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봄, 봄
차은량
봄 하나
한 겨울 꼼짝않고 들녘의 바람을 막아주던 창문살엔 켜켜이
먼지가 쌓여있었다. 창틀에서 떼어 낸 창문에 물 호스를 대고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 댄다.
이 찬란한 계절의 서막을 시샘할 꽃샘바람이 두어번 더
찾아와 투명한 유리창에, 혹은 뽀얗게 닦아놓은 항아리위에
붉은 흙먼지를 두둑히 날릴 것을 뻔히 알면서 나는 조급한 봄
청소를 한다.
겨우내 시퍼렇던 찬바람속에 죽은 듯이 잠자던 마늘밭에서
약속처럼 솟아나는 연초록의 새싹들 사무친 그리움 주체
못하고 꽃망울 기어이 터뜨리고야 마는 저 하얀 목련송이
보면서 어찌 바람자기를 기다릴것인가?
얼었던 땅에서 새순 돋는 그 희망을, 아기살처럼
보드라워진 흙살에 씨 뿌리는 거룩한 몸짓을 나는 앉아서
맞이할 수가
없다.
올 듯 말 듯,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다가오는
벅찬 봄을 맞이하고자 나는 해마다 이맘때면 조급한 봄
청소를 한다.
봄둘
나더러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딱히 어느 한
계절을 꼽을 수가 없다.
사 계절은 내게 저마다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하늘이 뚫린 듯 비 퍼붓는 여름은 어떠한 위로보다 더 큰
위안을 주고, 조락의 가을은 거칠 것 없이 외로워서 좋다.
겨울은 겨울대로 유배지에 귀양당한 심정이 되어 갖은 유혹
물리치고 잡독삼매를 만끽하게 되니 또한 싫지가 않다.
봄은 3월에 태어난 나와 어느만큼 닮은 듯도 하여 은근히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오는가 하면 아니오고 안 오는가 하면 그제사 모습을
드러내는 야속한 연인같기도 하다.
아직도 가슴까지 시린 바람에 옷깃 꼭꼭 여미는 동안
얼었던 강물 소리내어 흐르고 잠자던 땅에 싹을 틔우며 달래,
냉이, 씀바귀 한 상 차려내는 봄이다 봄은 그렇듯 저 할짓 다
하며 안 오는 척 오고마는 변치않는 내 사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봄을 닮았는지 봄이 나를 닮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봄셋
감미로운 미풍에 흔들리는 마른 갈대의 가냘픈 몸짓이
의연하다.
낮은 제방을 따라 논들이 길게 신작로에는 간혹 지나가는 차량의
들리지 않는다.
코끝에 와 닿는 쌉싸한 풀내와 펼쳐져 있고 그 너머 불빛이 보이지만
소리는 함께 크지 않은 여울물 앉아 봄밤을 즐기는 소리가
제법 명랑하여 풀섶에 여심(女心)은 저으기 만족스럽다.
날씨가 풀리고부터 어스름 저녁이면 괜히 집을 나서본다.
강변으로 향하는 한적한 마을 뒷길은 거대한 제지공장이
가로막고 선지 오래다 솔 내음 향그럽던 오솔길은 하나 하나
포장이 되고 달빛을 받으며 유유히 거닐던 신작로는 질주하는
차량에게 빼앗긴지 또한 언제던가.
시골에 살면서도 한적한 오솔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스스로도 비애스럽던 차에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였다.
마을과 마을사이를 흐르는 작은 시냇가의 둑길을 따라
어느만큼 내려가면 마을과 경계한 듯 버드나무가 늘어 서
있다. 그 앞 풀섶에 앉으면 어느새 마을은 저 만큼 멀리
느껴지고 잔잔한 수면위로 하늘의 별빛도 잠시 내려와
반짝인다 어쩌다 날개 푸득이며 철새라도 날아오르면 밤
산책의 운치는 더 할 나위가 없어진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고치에서 나비가 깨어나는 소리,
나뭇가지에선 꽃눈 트이는 소리도 들릴듯하다.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자리를 털며 일어나
돌아오는 발길에 보드랍게 밟히는 새 풀들의 감촉 괜히
나서보는 봄밤의 산책으로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98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