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상서당(溪上書堂)
이황 선생의 호가 ‘퇴계’인데 이는 ‘작은 개천가에 물러나 앉는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호가 말해주듯 어쩌면 선생께서는 어지러운 벼슬길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심신을 수양하고 인재를 기르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더 마음을 두셨을 것이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15년이 지난 49세 되던 해. 선생은 백운동 서원을 사액서원으로 해주기를 청한다. 그러고 난 뒤 1년 2개월의 풍기군수 직을 그만두고 두 궤짝의 책 짐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선다.
고향에 돌아와 지금의 퇴계 종택이 있는 상계의 개울 건너 산기슭에 한서암을 짓고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며 칩거하는 중 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서암이 협소하고 금방 퇴락하여 다시 지어진 것이 계상서당이다.
수 년 전에 새로 다듬어진 계상서당은 도산서당 이전 선생의 수련과 도학전수의 수도처로 선생의 도학이 시작되고 꽃피워진 곳이다. 일찍이 농암선생께서 자주 방문하셨고 율곡선생도 23세시에 이곳에서 사흘 동안 머무르면서 학문을 논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계상서당은 비록 작은 집이지만 만물일체라는 선생의 사상은 우주를 아우르는 크고 넓은 것이다. 서당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선생이 은퇴하여 퇴계수(退溪水)가 되었고 주변에 거처하시던 집과 자연은 선생의 깊은 학문과 사상이 깃든 도학의 연원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의 자취가 모두 없어져 안타깝게 여겼는데 1715년 창운재(蒼雲齋) 권두경 선생이 앞장서서 지금의 퇴계 종택인 추월한수정을 짓고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유적 고증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계상서당, 한서암, 계재 등 옛 유적을 중건하여 계상학림이라 하고 이 마을 전체를 계상도학연원방(溪上道學淵源坊)이라 부르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생의 도학을 체득케 하여 참다운 삶의 길로 이끌어 주고 있다.
지금 이 건물들은 다시 고쳐 지어져 개울가에는 2011년 계상학림중건비가 세워져서 이곳을 찾는 이에게 그 내력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세상사는 이야기] 퇴계와 율곡의 첫 만남에서 배우다
매일경제 기사 입력 : 2016-08-05 16:20:36 수정 : 2016-08-05 16:32:34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연일 폭염이지만 필자가 있는 안동 도산 기슭은 낮엔 덥더라도 새벽녘은 20도 정도로 선선하다. 그래서 삼복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온 수련생들도 새벽 산책을 반긴다. 장소는 주로 도산서원 뒷산 너머 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시냇가 주변, 계상(溪上)이라 불리는 곳이다. 천원권에 그려진 겸재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의 무대이다. 퇴계 선생은 50세에 이곳으로 물러나 스스로 호를 '시내로 물러난다'는 뜻을 담아 '퇴계(退溪)'로 하고, 시내의 이름인 '토계(兎溪)'도 퇴계로 바꾸었다.
60세 때 산 너머 도산서당을 마련하기까지 10년간의 이 시기는 많은 저술과 제자 양성이 이루어진 절정기였다.
몇 해 전 기록을 참고하여 없어진 당시의 집 세 채를 복원하였는데, 살림집(한서암)과 공부방(계상서당), 기숙사(계재)를 합쳐도 대여섯 칸에 불과하다.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계상학림의 참모습이다.
수련생들이 이곳에서 가장 집중해서 듣는 것은 퇴계와 율곡의 첫 만남이다. 1558년 음력 2월, 23세의 청년 율곡이 계상으로 58세의 퇴계를 찾아왔다. 막 결혼한 뒤 성주목사로 있던 장인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외가인 강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첫 만남에서 율곡은 대학자 퇴계에게 한껏 존경을 담은 시를 지어 드린다.
공자와 맹자의 학문으로부터 흘러나와
무이산 주자에게서 빼어난 봉우리 이루었네
살림이라고는 경전 천 권뿐이요
사는 집은 두어 칸에 불과하네
가슴 속은 비온 뒤 개인 달 같이 환하며
담소하면 요동치는 물결 그치게 하네
이 몸은 도 듣기를 구하는 것이지
반나절 한가로이 보내려는 것 아니라오
-율곡 이이가 퇴계이황에게-
이 시를 받은 퇴계는 율곡에게 각자 공부에 노력하자며 몸을 낮춘 겸손한 자세로 화답한다.
병든 나는 여기 갇혀 봄을 보지도 못했더니
그대 와서 내 정신 시원케 해주었소
명성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이미 알았으며
몇 해 전 먼저 찾지 못했음이 못내 부끄러워라
좋은 곡식은 돌피의 성숙과 아름다움 허용치 않고
작은 먼지도 거울이 닦여 새롭게 됨을 방해하네
지나친 시어는 모릊미기 거두어내고
노력하는 공부를 각자 날마다 가까이 하세
-퇴계이황이 율곡이이에게-
계상에서 3일 동안 함께 지냈다. 그사이 율곡은 퇴계의 인품과 학덕에 감탄하고, 퇴계는 젊은 율곡의 비범함을 파악하고 나라의 기둥이 되어 달라고 당부한다. 떠나기에 앞서 특별한 가르침을 청하는 율곡에게 퇴계는 오래도록 묵묵히 있다가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이 귀하고(持心貴在不欺), 벼슬에 나아가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함을 경계해야 한다(立朝當戒喜事)'는 글을 주었다.
젊은 율곡이 원로학자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정중히 청하고 배우는 모습은 요즘 우리 젊은이에게도 필요한 자세이다.
또한 퇴계가 자식보다 어린 젊은 학자에게 자신을 낮추면서 존중해주는 자세 역시 오늘날 기성 원로세대가 가슴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갈등과 반목이 점점 심해져 가는 세태에 우리 모두 퇴계와 율곡 두 분의 첫 만남으로부터 겸손과 배려의 자세를 배웠으면 한다.
계상서당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