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좌익세력들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왜곡과 비방중에 친일과 독재 그리고 지역감정이
있습니다..
다음은 친일왜곡 독재논란 및 지역감정유래에 대해 설명한 글들입니다.
--박정희 친일왜곡의 진상 및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먼저 노사모 위시해서 국내 좌익세력들이 인터넷에 퍼뜨리는 박통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통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좌익과 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뿐만 아니라 언론도 친일이고 공무원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느냐?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재물 영달을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그 자체가 친일이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합니다. 나폴레옹전기를 통해서 군대 군인을 동경하게 된 박정희는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김종신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 즉 나폴레옹에 대한 소년시절의 동경에서 비롯되어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대통령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식산은행금융조합서기,훈도야말로 식민지지배의 최일선에서 첨병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이런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 및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대로 남로당에 남아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어디 소속들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불분명하며 어쨌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군대지휘관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으면 임무를 잘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광복후 일본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의 내연녀였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외교석상에 욕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반미면 어떻냐?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가서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습니까?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를 일본과 공동관리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통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로 지켰습니다 단지 국제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습니다 독도영유권에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은 김대중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정권입니다
60년대 그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할려고 했을까요?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것은 이미 뉴스에 보도되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되는 문제의 수준이 아니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하겠지요
박정권이 개인청구권을 팔아 먹었다는 것은 잘못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개인청구권 대신 국가가 대신 받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장면정부부터 입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와 재판을 해서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죠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피해보상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경제개발 종자돈을 베팅할 시기를 놓쳐야한다니....? 그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병자 비일비재하는 국가에서 할수 있는 최선책였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받아 투명하게 충실히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박정권의 비리를 캐기 위해 만든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한 이원덕 국민대 교수의 글 인용합니다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를 부관참시하러 들어간 사람이 이런 평을 한 것은 박통의 승리라고 할수밖에 없슴)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에게도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할려고 혈안이죠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대통령은 DJ정권의 해수부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한일어업협정 연장하신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내용)이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통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역사를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과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의 지역감정 유래--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 )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김정렴 정치회고록 발췌
-- 후진국에서 경제건설과 민주화가 양립가능했겠는가? --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 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가」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몹시도 배고팠던 시절,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도 컸던 시절. 경제건설을 통한 산업화 근대화가 이룩되고 나면 그 토양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누가 과연 민주화에 진정한 공헌자인가 ---
흔히 말하기를,
박정희는 독재자이고, 김영삼 김대중은
민주화 투사라고 부른다.
이거 완전히 새빨간 거짓 선동이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세우면서,
자기들이 민주투사인양 가장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살았었고,
내 눈으로 똑바로 박 대통령을 보았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살았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동네 이장일을 보았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시골 농번기가 되면 어김없이 시골 농촌에
내려 와서는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막걸리를 즐기셨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어른들은 우리집에 모였었다.
그리고는 동네 어른들은 면장, 군수를 찿아다니면서
이번 농번기에 꼭 우리 마을에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자고 하였다.
당시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의 농촌부흥 운동으로 가난을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다.
만일, 박 대통령이 정말 독재자였다면,
과연 당시 농촌 농부들이 이토록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겠는가.
나는 1970년대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모대학에 다녔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중화학, 중공업이 집중 육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들은 세계 최하위 빈곤국가에서 우리가 중진국
진입이라는 희망과 꿈에 벅차 있었다.
대통령과 국민은 하나가 되어 꿈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일만
하였다.
자칭 민주화 투사들은 말하기를,
"70년대에 유신헌법은 유신독재체제"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거 또한 거짓된 민중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유신헌법 체제 동의는 전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 하였다.
우리는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더 중화학, 중공업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진국 진입이라는
희망을 낳게 되었다.
우리는 80년대가 가장 호황기 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80년대에 꽃피운 시기는 박 대통령의 유신헌법 개정
통과로 인한 경제개발 덕이었다.
만일 당시 유신헌법의 개정 통과가 불발로 끝나고,
자칭 민주화 투사란 분들이 집권 하였다면,
우리나라는 끔찍한 상황이 이미 일찌기 발생하였을 것이다.
70년대에 대학가는 연일 데모로 얼룩져 있었다.
여기에 선봉에 선 자가 김영삼, 김대중씨였고,
김대중씨가 특히 심했다.
김대중씨는 대학가 강단에 서서 당시 학생들에게 민중선동을
일으키면서 학생운동에 불을 놓았다.
당시 김대중씨의 수제자들이 현재 집권 열우당의 실세들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에게는 이들 데모만
주동하는 학생들을 너무 싫었다.
학교는 툭하면 휴강 하였다.
당시 모범 대학생들에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말을 빌려보자.
" 저 개XX들, 또 데모질이다"
"저 개XX들중에는 어떤놈들은 김일성 초상화 밑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책을 숨어서 몰래 본다고 하더라"
"저 개XX들 하고는 말도 하지 마라"
일반적으로 70년대는 민주화 투사가 독재자와
맞서 싸운 얼룩진 시기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이것은 철처히 오도된 잘못된 교육이다.
자칭 민주화 투사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는
자기들을 미화하기 위한 위장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나는 박 대통령 시절에 어린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내 눈으로 박 대통령을 똑바로 보았었고,
당시 상황을 진실되게 말하는 것뿐이다.
박 대통령은 절대로 독재자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우리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이끈 훌륭한 대통령이시고,
우리 국민들을 절대로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당시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몰두하고 있을때,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으면서 민중선동을 일으키며 데모만
주동하였던 작자들만 탄압을 받았었다.
그렇다면 자칭 민주화 투사인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를 방만하게 운영하면서 IMF 사태를
초래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체제하에서,
IMF 조기졸업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외국자본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기업을 외국에
헐값으로 팔아 버렸다.
작금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IMF 체제하에 무려 170만명의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 몰렸다.
한 가정이 4인임을 감안할 때 무려 700만명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달래 줄 것인가.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집권하면서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로 얼룩졌었다.
최근에는 국정원의 도청 비리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들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민주투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부도나게 하였지만,
이 분은 반공이념이 투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안보는 불안하지 않고,
국민들이 그런데로 마음 졸이지 않고 살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나라가 위기로 치달을 시 금융개혁 입법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야 대권주자를 비롯한 정치권이 개혁시도를
방해 하였다.
결국 우리나라는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당시 정치권은 썪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간첩 한마리도 안 잡고,
더구나 북한이 남한을 향해 뚫어놓은 땅꿀조차도
발견하지 않았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 안보 불안으로 국민들이
너무나 고통을 겪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혹시 부정에 개입할지도 모르는 친인척을 엄중하게
감시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친형은 가난한 농부로 여생을 보냈고,
친 누님은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또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철저하게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침실 화장실에는 물을 절약하기 위해,
벽돌 한장을 놓고 살았다.
또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때 보니,
20년된 다 떨어진 혁띠와 손목시계를 차고 계셨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전국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가보니,
할머니들이 정화수 물 한그릇을 떠 놓고는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당시 전국에 농촌의 할머니들은 다 이랬다.
그래서 당시 일간지 신문에도 이런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씀하셨다.
"민주화는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잘 살게 될때
진정한 민주화가 성숙될 수가 있다"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에 선진국 진입을
꿈꿀수가 있었고,
이로인해 중상류층이 두터운 층을 이루게 되었다.
두터운 중상류층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히 민주화를
이룩할 수가 있게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이어지며서 우리나라는 나라경제가
힘을 잃으면서 중상류층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
중상류층의 몰락은 민주화를 몰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정 민주화에 공헌한 분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란 말이더냐.
우리는 최소한 세상을 똑바로 알고 살자.
거짓 선동꾼에 제발 속지 말고 살자.
-누가 유신을 함부로 말하는가?--
현재 열우당과 그 추종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평가할 때 현재의 가치기준밖에 적용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가히 단세포적인 두뇌를 가진 집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가치관으로 평가하여 나약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현 세대들을 세뇌하려는 모리배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치가들이 '유신'을 악의 대명사처럼 폄하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신헌법'이란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을 총칼로 겁박해서 강제로 통과시킨 대악법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칭 '민주투사'라는 사람들은 '유신독재'란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유해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령, 60-70년대에 버스안에서 어떤 어르신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치자. 그 당시에는 유쾌하진 않았을 지 몰라도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젊은이가 '아저씨, 버스에서 담배피우시면 안됩니다'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용기있는 사람이다. 현재의 잣대로는 아무리 나이드신 어른이라도 버스안에서 담배피운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은 시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신통치는 독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독재'란 것은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통치자가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좋은 예이다.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겁박하고, 불리한 지역에서는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1972년 11월에 실시되었다. 투표인명부에 등재된 투표인수는 15,676,395인 이었고 이중 91.9%에 해당하는 14,410,714인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이중 찬성이 91.5%에 해당하는 13,186.559표로서 유신헌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세상에서 국민의 90%이상의 지지를 받은 정권에 대해 '독재'라고 매도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지 않을까? 집권후, 10년간 자유당 잔재를 청산하고 5000년 유산인 가난을 몰아내준 지도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모두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였더란 말인가?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의 주도하에 산업전선에서 피땀흘려 일하며 세계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 칭송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 직업도 없이 민주화운동 한답시고 국가에 저항하고 감옥이나 들락거리든 사람들을 국민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자칭 '민주투사'란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거꾸로 물어보고 싶다.
물론 국민소득 1만불 시대인 현재의 상황에서는 유신통치와 같은 형태가 허용되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재야운동가들 중에 인정받아야할 분도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을 받을려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 당시 산업전선에서 묵묵히 일하셨던 분들을 먼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불행히도, 열우당과 민노당의 자칭 '민주투사'들은, 극소수에 속했던 자신들의 생각은 옳고 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다는 아집과, 피해의식에 따른 보복심리로 과거사 전체를 부정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들인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에겐 박대통령 시절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평가도 금기시 되어 있다.
요컨대, 현재의 잣대로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려는 외눈박이들은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세월이 갈수록 그 당시에 사셨던 분들이 자꾸 돌아가셔서, 진실을 말해줄 분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점이 심히 유감스럽다. '유신'이란 것이 현재 정권을 잡은 모리배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헌정질서를 유린한 악이 아니라, 그 당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분명한 사실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에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90년대말 경제위기 때 재야운동권의 큰 어른이신 백기완 선생의 말씀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나같은 사람은 핍박했어도 나라전체는 잘살게 해줬는데 지금 이놈의 정권은 뭐하는 집단인지 모르겠다.' 불행히도 권력에 눈이 먼 작금의 열우당 시종잡배들에겐 자신들이 가장 존경했던 어른의 말씀조차도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고 있다.
[펌]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젊은 20대의 경제학을 전공한 여성입니다. 태어날때 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 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말로 한국을 망친 챙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에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 이라는 단기간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활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 진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안병직교수 ‘마르크시스트→뉴라이트’ 사상전환 첫 고백 "집권 운동세력 나라 위기몰아” • “南北현실 외면 ‘통일지상주의’ 어불성설” : 한국좌파 경제학의… • 安교수의 ‘캐치 업 이론’ : 70년대 이후 운동권 사상논쟁의 한축…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5일 “지금 집권 민주화 세력이 한국 사회를 구렁텅이로 이끌려하기 때문에 뉴라이트 운동에 나서게 됐다. 한국이 위기이기 때문에 무리하게라도 얘기를 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사상 전환 과정과 배경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안 교수는 특히 70년대까지 신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따라 한국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측하다가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경제를 살리는 걸 보고 충격을 받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인 안 교수는 “요즘 한자리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와 운동도 같이 하고 내가 기른 사람들”이라며 여권의 핵심인사들을 실명거론하면서 “이들이 노무현 정부를 건달정부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선진화를 위해선 한미공조를 통한 국제협력노선이 최선인데 참여정부는 민족자주쪽으로 경사되고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이들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민족자주를 내세우며 한미동맹을 이완시키는 것은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계산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비판한 뒤 통일운동을 펴는 학계의 원로교수들도 실명거론하면서 “북한현실을 외면하고 민족을 사지로 몰고가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안 교수는 학계의 박정희 전대통령 재평가론에 대해선 “과거 그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면서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여 중진자본주의로 나간다는 캐치 업(catch up)이론에 입각해 보면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론은 탁월하며 박정희식 군부 독재가 아니었다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인혁당 조작이라고? 그게 조작이다 이영민 /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대변인 국정원의 과거사 「眞實위원회」는 「진실 왜곡위원회」라야 맞다 2005년 12월 7일 이른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과거 1. 2차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국가기관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범죄자로 단정해 버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개입한 정황이 명확하다고 발표하였다. 국가기관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함부로 범죄자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는 얼마 전에도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하여 코미디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여 전 국민의 비웃음을 산 적이 있다. 그때도 그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박 대통령의 개입설을 일방적으로 발표했었다. 몇 달 간격으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물 쓰듯 하며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 이제 그들의 주장의 허구성을 한 번 파고 들어가 보자. 김형욱은 역대 중앙정보부장(안기부장, 국정원장 포함)중 최장기간동안 재임한 기록을 세웠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해임당한 후 미국에서 반 체제활동을 해왔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인 만큼 그의 회고록에는 박 전대통령에 대해서 부정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조작됐다는 말은 없고 다만 그의 표현대로라면 심증은 뚜렷하지만 물증은 없었던 까닭에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7년 동안 가장 다루기 어려웠던 사건이라고 털어 놓고 있다.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의 발표야말로 조작이며 터무니없는 허위임이 분명>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미 체포된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괴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으로도 인혁당이 북한과 연결된 조직이라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이 조작이라는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의 발표야말로 조작이며 터무니없는 허위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검찰은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이 사건에 대하여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혐의를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기소를 거부하는 등 공소를 엄격히 하였다. 당시 이 사건의 기소를 거부하였던 이용훈. 여운상(여운형의 친척) 검사가 물러나는 등 진통을 거듭한 끝에 처음에 구속기소 되었던 26명중 13명은 검찰이 공소취하, 공소장변경등으로 석방되었고 기소되었던 13명 중에서도 副責(부책)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춘우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것 외에 나머지 11명에게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으로써 당시 빠져나갈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갔고 최소한의 인원만이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가 이 사건 전체를 조작되었다고 결론내린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조작되었다는 것인가. 당시 도예종은 10년 후 다시 인혁당을 재건하려다가 체포당해 기어이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 이들의 구명운동을 하다가 추방당했던 시노트 신부는 2005년 4월 3일 방영된 MBC TV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자신은 인혁당이 무고하다고 주장한 적은 없으며 다만 형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였을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즉 당시 인혁당 구성원들의 구명운동을 했던 외국인 신부조차도 인혁당의 무죄여부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답을 피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혁당 사건이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함께 체포되었던 이철. 유인태 등 민청학련 구성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고 석방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인혁당은 북괴와의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조사결과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의 발표대로 이 두 사건이 모두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굳이 민청학련은 풀어주고 인혁당은 사형을 집행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왜 똑같은 국사범이라면 한 쪽만 봐 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도대체 누구를 조사했고 무엇을 조사했단 말인가?>
「과거사위원회」는 이번 조사가 국정원과 검찰, 국방부 등에 보관된 자료 위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보존 문서 중 핵심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또 사건 피해자를 제외한 면담 조사자는 불과 30명에 그쳤고 특히 각 사건 수사에 관여했던 당시 대공수사과장 이용택씨를 비롯한 전직 중앙정보부 직원 8명은 모두 「과거사위」의 면담 조사에서 사건 조작이나 고문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렇다면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도대체 누구를 조사했고 무엇을 조사했단 말인가. 또한 지난 12월 7일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도 조사의 객관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이에 대해 「과거사위원회」 측은 관련자 증언은 착각이나 정치적 입장 변화에 따라 부정확해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과거사위원회」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왜곡되었다는 별도의 증거를 확보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함부로 자신들의 견해를 강요한다면 그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조사대상사건들과 차이점이 무엇인가. 이번에 「과거사위원회」는 관련자 증언이나 자료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사건이 박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미 「의문사위원회」 등에서 용공 조작이라는 결론이 내려져 재심이 청구된 사건을 조사하면서 여러 시민단체가 주장한 방향으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정권과 코드가 맞는 결론이 도출되는 상투적인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지난 번 김형욱 실종사건 조사결과 발표를 재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는 그들의 활동이 진실규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며 오로지 특정인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또 다른 특정인이 바라는 바를 대행해주는 정치적 폭력청부업자로 전락하였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체성 허물기, 김대중 제2건국 운동 노무현 과거사진상규명운동으로 절정에>
작년 12월 27일 법원은 74년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 재심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라는 점을 법원은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동안 1. 2차 인혁당 사건 모두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해왔던 좌익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다. 작년 1월28일자 코나스(안보신문)의 김철 기자가 쓴 국정원 과거사, 객관적 진실규명 기대 어렵다. 진상규명 민간위원 10명 전원 민족해방(NL)계열..편향성 지적제하의 기사를 보면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민간위원들의 성향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하나같이 좌파를 지향하고 있는 편향적 인물들이며 지금도 국가보안법 철폐, 범민련 한총련 등의 이적단체 합법화 추진, 송두율 무죄처리등 소위 민족공조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이 과연 진실을 규명하고 있는지,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에서 시작, 제2 건국→태극기 부정까지>
이것이야 말로 과거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서부터 출발한 대한민국 정체성 허물기 작업이 김대중 정권의 제2건국운동(여기서부터 태극기, 애국가 부정운동이 출발하였다)을 거쳐 현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진상규명운동으로 절정에 올랐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추진을 거쳐 다음 단계인 군축, 평화협상을 마무리하면 저들이 바라는 적화통일의 완결로 되는 것이다. 물론 인혁당이 반국가단체라 하더라도 조직의 특성상 거기에 가담한 일부는 모르고 가입했을 가능성이 있고 수사 도중에 억울한 혐의가 추가된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 사건 전체가 정권의 조작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국가전복 행위를 뒤덮으려는 역사왜곡이고 또 다른 범죄행위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필자가 한 가지 더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김만복 국정원 기조실장의 이력에 대해서이다. 김만복 기조실장은 과거 부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다가 60년대 말 당시 중앙정보부가 시국사건담당부서인 제6국을 창설할 때 창설요원으로 특채된 인물이다. 바로 이번에 문제가 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직접 조사한 장본인인 것이다.
<과거사진실 왜곡위원회로 명칭 바꾸던지 그만 해체하던지 용단을 내리기 바란다>
그는 김대중 정부 말기 국정원에서 해임되었다가 세종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는데 당시 세종연구소에 있던 이종석씨가 NSC 사무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정보담당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대학동문인 김승규 국정원장이 취임하게 되자 기조실장으로 임명되어 도청사건과 과거사 진실위 활동을 총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자기가 과거에 직접 조사한 사건을 180도로 뒤집어서 발표하는데 참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조사한 사건을 자기 손으로 직접 뒤집는 사람은 없다. 이는 도의적으로도 있을 수 없고 이런 해바라기성 인물이 발표한 결과가 과연 믿을 만 하다고 볼 수 있을까.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는 이제 국정원 과거사진실왜곡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던지 아까운 국가재정을 낭비하지 말고 그만 해체하던지 용단을 내리기 바란다.
[포커스] 진실위의 역겨운 "인혁당 발표"를 보고.. - 박정희 정권의 조작보다 더 기만적인 노무현 정권의 조작.. (시대유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1,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1차 인혁당사건은 강령과 규약이 일부 논의됐어도 채택된 적이 없고, 당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반국가단체로 볼 수 없다고 주장을 했다.. 2차 인혁당(민청학련)사건 역시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며 그들의 목적이 사회주의건설이 아닌 민주투쟁이라고 주장을 했다..
즉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세력을 박정희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세력으로 왜곡하여 탄압을 했다는 것이 이번 발표의 요지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인권유린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들의 사형을 지시했다는 내용을 증거 없이 상황논리에 따른 추론으로 확정 지어 발표를 했다.. 나는 이 발표를 보고 웃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기 때문이고, 너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처리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의 무리수나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 역시 유감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실위의 발표는 나를 웃겼다.. 왜냐면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처리한 것 보다도 더 큰 왜곡과 뻔뻔한 기만이 그들의 발표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철면피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든다..
먼저 인혁당 사건이 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혁당이란 인민혁명당의 약자다.. 한일협정반대데모와 유신헌법 철회 데모가 가열되었던 1974년 계엄령을 선포 하에서 발생된 두 차례의 용공 사건을 인혁당 사건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1차 사건의 경우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했던 서울대의 “불꽃회”와 고려대의 “구국투쟁위원회” 등을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공산혁명세력으로 적발한 사건이다..
2차 인혁당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불리 우는데, 유신독재반대투쟁을 주도했던 배후세력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북과 내통하는 공산혁명세력으로 적발 된 사건이다.. 진실위의 발표는 이들이 공산혁명을 추구하는 용공세력이라는 박 정권 시절의 판결이 조작된 것이며, 북한의 방송을 몇 번 청취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공산혁명세력은 아니고 단지 한일협정과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세력이라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진실위의 판단은 좌파들이 그토록 수구언론으로 매도하는 신동아나 월간중앙에 80년대 게재되었던 수준의 내용일 뿐이다.. 사실 인혁당 사건은 그리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또한 인혁당 사건에 대한 그간의 담론의 조작의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본질과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 신동아나 월간중앙의 기사 역시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으로 접근한 기사에 불과할 뿐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혁당 사태에 대해 가장 깊은 수준의 연구를 했던 것이 80년대 NL(주사파)과 PD(맑스파)로 나누어지는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남한사회의 좌파세력의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을 한다.. 60년대 이전 북한의 노동당을 전위정당으로 규정하는 “민주 기지론”에 의거 활동하던 남한의 좌익들은, 60년 이후의 상황변화에 따라 남한 내의 독자적인 지하당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민주기지노선 하에서 지역혁명론”을 제기했다..
즉 “남한 인민들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형명적 당을 독자적으로 꾸려야 하며, 이 당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혁당 사건이나 통혁당 사건 같은 박정희 시절의 공안사건을 남한 내에 전위조직을 건설하는 혁명과업의 과정으로 판단을 한다..
또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부산의 암장(마그마)그룹은 1954년 고교학습서클로 태동하였지만, 4.19 당시 또 다른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인 도예종, 서도원 등을 만나 전위그룹을 형성하며 맑스레닌선집, 스탈린선집, 도이치이데올로기, 반듀링론, 공산당사 등 각종의 이론서와 월북작가, 역사학자들의 책을 섭렵하며 공산혁명운동을 수행하였다. 그 중에는 인혁당을 80년대 학생운동 양대세력 중 맑스파인 PD세력의 원조로, 통혁당은 NL세력의 원조로 보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또한 좌파 역사학자들은 인민혁명당이라는 이름이 베트남의 인민혁명당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들이 이러한 이름을 정한 이유는 베트남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북베트남의 노동당을 형제당으로 생각했던 남베트남 공산세력과 같이, 북한 노동당을 형제당으로 생각하는 남한 노동당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까지 주장을 한다.. 좌파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자료는 다 인용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즉, 인혁당 사건이 당시 남한 내의 공산혁명세력이 북한 노동당과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남한 내의 공산혁명을 주도했던 전위 조직임은 좌파 역사학자들이 커밍아웃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진실위는 뻔뻔하기 그지 없게 이들을 공산혁명세력이 아닌 민주세력으로 둔갑을 시키며 대국민 기만을 하고 있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들을 복권 시키고 국가에서 보상금도 주며, 민주투사로 둔갑을 시킬 모양이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처리가 절차나 과정상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며 유감으로 생각을 한다.. 형량도 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서,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공산주의자들이 민주투사로 둔갑을 한다는 것은 또 한번의 기만이며 조작이고 대국민 사기극이 아니겠는가? 물론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솔직히 까 놓고 이야기를 해 보자..
쉬쉬하지만 우리사회에 모두 다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지금 현정권의 주축이 된 80년대 학생운동권 세력들의 정체가 뭐냐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민주투사를 참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주체사상이나 맑시즘을 추종하며 남한 내의 공산혁명을 꿈꾸던 자들이 아닌가?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기 바란다.. 나 역시 그 조직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고 경험한 사실이니 말이다.. 위에 인용한 자료도 원한다면 출처를 다 알려줄 수 있다..
그런 자들이 정권을 잡고 스스로 민주투사를 참칭하고 있으니,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공산혁명분자들 역시 민주투사로 둔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이 구린 것이 있으면 차라리 하지를 말던지, 도대체 이 기만적이고 비열한 정권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 예측은 했지만, 너무도 뻔뻔한 그들의 기만에 치가 떨릴 정도다.. 부디 해도 해도 정도 껏 하기를 바란다..
시대유감
|
첫댓글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조국에 영원한 국부이십니다... 고이 잠드소서 슬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