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나안 여자의 간청(1)
마 15:21-31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15:21-31 / [가나안 여자의 믿음;막7:24-30] 예수께서는 그 지방을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다. 22) 그곳에 사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와서 큰소리로 간청하였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 딸이 귀신 들려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있습니다.' 24)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즉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지 이방인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선생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6) 예수께서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시자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질 않습니까?' 28) 그때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29)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로 되돌아가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30) 군중이 절름발이와 맹인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 앞에 앉혀 놓으니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1) 말 한마디 못하던 벙어리가 말을 하고 팔과 다리를 못쓰던 불구자들이 멀쩡하게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걷고 뛰어다니며 맹인들이 눈을 떠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중은 매우 놀라워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본문은 유대인들에게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두로와 시돈에서 가나안 여인의 귀신 들린 딸과 많은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자존심을 버린 사람(2)
마 15:21-28 / 조상호 목사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가씨와 아줌마의 차이점은 뭘까요?”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아줌마는 봬는 게 없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50%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20%의 응답자가 ”아줌마는 원더우먼처럼 용감하다”고 대답하여 2위를 차지했고, 8%가 지하철에서 아가씨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하든지 눈치를 보다가 조용하게 앉지만, 아줌마는 가방 먼저 던져놓고 “형님 여기 자리 있어”라고 소리치며 일행 자리까지 챙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외에 ‘성희롱하면 아줌마, 성희롱 당하면 아가씨’라고 대답한 사람이 3%, ‘얼굴이 두꺼우면 아줌마, 얼굴이 얇으면 아가씨’라고 대답한 사람이 2%, ‘목소리 크면 아줌마, 작으면 아가씨’라고 대답한 사람이 2%, ‘팔뚝이 굵으면 아줌마, 얇으면 아가씨’라고 대답한 사람이 1%입니다. 햇빛이 비칠 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아가씨, 챙모자를 쓰고 있으면 아줌마, 하이힐 신고도 뛸 수 있으면 아가씨, 운동화 신고도 못 뛰면 아줌마, 등의 답변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조사를 듣고 화가 나면 아줌마, 재미있으면 아가씨라고 한답니다.
여러분, 이 조사가 맞는 것 같습니까? 설문조사에 응한 이 답변들이 대부분 맞는 것이 분명하지만, 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가씨의 팔뚝이 아줌마의 팔뚝보다 더 굵을 수도 있고, 아가씨의 목소리가 아줌마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햇빛이 비칠 때 아가씨가 챙모자를 쓰고 아줌마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설문조사에 나온 결과가 일반적으로는 맞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가씨와 아줌마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준이 있습니다. 간난아이가 배고파서 울어댈 때 보면 그 사람이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간난아이가 배고파서 울 때 아가씨는 어떻게 합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안절부절 합니다. 심하면 아이에게 마구 신경질을 냅니다. 그러나 아줌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공공장소에서도 기꺼이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아줌마는 자기 자녀를 위해 자존심도 기꺼이 내던집니다. 원래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않게 체면과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느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욕탕이 불이 났을 때, 대부분의 여성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불이 난 목욕탕을 뛰어나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성들이 하체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가린 채 뛰어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체면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체면을 떨어뜨리고,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몹시 분노합니다. 심하면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자식을 위해서는 생명처럼 생각하는 그 자존심까지도 버린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다가도, 자녀를 위해서는 너무나도 쉽게 자존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을 때, 한 여인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오늘 본문에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마가복음 7장 26절에 의하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9장 26절에 보면 노아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라고 말하면서 아들 셈을 축복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일곱 족속을 다 몰아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매우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천하게 생각하는 가나안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딸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딸은 ‘흉악하게 귀신들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은 귀신이 들려 매우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종종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데, 아마도 그녀는 남편 없는 과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남편 없이 혼자서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들이 업신여기는 가나안 여자였고, 또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 '소리 질렀다'는 말의 원어 ‘에크라젠’은 미완료 직설법 동사형으로서, 계속에서 반복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 번만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 멀리 서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을 사랑하시고,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즉시로 그녀의 딸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다같이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님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그녀에게 질문하셨습니까? 아니면 ”알았다. 잠깐만 기다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부르짖는 그녀의 소리를 들으시고도 침묵하셨습니다.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 채 침묵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 예수님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그 여자에게 ”좀, 조용히 할 수 없소? 귀 따가와 죽겠네.“라고 꾸짖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 수 없이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그녀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 이 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같이 26절을 보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표현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써,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개들’이라는 말의 원어인 ‘퀴나리아’는 ‘큰 개’가 아닌, 조그마한 ‘강아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큰 개가 아닌 조그마한 강아지로 비유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인 이방인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표현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당시에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들이 먼저 떡을 받아먹어야 할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처럼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일단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증거되고 그 다음 단계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떡이 전달되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에게 떡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단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강아지처럼 취급하며 거절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녀 입장에 서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강아지 취급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는데, 거절당했다면 그것도 강아지 취급을 당하며 거절당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비참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더러워서 강아지 취급한 상대방에게 버럭 화를 내고 심하면 멱살 잡고 싸울지도 모릅니다. 누가 조금만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못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아가씨가 결혼을 하기 위해 중매쟁이에게 부탁을 했답니다. 중매쟁이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에게 사진을 달라고 해서, 서로 사진을 교환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아가씨는 중매쟁이로부터 ‘남자가 자기 사진만 보고 만나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습니다. 자존심이 너무 상한 이 아가씨는 "맞대면도 하지 않고 선을 거절하는 것은 실례"라며 남자의 집을 매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자, 남자의 집에 전화를 건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끊고, 또 전화를 건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끊기를 1년 동안 무려 16,333회나 했다가 나중에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자가 자존심이 상하면 무섭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남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도 눈 하나 깜짝 않다가, 정작 자신의 자존심이 조금만 상해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사를 했는데도 그 인사를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는데도 그 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도 얼마든지 화를 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인 예수님으로부터 강아지 취급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버럭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기 자신이 강아지 취급을 받고 거절당했지만, 그녀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라고 하며 예수님께 또 다시 부탁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자존심 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을 듣고 분노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좋습니다. 개라고 하든지 강아지라고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나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도 좋고 찌꺼기 같은 은혜도 좋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주고 난 찌꺼지라도 좋습니다. 그 찌꺼기 같은 은헤라도 좀 주십시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방해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개 취급을 받고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어 달렸습니다.
■ 대구서현교회의 박순오목사님이 쓰신 글에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력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의 집만 있는 조그만 외딴 섬에 살았습니다. 주민이 라고는 겨우 20명 뿐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갈 때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8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그 섬에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섬이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국민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때부터 6년 동안, 그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와서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이 어머니는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 어머니로 하여금 무려 6년 동안 견디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여인은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굴욕을 참고, 매어 달렸습니다. 개 취급을 당할 만큼 자존심이 짓밟혔는데도, 끝까지 참았습니다. 끝까지 견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매어달리는 그녀의 태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같이 28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그녀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풍랑 때문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신 반면(마8:26), 이 여인에게는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원대로 귀신이 떠나가고 딸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결혼하지 않은 형제들에게 아내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녀에게 어머니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놓쳐서는 알 될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녀에게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어떠한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어떠한 멸시도 다 참아내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개 취급을 받는 등,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주님께서 주실 은혜에 집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은혜만을 바라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떤 굴욕 속에서도 어떠한 모욕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개 취급을 받는 등,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져도 끝까지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에만 집중했던 이 여인의 자세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 주 수요일부터 금요일저녁까지 다섯 번에 걸친 오클랜드 세계선교교회의 수요예배와 4번에 걸친 감람산 기도원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목격했습니다. 특별히 방언 통변과 예언, 그리고 수많은 신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국군통합병원에서 무릎수술을 받고 고생하던 김모전도사님이 곧바로 치료되어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역사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어깨가 아파 고생하던 분이 치료되고, 허리가 아파 오랫동안 고생하던 분이 치료되었다고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집중력이 없어 학업에 큰 어려움을 겪던 형제가 치료되어 집중력이 생겼다고 다음 날 또 집회에 참석하여 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여자 목사님은 2년 전 뇌출혈로 사경을 헤매다가 간신히 생명을 연장 받았지만, 아직도 오른 쪽에 마비증세가 나타나서 고생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정확하게 오른쪽 마비증세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않은 마비증세였는데, 그 마비증세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 나중에 꼭 연락해달라고 부탁하고 왔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 아드님은 비염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코에서 콧소리가 나고, 입 다물고 숨을 쉬는데 어려움을 느꼈고 공부하는데도 방해가 되었습니다. 목요일 저녁에 안수해주고, 하루가 지난 어제 저녁 때 제가 ‘입 다물고 숨을 쉬어보라’고 했더니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숨을 잘 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렐루야! 5번에 걸친 집회 기간 동안 육신적인 질병도 치유되고 내적인 치유도 되어 간증하는 등, 수많은 신유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을 보니까 오히려 기도해주고 안수해준 제가 놀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큰 도전을 받은 것은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예배 때 제가 기도하다가 성령께서 주신 감동으로 “이 자리에 왼쪽 무릎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시죠? 손을 드십시오?”라고 하자, 김모목사님의 사모님이 손을 들고 나왔습니다. 사실 사모님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 교회의 성도님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나와서 기도를 받았는데, 나중에 고생하던 무릎이 아프지 않게 되었다고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목요일 오전 집회 때는 제가 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번 주 금요집회와 다음 주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해주실 성모목사님은 태국과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온 선교사님들 청년들 9명(?)과 함께 약 한 달 동안 성경을 통독하며 <말씀전무학교>를 하고 계셨는데, 이번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클랜드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거의 열 분 가깝게 매 집회 때마다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선교사님들과 목사님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분들에 대해서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떨려서 말씀도 전하지 못하고 기도도 해주는데 망설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면 용감하다고 평상시처럼 말씀을 전하고, 그 후에 기도 받으실 분들 앞으로 나오라고 했더니 몇 분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다 끝나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집회에 참석하신 분들과 인사를 하는데, 아까 제일 먼저 안수를 받으신 분이 오시더니, “저, OOO교회 이 모 목사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과거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귀하게 사역하시고 지금도 우리 뉴질랜드 AOG교단에 속해있는 OOO교회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이모 목사님이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 목사안수도 훨씬 먼저 받으시고 연세도 몇 살이나 위인 목사님으로, 4년 전 타우랑가에서 있었던 뉴질랜드 AOG교단 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모텔에서 묵으면서 식사하고 교제를 했던 목사님이셨습니다. 2년 전 식도암 수술을 받고 나서 침샘이 붙어버리는 바람에, 많이 늙으셔서 제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이신 줄 알았다면 결코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해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자존심을 버리고 까마득한 후배목사에게 안수를 받겠다고 앞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정말 겸손하게 후배에게 기도를 받았던 그 목사님이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목사님 선교사님들도 나오셔서 기도를 받으시겠다고 앞으로 나오신 것을 보고 두 번째 집회 때부터는 목사님들의 머리에 손을 얹지 않고 그냥 기도해드렸지만, 그 분들을 뵈면서 저절로 저의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제가 기도원집회의 강사로 다녀왔지만, 그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과 사모님들을 보면서 오히려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후배목사에게 기도 받겠다고 겸손함으로 무릎을 끊은 선배 목사님들과 연세 드신 선교사님들을 통해 제 마음 가운데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제가 그 분들의 사역과 삶의 형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목사로 선교사로 사모로 오랫동안 쓰시고 있는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오직 주님의 은혜 받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세계선교의 귀한 일꾼들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말로 원죄의 뿌리다.”라고 단언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생명처럼 여기고 있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슬럼프에 빠져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었다고,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분을 품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여 고민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외모 때문에, 학벌 때문에, 신분의 문제 때문에, 인종차별 때문에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고 고민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엘리사 선생의 말을 무시하고 아람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버리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엘리사선생의 말에 순종했을 때, 문둥병이 낫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도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에만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여자여 크도다”라는 칭찬과 함께 귀신들려 고생하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위한 것이라면,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이 어떻습니까? 자존심이 깎임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저도 교회가 살아날 수 있다면, 목사인 저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짓밟혀도 개의치 않습니다. 자존심 자체만 가지고는 10불도 벌 수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존심이 깎임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 수 있다면, 그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절과 무시를 당하고 냉대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딸을 살렸던 이 여인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존심의 벽을 허물고 요담강에 일곱씩이나 몸을 담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던 나아만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마 15:21-28 / 이성우목사
죽을 때가 가까워 온 어떤 어르신이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이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길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전도자를 보았습니다. 그 길로 어르신은 근처에 있는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교회에서는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장례식에 참석한 한 젊은이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젊은이, 예수는 어떤 분이시오?” 그러자 그 젊은이는 “할아버지, 지금은 그런 말씀하실 때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라고 말하며 어르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르신은 허탈한 마음으로 교회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전히 고민을 안고 있던 어르신에게 이번에는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와서 교회에서 경로잔치를 하니 가자고 청했습니다. 어르신은 고마운 마음으로 얼른 따라 나섰습니다. 교회에 가니 맛있는 음식이 많이 차려져 있었고, 어린아이들이 재롱을 피우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음식을 나르는 여자 집사님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 집사는 “할아버지, 지금은 바쁩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나 많이 드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역시 허탈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르신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 보구만. 그 전도자를 만나면 예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해야겠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면서 그 예수님을 믿는다면 지금보다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이고, 그 신앙생활도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그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오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는데, 많은 오해들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생각하기 보다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 4대 성인, 즉 예수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중에 한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나머지 다른 성인들을 통한 구원의 길이 있으며, 그 길이 예수님을 믿는 길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오해 중에 오해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도 분명히 알지 못하고 행하면 우리 인생살이에 크고 작은 피해를 주기 마련이지만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적인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인생살이에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의외로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적당히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적당히 알고 있고, 적당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고, 믿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분명한 방법이 우리 손에 들려주신 성경이며,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방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여러 가지 내용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주된 방법들이 우선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방법과 혹은 하나님께서 하셨던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리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창세기의 내용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무대에 오셔서 활동하셨던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기록들도 사실은 알고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리시기 위한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들, 곧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전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방법을 아주 많이 사용하신 사실이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분량의 예언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방법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는데,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하시는 방법이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직접 말씀하셨던 말씀(어록)들과 행적에 관한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로 사용된 방법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체험과 그들의 간접적인 간증, 그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활동과 그 과정 가운데서 이루어졌던 일들을 기록하는 방식을 통해서 알리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고 보이시는 가장 큰 이유와 목적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심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가장 중요한 대 전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기 전에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방법밖에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는데, 문제는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인해서 그 행복을 빼앗겨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어떤 질병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어떤 모양이라도 마음의 병, 곧 정신적인 질병이 있으면 역시 그런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4월 4일)이 우리 사회가 정한 ‘정신건강의 날’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만큼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꼭 육체의 질병이나 마음의 질병 때문만은 아니며, 더 무서운 질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의 질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영혼의 질병이 곧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라고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이 영혼의 질병을 치료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한 삶,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병원이나 의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고통을 느끼게 만들고 심하게 되면 우리 육체의 죽음을 가져오게 되며, 마음의 질병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만 우리의 행복한 삶을 해치게 되지만 영혼의 질병은 육체의 질병이나 마음의 질병과는 다르게 이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을 해치는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의 삶의 행복마저도 영원히 빼앗아 가게 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며, 이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사람들이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믿더라도 간절함이 없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 믿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5장 21-28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에워싸고 점차 좁혀오고, 거칠어져 가고 있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핍박을 피해서 그동안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 지역을 벗어나서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인들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을 거쳐서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 지역으로 내려가시는 과정 중에 행하셨던 또 하나의 기적 사건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초기에는 유대지역을 무대로 활동을 하시다가 그 이후에는 갈릴리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으시면 서부터 그 사역의 범위와 내용도 훨씬 더 왕성해지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사역이 왕성해지면 왕성해질수록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과 갈등도 더욱 깊어져갔고, 그들의 박해와 핍박도 더욱 거세져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의 많은 시간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하심으로써 구원의 복음을 우선적으로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이 먼저 구원받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인데, 실상은 예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자기들을 구원할 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배척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세가 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은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세주, 곧 인간의 육체적인 질병과 마음의 질병, 그리고 영적인 질병을 치료하심으로써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시기 위한 주된 방법이셨습니다.
자기 고향 유대 땅에서, 자기 동족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하시고 배척과 함께 핍박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뜻밖에 이방 사람들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역에 내려가시면서 이제까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접하게 되셨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 들어 가시자마자 한 가나안 여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예수님께 달려 나와서 아주 애절하고 큰 소리로 절규하듯이 예수님을 부르면서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더 놀랍고 중요한 것은 이 이방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고 있었으며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 곧 온 인류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으로 예언되었던 다윗의 자손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여인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줄도 잘 알고 있었음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자기 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애끓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개처럼 취급하면서 무시했는데,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 남자인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간절하게 매달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분명하고 컸는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이 여인은 예수님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의 이런 분명한 믿음은 예수님의 무관심한 듯한 행동과 주변 사람들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께 매어달리면서 부르짖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무시와 냉대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발목을 붙잡고 울부짖으며 긴급하게, 정말 간절하게 도움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여인의 분명한 고백과 믿음은 넘어서기 힘들어 보이는 장애물을 넘어서서 결국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힘입게 됨으로써 자기 딸의 질병이 고침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칭찬까지 겸하여 듣게 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실망하지 않는 믿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런 이 여인의 믿음은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바른 신앙 고백과 바른 믿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해답이요 해결책임을 믿고 있었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침묵과 냉대하시는 듯한 모습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귀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고백과 믿음, 그리고 열정이 분명한 것인가를 확인하시고자 하시며,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며 주어지는 결과를 더 귀하게 여기도록 하시기 위한 깊은 뜻이 숨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며 결국에는 선한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며 치료하시고, 해결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긍휼히 여겨주시고,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분이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들려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치료자요 해결자요 구원자가 되심을 믿으시고 어떤 질병이나 인생의 어떤 문제라도 능히 해결하시고 치료하심으로써 완전하게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행복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가나안 여인처럼 분명한 신앙의 고백과 믿음, 그리고 간절한 소망과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심으로써 응답과 함께 칭찬을 겸하여 받으실 뿐만 아니라 그 치료의 하나님을 주변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부지런히 증거하며 살아가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믿음
마 15:21-28 / 양인순목사
■ 실패와 좌절 속에 방황하던 한 청년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청년에게 목사님이 묻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청년은 말하기를 “출판사에 만화 원고를 들고 찾아가서 취직을 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만 당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나봅니다.” 측은하게 여긴 목사님은 일자리를 다시 찾을 때까지 교회 창고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용기를 가지십시오.” 목사님은 진심으로 청년을 사랑으로 격려했습니다. 허름한 창고는 새로운 꿈을 꾸며, 그림을 그리게 하는 그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머물고 있었던 창고에는 쥐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창고 안으로 들어온 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쥐를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쥐를 그대로가 아닌 아름다운 쥐로 새롭게 그렸습니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게 그려진 쥐 그림이 결국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이 쥐 그림이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미키 마우스입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바로 월트 디즈니입니다. 미국에 가면 디즈니랜드라는 세계적인 놀이공원이 있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졌던 청년이 포기하지 않고 꿈을 꾸며 나아갈 때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월트 디즈니로 하여금 실의와 좌절을 극복하고 성공자로 만든 것은 바로 목사님이 가르쳐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은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리에는 어디에나 장애물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를 만나기도 하며, 건강의 위기를 만나기도 하며, 사업의 위기를 만나기도 하며, 가정의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물을 훌륭하게 뛰어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장애물 앞에서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주저앉아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 50년 동안 세계 최대의 교회를 목회하시고 은퇴한 조용기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내가 50년 동안 사역하면서 내게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것은 장애물 경기와도 같았습니다. 죄의 유혹, 세상의 유혹, 질병, 고통, 시련, 가난, 좌절과 같은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장애물들을 내가 뛰어넘지 않았더라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것을 뛰어넘지 않았더라면 오늘 나는 이렇게 명예스러운 은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순간순간 맞이하는 위기의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장애물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당시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거하는 가나안 여인, 혹은 다른 번역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소개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학적으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동안 유대지방을 떠나신 적인 한 번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이라는 장벽을 넘어 이방 지역으로 복음의 문을 여는 시발점이 됩니다.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영역에 속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가나안 족속의 피가 흐르는 이방여인입니다. 요세프스의 글에 의하면 두로 지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가장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시돈은 아합 왕 때 바알 신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만든 악한 여인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장애물이 놓여 있는 상황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한창 예쁘게 자라야 할 딸이 심각한 귀신이 들려 고통당합니다. 얼마나 힘들고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그런데 귀신들린 딸이 고침 받는 과정 속에 또한 많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주님께 매달리며 간청합니다. 그 결과 이 여인은 놀라운 칭찬과 함께 축복을 받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아멘!
어떻게 해서 이 무명의 이방 여인이 장애물을 극복하고 최고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을까요?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먼저 살펴봅니다.
첫째로, 침묵의 장애물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그곳엔 언제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여인은 딸을 고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귀가 번쩍 뜨이는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을 만나면 귀신이 떠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최초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에 오십니다. 이 시간을 얼마나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을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나약한 여인의 몸으로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주님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일입니다. 여기서 ‘소리 질렀다’는 ‘에크라젠’이란 단어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이 외침은 아마도 그 여인이 지금까지 말했던 소리 가운데 가장 크지 않았을까요? 딸이 귀신들린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미 이 여인은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바로 그분이 바로 메시야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시고, 구세주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을 보면, 주님 앞에 내 모든 문제를 아뢰면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의외의 장애물이 부딪힙니다. 그토록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주님께 자신의 문제를 고백했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한 마디 위로의 말씀이라도 들려주셨더라면 얼마나 힘을 얻었을까요? 지금까지 예수님은 언제나 불쌍한 자, 병든 자들의 부르짖음에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부르짖기 전에 미리 찾아가셔서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불쌍한 이방 여인의 외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십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마저도 귀찮다는 듯이 너무나 몰인정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부딪혔다면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까요? 대부분 낙심하거나 원망하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외침에 대하여 침묵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신학자 카르(Karr)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가진 작은 믿음의 씨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주님은 그 여인의 외침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을 더욱 크게 자라게 하시기 위한 방법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종종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새벽을 깨우며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목놓아 울어도 침묵만 계속될 뿐입니다. 이 때 우리는 좌절하거나 포기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더 놀라운 축복을 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는 기도의 응답보다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는 믿음의 그릇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무리 복을 주셔도 내 믿음이 그것을 관리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것은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그릇을 키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시험과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신앙생활 가운데 아직 응답되지 않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 나의 작은 믿음의 씨앗을 더욱 크게 키워 가시는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침묵은 거절이나 무관심이 아닌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의 준비과정이요 주님의 응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냉담의 장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한 외침에 대해서 침묵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아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완전히 타오르는 불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이 말씀은 ‘너 같은 이방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내가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쯤 되면 완전히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오히려 주님께로 나아가 엎드립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제는 소리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엎드려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다가와 주님 앞에 애원합니다.
제자들의 냉대도 예수님의 침묵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거절과 냉대도 이 여인을 물러서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심이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불퇴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우리의 기도는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응답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하늘의 문이 열릴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부족이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드리는데, 이 아프리카 부족이 기우제를 드리면 반드시 비가 온답니다. 그 비결이 뭔지 아세요?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열심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 모욕의 장애물입니다.
예수님의 침묵과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계속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주님의 반응은 얼음처럼 더욱 싸늘합니다.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 하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은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음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라는 얘기는 ‘음란한 족속’ 이란 뜻입니다.
또한 개는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먹은 것을 토하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음으로 개처럼 더러운 죄를 짓는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개는 싸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화평을 모르는 족속이라고 해서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아무리 당시 상황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여겼다할지라도 딸의 아픔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 부르짖는 여인을 개와 같이 취급하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여인의 자존심마저 무너뜨립니다. 인간적인 모욕을 당한 상황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바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쯤 되면 예수님을 욕하거나 저주하면서 물러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존심도, 인간적인 모욕도 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꺾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의 끈질긴 신앙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을 앞두고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만 더 참고 기도하면 되는데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과 수치심 때문에 그만 물러섭니다.
지금 어떤 상황이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침묵과 냉대와 인간적인 모욕을 받는 상황이라도 한 번만 더 주님 앞으로 나가면 은혜의 문이 열립니다. 회복과 치유,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개 취급을 하는 예수님 앞에 이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인가요? “주님 저를 아무리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개라도 주인의 밥상 곁에 앉아 있으면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려 주십시오.”
이 여인의 놀라운 신앙을 보여주는 클라이막스입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부스러기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 부스러기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부스러기는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지 개가 돼서라도 주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항변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개 취급을 당해야 하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할 뿐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 말씀하시면 그대로 될 줄로 믿고 순종합니다. 그 결과 메시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축복의 여인이 됩니다.
Bill Johnson이란 사람이 쓴 책 가운데 「하늘이 땅을 침노할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늘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하늘의 축복이 땅에 침노하는, 땅에 쏟아지는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해져서 자기 생각, 자기 상식, 자기 경험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주판알을 두드려 보고 거절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될 일만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계획을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판단으로 다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내 인생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순간, 주님의 전능한 손길이 나타나는 순간, 그 인생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일만 한다면 그건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주인공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불가능하지만 그분이 함께 할 때 우리는 불가능을 돌파하는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아이디어들이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번쩍 번쩍 떠오르게 됩니다. 내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 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내 생각과 경험과 이성의 판단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아도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믿음은 선포된 말씀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논쟁하지 않습니다. 내 경험과 이성과 자존심에 맞지 않아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옳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긍정하는 태도가 바로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신앙이요 믿음의 태도입니다.
둘째, 부스러기는 포기하지 않는 열심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열심이 특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침묵과 냉담과 모욕을 주셨지만 물러서지 않습니다. 열심은 인생의 엔진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동차라 할지라도 엔진에 불이 붙지 않으면 꼼짝하지 않습니다. 열심의 불이 꺼진 사람은 어떤 역사도 이루지 못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바로 “열정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Howard Schultz는 10년 만에 스타벅스를 세계 최고의 커피회사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성공비결은 바로 열정입니다. "나는 모든 커피 한 잔 한 잔에 나의 마음을 쏟아 붓는다. 만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혹은 어떤 가치 있는 기업에 마음을 쏟아 붓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커피 한잔에 자신의 열정을 불어 넣었을 때 그는 세계적인 커피회사 스타벅스를 만들었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내게는 오직 한 가지 정열이 있다. 그 정열은 주님, 주님, 한 분 뿐이다." 그의 열정은 결국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교 조직체의 하나인 모라비안 교회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 상'을 제정한 존 템플턴은 "열정, 행복한 변화로 이끄는 내 삶의 기관차"라는 책에서 "열정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의 열정을 주위로 전염시켜라. 위대한 열정의 씨앗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당신의 삶을 열정으로 변화시켜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있습니다. 이분은 평안남도 맹상군이라는 곳에서 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양에서 주로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버님이 맹상군 어느 면의 면장이셨는데 누가 아버지를 꼬드겼습니다. “면장 그만두고 광산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그래서 귀가 얇은 아버지가 면장을 그만두고 광산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습니다. 온 집안이 깡통을 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자녀들을 키웁니다. 김동길 교수의 누나가 김옥길 총장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데 왜 그 딸을 그냥 두냐고? 공장에 보내서 돈을 좀 벌어오게 하던지, 기생 일을 시키지 왜 그냥 두냐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누나를 공장에 보내는 대신, 기생집에 보내는 대신 이화여전에 보냈습니다. 이화여전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에 이화여대 총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열심히 달려가면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주님이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 있습니까?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지요? 밤을 새워도 재미있는 것,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누가 박수를 쳐주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비전이 여러분에게 있는지요? 내게 주신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자는 환경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파도가 밀려올수록 더 담대해집니다. 더욱 주님을 사모하며 나갑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과 위로와 평강이 있습니다.
셋째, 부스러기는 자족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이방 여인은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라면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개로 취급해도 주님이 내게 필요해서 주시는 것이라면 족하다는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부스러기 같은 주님의 관심과 긍휼하심만 있어도 딸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야외로 나가서 잔디밭에서 식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밥풀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흘릴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개미들이 새까맣게 몰려듭니다. 그리고 열심히 밥풀과 과자 부스러기를 나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개미들에게는 한철 양식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부스러기 믿음은 바로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부스러기같은 주님의 은혜만 있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민족 위에 부스러기 은혜만 베푸셔도 이 백성을 새로워집니다. 이 성지교회 위에 주님께서 부스러기 은혜만 베푸셔도 우리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님께서 부스러기 은혜만 베푸셔도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믿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거창한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냉담함과 모욕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주님 앞에 필요한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며 나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놀라운 칭찬과 축복이 임합니다.
28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아멘!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는데 ‘크다’라는 말은 “메가스(megas)”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있는데 “메가톤(megaton)”이라는 말입니다. 크다는 것에도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는데 “메가스”라는 말은 “가장 큰 것, 위대하게 큰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분명 “메가톤급 믿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 그 속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받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믿음의 태도로 하늘의 문을 열고, 날마다 응답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큰 믿음
마 15:21-28 / 이수영목사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과 그의 이적 행하시는 능력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뿐만 아니라 인근 모든 지역으로 퍼져감에 따라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높아가는 존경심과 신뢰감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갈릴리로 급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공격을 통렬하게 반박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얼마 동안 갈릴리를 떠나 북쪽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거기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쉬려고 하셨던 예수님과 그 일행을 한 가나안 여인이 알아보고 좇아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인접해 살거나 섞여 살며 가장 오래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이방민족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이 이방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 그리고 그 이방여인의 언행을 잘 살피는 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봅니다. 어떤 이방여인에게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22). 예수님을 알아본 그 여인은 그 딸아이가 고침 받기를 원하여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소리지르며 좇아오는 그 여인에게 처음에는 아예 듣지 못하신 듯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소리지르며 좇아오기를 그치지 않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가시고 짜증나게 하는 그 여인의 간구를 예수님께서 들어주셔서 그 여인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게 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23).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24)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여전히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간청했습니다(25).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번에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 그 여인과 그의 딸을 개에다 견주신 예수님의 이 대답은 아주 매정한 말씀일 뿐 아니라 그 여인에게는 심한 멸시로 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27)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셨으며 "네 소원대로 되리라" 약속하셨고 그 때에 그의 딸이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그 여인의 무엇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그녀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2, 25, 27절에 보면 그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그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2절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을 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약속된 메시아를 일컫는 유대인 특유의 표현입니다. 즉 그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그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신적 치유와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이로 믿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근본적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것이라고 거짓 비난을 한 것과 매우 대조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 이방여인에게서 주목할 것은 그녀의 끈질긴 간구입니다. 그녀는 소리 지르며 간구하는 자신에게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찮아하며 예수님께 "제발 저 여자 좀 어떻게 해주시죠"라고 간청할 정도로 계속 뒤따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달려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그녀를 개에 견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셨는데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고집과 오기에서 나오는 언행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저 그녀의 그 고집에 감동되셨거나 그만 그 오기에 굴복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구원과 치유는 오직 그에게만 있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예수님께 매달린 것이라고 봅니다. 그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한 번 예수님께 접근해 본 것이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냉대와 모욕적 언사를 받을 때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떠나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그녀에게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기대하고 간구하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그녀의 인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며 그녀와 그녀의 딸을 개에다 견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물러나지 않은 그녀의 행동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겠습니까? 무엇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딸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욕도 참겠다는 그 갸륵한 모성애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모멸감을 느낄 줄 모르는 노예근성같은 무지함이나 무감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개와도 같은 존재, 아니 그 이하의 존재로도 인정할 줄 아는 죄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이라고 봅니다. 감히 구원과 치유를 요구할 권리도 자격도 없는, 그저 주인의 은혜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자신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인이 은혜와 자비로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주면 감사히 받아먹고 안 줘도 할 말이 없다고 여기는 순종적 믿음, 그러나 우리 주인은 그렇게 무정한 주인이 아니고 반드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믿는 순박한 믿음,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여인에게서 그러한 믿음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 부르신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교만하고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불신앙에 확연하게 대비되는 이방여인의 겸허한 믿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정통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칭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의 정면대결을 벌이며 그들에게서 참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이방여인에게서 큰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의 냉담한 태도를 거두시고 호의적으로 돌아서신 것은 그녀에게서 이러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나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그 이방여인을 냉냉하게 대하셨으며 나중에는 태도를 바꾸셨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또 "예수님께서 변덕을 부리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미처 이 여인의 믿음을 알아보지 못하셨던 것인가? 정말 예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오셨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변덕쟁이로 만들 수 없습니다. 또 사람과 그 속 생각이나 믿음을 단번에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추호의 의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오신 이가 아니시고 만인의 구주로 오셨음은 그의 출생에서부터 그의 가르침과 사역 자체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방여인을 향했던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태도는 교육적인 것이었다고 봅니다. 즉 그것은 그녀에게 있는 믿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참 믿음의 한 예를 들어 보이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 그 이방여인에게는 그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확실하게 드러낼 기회를 주셨으며,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에게는 그 여인을 통해 참되고 큰 믿음, 순박하고 겸손하며 순종적인 믿음의 한 본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일 직전에 갈릴리에서 맞부딪쳤던 유대인이며 정통신앙인으로 자처하는 교만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믿음과 대비시켜서 바르고 큰 믿음이 무엇인지를 한 이방여인을 통하여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믿음에 관한 소중한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큰 믿음이란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아는 바른 이해,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의 능력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간절히 매달림, 하나님의 구원을 바랠 자격이 자신에게 없음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밖에 의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죄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개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믿음이 있는 곳에 치유와 해결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무정하게 여겨질 때에도, 주님의 응답이 늦어지는 듯 보일 때에도, 우리가 멸시를 당하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 어디에서나 그 누구에게서나 국적과 신분에 상관 없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남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때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믿음을 보다 분명히 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여인에게 냉담하신 듯 뜸들이신 이유를 거기서 찾았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응답이 더딜 때에는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의 믿음을 보다 더 분명히 하기를 주님께서 기다리신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 속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의 무응답 속에서 오히려 응답을 발견하는 믿음의 귀와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큰 믿음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야망을 품고 그것을 이루어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이란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갖고도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실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큰 일을 벌이고 대단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닙니다. 몇 대에 걸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큰 믿음이 있는 것 아닙니다. 새문안교회같이 오래 되고 전통 있는 교회의 교인이라고 믿음이 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 오직 그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항상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겸손과 순종,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이것이 곧 큰 믿음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치유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끈기이다
마 15:21-39 / 최영기목사
우리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더 좋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들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마태 복음 8장에 등장하는 백부장이었고 다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입니다. 두 사람 다 신기하게도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갈릴리 호수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해변 도시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로부터 잠시 피신하기 위하여 유대인 지역을 벗어나 이 지역으로 오신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28절).
8장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종을 고쳐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집으로 가려고 했을 때에 가실 필요 없이 명령만 하시면 병이 떠날 것이라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을 나타내어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째서 칭찬을 들었을까요?
Ⅰ. 주님은 끈기를 사랑하신다
이 여인의 끈기 때문이었습니다. 님이 침묵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포기하기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끈기를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도 끈기 즉 인내가 들어있습니다(갈 5:22). 사도 바울이 사랑을 열거할 때에도 끈기 즉 오래 참고를 가장 먼저 들고 있습니다(고전 13:4). 우리 주위에는 끈기 있게 찬양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실 것입니다. 유아부, 유치 유년부 사역은 1년쯤 하다가 포기하는데 어떤 분들은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사역을 합니다. 이런 분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실 것입니다. 부흥하지 않는 목장을 끈기 있게 섬기는 목자 목녀들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서울 침례 교회 헌금과 출석 계수 위원들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역인데 예배 후에 늦게까지 남아 꾸준히 섬기는 분들을 보면 내 눈에도 예쁘게 보이는데 하나님 눈에 얼마나 예쁘게 보일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끈기 있게 간구하여서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딸이 치유되는 복도 누렸습니다.
Ⅱ. 하나님은 침묵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끈기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끈기 있게 기도하기가 힘이 듭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거나 거절하셨다고 생각될 때에 이 여인처럼 끈기 있게 매달리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그래서 소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이 왜 침묵하거나 우리의 소원을 거절하시는지를 알아야합니다.
1. 욕심으로 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거나 우리의 소원을 거절하는 것은 우리가 욕심으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약 4:2-3).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전달합니다. 그때에 구하고도 받지 못한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쾌락을 위해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꼬리를 붙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구할 때에는 응답을 거절하시기도 하십니다. 필요 이상의 것은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마치 바닷물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지는 바닷물처럼 욕심을 채워지시면 더 큰 욕심이 생기고 더 불만족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히13:5). 히브리 기자는 여기에서 금욕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하고 즐기는 법을 배웠을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놓고 채워주시되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2.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왜 침묵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은 세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행9: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으십니다. 이 지역을 벗어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사역을 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사역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요청에 대해서 침묵하셨고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Ⅲ.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꾼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꿉니다. 여인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처음에는 거절하셨지만 마침내는 계획을 바꾸시고 딸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지옥으로 갈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고 천국 시민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내릴 벌을 안 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알아야합니다. 많은 분들은 운명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_위로 하나님의 계획이 바뀔리 없다는 숙명론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을 좇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운명을 개척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삶 수강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출장 때문에 끝내지를 못할지 모른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저는 말합니다. "출장 가지 않도록 기도하세요. 우리는 운명을 만들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졸업을 못할 것 같다던 사람이 졸업을 할 뿐만이 아니라 개근으로 졸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무조건 떼만 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한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예수님의 성품에 호소했습니다. 공평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아이들 먹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했을 때에 이 말에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에게 먹여야할 빵을 기르는 개에게 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기르는 개도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자기 몫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주님의 공평함네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에 호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고 모세를 조상으로 하여서 새로운 민족을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민 14:12). 이때에 모세가 탄원하여서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다(민 14:19-20). 이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의 백성들이 멸망하도록 두지 않았겠느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직장 생활할 때에 저는 직장 생활을 사역의 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가능하면 성경에 있는 대로 상사는 예수님처럼 섬기고 동료들은 경쟁 상대자보다 도와주어야 할 사람, 내 밑에 일하는 사람은 돌보아주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그대로 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의도를 갖고 직장 생활을 한 것입니다. 또 기회가 있으면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에 다니면서 제가 일하던 연구실에 연계가 되어서 일하던 한국인 한 사람이 어머님이 100일 불공을 드려 낳았다고 하는데 교회에 나오게 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에 저는 직장 생활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크리스천인 것은 이제 누구나 압니다. 제가 직장 생활에 부진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결심하고 영광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학이 제 적성에 맞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연구 생활을 하게 하셨고 9년 동안 25개의 연구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능력에 호소한다
우리가 끈기 있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잃은 친구를 위하여 말을 넣을 때에도 친구를 취직시켜줄만한 능력이 있는 사장이나 회장에게는 끈질기기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별 능력이 없는 계장이나 과장이라면 한번 묻고 자리가 없다면 포기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하여서 소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29절에는 예수님이 이방인을 위해 병을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마태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모든 질병을 고치셨고 즉시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암을 고치는 것이다 감기를 고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100불과 1불에 큰 차이가 있지만 백만 장자에게는 1불이나 100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끈기 있게 기도하려면, 특별히 치유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을 기억하여야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유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의 예가 머리에 떠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여야할 것은 어떤 치유도 잠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는 누구나 다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도 결국을 몇 년 더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치유도 생명의 연장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도 하나님에게 호소하여서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5년 생명의 연장을 받았을 뿐입니다(왕하 20:5-6).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고 다 치유 받고 다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음을 없앨 때까지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늙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생명을 연장 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끈기 있게 기도하지 못하여 그러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어떠한 병도 고칠 수 있으시고 우리의 끈기 있는 기도가 치유를 가져오고 생명의 연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기도하여야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한다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끈질기기 졸라보지만 쌀쌀한 사람에게는 한번 부탁하고 끝입니다.
예수님은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15:32-39) 떡 7 덩어리로 4000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부각되는 것은 예수님의 동정심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흘 동안을 쫓아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갖고 왔던 음식을 다 먹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돌려보낼 때에 중간에 쓰러질 것을 염려하셔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이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은 다시 먹일 수 없다고 답변을 합니다. 앞서 5병 2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라면 이런 대답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제자들도 이러한 창조의 기적은 징표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기 위하여 보여주신 것이지 다반사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대답을 했던 것은 제자들도 예수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요단강 동편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에게 같은 증표를 나타내실 것을 기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영적인 것과 우리의 신앙 생활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방 군중들의 허기를 걱정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생계와 자녀 교육과 은퇴를 염려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끈질기게 필요를 아뢰어서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