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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사도 14,19-28; 요한 14,27-31 / 2022.5.17.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2026.5.5.
소리도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철(鐵)과 성(性) 그리고 영(靈)입니다. 철은 문명을 지탱하는 물질 재료요, 성은 생명을 탄생시키고자 주어지는 자연의 축복이며, 영은 문명과 인류에게 평화를 실현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관철시키되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철저하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 이것이 오늘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떠오른 묵상 주제입니다. 이에 대해 알맞는 비유가 철입니다.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한때 방송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광고 문구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철강기업이 자사 제품을 알리느라고 만든 것인데, 당시 들을 때에도 꽤 세련된 표현이었습니다. 아무리 전자산업과 인공지능 로보트가 인기를 끌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해도 지금 세상은 철기 시대임을 깨우쳐주는 말이었습니다.
철을 비롯한 광물자원은 땅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자원들은 비슷한 성분끼리 몰려서 묻혀 있습니다. 철광석은 물론 금, 은, 동, 아연 같은 일반 금속들이나 아주 귀한 다이아몬드나 석유와 가스까지 다 그렇습니다. 지구의 지질학이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관찰하고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구가 생성될 무렵에 우주를 떠돌던 작은 별들이 무수히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지구의 중력에 끌려와서 부딪혔는데, 그때마다 지구의 크기도 불어났지만 충돌 시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지구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광물들도 비슷한 밀도를 지닌 금속 성분끼리 뭉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류는 철이라는 금속을 발견한 이래,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일하는 건물, 강을 건너게 해 주는 교량은 물론이고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교량, 바다 속에 길을 내어 대륙과 대륙을 이어주는 해저터널 등 지금의 인류 물질문명을 지탱해 주는 구조물들에 모조리 철 성분을 넣어서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동차, 선박, 비행기나 우주선 등 모든 이동수단도 기본 구조는 철로 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통신수단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흔히 쓰는 물건들이나 전투를 위한 살상무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철기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었을 무렵에, 철을 가공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인류 문명에서 앞서 나갔습니다. 우리 민족은 초창기부터 철을 잘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철기 문명을 전해 주었습니다.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오늘날 첨단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고도의 철제 유물입니다. 이 종이 만들어진 합금 비율이나 음향 주파수 등이 하도 오묘해서 현대 금속공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이룩한 철기 문명의 수준이 그저 지성을 활용한 기술만이 아니라 영성적인 처원에서 정성을 기울였음을 알게 해 주는 흔적입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철 성분이 들어간 도구들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지만, 겉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건을 겉으로 감싼다고 하더라도 도색을 해서 쓰지 철 성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경우는 없습니다. 철 성분이 공기 중이나 물 속에 들어 있는 산소와 만나면 산화되어 수명이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현 시기 인류 문명의 도구적 중추인 철은 진리의 탁월한 비유 소재가 되어 줍니다. 인류가 물질문명의 세상을 소리 없이 조용히 철을 통해 움직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인생과 역사를 소리 없이 조용히 진리를 통해 움직이십니다. 각 분야에서 다양한 모습과 흐름으로 나타나는 이 진리를 무시하고서는 모처럼 이룩한 성과가 다 허물어집니다. 진리는 정신 문명의 철과 같습니다.
오늘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묵상하게 되는 이치는 생명과 성의 진리입니다. 어린이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이룬 가정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이 생기게 된 유래는 1920년대에 소파 방정환 선생과 천도교 소년회 운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흔히 ‘애들’, ‘어린 놈’ 처럼 낮추어 부르는 분위기가 흔했는데, 소파 선생은 아이들을 존중하자는 뜻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린이날이 처음으로 정해진 때는 1923년 5월 1일이었습니다. 소파 선생이 중심이 된 색동회가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 권리를 알리자는 운동을 벌이면서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습니다. 나중에 날짜가 바뀌어 5월 5일이 되었고 1975년부터는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따스한 봄기운이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만끽하게 하는 5월은 어린이날 뿐만 아니라 어버이날도 지내는 가정의 달인데, 생명을 연상시키는 이런 의미와 생동하는 봄의 기후가 잘 어울립니다. 사실은 이 날 하루만이 아니라 어린이라는 존재를 존중해야 하는 근본 이치를 묵상해야 하는데, 그것은 어린이라는 생명을 태어나게 한 힘은 성의 질서라는 진리하는 것입니다. 성 기능이 아니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고, 성의 질서가 아니면 후세를 태어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철(鐵)이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듯이, 성(性)도 소리없이 인생을 움직입니다. 철이 세상을 움직이듯이, 성은 인생을 움직입니다. 사람의 성은 일생 동안 변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남성으로, 여자는 여성으로 인간으로서 성숙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사도 바오로가 통찰한 대로, 인간의 성은 “질그릇 속에 지닌 보물”(2코린 4,7)이라는 점입니다. 철기 시대를 발달시켜온 인간의 지성과 영성의 수준이, 아직까지는 성의 본능과 질서를 온전히 통제하기에 몹시 버거운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물질과 돈에 대한 탐욕과 더불어, 죄가 가장 많이 저질러지는 자리가 바로 성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굳이 외면하려는 사람들은 성의 쾌락을 탐닉하려 들고, 성의 자유를 만끽하려 들지만 그렇게 남용되는 성의 질서로는 인생과 세상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타락과 무질서와 혼돈만이 남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성과 영성이 허용하는 한 보수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성을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정성을 들이려는 자세가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성의 자유는 성적 쾌락을 소유하려는 데에서가 아니라, 성의 질서를 진리에 따라 인간답게 꽃피우려는 조용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돌에 맞아서 죽을 지경으로 심하게 겪은 박해의 상황을 전합니다. 그렇게 심하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 선포의 뜻을 접지 않았음은 물론, 가사(假死)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내용은 복음 선포를 멈추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정도의 환난은 겪어야 마땅한 것이니,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신자들을 오히려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말씀에 대해 한결같은 그의 이런 처신과 태도에서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본 티모테오는 감동한 나머지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2티모 3,11 참조). 하느님의 영에서 나오는 말씀의 기운이 바오로와 티모테오를 움직인 셈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복음 선포 활동의 결실로서 하느님의 평화를 세상에 남기겠다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미사 때마다 이 말씀을 되풀이 하여 상기하고 있는 이 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짊어질 십자가와 그로 인한 부활의 은총으로 성취한 하느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겠다고 하셨고, 이 평화가 – 최근의 중동 정세에서 보고 있듯이 - 상시적인 전쟁 구조로 치닫고 있는 현 시기 국제 정세에서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 상황과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초연하게 하느님의 영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이룩하려는 데에 초점이 되고 있어서, 사도 바오로에게서 보여지는 진정성 있는 정신 자세를 우리가 간직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 않는 평화를 실현해 주시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민족과 함께 한민족의 역사도 이끄신 성령께서는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문화 속에 이 진정성과 평화의식을 이미 오래 전에 집어 넣으셨습니다. 속죄와 감사의 지향에서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몸과 마음을 수양(修養)하는 구도적 정신 전통이 생겨난 결과, 신체를 단련하는 무술에도 ‘태권도’ 같이 ‘도’(道)를 붙이고, 글씨를 쓰는 일도 기능으로만 여기지 않고 서예(書藝) 혹은 서도(書道)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하다 못해 차를 마시는 일에도 다도(茶道)라고 불렀는가 하면, 18세기 말에 장사를 하던 임상옥은 이 일에도 ‘상도’(商道)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입니다. 과연 그에 걸맞게 그는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구도정신의 철학을 지니고 조선 후기 사회에서 거상(巨商)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천의 지향에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문명의 도구로서 천문 관측과 역법, 농경 질서와 수리 철학과 존대어법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낮에는 비 온 뒤에 하늘과 땅에 걸쳐 세워지는 무지개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밤에는 별자리의 이동 경로를 관측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알아들어 문명의 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 넣거나 각종 역사 일지에 기록하여 남겼으며,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궤도가 서로 다른 태양계의 별들이 일렬로 늘어 선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라든지 작은 달이 커다란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 현상은 커다란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서 반드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천문관측활동에서 알아낸 지식에 기초하여 해의 공전주기로 일년을 삼고, 달의 공전 주기로 한달로 삼으며, 해의 자전 주기로 하루로 삼았으며, 역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 농업 문명이 이로써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천문 관측 활동은 땅의 질서를 이끄시려고 하느님께서 하늘에 보여주시는 뜻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부산물로 천문 현상에 대한 사색과 이를 수로 표현하는 수리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고조선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기록해 놓은 천부경(天符經)에 따르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뜻에서 하나(一)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기본 질서에서 둘(二)을 이끌어 냈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에서 셋(三)을 삼았고, 동서남북의 방위에서 넷(四)을 보았으며, 땅에 있는 물질 중에 불(火)과 물(水)과 나무(木)와 쇠(金)와 흙(土) 등이 기본이라고 보아 다섯(五)을 착안했습니다. 천지(天地)와 음양(陰陽), 천지인(天地人),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四方)과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본 물질이 모두 하나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성찰한 사색이 이 십진법의 수리 철학에 담겨 있습니다. 이 기본 수에서, 천지의 둘과 사방의 넷을 합해 여섯(六)을 만들고, 음양의 둘과 기본 물질 다섯 가지를 합해 일곱(七)을 만들었으며, 네 가지 방위를 다시 세분하여 여덟(八)을 만들었고, 땅의 사방과 다섯 물질을 합한 땅의 완전수로서 아홉(九)을 만들고, 땅의 다섯 물질에 상응하는 하늘의 다섯 별 즉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의 궤도를 오행(五行)이라 하고는 다섯에 다섯을 더한 열(十)을 하늘의 완전수로 삼았으니, 이로써 인류 문명의 십진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문제 해결과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 온 서양의 수학 전통과 대비되는 차원 높은 수리 철학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받드는 경천의식으로부터 부모와 윗사람을 공경하는 효(孝)의 도리가 나왔는데, 문명의 역사를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도 고조선 문명의 효 사상에 대해서 듣고는 인류를 구원할 사상이라며 경탄했던 독특하고 고유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경천과 효 사상이 반영되어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리었으며, 그 결과로 전 세계 모든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존대어법이 발달한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특히 ‘말씀’, ‘우리’와 같은 단어는 한국어에서만 통용되는 경천의 어휘들입니다.
이렇듯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요소들이 모인 결실이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정신 수양의 구도적 전통과, 이를 위해 문명의 질서를 수립하는 평화로 나타났습니다.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지향으로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는 흰 옷을 입었습니다. 이 전통에서 우리 민족은 흰 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 되었습니다. 사제의 직책을 받은 민족이 즐겨 입어온 흰색은 빛이 비추어오는 밝음의 색으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동시에 그분이 주시는 평화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강성해진 주변 민족들이 숱하게 침략을 해 왔어도 단 한 번도 다른 국가를 침략하거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시대 이래 중국의 힘에 밀려 사대했던 천5백년 동안이나 일본의 힘에 밀려 식민통치를 받던 36년간에도 하느님께 대한 진정성과 평화에 대한 정밀하고 고유한 문화 덕분에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그들 나라의 문화와 국력을 추월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지만 철저하게 하느님의 섭리를 관철하는 세 가지 힘, 즉 철과 성과 영을 한데 묶어 묵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최근 출생율 저하 현상 때문에 어린이들로 인한 생명의 축복이 줄어들거나 아예 끊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만, 선진적으로 철기문명을 이룩한 민족의 지혜를 발휘한다면 인구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할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렵사리 재개된 개헌 논의에서 젊은이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권 조항을 적극 도입하는 일, 그리고 고려인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이주해 온 아시아계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을 우리 한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국제 정세를 슬기롭게 관리할 수 있다면, 북녘과 만주 그리고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한반도로 젊은 인구가 유입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도 이제는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앞장서 실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민족사의 초창기부터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평화를 추구해 왔고 진정성 있는 구도정신으로 진리를 추구해 온 우리 “한민족은 분단 구도를 극복하여 평화를 되찾고 인류 전체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는 평화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세계 제44차 성체대회, 1989년)하고 격려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강론 말씀은 예언자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했던 구도적 정신 전통, 정밀한 문화로 이룩한 평화의 문명, 그리고 이를 알아보는 외부의 진지한 시선 등 이 모든 역사적 징표에서도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게 하신 성령의 이끄심이 엿보입니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