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의 기운이 여전히 창창한 가운데, 그래도 어디선가 살살 가을 내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여름과 가을이 맞물리는 딱 이맘때, 인제 여행길에 오른다. 실내에서 여름 더위를 피하면서, 동시에 가을 감성에 젖어 들기 좋은 특별한 인문학 공간들을 찾아간다.
여름과 가을 사이, 인제로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
시인의 그 시절로 시간 여행, 박인환문학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학창 시절 한 번쯤 읊어봤을 《목마와 숙녀》 첫 시구다. 모더니즘 시인으로 꼽히는 박인환의 대표작 중 하나다.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서른한 살 나이로 요절한 시인 박인환을 기리는 문학관이 그의 고향 인제에 자리한다.
박인환의 고향 인제에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앞에서 만나는 박인환 흉상
2012년 개관한 박인환문학관을 방문하면 야외 정원에 선 박인환 흉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말쑥한 차림새에 한 손에 만년필을 쥐고 넥타이를 휘날리는 모습이 멋스럽다. ‘명동의 댄디 보이’ 혹은 ‘명동 백작’이라 불리던 시인의 명성에 걸맞은 자태다.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를 재현한 전시관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도 재현했다.
각 공간 내부도 관람할 수 있다.
문학관은 박인환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그가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하던 시대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꾸몄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1940~1950년대 서울 명동, 종로 일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시인이 서울에서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와 함께 당대 문인들이 즐겨 찾던 봉선화다방, 동방싸롱, 포엠 같은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전시실을 돌아보는 내내 마치 그 시대 속으로 숨어들어 박인환의 삶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명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대폿집을 재현한 공간
옛 동네를 어슬렁거리듯 1층 전시실을 돌아본 후 2층에 오르면 당대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대폿집이 나타난다. 문인들이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며 문학과 인생을 논하던 이곳에서 박인환은 대중가요로도 유명한 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요절한 시인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대폿집 유리창에 적힌 《세월이 가면》 시구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읽어본다.
박인환문학관 바로 옆에 있는 인제산촌민속박물관
박인환문학관을 방문했다면 바로 옆의 인제산촌민속박물관도 들러볼 일이다. 산촌의 옛 생활상을 전시하는 이곳에서 어르신들은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고, 아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 계절과 절기에 따라 산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입체적인 전시로 설명하고 맷돌, 다듬이질을 직접 체험해보는 코너도 마련했다.
입체적인 전시물과 체험이 흥미를 자극한다.
맷돌과 다듬이질 체험도 할 수 있다.
시문학 감성이 충만해지는, 한국시집박물관
박인환문학관에서 시문학 감성이 샘솟기 시작했다면 한국시집박물관으로 여정을 이어가자. 우리나라 근현대기 시집을 체계적으로 전시해 놓은 박물관은 상설전시관, 작은 도서관, 각종 체험 공간 등으로 이뤄진다.
시집과 시를 주제로 하는 한국시집박물관
연대기별로 한국 근현대시단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 공간은 크지 않아도 내용이 알찬 박물관이다.
상설전시관은 연대기별로 한국 근현대시단의 흐름을 정리해 시대적 변화를 한눈에 파악하기 좋다. 전시 공간이 아주 넓지는 않지만 국민 애송시와 시인 애송시를 읽어보는 코너, 직접 시를 낭송하고 녹음해보는 체험 코너 등 즐길 거리가 알차다.
다양한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시집을 읽으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
1층 로비에 마련된 작은 도서관에서는 전시된 시집을 자유롭게 꺼내 읽으며 쉬어갈 수 있다. 곡선 모양으로 설계된 책장에는 시집이 꽂혀 있고 여백에는 박인환 《목마와 숙녀》, 윤동주 《서시》, 한용운 《님의 침묵》,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같은 명시의 구절이 가득 적혀 있다. 굳이 시집을 꺼내 들기 싫다면 여기 적힌 시구만 읽어도 충분하다.
군데군데 좋은 시구가 적혀 있다.
로비 한쪽에는 빨간 우체통과 엽서가 놓여 있다. 관람객 누구나 자유롭게 손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는 체험 코너로 무료로 운영한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시구가 적힌 엽서가 준비되어 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박인환 《세월이 가면》, 한용운 《떠날 때의 님의 얼굴》, 정지용 《호수 1》, 이렇게 4종 중 선택이 가능하다.
엽서를 써서 보내는 체험 코너
엽서를 우체통에 넣어 보낼 수 있다.
박물관 야외 솔 숲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현대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박인환, 윤동주, 한용운, 김소월, 이육사, 김수영 등 저명한 시인들의 시를 차분히 음미해보자.
솔숲에서 만나는 시비
자연과 조화한 예술 공간, 여초서예관
산책로는 한국시집박물관 옆 여초서예관까지 이어진다. 여초서예관은 우리 시대 최고의 서예가로 칭송받는 여초 김응현을 기리는 서예 전문 박물관으로 그가 인제에서 말년을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에 세워졌다.
서예 대가 여초 김응현을 기리는 전시관
투영 연못과 어우러진 건축물
서예관 입구로 향하는 길, ‘ㅁ’자형 중정과 먼저 마주한다. 이곳의 백미는 투영 연못. 주변 자연과 하늘, 건축물이 연못 수면 위에 그림처럼 담긴다. 건축물 한쪽 벽면을 장식한 여초의 명필도 물 위로 흘러간다. 같은 글씨가 돌과 물이라는 다른 물성을 만나 색다른 느낌을 완성한다. 건축물 곳곳이 예사롭지 않다 싶은데 역시나 건립 당시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여초서예관
여초가 남긴 다양한 서예 작품
작품 전시와 디지털 체험이 어우러진 상설전시관
전시관 관람은 1층 여초생애관에서 시작한다. 한평생을 서예 연구와 서예 저변 확대에 힘쓴 여초에 대해 알아가는 공간으로 그의 손때 묻은 유품이 전시되고 작업실이 재현되어 있다. 2층 상설전시관에서는 여초가 남긴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붓글씨를 써보는 체험 코너도 마련되어 있는데 서예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누구나 가볍게 도전해볼 만하다.
앱을 활용하면 관람이 더 즐거워진다.
여초가 작업실에 등장하는 AR프로그램
여초서예관을 더욱 즐겁게 관람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인제뮤지엄 앱을 활용하는 것. 앱을 설치하면 전시관에서 다양한 ICT(정보통신기술)를 접목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귀여운 캐릭터와 함께 전시관을 돌아보며 미션을 해결해 가는 프로그램, 여초가 작업실에 등장하는 AR 프로그램 등 다양하다. 앱을 이용하면 서예라는 주제를 어렵게 느끼던 아이나 어른들도 흥미를 갖고 전시관을 관람하게 된다. 인제뮤지엄 앱을 설치하면 한국시집박물관에서도 이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한국시집박물관과 여초서예관에서 만나는 귀여운 캐릭터
여행정보
[박인환문학관]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156번길 50
문의 : 033-462-2086
이용시간 : 09:30~18:00 /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휴관
요금 : 무료
홈페이지 : 박인환문학관(http://parkinhwan.or.kr)
[한국시집박물관]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만해로 136
문의 : 033-463-4082
이용시간 :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30 /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휴관
요금 : 무료
홈페이지 : 한국시집박물관(http://한국시집박물관.org)
[여초서예관]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만해로 154
문의 : 033-461-4081
이용시간 : 09:00~18:00 /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휴관
요금 : 무료
홈페이지 : 여초서예관(http://yeochomuseum.kr)
글·사진 김수진(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24년 9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에 사용된 텍스트, 사진, 동영상 등의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기사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