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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자의 간청(1)
마 15:21-31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15:21-31 / [가나안 여자의 믿음;막7:24-30] 예수께서는 그 지방을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다. 22) 그곳에 사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와서 큰소리로 간청하였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 딸이 귀신 들려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있습니다.' 24)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즉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지 이방인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선생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6) 예수께서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시자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질 않습니까?' 28) 그때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29)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로 되돌아가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30) 군중이 절름발이와 맹인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 앞에 앉혀 놓으니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1) 말 한마디 못하던 벙어리가 말을 하고 팔과 다리를 못쓰던 불구자들이 멀쩡하게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걷고 뛰어다니며 맹인들이 눈을 떠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중은 매우 놀라워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본문은 유대인들에게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두로와 시돈에서 가나안 여인의 귀신 들린 딸과 많은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21-28) 메시야에게 주어진 사명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선민인 유대인을 우선적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딸을 살려달라는 한 여인의 소리를 이방인들 중에 가장 천대받았던 가나안 족속이라는 이유로 듣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방인이었던 이 여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역의 대상은 유대민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이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처음부터 이 의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때가 있으신 것입니다. 가나안 백성이 가나안 땅에 거하는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남의 땅, 광야에 있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때 그들은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유대인들을 먼저 세워 이방인들을 섬기게 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인 이 여인의 딸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시간은 이 여인이 고백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인정한 위대한 신앙의 고백에서부터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오지 않은 시간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이 여인의 믿음을 ‘크다’라고 인정하십니다. 구원은 유대인에서부터 납니다(요 4:22). 하지만 구원의 복음은 이에 멈추지 않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모든 민족과 땅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29-31)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이방 땅인 데가볼리에 오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지역의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나라임을 체험한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온전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되어질 수 있습니다.
적용: 보이는 현상의 시간을 보며 걸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시간을 믿음으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자녀를 매우 사랑하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학교 상담교사가 어머니를 불러 말했습니다. "자녀분과 상담했는데 문제의 시작점은 평소 어머니께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저는 누구보다도 내 아이를 사랑해요."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조용히 다시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설 교 >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마 15:21-28 /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난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이 여자의 짧은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과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그림처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불쌍한 가나안 여자
여기에는 불쌍한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가나안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발음하면 싸이로 페니키아의 여자입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이 여자는 해양 민족이었고, 구약에서는 이 페니키아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바알신이 유입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방여자였던 것입니다.
인생의 커다란 무게 때문에 이 불쌍한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오래 전에 귀신에 들렸을 것이고 백방으로 고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딸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아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할 수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여자를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III. 가나안 여자의 믿음
A. 그리스도만 바라봄
그러면 이 불쌍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전에 이 예인이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다는 암시는 없습니다. 삭개오처럼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작정을 하고 여기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이 에워싸 예수님을 따르고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짧은 외침이지만 이 속에는 신앙의 고백과 마음의 간절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며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자신의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고백을 하는 한편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함으로써 심령의 간절함을 표명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서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자신의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정을 주님의 귀에 들리도록 그는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 목소리는 온 동리 사람들 귀에도 들렸을 것입니다. 후일 자기와 자신의 딸을 손가락질하며 욕할지도 모르는데 그는 간절히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 주 그리스도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집중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만 고정된 영혼의 집중된 시선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세상이 가져다주는 수많은 인상들에 반응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의 작용들 때문에 마음은 갈라지고 나뉘어집니다. 들뜬 욕망과 정념들은 더더욱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켜 초점을 잃은 신앙생활 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힘이 없고, 우리의 찬송은 맥이 없고,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 봅니다. 이 여인은 이방자였고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을 지닌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간 정말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부러워해야 할 훌륭한 영혼의 특징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시선을 오직 주님께만 고정시킨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으로 주님을 응시하는 시간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그 분의 성품과 속성에 마음을 모으고, 그 분을 깊이 앙망하는 가운데에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주님의 심정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욕망과 거친 우리의 마음의 작용들 때문에 묻혀버리기 쉬운 영혼의 진지하고 간절한 갈망이 이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께만 매달림
영혼이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이 여자의 외침은 골수에 사무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인 동시에 매달림이었습니다. 영혼의 응시가 지성의 집중이라면 예수께만 매달리는 이 신앙은 선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1. 장애에 굴복하지 않음
주님께 그렇게 매달렸을 때에 주님이 처음 보이신 반응은 무시였습니다. 아마도 반복해서 크게 부르짖으니 제자 중 한사람이 보내라고 간청합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예수님께 계속 부르짖었고,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마음에 대못이라도 박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은 적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상처받고 낙심할 만한데도 오히려 예수님께 더 경배를 드리며 매달립니다.
2. 경배하며 간구함
더 간절히 매달리니 이번에는 뼈아픈 말씀을 또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여기에서 자녀는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이방인 콤플렉스에 대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예수님도 생각 못하셨을 기발한 답변으로 주님의 이 뼈아픈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옳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자녀의 떡은 결코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비로운 개의 주인은 주인의 자녀들이 충분히 먹고 남은 그 떡은 상아래 떨어지게 허락을 하고 떨어진 그 떡은 원래는 주인의 자식들의 떡이었지만 자식들이 배부르고 버렸기 때문에 개들도 먹게 합니다. 주님은 그 개 주인보다는 자비롭지 않으십니까?’ 그러며 주님께 간절히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만 매달린 이 여자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마음에 간절한 부르짖음, 피를 토할 것 같은 울부짖음, 하나의 기도제목에 자신의 생명을 건 몸부림,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인생의 최고의 숙제는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묵묵부답인 예수님도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에게 상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경배하면서 주님 한 분만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예수님을 붙들고 매달려 놓지 않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C. 그리스도의 긍휼만 의지함
이 여자의 믿음은 예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의 부스러기도 먹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것보다는 주님의 은혜의 부스러기가 자신의 인생을 고치는 데는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가엾은 여자는 예수께 자신의 온몸을 던져 매달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의 오롯한 믿음을 보시고 이 여자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노라’고 외칠 때에는 이 여자는 부끄러운 여자였지만 주님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야 네 믿음이 참 크구나.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구원을 선언하셨을 때 이 주님의 음성은 모든 사람 앞에서 이 여자를 세워준 칭찬이었습니다.
III.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
오늘도 주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영혼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당신의 긍휼을 찾으며 어린 아이처럼 울고 매달리는 사람들 가까이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무엇으로도 바꿔 놓을 수 없는 인생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시선을 그 분에게 고정하고 그 분의 은혜의 그 보좌 앞에서 간절히 매달리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저버리지 않고 부스러기 같은 주님의 은혜라도 힘입고자 하는 이 가나안 여자의 그 애달픈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의 기도처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부르짖는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IV. 결론: 긍휼을 구하라
이렇게 이 여자가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에 비로소 그는 오래전부터 죄인인 자신을 부르고 계셨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인정받고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셔서 자신의 딸도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아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은 부르짖는 자 가까이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떠났다고 생각할 그때에 사실은 우리의 마음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영혼의 시선을 당신께 고정하고 선한 의지로 당신께 매달리고 당신의 작은 긍휼에 목숨을 건 기도가 올려지기를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절해지십시오. 무엇을 하시든지 진실해 지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주님이 결코 그대들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
마 15:21-28 / 이상호 목사
우리는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낙망치 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응답을 받았듯이,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절히 강청하여 자기의 소원을 성취했듯이 한나가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함으로 아들을 얻었듯이, 히스기야가 벽을 향하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여 죽을 병 고침받고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응답을 받고 우리의 소원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 위기나 고난이 닥쳐올 때 내가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낙망하고 포기하고 말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선택하여 기도한다면 그 문제 해결될 것이지만, 낙망하고 좌절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 문제 때문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구하였으나 예수님의 응답은 없고 오히려 모욕만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려서 결국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치료받게 한 가나안 여인의 귀한 믿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 가나안 여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본문 21-22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구약시대에 두로와 시돈지방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이곳을 이방인의 도시로 무시하고 멀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자신의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씀은 이 여인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문을 통하여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능력의 주님이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께 흉악한 귀신들인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 여인의 문제는 바로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신이 들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 사람은 완전히 지배하여 귀신의 도구로 사용되어 자기 통제력을 잃고 욕도 하고, 불도 지르게 하고, 때로는 아주 잔인하고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갑니다. 그 결과 귀신들린 사람은 큰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떠나가지 않으면 이런 사람은 평생을 고통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귀신들린 사람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창피한 노릇이겠습니까? 그래서 가나안 여인이 흉악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혹시 예수님께서 못들으신 것이 아닌가하고 더욱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이 여인이 시끄러우니 내 쫒아버리자고 예수님께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간절하게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인하고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24- 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결코 유대인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평소의 그렇게도 온유하시고 겸손하시고 인자하시고 모든 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인 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딸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이방 여인의 청을 거절하시고 오히려 개라고 모욕까지 하신 것은 이 이방여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정말 하나님을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섬기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 자신의 딸을 고치고 싶은 믿음이 있는지를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인 다음에 가나안 여인이 소원하고 있는 대로 귀신 들린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3. 가나안 여인은 정말 큰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본문 27절을 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러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하여 가나안 여인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딸만 고칠 수 있다면 어떤 모욕이라도 참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참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인의 인내심과 믿음을 보시고는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고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딸을 치료해주셨습니다.
4.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 그 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까? 그것은 첫 번째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구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천하게 생각했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또한 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큰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긴박한 문제를 가지고 구할 때 즉시 응답이 없다고 하여서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응답받고 문제를 해결받을 때 까지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구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찾는 것을 찾을 수 있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테너 임응균 교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성악가입니다. 그의 신앙간증이 「우리는 행복한 예수쟁이들」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연세대 음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이태리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도 그의 길이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대학의 시간 강사로 10년을 하면서 고통하면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10년의 세월 뒤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임교수는 지난 10년의 기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참고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여도 즉시 응답하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처럼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겸손하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침묵과 고통의 시기가 끝나면 아름답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물붓 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디크이스트맨은 기도에 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로 작정하는 시간부터 마귀는 우리 앞에 여러 종류의 방해물들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직장에서 일거리가 늘어날 것이며, 갈 곳이 많아지고,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가족들이 시간을 빼앗아갈 것이며, 화내고 신경질 낼 일들이 많아질 것이며, 걱정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때 기도를 포기하면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기도는 기적입니다. 기도는 축복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운명에 맡겨 사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기도의 무릎으로 축복의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면 이런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영웅들에게만 일어나는 기적과 이사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고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기적과 이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병고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문제가 해결 됩니다. 막힌 문제가 확 풀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이 자리가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여러분들의 모든 소원들을 다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믿고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온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모두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뜨겁게 기도하고 끈질기게 기도하여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 받고 묶인 문제가 확 풀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 김광일 목사
양주지방에 전해지는 ‘독장수의 구구’라는 설화입니다. 어느 독장수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간장, 된장, 술을 빚을 때 큰 독이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독이 워낙 크고 무거워서 많이 지고 다니지 못하여 큰 독 세 개를 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종일 돌아다녀도 독은 팔리지 않고 어깨만 빠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습니다. 고갯길을 힘겹게 조심조심 올라가느라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고개에 다다른 독장수는 나무 그늘 밑에 지게를 내려놓고 지겟작대기로 받쳐놓았습니다. 몸이 홀가분하여진 독장수는 지게 옆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야, 시원하다. 가만있어봐라. 저 독들을 팔아서 빚을 갚는 데 쓰고, 나머지 독들을 팔면 다른 독 두 개를 살 수 있겠지? 그 독을 팔면 다시 독 네 개를 살 수 있고, 넷을 팔면...가만있자, 이 이는 사. 이 사 팔..그래 여덟 개를 팔면,,,” 독장수는 신이 나서 머릿속으로 계속 셈을 하였습니다. “야, 며칠 안 가서 독이 백 개가 넘겠는 걸. 그럼 독을 판 돈으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사고 웃마을 삼돌이 각시 삼순이보다 더 이뿐 각시도 얻고, 그럼 ‘이리 오너라’ 하면 좇아올 하인도 있어야겠지. 나도 하인을 두는 거야.” 독장수는 너무 기쁜 나머지 팔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팔로 지겟작대기를 밀어버리고 말았는데... 와장창하고 독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독장수는 깨어진 독 조각들을 얼른 주워들었지만 이미 독은 독장수의 꿈과 함께 산산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쓸데없이 미리 셈을 하거나 궁리하는 부질없는 소원을 ‘독장수의 구구’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를 찾아 온 여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내용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져 귀신들렸던 딸이 정상으로 돌아 왔으나 그 과정은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가 평소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을 향한 냉담한 반응이나 경멸하는 듯한 눈빛, 인격적인 모욕이나 도저히 견디기 힘든 언어의 폭력까지도 잘 견디어내었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그녀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소원대로 되리라’ 보다 선행되고 있는 바로 ‘네 믿음이 크다’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소원보다 믿음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가진 마음과 반대로 대하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정 속에 담겨진 강한 긍정의 믿음입니다. 겉으로는 그녀를 부정하시고 무시하십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정 속에 담겨진 강한 긍정을 읽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이 끝까지 예수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텐데...’ 또한 나를 향하여 들려오는 소리들은 얼마나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는 말들입니까?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망스런 일들이 생겨나더라도, 자기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라도,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아니오’ 속에 멋진 ‘예’ 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겉으로는 나의 생각, 나의 길, 나의 계획을 막으시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 더 좋고 멋진 길을 열어 놓으심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비로소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다면 예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 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더 확신해야
미국의 크리스챤들은 편지 마무리에 ‘On the Victory Side’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승리 편에 서 있다’라는 뜻인데 이 말을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청교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었습니다. 영국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카톨릭 교도와 개신교도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크롬웰은 개신교 장군이었습니다. 전쟁이 맹렬해서 크롬웰의 군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크롬웰은 문서나 개인 편지에 언제나 ‘On the Victory Side General Cromwell’이라고 썼습니다. ‘나는 항상 승리 편에 서 있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므로 승리 편에 서있다’고 말했습니다. 공문서를 읽은 참모들은 그가 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확신이 점차 부대에 퍼지기 시작해 전부대원들이 ‘우리는 승리 편에 있다. 우리는 승리한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나아가는 크롬웰의 군대는 기어코 승리하여 영국을 개신교국가로 세우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확신에 거하며 승리만을 생각하고 말한 놀라운 결과이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 여기의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의심하고 믿지 않았지만 가나안 여인은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임한 메시야임을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유대인의 불신앙과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넉넉하다는 여인의 믿음은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확신의 믿음입니다. 흔들림 없는 견고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위력이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질병을 고칩니다. 삶의 질을 바꾸어 줍니다. 믿음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은 불신의 시대에 우리가 큰 믿음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보고 계신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인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가 보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는 확고한 믿음의 확신을 통하여 소원대로 이루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더 간구해야
2010년 3월 호주에서 사망선고를 받은 미숙아가 엄마 품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케이트 오그(Kate Ogg) 산모가 생후 27주만에 쌍둥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딸 에이미는 비교적 건강했으나 아들 제이미는 1킬로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호흡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숨이 멎고 말았습니다. 의료진은 제이미를 살리려고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20분이 지나도록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담당의사는 아기가 사망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기를 한 번만 안아보겠다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의사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엄마는 축 늘어진 아기를 가슴에 꼭 안았습니다. 볼을 쓰다듬으면서 마지막으로 아기의 입을 열어 젖을 물렸습니다. 그리곤 기도했습니다. 아기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소원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젖을 물린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아기의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 떠졌습니다. 그리고 손가락도 움직였습니다. 깜짝 놀란 엄마는 의사를 불렀습니다. 달려온 의사가 아기의 생존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 후 아기는 건강을 회복해서 다른 또래의 아기들처럼 잘 자라고 있습니다. 어미의 간절함이 죽은 아기를 살린 것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인은 간절함에 불타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함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간구하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갈급함과 간구가 있는 곳에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긴박한 문제를 가지고 간구할 때 즉시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구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찾는 것을 찾을 수 있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심의 간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실 만큼의 간절함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더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갈급함으로 간구하는 믿음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간절함으로 하나님만 바라고 소원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소원대로 이루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더 낮아져야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는 자기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얻고자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은 온갖 화초로 가득했고,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그 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습니다. 얼떨떨해 있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집은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래침을 뱉을 만한 곳이 없더군요. 당신의 집에서 가장 더러운 곳은 교만으로 가득 찬 당신의 얼굴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여자가 이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넉넉하다는 여인의 믿음은 끝까지 낮아지는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예수의 모른 척에도 여인은 계속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는 최고의 겸손이며 최고의 경배입니다. 자신을 개같이 여기는 여인의 모습을 저자는 겸손의 극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를 경험하였기에 늘 겸손해야 합니다.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제게는 너무 큽니다’라고 언제나 고백해야 합니다. 그 겸손이 예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 겸손이 예수의 긍휼을 발동시켰습니다.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겸손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가짐으로 소원대로 이루시기 바랍니다.
테너 임응균(任雄均) 교수의 간증이 ‘우리는 행복한 예수쟁이들’ 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연세대 음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이태리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도 길이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의 시간 강사로 10년을 하면서 고통 중에 기다렸다고 합니다. 결국 그 10년의 세월 뒤에 한국예술 종합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임교수는 지난 10년의 기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을 연단하시는 기간으로 생각하고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즉시 응답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더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겸손하게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엄마, 수로보니게 여인
마 15:21-28 / 배 혁 목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귀결이 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의 내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사랑의 동기를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가장 우선적인 관계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성경 곳곳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부모님이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부모를 공경함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자녀들이 부모를 대할 때에, "내가 부모님을 공경해야지..."라는 결단을 하고 대하는 자녀는 드물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편하게 부모를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부모가 자녀들의 공경의 대상, 존경을 받을 만한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부모에 대해 일방적인 편애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부모님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 육신의 생명을 주실 때에 부모님의 몸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왔지만 부모님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손길을 통해서 자녀를 돌보게 하시고 성장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주셔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자녀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은, 사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신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님에 대한 공경은, 그러한 부모님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부모님이 어떠한 분이셨는지를 한번 나누어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나아가서는 우리가 어떠한 부모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마가복음 7장에 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 가나안 여자를,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이방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소리질러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들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지금 딸 아이가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쁘고 사랑스럽던 모습의 딸이었는데, 이제는 귀신에 의해서 흉악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 딸 아이의 모습이 흉악한 얼굴로 바뀌었을 것이고, 그 행동도 흉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흉악한 일을 행했을 것입니다. 아비, 어미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그 딸의 흉악한 행동으로 봐서는 그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말합니다. "그 흉악한 귀신에 들린 그 여자 아이는 제 딸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한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한 아이의 엄마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의 모습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불쌍한 자신의 딸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자녀들을 바라볼 때에 그 부모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는 다릅니다. 자녀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됩니다. 자녀들의 기쁨이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축복하며 안타까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사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 여인의 딸과 같이 악한 영의 사로잡혀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흉악한 길로 가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며 주님 앞에 나가는 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님인 것이고, 그러한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의 영적인 상태를 바라볼 수 있고, 그 영혼을 바라보면서 내 아픔으로 여기면서 주님께로 올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부모의 모습인 것입니다.
2.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때로 자녀를 위해서 자신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고 내려 놓기도 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아이를 구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십니다. 곧 그녀의 소리를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냉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리어 제자들이 민망히 여기면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그녀를 보낸다는 것은,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내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만나 문제 해결을 받고서 돌아갔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 엄마를 낙심케 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하라고 보내심을 받았으니, 이방여인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행동과 말씀으로 이미 확실하게 그 여인을 거절하는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여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예수께 와서 절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냉대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이 엄마에게, 예수님께서 비수와 같은 말씀을 던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합니다.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적인 말을, 딸 아이를 구해보겠다고 온 엄마에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그 여인에게, 마치 그 여인이 개와 같은 존재인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모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듣더라도 시험에 들만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행하신 모습을 지켜보던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의 스승이 되고, 메시야가 될 수 있어"라면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등을 돌릴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의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개가 되던지, 그것보다 더 한 것이 되 던지 간에 자기 자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개에게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이 필요하니, 자신에게도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 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조차도 부인하고서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인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이러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그 애정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의 MBC방송국에서 방영한 "남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타리가 있습니다. "남극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듣고서, 남극이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극의 눈물"은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의 자식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소재로 한 영상물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황제펭귄들이 영하 60도의 추위 속에서 알을 낳고, 그 알을 부화시키고 부화된 자식을 얼어 죽이지 않고 키워내는, 엄마, 아빠 펭귄의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입니다. 황제펭귄도 새의 종류기 때문에 알을 낳아서 번식을 합니다. 영하 6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추위 속에 엄마 펭귄이 알을 딱 하나 낳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곳에서 알을 따뜻하게 품어서 부화를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알이 부화되려고 하면 2개월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그 일은 아빠 펭귄의 몫입니다. 엄마 펭귄들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백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를 향해 떠나고, 아빠 펭귄들은 그 알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두발을 모아 발등 위에 알을 올려 놓고 배로 알을 덮어서 두 달 동안 알을 품습니다. 혹시 놓치기라도 하면 1-2분 안에 알은 얼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두 달 동안 잠깐도 쉬지 않고 알을 품고서 서 있는 것입니다. 알을 품은 동안 아빠 펭귄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 빙판 위에 서서 지냅니다. 세찬 남극의 눈보라가 몰아치면 아빠펭귄들은 조밀하게 모여서 함께 그 추위를 이겨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두 달 이상 알을 품고서 있으니 아빠펭귄의 몸이 수척해 집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알이 부화되어 새끼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아기펭귄도 털이 없기 때문에 추위에 노출이 되면 얼어 죽습니다. 그래서 부화된 새끼를 계속 해서 품습니다. 그리고 새끼를 먹일 음식은 자신의 위벽속에 저장되어 있던 음식입니다. 자신도 먹지 못해서 수척해진 몸이지만, 위에 있던 음식을 게워서 아기 펭귄에게 먹입니다. 이것을 펭귄 밀크라고 합니다. 이 펭귄밀크가 거의 떨어져 갈 때 먹이를 구하러 갔던 엄마 펭귄이 나타납니다. 뱃속에 음식을 잔뜩 저장하고 기우뚱거리며 옵니다. 아빠 펭귄도 힘들었지만 엄마 펭귄도 자식에게 줄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옵니다.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받아 죽기도 하고, 다쳐서 피를 흘리며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는 엄마 펭귄도 있습니다. 그렇게 엄마펭귄은 아빠펭귄을 대신해서 아기펭귄에게 펭귄밀크를 줍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빠 펭귄은 그 아기펭귄을 넘겨주고 다시 바다를 향해서 걸어갑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만, 자식들을 보호하고 잘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부모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돌아가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모습에,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에 우리는 공경과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정작 딸 아이를 살렸던 것은 그 어머니의 믿음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한 딸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엄마가 그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수치와 수모를 견뎌내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보고자 원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엄마의 믿음이었던 것을 봅니다.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딸을 사랑해서 아이를 귀신으로부터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지만, 그 여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흉악한 귀신에 들려 흉악하게 된 딸을 반드시 고치시고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몇 마디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서 다른 방법을 찾아서 떠나는 어미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유일한 치료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믿고 간구하는 그 믿음을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실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부를 때에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 곧 구원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비수같은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간절하게 붙들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통해서 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딸을 향한 사랑이 아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여인의 믿음이 그 아이를 고쳤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하지만, 모든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자녀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의 구원이 세상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대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로 나와 치료받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그 부모가 믿고, 그 믿음이 그 자녀들에게 이어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모는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 부부의 자녀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 사랑과 헌신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서 부모가 되고, 부모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서 자신의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자신도 부모와 똑같이 자녀를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아무 대가 없이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부모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무조건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을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모는 자녀의 육신적인 삶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까지 돌볼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15에 보면, 결혼도 하지 않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아비로서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육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영혼을 관심하며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적인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낳고 양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부모님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헌신의 모습을 닮게 하신 것은, 자녀들을 양육할 때에, 육적인 자녀의 성장 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이 운영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원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하기로 다짐하며 사랑할 수 있고, 부모는 자녀를 육신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영적인 믿음까지도 책임지며 양육하여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나 부모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영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믿음의 아비로 성장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1-28 / 지성래 목사(예수사랑교회)
사람이 평안할 때는 그 누군가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이 들면 누구나 의사를 찾게 마련이다. 종합병원의 소문난 의사를 만나려면 몇 달 전에 예약하고 기다렸다가 3분 동안 만나 상담을 받고, 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기도 한다. 누구나 어려운 병에 걸리면 적절한 약을 구하려고 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나서서 해결하면 되지만 정작 전문성이 필요한 일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변호사, 세무사, 법무사, 부동산 전문가, 의학 전문가, 상담 심리학자, 유아 교육 전문가, 청소년 문제 전문가, 가정 문제 전문가, 부부 문제 전문가 등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한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북쪽의 국경을 넘어선 지중해에 연접한 해양도시이다. 그 두 도시의 역사는 깊다. 다윗 왕 때인 3,000년 전에도 있었던 도시이다. 사무엘하 5장 11절에 보면 두로의 왕 히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에게 사절을 보내면서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더불어 보냈다. 그들은 왕이 된 다윗을 위하여 왕궁을 건축하는데 직접 참여 하기도 하였다. 그처럼 두로 사람들은 이미 그 당시에 뛰어난 건축술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관계는 아들 솔로몬 왕 때까지도 이어져 갔다. 두로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염색, 목재, 곡물, 기름, 포도주, 금과 은을 비롯한 보석 등을 채광하고 각종 생산물을 수출해서 막대한 부를 누려 왔다.
본문에는 그런 얘기가 없지만 어떤 사료에 의하면 예수께 나와서 소리 지르던 이 가나안 여인은 부자였다고 한다. 부자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백년을 놀고 먹어도 남을 만큼 넉넉한 부자들이라면 뭐가 아쉽겠나. 그렇지 않나. 부자일 뿐만 아니라, 가족이 건강하고, 자식들이 잘 되고,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나. 그래서 예수께서“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뭐가 아쉬워서 예수께 찾아온 것인가.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
같은 본문을 기록한 마가복음 7장 25절에 보면 어린 딸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라. 차라리 내가 아프거나 내가 병드는 것이 낫지 자식이 아파봐라. 그것도 몸이 아픈 병이 아니라 사랑스런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으니 집안 형편이 오죽하겠는가.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는데 부자면 뭘하고, 아무리 잘 살면 뭘하고, 아무리 사업이 잘 되면 뭘하겠나. 물론 그나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딸이 귀신에 들린 것보다야 나을 수 있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많은 돈을 싸 들고 유명한 의사를 찾아다니고, 유명한 병원을 찾아다니며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딸을 고쳐 보려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람이 귀신에 들린다는 상태는 심각한 일이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야 수술하고 세월 지나면 고쳐질 수 있고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귀신 들린 상태에서 귀신이 떠나가고 고침을 받는 것은 현대 의학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귀신 들렸다는 상태는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영적인 해결점을 찾아 나서야 한다. 주님이 해결해 주셔야만 한다. 성령이 역사해야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의 하나가 각색 병자를 고치신 일이다. 그 중에서도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내시고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신 일이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신은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늘 사모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의 영혼에 찾아 들어간다. 예수를 믿는 것 같기는 한데 모양만 신자 행세하며 그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의 없으면 그 마음을 귀신이 점령하게 된다.
예수는 “어느 집에서 쫓겨난 귀신이 그 쫓겨난 집에 다시 찾아와서 집 안을 들여 다 보니 집안이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 귀신은 자기가 아는 일곱 귀신을 더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러면 그 집의 나중 형편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비유를 교훈해 주셨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집에 세속적인 생각과 귀신이 좋아할 만한 육신의 욕망에 가득 찬 생각들을 내어 쫓고 성령으로 가득하게 채우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는 비우는 것을 교훈한다. ‘공’(空) 혹은 ‘허’(虛) 이런 강조가 불교의 교훈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다. 성령으로 채우고, 은혜로 채우고, 감사로 채우고, 주님 생각으로 채우고, 천국 소망으로 채우고, 사랑으로 채우고, 기쁨으로 채우고, 온유와 겸손으로 채우고, 용서로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고 교훈하였다.
맞다. 신앙생활이란 내 마음에 예수의 마음으로 꽉 채우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에 가득하게 들어차게 된다. 자나 깨나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생각으로 가득차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일을 좋아하게 되면 그 좋아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 밤낮 나의 생각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나. 이처럼 사람이 무슨 걱정이나 근심이 있으면 그 근심이나 걱정이 하루 종일 내 생각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불면증으로 고생하기고 하고, 공황장애로 시달리기도 한다.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자살 충동에 빠지게도 된다.
미국은 총기 사고가 많은 세계 최고의 나라이다. 미국에는 등록된 총기의 수만도 3억 9,300만 점에 이른다. 4년 전인 2017년 통계이다. 미국 인구가 3억 2,600만 정도인 것을 비교하면 인구수 보다 총기의 수가 훨씬 더 많다. 그 총기 사고의 70%가 스스로 자기 목숨을 해치는 경우이다. 이처럼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하다.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마련한 총기로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해하는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오랜 만에 복음서의 말씀을 접하고 있다. 오늘 본문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7장 24절 이하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거기서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 찾아와서 절하며“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요청한 이 가나안 여인의 요구를 제목으로 삼고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소리 지르는 가나안 여인.
사람이 누군가와 말할때에 상대방이 알아들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본 예절이다. 간혹 자기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 상황에 맞게 적당한 크기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이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와 제자들이 지나는 가까이 다가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마15:22)
마태복음 15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앞부분인 1-20절까지의 내용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던 내용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다.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간혹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다. 장로들의 전통에 어긋난다는 지적이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배를 거쳐 뒤로 배설 되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들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책망조로 교훈하셨다. 예수께서 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하고 엄중하게 교훈하셨다. 사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항상 시비를 걸려고 달려들 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건 이후에 이어서 기록된 내용이 오늘의 본문이다. 예수의 동족이며 당연히 예수를 귀하게 알아보고 존귀하게 여겼어야 할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오히려 늘 예수를 배척하고 시기하였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향한 부르짖음이 달랐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가나안 여인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 흩어져 살아가던 유대인들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로 영접한 유대인들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직접 뵐 수 있는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그 때에 이 가나안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가며 예수께 도움을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태복음 15장 앞 부분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크게 대비가 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께 대한 불신앙을 지적하고 오히려 반대로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의 예수를 향한 신앙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앞뒤에 대칭을 이루도록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른 이 여인은“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청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아는대로 지금 이 가나안 여인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소리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다. 이는 딸의 고통을 어미의 고통으로, 딸의 아픔을 어미의 아픔으로, 딸이 겪는 슬픔과 충격과 어려움을 어미의 슬픔으로 끌어안고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딸의 문제를 나의 슬픔과 나의 충격과 나의 어려움으로 끌어안고 함께 괴로워하고 힘겨워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심정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표현이 이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요즘 어린 아들딸을 버리거나 죽이는 비정한 엄마 아빠 이야기도 없지 않지만 그런 경우는 예외로 하자. 정상적인 엄마 아빠라며 아들딸이 겪는 고통이나 고난이나 슬픔이나 충격적인 생의 사연을 곧 나의 일로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괴로워하고 같이 힘들어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그런 한 가정의 정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흉악한 귀신에 들린 내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소리 지르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한 말씀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의 모습이 뭐 그리 당황할 일인가. 예수의 냉담한 반응이 뭐 그래 대수인가. “뒤에 따라 오며 소리 지르는 저 여자를 좀 어떻게 해서 보내시죠”하는 제자들의 매정한 태도가 뭐 그렇게 마음 상할 일인가.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모, 그 어떤 모멸감, 그 어떤 무시, 그 어떤 난관,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감내하고 이겨낼 담력이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마음 속에 가득차 있었다.
예수의 반응과 여인의 대답.
큰 소리로 소리 지른다는 것은 다급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 아닌가. 이쯤 되면 예수께서도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옳고 제자들도 예수께 어서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간청해야 맞을텐데 이 날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의 이 상황은 예수의 그 어떤 다른 날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예수께서는 소리 지르는 가나안 여인의 큰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너무나도 무정해 보이고 차갑고 쌀쌀맞아 보이는 예수의 모습처럼 비추인다. 더군다나 뒤늦게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더욱 걸린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우리는 예수의 이러한 대답을 오해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 24-25절에 보면 이미 예수의 비유 말씀과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간질 병자를 고치고, 중풍 병자가 고침을 받는 소문이 사방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예수의 소문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과 수리아 지역까지 점점 펴져 갔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실제로 같은 본문인 마가복음 7장 25절에 보면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 왔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이처럼 냉담한 듯한 반응을 보이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34장 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맞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를 배척하듯이 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양이 맞다. 집 안에 잃어버린 양이 있는 것이다. 나라 안의 동족인 유대인이 주님 보시기에는 잃어버린 양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는 유대인들의 구원 만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천하만국의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하였다.
예수의 칭찬과 축복의 선언.
예수의 냉담한 반응과 가나안 사람들을 차별하는 듯한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 앞에 와서 발 아래 엎드려 절을 하며 말하였다. 여기 절했다는 ‘προσκυνεω’(프로세퀴네오)는 잠시 엎드렸다 일어나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하여 엎드려서 매어 달리는 모습을 말한다. 무시를 당하든지, 거절을 당하든지 상관없이 흉악한 딸이 고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간절함이 묻어 나는 태도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와 주세요.”라고 간청하였다. 여기서 ‘도와 달라’는 이 표현은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이며 부르짖음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하고 큰소리로 외쳤듯이 지금 예수 앞에 엎드려 절한 채로 “주여 나를 도와 주세요.”하고 간청하며 매어 달리는 것이다.
이 때에도 평소의 예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대화의 내용을 접하게 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
여기서 말하는 개는 길가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그런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집안에서 많이 키우는 반려견을 말한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집 안에서 강아지를 키웠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빵을 먹는데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주인을 쳐다보는 강아지에게서 깨달음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강아지도 저렇게 주인에게 눈을 마주치고 원하고 바라는 것처럼 저도 주님께 마음을 고정하고 주님께서 눈을 떼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런 마틴 루터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1517년 10월 31일, 그로 하여금 종교 개혁의 불을 붙이도록 사용하기 시작하셨다.
개 운운하는 예수의 대답에 이 가나안 여인은 전혀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 가나안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순간에 그의 딸에게서 흉악한 귀신이 떠나갔고 건강해졌다. 복음서에 이런 대단한 칭찬을 받은 주인공은 이 가나안 여인이 유일하다.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마8:10)는 칭찬을 받은 것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하고 극찬해 주셨다. 신앙생활, 기도 생활이란 믿음 생활이다. 내 안에 순간마다 일어나는 불신앙과 의심의 쓴 뿌리를 뽑아내고 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이 장면은 마태복음 14장 31절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가던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비교가 된다. 베드로는 제자였는데도 이 때까지“네 믿음이 크도다”고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왜 믿음이 작으냐고,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을 받고 있었다. 직분이나 신앙생활 오래 한 것만 자랑하지 말고 예수께 “네 믿음이 크도다”하는 칭찬을 받으며 소원을 이루고 간증하는 복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
마 15:21-28 / 문기태목사
여러분 예수님께 어떤 대접을 받고 싶습니까? 공주대접, 왕자대접까지는 몰라도 인격적인 대우는 받고 싶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시며 여러 사람앞에서 무안하게 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무시하는 표현을 하시고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여 부끄럽게 만드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이 그럴리가 있겠어요?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는 분인데요." 아니요. 충분히 그럴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그런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모욕했습니다. 간청을 하는데도 대꾸도 하지 않다가 직접 그녀를 향하여 개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어떻게 인격적인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편파적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런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다면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렇게 대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존경하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실망하지 않고 사랑하며 끝까지 믿음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여인이 외치는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못 들으신 척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일부러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토록 부르는데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묻거나 요청하는 말에 댓구를 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예수님께 대하여 흉악하게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계속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한 단계 높여 무시하십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보냄을 받아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같은 이방인은 관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여인이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말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를 사랑스런 자녀처럼 여기지 않는다. 개처럼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무시를 떠나 매우 모욕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악한 사람, 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은 그래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참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괴로움에서 건져주시리라고 믿고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무시와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상처가 크고 분노가 솟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무시와 모욕을 당했을 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쉽게 포기하고 예수님을 원망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참으로 대단하였습니다. 화도 내지 않고 '옳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마디는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의 테스트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큰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예수님은 그 믿음에 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네 믿음대로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오랫동안 고통을 받던 여인의 딸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지 않습니까? '실력이 있다.' '인간성이 좋다.' '인물이 잘 생겼다.' '살림을 잘 한다.' '성공했다' 등등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즐겁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에게 하나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사람에게보다는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십니까? 어떤 사람을 칭찬하시고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믿음이 있는 사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인물이 잘 나도 믿음이 없으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실력이 출중하고 재주가 뛰어나도 믿음이 없으면 칭찬듣기 힘듭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유명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관심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인물이 없어도, 지식이 많지 않아도, 재주도 없고 출세하지 못했어도 참된 믿음을 보이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며 칭찬하십니다. 그 믿음에 합당한 큰 상을 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눈에 들어 칭찬받고 상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믿음을 접게 만드는 많은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지만 이에 굴복하지 말고 힘써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의 믿음만 가지고는 예수님의 눈에 뜨일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믿음을 접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믿음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나안 여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 탁월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여인보다 부족한 믿음은 어떤 면입니까? 우리도 주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상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반응이 없을 때도 나아가야 합니다.(23)
여인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들렸나이다." 저같으면 딸리 귀신들렸으면 창피하여 조용히 다가가 남이 듣지 않을 때 귀엣말로 부탁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지금 다급하여 그런 것 따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너무 시끄럽게 부르짖으니까 제자들이 견디다 못해 어떻게 해서 돌려 보내자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다 들으시고서도 아무런 대꾸도 않으신 것일까요? 여인의 믿음을 관찰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신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경우 '씹혔다.'라고 합니다. 무시당했다는 거지요. 아이들도 기분이 몹시 언짢아합니다. 가나안여인 역시 유쾌할리가 없습니다. '내가 수치를 무릎쓰고 알아들으시도록 큰 소리로 반복하여 부르짖었는데 왜 예수님은 대답은 커녕 돌아보지도 않으실까? 섭섭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무반응 테스트에 걸립니다. 그리하여 불평합니다. "나도 기도해 보았는데 아무 응답이 없더라." "나 역시 기도햇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 믿음을 인정받으려면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고자 일부러 침묵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반응이 없어도 포기하지 말고 반응이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새벽기도 며칠 나오고 포기하면 응답받기 어렵습니다. 문제가 생겨 특별히 작정을 하고 기도를 시작하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며칠 하고서 집어치우면 안됩니다. 주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구하는 것을 주님이 다 들으시는 것을 확신하고 응답고 올줄로 확신하고 계속 부르짖는 끈기를 나타내 믿음을 인정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거절당할 때도 더 나아가야 합니다.(24)
가나안 여인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왜 이방땅인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신 것입니까? 어쩌면 구세주란 분이 이렇게 편파적일 수 있습니까? 딸의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다급한 마음으로 달려와 간청하는데 어떻게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본래 유대인의 편을 들어주시는 편협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 지으시지 않고 온 인류를 창조하시고 다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운운하십니까? 여인의 중심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거절당할 때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처하면 돌아섭니다. 오래 믿은 교인들중에도 거절의 상처가 커서 거절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거절하는 빛을 느끼면 못 견뎌합니다. 교회를 옮기거나 떠나는 상당수의 교인들이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극복하지 못해서입니다. '목사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 '교인들이 나를 따돌리는 것 같아..' 나를 누가 거절하지는 않는가? 눈치를 보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그런 빛이 보이면 사정없이 발길을 돌립니다. 오랜 관계도 칼로 무자르듯 냉정하게 잘라버립니다.
여러분이 거절의 상처를 느껴 괴로울때는 가나안 여인을 떠 올리고 위로받으시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거절당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만약 제가 어떤 교인에게 "집사님, 난 당신같은 사람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니 기도해달라, 심방와달라 하고 자꾸 귀찮게 하지 말고 딴 데로 가시오"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날이 다하기전에 난리가 날 것입니다. "저게 무슨 목사냐? 돈 있는 것들한테는 아부를 떨고 내가 위기에 처하고 어려운데 괄시를 하고 두고보자." 하고 집집마다 전화를 걸어 목사가 날 쫓아 내더라고, 저주를 퍼붓더라고 저거는 목사도 아니라고 시끄러워서 못견디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가 그렇게 '당신같은 사람 필요 없으니 딴데 가서 알아보시오.'라고 말해도 쫓아와서 무릎을 탁 꿇고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목사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발 불쌍하게 여기고 쫓아내지만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매달릴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미쳤어요. 내가 뭐가 아쉬어서 그럽니까?'할 것 같아요.
여러분은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은 그렇게 했습니다. 거절당해도 매달렸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떠나 아무데도 갈데가 없습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고 간청했습니다. 여러분 거절당하는 것도 시험입니다. 믿음을 보이는 기회로 삼으세요. 기도응답이 안되도 기도를 접지 마세요. 주님이 여러분의 직분을 거두셔도 봉사를 접지 마세요. 교회안에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외면당해도 주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교회와의 관계를 접지 마세요. 돌아서지 마세요. 무릎을 꿇으세요. "제발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고 엎드려 간청을 하세요. 그러면 인정받습니다. 주님께 칭찬 받습니다.
3. 모욕감을 느낄때도 나아가야 합니다.(26)
옛말에 동냥을 주지 않으려거든 쪽박은 깨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 병을 고쳐주시기 싫으면 곱게 보내시지 모욕적인 언사를 쓰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개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취급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놓고 개취급을 하면 화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뭐든지 개자를 붙이면 나쁜 것이 됩니다. "개떡, 개집, 개밥, 개똥, 개털..."
유대인은 자녀이고 가나안 사람 너희들은 개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을 보면 예수님이 이처럼 모질게 불쌍한 사람을 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가나안여인에게만은 개라는 단어를 사용해가며 모욕감을 느끼게 한 것일까요? 중심을 보시려고 믿음을 테스트하시려고 한 것이다라는 말 외에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많은 모욕을 친히 감수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억울하고 애매한 말씀을 많이 들으셨습니다. 뺨도 맞으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옷을 발가벗기운채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럼 내려와봐라 하는 조롱의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에게까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다 감수하셨습니다. 참아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당하시려고 다 견디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모욕감을 느길때 인내합니까? 참아내며 감수합니까? 조금도 못견디는 것은 아닙니까? 모욕감을 느낄 때 결단코 돌아설 때가 아닙니다.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인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좋습니다. 땅에 떨어진 것 줏어 먹어도 좋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은혜를 내려주세요."
오늘 우리도 이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 전도하다가 모욕을 받아도 좋습니다. 봉사하다가 오해받고 욕을 먹어도 좋습니다. 심지어 주님께 개취급을 받아도 좋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려 주십시오. 제발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영의 양식을 먹을 수 잇게 해 주세요."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까짓거 그런 대접받으며 은혜받지 않는 것이 훨신 더 낳아. 은헤받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어..' 하는 생각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욕받는 것 별거 아닙니다. 은혜받으면 다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은혜받고 믿음이 인정받는 것이 내 자존심에 다소 타격을 입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려고 모두들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자기가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듣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수님께 인정받고 칭찬듣는 것은 이에 견줄 수 없을만큼 행복한 일입니다. 상급이 다라옵니다. 문제도 다 해결됩니다. 주님의 큰 사랑이 밀려올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품으십시오.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마 15:21-28 / 김명혁 목사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행복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었고 또 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은 평생 “하님은 사랑이시라” “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중얼거리며 살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주적인 축복과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야말로 평생 그렇게 중얼거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는 하나님과 아내를 원망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무정하고 냉정하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불행한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진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살던 가나안의 이방 여자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더 심한 멸시를 받으며 살던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이방 여자였습니다. 가나안을 베니게라고도 하는데 그 여자는 수리아 지방의 베니게 족속인 수리아 베니게 즉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가나안의 이방 여자였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사는 모슬렘 여자와 같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까지 해 주셨습니다. 귀신 들렸던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사랑이었고 역설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 가나안 여자는 평생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중얼거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개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는 베니게에 속한 이방이었고 신약 시대에도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와 상관이 없는 베니게에 속한 이방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두로에 관한 경고라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찌어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찌어다”(사23:1,4). “인자야 너는 낯을 시돈으로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라 내가 그에게 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니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 엎드러질 것이라”(겔28:21,23). 역사적으로 보면 두로와 시돈은 앗수르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바벨론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페루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희랍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로마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그들이 범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날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거기서 나가사” 라고 기록했고 마가복음은 “거기를 떠나” 라고 기록했습니다. 저는 “거기를 떠나사” 라는 기록을 읽으면서 혼자서 “어쩌면? 어쩌면?” 이라고 중얼거리며 잠시 감탄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가신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멀고 먼 변방인 두로와 시돈을 가신 일은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이 대부분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행해졌지 두로아 시돈에서 행해진 일은 이번 밖에 없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복음사역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버림 받은 땅이었고 저주 받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으로 가셨을까?” 라고 저는 잠시 감탄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래 저주 받은 땅인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니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모순되는 사랑이었고 역설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숨어 있는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려고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포악한 이교도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려고 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주와 멸시와 절망과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가나안의 개 한 마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저주 받은 땅 이방의 땅으로 향하는 사랑의 발길을 정죄하는 소위 의인들의 정죄 소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인 유스티니안 벨츠가 저주의 땅 남미의 서리남을 향해 가려고 했을 때 독일 교회의 의인들은 이렇게 그를 비난했습니다. “유스티니안 형제여, 그대만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선교를 시작하겠다는 말이요?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요? 일본으로 갈 것이요? 이미 30년전에 일본은 기독교를 뿌리 뽑아 버렸고 지금은 기독교 상인조차 입국을 금하고 있지 않소. 중국으로 가겠다는 말이요? 최근에 중국에서 기독교인들과 설교자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모르시오? 아프리카에 가겠다는 말이요? 그렇다면 화란, 영국, 포르투갈, 불란서 보다 더 튼튼한 배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배를 가지고 있지 않소? 그러면 미국으로 가겠다는 말이요? 그곳은 너무 멀고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야만스럽지 않소? 유스티니안 형제여, 제발 그 꿈을 버리시오. 그런 꿈을 꾸다가는 사탄의 꼬임에 빠질 것이요. 먼데 갈 생각말고 당신의 이웃이나 도울 생각을 하시오.” 그러나 유스티니안 벨츠는 1666년 독일을 떠나 남미 서리남으로 가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다가 1668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각성운동인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켰고 현대선교의 모체인 모라비안 선교 운동을 태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120여년 후인 1786년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케리가 (25살이었을 때) 미신과 저주의 땅 인도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영국교회는 그를 가리켜 “비참한 미치광이”라고 불렀습니다. You are a miserable enthusiast” 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그를 향해 “자리에 주저 앉으라” 고 명령했습니다. 케리의 아버지는 아들을 가리켜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며 반대를 했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도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캐리는 1793년 6월 13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국을 떠나 저주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것이 현대선교의 출발 점이 되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의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인디언들 속에 들어가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했을 때 어느 백인 목사는 그를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아마 토마스와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조선 땅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영국과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미신과 무지와 저주의 땅인 조선에 가는 것을 반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 가신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저주와 멸시와 절망과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가나안의 개 한 마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가나안 여자는 인종적 차별과 멸시, 문화적 차별과 멸시, 종교적 차별과 멸시를 당했을 뿐 아니라 가정적인 불행과 비극과 슬픔을 당하며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미친 생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저주 받은 불행한 개 한 마리에 불과 했습니다. 옛날 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이 자기를 가리켜 “죽은 개”라고 불렀는데(삼하9:8)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도 자기를 가리켜 개라고 불렀고 예수님도 그를 가리켜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저주 받은 개 한 마리를 살리려고 일부러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모순되고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죽은 개 같은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아마 오늘날 어느 미국 선교사가 이라크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주의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나도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기독교 적대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간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적대세력의 중심부인 평양으로 갈 수는 없을까?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고 아주 가 버릴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반대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주의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저를 가리켜 공산주의자라고 비판도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좀 지나치게 가나안 여자를 무시한 것 같습니다. 너무 무례한 말씀을 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 가나안 여자에게 하신 세 마디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가나안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가나안 여자를 인종 차별하며 무시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아니하며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무례한 말씀들을 묵상하며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며칠 전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를 한 10분 동안 들은 일이 있는데 저는 은혜를 받으며 그 설교에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었습니다.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힌트 때문에 오늘 아침 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설교의 내용과 방향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과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것이 그를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살리는 길도, 가나안의 개를 살리는 길도 그들의 자존심과 체면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사가 병자를 살리기 위해서, 병자를 수술을 하기 위해서, 병자를 마취 시켜 죽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수술을 받기 위해서 마취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 의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직 안 죽었네?”
수 많은 사람들이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곤 합니다. 박종순 목사님이 설교 중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자존심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백인이든지 흑인이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에 붙잡혀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주셨습니다. 그를 개라고 부르면서까지 그의 자존심과 체면을 무너뜨려주셨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주님의 손에서 여지없이 자신을 낮추고 부인하고 죽이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나는 개 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치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여지없이 무시를 당하고 낮아지고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교만을 여지없이 내려 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교만하고 건방지고 자만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알량한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내려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이방의 개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도 몰랐습니다. 우리 교회에 새로 열심히 나오시는 새 신자 한 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할 줄도 모르는 초보입니다. 가끔은 종교적으로 잡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기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고 아직도 가끔 미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린다고 하고도 아직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욕되게 한 것을 용서를 빌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를 않습니다. 뻔히 아는 것들도 핑계로 덮어버리고 마음을 위장하며 살아온 죄인이 요즈음 많은 변화를 느끼면서 주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담배도 아주 끊었습니다. 가끔은 술도 먹지만 이제는 끊기로 했습니다.” 아주 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같지도 않은 가나안 여자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그저 소리를 지른 것뿐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가로되” 그 여자가 한 것은 나와서 소리를 지른 것뿐입니다. 복음서나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에 들어 누어서는 소리를 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가 부르짖은 세 마디는 단순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어디 한 번 저와 함께 소리를 질러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가나안 개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아마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눅19:9).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아마 로마인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느니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마8:10,13). 분에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생기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21:3,4절을 읽습니다.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방의 개들이 살던 저주의 땅 두로에 사도 바울의 일행을 맞은 주님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물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베니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지역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전도자는 가나안의 개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전도자가 수가성의 개였던 것처럼 두로와 시돈 지역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전도자가 가나안의 개였습니다. 요사이 개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낫다고 들 하지만, 이방 개들의 인권을 인정하시고 신장하시고 축복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첫째 저주의 땅으로 가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둘째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여지 없이 무너뜨려 주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셋째 개인과 가정과 지역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구원의 사랑이십니다. 박종순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자존심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까?” 가나안의 개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소리를 지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1절을 다 함께 부르시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 이용효목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한 사람, 미래를 바꾼 주인공들은 모두 꿈과 비전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은 소원입니다. 성경은 꿈이 없으면 그 백성은 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빌 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시 21:2에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라고 하셨고, 시 37:4에도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하셨고, 시 103:5에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신년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자리에 여러분은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이 쇠판에 각인 된 것처럼 여러분의 심령 판에 새겨져 자든지 깨든지 여러분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까? 눈을 떠도 감아도 그 소원이 여러분에게 보입니까? ‘꿈이 없는 부자보다 꿈을 가진 거지가 더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없는 사람은 내일도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역경과 고난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슴에 실현시킬 꿈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알을 품으면 때가 되면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잉태하면 때가 되면 그 꿈이 현실에서 반드시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된 글을 보면 대의 그룹의 채의숭 회장님의 간증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분은 충남 서산 산골 오지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대로 산골에서 화전민으로 농사짓고 겨우 먹고 사는 집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타어나 초등학교 밖에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에게 가난을 되물림 해주기 싫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결심을 하고 봇짐을 지고 그 산골을 떠났습니다. 정처 없이 길을 떠나 사흘 밤낮을 걸어, 어느 산 중턱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정착해서 꿈을 이룰 가나안 땅이 어디입니까? 지팡이를 던져 지팡이 끝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가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고 지팡이를 던졌는데, 그 끝 방향대로 걸어가다 보니 충남 대천이라는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대천감리교회 앞에 허름한 집을 얻어 신앙생활을 하며 생활터전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새벽기도회 한번 빠지지 않는 분이었고 가정예배도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늘 자식들을 앉혀놓고 훈계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첫째, 주일성수해라!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본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라! 둘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부유하게 살고 싶거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철저하게 십일조생활을 해라! 셋째, 예배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라! 넷째, 담임목사님에게 절대순종해라!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들 형제가 넷인데 세 사람이 장로님이 되었고, 막내는 목사가 되어 현재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대천감리교회 장로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 때 어린 채의숭 회장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졌습니다. 첫째, 공부해서 박사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중학교도 보내지 못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소원을 주셨습니다. 둘째, 큰 회사의 사장이 될 것이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셋째, 교회 100개를 건축하겠다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나와 고등학교, 대학교는 장학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박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꿈도 이루어졌습니다.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근무하다 대우에 스카웃되어 대우 아메리카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에게 나와서 대의 그룹을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습니다. 또 현재 사십 몇 군데의 교회를 설립했기에 앞으로 100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간증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꿈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혹은 기도 중에 꺼지지 않는 불타는 소원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2. 소원을 픔은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많은 분들이 꿈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끈질기게 소원을 품고 기도하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건강하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심지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기 까지 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그런 딸을 볼 때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시기에 두로와 시돈 지경에 찾아 오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유대와 갈릴리와 데가볼리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방 땅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실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의 소원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 가셨다고 봅니다.
여인은 뒤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녀가 부르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돌아보지도 않으셨고,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그 여인을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딸 때문에 속이 타고, 한이 맺힐 지경인데도 다른 사람은 그런 아픔을 알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런 것에 시험 들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쳤습니다. 그들의 방해와 무정함도 이 여인의 가슴에 타고 있는 소원의 불을 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마음에만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소원이 있다면,새벽에도 밤에도 잠잠치 말아야 하고, 때로는 금식하고 작정하여 눈물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렘 33:2~3 , 시편50:15) 당신에게 억울한 일이 있으면 부르짖어야 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으면 간절히 구하여야하며, 소원이 있으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 미첼이라는 26세 여인이 다리를 다쳐 우울증이 들기도 하였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글을 쓰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소설을 쓰게 되었고 그 소설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 갔지만 가는 곳 마다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 즈음에 대형출판사인 맥밀런 회사의 사장인 레이슨 씨가 아틀란타에 출장을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그 사장을 만나기 위해 기차역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레이슨 사장을 만났고, 자신이 쓴 원고를 주면서 “제가 7년 동안 쓴 원고입니다. 한번만 읽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레이슨 사장은 기차를 타고 자기 옆에 원고뭉치를 두었는데 읽을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는 피곤해 잠을 청하는데 얼마 후, 역무원이 그를 깨웠습니다. 전보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보에는 “사장님! 꼭 읽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레이슨 사장은 개의치 않고 또 잤습니다. 얼마 후, 다시 역무원이 그를 깨웠습니다. 또 전보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장님! 꼭 읽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레이슨 사장은 이번에도 읽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역무원이 그를 깨웠습니다. 전보가 와 있었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한번만 읽어주십시오! 미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레이슨 사장은 그 자매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그녀가 준 소설 원고를 들고 첫 장을 읽었습니다. 원고를 읽던 레이슨 사장은 점점 그 소설에 몰입되어 갔습니다. 뉴욕에 기차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원고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원고는 맥밀런 출판사를 통해 책으로 나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습니다.
사람도 소원을 품고 호소하고 간구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전능하시고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들어 주실것입니다. 여러분,소원을 가진 사람은 절대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오직 앞으로 전진합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게 되고 그소원이 이루어 질 때 까지 전진 할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런 행동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3. 소원을 품은 사람은 끝까지 인내합니다.
이 여인이 부르짖는데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오히려 방해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말이 끝나자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은 유대 땅에 오셨고,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 못 이해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방여인에게는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실망하지 않고 엎드려 절하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자녀들이요 이 여인은 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누구든지 포기할만 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너무나 실망스럽고 절망적인 말을 듣고도 “옳소이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겸손한 믿음과 포기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들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설교를 들으면서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모든 시험을 잘 이겼습니다.
우리들은 보고 읽고 들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실제로 여러분이 이 여인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당신이라면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꿈이 있고 소원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와도 견디고, 방해가 있어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안된다는 말을 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13년을 참지 못해서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오늘날까지 4,000년을 내려오면서 중동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면 이삭이고, 참지 못하면 이스마엘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참을성이 없고 기다리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고 소원이 있는 사람은 쉽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히 6:15에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악마들이 사람을 낚시로 올려 지옥바구니에 담는데 한 쪽에 있는 노련한 마귀가 사람들을 잘 낚고 있었습니다. 다른 마귀들이 “무슨 미끼를 쓰는데 그렇게 잘 낚는가?”라고 묻자, 그 마귀는 “포기라는 미끼를 쓰지!”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조각가 카푸치오는 채석장에서 조각할 돌을 고르는 중에 큰 돌이 오른 손을 짓눌러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구가 그의 마음의 소원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열심히 조각하여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 조각품의 이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 불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완성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붙힌 이름입니다.
어떤 분은 “포기란 배추를 썰 때 쓰는 말이고, 실패란 바느질 할 때 쓰는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에게 실망을 주고, 교회 안에서도 실망할만한 말을 들어도 절대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가지 마시고 항상 소원들 품고 기도로 전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보시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가나안 여인에게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딸에게 있던 흉악한 귀신이 떠나가고 그 가정에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 찾아 왔습니다. 흉악한 귀신은 의술이나 약이나 혹은 무당의 푸닥거리나 인간의 여러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정 폭력, 음란, 방탕, 술 취함 온갖 악한 일의 배후에 흉악한 귀신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소원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리십시오! 이왕이면 가치 있고 고상한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영원으로 이어질 소원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어찌하든지 주님을 더 알기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믿음의 부자가 되십시오! 높은 지위를 가지시기 원합니까? 먼저 교회에서 봉사하는 지위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기뻐할 만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시고, 꺼지지 않는 영혼으로 이어지는 소원을 가지시고 신령하고 가치 있는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그 소원이 이루어진 간증을 수도 없이 듣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가장 강한 여자입니까?
마 15:21-28 / 김영현목사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강한 여자일까요?
힘이 센 여자가 아무래도 강한 여자일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여자 장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타지방에 갔다가 껄렁패들에게 맞고 돌아오면 반드시 가서 복수를 하고 남편 앞에 데려와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대전 형무소 옆에서 푸줏간을 경영하는데 웬만한 남자는 그녀의 손에 잡히면 꼼짝을 못했습니다. 남편은 숨도 못 쉬고 사는 줄 알았는데 동네 사람들에 의하면 남편 앞에서 그렇게 애교가 넘칠 수가 없답니다. 쌀 한가마를 가뿐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여자였습니다.
■ 이번에 장미란 선수가 105kg의 몸무게를 갖고 인상 140kg, 용상 186kg 합계 326kg으로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날 밤 만큼 가슴 뿌듯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해설가에 의하면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무거운 바벨을 드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장미란 선수보다 약 50kg 쯤 더 나가는 선수가 장미란 선수보다 무려 20kg이상 못 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힘이 세다고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둘째로 돈 많은 여자가 강한 여자일 수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시대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어서 돈만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권력을 쥔 여자가 강한 여자입니다.
옛날 헤로디아는 빌립이 죽자 남편의 형인 헤롯왕의 아내가 되어 권력을 쥐었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비난하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하니 헤롯왕은 자기 생일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베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멜다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필리핀을 쥐락펴락했습니다. 결국 권력을 잘못 사용한 이 여자들은 파멸의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대처여사는 감리교인인데 영국수상에 오르자 우후죽순인 노조를 정비하고 영국의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 놓았습니다. 대처여사가 죽으면 영국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것이 영국 국민들의 뜻이었습니다.
넷째는 인기 있는 유명인들도 강한 여자입니다.
영화배우 마릴린 몬로는 전 세계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힘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고, 인기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여자는 다음의 여자들입니다.
첫째는 불타는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있는 여자입니다.
가슴에 소원을 품고 있는 자가 강한 여자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소원을 주셨을 때 결코 패하지 않는 강한 여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의 가슴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이변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장미란 선수가 5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운 것도 그렇고, 육상 100m와 200m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건 자마이카의 우사인 볼트도 이변의 주인공들입니다. 올림픽에서는 물론 금메달을 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남아공 대표로 여자 수영 10km 마라톤에 참가한 22세의 나탈리 뒤 투아(Natalie du Toit)의 인간 승리 모습은 세계인에게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가 출발선에 서면서 왼쪽 다리를 뽑아내자 모든 사람이 경악했습니다. 한쪽 다리로 수영 마라톤 선수로 뽑힌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17세 때 고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각국 대표 25명이 참가했는데 16위를 했습니다. 왼쪽 무릎 아래가 없어 물을 차는 힘이 부족한 데도 1위 라리사 일첸코에 불과 1분22초를 뒤졌을 뿐입니다. 경기 직후 그는 기자들에게 “이건 나의 꿈이었다. 나는 경기에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2002년 영연방 커먼웰스 게임에 장애인 대표로 출전해 50m와 100m 자유형 부문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습니다. 2004년 시드니 패럴림픽에서는 금5, 은1로 장애인 세계 최강을 과시했습니다. 지난 5월 3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10km 세계대회에서 1위에 불과 5.1초 뒤진 4위를 하여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것입니다. 미국 타임즈는 이번 올림픽에 주목해야 할 100인의 선수 중 우사인 볼트, 마이클 펠프스와 함께 그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경기 후 비장애인들과 경기를 한 소감을 묻자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들만큼 노력하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다리 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투아가 방벽에 써 붙인 글을 소개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목표에 못 미친 것이 아니다. 도전할 목표를 갖지 못한 것이다.” 꿈을 갖고, 소원을 갖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소원을 이루기 위해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이 강한 여자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고쳐야겠다는 소원이 그녀의 가슴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역경도 끝까지 인내하며 매달리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인입니다. 시돈 지방에 사는 가나안 여인은 딸이 귀신들려 병들어 있어 어떻게든지 고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시돈지방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차가운 예수님의 반응에도 가나안 여인은 더 간절합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냉대는 더 심해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예수님이 냉대할수록 가나안 여인의 집착은 더욱 끈질깁니다. 그 가슴 속에 어떻게 해서든지 딸을 살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엄마의 소원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 다”(마 15:27)
이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가나안 여인을 칭찬하며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Woman, you have great faith! your request is granted)
이 사건을 놓고 예수님도 역시 민족주의자였고, 시온니즘에 빠진 유대인이었고, 인종차별주의 자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으로 가나안 여인을 개 취급하시지 않았느냐는 얘기입니다.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인종차별은 피부색깔이나 민족들의 선입견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인종차별이 심각한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수년전 오토 칸(Otto Kahn)이라는 사람이 200만불 이상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ropolitan Opera)에 기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토 칸씨는 오페라의 좋은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곳이 이 지구입니다. 과거에 흑인들이 차별당한 역사는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비극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지 늘 유의해야 합니다. 나보다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신분이 낮다고 없수이 여기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봄은 너무 겉핥기식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십니다. 역사의 주관자요, 역사의 시작과 끝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한 말씀, 한 말씀은 모두가 중생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이나 기사이적들, 그리고 행하심도 모두가 천국진리를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소원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너를 짓기 전에 이미 아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가나안 여인을 냉대하시는 까닭은 그녀의 큰 믿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사람은 이 가나안 여인처럼 끝까지 매달려 간구할 때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끈질긴 믿음, 인내하는 믿음, 끝까지 매달리는 믿음, 그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여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공한 사람들(Those who succeed in life)과 실패한 사람들(Those who fail)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예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재능이 많은 연예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운동선수들도 보면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상(to make it to top)에 오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사람이 정상에 오르기도 합니다.
■ 미국 텍사스에 컨츄리 뮤직 스타 클린트 블랙(Clint Black)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는 1,600만장의 앨범(Albums)을 팔았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처음 시작할 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Nothing was handed to him). 그는 가난을 이기기 위해 어렸을 때 신문을 팔았습니다. 매일같이 가가호호를 방문해서 휴스톤 포스트(Houston Post)신문을 팔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신문팔이를 대하는 사람들은 늘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면전에서 “나는 쓰레기 같은 그 신문을 원치 않는다”며 문을 꽝 닫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격려하고 다시 문을 두드려 그 신문이 얼마나 좋은 신문인지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결국 그 남자는 이 소년에게서 신문을 사고 말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블랙(Black)은 그 신문사에서 최고의 판매원(the top subscription seller)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공적인 판매원들처럼 신입 판매원들을 훈련시키는 직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입 판매원 훈련을 시키면서 그는 하모니카와 기타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18세에 그는 전문음악가가 되기 위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어렵고 오랜 시련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습니다. 1,600만장의 앨범이 팔린 유명한 가수가 된 후 그는 말합니다. “나는 결코 나의 꿈(소원)을 향한 시각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I never lost sight of my dreams).
인생을 성공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결심과 끈기가 필요합니다(Determination and persistence). 성공할 때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은 채 끝까지 굳건한 의지로 나아가는 불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가나안 여인도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나 예수님에게서 냉대를 받아도 거부를 당해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부르짖었습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너는 할 수 있다”(You can do it). 어떤 사업가는 “온순한 사람은 세계를 상속받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시장 점유율을 높이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부인인 엘리나(Eleanor)는 아침 일찍 볼티모어 감옥소를 방문하기 위해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남편의 새벽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떠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엘리나가 어디에 있느냐?”는 대통령의 말에 비서는 “네, 지금 감옥소에 있습니다. 각하”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난 별로 놀라지 않는다. 무슨 죄로 갔느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두 부부의 재미있는 일화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만큼 엘리나 루즈벨트는 해야 할 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에는 결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눅 18:2-5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재판관은 처음에는 들어주지 않다가 과부가 너무 번거롭게 하니 할 수 없이 그 여인의 소청을 들어주었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7-8)
예수님은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인내심을 갖고 끈기있게 매달리는 기도와 직접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믿음은 오래 참음이라는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이나 못된 재판관을 설득한 여인은 끈질김으로 강한 여자가 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여인의 탄원에 대한 예수님의 궁극적인 응답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Woman, you have great faith. Your request is granted!)
그 즉시 그의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여기 ‘믿음’은 무엇을 말합니까? 단순히 ‘믿는다’(believing)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Even the demons believe and tremble)고 했습니다. ‘믿음’은 어떤 지적인정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Faith is movement in the direction God has called you to go). 믿음은 하나님이 증명하신 진리들을 외치는 것입니다(Faith is speaking out for those truths you know God approve). 믿음은 힘들고 어려울 때, 친구들이 당신을 버릴 때, 바로 그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여인의 소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매우 크고 소중한 것을 교훈으로 얻습니다. 큰 믿음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을 때 큰 믿음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위하여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제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신발 흙털개가 될 것이냐?(Disciple or doormat?) 선택은 분명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외치십시오(Never give up. Always speak up!).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Woman, you have great faith! Your request is gran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