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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술을 편하게 생각하고, 마치 신앙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이 쉽게 마시거나 합리화하며, 생각보다는 많이 가볍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고..
게다가 믿음이 좋다고 알려진 연예인들 중에서도 술은 자연스럽게 마시면서 방송에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시키는 이들이 꽤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교회의 중직자들까지 그런 경우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는 목회자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있는 현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약용이나 요리용, 체질에 따른 처방이나 불가피한 목적 등을 위한 술에 대해서 까지 문제 제기를 하기는 어렵고, 또한 한편으로는 올바른 믿음으로 제대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가 맞는 것이라면 술을 마신다고 해서 구원이 돌이켜 지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며, 게다가 음주하는 신앙인들에 대해 마음대로 정죄하고 함부로 비난하는 것도 바람직한 영성은 아닌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음주나 흡연 등이 잘못된 것임은 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아주 가벼운 허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무엇보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포도주를 마셨기에, 특히 오늘날의 사회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술의 비중이 작지 않는 것이기에 신앙과 연계시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간섭을 꺼리면서 쉽게 무시하고 저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며,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때로는 피 흘리기 까지도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상 그런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고 쉽게 합리화시키면 성경의 말씀들에 있어 모든 곳들이 희미해지거나 흔들리거나 혼란스러워 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그 누구보다 한 줄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여주인의 유혹을 목숨 걸다시피 하면서 거절한 요셉의 억울한 투옥,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고 3000명의 별동대를 꾸려 뒤쫓는 사울 왕임에도 불구하고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의 옷자락을 벤 일 정도로도 과하리만큼 보였던 다윗의 찔림과 자복, 또한 이방왕의 진미를 율법 말씀의 한 두 구절을 따라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피하기로 결단했던 다니엘의 처절한 몸부림 등이..
게다가 그들과 함께, 바로 그러한 믿음과 함께 세상이 짐작도 못할 하늘의 힘들로 생생하게 일하신 하나님의 응답과 기적과 복들 등과 같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의 치열한 몸부림들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들이 특별하지 않게 되고 의미가 절하될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세상과 구별되는 살아 있는 신앙은커녕 세속화되거나 사단의 밥이 되기 쉬울 것이고, 그에 있어서 자기 몫의 대가나 징계나 결과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 지경에서도 빛과 소금들이 아닌 방해들이나 민폐들이 적지 아니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내 생각이나 상황들, 시대적 분위기와 역할들이 중요하고 고려되어 져야 한다고 한들 하나님보다 더 우선될 수는 없는 것이며, 특히 우리의 모든 기준은 절대 진리이자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사실 많은 이들이 술을 합리화하는데 있어 가장 큰 핑계와 방패로 삼고 있는 예수님 당시나 이스라엘의 전통에 있어서의 포도주는 오늘 우리들의 술 개념과 적지 아니 다르거나 넘어서는 부분이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지역 특성 상 석회가 섞인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음료적 특성과 당시 열악한 의료 체계에서의 자연적인 재료의 특성을 활용한 치료적인 용도, 더 나아가 아주 오랜 세월이 녹아진 문화와 검증된 전통의 측면에서 많이 쓰이고 활용되어진 시대적, 지역적 상황과 관례, 더 나아가 속성과 형편과 여건이 고려되어진 필요에 따른 하나님의 도구 등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만일 그러한 경우들이 아니라 인간적 연약과 세상적 욕망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취함이 목적인 경우인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아래 본문에서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과 같이 단지 마시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보지도 말라고 하시는 강력한 명령이 술에 있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신약의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울을 통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하신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술을 직설적으로 경계하게 하시면서 심지어는 술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위험한 것이며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인지 성령님과 마치 맞짱 뜨는 모양새로 진정 술과 비교해서 반대급부로서의 성령님께 집중해야 함을 생각 이상으로 명료하게 명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현실적인 면에 있어서도 수많은 세월에 걸쳐서, 진정 오늘 날에 있어서도 술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제와 죄악들이 기인해 왔는지 말로 다 표현 못하는 정도인 것이고, 실상 우리 인생들이 술로 인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지고 약해지며 처참해 지고 위태해 질 수 있는지는 다 표현하거나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며, 사실 극히 일부라도 다 세지도, 짐작하지도 못할 정도로 잘 증명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술을 허용하고 합리화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소에는 자기 식대로 관리나 제어나 통제가 어느 정도 되다가도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거나 갑작스레 무슨 일이 생기거나 자신도 모르게 약해지거나 작지 않은 스트레스에 놓이게 되거나 치명적인 유혹을 받게 등과 같은 상황들이 될 때 술과 함께 순식간에 넘어지거나 실수를 하거나 또는 고통과 상처와 갈등을 주고받게 되는 등과 같은 작지 않은 문제들, 사건들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생기곤 하는 사례들이 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이고, 실상 아주 가까운 곳들에서부터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험해 지게 된 일들까지도 하나 둘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술로 인해 당장에 문제들이 생기거나 날마다 아주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하지는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어떤 면에서는 장점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들도 있는 것이긴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술의 주 성분인 알코올이라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에 있어 깨어 있지 못하게 하고 혼미하게 하는 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며, 상황과 환경과 분위기와 컨디션 등에도 어떤 식으로든 적잖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인 것이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 오늘 밤에라도 당장 얼마든지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게다가 술이 더 들어가면서 어떻게 될지는 신체적, 육체적, 감정적, 화학적 현상 등에 있어 사실 그 자신부터도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것이고, 무엇보다 맨 정신에 있어서도 살아 있는 믿음이 되고 자신을 부인하며 죄악들을 경계하고 정욕과 세속과 온갖 불신앙들 등의 유혹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데 술을 마시면서는 오죽할까 어렵지 않게 유추되고 정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술과 같이, 사실상 담배나 도박이나 음란물이나 유해 약물 등 술과 유사한 모든 해로울 수 있고 이성이나 감정이나 각오나 결단을 흐리거나 마비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중독되게도 할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신앙이나 영성을 좀 먹게 하는 모든 종류들에서부터 더 이상 옛 사람과 같이 나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이 아닌 순간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을 갈망하며 그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치열하게 싸우고 결단하며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 깨어 있는 믿음, 산 신앙이 되기란 심히 힘들다고 할 수 있으며..
게다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성령님으로 충만케 되기는 더 힘들고, 뿐만 아니라 더욱 힘들어 보이는 말씀이나 신앙적 부분들에 있어서는 실천은커녕 아예 고민하기도 힘들어 지고 신앙적 성장도 힘들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십자가나 좁은 길을 갈망하고 몸부림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사에 더 많이 타협케 되고, 더 많은 말씀들을 편하게 생각하고 합리화시키기 쉬울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인생들 자체가, 다른 그 누구보다 바로 나 자신이야 말로 얼마나 연약하고 넘어지기 쉬인 존재인지를 가면 갈수록 더 심각하게 망각하게 될 것인데 그러한 면들이야 말로 미지근해지고 맛을 잃어가는 영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죄와 세속과 정욕들 등으로 병들거나 죽은 듯이 되는 신앙의 과정, 심지어는 변질되고 뒤틀리며 자신도 모르게 어둠의 도구로 까지 점점 진행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현실적, 실질적으로 거의 지름길과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 누구라도 그러한 술과 함께 병행하면서 얼마든지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거나 또는 음행이나 혼미, 다툼, 자만, 나태, 타협 등 다른 모양의 죄악들, 불신앙들로 이어질 위험들이 작다고 쉽게 말하기가 힘들 것인데, 아마 실상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실 다른 그 무엇보다 진정 작아 보이든 커 보이든 말씀대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며 신실하고 긴급한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실상은 어둠의 세력들이 우는 사자들과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이 험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날마다 순간마다 수시로 그렇지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쨌든 그러한 때에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고 포기하며 더욱 침륜에 빠지게 되기보다는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즉시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모하며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다시 한 번 더 싸우고 결단하는 것이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이나 잘못들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는 것이며, 무엇보다 주야로 더욱 말씀으로, 말씀의 자리로, 말씀의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인 것일 뿐 아니라 죄와 유혹들에 있어서 예방도 되고 평상시의 하늘의 힘과 은혜들의 계속성, 더 나아가 가면 갈수록 더더욱 충만해 지고 생생해 지며 강렬해 질 수 있게 되는 유일하다시피한 방법과 통로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진정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이야 말로 병든 신앙이나 죽은듯한 신앙 대신 조금이라도 더 깨어 있게 되고 갈수록 더 살아 있는 신앙이 되게 하며, 더 나아가 가면 갈수록 더 죄와 세속들을 이기고 유혹과 시험들을 이기며, 다양한 모양의 악한 세력들을 이기고, 심지어는 온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며, 다른 그 무엇보다 하늘의 힘과 응답들, 역전과 복들 등으로 더욱 차고 넘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명료하고 절대적인 통로인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모든 것이자 전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그러한 말씀의 몸부림들 하나하나에 있어서, 특히 치열한 말씀대로의 믿음의 열심들과 함께 더욱 충만하고 강력하게 기뻐 역사하시는데 진정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직접적, 현실적,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작아 보이는 것에서 부터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자,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몸부림을 침과 함께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읽고 결단하며 실천하고 증거하며 사는 자들을 생각 이상으로 기뻐하시고..
그 이상으로 하늘의 힘으로 채우시며, 복음의 능력과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더욱 풍성하게 보게 하시며 실제로 경험케 하시고, 갈수록 더 큰 믿음의 세계와 역사와 기업들로 실질적으로 누리게 해 나가시는 분인 것입니다..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른 그 누구보다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술, 담배, 음란물, 향정신성 약물, 도박 등과 같이 온갖 혼미케 하고 중독성 있는 것들 및 유혹들과 처절하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절실하게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고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바로 그러한 말씀의 사람들, 믿음의 몸부림들과 함께 기뻐 역사하시고 강렬하게 누리게 하시며 풍성하게 예비하시는 것인데..
곧 온갖 하늘의 힘과 응답의 일들, 영적 각성과 부흥의 역사들, 특히 모든 말씀의 절정이자 결정체이며 복합체라 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들, 게다가 다름 아닌 절대 진리이자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중심인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에 거하게 하시는 것이고 넘치게 하시는 것으로 진정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 시간 우리의 삶의 자리와 기도 제목들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로 엄청나고 실제적인 것인지를 그러한 믿음의 사람 그 자신부터 생생히 볼 수 있게 하시고 경험케 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그를 통해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그의 지경이, 이 세상이 함께 누릴 수 있게 하는 손길과 도구와 통로로도 삼으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잠23:29~31)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0월 31일(목)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