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군 반야사의 명물인 쌍 배롱나무
반야사의 명물 중 하나인 수령 500년이 넘은 배롱나무 두 그루다. 극락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이 배롱나무는 반야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3층석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배롱나무(백일홍)는 조선을 건국할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꽃아 둔 것이 조깨져서 쌍 배롱나무가 생겨났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높이가 8m에 이르는 이 나무는 영동군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반야사 배롱나무
늙었어도 나무가지에 꽃 일만 개쯤
매달 힘은 아직은 있어.
누가 날 보고 늙었다고 하지
젊은 것들은 날보고 늙었다고
뒤담화를 몰래 수근 대지만
한 오백년 살면서도 바람 한번 피우지 않고
꽃피고 질 때를 알지,
한번 꽃피면 백일 동안은 거뜬하게 버티지.
젊은 것들은 꼭 사랑하다가 지치면
배롱나무 아래 찾아와서
세상 떠나가도록 울지만
그래도 나는 외면하지 않아.
더러는 부드러운 입술 같은
푸른 잎을 드리우고
포근하게 위로해 주기도 하지.
눈가에 눈물 대롱대롱 달고 가는
젊은 것들을 보드라운 바람으로
달래주기도 하지,
세상 늙지 않는 건 없어
나처럼 곱게 늙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살다 보면 알아.
이제부터 날 늙은이 취급하지 마.
정성욱 시인의 시 ‘반야사 배롱나무’의 전문이다. 여름철 반야사를 찾는 이들이라면 100여일 동안 핀다는 연붉은 배롱나무를 보고 사색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배롱나무 꽃 선연한 극락전 아미타부처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업장을 녹일 수도 있다. 다시 돌아보면 시인의 마음처럼 지난 시간이 순식간으로 느껴지겠지만 천년을 버티고 서 있는 절집과 절집나무를 보면서 의연함과 의젓함을 배울 수 있으리라. 피는 꽃은 아름답지만 질 때는 처연하다는 것은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는가. 반야사 배롱나무 아래로 가 보시라. 500년 동안 매년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꽃의 이야기를 상기하면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리라.
곱게 늙은, 고찰의 배롱나무 한 쌍
경향신문 기사 입력 : 2024.07.08 20:49 수정 : 2024.07.08 20:53
글 :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여름, 배롱나무의 계절이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해서 주로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었지만, 변화하는 기후 탓에 요즘은 중부지방에서도 너끈히 키우는 나무다. 여름의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하여 ‘백일홍나무’라고 부르다가 변성된 ‘배롱나무’라는 우리말 이름도 살갑다.
주름투성이로 피어나는 꽃송이가 화려하지만, 갈색 바탕에 곱게 번진 얼룩무늬의 매끈한 줄기 또한 아름답다. 그리 높게 자라지 않고 나뭇가지를 수평으로 넓게 펼치는 나무여서 정원 조경수로 적당하다. 특히 꽃이나 줄기 표면에 드러나는 화려함은 한옥 건물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오래전부터 선비의 정원이나 절집 마당에서 많이 심어 키운 이유다.
‘영동 반야사 배롱나무’가 그런 나무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반야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상원이 창건한 고찰로, 이 절집의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배롱나무는 나무 나이가 500년쯤 된다.
이즈음 반야사는 조선 세조의 허가를 받아 중창에 착수했다. 반야사의 불사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이 절집을 찾은 데서 비롯됐다. 이때 한 아이가 세조를 샘으로 이끌어 목욕을 권한 뒤 사자를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아이가 바로 문수보살이었다.
문수보살의 인도로 피부병을 완화할 수 있었던 세조는 자연스레 반야사를 각별히 배려해 중창불사를 허가했다. 1464년의 일이다. ‘영동 반야사 배롱나무’ 한 쌍은 이때의 중수 과정에서 극락전의 풍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심은 나무로 짐작된다.
나무 높이 8m쯤 되는 그리 큰 나무가 아니지만,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제가끔 7~8m씩 펼친 수형이 여간 근사한 게 아니다. 훼손 부위 없이 건강한 배롱나무 바로 앞에는 2003년 국가보물로 지정된 ‘영동 반야사 삼층석탑’이 있다.
오래된 석탑과 곱게 늙은 전각 사이의 빈 공간을 한가득 채우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과 신비로울 만큼 기묘하게 펼친 나뭇가지가 지어내는 조형미는 이 여름에 찾아볼 몇 안 되는 장관이다.
영동군 반야사 안내도
[배롱나무는 삼층석탑 옆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