 분까지 다다르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중간에서 오고가며 파견하신 분과 세상을 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천사의 역할을 하시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면 너희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4,3)
가톨릭교회는 세례를 받으면 바로 왕이요 사제요 예언자로 파견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견 받아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파견 받은 이의 직무이고 천사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천사가 되어야합니다. 그들이 우리말을 잘 들으면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천사가 되어야만 그 파견하신 분의 이름, 즉 그 분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구원이 가능한데, 결국 파견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선교로 파견 받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면 동시에 그만한 책임도 따릅니다. 우리 마음대로 했다가는 우리를 파견하신 분의 이름을 더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는데도 우리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파견하신 분을 거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교회로부터 파견 받은 천사들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파견 받아야 파견하신 분의 이름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파견하신 분의 이름을 지녀야 그 이름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 등 뒤에 우리를 파견하신 분의 이름이 항상 붙어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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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람은?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사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타산지석”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실수나 잘못을 거울삼아 나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면 내 부족함을 챙겨봅니다. 누군가의 꾸중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내가 그 꾸중을 듣는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를 접하면서 저의 무뎌진 마음을 질책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님 앞에는 어린이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그저 그분께 안겨있으면 행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19,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수 배우시기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처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 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10가지 행복비법을 맘에 새겨봅니다.
1. 다른사람의 삶을 인정하라
2. 관대해져라
3. 겸손하고 느릿한 삶을 살아라
4. 식사때 티비를 끄고 대화하라
5.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6.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줘라
7.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라
8.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라
9. 자신의 신념,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
10.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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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오래전부터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 신심의 대상일뿐더러 신학적 성찰의 가치가 높은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머물러 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지낸 ‘소화’ 데레사 성녀 대축일의 복음과 거의 같습니다. 성녀의 영성에 깊이 공감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노스가, 그의 책에 사인해 주기를 청하는 한 브라질 소녀에게 ‘어린이다움’의 위대함에 대하여 적어 준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 추악한 세상은 오직 시인들과 아이들의 순박한 공감으로 말미암아 지탱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시인들에게 충실하고, 어린 시절에 충실하십시오! 절대로 어른이 되지 마십시오!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채려면 복음서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를 닮아라.’ 그런데 어른들은 기만당한 어린 시절을 향해 여러 세기에 걸쳐 이렇게 되풀이합니다. ‘우리를 닮아라.’ 당신이 오랜 세월을 다시 읽을 때, ‘세도가’는 무력하고 ‘박사’는 무지하며 ‘권모술수’는 어리석다고 점점 더 믿게 된 이 늙은 작가를 떠올리며 기도해 주세요.”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의 질서 안에서 본디 모습을 찾는다는 ‘어린이 정신’을, 유혹과 위협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간직하며 살아가는 데에는 큰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약속하듯, 하늘의 천사들은 우리의 이러한 영적 투쟁에 늘 함께할 것입니다. 수호천사 기념일에 제 가슴속의 어린이의 마음을 오랜만에 만나며 조용히 미소 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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