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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명을 먹이심
20240211 / 마 15:32-39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마 15:29-39 /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로 되돌아가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30) 군중이 절름발이와 맹인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 앞에 앉혀 놓으니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1) 말 한마디 못하던 벙어리가 말을 하고 팔과 다리를 못쓰던 불구자들이 멀쩡하게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걷고 뛰어다니며 맹인들이 눈을 떠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중은 매우 놀라워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32 [4천 명을 먹이시다;막8:1-10]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들이 벌써 사흘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참 안됐구나. 그들을 굶겨 보낼 수는 없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지 않느냐?' 33)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런 빈들에서 이 많은 사람을 충분히 먹일 만한 음식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34) 예수께서 물으셨다.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떡 일곱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습니다.' 35)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땅에 앉도록 하신 뒤 36) 떡 일곱 덩어리와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37)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38)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빼고 남자만도 4천 명이나 되었다. 39) 예수께서는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신 다음 배를 타고 마가단 지방으로 건너가셨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한 곳임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본문은 더 나아가 칠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곳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32) 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자들을 고쳐서 많은 사람들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목격한 사람들은 육신의 배고픔을 잊은 채 사흘이 지나도록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역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같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한 자들로 여기시고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삶에서 소망을 갖지 못했던 자리에서 메시야를 만나 하늘의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기보다 하늘의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쫓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소망 위에 하늘의 창고를 열어 채우시는 칠병이어의 사건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33-39) 제자들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오직 수다한 많은 무리에게 양식을 채우시는 예수님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때의 불신앙의 동일한 잘못을 다시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굶겨 보내지 않겠다고 말씀시며 신앙의 사람들은 그 문제의 답을 예수님께 찾아야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고기 일곱 마리와 떡 두어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을 먹여야 할 문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땅의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가서 하늘의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과는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차게 거두는 것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방식으로 그들의 배고픔을 채우려 하신 사건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오늘도 이 땅에서 영육 간에 궁핍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해결책은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나타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궁핍함이 없는 풍요로운 곳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늘의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곳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출근 시간 지하철역 근처 횡단보도에서 한 사람이 길을 건너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행인들은 힐끗 쳐다볼 뿐 아무도 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곧이어 하늘을 바라보는 세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행인 중 상당수가 하늘을 쳐다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은 하늘을 쳐다보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는 1969년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뉴욕의 거리 한복판에서 실시한 실험으로 이른바 제3의 법칙 이론의 실험입니다. 이 법칙은 올바른 사회정의를 위해 적용할 수 있는데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바른 일을 하는 세 명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때로는 수많은 대중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만, 역으로 상황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선한 행동의 세 번째가 되어 주십시오.
< 설 교 >
너희에게 떡이 있느냐
마 15:32-39 / 박지온목사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목을, "너희에게 떡이 있느냐?" 그랬습니다. 사실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 또 너희에게 줄 떡이 있느냐? 예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을 기본으로 가지고 34절 보면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그랬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불 신앙을 꼬집는 그런 어떤 내용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서 이 먹을 사람들의 떡을 구하겠습니까! 못하겠다!' 이겁니다. '안 된다!' 이겁니다. 그것은 실컷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던 그런 어떤 배경들이 불과 바로 앞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겪었는데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줘야된다! 이 사람들을 굶겨서 못 보내겠다!' 이러니까, '우리가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의 먹을 떡을 구하겠습니까!'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삶에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많이 봤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뭐 보고도 못 믿으니까! 버젓이 하나님의 역사와 그 축복을 눈앞에 보고도 못 믿으니까! 뭐, 아침에 태양이 솟아오른다! 저녁에 태양이 진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사실로 못 믿어지거든요. 또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한해에 곡식을 거두어서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린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셨다!' 이게 안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올해에 노력을 해서, 올해에 특별히 뭐가 되어서 되었다!' 이렇게 되지, '먹을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 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오늘 추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도, '내가 노력해서, 직장이 좋아서, 이렇게 내가 먹고 잘 산다!' 이렇게 생각하지, '하나님이 주셨다!' 이게 잘 안되고 있어요. 말은 잘하지, 찬송도 그렇게 부르고... 그래도 이 믿음이 아니에요. 버젓이 앞에 보면서도 못 믿는 것! 이게 인생에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떤 면에서 여러분들에게 많은 믿음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적은 믿음, 그저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적은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 보시고, 그 믿음가지고 기적으로 역사 해 나가시는 사실이 오늘도 본문에 내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런 말을 하죠. 뭔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뭔가 이렇게 예수 믿는 문제를 가지고 말할 때에 흔히 그럽니다. 사람들이 어디서 잘 넘어지느냐 하면, 늘 이 영원한 축복과 은혜를, 눈앞에 보이는 어떤 물질이나 육신 적인 것 때문에 잘 넘어지더라 구요. 그래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요. '뭐, 예수 믿으면 먹을 것이 나오나?' 이랍니다. '예, 먹을 것이 나옵니다!'그게 오늘 성경에 말씀이에요. '예수 믿으면 뭐 양식을 주나?' '양식을 줍니다!' 이 성경에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 그러면서도, 뭔가 큰 기적은 기대하면서도 사소한 일에 하나님의 사실적인 간섭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안 믿고 있어요. 이것이 우리가 큰 것이 아니지만, 이 사실적인 믿음에 조금만 눈이 열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기도라는 사실이 나와지게 되고요. 또 구체적으로 우리 신앙생활이 힘이 있다는 것은, 뭐 큰 어떤 힘이, 위에서 불이 떨어져서, 그 문제가 아닙니다. 사건 하나 하나에 이 믿음이 조금만 확인되는 만큼 구체적인 힘과 또 생명력에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경험하게 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말씀 속에서, 특별히 오늘 좀 강조를 하고 싶은 것은,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기도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죠. 그 기도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뭐 달라 소리, 구하라는 소리를 거의 안 했습니다. 하나도 안 했어요. 그런데 단지 하나 하라고 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그런 실제로 우리가 구하는 것하고는 조금 관계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하고는 성경이 좀 다른 문제죠. 그래서 너희 구하는 것이, 뭔가 직접 달라고 하는 그런 구함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뭐냐하면,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구하라!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 '시험에 들지 말라!' 뭐 하나님의 영광! 이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 문제는 내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안 느껴져서 그렇지, 이것도 실제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보면 참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뭘 구하라 그랬는데! 하나는 구했다 그랬는데 그게 뭐냐하면, '일용할 양식!' 이것은 내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구하라 그랬어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성경에는 반드시 '구하라!' 그럴 때는 뭐라 그랬습니까? '준다!' 그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라!' 그러면 '준다!' 또, 실제적으로 그런 것을 구하게 될 때에 받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데,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이 어떤 면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고 5천명, 4천명을 먹였다! 참 큰 믿음이다!' 그것보다도 더 큰 믿음이 어떤 면에서 이 문제입니다. 내게 오늘 한끼 양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믿는 믿음! 이 회복이 큰 믿음입니다.
어떤 면에서 뭐, 얼른 보면 적은 믿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믿음이 사실은 신앙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추수감사절을 통해서 또 우리 실제적으로 좀 이해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마태복음 6장 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랬습니다. 뭐냐하면 실제적으로 먹을 양식과, 또 사실 입을 옷과 내 생활에, 또 그리고 모든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는 절차가 무엇이냐? 방법이 무엇이냐? 그 한마디를 간단하게 말씀했어요. '너희는 먼저' 뭐라 그랬습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먼저 이런 면에서 제자들이 오늘 보면, 아주 믿음이 없는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과 제가, 제자들이 믿음 없는 소리를 했지만, 믿음이 전혀 없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단은 이 믿음을 가지고 '연약한 믿음이다!' 그렇게 한번 붙여 봤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연약한 믿음! 또 보잘것없는 믿음! 그 믿음만 가지고도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역사를 주셨다! 그렇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모든 문제 해결자라고 믿고 있지만, 막연한 믿음입니다. 믿고 있지만 실제적, 구체적으로 그렇게 믿고 실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먼저 부닥치니까! 의심하면서도 기도했어요. 의심하면서도 또 믿고 나갔습니다. 이게 제자들의 믿음이나 오늘 여러분과 제가 처해있는 믿음! 같은 어떤 그런 맥락에서 볼 수가 있죠. 마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랬거든요. 그것도 역시 광야에 먹을 것이 없다는, 그런 배경을 예수께서 보시고, 제자들을 통해서 먹을 것을 주시는 모습으로 봅니다. 그럴 때에 17절에 보면,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그러니까 5천명 먹는 그런 배경에 있어서, '먹을 것을 너희가 주어라!' 그러니까, 하는 말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것은 그때 당시에 장정 한사람이 먹는 몫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밥이지만 유대인들은 떡입니다. 떡은 빵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두 마리 그랬는데, 이건 옵사리온이라고 그래서, 그때에 나온, 14장에 나온 먹는 것의 배경은, 멸치종류에 적은 이 물고기 두 마리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적은 것 가지고, '이 수많은, 수 천명이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이 제자들의 믿음이죠. 이렇게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간단히 다른 소리를 안 했습니다. '있는 것 가지고 오라!' 그랬습니다. 가지고 오라! 그래서 가져다 드리니까, '축사하시고 이제는 이것을 갖다 주어라! 제자들에게 먹여주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떡을 떼어주고, 또 그 다음에 물고기를 잘라주었는지, 떼어주었는지 손에 있는 데로 떼어주었겠죠. 그렇게 주었는데, 그걸 먹고도 여러 바구니를 거두게 된 이런 배경들이 오늘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서 말씀했습니다 만은, 그것이 14장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바로 15장에서 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그리고 이 말속에는, '너희가 먹을 것을 좀 줘라!' 같은 내용이 여기 들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줘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 그랬냐하면요. 깜짝 놀라 가지고, 15장 33절에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그랬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똑같은 내용이에요. 먼저 똑같은 그런 배경을 저희가 안고 있으면서, '이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우리가 이 광야에서 무엇으로 먹을 것을 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 엄청난 기적으로 먹을 것을 공급했던 사실을 벌써 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뭐냐하면, 안 좋은 것은 오래오래 기억을 합니다. 또 그것도 아주 더 붙여서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 하나님의 은혜주신 것, 이것은 금방 잊어버려요. 은혜는 잊어버리고 원수는 돌에 새깁니다. 그래서 '은혜는 모래 위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 그런 말이 있는 것처럼,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면에서 믿음회복! 그럴 때에, 은혜를 기억하고 원수를 잊어버리는 것이 이게 믿음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이 사실은 간단한 것 같지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은혜 아니면 되어지지를 않아요. 인간의 본성이, 안 좋은 것은 오래오래 기억하지만, 좋은 것은 잊어버립니다. 안 좋은 것은 기억을 해도 몇 배 붙여서 기억을 합니다. 좋은 것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늘 우리 인간에게 감사가 없고, 찬송이 없고, 또 그런 배경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받지만, 좋은 것을 기억하자면 한시도 우리는 찬송으로, 감사로,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데도, 이게 안되니까! 늘 원망과 불평과 짜증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조금만 이 문제가 회복되면 여러분 자신 자신이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도 어떻게 살았느냐?' 잠깐 돌아보세요. '감사하며 살고 있느냐? 찬송하며 살고 있느냐?' 믿음이 회복된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돌이켜 보면서, '불평하면서 살고 있느냐?' 그건 백 번, 천 번 잘 믿는다 그래도 불 신앙입니다. 아무리 중직자로 앉아있다 그래도 불 신앙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내 삶을 뭐 많이 돌아볼 것도 없어요. '참, 어쩌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은혜를 받고 살고, 그리고 또 어쩌다가 내가 이 송현 교회에 와 앉았느냐?' 이런 정도만 감사해도 여러분 달라집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이런 경우가 아니고, 반대로 '어쩌다가 내가 이 은혜를 받았느냐?' 그 말이 아니고, '어쩌다가 내가 이런 팔자로 사느냐?' 거의 이런 식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조금만 우리가 눈이 열리게 될 때에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축복과 역사가 그러면 어떻게 얻어지느냐? 오늘 조금 전에도 말씀했습니다. 사실은 우리 앞에 사실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이고, 그 위에 우리가 서 있음에도 이게 안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느냐? 조금 전에 말씀했습니다. 불 신앙이지만, 믿음이 연약하지만,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라고 믿어져도 어떻게 하라 그랬습니까? '나한테 가져 온나!' 전부 이 이야기입니다. 간단하게 '내게 가져 온나! 떡 5개 물고기 2마리도 내게 가져 온나! 불 신앙조차도 내게 가져 온나!' 우리에게 적은 믿음이라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기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문제는 어디에서 안 되느냐 하면, 아무리 불평해도 좋고 아무리 불 신앙해도 좋습니다. 한가지 딱 방법입니다. 불평조차도 어디에 가져가면 됩니까?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됩니다. 이 관문을 못 넘더라 구요. 내 불 신앙조차도 '하나님 내가 안 믿어집니다! 참, 내가 불 신앙됩니다! 이것조차도 어디에 가지고 오면 됩니까?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오면 됩니다. 그런데 이 고비를 모두 못 넘어요. 그러니 어디에 가지고 가느냐? 이게 이 믿음이 회복이 안 되는 사람들로 어디 가느냐? 불평 불만을 사람에게 가져갑니다. 이웃에게 가져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생기면 친구와 의논할 수가 있고, 이웃과 의논할 수 있고, 부모와 의논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에?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실 것은, 아무리 큰 친구가, 아무리 큰 능력으로, 아무리 크게 우리를 인도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는 순간에 성령의 인도 받는 것 이상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가장 크고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기도하면서, 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도, 또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믿음조차도 없기 때문에, 뭘 기도합니까? 기도할 때조차도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성령으로 간구하게 하옵소서. 하도 우리가 기도해도 불 신앙으로 기도하니까! '하나님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이 한마디만 가지고 나와도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사실이 우리 생활에 솔직히 조금만 밑에 깔려도 달라지게 된다는 정도가 아니고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고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4장 18절에도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도 보잘 것 없는 겁니다. 그 5천명, 4천명이 먹을 수 있는 그런 어떤 먹을 음식치고는 떡 5개와 물고기는 이것은 보잘 것 없는 겁니다. 이건 뭐 택도 안 되는 거예요. 한번 받아합시다. "말도 안 된다!" 진짜입니까? 여러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생활 하다가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조차도 어디가지고 가면 통합니까?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면 됩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오늘 여기서 참 실제적으로 좀 붙잡아야 될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33절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그게 뭡니까?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있는 건 그것뿐인데, 어디서 이런 많은 음식을, 이 광야에서 살 때도 없는 이 광야에서 가지고 올 수 있습니까? 그럴 때에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여기에 두어 마리 그랬는데, 꼭 두어 마리라는 그런 어떤 개념도 있고, 그 다음에 두어 마리보다도 뭐 조금 더 대략 한 두어 마리다! 이런 어떤 우리 개념이 조금 보여집니다 만은, 일단은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기에는 너무나 이 부족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35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마 15: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그래서 제자들이 그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무리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 엄청난 기적으로 역사가 되었더라! 그렇게 본문에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어떻게 하라 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택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가져 오라?' '예수께 가져 오라!'
여러분 지금 우리 기도하는 내용, 또 특별히 교회를 건축해 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여러분 여기에 참 속지 말아야 합니다. 택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는 하고 있거든요. 지금 송현 교회가 부지를 사는 것조차도 택도 안 되는 짓을 해 놓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은행에 말하면 뭐 이건 도저히 이것은 계산이 안 맞는 일입니다. 나는 이것을 믿고 있는 것보다도 우리 교회를,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이 교회를 건축하면서 느끼는 것은, 택도 안 되는 짓을 했거든요. 그때는 뭐 그래도 요즘은 우리 교인들이나 그래도 숫자나 안 많습니까! 그때는 교인들 숫자가 50명밖에 안 되는 교회에서 이 건물을 지었습니다. 택도 안 되는 짓을 했는데도, 하나님은 일딴 가지고 나갔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앉아있는 기적의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부지를 선정해서, 부지를 실제로 확보하고 이렇게 하는 과정 속에서도 제가 교회를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거든요. 원래 계획이 건축위원회를 만든 것은, 멀리 내다보고, 우리 후대에 건축할 수 있도록 땅이나 한번 준비하고, 돈이나 좀 준비를 해 놓자는 그런 배경으로 건축위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택도 아니게 뭔가 땅을, 그것도 뭐 저 변두리의 산꼭대기 어디에 얻어놓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조차도, 어떤 누구도 그건 요지 중에 요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다가 딱 같다가 놓았거든요. 혹시 여러분들이 그것을 보고도 눈치 못 채고 앉았다. 그건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다. 성경에 받아합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우리 속에 있는 생각입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안 믿어져요. 안 믿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이런 것이 많은 것을 봤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예수 믿으면 떡 주나! 밥 주나!' 그 말을 '예, 줍니다!' 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내 인생이 그랬어요. 뭐 시골에 가든지, 어디 가든지, 하나님이 하신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 전혀 답이 나올 수 없는 시골교회에 들어가서도 제가 늘 그런 이야기를 하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되었다!'는 정도가 아니고 풍성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러니까 저는 목회 생활 속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뭐 먹는 것 때문에, 마시는 것 때문에 고생했다! 이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정말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느냐? '먹이시느냐!' 라고 할 때, 눈뜨면 뭐 조그마한 것을 놓고, 눈뜨면 꼭 까마귀가 뭐냐 그 먹을 것을 같다놓았다! 그 말이 사실적으로 느껴지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교역자니까 그렇지 않느냐!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교역자나 평신도나 같습니까? 틀립니까? 대답이 희미해요. '같습니까! 믿습니까!' 그러면 나를 먹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안 먹이시겠어요! 여러분을 축복 안 하시겠습니까! 뭔가 이상하게, '교역자니까!' 하는 이런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도 저도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자녀요.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고, 여러분도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확실히 믿습니까? 이 진짜 믿습니까? 믿으면 왜 빌빌합니까! 오늘 여러분이 꽉 잡으시기 바랍니다.
박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똑같이 하나님의 특별히 사랑하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다! 자부를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박 목사니까! 기도하니까! 응답하시지!' 아닙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단지 안 가지고 나갈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게 되겠나? 대게 안 된다고 믿고, 아예 절대로 하나님이 응답 안 하신다고 믿고, 그리고 기도해도 이것은 응답 안 하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기도하니까! 그러니까 응답이 확실히 안 오는 거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확실히 믿고 가지고 가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데로 주님이 축사하시는 순간, 순간 엄청난 은혜와 축복으로 임하실 것이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추수감사다!' 그럴 때에 여러분 중심으로, 이 추수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는 배경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적은 것이 이해되면 정말 추수하는 것이 감사하죠.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이 뭔가 곡식을 심었습니다. 땅에 던진 것 아닙니까! 같다가 내어 던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올라와서 열매를 맺는다는 이것은 전혀 인간이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죠.
저는 그 가을 들녘에 가서 이렇게 보면, 그 뭔가 곡식에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보면, 전혀 하나님의 작품이지, 인간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되겠다!' 싶으면 순식간입니다. 금년도에도 안 봤습니까! 순식간에 바람 한번 불어도 끝나 구요. 물 한번 덮쳐도 끝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못 믿어요. 그래도 뭔가 이것을 하면 인간이 노력해서 되는 줄 알고, 여러분 뭐 직장 좋아서 된 줄 압니까! 하나님의 역사, 어떤 면에서 직장조차도 하나님의 인도!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조금만 이해하고 붙들려도 여러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직장을 '가졌다, 못 가졌다!' 이전에 이런 기본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을 오늘 우리가 좀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적은 것이지만, 가지고 갈 수 있는 자격이 누구냐? 이 말씀을 드렸을 때에, '가지고 가면 된다!' 아무나 되는 줄 압니까?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 정말 여러분 가슴에 좀 꽂혀 지기 바랍니다.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 너무 상식적인 일이지만 절실하게 여러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 자다! 안 믿는 사람, 그것은 바보라서 그래요. 이 말에는 아마 긍정이 안 되는가 보죠. 똑똑한 사람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러면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됩니까?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해결 자다! 모든 문제해결이다! 이것과 등식입니다. 같은 연결이에요. 여러분 오늘 이 사실을 바로 붙들어야 됩니다.
내게 와서 이웃에 있는 어린 아이가, '목사님 공책 사게 돈주세요!' 그랬다. 그럽시다. 그러면 내가 첫마디가 '야, 너희아빠한테 가서 달라해라! 나한테 왜 달라고 그러느냐?' 그렇잖아요. 그러면 내게 내 아들이 내 딸이, '아빠 공책!' 많이 달라고 할 것도 없어요. 많이 뭐,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공책 하나 주시옵소서.' 할 것도 없어요. '아빠 공책!'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겁니다. 간단하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자연적으로 구체적인 말을 하게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장황하고, 기도가 길어지고, 기도가 거창하게 되는 것은 자녀와 상관이 없다는 배경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가 구체적이고 간단한 것은 자녀라는 사실적인 증거입니다. 자녀가 와서 길게, 그리고 미사여구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이 없어요. '아빠 공책 하나!' 끝나는 겁니다. 뭐 아름다우시고 뭐 어떻고 할 것도 없어요. 뭐 날씨가 추운데, 할 것도 없어요. 날씨 춥던, 좋던 필요를 채우시는 아버지! 여러분에게 제게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실제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잔말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우리 예수께서 뭐라 그랬습니까?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중언부언하지 말라! 듣기 싫다! 쓸 때 없는 소리 다 치워라! 뭘 기도하려고 밤새도록 막 지껄이는데, 잔말하고 앉았어. 간단하게 정말 사실적인 문제가지고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그래서 밥 먹고 싶으면, '아버지 밥!' 끝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이야기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여러분과 제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가지고 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긴소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길고 오래하기 때문에 기도에 힘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기도가 힘이 있습니다. 사실적인 힘이 있고, 사실적인 역사가 나올 수 있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합니다. 교회의 힘이라는 것은, 여러분 교인들의 힘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죠. 송현 교회 교인이 되었다! 그럴 때에, '나는 송현 교회 교인이다!' 힘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 연결이 되는 겁니다. 다른 교회 교인이, '나는 송현 교회 교인이다!' 그래서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잖아요. 혹시 그것을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네가 어떻게 송현 교회 교인이냐! 혹시 한번 송현 교회 갔을 뿐이지!'
마귀는 얼마나 잘 아는지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 마귀가 옆에서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입만 그러지 마라!' 실제와 사실을 붙잡고 있으면, 여러분 이것이 바로 힘이요. 이 실제가 바로 생명줄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정말 바로 되어 있다면, 사건과 일들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한마디만 해도 힘이 나오는 겁니다. 사실적인 능력이 생겨지는 겁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이 축복된 역사를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뭐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참 중요하죠.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절에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절에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여자와 아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여자와 아이를 다 빼고 얼마나 왔다 구요? '4천명이다!' 그랬습니다. ]
대게 보면 2/3가 여자 아이고 그 다음에 4천명! 그러는 것도 원래 유대인 숫자는 이 장정들입니다. 노인도 빼고, 그렇다 그러면 지금 4천명! 그러면 한 얼마나 쳐야 되느냐? 1만 2천명 내지 1만 5천명된다! 그렇게 칠 수 있습니다. 1만 5천명을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먹이신 일을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었던 배경! 중요한 것이 여기에 예수께서 이들을 먹이시려고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걸 벌써 알았죠.
그 다음에 예수께서 다 앉히셨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입니다. 그럴 때에 제자들이 택도 안 되는, 말도 안되는 그런 상황에서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 가지고 제자들에게 '주어라!' 그랬을 때에, 나갔다는 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믿음이라 그러죠. 하나님의 계획을 봤다! 깨달았다! 서슴없고 주저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눈이 열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뭘 '한다! 안 한다!' 이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것은 하게 되는 겁니다. 당연히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 복음화 그러고 큰소리치는 배경도 당연히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들고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떡 5개 가지고 수천 명을 앉혀놓고, '다 앉아라!' 그래놓고는 예수님의 뜻을 가슴에 담고 제자들이 나갔습니다. 여기에 축복의 역사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뭐 큰 뜻을 가지고,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너무 감사한 것은, 참 하나님의 계획과 그 축복을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 묘합니다.
왜, 그러냐 생각해 보세요. 지금 4천명을 먹이려고 그러면 떡을 바리바리 지고도 힘듦이다. 하번 생각해보세요. 엄청나게 걸머지고, 둘러메고 이래도 이게 다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이 손에 딱 들려 가지고 지고 가고, 이고 가고 할 것도 수고할 것도 없어요. 이걸 들고 '네가 같다 주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떡을 4천명 먹이려고 그러면 얼마나 필요한데, 그걸 한꺼번에 들고 나 갈려고 그러면 얼마나 힘듭니까! 땀을 벌벌 흘려도 될지 말지 입니다. 그런데 간단히 들고 떼 주었어요. 4천명에게 떼어주기까지 이게 줄어들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축복과 이 은혜의 역사가 이해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뭘 아셔야 되느냐 하면요. 우리가 부자로 살고 있는데, 주의 일을 한다! 당연한 일이겠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주의 일 할 때에 장애가 참 많습니다. 나는 부자들이 뭘 한다! 그럴 때에, 간단하게 '돈이 있기 때문에 쉽다!' 그럴지 모르지만, 돈이 있기 때문에 들어오는 장애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 다음에 실질적으로 장애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없는데도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장애가 없어요. 그런데 하는 일마다 감사가...
왜? 조그마한 것 들고 나가고도 가볍고 기쁘고 감사하고, 떼 낼 때마다 떼 내어도 또 있고, 떼 내어도 또 있고, 떼 내어도 또 있고... 신기할 것 아닙니까! 볼 때마다 감사라! 여러분 정말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주님의 계획 속에 세워졌다하는 사실을 순간, 순간 없는 곳에서부터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일을 하는 것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나는 뭔가 교회 헌금하고, 교회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이 돈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하는 사람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 거의 돈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야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붙잡고 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바로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있다, 없다! 문제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가게 될 때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역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있는 사람들은 감사를 못해도 막 바리바리 짐을 지고 내는 사람들은 봉사하면서 휴 고되다 힘들다 이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걸 떼어줄 때마다 감사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훨씬 감사가 많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일에 이런 비밀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 일에 많은 것을 갖고, 많은 것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더라 구요. 내게 있는 것 적은 것이지만, 믿음으로 주 앞에 나갈 때마다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나가는 자들마다 엄청난 축복과 역사가 일어날 뿐 아니고, 적은 것을 했는데도 그 결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사실을 보고 너무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뭐라 그릅니까? 받아합시다. "나 같은 죄인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나 같은 걸 하나님이 사용하셨구나!" 감격이 되는 것 아닙니까!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인도하셨구나!' 저절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일은 하면 할수록 뭐가 나옵니까? 겸손히 나오게 됩니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면 할수록 교만이 나옵니다. 자기 의가 나옵니다. 오늘 진심으로 오병이어의 그리고 또 4천명을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보면서 정말 이 지경에, 이 순간에, 이 사실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만 붙잡아도 우리는 감사하게 되고 추수감사절이라는 특별한 절이기 이전에, 우리는 순간마다, 발걸음마다, 날마다 감사하며 여러분 생활과 사건 속에서 이런 배경이 되었을 때에, 근심하며 염려한다는 것만큼 미련스러운 일이 없어집니다. 감사하고 찬송할 수밖에 없죠. 받아합시다. "이제는 걱정 끝!"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불쌍히 여기노라
마태복음 15:32-39
오늘 본문의 주제랄까 초점이 되는 것은 "내가 저들을 불쌍히 여기노라"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나 읽는 분들에게 가끔 문제되는 바가 있는 대목입니다. 성경에 오 천 명 먹이신 사건도 기록되어 있고 사천 명 먹이신 사건도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두 번 있었던 일이냐, 아니면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로 기록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우리는 늘상 '오병이어(五餠二魚)'라고 하면서 오 천 명 먹이신 이야기만 하지 사천 명 먹이신 이야기는 기억에도 거의 없다시피 되어 있지 않습니까?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잘 아는데, '칠병이어(七餠二魚)-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사천 명 먹이신 기적 역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은 같은 사건인데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는 것은 억지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두고 변론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하는 짓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점 하나 획 하나도 그대로 사실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에 오 천 명이라 하면 오 천 명이고, 사천 명이라 하면 그것은 또 사천 명입니다. 분명히 두 가지 사건인 것입니다. 성경의 본래적인 정확성과 권위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사건을 한 가지 사건으로 보려 하는 억지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두 사건으로 알고 비교할 때에 더욱 중요한 은혜를 깨닫게 되면서 계시적인 말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은 순수한 마음으로 읽어야만 은혜가 됩니다. 순수하게 묵상하며 읽느라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많은 은혜를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홍해를 건너갔다'하면 홍해가 갈라져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믿을 때, 거기에 따르는 모든 영적 교훈을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이것을 의심하기로 든다면, 의심 자체도 문제가 될 뿐더러 그에 따르는 계시적 말씀과 교훈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게 되고 맙니다. 오 천 명 먹이신 것과 사천 명 먹이신 것은 두 사건입니다. 분명한 사실이므로 이를 인정하고서 오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같은 마태복음에 14장에는 오 천 명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의 이 15장에는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 사건으로 볼 수 없거니와, 오 천 명 먹이신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고,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은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8장에만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두 사건을 한번 비교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상이 다릅니다. 오천명 먹이신 사건의 대상은 유대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복음서가 다같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던 순례자들이 코스를 바꾸어서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이 갈릴리 벳새다 들로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해를 같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억지로 받들어 저들의 정치적인 왕으로 삼겠다고 들끓는 일까지 생기지 않습니까? 그 모두가 유대사람 순례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오늘의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은 그 대상이 대부분 이방사람들입니다. 대상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사람들에게만 구세주인 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에게도 떡을 먹이시고, 이방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 한번 복음의 세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건은 일어난 장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천 명 먹이신 사건은 갈릴리 벳새다 들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은 데가볼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건은 장소도 다르거니와 또한 동정의 동기가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 저들에게 떡을 먹이시게 되었느냐를 살펴보면, '오천 명' 때에는 광야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십니다. 양들인데 목자가, 지도자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도 참 지도자가 없어서 실망을 하는 무리들이거든요. 순례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언제나 결과는 허탈감으로 끝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교만한 바리새인들, 위선자들, 또 제사장들의 허다한 그릇됨을 보고는 실망하고 돌아옵니다. 이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다시 떠나다가 갈릴리에서 메시야가 났고, 그 메시야 예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벳새다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을 보시매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주님은 보신 것입니다. 정신적인 방랑자들, 영적인 방랑자들로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천 명 먹이신 사건에서는 단순히 굶주림을 보시고 불쌍하다 하십니다. 영적이기보다는 육체적으로 배고픈 사정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또다른 교훈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실 때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는데 여기서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입니다. '두 마리'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남은 광주리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실 때에는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곱 광주리'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기간도 다릅니다. 순례자들의 경우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던 사람들이 그냥 코스를 돌려서 모여든 것이므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하루를 지낸 것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고 했으니 하루입니다. 그러므로 한 끼 정도 굶은 셈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사흘 동안이라고 합니다.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이 이방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천 명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광야집회요, 산상집회라 할 수 있겠는데, 참으로 엄청난 집회였습니다. 그들이 소지했던 음식은 이제 다 떨어지고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도록 사흘 동안을 내리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를 시사해줍니다. 시기로 보았을 때, 오천 명 먹이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봄입니다. 그러나 사천 명 먹이신 일은 여름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천 명 먹이신 사건 때에는 그 이적 뒤에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하는 정치적 욕망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강요, 강권적으로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사천 명 먹이신 이적 뒤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고, 예수님은 급히 저들을 떠나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바 바구니와 광주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말로는 바구니나 광주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두 사건에서 바구니와 광주리는 그 크기부터 다릅니다. '열두 바구니'의 바구니는 '코피누스' 곧 휴대용 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구니라기보다는 그저 '구럭'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여자 분들 핸드백도 이상하게 커져서 마치 꼴 망태기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아요. 꼴 망태기는 꼴을 베어 담아 메고 다니는 것입니다. '코피누스'라는 것이 그와 비슷한 것인데, 거기에 자질구레한 것을 많이 넣어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 것으로 열두 개니, 별로 많지 않은 양입니다. 열두 제자가 돌아다니면서 주워 모은 것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일곱 광주리'의 광주리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스푸리스'라고 하여 이방사람들이 떡을 담는 데 쓰는 그야말로 큰 광주리입니다. 사도행전 9장 25절에 보면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 나오는 광주리가 '스푸리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광주리'가 '열두 바구니'보다 훨씬 더 양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사건에서 쓰인 코피누스와 스푸리스도 이와같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유대사람이 쓰던 것이요, 하나는 이방사람이 쓰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물'입니다. 몇 사람이 등장하는데,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발견하십니다. "저희가……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형이하적 사정까지 돌아보십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들, 지도자가 없이 헤매고 다니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의 영적인 문제에만 마음쓰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배고파서 가다가 기진 할라'까지 걱정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영적 빈곤도 담당하시지만 육체적 빈곤도 담당하시는 것을 봅니다. 문제를 제시한 이도 예수님이요 해결한 이도 예수님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고 영적인 교훈을 주고 진리를 가르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다, 경제 문제도 해결해줘야 한다고 하는 귀중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빈곤에 대해서만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정에 대해서도 깊이 동정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을 한번 보십시다. 참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둔할 수가 있나 싶어요. 아시다시피 바로 앞의 14절에 오천 명 먹이신 이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름이니 그때로부터 기껏해야 2-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떡을 얻으리이까?"-보리떡 5개와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불과 이삼 개월 전에 있었던 그 엄청난 이적을 까맣게 잊었는지, 오늘 이따위로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실 때에는 빌립이 '이거 뭐 200데나리온 가지고도 안되겠는데요' 하고 돈으로 계산하더니, 오늘도 제자들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옆에 있었다면 한마디 했을 것입니다. "이 멍청한 사람들아!"하고요. 그러나 우리, 이 사람들 나무라지 맙시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도 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과거에 얻은 경험, 우리가 신앙적으로 깨달은 간증이 있으면 그것을 현재와 연결하고, 나아가 미래로 연결해서 앞에 있는 문제를 지난날의 간증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풀이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흔히들 '옛날이 좋았다'라는 소리를 합니다. 옛날이 좋았다면 오늘도 좋은 것이지 왜 옛날만 좋습니까? 지난날이 좋았다면 오늘은 더욱 문제가 없는 법입니다. 앞으로의 걱정은 더 없고요.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늘 지난날에 받은 은혜는 항상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오늘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은혜를 모르는 자인 것처럼, 한번도 은혜를 간증해본 일이 없는 자인 것처럼 답답하게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그 깊은 간증, 거기서 깨달은 바가 있었으면 이제는 그것을 잊지 말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문제를 볼 줄 아는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 다음날 배를 타고 가시다가 제자들보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삼가하라." 그러자 제자들은 '아 떡이 없어서 그러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떡 문제를 놓고 시비를 벌입니다. 식구는 열 셋인데 그 배에 떡이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 '누구 때문이냐'고 신경전을 벌였겠지요. '가룟 유다 당신이 좀 준비해 가지고 왔어야 하지 않소?' '무슨 소리! 수제자인 베드로 당신이 미리 좀 챙기지 그랬소? 나야 돈이나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오?' 이런 식으로 시비를 벌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답해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 얼마가 남았더냐?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내가 누룩 얘기를 한다고 떡 없는 것으로 문제삼고 있느냐? 어찌하여 기억도 하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기억도 하지 못하느냐-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을 하나 배워서 깨달았으면 다음에는 그것을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운 것은 배운 것 대로고 응용은 하나도 되는 게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따로따로 입니다. 경험과 현실이 따로 놉니다. 우리가 뭔가를 배웠으면, 오늘이라도 여기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집에 돌아가서 적어도 부부싸움만은 하지 말아야지요. 뒀다가 내일 아침에 싸우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문만 나서면 똑같습니다. 전혀 교회 갔다온 사람 같지가 않고 은혜 받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악순환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자들이 그 짝입니다.
칼뱅 선생도 말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기대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바가 있다면 그로 해서 앞에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 우리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습니다. 생각지도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그 큰 능력, 기적 같은 은혜 속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기적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만 있는 기적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는 기적입니다.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무슨 문제가 또 있습니까? 그런데 일만 닥쳤다 하면 지난날 은혜 받은 경험은 까맣게 잊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니 될 일입니까? 오늘 본문의 이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또다시 불 신앙적으로 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발전한 것이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지난번에는 그저 막연하게 있다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나이다(막 14 : 17)"하고 나옵니다마는, 오늘은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하시니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하고 내놓습니다. 조금은 정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신 사건에서는 상당히 영적인 데에 치중했습니다. 그에 오늘은 상당히 물질적입니다. 본문에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사흘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같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동안에 뭘 먹을까 뭘 마실까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저들은 이 시간 동안 유대사람들처럼 정치적인 욕망을 가진 것도 아니며 물질적인 욕망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그 위대한 교훈에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흘이나 함께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역시 유대사람들보다 이방사람들이 더 열심을 냈습니다. 그 당시에도 벌써 충성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백부장같은 사람도 로마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훌륭해서 이미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온 이스라엘 중에서 그 사람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습니까? 그밖에도 이방사람들 가운데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천 명도 대체로 이방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사흘 동안 부흥회를 가질 것으로 작정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에 취하면서 함께 하다보니 저들도 모르게 사흘이 지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이에 대해서 플러머(Plummer)라고 하는 유명한 주석가는 재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6장 33절의 성취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물질을 구할 때에는 물질도 얻지 못하고 영적인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추구할 때에는 먼저 영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신령한 것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물질적인 것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을 따라 나아갈 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할 때에는 신령한 것도 얻고 영생도 얻고 동시에 물질도 얻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빵이 예수님께로부터 오리라고 기대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을 먹으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예수님께 빵을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신령한 말씀만을 구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양식이 떨어지는데도 아랑곳없이 말씀을 듣는 데 넋이 빠졌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저들에게 마침내 주님께서는 물질까지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에 동정하시고 충분한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한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도 깊이 동정하고 계셨습니다.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마셔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를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배고픔을 아신다는 게 얼마나 귀중합니까? 우리의 배고픈 사정을 아십니다. 우리의 외로움도 아십니다. 육체의 아픔도 아십니다.
억울함도 아십니다. 그가 우리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기에, 능력이 많으신 분이기에,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요, 우리 같은 인간이 느끼는 배고픔도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리 장로님,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죄송한 말씀이지만, 장로님 한 분과 제가 얘기하면서 우리끼리 뭐가 통한다고 한일이 하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고학을 할 때, 아주 어렵게 배고프게 살았거든요. 하루에 두 끼 먹는 것이 어렵고, 그나마도 어떻게 하면 더 싸게 먹을까를 궁리하던 때였습니다. 돈이 없으니 어쩌다 식당에라도 가게 되면, 제일 싼 집만 찾게 마련이었습니다. '어디 가면 싸게 사먹을 수 있을까?' 될수있으면 작은 집, 집보다는 천막 같은 데로 가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식사를 하더라도 좀더 많이 주는 데로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싼값이고 밥그릇 큰 데를 찾았던 것이지요. 배고픈 사정을 실감 할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같이 먹는 중에도 '내 것은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뭐든지 같은 찬이라도 조금 더 큰 것, 많은 것을 찾으면서 지냈습니다. 거기서 탐식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정이 그 장로님 한 분하고만 통하더라는 말입니다. 그 분도 옛날에 많이 고생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통하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정말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내일은 또 무엇을 어디 가서 먹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가 해결해나가야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니 예수님께서 나의 배고픈 사정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배가 좀 고프면 대순가? 고작 사흘밖에 안 지났고 또 며칠 더 굶는다 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니 배고픈 것을 참으라'-이렇게 몰아붙이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까지는 먹었지만 이제 돌아갈 때에는 배고파 기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염려해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말씀 들으러 왔다가 허기지고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고 가난해지지는 않습니다. 배고픈 사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남보다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배부를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 의를 이렇게 갈망할 때에야 의도 채워지고 배도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시는데, 방법이 전과 똑같습니다. 이적을 행사하시고자 축사(祝謝)를 하십니다. 떡을 가지시고 사천 명 앞에서 비록 적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형편에서도 기도하면서 작다고 하지 마십시오. 부족하다고 하지 마세요. 식사기도, 감사기도 할 때에, 음식이 좋을 때는 '좋은 음식 감사합니다'할 것이요 음식이 시원치 않아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이상하게도 식사기도 때 감사기도를 안하더랍니다. 늘 그냥 먹더랍니다. '목사님, 왜 감사기도 안 하십니까?' 하고 누가 물었더니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 메뉴로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이 음식은 못마땅해서'라는 소리지요. 또 '그 동안 줄곧 똑같은 음식만 자꾸 주니까 똑같은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라는 소리지요.
여러분, 오늘 음식이 아무리 불만스럽더라도, 막말로 '어쩌자고 밤낮 똑같은 것만 처먹이노?' 싶더라도 그것은 사람한테나 가질 불평이지 하나님 앞에서 불만스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른 떡 하나라도 감사할 것입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더라도 감사할 것입니다. 내 앞에 음식이 있을 때에는 무조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천 명 앞에 떡 다섯 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천 명 앞에 떡 일곱 개라니 냄새나 맡고 말일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유카리스테오'-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할 때에 거기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감사해보십시오. 거기에 특별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돌아봅시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스프랑크니조마이'라고 하는 이 동사는 '스프랑크논'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무슨 말이고 하니 '창자'입니다. 창자, 곧 '배알이 뒤틀린다' 할 때의 '배알,' '애가 탄다' 할 때의 '애'가 스프랑크논입니다. 원문 그대로 말한다면 '나의 애가 끊나니'--애끊는다는 뜻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육신에까지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그냥 안됐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보는 순간에 불쌍해서 애가 끊어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에 대하여 그런 정도로 마음 아파하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정말로 불쌍히 여길 때에 그 아픔은 내 몸의 속속들이 전달돼오는 것입니다. 창자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감상적으로 안됐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혀나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동정심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육신에까지 절실하게 전달되는 역사로 나타날 때에 거기에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병에 걸려 아픔으로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할 때, 그런 때라면 진실로 괴롭겠지요. 얼마 전에 제가 명륜동 명성교회에 볼일이 있어 혼자 차를 타고 잠깐 다녀오는데, 어떤 사람이 복잡한 길 한가운데서 차를 세우라고 합디다. 그래서 섰지요.
그랬더니 젊은 사람이 조그마한 어린아이를 안고 태워달라는 것입니다.
곁에서 어머니가 "이 애가 지금 자꾸 숨이 넘어가요"합니다. 아이가 새D똕TXT+ 파래져서 헐떡거립니다. 아무리 택시를 잡아도 택시가 안태워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선생님이 좀 태워주세요." 그래서 태웠는데, "어디로 갈까요?"하고 물었더니 "좌우간 가세요." 밑도 끝도 없이 자꾸만 그냥 가자는 겁니다. 가다가 병원을 찾아 그 앞에 세워주었습니다.
가는 동안에 이 아이가 자꾸 숨이 넘어가니까 아버지가 얼굴이 새까맣게 질리고, 어머니가 엉엉 울고, 난리가 났습니다. 도착해서 차 문을 열고 내려주었더니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뛰어올라갑니다. 한참 서 있어도 내려오지 않기에 그냥 돌아왔습니다 마는 그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가 아플 때에 그 부모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사천 명, 당장 죽게 된 것도 아닌 이 사람들을 보시고 애끊는 동정을 느끼시며 '가다가 지치겠다, 기진 하겠다'라고 염려하십니다. 집에까지 돌아가느라면 가다가 지칠 사람들이 있겠다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배가 아플 만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하십니다. 먹여 보내야겠다고 하시는 마음이 인정 많은 우리네 할머니들 마음씨와도 같습니다. 콧마루가 시큰하도록 고마운 마음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생각으로야 하나님의 말씀 들었으면 됐지 육신까지 염려하실 것 뭐 있나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히 듣고 은혜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가다가 배고파서야 되겠느냐-'육체가 지쳐서야 되겠느냐, 이로 인해서 약해져서야 되겠느냐'고 걱정하셔서 굶겨 보내지 못하십니다. 이적을 베푸셔서 모두들 배불리 먹고도 가마니 만한 광주리로 일곱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쁘게 하시되 영적으로 충만하게, 육적으로도 배부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가난하게 살지도 말아야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성껏 절약하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동시에 육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넉넉하게 먹고 쓰고, 배부르고 남게,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두루 샬롬이 있기를 그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선교를 향한 주님의 애타는 마음
마 15:32-39
오늘 본문은 일곱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사천 명을 먹인 기적이 나온다. 38절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사람들 중에는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사건과 오늘 4천 명을 먹인 칠병이어의 사건을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에는 몇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이 두 사건이 서로 다른 사건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첫째, 오병이어 사건은 봄에 일어났지만, 칠병이어는 여름에 일어났다.
둘째, 두 사건에는 사람과 장소가 다르다. 오병이어는 떡을 먹은 성인남자가 5천 명이었지만, 칠병이어는 4천 명이라고 되어 있다. 또 오병이어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벳새다 들판에서 일어났지만, 칠병이어는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일어났다. 기적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지난 시간 잠시 살펴봤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31절) 고 했다.
셋째, 기적 사건에 사용되는 바구니가 다르다. 오병이어에 대해서는 14장 20절에 이렇게 말한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그러나 칠병이어에 대해서는 15장 37절에 이렇게 말한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고 남은 떡을 담은 용기에 대해 오병이어에서는 ‘바구니’라고 했고, 칠병이어에서는 ‘광주리’라고 했다. 이것을 성경원어인 헬라어로 보면 ‘바구니’는 ‘코피노이’라 칭하는데, 유대인들이 흔히 들고 다니는 목이 좁은 휴대용 병과 같이 생긴 것이라 했다. 유대인들은 이 안에 음식을 넣어 다녔다. 이는 이방인들 손에 닿아 불결하게 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칠병이어에는 보면 ‘광주리’라 하는데 헬라어로는 ‘스푸리데스’라 부른다. 이것은 손으로 드는 바구니와 거의 흡사한 것인데, 사람을 넣을 수 있을 만큼 컸고 이방인들이 널리 사용했다고 한다.
넷째, 먹고 남은 떡을 담은 용기의 수에 차이가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광주리가 남았는데, 칠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만수인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이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필요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이렇듯이 본문을 연구하고 비교해 보면 벳새다 들판에서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과 데가볼리에서 일어난 칠병이어 사건은 서로 다른 두 사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 한 장을 두고 서로 유사한 듯 하면서 다른 두 사건을 연이어 접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연약한 자들의 병을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이 택한 백성이라 칭하여진 유대인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떡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유대인들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먹게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 인종적. 민족적 차별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민족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생명의 떡이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풍요롭게 된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는 것은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다시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핵심 주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성도가 받는 구원의 결과에 대한 모형이다. 종국적으로 성도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장애인도 없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으로 어느 누구도 병들거나 아프지 않으며, 모두가 하나님께서 준비한 풍성한 잔치를 누리며 희락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 모두는 그 날을 소망하여 이 땅의 삶을 하나님 앞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세계 선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세상 모든 민족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옳은데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성경기자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마태복음 14장과 15장에서 서로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두 가지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오늘 우리는 부산의 영도라는 좁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우리 기도와 선교의 지경은 예수님처럼 세계 여러 민족들 사이를 누빌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시간도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애타게 고대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이미 배부른 우리 민족이 애타하는 것 그 몇 배의 갈망이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비교해 보면 오병이어는 한 날에 일어난 사건이다. 한 날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고 병자에 대한 치유와 오병이어의 기적이 모두 일어났다. 그러나, 칠병이어를 보라. 칠병이어는 사흘 동안 일어난 기적이다. 3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수많은 이방인들의 무리를 사로잡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흘 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이방인 무리들은 자기들만 은혜를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종 병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직접 데리고 왔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능력을 맛보게 했다. 반면, 오병이어에 나온 무리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벳새다 들판에 나온 무리들 중에서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것이지, 거기에 모인 무리들이 병자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갈망의 차이가 있다. 오늘 이것이 복음이 이미 우리 사회 깊이 들어온 한국 교회 성도들과 아직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한 세계 여러 민족들 사이의 차이점인 것이다. 복음에 대한 갈망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런 사람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외국에 산다고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아서 되겠는가!
또,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라. 오병이어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의 큰 무리가 나온 것을 보고 다만 불쌍히 여겼다고 했다. (마14:14) 예수님은 저녁 먹을 때가 되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면서도 어떤 감정적인 표현도 없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라. 예수님이 이방인 무리들을 향해 염려를 표현하는 말들은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듯하다. 예수님은 이들이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히 지쳐 객사할 까 크게 염려하셨다. 32절을 다시한번 읽어 보겠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방인들이 지쳐 쓰러질까 하는 염려.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있는 주님의 염려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마음은 미국이나 우리나라, 또 이미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있는 어떤 나라들보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와 민족들에게 향해 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선교를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아침 우리는 이런 점을 묵상하며 세계선교에 우리 자신과 교회도 사용되길 기도해야 하겠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마 15:32-39
미국 캘리포니아 알토스연합감리교회의 건물이 너무 낡아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건물을 수리하는데 최소 1만달러 이상의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작 5천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더구나 50여명의 교인들은 모두 가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인 존 닫슨목사는 주일날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설교한 후 전 교인에게 5달러씩을 나눠주며 당부했습니다. “5달러를 갖고 돈의 가치를 늘리십시오. 2개월 후에 다시 이 돈을 회수할 것입니다 “교인들은 5달러로 각양각색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은 5달러로 쿠키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팔았습니다. 할머니는 털실로 수예품을 만들었서 팔기도 했습니다. 2개월 후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5달러를 그대로 가져온 사람은 4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헌금은 교회수리비로 사용하고도 5천달러가 남았습니다.
우리교회도 교회 옥상의 방수작업과 외벽 페인트를 위해서 3년간 조그만 돈을 모았더니 모든 공사를 하는데 부족하지 않은 액수가 모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땅에 살아가면서 기적을 바라면서 살아갈때가 있습니다. “나한테 기적이 안일어나나! ” 하면서 하늘을 처다 본 적이 한, 두번은 다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집사님이 매일같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하나님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이것만 당첨되면 하나님 앞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면서 매일같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기도 속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 애야 너 기도하는 것도 좋은데, 제발 복권 좀 사고 기도 좀 할래” 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땅에 살아가면서 정말로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라는 간절함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일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야지 만 내가 살수 있는 형편 속에 놓이게 될 때 기적을 달라고 간곡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지적을 원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기적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통해서 우리도 그 기적의 주인공들 되기를 바랍니다.
1.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7병2어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14장에서는 5병이어의 이야기이고 15장에서는 7병2어의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기적이 두 번씩이나 일어난 것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면 이런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고 싶은 것은 이런 기적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적이 일어난 이야기들을 보면 반드시 그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유없는 기적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것이 동기입니다. 그리고 14장에 나오는 기적의 이야기도 “불쌍히 여기사” 하면서 기적의 동기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영혼들을 불쌍히 여긴 배경이 한가지 있는데, 14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세례요한의 순교의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약400여 년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던 시기에 등장한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요한 에게 모여들어서 세례를 받고 그를 따라 다녔던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헤롯 에게 붙잡히고 그리고 헤롯의 생일날 세례요한의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이제 남은 것은 세례요한과 동시대에 등장한 예수님밖에는 바라볼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목자 잃은 양”들처럼 보았던 것입니다. 그 목마른 영혼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따라다니는 그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기적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배가 고파서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 말고도 기적을 일으킨다는 마술사들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아니 그 옛날 모세의 시대에도 마술사들이 있어서 모세와 곁주어서 덩달아 비슷한 기적을 보였던 것을 봅니다.
오늘날에도 마술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관객들을 모아놓고, 화려한 쇼를 하면서 등장을 합니다.
그들의 어떤 행위에서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은 없습니다. 그들은 박수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쑈에 불과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기적도 사람에게 보여서 인기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 없습니다. 몸이 아파하는 영혼들, 귀신들림의 고통 속에 있는 영혼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후에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혔을 때 헤롯왕앞에 끌려간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23장8절에 보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성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고합니다. 즉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싶었던 것은 무슨 마술쇼 같은 것을 자신의 눈앞에서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은 들었고, 왕의 체면에 직접 가서 볼 수도 없고 했는데, 마침 자기 앞에 온 것입니다. 이 앞에서 예수님이 아주 간단한 이적만 보여주었어도 예수님은 풀려 날수도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서는 어떤 이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말 한마디 안 하셨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보여 주실 때는 언제나 그 동기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을 봅니다. 자신의 자랑이나, 명예를 위해서는 절대로 행하지 않으셨던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종교나 또 우리 기독교에서도 마치 이런 일들을 자랑하듯이 사람들에게 내보이면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그런 집회를 열고, 또 광고를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그 은사를 잘못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하시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 정말로 쑈에 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적을 원하십니까. 먼저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기적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주변에 안타까운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을 놓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남들에게 자랑하려는 것이 동기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2. 작은 것에서.
그리고 또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엄청난 기적에 쓰여진 도구가 무엇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또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였습니다. 성경에는 이것은 어린아이가 들고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작은 것 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은것이면 적을수록 기적의 의미는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을 늘 말씀하셨던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에 엘리야가 비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손바닥만한 구름조각을 가지시고 큰 비를 주셨던 주님, 보리떡 5개로, 7개로 물고기 2마리로 시작된 기적이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맛있는 포도주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작다고 하는 것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말씀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작고 작은 겨자씨 하나로 새들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 수 있는 큰 나무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적같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분들의 출발점은 모두가 조그만 가게에서 출발했습니다. 1평, 2평의 작은 옷가게에서 그룹으로 성장한 기업들도 있습니다.
성공한 기업인들의 출발이 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서러워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작은 것이 내 손에 그대로 있느냐 아니면 그것이 주님 손에 옮겨 졌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작은 5병2어가 어린아이의 손에 그대로 있었다면, 한끼 식사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내 작은 물질이 그저 나 하나만의 먹고 살 것 때문에 내 손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 날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손에 옮겨지면 그때부터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것이 주님 손에 옮겨지니까 그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작은 것을 주님 손에 옮겨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기적은 일어납니다. 움켜잡고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나중에는 나도 못 먹고 썩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원하시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작은 것을 주님 손에 올려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약해서 내어놓지 못합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을 놓으면 그것으로 끝이 날것 같아서 내어놓지 못합니다. 드리지 못합니다. 이제 내 손에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는데, 이런 마음이 우리의 것을 주님 손에 올려놓지 못하게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1개 소대가 무더운 벌판 한가운데서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무더위와 갈증에 허덕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아 있는 물이라곤 소대장 허리춤에 있는 수통 1개가 전부였습니다. 소대장은 비장한 마음으로 수통을 열어 병사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병사들은 수통을 돌려가며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수통이 다시 소대장에게 돌아왔을 때 소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물이 반 이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마실 전우를 생각하느라 병사들은 물로 겨우 입을 축였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찰랑거리는 수통은 병사들에게 새 힘을 주었습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함께 나눌 전우들이 옆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견디며 지원군이 올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주님의 손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 있으나 없으나 그리 큰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리느냐 아니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이 기적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앞에 내어놓으면, 주님이 축복해주시면 그것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3. 순종을 통해서.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기적은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제자들의 순종입니다.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라고 합니다. 그리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가서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축사하시자 마자 그것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눠주라고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에 뻥튀기 아저씨들이 있었습니다. 옥수수나, 쌀가루를 가지고 갔다주면 뻥튀기 아저씨들이 가마에 넣고 슬슬 돌리다가, 시간이 되면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뻥이요” 라고 외치면서 뚜껑을 열면 “뻥”하면서 그 안에서 우르르 맛있는 뻥튀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 온통 주위에는 연기가 자욱하고 맛있는 냄새는 그 주변에 가득합니다. 어느 누구도 화내는 사람도, 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다들 좋아했었는지요. 예수님이 기적을 그런 식으로 일으켰다면 까짖 것 나눠주는 것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어디를 보아도 그렇게 기적을 일으켜주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적은 제자들의 손으로 나누어주기 시작할 때 일어난것입니다. 주고 나면 또 생기고, 주고 나면 또 생기는 역사가 일어난것입니다. 그렇게 주고 남은 것과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다 거둬들이니, 열두광주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도 물을 포도주로 만들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하인들입니다. 그 하인들의 순종, 물을 항아리에 갔다 넣으라, 그리고 떠다 주어라 이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그 하인들의 순종이 기적을 이루게 되었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기적은 언제 일어납니까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내 생각에는 안맞지만, 때로는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일단은 순종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기적을 최종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바로 이 순종이 중요합니다.
순종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과 조지 뮬러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스펄전목사는 타 도시에서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들을 위해 300파운드를 모금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그 돈을 조지 뮬러목사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오! 주님, 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 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네,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스펄전목사는 그 돈을 들고 뮬러에게 갔습니다. 뮬러는 무릅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스펄전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습니다. “주여, 제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주시는군요!” 그는 감격하여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순종이 기적을 일으키는 마지막 단계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그기적을 일으킨 도구는 지극히 조그만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라십니까! 기적을 원하십니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라십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것을 주님 손에 올려드리시길 바랍니다. 내 손에 있는 한, 그것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손에 올려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능도, 물질도, 능력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을 위해서 쓰는 것이 바로 주님 손에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는 것이 주님의 손에 올려 놓는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순종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상식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특별한 것입니다. 내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내 지식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사업장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기적입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기적도 일어났는데, 다른 기적은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바로 이런 기적의 주인공들로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