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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침대피(長枕大被)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는다는 뜻으로, 부부간의 깊은 애정이 있음을 또는 형제간에 우애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長 : 길 장(長/0)
枕 : 베개 침(木/4)
大 : 클 대(大/0)
被 : 이불 피(衤/5)
출전 : 신당서(新唐書)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
긴 베개와 큰 이불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보통 부부나 연인이 함께 잘 때를 묘사할 때 사용되며, 같은 자리에 누워 긴 베개를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는 모습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넓게는 부부간의 다정하고 화목한 동침을 상징하거나 사랑이 깊고 친밀한 사이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쓰인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태자 이전인 임왕(臨王) 시절, 형제들과 우애 깊게 지낸 일화로 유명한 것이 바로 장침대피(長枕大被) 고사이다. 이 고사는 형제간 우애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 이 고사는 구당서(舊唐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도 언급되며, 오늘날까지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상징하는 대표적 일화로 인용된다.
당 고종(高宗)의 아들인 예종(睿宗) 이 황태자로 있을 때, 그의 아들들, 훗날의 현종(이융기 李隆基)를 포함한 여러 황자들은 어릴 적부터 매우 우애가 깊었다. 그들은 같은 방에서 지내며, 긴 베개 하나와 큰 이불 하나를 함께 사용하면서 서로 다정하게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이 모습이 장침대피(長枕大被)로 표현되었고, 그만큼 형제애가 돈독했다는 의미로 역사서에 기록된다. 훗날 현종이 황제가 된 후에도, 그 시절을 회상하며 형제들과의 우애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전한다.
당 현종(玄宗)이 태자 시절 형제들과 우애 깊게 지낸 일화로 알려진 장침대피(長枕大被)는 단순히 같은 잠자리를 공유한 것을 넘어, 실제로 형제애를 실천한 구체적인 사례들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현종은 황제가 된 후에도 형제들과의 우애를 계속 이어갔다. 그는 궁전 내에 다섯 개의 장막을 설치하고,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며 잠자리를 같이 했다. 이 장막은 '오왕장(五王帳)'이라 불렸다. 이러한 생활은 형제들과의 깊은 유대를 상징하며, '장침대피'의 유래가 되었다.
어느 날, 동생인 설왕(薛王) 이업(李業)이 병에 걸리자, 현종은 직접 약을 달여주었습니다. 약을 달이는 동안 바람이 불어 불꽃이 일어나 그의 수염을 태웠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도우려 하자, 현종은 "동생이 이 약을 먹고 병이 낫는다면, 수염이 타는 것이 무슨 대수랴"라고 말하며 동생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단순한 형제애를 넘어, 현종이 실제로 형제들을 아끼고 사랑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이러한 우애는 당시에도 드물게 여겨졌으며, 후세에까지 전해져 형제간의 모범으로 회자되고 있다.
신당서(新唐書)는 당나라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정사로, 특히 황실의 인물들을 다룬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에서는 당 현종(玄宗)과 그의 형제들 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의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은 당나라의 세 황제인 고조(高祖), 태종(太宗), 고종(高宗)의 자녀들에 대한 전기를 다루고 있다. 이 중에서 현종(玄宗)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기록에서는 그들의 우애와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장침대피(長枕大被)는 문자 그대로 '긴 베개와 큰 이불'을 의미하며, 형제들이 함께 잠자리를 공유하며 우애를 나눈 모습을 상징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생활 방식을 넘어, 형제간의 깊은 정과 화목한 관계를 나타내는 고사성어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황실 내에서의 형제간 우애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며, 후대에까지 그 의미가 전해지고 있다.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고사나 역사적 일화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아래는 장침대피(長枕大被) 외에 대표적인 형제간 우애 일화들이다.
공자의 제자 민자건
논어(論語)에서 공자의 제자 민자건은 계모 밑에서 자랐다. 계모가 자기 자식은 솜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로 만든 옷을 입혔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지만, 민자건은 "어머니가 떠나면 동생들은 더 추워질 것"이라며 오히려 계모를 감쌌다. 형제와 부모를 동시에 아끼는 효우(孝友)의 본보기가 되었다.
민자건(閔子騫)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에서도 효(孝)와 형제간의 우애(友愛)로 유명한 인물로, '논어'를 비롯한 여러 고전에서 효자의 표본으로 자주 언급된다. 본명은 민손(閔損)이며, 자는 자건(子騫)이다. 민자건은 계모(繼母)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두 부인을 두었고, 계모가 낳은 아들들과 함께 자랐지만, 계모는 민자건만 차별하며 냉대했다.
효경 및 설원 등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겨울날, 계모는 자신의 친아들들에게는 솜을 넣은 따뜻한 옷을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蘆花)를 넣은 얇고 차가운 옷을 입혔다. 아버지 민문은 이 사실을 민자건이 병이 나자 알게 되어 계모를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민자건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계시면 제게는 한 사람이 춥고, 두 동생은 따뜻하오나, 어머니를 내치면 세 사람이 모두 추울 것입니다." 이 말에 감동한 아버지는 계모를 돌려보냈고, 계모는 깊이 뉘우치고 이후 세 아들을 공평히 대했다고 한다.
공자는 민자건의 인품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자건은 인(仁)의 사람이다(閔子騫, 仁也)." (논어 선진편) 또한, '논어'에서는 그가 온화하고, 말수가 적고, 행동으로 도를 실천한 인물로 묘사된다. 민자건은 공자의 10대 제자 중 '덕행(德行)'으로 으뜸으로 평가된다. 효자문(孝子門)은 서당, 학당 등에 그림과 이야기로 전해지며 효교육의 본보기가 되었다. 조선에서도 '이륜행실도', '삼강행실도' 등 교화서에 필수적으로 실린다.
민자건은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계모를 미워하지 않고 도리와 사랑으로 감화한 대표적 효자로, 공자의 이상인 인(仁)을 실천한 제자이자 형제애와 효도의 상징으로 전해진다.
순(舜) 임금
맹자(孟子)에서 고대 요임금 때 순(舜) 임금은 계모와 이복동생 상(象)에게 학대 받았음에도 그들을 극진히 대했다. 동생이 그를 죽이려 해도 끝내 원망하지 않고, 부친과 동생을 극진히 공경했다. 극진한 인내와 형제애, 효심의 본보기가 되었다.
순(舜) 임금은 중국 고대 요(堯)임금의 뒤를 이은 성군(聖君)으로, 지극한 효심과 형제애, 인내심으로 전통 유교문화에서 모범 인물로 숭상된다. 사기(史記), 서경(書經), 맹자 등에 기록된 그의 일화는 효자 중의 효자, 가족 내 갈등을 사랑으로 극복한 인물로 널리 전해진다.
순의 아버지 고수(瞽瞍)는 눈먼 사람이면서도 성격이 포악했고, 계모는 시기심이 강했으며, 이복동생 상(象)은 순을 해치려 했다. 그러나 순은 한 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끝까지 공경과 사랑으로 가족을 대했다.
동생 상이 순을 해치기 위해 지붕 공사 중 일부러 위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다. 순은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건지고도, 동생을 꾸짖지 않았다. 또 한번은, 상이 순을 우물에 빠뜨리고 흙으로 메우려 했으나, 순은 몰래 빠져나와 살아남았다. 귀가 후 아무 일 없던 듯 가족을 대하였다. 그 모습을 본 상과 부모는 점차 마음을 돌렸다.
요임금은 후계자를 찾기 위해 여러 인물의 인품을 시험했는데, 순이 그처럼 악한 가족 안에서도 효심과 사랑을 잃지 않는 모습에 감복하여 두 딸(여황과 아황)을 순에게 시집보내고, 후계자로 삼았다.
순임금의 이야기는 유교의 효와 우애 교육의 최고 본보기로 삼자경, 이륜(二倫), 효경 등 어린이 교육서에 필수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효와 가족 사랑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순임금은 악한 가족 환경에서도 원망 대신 사랑, 복수 대신 덕으로 감화하여 결국 성군이 된 인물로, 효와 형제애, 인내의 모범적인 상징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한나라때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도원결의를 통해 형제가 되었고, 생사를 함께 하며 끝까지 서로를 배신하지 않았다. 특히 유비는 관우가 죽자 복수를 위해 형제애를 내세워 촉한을 일으키기도 했다. 혈육을 뛰어넘는 의형제의 우애의 본보기가 되었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중국 삼국지(三國志)에서 가장 유명한 의형제 삼인방으로, 형제애와 의리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세 사람은 실제 역사에서도 존재했지만, 삼국지연의 등의 문학적 재구성으로 그들의 우정과 단결이 더욱 극적으로 알려졌다.
도원결의(桃園結義)는 형제의 시작으로 탁현(涿縣)의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같은 날 태어나진 않았지만, 같은 날 죽고자 의형제를 맺고 한 뜻을 이루기로 맹세했다. 유비가 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셋째이다.
이 장면은 중국 및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의(義)의 상징이 되었으며, 형제 이상의 결속을 표현하는 대표적 고사로 전해진다. 황건적 토벌, 동탁 타도, 유표 휘하 거주, 조조와 손권과의 수많은 전투를 함께 하였다. 세 사람은 고난과 위기를 함께 겪으며 우애와 충성심을 더 깊게 다져갔다.
관우가 형주에서 손권에게 포위당해 전사하자, 유비는 슬픔에 빠져 결국 오나라 정벌(夷陵 전투)을 감행했다. 이는 정치적 판단보다는 형제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의리의 행동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패배하지만 유비의 행동은 형제애의 극치로 평가된다.
장비는 다혈질이었지만, 유비를 향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관우가 죽자 유비보다 먼저 분노하며 보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복수를 서두르던 중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 또한 관우와의 형제애에서 비롯된 과격한 충성심의 비극으로 해석된다.
경극, 소설, 드라마, 게임 등에서도 이 삼형제는 불멸의 의형제 캐릭터로 반복 재해석되고 있다. 특히 관우는 후에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제사되며, 의(義)의 신으로 숭배된다. 유비와 관우와 장비의 관계는 단순한 정치 동맹이 아니라, 의형제를 넘어선 생사를 함께한 동지애로, 동양문화에서 우정과 의리와 형제애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양가장(楊家將) 형제
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에서 송나라 양가장(楊家將) 형제들은 송나라 명장 양업의 아들이다. 모두 군인이었으며, 나라와 가문을 위해 함께 싸우며 형제간 우애와 충절을 지켰다. 국가와 가문을 위한 형제간의 단합과 충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양가장(楊家將), 양씨 가문 장군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실존 인물과 전설이 뒤섞인 충성스러운 무장 가문으로, 특히 형제 간의 단결과 우애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양업(楊業) 장군과 그의 아들들(양가장 형제들)의 이야기는 형제애와 가문 전체의 충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고사로 자리 잡았다.
양업(楊業)은 북송 초기 명장으로, 원래는 후한(後漢)과 북한(北漢)에서 활동하다가 송나라에 귀순하였다. 그의 아들들이 모두 무예가 뛰어나 병법과 충절을 가문 전통으로 삼았다. 가족 대부분이 송나라와 조정을 위해 전사하거나 순국하였다. 양업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주로 전설과 소설에서는 7형제(양가칠랑, 楊家七郞)로 등장한다.
아버지 양업이 조정의 오판으로 적진에 고립되어 최후를 맞이할 때, 아들들이 구출하러 나섰으나 실패, 모두 통곡하며 후에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를 맹세했다. 적국에 인질로 잡혀갔지만, 가족과 국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했다. 다른 형제들은 그를 추모하며 그 뜻을 받들어 전투에 임하였다. 아들들이 죽거나 전사하자, 과부가 된 형수들과 어머니들이 무장을 하고 직접 전장에 나아갔다. 이는 가문의 충절을 여성까지 함께 계승했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는 명나라 말기부터 유행한 소설로, 양가장 형제들의 무용담과 의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경극· 판소· 영화 등으로도 자주 재현되며, 중국 문화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충신 이야기 중 하나이다. 양가장의 정신은 단순한 무공이 아닌, 가문과 형제와 국가를 위한 희생과 단결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정몽주와 그의 형제들
'고려사'와, '정몽주 문집'에서 고려시대 정몽주와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이다. 고려 말 정몽주는 정적이 많았지만, 형제들과의 관계는 돈독했고, 특히 가족에 대한 신의를 중시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집안에는 화목의 본보기가 되었다.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정치가, 외교관, 충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형제들과의 관계 역시 깊은 우애와 신의로 조선 전기 문헌에 종종 언급된다. 특히 가문 전체가 고려에 충절을 바친 인물들로 평가되며, 정몽주 혼자만의 위대한 삶이 아닌 형제 전체의 집단적 가치 실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정몽주의 부친은 정운경(鄭云敬), 형제는 적어도 3~4명 이상인 것으로 전해지며, 그 중 일부도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직에 올랐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형제는 정몽형(鄭夢衡)으로, 이 또한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던 인물로 보인다.
정몽주는 형제들과 함께 문학, 경학을 함께 연구하고 수련하며 성장했다. 형 정몽형은 정몽주가 어린 시절부터 지적 재능과 도량을 인정하고 극진히 아끼며 지도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건국 당시 이성계와 정도전이 고려 충신들을 회유할 때,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에 충절을 지켰고, 그의 형제들 역시 가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은거하거나 정몽주의 선택을 따름으로써 형제 간의 신의를 드러냈다.
정몽주가 죽은 뒤, 그의 형제들과 후손은 모두 조선 초반에는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했으며, 이는 형제간의 유대뿐 아니라 정몽주의 뜻을 지키려는 공동의 결의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에도 정몽주의 후손은 충절과 절의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불리며, 형제와 자손들의 단결도 칭송되었다. 정몽주는 시문에도 종종 형제나 집안에 대한 감정을 남겼으며, 포은집(圃隱集) 등에 관련 글이 일부 실려 있다.
이항복과 형 이항서
'연려실기술'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시대 이항복과 형 이항서의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에 이항복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형 이항서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다. 형을 부모처럼 섬겼고, 조정에서도 형제를 칭송하였다. 형에 대한 극진한 공경과 보은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항복(李恒福)과 그의 형 이항서(李恒瑞)는 조선 중기의 문신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로, 특히 이항복이 훗날 영의정까지 오른 명재상으로 알려지면서 그들의 형제애와 우애 역시 주목받게 되었다.
두 형제는 경기도 양주 출신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형 이항서는 어린 동생 이항복을 부모처럼 극진히 돌보며 교육을 시켰다. 이항서는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동생의 성공을 위해 자신은 학업을 포기하고 가사와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나는 부모를 대신할 뿐이다. 항복이만 출세하면 족하다”라고 말하며 동생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뒷바라지했다.
이항복은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에 오르면서도 항상 형에게 존댓말을 쓰고, 벼슬보다 먼저 형에게 예를 다했다. 그는 “형은 나의 스승이자 어버이와 같으니, 내가 영의정이 되어도 형 앞에서는 어린아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형의 생일이나 제사에는 친히 술과 음식으로 공양하며, 한번도 예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항복 형제가 효우(孝友)의 본보기로 꼽혔고, 선조도 “그 형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항복은 자신의 고향에 서원을 지을 때도, 먼저 형의 공덕을 기리는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항복의 성품이 밝고 유쾌했던 만큼, 형제간의 관계 역시 진중하면서도 따뜻했고, 조선시대 가문 중심 윤리와 형제애의 본보기로 기록되고 있다.
안중근과 동생 안공근
'안중근 전집'과, '사형장의 이슬로'에서 근대 인물로 안중근과 동생 안공근의 이야기이다. 대한제국 말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투옥되었을 때, 동생 안공근은 형을 위해 일본에 호소하고 뒷바라지를 아낌없이 하였다. 민족과 가문을 위한 형제간 단결의 본보기가 되었다. 안중근과 그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관계는 단순한 형제애를 넘어, 민족과 가문을 위한 헌신과 단결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대한제국 말기 격변의 시대 속에서 가족 공동체와 민족의식을 함께 지켜낸 형제들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했다.
그는 체포된 뒤, "이토는 동양 평화를 해친 원흉이며, 조국을 짓밟은 침략자"라며 당당히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안공근은 안중근의 의거 이후, 형의 유해와 유서를 돌려받기 위해 일본 당국과 여러 차례 교섭했다. 그는 형의 뜻을 알리고, 정당성을 알리는 데 온몸으로 노력했다.
당시 안씨 가문은 '역적의 집안'이 될 위험이 있었으나, 안공근은 "형의 뜻은 옳다"며 가문 전체를 하나로 단결시켰다. 조카 안필립을 비롯한 후손들 또한 이를 계승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안공근은 형의 유해를 모시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마음에 걸려 했다고 전한다. 형의 유언이 담긴 '동양평화론' 초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보존했고, 훗날 후손들이 이를 출판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개인적 의리를 넘어 역사의 대의와 가문, 민족을 위한 형제 단결의 모범적 사례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까지 교육과 문학, 영화 등에서 자주 조명된다. 이 외에도 중국과 한국 고전에는 효우(孝友)라는 개념 아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를 나누는 사례가 다양하게 전해다.
장침대피(長枕大被)
이 성어는 당나라 현종(玄宗)이 태자(太子) 시절 형제들과 우애(友愛) 좋게 지낸 일화에서 연유한다. 송나라 사람 왕당(王讜)이 편찬한 당어림(唐語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현종이 태자시절 긴 베개에 큰 이불을 만들어 늘 형제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玄宗諸王友愛特甚, 常思作長枕大被, 與同起臥。
현종은 여러 형제 중 혹 누가 아프면 하루 종일 안절부절 하며 밥을 먹지 못했다.
諸王或有疾, 上輾轉終日不能食。
좌우에서 식사하기를 권하면, 현종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은 나의 수족인데 수족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인데, 어찌 잠을 자며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左右開喻進膳, 上曰 : 弟兄, 吾之手足, 手足不理, 吾身廢矣, 何暇更思寢食?
(唐語林/卷一)
또 신당서(新唐書)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에, “현종이 태자로 있을 적에 큰 이불과 긴 베개를 만들어 여러 아우들과 함께 썼다. 이를 예종(睿宗; 현종의 선왕)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玄宗為太子, 嘗制大衾長枕, 將與諸王共之。睿宗知, 喜甚。
(新唐書/卷081)
성호사설 제12권 인사문(人事門)의 원비 작요(寃婢作妖; 억울하게 죽은 계집종이 요귀로 화함)의 글이다.
왕손(王孫)인 정(楨)은 바로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다. 그 부인의 성품이 질투가 많아 득옥(得玉)이란 계집종에게 학형(虐刑)을 가하여 죽게 했는데, 득옥이 죽은 뒤에 요귀로 화하여 야차(夜叉; 사나운 귀신)와 함께 한낮에 그 집에 들어와서 용마루를 타고 다니므로 이것을 보고서 달아나 숨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이로부터 온갖 요사와 변괴를 일으켜 결국 그 일족을 다 멸하고야 말았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나라에 공로가 있는 이로서 병자년 당시에 세 번이나 연경에 다녀왔고 아홉 번이나 요동성에 다녀왔으매, 또 효종은 우애가 지극하여, 이른바 장침 대피(長枕大被)도 비교가 안될 정도였지만, 그러나 자손들이 다 반역죄로 옥사했고, 다만 손자 한 사람이 벙어리에다 귀먹은 천형(天刑)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제사를 받들어 대가 끊기지 않았으니, 역시 기이한 일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조선조 인조의 셋째 아들로 호는 송계(松溪), 효종의 아우이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압박이 날로 심해지자 부왕 인조를 도와 외교 사명을 받들고 여러 차례 청나라에 가서 많은 공을 세웠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송계집(松溪集),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 등이 있다.
▶️ 長(길 장/어른 장)은 ❶상형문자로 仧(장),兏(장)은 동자(同字), 长(장)은 약자(略字)이다. 長(장)은 머리털이 긴 노인이 단장을 짚고 서 있는 모양으로, 나중에 노인이 전(轉)하여 나이가 위인 사람으로 관리(官吏)의 長(장), 또한 성장하다, 길게 자라다, 길다 따위의 뜻에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長자는 '길다'나 '어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長자는 머리칼이 긴 노인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길다’였다. 長자는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후에 '어른', '우두머리'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長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張(베풀 장)자나 帳(휘장 장)자에 長자가 쓰이기는 했지만, 長자가 부수로 지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長(장)은 (1)어떤 조직체(組織體)나 또는 부서 단위의 우두머리(책임자) (2)긴 기다란의 뜻을 나타내는 말 (3)오랜의 뜻을 나타내는 말 (4)길이 (5)늘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길다 ②낫다 ③나아가다 ④자라다 ⑤맏 ⑥어른 ⑦길이 ⑧우두머리 ⑨처음 ⑩늘 ⑪항상(恒常),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랠 구(久),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릴 유(幼), 짧을 단(短), 늙을 노/로(老)이다. 용례로는 좋은 점을 장점(長點), 긴 것과 짧은 것을 장단(長短), 목숨이 긺을 장수(長壽), 맏 아들을 장남(長男), 한 관청의 으뜸 벼슬을 장관(長官), 오랜 기간을 장기(長期), 장편으로 된 노래를 장가(長歌), 길게 내는 소리를 장음(長音), 어른과 어린이를 장유(長幼), 나이가 많고 덕이 많은 사람의 존칭을 장로(長老), 통나무를 길쭉하게 잘라서 쪼갠 땔나무를 장작(長斫),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을 장고(長考), 아주 능한 재주를 장기(長技), 생물이 자라서 점점 커짐을 성장(成長), 모임을 대표하는 사람을 회장(會長), 집안의 어른을 가장(家長), 도와서 자라나게 한다는 조장(助長), 시간이나 물건의 길이 따위를 처음에 정한 것보다 늘이어 길게 함을 연장(延長), 위에 서서 집단이나 단체를 지배 통솔하는 사람을 수장(首長), 특별히 뛰어난 장점을 특장(特長), 오륜의 하나로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장유유서(長幼有序), 길다란 목에 까마귀 부리 같이 뾰족한 입이라는 뜻으로 관상에서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상을 이르는 말을 장경오훼(長頸烏喙), 오래 서서 분부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권문세가에 빌붙어 이익을 얻고자하는 사람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장립대명(長立待命), 긴 눈과 날아다니는 귀라는 뜻으로 옛일이나 먼 곳의 일을 앉은 채로 보고들을 수 있는 눈이나 귀 곧 서적을 이름 또는 사물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널리 정보를 모아 잘 알고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장목비이(長目飛耳), 길고 짧음은 상대적 관계에서 비교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장단상교(長短相較), 멀리 불어 가는 대풍을 타고 끝없는 바다 저쪽으로 배를 달린다는 뜻으로 대업을 이룬다는 말을 장풍파랑(長風波浪),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출 수 있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함을 일컫는 말을 장수선무(長袖善舞), 날이 새도 창을 가리고 불을 켜놓은 채 며칠이고 계속하는 술자리를 일컫는 말을 장야지음(長夜之飮), 길고도 긴 봄날을 일컫는 말을 장장춘일(長長春日), 사업의 오랜 계속을 도모하는 계획을 일컫는 말을 장구지계(長久之計), 길게 뻗친 숲의 깊은 곳을 일컫는 말을 장림심처(長林深處), 오랫동안 살아 죽지 아니함을 일컫는 말을 장생불사(長生不死), 늘 길거리에 모여 있으면서 뜬 벌이를 하는 막벌이꾼을 일컫는 말을 장석친구(長席親舊),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함을 일컥는 말을 장와불기(長臥不起), 먼 장래의 계책이라는 말을 장원지계(長遠之計), 긴 줄로 해를 붙들어 맨다는 뜻으로 시간의 흐름을 매어 멈추게 하려는 것 즉 불가능한 일을 이르는 말을 장승계일(長繩繫日), 장자의 일만 개의 등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부자가 신불에게 일만 개의 등을 올리는 반면에 가난한 여인은 단 하나의 등을 바치지만 그 참뜻만 있으면 가난한 여인의 한 등이 장자의 만등에 못지 않다는 말을 장자만등(長者萬燈), 부자는 3대까지 가기 어렵다는 말 곧 아버지가 고생해서 재산을 만들고 그것을 보고 자란 아들인 2대는 그것을 잘 지키지만 3대인 손자는 생활이 사치하여 마침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가산을 탕진하는 예가 많음을 이르는 말을 장자삼대(長者三代), 긴 베개와 큰 이불이라는 뜻으로 긴 베개와 큰 이불은 함께 누워자기에 편하므로 형제 간에 우애가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장침대금(長枕大衾) 등에 쓰인다.
▶️ 枕(베개 침)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밑에 까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 冘(임, 침)으로 이루어졌다. 머리 밑에 까는 것, 즉 베개를 말한다. 옛날의 베개는 나무로 만들었다. ❷회의문자로 枕자는 ‘베개’나 ‘베다’, ‘잠자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枕자는 木(나무 목)자와 冘(나아갈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冘자는 목에 칼을 차고 걸어가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베개를 사용했었다. 그러니 枕자에 木자가 쓰인 것도 베개의 재질을 뜻한다 할 수 있다. 또한, 머리에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을 그린 冘자는 뜻과는 관계없이 베개를 베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枕(침)은 ①베개 ②말뚝 ③머리뼈 ④베개를 베다 ⑤드러눕다, 잠자다 ⑥가로막다, 방해하다 ⑦임하다, 향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베개와 자리를 침석(枕席), 팔을 베게 삼아 벰을 침굉(枕肱), 베갯 보를 침량(枕樑), 벼개를 베고 죽었다는 침사(枕死), 누울 때 사람을 벰을 침인(枕人), 베개를 침자(枕子), 밑에 깔거나 받치는 널빤지를 침판(枕板), 베갯 머리를 침두(枕頭), 머리맡에 치는 병풍을 침병(枕屛), 서로 베개 삼고 잠을 침자(枕藉), 이부자리와 베개를 금침(衾枕), 나무 토막으로 만든 베개를 목침(木枕), 구르는 차바퀴를 받쳐 멈추게 함을 차침(車枕), 둥근 나무나 큰 방울 모양으로 된 베개를 경침(警枕), 네모난 베개를 방침(方枕), 편안히 잠을 잠을 안침(安枕), 자리를 펴고 누워 잠을 개침(開枕), 한 자리에서 함께 잠을 연침(聯枕), 잠자리에서 일어남을 기침(起枕), 물에 가라앉음 또는 물에 잠김을 수침(水枕), 홀로 잘 때의 외로운 베개로 곧 외로운 잠자리를 고침(孤枕), 시냇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침류수석(枕流漱石), 창을 베고 갑옷을 깔고 앉는다는 침과좌갑(枕戈坐甲), 창을 베고 기다린다는 침과이대(枕戈以待),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침과대적(枕戈待敵), 창을 베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잔다는 침과침갑(枕戈寢甲), 창을 베고 자면서 아침을 기다린다 라는 뜻의 침과대단(枕戈待旦) 등에 쓰인다.
▶️ 大(클 대/큰 대, 클 대, 클 다)는 ❶상형문자로 亣(대)는 동자(同字)이다. 大(대)는 서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본 모양으로, 처음에는 옆에서 본 모양인 人(인)과 匕(비) 따위와 같이, 다만 인간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나중에 구분하여 훌륭한 사람, 훌륭하다, 크다의 뜻으로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大자는 '크다'나 '높다', '많다', '심하다'와 같은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大자를 보면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크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大자는 기본적으로는 '크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정도가 과하다는 의미에서 '심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러니 大자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大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크다'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사람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大자가 본래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大(대)는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 큰, 으뜸가는, 뛰어난, 위대한, 광대한, 대단한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존경(尊敬) 또는 찬미(讚美)의 뜻도 나타냄 (3)큼. 큰 것 (4)큰 달. 양력으로 31일, 음력으로 30일인 달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대) ②높다, 존귀하다(대) ③훌륭하다, 뛰어나다(대) ④자랑하다, 뽐내다, 교만하다(대) ⑤많다, 수효(數爻)가 많다(대) ⑥중(重)히 여기다, 중요시하다(대) ⑦지나다, 일정한 정도를 넘다(대) ⑧거칠다, 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대) ⑨낫다(대) ⑩늙다, 나이를 먹다(대) ⑪대강(大綱), 대략(大略)(대) ⑫크게, 성(盛)하게(대) ⑬하늘(대) ⑭존경하거나 찬미(讚美)할 때 쓰는 말(대) 그리고 클 태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태) ⓑ지나치게(태) 그리고 클 다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다) ㉡극치(極致), 극도(極度)(다) ㉢지나치게(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위(偉), 클 굉(宏), 클 거(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소(小), 가늘 세(細)이다. 용례로는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큰 일을 대사(大事), 크게 구분함을 대구분(大區分), 일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형세를 대세(大勢), 크게 길함을 대길(大吉), 조금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음을 대동(大同),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큰 규격이나 규모를 대형(大型),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사물의 큼과 작음을 대소(大小), 크게 이루어짐을 대성(大成), 크게 웃음을 대소(大笑), 넓고 큰 땅을 대지(大地), 넓혀서 크게 함을 확대(廓大), 가장 큼을 최대(最大),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뛰어나고 훌륭함을 위대(偉大),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중대(重大), 마음이 너그럽고 큼을 관대(寬大), 엄청나게 큼을 거대(巨大), 형상이나 부피가 엄청나게 많고도 큼을 방대(厖大), 더 보태어 크게 함을 증대(增大),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또는 만년이 되어 성공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대기만성(大器晩成), 넓고 큰 바다에 물방울 하나라는 뜻으로 많은 것 가운데 아주 작은 것이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대해일적(大海一滴), 넓고 넓은 바다에 떨어뜨린 한 알의 좁쌀이란 뜻으로 매우 작음 또는 보잘것없는 존재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대해일속(大海一粟), 거의 같고 조금 다름이나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대동소이(大同小異), 큰 의리를 위해서는 혈육의 친함도 저버린다는 뜻으로 큰 의리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의를 버림 또는 국가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버림을 일컫는 말을 대의멸친(大義滅親),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 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이르는 말을 대의명분(大義名分), 큰 집과 높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웅장하고 큰 건물을 이르는 말을 대하고루(大廈高樓), 크게 깨달아서 번뇌와 의혹이 다 없어짐을 이르는 말을 대오각성(大悟覺醒), 장군의 별칭으로 매사에 겸손하고 말 없이 수고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대수장군(大樹將軍), 큰 재목이 작게 쓰이고 있다는 뜻으로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됨을 이르는 말을 대재소용(大材小用),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슬피 욺을 일컫는 말을 대성통곡(大聲痛哭), 몹시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대경실색(大驚失色), 크게 간사한 사람은 그 아첨하는 수단이 매우 교묘하므로 흡사 크게 충성된 사람과 같이 보임을 이르는 말을 대간사충(大姦似忠), 바라던 것이 아주 허사가 되어 크게 실망함을 일컫는 말을 대실소망(大失所望), 매우 밝은 세상을 이르는 말을 대명천지(大明天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을 대도무문(大道無門), 덕이 높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에 초연함 곧 도량이 넓어서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대인대이(大人大耳), 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명정대하여 잔재주를 부리지 않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말을 대지여우(大智如愚) 등에 쓰인다.
▶️ 被(이불 피)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옷의변(衤=衣; 옷)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가리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皮(피)를 합친 글자이다. 잘 때 뒤집어 쓰는 옷의 뜻에서 뒤집어 쓰다, 쓰다, 입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被자는 '씌우다'나 '덮다', '당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被자는 衣(옷 의)자와 皮(가죽 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皮자는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죽'이나 '겉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被자는 이렇게 '겉면'이라는 뜻을 가진 皮자에 衣자를 결합한 것으로 겉에 덮는 옷이라는 의미에서 '이불'을 뜻하게 되었다. 이불은 내 몸을 덮는 침구이기 때문에 '씌우다'나 '덮다'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불을 '被子'라고 한다. 그래서 被(피)는 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동작을 받거나 입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①(옷을)입다 ②당하다 ③씌우다, 덮다 ④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닿다 ⑤더하다,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⑥받다, 받아 가지다 ⑦꽉 차다, 두루 퍼지다 ⑧합치다, 맞다 ⑨주다 ⑩두루 갖추다 ⑪떠맡다 ⑫등지다 ⑬의지(依支)하다 ⑭흐트러뜨리다 ⑮풀어 해치다 ⑯옷 ⑰겉, 거죽(물체의 겉 부분) ⑱이불 ⑲머리꾸미개 ⑳길고 큰 모양 ㉑저, 저것,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불 금(衾)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람이 재물을 잃거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해를 입은 상태를 피해(被害), 살해를 당함을 피살(被殺), 납치를 당하는 것을 피랍(被拉), 민사소송에서 소송을 당한 측의 당사자를 피고(被告), 습격으로 사격을 받음을 피격(被擊), 남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일을 피동(被動), 억지로 빼앗김을 피탈(被奪), 습격을 당함을 피습(被襲), 제소를 당함을 피소(被訴), 선거로 뽑힘을 피선(被選), 덮어 싸고 있는 막을 피막(被膜), 의심을 받음이나 혐의를 받음을 피의(被疑), 저지를 당하여 막힘을 피색(被塞), 강압에 의하여 억지로 참가하게 됨을 피참(被參), 탄핵을 당함을 피탄(被彈), 비방이나 비난을 받음을 피방(被謗), 겉에는 거친 옷을 입고 있으나 속에는 옥을 지녔다는 뜻으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려 함을 이르는 말을 피갈회옥(被褐懷玉),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관을 쓴다는 뜻으로 머리를 손질한 틈이 없을 만큼 바쁨을 이르는 말을 피발영관(被髮纓冠), 수놓은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다는 뜻으로 공명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야행피수(夜行被繡), 덕화가 사람이나 짐승 뿐만 아니라 초목에까지도 미친다는 말을 화피초목(化被草木)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