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구신문 ＜좋은 시를 찾아서 317 하순명 시인

[박윤배]

[좋은 시를 찾아서] 나무의 고요

---

                    하순명 시인

얼음장이 다녀가고 맵찬 바람이 다녀갔다
꼭 와야 할 것이 왔다가 간다
데리고 간 것은 무엇이고 남겨진 것은 무엇

나무의 고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잎이나 꽃이 없다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가지 끝 마디마다 겨우내 봄이 들락거렸다

저것 봐!

매화나무 자줏빛 우듬지 얼음새꽃 가지 끄트머리
남천의 여린 나뭇가지가 홍조를 띠잖아

저 대견한 붉은 기운
미리 갈무리해둔 숨은 꽃눈

그래그래. 나무는 죽은 듯이 자란다.


◇1998년 《문예사조》등단. 국어교육학 석사. 시집 ‘그늘에도 냄새가 있다’, ‘물의 입, 바람의 입’ 등 5권, 교단에세이 ‘연둣빛 소묘’, 논문 ‘辛夕汀詩硏究’. 한국시문학상, 한국문협서울시문학상, 진도명량문학상, 공무원문학상, 허난설헌문학상, 서초문학상.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이사, 중앙대문인회 부회장, 한국공무원문인협회 회장역임.


<해설> 나무를 노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나무는 시인 자신은 아닐까. 말이 없으니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혹독한 겨울을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고 있다. 한 생을 돌아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회상해 보는데, 꼭 와야 할 것은, 왔다가 간다는 것이다. 그 뒤에 데리고 간 것은 무엇이고, 남겨진 것은 무엇? 인지를 시인은 되짚어 본다. 이렇듯 고요 속에 서 있는 나무 즉 자신은, 눈꽃을 갈무리해둔 채 그 얼음새가 다녀간 저 가지 끝의 붉음으로 죽은 듯이 그러나 어느 한순간의 폭발을 위해 오늘이라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가 고요하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게 아닌 것처럼.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