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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
마 16:1-12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 16:1-12 / [이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막8:11-13,눅12:54-56]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러 와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을 보고 날씨는 곧잘 알아맞힌다. 오늘 저녁에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 아침에는 날씨가 좋겠군. 오늘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날씨가 종일 궂겠군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시대의 징조는 분별할 줄 모른다. 4) 너희 악하고 믿음이 없는 백성은 하늘에 어떤 징조를 나타내 주기를 내게 요구하지만 요나에게서 일어났던 이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 두고 떠나가셨다. 5)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막8:14-21]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에 닿은 후에야 비로소 먹을 것을 준비해 오는 것은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 이때 예수께서는 `정신을 차리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7) 제자들은 자기들이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고 생각하였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하느냐? 9)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덩어리로 내가 5천명이나 먹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러고도 몇 광주리가 남지 않았느냐? 10) 또 내가 4천 명을 먹였을 때도 얼마나 남았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그런데도 내가 먹는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고 생각하느냐? 다시 말한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12) 그제야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룩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1-4)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큰 무리를 먹이신 표적을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한 이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수많은 표적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보더라도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정죄할 근거만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데 있어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만과 이기심은 진리를 왜곡하고 배척하는 동일한 목표로는 원수도 협력하게 만듭니다. 무릇 지킬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먹을 것에 집착하는 제자들(5-12)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이른 제자들은 음식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 거짓 경건, 율법주의, 의식주의와 사두개파 사람들의 신학적 자유주의, 회의주의, 합리주의라는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음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여기고 대책을 논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큰 무리를 먹이신 상기시키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의 교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면 영적인 시각을 잃어버립니다. 기적적인 은혜를 경험하고도 육적인 문제를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적용: 진리를 추구하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 있습니까? 마음을 지키기보다 신비롭고 영적인 체험만을 갈구하지는 않습니까?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집착과 염려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한 적은 없습니까?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인 강병화 교수는 1984년부터 전국의 산과 들을 다니며 야생 들풀을 채집했습니다. 그 결과 100과 1,220 초종에 속하는 4,439종을 수집해 왔으며, 1991년에 야생 초본 식물자원 종자은행을 설립하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이 일로 언론에서 취재를 왔는데, 기사의 끝에 실린 강병화 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잡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그게 바로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그 역시 잡초가 되며 산삼이라 해도 엉뚱한데 나면 잡초가 되는 것입니다. 잡초란 단지 뿌리를 내린 곳이 다를 뿐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모든 풀은 다 이름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 설 교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마 16:1 / 이필재목사
다음 주일이 종교개혁주일인데 다음 주일 예배에 제가 목사님 한분을 초대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4천여 개의 우리 한인교회 중에서 훌륭하게 성장을 했고 또, 많은 교우들에게 존경을 받는 아주 훌륭한 이민교회에 앞서가는 목사님 한분을 주일예배 설교 요청을 했는데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주일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일일부흥회하는 거 같이 훌륭한 목사님이 오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시고 다음주일에 할 종교개혁 주일설교를 오늘 앞당겨서 준비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등장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아주 뚜렷한 일은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얼마나 괴롭혔느냐 하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똑같이 이 사람들을 향해서 아주 극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에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얼마나 극한 표현입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 예수님도 똑같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두새인, 사두개인을 보고 “독사들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이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왜 싫어하셨는가? 오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왔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왔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이 예수를 때려 잡을까 입니다. 오늘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합니다. “만약 당신 말대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만한 표적을 보여 달라. 못 보여주면 당신은 거짓말이다.” 이런 당돌하고 상식 없는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나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지 말라. 위험하다. 저들은 마귀들이다.” 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싫어하셨고 무엇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인지 밝혀보면 그 이유를 우리가 알게 됩니다.
먼저 사두개인이란 무슨 말인가? 유대 나라는 민족과 국가 형성이 종교적으로 설립된 특수함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사역자로 쓰셨기 때문에 그의 혈통적 후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유일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출발했기 때문에 저마다 가장 열심히 하려는 일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열심히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도 생겼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다 다른 것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의 차이로 종교적인 파를 생겨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그렇게 해라. 우리들은 이렇게 하겠다.” 그래서 파가 생기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르면서도 동방정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로마가톨릭이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도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이렇게 여러 가지 파가 있습니다. 이런 파가 많이 생겨난 이유는 저마다 하나님의 뜻을 더 훌륭하게 지킨다고 하는 논리와 진리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맞지 않았을 때 갈라졌습니다. “너희들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겠다.” 그래서 파마다 독특한 자신들의 특색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나라는 구약 때부터 대표적인 두 파가 있는데 바로 바리새파, 사두개파 이렇게 둘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러면 이 사두개파의 특징은 무엇이며 바리새파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사두개파의 특징은 귀족 계급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자기들의 호화스러운 귀족 생활이 다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합니다. 세속주의로 타락했습니다. 헬라 문화를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로마 정부와 손을 잡고 권력에 될 수 있는 대로 아부를 하면서 육신적으로 좋은 것만을 누리면서 살고자 하는 세속주의 신학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두개파는 로마와 가깝습니다. 우리 익숙한 말로 표현을 한다면 친일파와 같은 친로마파입니다. 로마가 하는 일을 다 찬성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교리를 보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천사도 없다고 하고 인간은 영도 없다고 합니다. 현실만 있다고 합니다. 내세관이 없으니까 현실주의 사상에만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속화된 종교의 한 학파가 사두개파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교리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나라가 있고 영생을 누리고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이게 모세의 율법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7형제가 살았는데 모두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7형제가 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으니 천국에서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세속의 세계관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 가서도 장가들 걱정을 하느냐? 그것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가고 천사들과 같으니라.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하였도다.” 그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세 가지입니다. 신관, 세계관, 내세관입니다. 신관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천하 만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 행복에 필요한대로 이용하고 살아도 됩니다. 내세관은 영생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두개의 유형이 가장 철저하게 나타난 역사가 교권주의로 우리 기독교 역사에 잘 나타났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까지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 성서의 진리를 필요한대로 마음대로 뒤집어 이용함으로써 죄 없는 민족을 수없이 피 흘리게 한 역사입니다. 우리는 종교재판이라는 말도 많이 들어봤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1, 2, 3, 4부에 예배드리는 이 모든 사람을 교회에서 무참하게 다 죽였다면 어떻게 생각이 되십니까? 옛날에는 그랬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주님의 뜻을 새롭게 찾으려는 개신교 신자들을 교회에 다 오라고 해서 불러놓고 수만 명씩 그 자리에서, 성전에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교권주의로 사람을 살해하고 죽인 역사는 기독교가 아주 영원히 씻지 못할 죄로 교회가 잘못되면 그런 죄를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을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바로 이런 사두개적인 당시의 교권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잡혀서 죽을 뻔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이 인간에게 베푸는 가장 큰 선물은 영혼의 구원을 누려서 영생을 누리는 것인데 사두개인들은 영혼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만 잘 살도록 하는 것에 치중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사두개인의 말을 듣지 말라. 큰일 난다.” 천국도, 성령도, 부활도 없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니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지옥 갈 염려가 없습니다.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니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전도 사역을 보면 바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종교화의 사역이고 하나는 비종교화의 사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화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종교화 작업을 시켜서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고 성경공부를 시키고 금식을 훈련시키고 회개 집회를 참석하게 하고 신비한 것을 체험하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부흥회를 열어서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만들고 속된 것은 금하게 하는 훈련을 시키고 종교화시켜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을 빨리 영양을 집어넣어서 건강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급하면 링거 주사 약을 투입하고 보약을 지어 먹여서 빨리 회복되도록 영적인 사역을 해주어야 그게 종교화 작업이 됩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도 사두개적인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닙니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가봤나? 죽었다가 산다고 했는데 그때 가봐야 알지 어떻게 믿겠어?’ 그러나 교회는 열심히 나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파들의 주장이 많이 있는데 사두개파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바리새인은 쉽게 말씀드리면 사두개파와 정 반대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으로 너무 많은 양식을 먹어서 비만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히려 비종교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고 영적으로 다이어트를 시켜야 합니다. 영양분이 좋은 음식도 적당히 먹을 때 우리 몸을 지탱시켜주는 에너지가 됩니다. 그러나 좋은 음식이라고 영양가가 많은 것을 무절제하게 많이 먹으면 우리 몸을 망치는 독이 됩니다. 쇠고기가 좋다고 매일 잡숴보십시오. 내 고기가 망쳐집니다. 제가 먼저 목회하던 교회에 한국에서 한 가정이 이민을 왔습니다. 형제들이 왔는데 이 동생은 아주 똑똑하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무엇을 시키면 반듯하고 아주 센스도 빠르고 쓸 만한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 형님은 멍청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적당하지 않은 말을 자꾸 하고 민첩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고 무엇을 멍히 쳐다보기 잘합니다. 그래서 제가 동생한테 물어봤습니다. “형님이 좀 아픈가요?” 그랬더니 그 동생이 “목사님! 제가 형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 줄 알고 우리 형님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 형님이 맏아들입니다. 나는 동생입니다. 그런데 이 자손이 귀하다고 하는 집에 맏아들이 낳으니까 우리 엄마가 온 세상의 좋다는 것을 다 가져다 먹였습니다. 좋다고 하면 좋은지 나쁜지 과학적으로 실험도 안하고 그냥 좋다는 것을 날마다 다려서 먹이더니 저렇게 멍청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줄 아십시오. 동생인 나는 우리 엄마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장손을 잘 키워야 된다고 하더니 저 모양이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형님이 하도 좋은 것을 많이 먹어서 좋다는 것에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신앙도, 영적인 것도 지혜롭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지 이 바리새인과 같이 지나치게 영적 양식만 자꾸 먹이고 거기 너무 지나치게 몰두하면 종교적 환자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지독한 비판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지독한 우월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왜입니까? 내가 기도를 제일 많이 하고 내가 성경공부를 제일 많이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못한 사람들을 항상 시험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 진리를 배우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를 시험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왜? 자기들이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나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 없으니까 이 예수도 질문해 봐서 틀리면 때려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종교적 환자입니다. 율법이라는 몽둥이 하나씩 차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몽둥이로 때려잡습니다. 때려잡을 사람 없나 돌아다닙니다. 얼마나 이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많이 했는지 달달 외우고 다닙니다. 성경에 나타납니다.
어느 날 창녀 한 사람을 이 사람들이 잡아 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갖다 놓고 금방 율법을 외웁니다. “율법에 이런 여자는 때려죽이라고 했나이다. 이게 율법이요. 당신 말해보시오.” 그러면 때려죽이지 왜 예수님 앞에 왔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면 “너도 율법을 어겨서 너도 죽어야 돼.” 이것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종교비만 환자로서 날마다 자기 신앙생활이나 잘할 것이지 그 우월감을 가지고 매일 다른 사람을 때려잡으려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죽이라.” 그것도 율법입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율법을 갖다 대니까 무서워서 “어이쿠! 우리가 도리어 걸리겠다.” 돌을 버리고 다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들보다 낫다. 그렇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렇게 많이 기도를 하고 그렇게 모세율법을 공부한 지식인들이 할 일이 없어서 무슨 도둑고양이모양 살금살금 남의 죄짓는 현장이나 훔쳐보다가 파렴치하게 여자를 끌고 나가는, 그것이 하나님이 시킨 일이냐? 그게 율법의 정신이냐? 저 끌려온 창녀는 너희들보다 낫다.”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아성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이게 성전이냐? 강도의 소굴이다.” 종교개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비종교화 시켜주어야 합니다. 성경공부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도움이 되어야지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이기주의 몽둥이로 사용할 때 그 성경공부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기도하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게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이단이 왜 성공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나라에 광신자가 많습니다. 이단에 끌려가는 사람들은 거의 광신자들입니다. ‘무엇 좀 더 보여줄 거 없나?’ 찾다보니까 기성교회에서는 도저히 그런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거기 가는 줄 아십니까? 이미 기성교회 잘 다니는 사람, 그래서 그 사람들의 전도 대상은 기성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잘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문제점이 뭔가? 성경의 객관적 진리를 믿는 것보다 신비 체험에 치중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샤머니즘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말씀에 치중해야 합니다. 훌륭한 신앙생활은 훌륭한 시민생활로 연결이 되어야 크리스천의 능력이지 시민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신앙생활을 해서 뭐하느냐 말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교회 집사를 처음으로 선택합니다. 세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영적 능력이 있어서 복음의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집사가 되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서 내가 필요 적절하게 대처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지혜가 없을 때는 그 사람 때문에 그 교회가 문제가 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겪은 것인데 미안하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전에 제가 한번 예화를 들은 거 같습니다. 갈보리교회는 장로 제도가 없어서 우리 목회 기도를 우리 부목사님들이 그것도 시간에 딱 맞게 거의 30초 넘기지 않게 정하고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기도문을 써서 준비된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장로님들의 기도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는지 모릅니다. 왜? 길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당회에서 정했습니다. “4분 이내로 하십시오.” 안 지켜서 빨간 글씨로 크게 강대상 앞에 써 붙였습니다. “기도는 4분 이내!” 지키는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거의 다 10분을 넘깁니다. 한번은 장로님 한분이 24분을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게 왜 24분인지 정확히 아느냐 하면 장로들 기도 때문에 교인들이 너무 말이 많아서 장로들 기도 시간만 재는 집사가 한명 따로 있었습니다. 그날 설교 7분 했습니다. 예배 끝나야 다음 예배를 보는데 어떡합니까? 이게 스트레스입니다. 이 장로들의 기도가 문제입니다. 교인들에게 민원이 들어옵니다. “목사님! 그 장로는 기도 시키지 마세요. 우리 일주일동안 고생하다가 나왔는데 하나님 말씀 들어야 되는데 장로님이 기도를 길게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저는 장로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장로님! 오늘 기도 24분이랍니다. 그렇게 기도 길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저 설교 7분밖에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 다 약속했잖아요? 그것을 지키셔야지요.” 그러니 이 장로는 나이 어린 목사가 책망을 하니까 자존심이 상해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게 아니라 화를 벌컥 내면서 “기도라는 게 성령이 시켜서 하는 것인데 성령을 거스르란 말입니까?” “그래요. 그러면 장로님! 저는 성령님이 시킨다고 하루 종일 설교할까요?” 성령이 시켜서 기도를 했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뭐가 없었습니까?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만이 교회 일에 나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칭찬 듣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지혜와 그 사람의 성령 충만은 교인들의 공인성이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날마다 말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정할 수 없는 너의 지식이나 너의 그 지혜나 성령 충만은 우리 공동체에서는 필요 없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적 환자가 되면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성령의 지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종교적 비만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종교화 시켜야 합니다. “집사님은 이제 기도원에 그만 다니고 살림 좀 하세요.” 우월주의에 빠져서 내가 하는 일은 모두 다 옳다고 하는 어려움이 생기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야단을 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를 삼으실 때 그 사회에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천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는가? 이렇게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굉장히 우월한 사람들을 제자로 왜 삼지 않으셨는가? 그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들의 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천한 사람을 오히려 제자의 반열에 들게 하시고 그들의 봉사를 받으시면서 오히려 그들보다 이들을 더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찾아왔는데, 우리들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실 때 자기 소원의 성취를 바라고 기도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것을 꼭 이루어주십시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만약 안 들어주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협박적으로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 반드시 내가 시험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봤자 아무 소용없단 말이야. 기도를 응답하신다더니 안하시고….” 이렇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내가 보여줄 표적이 없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동안 있었던 것과 똑같이 나는 무덤에 3일 동안 갇혀 있다가 영생하고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메시야의 표적이다.” 하셨지 않습니까? 요즘도 환자스러운 교인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지도 않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이단에 빠집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너희의 알 바 아니다.” 하신 것은 알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믿음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저 사람들의 말 듣지 마라. 저 사람들 말 들으면 큰 일 난다.” 잘못 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바로잡는 종교 개혁입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사 어느 때나 떠나지 마시고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주님의 뜻을 따르며 진리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요나의 표적
마태복음 16:1-4 / 이상호 목사
옛날 속담에 견원지간(犬猿之間)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이 개를 집에서 기르지 않던 시절에는 개들도 들에서 살다보니 자연히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개는 큰 동물을 잡아먹기에는 힘이 들고 해서 몸집이 작고 눈에 잘 띄는 원숭이가 만만했던 모양입니다. 원숭이 입장에서 예민한 후각을 가진 개가 더 없는 강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적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자기를 표적삼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개에게 원숭이도 개처럼 으르렁대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가 바로 견원지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견원지간(犬猿之間)과 같이 만나면 서로 비난하고 야유를 보냈던 두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난을 중단하고 전략적인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바리새인이며 다른 하나는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상반된 교리와 생활자세로 인하여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교리에서 부활과 천사와 악령들을 인정하였지만 사두개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사두개인은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와 협착하여 상당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로마지배를 반대하면서 회당에서 일반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율법을 가르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교리와 생활을 표방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온전히 연합하였습니다.
=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뒤를 밞고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나 병을 고치신 일들을 보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이루어진 기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지상에서 나타난 표적들은 사단과 그 졸개들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늘에서 오는 표적]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다그쳤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당신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셔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표적이 될 수 없습니다.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의존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 불신앙의 결과는 실패와 멸망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모세가 광야를 인도할 때에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던 것과 같은 표적(출16장)이나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과 전투할 때에 태양을 기브온 위에 머물게 하고 달은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게 했던 표적(수10장)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예수님께서 보이시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격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 갤럽에서 조사한 최근에 발표 통계를 보면 기독교인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병 고침을 받았거나 그와 유사한 체험을 했었다'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3명이나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천주교인들은 10명 가운데 1명이고 불교인은 거의 전무한 통계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기독교인이 일천만 명이라고 가정하면 대략 삼백만 명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병 고침이나 그와 유사한 체험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적이 있어야만 예수님을 믿고 표적을 보지 못하면 믿지 않는다는 발상은 바리새인적인 불신앙입니다.
교회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만 기도원에서 더 많은 치유의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용하다는 점쟁이 찾아가듯이 방언을 받네. 입신을 하네. 불이 떨어지네. 병을 고쳤다네. 하는 기도원을 찾아다닙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약 중독에 빠지면 다른 약이 효험이 없는 것과 같이 표적 중독증에 걸려서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시대에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 주시기 전에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기후변화를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직업이 어부들과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기후 변화에 민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후변화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민감하였지만 진작 중요한 영적인 흐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메시아의 강림하신 때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하였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라고 하였습니다.
이솝 우화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많은 먹이를 사냥하여 셋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나귀가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셋이서 잡은 것들이니 세 등분하여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자가 나귀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구대일로 나누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자가 마음이 흡족하여 여우에게 어떻게 그런 갸륵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우가 대답하기를 바로 전에 나귀가 죽은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사계절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으며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더욱더 불행한 사람은 종교와 정치지도자로서 시대적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이 시대적 표적을 분별력이 없이 백성들을 인도하므로 자기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멸망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유대 지도자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아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시면서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육체적인 음란을 질책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음란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세운 규례나 전통은 물론 자기들의 체면이나 인간적인 이익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섬겼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영적인 음행으로 보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겼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이미 메시아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에 돌아오는 인간적인 유익이나 육체적인 욕심이나 세상적인 향락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하였던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이방인이었던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시키라고 보냈지만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뱃사람들에 의해서 바다에 던져져서 주야로 삼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표적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을 믿는 자가 구원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현재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세상일에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심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보다 이 세상에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를 더 우선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표적을 분별하는 성도
마 16:1~ / 김양인목사
오늘은 “표적을 분별하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먼저, 표적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나병환자, 소경, 중풍병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등등 현대의술로도 고치기 어려운 병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주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거저 돌려보내신 적이 없이 모두 치료해 주셨습니다.
또한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온전케 하셨으며,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적도 있습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은 것을 살리셨습니다. 이 외에도 물 위를 걸으셨고 갈릴리 풍랑을 명하여 잔잔하게 만드셨으며, 떡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수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한번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 거두었으며, 또 한번은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이런 목적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가리켜 표적 곧 표시로서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 같은 표적들을 보고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대다수는 호기심을 충족시킨 것으로 만족했으며, 예수님을 적대하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보고 귀신 들렸다고 하는가 하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시자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지고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사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단순히 떡을 얻어먹고 배가 부르니 좋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탁월한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고 많은 봉사를 해도 믿음의 동기가 잘못되면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둘째 부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로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의 떡을 받아먹었을 때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이 되심을 깨달아 안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신실한 추종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떡을 얻어먹지 않아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떡은 고사하고 예수님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받더라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실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매 우리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오리이까?” 이와 같은 신앙자세를 갖고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신앙 연조가 길든 짧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올바른 성도는 어떤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요지부동하며 결코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는 법이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당시에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는데 그중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많은 고문을 당하고 총독 앞에 끌려갔을 때, 총독이 선심이라도 쓰듯이 “자,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은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총독의 제안에도 흔들림 없이 하나같이 기쁜 마음으로 형벌을 받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을 고문하던 한 군병이 그러한 기독교인들을 보고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들이 믿는 예수가 어떤 분이길래 그를 믿는 일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이는 필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군병은 총독과 기독교도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관심을 갖고 듣던 중에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도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데 그도 총독 앞에 나서서 “나도 이들이 믿는 예수를 믿소. 그러니 나도 함께 죽는 데 동참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자진해서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되고 위대한지를 올바로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은총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심을 써서 교회에 나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삼아주신 것이야말로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란 이 은혜와 축복을 나만 알고 누릴 수 없기에 함께 나누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누구나 이 도(道)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마음을 닫고 거부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수월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처음 믿은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아서 자상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게 되면 누가 무어라 하든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셋째 부류는, 예수님을 적대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의 대표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뚤어진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린 된 사람을 고쳐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보게 되자 무리가 다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6)라고 했는데, 소경되고 벙어린 된 사람이 고침을 받자 사람들은 이 예언을 생각해 내고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는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기적을 보고서도 백성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하였으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는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라”고 전혀 상반된 태도를 보였으니 저주받을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몰랐을 리가 만무합니다. 필경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면서 ‘이 사람이 행하는 기적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하지 않느냐?’고 내심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해야 하지만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명백한 증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도 그것을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마음이 완악하면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방금 전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떡 몇 개를 가지고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똑똑이 보았으면서도 또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볼지라도 믿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힘쓰는 일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사가 일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도 일기를 바르게 예측해야 파종이니 추수를 제때 할 수 있고, 기업체에서 상품의 생산량을 정하는데도 먼저 기후의 변화를 예측해야 합니다. 어디 멀리 여행을 할 때도 일기를 살피고 떠납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천기를 분별했으나 현대는 위성을 비롯하여 첨단 기상예측 장비를 이용해서 상당히 정확한 예보를 합니다.
그러나 천기를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에 있어서도 지극히 중요한 때였는데,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고대해 왔던 선민으로서 깨어서 시대의 표적을 관찰하면서 그리스도를 맞이할 대비를 하고 있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기다려 왔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시는데도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예수님께서 유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시자 도리어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까 염려되어 예수님을 적대하고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눈에 시대의 표적, 그리스도의 표적이 보일 리 만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하신 말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신 경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파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이므로 그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면서 일상적인 삶에만 몰두해서 살아가는 것은 멸망 받을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하나부터 열까지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대를 일컬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합니까?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으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가 멸망했으며, 오늘날 인류는 물질만능주의, 과학기술과 쾌락추구에 완전히 몰두한 채 역사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다 육체가 되었으며,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고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했는데, 이 평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가감 없이 해당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종착역이 가까운 때를 살아갑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임박한 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사람들의 영적, 윤리적인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를 숭배하는 불신의 시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무색할 정도로 동성애가 호응을 얻고 성적 문란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낙태를 죄로 정하지 않고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돈 앞에서는 높은 자도 낮은 자도 굴복하는 시대입니다. 정통 기독교 신앙을 배척하나 온갖 우상숭배와 이단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온 인류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을 예고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에 앞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며, 세계정부를 세우고,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을 지배할 것이며, 사람마다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사고팔지 못하게 할 것이며, 스스로 성전에 앉아 하나님이라고 내세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깨어 있어 현재 되어가는 시대상을 보면서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곳이 어딘지,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관찰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분위기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가지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이 세속화되는 것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 준비도 하지 않고 깊이 잠든 것처럼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절대로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로마서 13장은 우리에게 이같이 경고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시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이 말씀은 이천 년 전에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한 것입니다. 하물며 21세기가 5분지 1이나 지난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아니라 이미 단장을 마치고 문 앞에 서서 주님의 강림을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게끔 모든 것이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방심하면 거기에 속아 넘어갑니다. 오늘날 현실은 어떻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강림을 대비할 성도들의 대다수가 졸며 잠들어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기독교인이긴 한데 기독교인답게 살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므로 실천하지 않습니다. 무슨 문제를 만나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돈의 위력 앞에 복종합니다. 결국,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합니다.
성도들에게도 생활이 있습니다. 직장도 다니고 사업도 하고 자녀 양육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시대의 표적을 살피고 분별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며 주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땅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것들은 언젠가 다 불타고 말 것이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공력을 심판받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몸으로 행한 대로 상벌을 받습니다. 그때 가면 이 땅에서 잘 살았는지 잘못 살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때에는 잘못을 시정 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고 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고백입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후회함이 없는 믿음의 생애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나타내는 표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속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는 가장 위대한 표적입니다. 이제 불신의 시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 마지막 표적을 나타내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자들은 주님의 마지막 표적조차 믿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장에 이르기를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한 것입니다. 표적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위대한 표적을 보여줄지라도 믿지 않지만,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을 지켜나갑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은 진실한 성도들을 위한 표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 하신 후에 미련 없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오래 머물면서 설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성도님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고 하셨습니다.
교회생활을 한 것이나 직분자 노릇을 한 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러려면 항상 영적으로 깨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고 불신앙과 세속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표시가 나야 합니다. 불신 이웃들로부터 “당신의 사는 모습을 보니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이 분명합니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께 저의 마음 눈을 밝혀주셔서 시대의 표적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강림하실지라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리새인들을 조심하라
마 16:1-12 / 이종윤목사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정치지도자였던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서로 견제하며 대립해 왔지만 예수님께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I. 그들의 속셈은 감춰져있다.
그들은 방금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떡 7개와 생선 2마리로 4000명을 먹이고 7광주리가 남았던 사실을 보았고,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기적들을 알면서도 표적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오늘날 일기예보는 더 많은 것을 감지케 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은데 꼭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너희가 일기는 예보할 줄 알면서 시대는 해석할 수 없느냐 하실 것입니다.
II. 제자들의 생각은 둔해져 있었다.
제자들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보다 예수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떡을 못 가져 온 것을 토론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때에도 제자들의 불신앙을 보시고 탄식하셨을 것입니다. 떡 5개로 5000명을 먹이고 주은 것이 몇 광주리며 떡 7개로 4000명을 먹이고 주은 것이 몇 광주리인지 기억하지 못하느냐?(8-10) 예수님은 떡을 말씀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누룩(교훈)에 대해 말씀했으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III.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교훈)
첫째, 바리새의 잘못된 교훈은 무엇입니까? 불신(1-4), 냉소주의, 위선(눅12:56)등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외식하는 바리새인 같은 자칭 애국자들, 자칭 바른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9)
둘째 사두개파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바리새파가 성경의 계시에 무엇을 더한 것이 잘못이었다면 사두개파는 성경말씀에서 제거한 것이 오류였습니다. 이들은 기적, 내세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20C후반부터 21C의 사상을 Post-Modernism(後期현대, 현대以後)이라고 합니다. Modernism에서는 권위적인 규범, 절대 진리, 절대 가치를 인정했지만, 이들은 그런 기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Post-Modernism에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해체주의와 거부하는 대신에 모더니즘을 고치려 하는 건설주의 두입장이 있는데,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갑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Post-Modernism을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맺는 말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 못하느냐(3)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는 악한 세대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11-14의 말씀을 통해 회심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Post-Modernism의 탈을 조심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고하신 예수님
마 16:1-12 / 안병호목사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 하라고 가르치셨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통주의, 율법주의를 의미하고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자연주의, 합리주의, 세속주의를 의미한다. 우리가 전통주의에 얽매이고 초자연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주의 적인 사고에 빠지게 될 때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쉽게 경직이 되고 생명력이 없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묵상 하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청산할 수 있기를 빈다. 어떻게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1-4)
예수님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16:4)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다가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을 상징한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의 부활 신앙이다.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 하셨는가?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건성으로 읽지 말고 자세히 살펴 보아야한다. 본문의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모든 면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 했다. 그런데 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힘을 합해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너무나 이상하게 보인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주의자, 전통 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하나님을 믿었고, 성령의 사역을 믿었다. 오늘 날 우리가 성령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성령이 역사하신 다는 사실은 믿었다. 그들은 천사들을 믿었고, 부활을 믿었고, 영적인 진리들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주의와 전통주의라는 두꺼운 수의 속에 그들의 영적인 신앙을 덮어 버렸다.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들 자신은 그 짐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마23:4). 자기들도 믿지 않는 것, 자기들도 행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합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영혼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들의 존재도 믿지 않았고,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 속에서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세속주의자들이고 종교를 단지 윤리적인 규범으로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부인하며 다만 고상하고 높은 원리에 진실해야 한다고 선언 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 서로 무시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천사와 악마의 존재, 부활과 영혼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개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경멸하였다. 사두개인들은 그 시대에 교양 있고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신기한 것은 유대의 대 제사장들까지 영적인 것을 부인하는 사두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주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 자들을 늘 경멸하는 태도를 가졌다.
그런대 바로 이 서로 앙숙이던 사람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트라프라는 주석학자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들은 아무리 격렬하게 싸우며 물어뜯다가도 산토끼 한 마리가 곁을 지나가면 개들은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토기를 뒤 쫒는다.” 그들은 예수를 적대시 하는 데는 마음을 같이 했지만 그 둘이 예수를 공격한 이유는 각자 달랐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전통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를 신앙심 없는 불경건한 자라고 판단해 버렸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영적인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비합리적인 인물로 생각하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예수를 시험하기를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 그들의 강조점은 “하늘로서 오는“이란 말에 있다. 바리새인들은 마귀와 거짓 신도도 땅에서 표적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 많은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은 땅의 기적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해가 멈춘다던가, 어두운 밤하늘이 찬란한 태양빛 보다 더 밝은 그런 하늘의 표적을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능히 그런 표적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6:53에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은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없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표적은 하나님이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이런 시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아예 그런 표적에 대하 여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저히 그런 표적을 할 수 없다고 믿고 예수님을 시험 한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신앙이 달랐지만 예수를 시험 하는 데는 연합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결코 그들의 시험에 응하여 하늘의 표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차원에서 답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의 병든 마음을 지적함으로써 대답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2-3)
기상대가 없을 때는 랍비들은 하늘을 보고 미리 날씨를 예언 했는데 대부분 맞았다고 한다. 우리도 무지개가 뜨면 비기 그친다든가, 동풍이 불면 비가 온다든가 하는 것을 예측한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개미와 구렁이의 이동을 보면서 홍수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개미의 이동을 보고 지진을 예견 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들은 외적인 세계에서 앞에 일어날 사건과 그 결과를 관찰 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과 그 결과는 관찰할 능력이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의 표적”이란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어떤 외적인 사건, 혹은 기적만을 보고 믿고자 하기보다 하나님이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의 탄생, 그의 병 고치는 사역,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등이야 말로 태양이 멈추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키는 이 사건이야 말로 시대를 분별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볼 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신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16:4)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악할 뿐만 아니라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것은 영적인 간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영적인 비밀을 아는 데는 무지하다고 책망하신다. 아무리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능하고 사두개인들처럼 세상 지식이 풍부해도 영적인 간음을 행하며 사는 자는 영적인 세계에는 무지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요나의 표적은 곧 부활의 표적이다. 이 부활의 표적이야 말로 전통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의 세계에 혁명을 가져 다 주는 놀라운 표적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경직되고 생명이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전통주의와 합리주의에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 전통주의와 합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요나의 표적 곧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낙심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거기에 좌절하고 마는 가? 좌절하지 말라. 부활의 신앙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역전하라.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전통주의와 합리주의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생명을 다해서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인 삶을 위한 도전이 필요하다. 우리가 육적인 것에만 얽매어 살면 기도할 수도 없고, 전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육을 죽이고 부활을 체험하며 살게 될 때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그와 같은 인생은 얼마나 신이 난지 모른다. 우리가 왕십리 성시 화, 민족 복음화, 캠퍼스복음화, 세계선교를 위하여 부활의 신앙으로 도전해야한 다. 그래서 우리는 힘든 일이지만 레몬 프라자로 예배당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부활의 신앙이 아니면 안 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주일 당회에서 자금 계획을 생각하다가 계산이 맞지 않아 덮어 버렸다. 이제 믿고 기도할 뿐이다. 그런데 부담이나 두려움이 생기는가? 아니다 얼마나 신이 난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 것인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요나의 표적,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아직은 그들은 이 심오한 말씀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떠나시고 만다. 이런 사람들을 붙들고 아무리 이야기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우리 주님은 앞에서 헤롯과 같은 사람과는 영원히 대면해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도 우리 주님은 상대하기를 싫어 하셨다. 오직 그 귀중한 시간을 그의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는데 온 심혈을 기울이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신앙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사상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신 것이다.
Ⅱ. 물질의 시험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를 기억해야한다(5-12).
제자들은 물질의 시험이 들어 참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물질 시험에서 건져 주심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5-6)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은 스스로 부패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부패케 하며, 또한 스스로 붕괴되어 갈 뿐 아니라 다른 것들에도 영향을 미치어 붕괴되도록 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분별하라,” “알라,” “정통하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주의 하라”는 말은 “...에 대하여 계속 조심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기독교 신앙을 해하는 가장 음흉한 적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인간의 전통을 첨가 시키는 전통주의며, 또한 그 본질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외시키는 합리 주의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이것을 주의 시킨 것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적은 전통주의와 합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주의는 새로운 창의력을 말살시킨다. 합리주의는 도전과 모험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내일부터 매일 철야 기도를 하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전통주의 사고를 가지면 지금까지 그런 철야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무슨 철야 기도냐?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교회는 통성기도를 한다고 목사님을 내어 보냈다고 한다. 반면에 합리주의자들은 철야는 나이든 사람이나 잠이 없으니까 할 수 있지만 할일 많은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철야를 할 수 있느냐? 철야 하고 나면 직장에서 졸게 되고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그러면 전도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영향에 물들지 않도록 계속 조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전통주의 초자연주의를 거부하는 자연주의 및 합리주의는 기독교를 이방종교나, 하나의 윤리적인 종교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믿는다. 기적을 믿는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얼마든지 역전 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에나 도전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준다. 우리는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했는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16:7)
그들은 엉뚱하게 떡에 대하여 염려를 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한 영적인 진리를 말씀하시고 계신다. 먹는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물질의 시험에 빠져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진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40년 동안 아무 일을 하지 안 해도 만나를 공급해 주시고 헤어진 의복을 입히시지 않으시고 헤어진 신발을 신기지 않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는 항상 떡 문제가 심각하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입을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 등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걱정이 된다. 가정뿐만 아니다. 교회도 물질적인 걱정이 많이 있다. 이와 같은 물질 시험이 들어오면 우리는 금방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도 들어오지 않고, 교회를 출석한다는 것조차도 큰 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떡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시는가 살펴보자.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8-11)
예수님은 마치 초등학생을 다루듯이 말씀하신다. 먼저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신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고 남은 것이 몇 광주리냐고 물음으로서 주님이 베푸신 기적을 상기하도록 하신 것이다. 주님이 그런 기적을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떡 문제로 염려 할 것이 없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섬기다 보면 떡 문제 물질 문제로 염려가 많이 있다. 그러나 지내고 보면 황상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 은혜를 늘 잊고 산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경우에 우리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가를 배운다. 우리 주님은 과거의 경험을 다시 있는 그대로 상기 해 보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되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과거의 주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그들은 비록 연약해서 믿음을 잃게 될지라도 깨우쳐 주시면 금방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이 연약한 자를 오래 참음으로 도와주신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기보다 대적하고 시험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피하고 만다. 예수님의 책망과 교훈을 받아 들인 제자들은 결국 주님의 가르침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16:12)
물질의 시험에서 벗어날 때 영적인 비밀을 깨닫게 된다. 성경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육의 생각에서 벗어나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복이 된지 모른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잘못된 세계관을 바꾸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잘못된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문제를 가르쳐 주신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만 읽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 다양한 독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번 독서 스쿨 교사 세미나를 하게 된 것이다. 다른 책을 읽어야 성경의 우수성을 알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진정으로 승리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는 올바른 세계관을 가져야 되며 물질 시험으로부터 벗어나야 될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1-12 / 이정선 목사
잠언 말씀에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잠 19:13)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는 표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낙숫물이 댓돌 뚫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도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에 패이고 구멍이 뚫립니다. 그만큼 반복되고 지속되는 비난과 공격은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예수님께는 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예수님을 비난하고 시험하고 속을 긁어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여줄 것을 청했다고 했는데, 12장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와서 표적을 요구했는데(마 12:38), 여기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왔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도무지 화합할 수 없는 앙숙입니다. 바리새인은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이었고, 사두개인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대항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가지고 함께 공격하러 온 것입니다.
12장에서는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가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를 했었고, 여기서는 떡과 물고기 몇 조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 있은 후에 이런 요구를 했습니다. 즉 이 글을 기록한 마태는 그러한 사건의 순차적인 서술을 통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요구가 얼마나 억지스럽고 악한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떡과 생선 몇 조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신 그 놀라운 승리의 사건 뒤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도 큰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꼭 시험이 따라옵니다. 거기서 시험에 빠지면 전에 받은 은혜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분은 새벽기도에 가서 은혜 받고 집에 오면 꼭 남편과 싸울 일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어느 교회에서는 온 교회가 힘을 모아 어렵게 예배당을 건축하고 나서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겨 교회가 깨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교회가 깨지면 그 부작용과 후유증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예배당을 건축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겠지요. 정말 사탄은 교묘하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파괴하려고 달려듭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대비하고 또 올바로 대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의 뜻은 표시가 되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 자체가 표적이었고, 또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표적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서 표적 행하시는 것을 목격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또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일까요?
마음을 닫은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예수께서 이적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다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이적을 행해도 그것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주로 사람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자신의 사역이 메시야의 증거임을 보이셨습니다. 즉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눅 7:22)이야말로 자신이 하늘로서 오신 메시야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이적을 행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늘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땅의 사람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그런 것들, 즉 사람에게 행하는 자비와 은혜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하늘에서 오는 표적이란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이나 모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오는 것입니다. 또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그를 고쳐주시겠다는 표시로 해가 뒤로 10도를 물러간 적도 있었습니다(왕하 20:11). 또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해가 지지 않고 머물러 있었습니다(수 10:12-13).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겠다는 것일 뿐,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것은 거부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적을 구한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자기들이 하늘의 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이 또 무척 재미있습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하늘이 붉고 노을이 지는 것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고, 또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렇게 잘 파악하면서 땅에서 일어나는 시대의 표적도 못 알아보느냐고 힐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수가 많습니다. 말하는 것은 굉장히 경건스럽고 영적인 분위기가 충만한데, 그 내용을 잘 들어보면 아주 이기적이고 자비가 없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는지 자랑하는데, 믿음으로 헌신했더니 자기가 산 땅이 몇 배나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90년대 초였는데 땅 투기가 사회적 문제로 큰 관심을 끌면서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이분은 경건한 단어들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하지만, 이분에게는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적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소외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꼭 그랬거든요. 신에 대한 믿음과 물질적인 욕망이 결합하면 이런 괴상한 종교가 탄생합니다. 천국은 하늘에서 경험하기 전에 땅에서 우리 삶 속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늘에 올라갈 수가 없지요.
여기서 시대의 표적이라는 말은 메시야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에 정통했던 그들이라면 다니엘의 예언(단 9:25)에 의해 메시야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부합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들은 그런 시대의 표적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십니다. 악하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음란하다는 책망은 좀 심한 것 같지 않습니까? 악하고 음란하다는 표현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뜻을 강조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음란하다는 표현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과 범죄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냥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불성실한 악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2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야라는 온전한 표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믿음의 골격을 이룹니다.
그렇게 대답하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그냥 그들로부터 떠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교제를 끊으시고 멀리 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하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때로는 거리를 두고 관계를 끊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명하게 부각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끝없는 소모적인 논쟁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합니다(딤전 1:4).
그렇게 떠나면서 제자들이 남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배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떡을 안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떡 안 가져왔다고 책망하시는 줄 알고 안절부절 못합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심사가 다를 때는 이처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합니다.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고 오해가 생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주된 관심사가 하나님의 관심사와 다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그 뜻을 오해하게 됩니다.
누룩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적은 양으로 큰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마 13:33). 예수께서 비난하셨던 바리새인들의 행태는 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위선이라는 누룩이 제자들에게 감염된다면, 천국 복음의 전파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위선의 탈을 뒤집어 쓴 것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이 위선이라는 누룩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위선이라는 누룩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직자가 되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게 되면 그에 걸맞은 믿음과 삶이 기대됩니다. 그 기대와 현실이 일치하지 못하고 그 간격이 너무 커지면 위선으로 그 간격을 메우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위선이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 위선의 누룩에 감염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염이 되면 그만큼 담대해지는 것인지 영적으로 둔해지는 것인지, 그렇게 변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미워하셨던 위선이라는 누룩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잘못된 교훈들이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을 위협합니다. 끈질기게 찾아오는 여호와의 증인들, 교회 잘 다니는 사람들을 꼬여내가지고 기도회 한다, 성경공부 한다 하면서 잘못된 교훈을 집어넣어 교회를 흔드는 등, 이단들의 활동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유혹과 불건전한 누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법은 교회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무슨 신령한 모임이 있다고 혹해서 나갔다가 그런 누룩에 감염되고 교회까지 어지럽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지키셔서 그런 각종 거짓된 교훈과 누룩들로부터 우리 모든 성도들과 우리 교회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표적
마 16:1-4 / 박지온 목사
이 시간에 말씀드릴 제목이 "이 시대에 표적"이라! 이 시대에 필요한 표적이다! 그런 제목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칭찬하고 예수님께 은혜를 받은 신앙에 고백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해서 '어떻게 하면 올무에 빠뜨릴까?' 그래서 합력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혀 사상으로 믿음으로 같이 가지를 않습니다. 영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있고, 영들도 있고, 또 하늘나라도 있고 믿습니다. 유대의 전통적인 그런 신앙 인들로 알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아주 급진주의자들입니다. 영들도 없고, 천사도 없고, 부활도 없고, 이런 게 없다고 그럽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전도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도하는 사역을,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보고서도 핍박하는 일에는 둘이 짝짝궁이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어서 이게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라는 방향을 잡고 나니까! 어떤 모양을 보이느냐 하면, 모든 종교가 똑같이 핍박을 하는 겁니다. 복음이 안되어 있는 종교는 똑같이 핍박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뭐, 이런 면에서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수께서 걸어가신 이 축복된 은혜의 방향을 따라 걷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적인 증거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 특별히 이 핍박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이다! 또 우리가 잘못 복음에 방향이 놓일 때에 일어나는 모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어요. 이 핍박자들의 모습이 바로 불 신앙 자의 요구의 대표들입니다. 불 신앙 자들이 이렇게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그 뭔가 복음을 아는 것 같았으면서도, 신비하면서 열심을 내는 것 같았으면서도 사실상 복음의 방향과 다른 그런 때가 많았다는 것을 더욱 느끼는 것은, 그때 당시에는 기도할 때마다 뭘 느끼느냐하면, 뭔가 내가 요구하는 기적과 신비와 이적과 체험들을 많이 요구를 했습니다. 그걸 겪었고... 그래서 제가 이 뭔가 기도할 때에, 또 산에 가서 기도할 때에, 여러분 아마 성도들이 기도 할 때에 그런 것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 뭔가 하늘에서 이상한 기적이 오고, 또 내 몸에 어떤 이상한 기적이 나오고, 내가 기도하고 돌아가면 가정에 뭔가 이상한 기적이 나오고, 하는 어떤 이런 것들로... 우리가 바라는 기적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그래서 제가 스펄쳔의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것은 우리 사람과 함께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마치 어떤 기적으로 표현했느냐 하면, '조각배에 우주를 담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조각배에 어떻게 우주를 담을 수 있습니까? 기적 중에 기적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더럽고 추한 인간에게 깨끗하고 정결하신, 아니 영원하신 그리고 그 능력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우리 몸에 담겨 계시다. 이건 기적이라고도 붙일 수 없는,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이 자리에 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더럽고 추한 여러분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마치 조각배에 우주를 담는 것보다도 더 큰 기적입니다. 늘 추한 몸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안고서도 무심하게 있다! 그게 이상한 거예요. 이 기적을 안고서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게 이상한 거예요. 우리가 밥을 먹으면 배가 부릅니다. 간단한 이치입니다 만은, 밥을 먹는데 배가 부르다! 얼마나 간다합니까! 그러나 확실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기적이 임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때부터 우리 생활과 삶에 모든 증거들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체가 기적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에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같이 하시기 때문에 이런 모든 기적과 역사가 예수님이 하신 사건과 일들 속에서 나타났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미 많은 기적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오병이어' 전부 기적 아닙니까!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온갖 병들이 다 나았던 무한한 기적들! 이런 모든 기적들! 그래서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가난한 자들에게, 병든 자를 구원하신 모든 표적들! 이런 것들을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업신여기고 교만한 자들에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 구하는 표적이 오늘 표적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불 신앙!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빠지게 되거든요. 여러분과 제게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구원의 축복과 역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하고 또 죽음과 멸망에 있던 자들이 해방 받고, 평안 얻고, 그 다음에 감사하고, 치료받고, 인도하심 받은 것 엄청난 역사입니다. 이런 축복의 역사들을 다 놓아두고 뭔가 보이는,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만지고 있는 어떤 이상한 기적들을 요구한다! 이것과 똑같습니다. 이 엄청난 축복을 무시하고, 우리가 다른 기적을 요구한다! 이것은 교만이요, 완악이요, 그들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표출입니다. 감정의 표출이에요.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건방진 사건이다! 이런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얼마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되죠. 누가복음 16장 31절에 보면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축복된 역사! 엄청난 현실적으로 이미 주어진 보이지 않는 기적들! 별로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으나 우리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이루어진 이 기적과 역사! 그리고 이 역사를 회복하는 믿음이 없이는 죽었다가 살아나도 엄청난 기적을 행해도 소용없다! 이겁니다. 그 사람들은 믿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나사로에게,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이들을... 내가 죽고 나니까 정말 지옥이 있다! 내 형제는 살아서 예수 믿고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 알게 해 달라! 만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말하면 믿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말해도 지금 현재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모세와 선지자! 말하자면 주의 종들이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전하는 것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었다가 살아나도 안 믿을 사람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신앙 자들의 요구는 결국 어떤 사건과 일이 있어도 호기심과 교만을 채우기 위한 요구이지, 믿기 위한 요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정말 내 마음속에, 말씀을 긍정하지 못하고, 말씀을 받지 못하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이 내 마음속에 기쁨으로 감사로 자리잡지 못한다면, 그 어떤 기적들도 하나님의 역사와 그 축복을 믿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보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여러분 앉았다는 것은 흔히 우리가 듣는 이야기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보다도 더 위대한 기적입니다. 어쩌다가 여러분 여기 앉았습니까! 절대로 안 올 사람 많거든요. 절대로 안 올 사람! 그런데 여기 와서 앉았거든요. 이게 기적이 아니고 뭡니까! 제가 이 잠시만 이렇게 훑어보아도 안 올 사람 너무 많습니다! 어쩌다가 여러분 여기 와 있습니까! 이 기적입니다. 뭐 우리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말하지만 그런 사람 못지 않게 여기 안 올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먼저 이 사실을 확실히 붙잡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주신 것 감사하고, 먼저 이것이 기적 중에 기적이구나! 이게 받아지지 아니한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다음에 주실 역사가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적이 도대체 어떤 기적이냐? 먼저 보면,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거든요. 그 표적을 보게되면, 이건 구약 적인 기적입니다. 그들이 뭔가 이 감각적이고, 이런 어떤 인간적인 그런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구름이 일고,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뭔가 무섭고, 두렵고 떨리게 하는 이런 어떤 기적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각적 표적과 무서운 것들은, 영적이고 위안을 주는 복음에 섭리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분과 제게 주신 이 조용하면서도 영적인 것,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지는, 도저히 불 신앙으로 이해하고 받을 수 없는 이런 기적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적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받았습니다. 왜? 이미 기적이 임했습니다. 그 나라가 그들 속에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보지 못한 그들에게는 엉뚱한 다른 기적들, 도저히 이제는 기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가치 없는 기적들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정말 조금 조금 더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요. 우리가 복음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떤 것을 느끼느냐 하면, 기도제목이 자꾸 없어진다는 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 받는다는 기적만큼 위대한 기적이 없습니다. 나와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인도 받는 이런 엄청난 축복에 역사가 사실화 되어있다!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여러분 도저히 이해가 안될 일이 아닙니까! 이런 축복을 받고서도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니까, 다른 것 요구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게 조용히 영적인 놀라운 역사와 축복,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이 축복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0장 8절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미 여러분 성경이 무슨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있다. 내 입에 있고, 내 삶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들이 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나면 더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이 규정하신 표적이 뭡니까? 그것이 성경이 뭐라 그랬습니까?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다! 그랬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요나가 밤낮 몇 일 동안 고기 뱃속에 있었습니까? 3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서 무덤 속에 있을 날짜를 예견하는 겁니다. 3일 동안 죽었다가, 그 다음에 요나가 영 죽어버렸으면 그게 안 되는데, 거기서 다시 어떻게 했습니까? 무덤에서 나와서 다시 어떻게 했습니까? 나와서 어디로 갔습니까? 니느웨로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원을 완성하시고,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온 이방에, 전 세계에 뭐가 되어질 것을 말합니까? 복음화 되어야 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 기적을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당시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을 전도한다는 것은, 이것은 도저히 상상을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도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방인에게 실수로 전도했는데, 이방인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이방인들도 복음을 받았다!' 그때부터 이방에 문이 열려서 이방으로 마케도니아 저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며, 유럽 구라파 전체가 복음화 되고, 나가서 여러분과 제게 도 구체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제게 이 시대에 주께서 원하시는 기적이 뭐냐? 구원받았느냐? 그걸로 끝난 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도저히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을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언약으로 예견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여러분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를 이루겠다! 이 시대에 필요한 기적의 약속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렇게 보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하면요. 이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를 전에는 나 혼자만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축복의 역사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교회 교인이라 그러면, 안 믿는 사람 붙였다! 그러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뭐가 나옵니까? 전도가 나와요. 전도가 나와요. 도저히 전도를 못할 것 같았는데도, 그게 아니더라 구요. 송현 교회 교인에게 안 믿는 사람이 붙었다! 전도가 나옵니다. 상상 못 할 일들이... 옛날에는 도저히 이게 안 되었데... 뭡니까? 여러분 이것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감당 못하고, 내가 구원받은 것도 옛날에 확인이 잘 안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교인들은, 우리 송현 교회 교인들이라 그러면 가정에 어린 아이들에게 까지도 최소한 기도할 때에 밥 먹으면서도 기도할 때에 뭐가 나옵니까? 세계 복음화! 이게 왠 일입니까? 이것은 기적이에요. 일본도 못 가본 사람들이, 제주도도 못 가본 사람들이 감히 세계 복음화 기도가 나와요. 기적입니다. 성경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대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그 대열에 일본에 현지 인들이,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가면서 미국에 현지 인들이, 이제는 현지 인들이 구체적으로 돌아오고, Remnant 후대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희락이가 밥 먹기 위해서 기도하면 뭘 하느냐 하면, 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도를 해요. '하나님 고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콩나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놓고는 꼭 하는 말이, 빼지 않는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세계 복음화 하게 해 주옵소서!' 꼭 기도합니다. 여러분 겨우 말을 시작하는 그때부터 벌써 뭡니까? '세계 복음화!' 우리 손자의 이야기만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에 아이들 기도시키면, 꼭 빼지 않는 기도가 뭡니까? '세계 복음화!'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성경에 예언대로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성취되는 것뿐입니다.
이제 주께서 마지막 이 시대에 필요한 기적이 뭡니까?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구원받게 하시고, 죽음과 멸망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로 이 땅에 도저히 해방 받을 수 없는 여러분들을 죽음과 멸망에서 생명과 삶에 진정한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하시고, 해방 받게 하시고, 그리고 여러분 통해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나가서 복음에 증인 삼았습니다. 이방인의 전도자로 삼았습니다. 이 일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역사로,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일찍이 예언하신 역사입니다. 약속하신 역사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마다 실패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하나님이 성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 가정을 계획하고,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건축을 계획하고, 이 일을 위해서, 후대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과 역사를 예수께서 흘리신 피와 살로 기념할 것입니다. 참여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사실이 성취됨을 확신합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의 표적
마 16:1-4 / 최승윤 목사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예수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알되 잘못 알고 있으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베드로가 한 고백을 떠올립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태 16:16절). 맞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것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행해서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면, 단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심령에서 나오는 진실한 고백이라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고백이 올바르고 정당한 고백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그 고백 위에 여러분들의 삶을 얻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그렇게 이해하셨습니까? 내가 기적을 체험했든, 다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한 것을 보고 그렇게 믿게 되었든 모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인격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좋고, 재미있고, 또 목사의 설교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소위 말해서 “좋은 말씀”을 듣고 마음이 동해서 교회를 나오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단 하나의 방식만이 있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한 이해가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할 만한 표적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가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말을 기록한 것을 보면(마가는 시험이라는 말 대신에 “힐난”이라는 말을 썼다) 그들이 예수님께 한 요청 안에는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보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악의적인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포함한 그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규정하셨을까요? “악하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악의적인 생각을 갖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올 곧게 섬기지 아니하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을 숭배할 때 “음란하게 섬긴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필요,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고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 조건이라는 것이 대체로 무엇입니까? 욕망의 충족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음란이라고 성경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면서 “저 분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다시 말해서 “저 분이 바로 메시야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와 같은 비난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정당한 논리로 반박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무슨 말입니까?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수없이 말했던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나라가 나,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너희 가운데 임했다”는 선언입니다. 나, 예수는 곧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다 라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과 놀라운 일들은 바로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겨울이 깊어지면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몹시 춥고 아직 눈이 쌓여 있고, 또 앞으로 눈이 온다고 하더라도 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표적들은 모두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된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들이라는 말입니다. 단지 큰 능력이 있는 어떤 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서 사람들을 고쳐주고, 필요를 채워주고, 아쉬움을 달래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 획기적인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존재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말씀과 이적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고 “참 좋은 말씀이다”“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들려주었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구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새 시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천기를 분별할 수 있다면 악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편견이나, 의혹의 눈초리로 볼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서 그 뜻과 의미를 깨달아 알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알게 하시는 신령한 은총, 생명의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마지막 표적은 바로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그 당시 강국이었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사명을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풍랑이는 바다에 빠져서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물고기 배에서 나와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요나가 죽음과 같은 바다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최고, 최후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능가하는 표적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표적은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다른 표적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지만 질적으로, 그것이 품고 있는 메시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던 그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그 근본 메시지를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오해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은 그 메시지가 명백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오해할 수 있고, 부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을 오해하거나 부정하면 더 이상의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요청했는데, 진정한 하늘의 표적,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 최대, 최후의 표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요 부활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면 그 다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십자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요 태도입니다. 복음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전제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셨겠습니까? “회개”란 무엇입니까? 바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돌이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지 않았던 나와 나의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죄라는 것, 잘못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아파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향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그와 같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타락과 배반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오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절망, 인간의 무능력, 인간의 한계가 십자가에는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충족시킬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 그 한계에서 오는 절망감이 십자가에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인간의 한계와 절망과 무능력을 예수님께서 홀로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충족시켜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악과 타락의 현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무리 고급하고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로움에 비추어보았을 때 누더기요 쓰레기와 같다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때 과연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을 여상하게 생각하고 그저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곤고함을 해결해 주시는 능력이 많으신 분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충족시킬 수 없는 나의 나 됨, 나의 무능력과 한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한 없으신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죽이시는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로움과 사랑이 나에게 복음이 되고,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때문입니다.
부활은 단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에녹이나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더 뛰어난 기적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에녹과 엘리야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이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해결하셨다는 명백한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죄가 없고, 심판이 없고, 은총과 사랑과 생명만이 주어진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 전에 행하셨던 모든 이적을 능가하는 최대의 이적입니다. 능력 면에서도 그렇고, 그 부활이 담고 있는 메시지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의 메시지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행하신 놀라운 표적 때문입니까? 그가 우리의 병을 고쳐주고, 필요를 채워주고, 우리들의 이성을 뛰어 넘는 놀라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까? 만약 우리가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악의적인 마음으로 더 큰 표적을 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운데서 그 세대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단지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만이 아니라 그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능력이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소망이요, 나의 위로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안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생활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지 아래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고, 내 감정에 휩싸여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질문,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 위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 안에서, 교회 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주께서 돕고 계십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를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일에 마음을 쏟고 힘을 모으고 정성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듣지 않으면 탄식하십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기뻐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안에서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서 거하시면서 진리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삶을 조정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느끼고 계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긴장하셔야 합니다. 단지 내 필요에만 급급하고, 내 소원에만 신경을 쓰고 살아간다면 우리 안에 계신 주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들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동기가 되어서 그것을 소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일용할 양식까지 제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어려울 때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우리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하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마십시오. 한 걸음 더 나가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삶의 목표에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다거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을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때든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로움과 사랑과 능력은 결단코 줄어들거나 포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은 세상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십자가와 부활로 명백하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예수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 봐야 합니다. 잘못 가고 있다면 돌이키셔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이 주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단연코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뜻에 합당하게 나아가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의 은총과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기다리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소망 중에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면 크신 능력과 은총으로 여러분들에 그 은혜의 표징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그것을 추호의 의심 없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어주는 최고, 최대의 표적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끝까지 붙잡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못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고 계시는 천상의 계신 주님께 여러분들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승리가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 16:5-12
1. 말씀을 잊지 말고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물고기의 기억력은 약3초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낚시를 할 때 금방 미끼를 물었다고 혼 줄이 나고도 조금 있으면 또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느 날 물고기가 화가 나서 사람에게 따졌다고 합니다. “당신들 말야, 내 기억력이 3초라고 하는데 당신들이 시간 재봤어? 그리고 말이야, 또 할 말이 있는데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하는데 당신들이 시간 재봤어? 에, 또 뭐였더라. 아! 그래 맞아,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하는데 당신들이 시간 재봤어? 그리고 또 말야,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하는데 당신들이 재 봤어. 재 봤냐고?”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도 계신 것 같군요. 물고기가 왜 내 기억력이 3초밖에 안되냐고 따지면서 불과 2초 전에 했던 이야기를 까먹고 계속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어쩌면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얼마나 까먹기를 잘하는지 지금 들은 설교를 교회 문밖에만 나가면 다 까먹어 버리고 또다시 그저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물지 말아야 할 마귀의 미끼를 덥석 물어서 고통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그런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님을 모시고 다른 곳으로 가면서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여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9,10절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지 못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이 말씀이 있기 전에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약 이 만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를 가지고 약 1만 오천명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이 두사건이 사건이 몇 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불과 하루 이틀 전에 오래돼 봐야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하고 미련한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금방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는 것을 보았지 않았습니까? 자신들이 그 현장에 있었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냥 현장에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게 일년 전도 아니고 몇 달전도 아니고 바로 며칠전 전의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먹을 것을 가지고 걱정을 하다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입니까? 그야말로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우매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그리 믿음이 없느냐, 어찌 그리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그리 둔하냐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계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대단히 죄송하지만 좀 속된 말로 하면 ‘야, 이 바보들아, 너희들 돌대가리냐? 아니 바로 엊그제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새 다 까먹었단 말이냐?’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께서 귀가 따갑도록 누누이 말씀하셨고, 수없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제자들조차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엉뚱하게 부자되는 것이나 건강이나 평안이나 기타 세상의 복을 위하여 따르며 그래서 세상의 것들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며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걸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알량한 자신의 생각, 경험, 가치관, 이성, 논릴랑 접어두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 평안, 기쁨, 안식, 소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그런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자들은 왜 주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고도 잘 믿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오늘 5,6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보십시오. 제자들은 지금 떡 즉 도시락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성경에서 누룩은 주로 죄의 영향력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누룩 속에 있는 효모가 반죽에 빠르게 퍼지며 이산화탄소를 발생하여 부풀게 하는 것처럼 죄가 빠르게 확산되어 악이 부풀어 올라 커지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되고 왜곡되고 가치관이나 삶의 모습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에 누룩처럼 퍼져있는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에 휩쓸려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함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형식주의 혹은 외식주의를 말합니다. 바리새는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세속적인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전수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일주일 두 번씩 금식하는 등 율법대로 살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형식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그 자체를 자신의 의와 공로로 여기며 사람들 앞에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사랑과 의와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은 그럴 듯한데 속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3:27에서 그들에게 이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 너희는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며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한마디로 형식주의, 외식주의를 말하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그럴 듯한 데 속은 텅빈 것, 아니 텅빈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것, 종교적 행위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생활에서는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지 않는 것, 주일성수, 헌금생활, 말씀과 기도와 찬송 생활은 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 예배, 기도, 찬송, 금식하는 것 자체를 의와 공로와 자랑거리고 여기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이 형식이나 종교적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23:2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즉 십일조는 드리면서 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면 안된다. 즉 십일조와 기타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 드릴 것도 잘 드려야 하고 동시에 일상생활에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릅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제자들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현상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어느 겨울날 어떤 도시의 대형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못타고 먼저 온 사람부터 먼저타고 늦게 온 사람들은 또 다음 차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어떤 젊은 엄마가 꼬마아이 둘을 데리고 제일 앞에 서서 다음 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버스가 길게 줄을 서있는 중간 쯤에 서는 바람에 중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먼저 타기 시작했고 그래서 제일 앞에 서 있던 젊은 엄마는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곳에서 또 두 아이의 손을 잡고 10여분을 기다렸다가 가까스로 다음 차를 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을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그들 중 대부분은 이 교회의 성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장소는 바로 교회 앞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앞마당에서 바로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금방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은 지 불과 20분도 못되어서, 교회에서 불과 몇 미터도 못가서 하나님의 말씀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앞에 두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안일만을 위하여 줄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날름 버스에 먼저 올라타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배와 헌금과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나서 삶의 현장속에 나가서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 말씀대로 은혜받은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속의 제자들도 금방 예수님이 오병이어 칠병이어로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몇 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주는 것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빵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예배와 말씀과 기도, 중요합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드리고 말씀 듣는 것으로 믿음 생활 다했다고 여기면 오산입니다. 먼저 당연히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주일성수 헌금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나 안식일 준수 명령은 구약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신약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주일 첫날 곧 주일에 열심히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들었으면 다음에는 그 말씀을 따라서 의와 인을 행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생활입니다. 그런 산제사의 삶이 있을 때 진정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먼저는 모든 영광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영광과 존귀를 돌리고 그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며 우리들 자신도 더욱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의 은혜가 풍성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친 로마적 성향을 가지고 헤롯과 어울리면서 산헤드린 공회와 제사장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많은 기득권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세상의 권력과 야합하여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세속주의에 물들지 말라. 물질주의에 빠지지 말라. 그런데 제자들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6,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그걸 빵으로 해석하여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아니 바로 며칠전에도 오병이어 칠병이어로 몇만명을 먹여주신 예수님이 설마하니 빵을 안 가져왔다고 야단을 치시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게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까? 8~10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즉 이 제자들도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물질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누룩을 빵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걸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속에도 세속주의, 물질주의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자되고 건강하고 자식이 잘되고 평안한 것을 목적으로 따르기도 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돈에 얽매이고 육신에 얽매이고 세상에 얽매어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자유와 참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경우가 많습니다.
저 유명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용하지 않는다.’ 무슨 말입니까? 회개했다, 새사람 되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하면서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육신의 요구만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면 새 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 아닙니까? 세례가 뭡니까? 물속에 들어가서 나는 죽었다. 이제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 태어났다. 그런 의미지요. 그런데 과거의 내가 죽어 새사람이 되었는데 시간은 여전히 옛날 방식대로 사용한다? 옛날의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새 사람이 되었는데 물질은 죽기 이전과 동일하게 사용한다? 내가 죽었는데 내 육신은 여전히 죽기 이전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났는데 생각이 하나도 안 바뀌었다?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가능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어디에 사용합니까? 물질은 어디에 사용합니까? 내 몸은 어디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까? 물어보나마나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곳, 중요한 곳, 기쁘게 하는 곳,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곳, 그런 곳으로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겠죠. 어떤 바보가 중요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도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곳에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겠어요?
그렇다면 옛날의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던 내가 죽고, 주님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면 무엇이 중요하게 여겨질까요? 어디에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있다고 여겨질까요? 뭐 물어보나마나 주님 안에 있는 것이죠. 거기에 생명의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지요. 사랑과 평안과 행복과 가치와 의미와 보람이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경계의 말씀은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외식주의와 물질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그래서 금방 오병이어 칠병이어로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빵 때문에 걱정하고 있구나. 아직도 정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구나. 거기서 빨리 벗어나라. 그래야 너희들은 진짜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나의 진짜 제자가 되어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빨리 벗어 던지고 내게 오려므나. 나를 신뢰하고 나를 따르거라. 그리하여 내가 주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거라. 그런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님의 이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제는 주님 안에서 거듭난 자로써, 그래서 영과 혼과 몸과 시간과 물질과 생각과 가치와 말과 행동이 거듭난 자로서 세상의 모든 죄되고 왜곡된 누룩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주님 안에 있는 참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누룩을 주의하라
마 16:5-12 / 곽선희 목사
제가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갔다가 들에 매어놓은 남의 황소 한 마리를 훔쳐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발각이 되어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말하기를 "이 사람아, 벌건 대낮에 남의 황소를 훔쳐? 어떻게 그래가지고 그게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하고 물었더니 도둑이 하는 말이 "나는 들에 나갔다가 고삐 하나가 땅에 놓여있는 것을 끌고 왔는데 와보니 소 한 마리가 따라오더군요. 난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요"라고 능청맞게 대답을 했습니다. 경찰의 대답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래? 우리도 자네 손만 묶어 가지고 왔는데 자네는 왜 따라왔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행동이든지 반드시 거기에 의지가 있고 생각이 있고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행동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부지중에 혹은 몰라서 혹은 무의식중에 이런 말은 합니다만은 알고 보면 무의식도 의식적인 행동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행동만 남고 의식이 뒤에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 자신의 것이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역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어디까지냐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깨닫느냐 거기에 사람된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영학 이론에 "전파론" 이라는 이론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유형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는 변화를 즐기며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고 항상 창의적인 것으로 치닫는 그러한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변화를 즐기는 사람, 다시 말하면 파이오니아쉽(Pioneership)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모든 사람 중에 5%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타인 인식형입니다. 아주 소극적이라서 변화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하는 것까지 생각하다 보니 진정한 변화를 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20%가 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추종자 유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조건 남이 하는대로 따라갑니다. 남이 가면 가고 오면 오고 남이 입은 옷을 내가 못 입으면 속상합니다. 남이 입은 대로만 입으면 그럼 내 마음은 행복합니다. 남이 하는 일을 못 따라 하면 마치 그것을 악처럼 생각하고 남이 하는 일대로 따라하면 그것은 선이라고 그렇게 느끼고 사는, 완전히 타인 추종형, 이런 형은 무려 70%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나머지 가운데는 자신의 고집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철학, 생활 태도·방법이 무너지면 인생이 망가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고집불통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문제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들으면서 기억하고 기억이 축적되어서 논리적으로 정돈해서 이해가 됨으로써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건에 부딪히면서 경험하게 됩니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이 지혜를 주고 지혜가 믿음을 주고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실생활에서 생명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듣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들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제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에 보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쉽게 기억하는 두 사람, 대표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근처에 우물가에 앉으셨다가 그 수가성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을 때, 그에게 귀중한 아주 신비로운 차원 높은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을 듣고 이 여자가 하는 말을 보십시오. "그런 물을 나 좀 주어서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세요." 참 맹추같은 여자입니다. 이거 참 힘든 사람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또 유식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같은 사람은 바리새교인이요 당대 종교 지도자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를 맞아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거듭나야겠다. 중생해야겠다"라고 말씀했더니 이 사람 하는 것을 보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아니 젊으면 다시 들어갑니까? 어찌 이렇게 맹추같은 소리를 하노.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랍비가 되어서 그것도 모르느냐?" 정면적으로 충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이 모두가 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에 집착을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왜 기억지도 못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는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떡 다섯덩이로 5000명. 또 떡 일곱개로 4000명.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사건인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 깨달음도 많고 느낌도 많고 감격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격을 가진지 불과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 지금 어떤 복음에는 다음 날로 되어있구요, 며칠 후 정도밖에 안되요. 그런데 배를 타고 지금 가십니다. 배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누룩"하고 나올 때에 '아이쿠, 빵이 없구나' '아, 우리가 빵을 준비하지 못했구나' 서로 시비를 벌였습니다. 의논했다는 말은 서로 변론했다는 말입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아마도 그랬겠지요. 베드로가 그러니까 가롯유다가 회계 아닙니까? "아, 당신이 수제자로 '준비하라' 했으면 내가 했을 것이 아닙니까?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왜 나에게 시비냐"는 것입니다. 서로 의논을 하게되고 변론을 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니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본 사람이 또 5000명을 먹이는 그 귀한 역사를 나타낸 그 하나님의 아들이 눈앞에 계시는데 아, 그 앞에서 빵이 없다고 시비하게 되었습니까 지금?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지도 못하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이적에 대한 이해는 삼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도 아주 고맙게 세단어로 구별되게 나타납니다. 첫째가 테라스입니다. 이적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wonder라고 합니다. miracle, 기적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인간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한 일이 있을 때에 "이적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적은 많습니다. 오늘도 죽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그런 때에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이적하면은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중앙 의료원에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다가 죽었습니다. 죽어서 시체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장례식을 하려고 냉장고로 갔더니, 냉장고가 꽉 찼습니다. 넣을 데가 없어서 내일 아침에 하나 뽑아서 장례식을 하면 그 때 그 자리에 넣기로 생각하고 그 냉장고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냉장고에 넣으려고 가보니까 살아났습니다. 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은 '이렇게 살았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그래서 목사가 이미 되었고 병원전도를 위해서 한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기적이란 있습니다. 깜짝 놀라는 기적이 있잖습니까.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두나미스라는 것입니다. 다이나믹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두나미스란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power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이 사건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이요 권능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세메욘이라고 하는데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표적, 이렇게 번역하는데 이 말은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표적,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에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기에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 나타난 일이지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제 된 사건이지만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이지만 지금 새롭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저는 그것을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인데 그것을 오늘에, 그 의미를 오늘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메욘, 표적 이해의 능력입니다. 표적을 표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남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몇 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표적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사람들은 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큰 능력을 보고도, 감격하고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떡 하나 없는 것 가지고 시비를 벌이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참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조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생명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고, 떡을 보시면서도 생명에 대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40일 금식한 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우리는 떡을 대할 때마다 생명을 생각하고 생명의 주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말이 또 문제가 됩니다. 신앙 없는 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세 황금 문"이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에 대해 충고를 합니다. 적어도 말을 할 때에는 이 세가지를 생각하고 말하라. 세가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째가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실 된 참말인가' 하고 물어봐야 됩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는 남의 말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런다더라" "그렇대" 혹은 "누가 그런대" 이 정도로 말을 하는데 이걸 잊지 마십시오. 내 입으로 말하는 한, 나의 말입니다. 남의 말이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Quotation is nothing, 아닙니다. 남의 말이지만 내가 말하면 내 말입니다. 이제부터. 내게서 듣는 사람은 내 말로 듣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말은 참 조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제 저녁에 혹, 그 프로그램을 보셨습니까? 연예가 중계. 제가 그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봅니다. 그런데 연예가 중계가 나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에 요 몇 년 몇 달 동안에 소문이 났던, 인터넷에 뜨고 신문에 나고 했던 그런 이야기들을 전부 확인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연애한다더라 해서 물어봤더니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한다더라 해서 물어보니 "우리가 왜 이혼합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고 하는데 안 먹었습니다. 멀쩡합니다. 그뿐입니까? 와, 놀랍습니다. 어느 가수 에이즈 걸렸대, 그래요. 그 아이들까지 걸렸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아 이거 야단났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그래서 정말 그런가 했더니 어제 보니 멀쩡합니다. 절대 그런 일 없다고 합니다. 자, 그러니 연예인들 고생을 많이 합데요 정말. 그 연예인 된 죄로 말야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에이즈 걸렸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엉뚱한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확인을 하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는 얘기를 보았습니다. 결론은 무엇인가요? 여러분, 쉽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그것이 망조입니다. 연기 납니다 요즘에는. 나고 말고요. 왜 그 생각을 못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책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에는 참으로 확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그 외의 말은 들은 말이라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해야 될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내가 할 말인가? 또 하나, '이 상황에 이 말이 필요한가?' 그것을 물어봐야 합니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다릅니다. 제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 기계체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철봉을 잘했습니다. 아주 썩 잘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다 잘했는데 딱 하나, 못하는 게 있었습니다. 대회전을 못했습니다. 그것을 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는 그것을 잘했습니다. 공부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와서 탁 붙잡자마자 휙 돌아가는데 참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지켜보고 있는데 구경하던 친구 중에 하나가 입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지. 표주박이 우물에서 깨지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돌면서도 그것을 또 들었습니다. 내려오자마자 "나 이거 하다가 죽으란 말이냐" 하더니 냅다 치는데요 저도 안 말렸습니다. 내키는 데로 때리라고. 참, 그거 입방아 못됐더라구요. 그거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합니까? 위험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런 때에는 입이라고 잘 안 합니다. 그런 때는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말조심해야 합니다. 입이라는 것이 아무 때에나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라고 다 말입니까? 진리야 진리입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할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상황에 이 말이 필요한가, 물어 보십시오.
세 번째,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혹이라도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이 이 속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빗나가기 때문입니다. 동기를 물어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가? 이 세 가지 문을 통과하면 훌륭한 덕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잘 아시는 디트리히 본훼퍼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쓴 작은 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가? 라고 하는 논문에서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감정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질투심을 유발해서 불평하게 만든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질투는 죄가 아닌 줄로 아십니다만 마귀가 작용을 합니다. 원망하게 만듭니다. 작은 일 큰 일에서 원망하게 만듭니다. 이 원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울증을 우리는 병이 아닌 줄로 착각을 합니다. 우울증은 불치병입니다. 무서운 병입니다. 자기가 죽던지 남을 죽이던지, 이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애의 의미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셋째는 구원 신앙을 흔들어서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미 죄가 많다, 너는 끝장이 났다'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부정과 절망으로 유혹하다. 한번 들어둘 만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제자들, 어느 사이에 유혹을 받아서 방금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보았건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감격도 없습니다. 그 능력도 잊었습니다. 오늘은 또 원망,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깨닫지도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어찌하여 서로 의논하느냐." 바리새 교인의 누룩, 외식주의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 이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비유해서 "누룩과 같다, 한 번 받으면 자꾸 퍼져나간다,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조심해라. 이 악한 교훈을 조심해라, 사탄의 역사를 조심해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중요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어째서 떡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 불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두 주일도 못 가서 원망을 합니다. 모처럼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죄목이 원망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원망하게 되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원망하는 사이에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딱 붙들리는 순간 완전한 절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깨닫지 못하느냐? 깨달아야 되고 기억치 못하느냐? 여러분,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됩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했으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살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하는 순간 오늘의 모든 문제가 시원하게 풀려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달아야 은혜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능력으로 바꾸어집니다. 생명력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기억하고 그 기억한 바 은혜로 오늘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해 보십시오. 밝은 미래가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저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또 새 은혜를 주시며, 또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또 다시 깨달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우리가 누리는 큰 기적을 순간순간 깊이깊이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기억하는 바대로 모든 것을 은혜로 소화하고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 안에서 충실히 사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