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나는 내소사 월명암이라는 암자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었는데 나의 끄나풀이 되는 안형이 갑자기 장소를 통도사 앞 작은 암자인지 움막인지 잘 모르지만 한적한 곳에 자리잡음으로 해서 나는 끈에 매달린 연 신세라 통도사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월명암은 해질 때가 일품이고 짐도 케이블을 이용해서 옮겨야 하는 고도 같은 곳이라고 했는데 아쉬웠지만 닭대신 꿩이다란 '심뽀'로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이번 여행은 사실 군 시절 유격대 가는 기분으로 가고 싶었다.
마음에도 안 들게 그려진 그림으로 유화물감덩어리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캔버스를 나이프로 박박 긁어내고 '샌드페이퍼'로 문질러 대고는 커다란 백붓으로 하얗게 지우는 마음으로 떠나고픈 그런 여행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지우기 여행 같은 것이랄까?
여행은 목적이 있으면 실패하기가 다반사인데......
나는 여행을 열시에 떠날려고 별렸는데 그것이 잘 안되었다.
우선 떠나기 전에 한동안 못 볼 나의 '애장소' 탄천의 교각 테니스백보드를 먼 여행 인사차 두드리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난 데다 짐도 늦게 정리하고 같이 갈 동생도 꾸물대고 막상 떠날려니 빈손으로 오라고야 했지만 쌀, 라면, 떡국 등의 물건 장만에, 은행도 들려서 없는 돈도 긁어서 갈려니 시간이 꽤 지체되어 11시에 출발을 했다.
하긴 누가 엄청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간다고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니 우리가 떠나는 시간이 가장 적당한 시간일 것이다.
고속도로를 접어들어 내달리니 아직은 귀성객이 붐비는 날짜도 아니고 하루 중 시간도 적당하여 우리를 말리는 것 없이 쭉 내달리니 천안, 대전, 영동......
추풍령에서 내려 우동을 한 그릇 먹을 마음이었는데 아차하여 놓치고 칠곡휴게소에 들려 대충 끼니를 때우는데 어디쯤이냐고 전화가 왔다.
저녁 약속이 있단다. 아직 가지도 않은 길에 우리의 앞 시간이 이미 저당 잡혀 있었다.
대구 근처에서 막혀 적당히 지루하고 허벅지도 적당히 땡길 즈음 드디어 통도사 팻말이 보였다.
팻말을 싸잡고 돌아 나오니 금방 통도사 입구다.
한 이십 년도 더 먼 세월만에 와보지만 이렇게 큰 길에서, 도회지에서 가까운 줄은 미쳐 몰랐다.
절들은 대부분 깊은 산간지역에 있어서 통도사도 당연히 길이나 도회지에서 먼 산 속에 있는 줄 착각했던 모양이다.
절간도 처음처럼 도회지에 '짱박혀'있었다면 오랜 이 땅의 터주대감이었으면서도 지금처럼 교회에 밀리지 안했을지도 모르겠다.
화장실도 우리 어렸을 적에는 안마당도 아니고 꼭 바깥마당 한참 모퉁이에 있어서 얼마나 불편했던가? 밤에는 아예 가는 것을 포기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뒷간하고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사람이란 얄팍해서 거리가 멀면 마음도 먼 법이니 친구도 그렇고 일가 친척도 그렇고 종교도 그럴 것이다.
가까우면 급하게 쪼르륵 달려가서 이것저것 푸념도 하고 고자질도 하고 한 풀이도 하고 그러기가 수월할 것이니 더욱 마음도 가까워질 것이다.
마음이 약할수록 더욱 거리에 민감한 것이니 그런 사람일수록 교회나 절간은 가까워야 되지 않을까?
절 입구에서 기다리니 정말 전화에서처럼 5분도 안 되서 친구가 보인다.
내가 끌고온 트럭을 안형이 잰걸음으로 앞서길래 쫓아가는 둥 마는 둥 할 즈음에 길옆에 차를 대란다.
으잉?
여기는 암자도 절간도 움막도 아닌 그냥 도회지 남의 집 담장인데?
내리라니 내릴 수밖에.......
그런데 그 옆은 그림 같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 친구가 마치 들짐승이 자기만이 다니는 길이 있듯이 더듬는 것 없이 쫄쫄 징검다리를 사뿐히 건너뛰며 우리를 인도하니 바로 옛날 기와집이 나왔다.
냇물은 마치 이승과 저승의 구별인 듯하고 천국과 지옥, 속세와 피안의 세계,
참과 진실 현실과 꿈 오염과 자연의 경계선 같았다.
냇물 이쪽은 절 입구의 마을로서 사람 사는 모습이 복잡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니 절 앞이라고 예외는 아니란 듯이 즐비한 모텔의 나열과 밤이 되면 그런 것들에 대한 알림그림들의 휘황함이며 차들과 사람들의 복잡함이 즐비하지만
냇물 저쪽은 그야말로 산자락 나지막한 곳에 커다란 송림들에 둘려 쌓여서 덩그란히 기와집 두 채만 있다. 거기는 차로는 갈 수가 없고 오리지 이 개울을 징검다리 놓아서만 갈 수 있은 곳이기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검은 사람은 빠지기가 십상인 곳이다. 내가 있는 동안 세 사람이나 그걸 증명해 주었다.
정말이지 그 집은 절묘한 위치에 절묘한 형태로 현실을 바로 코앞에 두고 거짓말처럼 옛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방은 돌 박은 토담 벽으로 기와지붕을 줄로 이고서 둘러 쳐져 있고
두 채의 집 사이도 이 담으로 경계를 그어서 그 속에서도 어떤 구별이 있었다.
먼저 대문이 달린 집은 그 현판의 이름이 '영모정'
영원한 사랑이 있는 정자란 뜻인 모양이다.
이 집은 구조가 어찌나 예쁘고 멋스럽게 지었는지 절간이나 궁궐처럼 호화롭지는 않지만 그 멋스러움은 간단하면서도 아담하고 단아하며 최소한의 크기와 절제를 들였을지라도 고졸한 멋은 수 백년이 지난 거창한 옛집 못지 않다.
그 집에 돌 박은 토담으로 막아서 들어선 또 다른 기와집은 그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인지라 이 본체에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사람 살았던 느낌은 더하여 많은 이야기 거리를 숨기고 있는 듯하였다.
그 집에 들어서니 어느 여자 분이 아랫목에 발 넣고는 그윽한 눈빛을 던지는데
무용가 이모씨란다.
이어서 차를 들 즈음에 사진 하시는 박 모씨가 합석하여 예약이 되어 있다는 어디론가 가잔다. 이름이 철마란 곳이란다. 여기가 삼팔선 근처도 아닌데 이름이 희안하였지만 우리야 무슨 발언권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예의 그 무용가 여인의 차를 타고 가는데 바로 옆인 줄 알았더니 근 한시간을 달려가는데,,,,,,
드디어 철마란 곳에 도착하니 우리를 안내할 차가 온단다.
아니 지금처럼 핸드폰이 지천인 세상에 길 안내 차가 온다니?
처음에는 납득이 안 갔지만 가보니 납득이 갔다.
산길을 꼬불거려 가는데 도저히 핸드폰으론 안내가 안될 길이었다.
드디어 철제문에 도달하여 문을 열고도 한참을 차로 들어가니 비로서 집이 나왔다.
도대체가 이렇게 큰 땅덩어리를 누가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작업실 터 백 평도 평생의 꿈으로 삼고 살고 있는 놈도 있는데 철문에서 3km를 들어와야 비로서 집에 도달하는 덩어리는 도대체 얼마만한 꿈 덩어리일까 감이 안 잡혔다.
우리는 그런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 곳에는 한복연구가 김모씨와 그 한복원단 천연염색을 한다는 장모씨를 만났다.
거실에 걸려 있는 한복 중에 색이 너무도 아름다운 한 벌이 있어 문뜩 이걸 사가면 마누라가 평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몇 년은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까 하는 망상에 친구에게 가격을 대충 물으니 한 이 백 만원은 할거란다.
이 나이에 무슨 애정이 있으랴만 그래도 한 품의 애정표시도 결국은 돈의 벽의 두께만 실감하고 딴 짓을 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한복의 색은 비록 몇 가지가 안되지만 그 어떤 그림이 주는 감동보다도 깊은 것이었다.
암갈색 계열의 치마에 쑥색 계열 삼희장 저고리와 투명한 주홍색의 옷고름 포인트는 이 세상여인 누가 입어도,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미인이 안될 수가 없는 그런 색감이었다. 그 색들이 모두 천연색이다 보니 정확한 색명은 만든 이도 모르지만 아름다움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세계였다.
천연염색의 깊이가 주는 감동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물감색의 깊이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알고 보니 정성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세월이 익혀서 내는 데다 장인의 손길이 만나서 나들어 지는 색이니 기계가 만들어 내는 색과 비교가 안되었다.
황토색물 들이는데도 이-삼십번의 물을 반복하여 들이고 시간도 엄청 걸린다니 그 하찮은 흙에서도 깊이 있는 색을 뽑아 낼 수 있고 그런 끝없는 정성을 들여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하찮은 것에 들인 정성이기에 더 깊은 감동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목덜미에 둘둘거리고 간 종로2가 '이어카'상인한테 오천 원 주고 산 내 '마후라'는 그 황토색과 옷고름색 중간색이었지만 그런 색조나 질감의 반열에서는 너무나 멀고 그런 천연색의 옷감에 비하면 목에 때 같아서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 자기 삶의 깊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는 길에 그 천 조간 한 두어 개라도 목에 걸고 싶어서 혹시나 했지만 그 옷 만드는 이의 마음은 너무나 깊어서 접근 불능이었다.
밤은 깊어 갔지만 박선생과 안형의 노래를 들으며 술잔은 기울어지며 밤은 더욱 깊어가고 결국 우리는 3시가 되서야 잠을 청하였지만 아침에도 일찍 일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정자로 돌아와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온 떡라면으로 점심을 먹고는 통도사로 들어갔다.
통도사 입구는 다른 많은 절처럼 커다란 소나무들이 즐비한 숲길이었다.
워낙이 낮은 곳이어서 그 깊은 맛은 다소 적었지만 그래도 그 소나무들의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그 길을 거쳐간 사람들 삶의 무게만큼이나 다양하였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이란다. 그 중에서도 불보사찰이라고 해서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절이란다.
그 옛날에 이 먼 곳까지 정말 그런 유리알같은 물건을 가지고 왔을까 갸우뜽스럽고 우리나라에도 적멸보궁이 여기 말고도 더 있으니 인도 중국의 절들에 있는 것과 합하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니 진실여부가 의심도 되지만 종교의 힘이란 모든 불가능한 것에의 실현을 씨로 삼아 번창하는 것이니 그런 것을 따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 저기 둘러보니 명성에 걸맞게 규모도 컷다.
늘어선 건물들의 빼곡함이 대단하였지만 유독 내 눈에 띄는 것은 대웅전 꽃문창살과 특히 그 밑의 길다란 널판창 그림이었다.
나무를 깍고 다듬어서 이런 저런 형상을 각을 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였는데 적멸보궁 전체의 빛 바랜 단청과 함께 그것도 모두 빛이 바래서 채색의 흔적만이 보이고 그 속 들어난 나무테의 연질과 강질의 풍화작용에 의한 곡선적 흐름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오히려 색이 벗겨져 있음으로 해서 그 위에 마음의 색을 마음대로 칠할 수가 있어서 좋았고
그 시간의 흔적이 깊어서 좋았고 속 들어난 나무의 숨결이 너무도 자연의 본질 같아서 좋았다.
그 들어난 형상들에서 풍겨나오는 장인들의 칼맛은 닳아서 다 없어 졌지만 그 들의 숨결은 곡선으로, 깊이로, 입체로 들어나 나한테 무엇인가 말하는 듯하였지만 불심없는 내 눈에는 그저 그 옛날 장인의 인간적인 손길만이 따뜻하게 느껴져 올뿐이었다.
부처의 사리가 있다고 하는 그 곳은 넓직한 사리탑의 적막함이 겨울날의 선듯한 차가운 공기와 함께 덤덤하게 나한테는 다가올 뿐이었지만 같이 간 불심 깊은 박 선생이나 안형은 그 이상의 무엇이 감동으로 져미는 듯 숙연한 마음들이었다.
겨울날 늦은 오후의 절은 긴 그림자와 무거운 기와장에 가리고 눌려서 나에게 그 고즈넉한 따뜻함을 느낄 짬을 주지 않았다.
다시 정자로 돌아와 나는 목판화를 시작할 마음으로 목판에 칼을 대기 시작하였고 안형은 연필을 잡고 캔버스를 채우기 시작하였고 박 선생은 울산으로 돌아 가셨다.
나와 내 동생은 일찍 잠에 들었지만 안형은 새벽까지 작업을 하다 잠을 청했는데 우리들이 코를 경쟁적으로 골면서 잘 자더란다.
드디어 다음 날은 초하룻날 나와 안형은 일출을 보러 산에 오르기로 하고는 자명종 소리에 새벽 5시 반에 깨서는 무장하고 절에 들러서 안형은 여기저기 절을 하고 나는 그 옆에서 경건한 마음이나 더할 뿐이었지만 여명 전의 절간은 정말이지 '고색창연' 그 자체였다.
색은 안보이지만 어제 봤던 느낌들이 연상되면서 간간이 비추는 불빛 속에 보이는 절간 건물들의 실루엣은 '고색'의 연출 그 자체였다.
그 무언의 합주들은 인간의 바램을 먹고 키어온 커다란 적막이었다.
그런 적막을 우리들의 발소리와 신도들의 발소리에 덮여가고 우리는 산 쪽으로 차를 돌려
올라가니 의외로 길도 많고 암자도 많아서 어디로 가야할지 한참을 헤매서 겨우 차를 대고 접어든 길이 백운암이란 암자로 가는 길이었다.
이미 사방은 밝아 오고 있어서 나는 발길을 자꾸 재촉하였다.
첫 해를 본다는 일념과 조급한 마음은 발을 가볍게 하였다.
오르는 중에 이미 암자에 들려 일 년의 안녕을 빌고 내려오는 신도들이 몇 명 눈에 띈다.
그 중에 나의 둘 째만한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내려오는 어떤 남자가 보인다.
우리 둘쨋 놈은 아직도 자고 있을 텐데 그 소년의 아버지의 불심이 어린애의 잠도 뛰어 넘었으니 그 아버지의 정의 깊이가 감동적이었다.
혹시는 그 아버지의 불심에 너무 감동받은 그 소년이 나중에 커서 머리 깍는다고 하면 어찌 될까 하는 마음에 그 둘의 정에 찬물을 끼얹으며 산을 오르니 나의 재촉하는 발길에 안형이 조금은 '보대끼는' 모양이었지만 난 열심히 박차고 나갔다.
오로지 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헛디뎌서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계속 내딛어도 도대체 능선의 서쪽으로만 올라가니 언제 해를 볼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갈까 조금함만 앞섰다.
한 참을 올라가서 암자가 보일 즈음에 나는 길을 가로질렀다.
기어서 동쪽 능선에 올라서니 어찌나 서둘러서 올라 왔던지 헛구역질이 다 나고 약간 중심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군대 있을 때 선착순을 한 그 때 같았다.
무슨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미련스럽게 허겁지겁 올라왔는지 내가 조금은 한심스러웠다. 그래도 고개를 들어서 나무들 사이로 해 있는 쪽을 보니 해가 아직 이른 것인지 구름에 가린 것인지 사방은 완전히 밝았지만 해 '코백이'도 안 보였다.
우리는 다시 암자 쪽으로 발을 돌려 불심 깊은 안형이 불전에 지폐 꽂아 넣고 절할 때 나도 곁다리로 옆에 기생하여 절을 하였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공짜인데 친구 박자도 맞추어 줄겸 절을 하고는 밖에 나와 돌담에 기대서서 해 있는 쪽을 보니 거기가 우리가 찾던 바로 그곳이었다.
명당이란 모르긴 해도 이런 곳을 두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때 문득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란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자연의 무량함 그 것이었다.
멀리 산들이 중첩되어 있고 아침 기운에 잔잔히 깔린 뿌연 공기의 운행과 잔잔한 운무 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한 산들의 어울어짐은 '쪼브장한' 내 마음도 넓은 듯 착각하기에 충분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왼쪽 능선의 뚝 떨어지면서 그 한 켠의 운무 속으로 내리 꽂히는 모습은 그런 겹겹한 아름다움에 가하는 파격이었다.
불심과 정성으로 한알 한알 쌓았을 돌담 앞에 여러 가지 나무의 실가지들이 있어 근경의 사실감에 덧 칠해져서 먼 거리의 깊이감까지 강조되고 그것들이 주는 현실감때문에 저 멀리 깔려 있는 심연함은 더욱 무슨 영계의 세계처럼 마음에 와 닿았다.
암자는 조촐하고 인적이 없이 본당과 삼신각의 촛불만이 현실감을 나타낼 즈음에 잠시 마음을 허공에 띄워 나도 영계의 한 영역에서 아침 묵상에 젖는 듯 착각이 서리었다.
문득 두고온 식구들 생각에 돌담에 기대서 집에 핸드폰을 치니 단잠 자는 마누라만 깨운 꼴이 되어 버렸다.
전화를 접고 머리를 드니 드디어 해가 구름사이로 벼잠뱅이에 뭐 삐지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 친구는 이 기를 받아야 일년이 편하다고 숨을 헐떡이기에 나도 덩달아 숨을 껄덕거려 보지만 그러건 말건 해는 계속 얼굴을 내미는데 그 환한 기운에 내 가슴에 가라앉는 듯 마음이 편하고 자연이 고맙고 친구가 고마워 그저 멍청한 마음을 유지하며 한 참을 서 있으니 해는 벌써 온전한 모습이다.
바로 뒤의 약수물을 홀짝이며 정신을 차려 오늘의 일정에 대 만족을 서로 확인하고는 우리둘은 오던 길을 내려 하산하였다.
겨우 문을 연 한집을 발견하여 출출함을 달래고 정자에 드니
잉! 어제 잠시 나 혼자 있을 적에 들렸던 그 땡초아저씨가 자리를 잡고 누워있다.
그 친구는 염치는 말 할 것도 없고 잠도 없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에 남의 안방에서 제집처럼 누워 있다니.
대충 달래고 얼르고 해서 안형이 택시비를 줘서 보내니 어디 암자에 괴롭히러 간단다.
그 친구는 남 괴롭히는 맛으로 생명을 연명하는 모양이다.
이어서 작업을 할까 하는데 이 정자에 원래 주인한테 사용허가를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 한복연구가 김모씨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온단다.
우리는 군대 있을 때 별 뜰 때처럼 열심히 갈고 닦아서 맞을 준비를 하니,
사단장 공관에 있을 적에 그 마누라가 와서 공관을 다 뒤집어 놓을 때처럼 이것저것을 뒤집어 놓으니 우리도 덩달아 손을 거들어 다시 더 정리를 하고는 바베큐를 준비하였다.
마침 인천에 설세러 갔던 박선생도 오시고 해서 질펀한 돼지 바베큐 파티가 쌀쌀하지만 모닷불을 난로 삼아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면서 홀짝이는 술맛이 술 못하는 나도 나쁘지가 안했다.
추위에 멋모르고 들이킨 술잔이 '배기기'가 힘 들 즈음 난 이승과 저승의 경계 암흑과 '난리부르스'의 경계인 그 예의 개울을 건너 모텔로 갔다.
어차피 우리 권총들은 오늘밤은 여관 신세를 져야 할 판이라서 내가 말하자면 전초병으로 먼저 간 꼴이 되었다.
방은 크고 넉넉하였지만 온기는 적고 샤워기의 물은 쫄쫄거려서 머리숱이 쓸데없이 많고 긴 내 머리통 감기가 여간 일이 아니었지만 술도 깰 겸 차근히 '빨고는' 잠을 청하니 넓직한 방의 큰 대자 잠이 참으로 편했다. 아무래도 내 몸은 정자에는 길들여질 '몸뚱아리'가 아닌 모양이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정자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먹고(여기서는 두끼 먹는 것도 많이 먹는 편) 설거지를 흐르는 찬물에 한 참을 쪼그리고 앉아서 하고는 우리 모두 다시 절에 가기로 했다.
우리들만의 '귀빈용 전용 통로'가 있어서 절로 가는데 강변에 버들강이지가 그 보들보들한 털을 벌써 많이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추워서 군불 때며 찬 머리통을 움켜쥐며 잠을 청하고 낮에도 앉은 등줄기 찬바람을 보듬느라 애썼었는데 이 놈들은 용케도 봄 냄새를 맞고 얼굴을 삐죽 내밀다니......
그러고 보면 정자안 버드나무 가지에도 벌써 새싹이 조그맣게 난 것을 알려 주던 어제의 기억이 난다.
자연의 흐름을 용케도 알아차리는 그 들의 예견력이 늘 미련하게 눈앞만 보고 전전긍긍하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다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이 절로 난다.
이번에 들린 곳은 통도사 박물관.
누군가 시주를 해서 지은 박물관이란다. 돌의 웅장한 위용이라니......
절간에는 더 이상 건물을 안 지으면 안될까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산에 있는 절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이제 도시에다나 절을 지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현대적 건물양식으로다 말이다.
어차피 기술자가 없어서 고식 건축은 어렵다고 하니 어설프게 절간에 새 건물을 지을 것이 아니라 아주 시내 복판에 절간들을 지으면 어떨지.
박물관 건물은 그래도 그 안에는 볼 것이 많아서 한참을 보았다.
탱화가 아주 많았다.
대부분의 그림들이 불투명한 천연안료를 사용하여서 답답한 느낌이었지만 딱 한 점은 물감이 투명했고 기법도 퍽 서양적이어서 음영의 효과가 두두러져 입체감이 돋보이는 그림이 하나 있어 눈에 띄었다.
꼭 다른 그림들이 포스터 칼라로 그렸으면 그것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
탱화가 아주 복잡한 그림이고 일정한 격식과 훈련과정을 거쳐서 그리다 보니 파격이란 것이 어려워서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만들기가 쉽지 안 했을 텐데 신기해 보였다.
어떤 소장자가 불교 예술품들이 아닌 일반 예술품을 이곳에 기증하여 특별실을 마련하였는데 그 양도 많고 다양해서 불화에 더불어 의외의 즐거운 마음을 더했다.
나는 거기서 이응로씨와 김기창씨의 아주 초기 작품을 볼 수가 있었는데 전에는 못 본 그림이거니와 그런 풍도 처음이어서 무척 새로웠다.
하지만 다들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정자에 돌아와 점심 겸 저녁을 먹고는 갈려는 이들을 위한 노래를 안형한테 청하여 들을 즈음에 무용가 이모씨와 그 후배와 또 울산에서 양산박(뭐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주인 마나님이 오셔서 기분이 무르익을 즈음에 그 땡초가 또 우당땅땅 들어 와서 찬 물을 끼얹으니 방법이 없었지만 이번에 박 선생이 택시비를 줘서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형 먹으라고 암자스님한테 뺏아온 토종꿀 한 통과 무슨 나무 진액이란 것도 내 놓았다. 거참 별스런 땡초다.
김여사 패거리는 돌아가고 우리들은 다시 모여 앉아서 무용가가 가지고 온 생굴과 한보따리 사가지고 온 '오꼬시'과자를 먹으며 음악 잔치에 들어갔다.
예의 그 안형의 기타와 노래 덧붙여진 김 여사가 '뿅'가서 펑펑 울게 만들었던 박 선생의 기타와 함께 불려지는 이을라 끊을락 하는 젖어드는 노래.......
한참을 듣다가 갈 사람은 가고 있을 사람인 우리 넷만 남아서 어깨 비비며 자고 안형은 작업을 더하다 잠을 청하고......
아침에 또 땡초가 우당땅땅 왔다.
그나마 오늘아침은 맨 정신이다 그래도 말은 오락가락이다.
휴우! 이 집에 귀신이 많다던데 귀신들은 다 뭐하는지 .....
나와 동생은 먼길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김 여사가 아무래도 난 눈치가 보여서 오늘 제주도 갔다 오기 전에 돌아 갈려고 어제부터 마음을 먹고 있던 터라 바리바리 짐을 챙기고 일어 날려는데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라기에 어제 남은 미역국에 밥을 대충 말아서 훌훌거리고 그 피안의 다리인 징검돌다리를 건너서 이승의 세상으로 완전히 돌아오니 그 동안의 시간이 '꿈인가 생시인가 아득하여 일 순 혼미하였지만' 마음을 가다듬어 트럭을 몰고는 집을 향했다.
원래 계획의 꼭 반 토막만을 잘라 쓰고 돌아가는 발길이라 약간은 서운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대구쯤 오니 차들이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귀경차량이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하루만이라도 더 있다가 나왔어야 되는데......"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방법이 없던 차에 뻥 뚫린 옆길이 있어 내 달리니 중앙고속도로......
안동을 지날 즈음에 갑자기 테니스치는 친구가 생각나서 접선하여 만났으나 시간관계로 공은 못 치고 식사만 대접받고 올라오는데 남원주부터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다시 진천 친구 화실로 발을 돌려서 거기서 하루를 묵고는 남은 판화작업도 마치고 집에 도착하여
결국 6일 동안의 여행은 막을 내려 버렸다.
집에 도착하니 마누라가 한마디한다.
"윗집 지서엄마 말이 '갈 때는 폼나게 가는 것 같았지만 알고보면 궁상떨러 간거구만' 하던데"
남 좋은 여행에 초를 쳐서라도 집 지킨 것을 화풀이하려는 건지 고생에 위안을 할려고 하는 말인지 통 감이 안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