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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
마 16:13-20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13-20 / [베드로의 고백;막8:27-30,눅9:18-21]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20) 그리고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아느냐”라는 질문에 제자들은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답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하늘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13-16)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여러 번 제기되었습니다(마 8:27; 11:3; 12:23).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중 하나라고 평가한 것은 그분을 메시야가 아닌 메시야를 예비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체험적으로 배운 제자들은 때론 부족하고 의심할 때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누구신지 바르게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기초(17-20)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시몬아 너는 복 있는 사람이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이성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알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근거해 그에게 특별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반석이라는 뜻인 ‘베드로’는 이름처럼 그의 신앙고백은 교회의 든든한 기초가 됩니다. 그러한 그에게는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영생의 기초가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임을 말합니다.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와 같은 하늘나라 열쇠가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적용: 예수님을 머리로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순간마다 ‘체험적으로’알고 있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당신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한 적은 없습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는 신앙고백이 내 입에도 있습니까?
세렌디피티의 법칙(Serendipity’s Law)이란 노력한 끝에 찾아온 우연한 행운을 말합니다. 18세기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의 페르시아 동화 '세렌디프의 세 왕자'라는 내용에서 처음 유래된 이론입니다. 동화 속 왕자들이 생각지 못한 행운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이야기에서 그 의미가 생겨난 것인데, 왕자들은 전설의 보물을 찾아 떠나지만 보물을 찾지 못하고 그 대신 계속되는 우연으로 지혜와 용기를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거나, 모래 위에 불을 피우다 유리를 개발하거나, 목욕탕에서 넘치는 물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알아내는 것이 해당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행운은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만 찾아온다고 해서 세렌디피티의 법칙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우연'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준비된 자에게 오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성경의 3대 열쇠
마 16:19; 마 7:7 / 김홍도목사
대단히 중요한 것을 열쇠로 비유합니다. 열쇠(key)란 잠긴문을 여는 것으로서 중요한 비결이나 비밀을 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비결을 열쇠와 같이 표현하면서 가르쳐 주신 말씀 3가지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 16:19)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베드로 자신이 어떤 천국 열쇠가 된다는 뜻도 아니요, 베드로가 어떤 천국 열쇠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 "주는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시인하는 신앙고백이 곧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베드로는 결코 천국 열쇠가 될 수 없습니다.
천주교회에서 믿는 것처럼 천국 열쇠를 어떤 교황이 가지는 전유물도 아닌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잘 났든, 못 났든 죄가 많건 적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시인하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9-10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그 신앙고백이 바로 천국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에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3:16에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오늘 처음 이 말씀을 일은 사람일지라도 이 사실을 믿으면 분명히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열쇠를 우리만 갖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받도록 구령열에 불타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2. 경제 문제 해결의 열쇠
말라기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요 진정한 의미에서 물질 축복의 천국 보고(寶庫)를 여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가서 우리 국가가 복을 받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사실 십일조는 물질의 축복만이 아니라 건강의 축복, 가정평안의 축복, 물질을 통하여 들어오는 여러 가지 사탄의 시험을 막는 중요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노르만 빈센트 피일"(Norman Vincent Peale) 박사에게 경제문제로 가정이 파탄이 되고 이혼하게 됐다고 그 해결책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편지가 일년에 수 백통씩 온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해답을 "가이드 포스트"지에 "Do you worry about money?"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돈을 남용하지 말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사라, 서로 딴 주머니를 차지 말라 등등 10가지를 써 내려가다가 맨 마지막으로 가장 역점을 두어서 대문자로 쓴 것이 말라기 3:10의 말씀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러면서 "노르만 빈센트" 박사가 하는 말은 "복을 주나 안 주나 시험해 보라" 그랬는데 당신들은 십일조를 해보았습니까? 하면서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 말씀대로 꾸준히 실천하면 경제 문제는 해결되고 물질의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중요한 축복의 열쇠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신앙가이면서 큰 재산가인 알렉산더 커르(Alexander Kerr)라는 사람은 십일조 생활로 축복을 받았는데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보라 여러분의 가계부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하고 간증을 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축복의 약속이 붙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들이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하시면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책망하시다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고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잎습니다.
어떤 이는 축복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고 합니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들여……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가 맘대로 성경 말씀을 변경시킵니까? 그것은 믿음 없는 자의 합리화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했는데 복을 주실 줄 믿어야 복이 올 것이 아닙니까?
어떤 이는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받았으니 오늘날도 목사가 십일조를 받아 써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히브리서 7:8에 보면 "또 여기는 죽은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사람(제사장)이 받았으나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부활하신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복을 받은 것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들은 멜기세덱인 예수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드리고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어느 분이 십일조에 대한 말에 인가귀도(認家歸道) 안된 집은 안해도 무방한 것 같이 말하고 십일조를 쪼개서 주일헌금이나 월정 헌금으로 내도 되는 것 같이 말하나 십일조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십일조를 쪼개서 주일헌금이나 감사헌금으로 대신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십일조대로 드리고 기타 헌금은 자유로 정성껏 바치는 것입니다. 또, 인가귀도 안 되었으면 안 바쳐도 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남편이 안 믿으면 내게 준 생활비에서 만이라도 바쳐야 그 가정이 축복이 됩니다. 남편 몰래하면 거짓말하고 도적질이 아니냐 하는 이가 있으나 부부는 일신이기 때문에 몰래해도 도적 행위가 안 됩니다. 남편이 저주받을 짓을 해도 부인이 복받을 일을 하면 부인 때문에 저주를 안받는 것입니다. 저의 모친께서 아버님이 신앙 생활을 안하실 때 수 십년을 부친 몰래 십일조를 드렸으나 도적질했다고 화받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앙 생활 않던 아버님도 예수 믿고 주의 종이 되어서 목회까지 하셨고 아들 4형제가 다 목사가 되고 목회도 축복가운데 하게끔 축복을 받았습니다.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진정한 물질의 만족함을 오게 하며 하늘보고를 열게 하는 중요한 열쇠는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빚을 져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빚을 먼저 갚아야 사람의 빚을 속히 갚게 되는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교회재정에 이롭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도 아니며 헌금을 내게 하기 위한 인간의 고안이나 방법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십일조는 축복의 약속이 붙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3.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
마태복음 7:7에 보면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말씀했습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기도입니다. 무슨 문제든지 간절히 기도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 일찍이 역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역사를 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모두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의 역사입니다.
다니엘이나 다윗왕은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되 목숨 걸고 기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를 안하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안하는 한 민족보다 강한 것입니다. "무기" 위에 있는 나라는 망해도 "무릎" 위에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전쟁중에 아무리 시급한 상황일지라도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천막 밖에 흰 수건을 걸어 놓았는데 그 때는 아무도 못들어 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기도는 이 세상 모든 병폐의 만병통치약입니다. 기도없이 깊은 신앙에 들어간 사람도 없고 기도없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 역사도 없습니다. 기도는 진정한 부흥의 열쇠요 진정한 문제해결의 열쇠요 진정한 축복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이 설교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기도하는 법은 누차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신학(Theology)은 많이 배우나 무릎학(Kneelogy)을 배우지 않습니다. 성경에 쉬지 말고 찬송하라거나 쉬지 말고 설교하라는 말은 없어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차와 같고 우리들의 기도는 철로와 같아서 아무리 기차가 가고 싶어도 철로를 놓아 주지 않으면 못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로 철로 길을 많이 놓아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가 크면 큰만큼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해결 안될 것은 없습니다.
에스겔서 36:37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말씀했습니다. 이사야서 62:6-7에 보면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3:2-3에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6:19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가 기도로써 먼저 풀어야 하니님이 풀어주시고 기도로써 먼저 매야 하나님도 매준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먼저입니다. 기도는 만능의 열쇠입니다.
아침에 기도로 하루의 문을 열고 만에는 기도로 하루의 문을 닫는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 고백이며 축복의 열쇠는 하늘보고를 여는 열쇠로서 온전한 십일조이며 만능의 열쇠는 기도입니다.
이 3가지 열쇠를 여러분의 개인에도, 가정에도, 교회에도, 민족에도 꼭 사용하시고 활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교회란……1
마 16:15-20 / 박경수 목사
목적: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다. 그 교회는 거룩하다. 성도가 거룩함으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은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배실, 교실, 주차장, 교제실 등등, 공간(space)이 늘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이 항상 비어 있어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학생, 청년의 목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쓰기 때문에 은행 잔고가 거의 없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신자가 매주 등록하기 때문에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giver)로 가득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sight) 위에 운행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전도하며 봉사하기 위해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편안하고 한가롭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evangelize),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가 석회화(fossilize)한다.” 적절한 구분법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라 할 때, 사람들은 종탑과 더불어 고딕식으로 잘 지어진 ‘건물’을 연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당’이지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배당을 세우기 위해 단 한 장의 벽돌도 쌓으신 적이 없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예배당’을 ‘집’으로 비유한다면 교회는 ‘가정’이다. 집과 가정은 같은 말이 아니다.
교회란 ‘사람들의 모임’이다. ecclesia 자체가 ‘부르심을 입은 자’란 의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교회를 정의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고전 1:1~3).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그리고 “각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다.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인간의 죄를 대속하러 이 땅에 오시는 구원자, 그러나 동시에 임마누엘 하나님 되시는 메시아,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 주실 그리스도를 학수고대해 왔다.
베드로의 고백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 16:16).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선포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아니다. 교황도 추기경도 신부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과도 같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그 주님께 경배 드리며, 그 분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 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뜻을 이 땅 위에 삶으로 심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더더욱 제도는 아니다. 교회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건물이나 제도가 썩었다는 말이 아니라 곧 교회인 우리 자신이 부패했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자신들이다.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말은 곧 우리 자신을 다시 세운다는 말이다. 당연히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완벽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교회란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여야만 하는데,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당연히 완전한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완전한 교회가 아닌 ‘제대로 된 교회’라고 하면 그 표현은 옳다.
형제교회에 미래가 있는가? 그것은 형제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말이다. 형제교회에 미래가 없는가? 불평과 불만투성이인가? 그 말은 우리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한없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존재들이라는 말이다.
형제교회에 사랑이 있는가? 형제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랑이 있다는 말이다. 형제교회에 사랑이 없는가? 형제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를 향한 비난은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이다.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381년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되었다. 교회는 하나라는 말이다. 흩어져 있지만,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이름은 많지만 모두가 다 하나의 교회라는 말이다.
교회가 하나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교회가 믿는 주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엡 4:3~6).
교회가 하나이어야 한다고 성토하는 사람을 만났다. 감리교 장로교 꼬리를 다 떼고 하나의 교단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것은 틀린 논리이다. 박씨 김씨 이씨 각 성은 다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각 교파는 결국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의 교회라고 하면서 이렇게 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A4 용지 하나씩을 나누어주고, 박목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써보기로 하자. 내용이 어떻게 나올까? 커닝을 하지 않은 이상 똑같은 글이 나올 확률은 0이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데 어떻게 박목사에 대한 생각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분명히 다른 내용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거짓이 되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박목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뜻이지, 거짓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나름대로 모두가 사실이다. 성도들이 각각 써놓은 상이한 내용의 글들을 모두 읽어봄으로써 박목사에 대해 더 구체적이고도 입체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 글들 중 하나만 골라서 읽는다면 박목사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단편적인 일부분만 알게 될 것이다. 박목사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이다.
복음서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는 하나가 아니라 네 권이나 된다. 내용도 서로 상이하다. 그렇다면 복음서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령님께서 마태라는 세관원의 인격, 마가라는 청년의 인격,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의사 누가의 인격, 요한이라는 노인의 인격을 감동하게 하시어 그들이 그들의 인격 속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쓰게 하셨다. 그것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다.
네 권의 복음서가 다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네 권의 복음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 유한성 때문이다. 네 권의 복음서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교회가 여러 교파들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의 교파만 갖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일방적인, 한쪽 측면에서만 바라본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장로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와 감리교회에서 또는 순복음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각각 다른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에서 받는 느낌은 또 전혀 다르다. 어느 것이 거짓되지 않다. 모든 교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측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교회의 분파가 긍정적이라고 이야기하려면 조건이 있다. 다른 교파에 대해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자기 교파의 교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타교파를 수용하고 배우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고, 또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 가능하므로 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교파든 자기 교리를 절대시하지 말아야 한다. 교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고백일 뿐이다.
불행히도 분파된 교회의 현실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 대개 교파 사이에는 높은 벽이 존재한다. 교리는 배타적이다.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전기 후기로 나뉘어 모집했었다. 신학대학을 정말로 가고 싶은 사람만 먼저 전기대학에 지원할 터인데, 당시 전기대학은 유일하게 감리교신학대학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6년 동안 배운 신학은 타신학보다 얼마나 감리교 신학이 우수한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칠 수밖에.
명분이 무엇이든 인간의 욕심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 교회는, 그리고 형제인 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형제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를 때 ‘성도(聖徒)’라고 부른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거룩하다고 서로가 서로를 불러주는데, 너무나 태연스럽기만 하다. 물어보고 지나가자. 당신은 ‘성도’라고 불릴 때, 그 기분이 어떠한가? 아무렇지도 않은가? 당신을 향해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데에 있어서 전혀 거부감이 들지를 않는가?
아마도 자기를 거룩하다고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자기를 돌아볼 때 누가 감히 거룩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성도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것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신다. 단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라고 불리는 Stephen W. Hawking 박사. 그는 온 몸을 쓰지 못한다. 사지를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그는 22살에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으로 전신이 마비됐다. 이때 이미 1~2년밖에 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인슈타인조차도 해결 못했던 이론들을 해결하는 천재로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다. 왜 존경을 하는가? 그의 천재성 때문이다. 그의 천재성이 귀하게 대접 받으니 불구인 그의 사지도 같이 귀하게 대접 받는다.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어색한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 솔직한 우리네 모습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거룩한 교회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 1:22~23).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다고 불러주셨다. 그 말은 지금부터 우리는 거룩한 자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다르게 살아야 한다. 거룩한 모습으로. 거룩한 생각으로. 거룩한 손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나를 거룩하다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에 가장 어울리는 인생이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승인하기까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의 박해에 의해 목숨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는 교리 싸움으로 교인이 교인을 죽이기 시작했다. 영어로 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불태워 죽였고, 정신병자는 마녀라는 이름을 죽였다.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나하고 원수이기 때문에 종교재판을 열어 마녀라는 누명의 씌워 죽였다. 아프리카에서 땅을 강탈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남자의 체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인도네시아와 월남의 어린아이들에게 담배를 가르치기도 했다. 야만인이라며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또 얼마나 학살했는가. 학살하던, 강제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탐하던 사람들의 한쪽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의 중심에는 늘 그리스도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거룩한 자들의 모습일까?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거룩해질 수 있기를. 우리 교회가 거룩해지기를. 이것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 21:13).
우리에게 두 가지 사명이 있다. 첫째, 하나가 되는 것이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끝에 있던 사람들은 늘 불평을 해댔다.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다. 섞여 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나가 되는 형제교회가 되어야 한다. 끝줄에 서 있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아닌, 서로의 아픔을 서로가 위로해줄 수 있고, 용기와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형제인이 되어야만 한다. 사랑하는 식구는 비난하지 않는다. 보이는 단점은 내가 채워주어야 할 부분들일 뿐이다. 사랑할 부분들일 뿐이다.
둘째, 거룩해져야만 한다.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꿈쟁이 요셉은 감옥에까지 갔다.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다니엘은 사자굴까지 갔다. 그러나 그 다음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셨다. 두 사람 모두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는 축복을 이루어냈다. 거룩하게 살려면 손해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시간들이 내 인생의 지름길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작품일 수 있기에 감사함으로 기꺼이 손해를 보려고 한다.
내 고백 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내 어깨 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내 이름 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나는, 우리는 그렇게 존귀한 자이다. 거룩한 발걸음을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그 관점처럼 거룩해지기 위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5-20 / 이종철 목사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자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그리하시고는 베드로 위에,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페트라’ 곧 반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는 그 존립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반석 1. 신앙고백
주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고 계신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 도시는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요단 강이 발원하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은 또한 가이사랴 라는 지명이 상징하듯 로마 황제, 곧 가이사에게 헌정된 곳입니다. 황제 신상도 있고, 온갖 우상이 가득한 곳입니다. 바알 등 우상을 섬기는 사원이 14개나 있던 곳이고, 그 주변에 큰 동굴이 있는데, 동굴 신 ‘판’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상이 있던 곳은 항상 윤리적 타락과 사치가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오늘날의 세속도시의 한 복판과 같다 할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은 주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가이사랴를 지배하고 있던 황제의 논리는 오늘날의 도시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경쟁. 바알 우상이 이제는 물질우상으로 바뀌어 끊임없는 물질 추구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마치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도덕적 타락과 무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고백을 하고 살아가도 있습니까?
성도를 성도답게 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교회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이 신앙고백입니다. 사람 수가 아닙니다. 화려한 건물이 아닙니다. 멋있는 이념이나 비전이 아닙니다. 오래된 전통이 아닙니다. 가장 단순한 것,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분명한 교회는 아무리 수가 적더라도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1)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탐욕과 경쟁의 사회를 이길 수 있는 힘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분명치 않다면 우리는 세속의 가치관에 다 전멸되고 말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고백입니다.
자기 의지나 힘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병들고 쓰러지고 나면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념이 자기를 구원해 줄 줄 압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애국적 민족주의든. 이념도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이념에 목매인 사람은 시대가 바뀌면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평소 신념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기도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념은 시대를 조명하는 틀일뿐입니다. 오직 영원하신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구원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최근의 황우석 교수 사태나 여전히 황우석 교수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재물이나 명예나 일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았습니다. 왜 호출했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마음이 불안해서 세 명의 친구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동안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가자고 하니까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은 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친구는 궁궐 앞까지만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했지만 별로 소중하게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요청을 받자 임금님 앞까지라도 같이 가서 자기가 변호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고,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이고,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재산보다는 사람이 더 낫고, 사람보다는 선행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행도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선행이 얼마나 우리를 보호해주겠습니까? 우리를 영원히 변호해줄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신앙고백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 라는 가치관입니다. 재산보다는 사람이 낫고 사람보다는 주님이 낫습니다. 재산보다는 일이나 건강이 낫고 그것들보다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더 낫습니다.
2)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사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몇몇 이단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을 합니다. 저는 오늘 베드로의 고백에서 ‘살아계신’ 이라는 수식어에 더 주목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로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죽은 하나님도 있느냐? 예, 있습니다. 이슬람권의 신 ‘알라’가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신은 이신론의 신입니다. 이신론이란 것은 마치 시계를 만들어 태엽을 감아놓고 던져 놓으면 저절로 시계가 가는 것 같과 같습니다. 신이 우주를 만들고 법칙을 만든 후에는 뒷짐을 지고 우주에 간섭하지 않는 신입니다.
신이 존재하지만 우리 인생과 상관이 없다면,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신이라면 그런 신은 죽은 신과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도 그렇게 믿지 마십시오. 죽은 예수 믿지 마세요. 자신이 죽은 예수를 믿는지, 산 예수를 믿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면 그 사람은 죽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응답해 줄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역시 죽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2천년 전에 능력을 행하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능력을 행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예수 이념을 믿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삶과 모범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예수도 죽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의지나 생각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자기 기분에 들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방망이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침투하여 우리 인생을 깨뜨리고 뒤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불입니다. 우리 가슴에 갑자기 불을 질러서 우리로 도무지 가만있게 만들지 않습니다. 손에 쥔 것을 놓고 새로운 비전을 향해 떠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개척 교회가 좋은 점은 자신을 신앙생활의 최전선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살짝 숨어서 신앙생활 했는데 이제는 정면에 노출이 됩니다. 헌금, 교회출석, 봉사 모든 게 그렇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이때 자기 신앙을 점검하십시오. 무엇보다 자기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인생의 승부를 신앙에 거십시오. 세속 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오직 구원자는 예수 한 분 뿐이며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는 분명한 고백을 하며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문제는 신앙이 바로 서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문제는 엉거주춤한 것입니다. 교회와 세속 양쪽에 발을 디디고 있으니 힘든 것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의 무리들과 싸우며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
반석 2. 사람 : “너는 베드로라”
교회는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근거하지만 우리가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입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이는 ‘어떤 회의에 회집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카할’이라고 불렀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 광야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건물 위에 교회를 세우니까 마치 건물이 교회고, 강단을 지성소처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사람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연약합니다. 오늘 주님은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연약한 인생일 뿐임을 일깨워 줍니다. ‘바요나 시몬’, 곧 베드로는 요나의 아들이며, 연약한 시몬 곧 시므온 지파 출신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16절에 말씀하신 대로 ‘혈과 육’으로 만들어져서 병에 걸리기 쉽고, 조그만 위협에도 비겁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21절 이하에 보면 곧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붙들고 간합니다. 여기 간했다는 단어는 부드러운 번역이지 원래 뜻은 ‘에피티마오’로 꾸짖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2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책망하십니다.
한 순간에 교회의 반석이었던 사람이 사단의 똘마니가 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변하고 또 내 자신도 잘 못 믿겠습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완벽한 인간들만 사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어느 때는 성령충만해서 천사 같던 사람이 또 다른 순간에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처럼 안색을 붉히고 싸웁니다. 그래서 기적이 달리 기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이 구원 받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이런 부족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족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도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부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판단하지 않는 눈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는데 우리가 누구관대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습니까? 우리 자신 스스로도 정죄하거나 비하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괜찮다고 하시는데 어째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눈은 콩깍지가 씌인 눈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그렇지요.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것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소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기 과거보다 미래나 가능성 자기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인정해주길 원합니다. 소망의 눈은 그 가능성을 보는 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 곧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사람이 됩니다. 바뀝니다. 이런 가능성의 시선으로 사람을 볼 때 지금은 부족하지만 미래에는 달라 질 것입니다.
반석 3. 교회의 주인 : “내 교회”
주님은 18절에 분명히 ‘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소유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근본 원인은 소유권의 혼란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인데 그 자리를 인간이 차지합니다. 세습이나 전횡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교회가 주님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의’ 교회라는 이름도 나올 정도이겠습니까?
주인이 인간이 되니 교회를 예수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세상의 방식대로 운영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작은 소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마치 세상처럼 작은 소자를 하찮게 여깁니다. 오히려 권세 있고 힘 있는 사람을 위주로 교회가 운영이 됩니다. 섬기라고 했는데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땅 끝까지 나아가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 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소유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는 다윗의 이런 고백을 좋아합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며...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1-14)
예컨대 농사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농사해서 열매를 거두면 이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번 따져봅시다. 땅을 만든 분은 누구며, 씨앗을 만든 분은 누구입니까? 때를 따라 주어지는 햇볕과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인간의 뛰어난 머리와 손의 기술은 거저 주어진 것입니까?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인간이 하는 노력은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은사나 능력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뛰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술성이 뛰어납니다. 조금만 노력해도 성적이 쑥 오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실 자도 여호와십니다. 문제는 소유권 의식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권, 로드십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로드십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반석 4. 교회의 권세
예수님은 이런 교회에 다음 두 가지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첫째는 18절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적 권세입니다. 둘째는 19절의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메고 푸는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1)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입니다. 인간을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은 그 힘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그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사자 밥이 되고, 저녁을 밝히는 불 기름으로 사라져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천당이라는 말이 요즘은 어떤 광신도의 구호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대단한 선언입니다. 죽음이라는 음부의 권세가 힘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죽는다 할지라도 잠간 잠을 잔 듯 눈을 뜨고 나면 하나님 품속에 있을 것을 믿습니다. 아직도 이 믿음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자기 신앙을 한 번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라는 것은 또한 사단의 권세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나 사단이 이제 여러분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십자가가 박혀 있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가슴속에 십자가가 보입니까? 잘 보이지 않으면 미아리에 있는 점쟁이한테 가보세요. 점쟁이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남편의 장래에 대해 불안해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갈 수 없고 믿지 않는 친구와 함께 미아리에 있는 용하다는 점쟁이한테 갔습니다.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속이고 점을 보는데, 이 점쟁이가 점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점괘가 잘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수나 잘 믿어” 합니다. 그 집사님 가슴속에 십자가가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는 잘 모르는데 악한 영들은 더 잘 알아봅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쟁이가 된다면, 곧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이 분명하다면 모든 환난이 우리를 피해 갈 것입니다. 환난이 닥쳐도 변하여 감사가 되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예수쟁이는 세상이 감당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우리의 가슴속에는 십자가가 박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마치 골리앗 같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할 뿐이지 어떻게 해할 수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2)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두 번째 축복은 천국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육중하게 닫힌 문도 열쇠만 있으면 쉽게 열립니다. 생각하면 천국은 모두가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 곳입니까? 지금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을 얻기 위해 고행하며, 고통하며 때로는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여러분에게 이 열쇠를 거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은 곧 복음 전파의 특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의미 없이 외롭게 살던 인생이 예수를 만나 인생의 의미를 찾습니다. 삶이 행복해지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죽음의 권세를 이깁니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 10:15)
천국 열쇠를 주겠다는 말은 또한 여러분에게 축복과 저주하는 말의 권세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축복하든 저주하든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매거나 풀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권세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정치인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말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습니까? 별것도 아닌 한 마디 말 가지고 대서특필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 한마디는 평범한 사람의 말 한 마디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한 마디 하면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아마 그러면 “산은 산이지 산이 물이냐?”하며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하면 사람들이 “아, 심오하도다”하며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골몰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이 그렇게 위대하고 힘 있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누군가 축복 기도를 하고, 축복의 말을 하면 하늘에서 듣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저주하면 그대로 하늘에서 듣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건들면 “까불지마 잘못하면 다쳐” 하고 말하세요.
요즘 세상 사람들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만큼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여기서 좀 더 나가야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한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세상을 복되게 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신앙고백 위에 바로 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우리 인생에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
마 16:15-19 / 문기태목사
목회를 하면서 품은 소원은 제가 복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불행하던 사람이 저를 만나고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고통스럽게 살던 사람이 저를 만나고 일이 잘 풀려 부요 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사람이 저를 만나 기도를 받고서 치유의 은혜가 임하여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이 깨어질 위기의 사람이 저를 만나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나서 다시 화해하고 화목한 가정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중보기도와 축복 기도를 받은 모든 이들이 기도한대로, 축복한대로 복을 받게 되어 좋아지고 열매를 많이 맺으며 살면 참 좋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주위를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복을 받아 행복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께 놀라운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점점 더 잘 되고 있습니다. 제가 복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복이 있는 사람이 되셔서 여러분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이 흘러가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본래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이처럼 복이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성경을 보다가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또 있습니까? 그런데 왜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시몬은 어떤 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또 어떻게 복을 받았기에 네가 복이 있다라고 하셨을까요?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기뻐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대단한 권력이 있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세상의 부귀영광을 다 누리는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인물이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누구에게도 "야, 네가 복이 있구나!" 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된 믿음을 고백하면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십니까? 나의 주님이시오. 모든 죄에서 구해주시는 구원주이시며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마귀가 의심으로 공격해도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리를 깨닫게 눈을 열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으니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구한 것보다 더 넘치게 부어주시니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온갖 좋은 복을 풍성하게 받아 흘러 넘쳐서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니 복이 있는 사람인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큰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한 번 더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정말 시몬 베드로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시골에서 물고기나 잡다가 사라질 어부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큰 영향을 끼치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2000년이 흐르도록 잊혀지지 않고 만인에게 사랑 받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복을 받아 존귀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큰 능력이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1.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축복
예수님은 시몬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은 음부의 권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옥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과 마귀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간교하게 죄로 물든 더러운 마음을 이용하여 온갖 욕심과 다툼 그리고 미움을 부추겨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관계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해치고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불행에 눌려 있습니다. 이 모든 불행의 이면에는 음부의 권세의 교묘한 조종과 강력한 역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힘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를 두려워하고 굴복합니다. 사단의 권세에 눌려 죄를 지으며 고통을 당하고 저주아래 놓여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강력한 군대를 움직이는 힘이 있어도 마귀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고 주먹이 세도 마귀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에게 눌려 살면 아무리 좋은 침대에 누워도 단잠을 잘 수 없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려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불안하게 하고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면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잘 믿으면 마귀 사단, 귀신의 권세를 이깁니다. 아주 쉽게 이깁니다. 어린아이라도 믿음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하면 음부의 권세는 맥을 못 추고 쫓겨갑니다. 믿음으로 가득한 마음에는 음부의 권세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의 저자 박효진 장로님은 오랜 간수생활을 통해 간증하기를 살인범 중에는 미움과 원망에 사로잡혀 살다가 어느 날 어두운 무언가에 씌워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을 알게 되는 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부의 권세는 무서운 역사를 일으키며 사람들로 추악한 모습으로 떨어지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음부의 권세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복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셔서 음부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구해내도록 하십니다. 음부의 권세와 싸워 이기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대적하기만 하면 사단은 항복하고 쫓겨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연합하면 아무리 강한 마귀의 공격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귀신이 쫓겨가고 귀신들린 사람도 온전해 집니다. 불행한 사람도 행복해집니다. 음부의 권세의 영향으로 병든 사람도 건강해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도 담대해집니다. 무언가에 눌리고 포로 된 삶도 자유롭게 되고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승리의 간증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행복한 승리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축복
사단은 초대교회를 깨뜨리려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핍박을 일으켰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를 세상권력을 충동질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옥 문을 단단히 잠그고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그래도 부족하여 쇠사슬로 단단히 묶고 군인들이 양팔로 끼고 지켰습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면 대 사도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교회는 한 곳에 모여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밤을 세워 마음을 합하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습니다. 쇠사슬이 손목에서 풀렸습니다. 감옥 문도 열렸습니다. 천사에 이끌려 나오니 저절로 첫째 문, 둘째 문, 셋째 철문이 자동으로 활짝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열쇠란 권위를 상징합니다. 신임 받는 청지기는 그 주인의 소유가 있는 창고의 열쇠를 맡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왜 문을 열어야 합니까? 천국 창고에서 보화를 꺼내 와야 하니까 천국 창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땅에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땅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천국의 열쇠를 우리에게 맡겨 놓으심으로 우리가 천국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문제와 필요를 보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마음껏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천국 열쇠가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천국 열쇠가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꼭 닫긴 감옥의 문도 열립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3년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던 하늘에서도 비가 내립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불치의 질병이 치유되고, 간악한 귀신도 떠나갑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천국 열쇠가 맡겨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천국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기도하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케 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함께 기도하여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불치의 병에서 치유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 받던 사람이 온전해졌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더 열심히 기도하여 매인 자를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많은 사람으로 천국을 경험하게 도와 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천국 열쇠를 사용하여 하늘 문을 열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복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복이 흘러가고 있습니까? 날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삽니까? 천국 열쇠를 사용하여 하늘의 보물을 가져다 나누어 주고 있습니까? 오늘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복이 있는 사람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복을 흘려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죄에서 나를 구원해주실 뿐 아니라 내가 처한 모든 큰 위험에서 나를 구해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날마다 고백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내 삶 속에 오셔서 큰 능력을 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알고 성탄절을
마 16:16 / 김홍도 목사
1775년 어느날 허름하게 입은 한 농부가 미국의 볼티모어에 있는 한 호텔에 투숙하려고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여관방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분이 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라는 것을 알고 호텔에서 다시 모시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부통령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미 방을 얻었습니다. 그 뜻은 고마우나 허름한 미국의 농부에게 줄 방이 없다면 미합중국의 부통령이 있을 방도 없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X-mas를 즐거워하고 축하하지만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Christ-mas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지수 X-mas를 지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니까 “어떤 이는 세례 요한, 어떤 이는 엘리야,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할 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천추에 빛나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정확한 이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즉 베드로가 똑똑해서 알아맞힌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도 구원받을 사람들만 성령의 조명을 받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신성(神性)을 가진 분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따라서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고 부활도 부인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없고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신성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① 그의 신성은 그의 생활에서 나타났습니다
ⓐ 그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보내시려고 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를 갖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기적으로 잉태되신 분입니다. 이와 같이 태어난 인간은 역사상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통적인 법칙을 깨고 탄생시키신 분입니다. 창세기 18장 14절에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신 말씀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동정녀 탄생을 안 믿으면 하나님도 안 믿고 구세주도 안 믿는 사람입니다.
ⓑ 그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 전대미문의 기적을 행하신 분입니다. 성경에 35번의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라도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니고데모의 말은 옳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분입니다.
ⓓ 그는 속죄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희생의 죽음을 죽은 분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과 같이 속죄 제물로 죽은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세상에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대속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신성을 보여주는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 없습니다. 신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 그는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손을 들어 축복하실 때 구름에 둘러싸여 그가 오셨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신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무덤에 머물지 않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② 그의 신성은 그의 주장하신 말씀에
나타났습니다
ⓐ 그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고 하셨고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셨고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신 대로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어느 날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하실 수가 있는가”라고 수군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들아, 네가 죄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일어나 걸으라” 하시면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 인간의 생활 속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한 인간으로서는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존경과 영광과 찬양을 받아 마땅하신 분입니다.
ⓓ 심판주가 되실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일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 보존, 심판, 이 세 가지는 하나님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① 하나님께 쓰여진 이름이 예수님께도
똑같이 쓰여졌습니다
ⓐ 이사야 44장 6절에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예수님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 시편 24편에 “영광의 왕이 뉘시뇨?”라고 질문하고 “만군의 여호와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고 화답하셨는데 고린도전서 2장 8절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서 9장 5절에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하셨고
ⓓ 의심하던 도마도 나중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의 다섯 가지 속성을 예수님도
다 갖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무소불능(omnipotent)하신데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질병과 죽음을 정복하시고 바람과 파도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무소부지(omniscient)하신데 같은 속성을 예수님도 가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과거와 비밀을 다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므로 다 알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무소부재(omnipresent)하신 분인데 예수님도 동시에 다 계신 분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신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나 동시에 계신 분입니다.
ⓓ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데(eternal) 예수님도 영원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1장 1절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참 하나님이 되시며 참 인간이 된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동시에 마리아가 참어머니가 되신 분입니다. 모세는 “스스로 있는 자(I am)”가 보내셨다고 했는데 예수님도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I am)”고 했습니다.
ⓔ 하나님은 불변(immutable)하신 분인데 예수님도 결코 변치 않으신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라고 예수님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③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가지를 예수님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몸이 변형되시고, 심판을 선고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④ 하나님만이 받으실 예배와 믿음과 충성을 그리스도께서도 받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버지께 경배함과 동시에 어린양께도 경배하는 광경을 봅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에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똑같으신 분입니다.
3. 예수님은 인격을 가지신 참사람도 되십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지만 그는 참사람으로서 사랑하는 친구처럼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는 분입니다.
① 그는 육신의 부모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누가복음 2장 5~7절에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맏아들을 낳아”라고 한 말씀대로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지만 참으로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입니다. 신적 아버지를 갖고 계심같이 육신의 어머니도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도와주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육신의 부모를 주신 것입니다.
② 그는 육적 성품을 갖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그가 시장하셨다고 했고, 목마르시고, 우시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기뻐하시고, 고통도 느끼시고, 죽으시고, 장사지내지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고통과 유혹을 아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몸을 가지셨고 인간의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당할 때 위로하실 수가 있고 시험받을 때 피할 길을 열어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이 되시고 동반자가 되시고 친구가 되셔서 인생의 모든 염려와 문제를 맡아서 도와주시는 분임을 잊지 마시기바랍니다.
4. 예수님은 인간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할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니라”고 친히 말씀하셨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천사가 일러주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감사합시다. 우리는 다 범죄했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이었는데 놀라운 그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진심으로 여러분의 구세주로 모셨느냐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날마다 역사하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5. 그는 매일의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① 우리에게 삶의 능력을 주시는 분
아무도 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체험하고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② 우리 영혼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
전에 제 동생들이 제게 요구 조건이 있을 때는 직접 말하면 안 들어 주겠으니까 제 아주머니한테 잘 부탁해서, 제 아내가 기회를 틈타 제게 말해서 들어주게 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다 범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가 어렵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까이 계셔서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 위해 간구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위해 도고하고 계십니다.
6. 예수님은 장차 오실 왕이 되십니다
그가 하늘로 올리워 가실 때 흰옷 입은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예수는 하늘로 올리우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전 신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데리러 오십니다. 공중에 임하셨다가 그후에 영광 중에 지상에 오셔서 성도들과 천 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그후에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겠습니까. 기쁨으로 그를 맞이하겠습니까?
7.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예수님은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시고 예수님 믿지 않고 제멋대로 산 사람들을 불러 낱낱이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 듣는 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신다면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영접하십시오. 만일 거절하면 심판날에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 에 인자가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놀라운 인격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매일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이며 장차 오실 왕이시며 심판주가 되실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늘 당신의 구세주가 되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스코틀랜드에 한 나이 많은 성도가 죽음에 임박하여 눈을 감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여보, 나 아시겠어요? 당신의 아내예요” 하니까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딸이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아빠, 저 아시겠어요? 사랑하는 딸이예요”라고 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목사님이 귀에 대고 “샌디(Sandy),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눈을 번쩍 뜨고 웃음을 띄고 말하기를 “알구말구요. 그 분은 사랑하는 구주이신걸요”
성도 여러분도, 그날에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복음 16:16~20 / 이필재목사
갈보리교회가 오늘 28주년 기념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컸다는 말이 제일 좋은 표현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두 가지를 제도화해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하나가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를 인도해나갈 사도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되도록 해주셔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고 열두 사도를 세우시고 “너희들이 또 사도를 세워서 이 땅에 교회가 영원하게 하라.”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교회 공동체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영적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렇게 선언해 주셨습니다. 아마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러한 교회 제도보다도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 방법을 가르쳐주셨을 터인데 이것이 가장 훌륭한 제도이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는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 완전히 구체화되고 제도화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나타난 교회 모습을 보면 노아 방주 때부터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적 성격의 노아가 하나님 심판 앞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방주라는 구원의 장소를 마련해 놓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이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40년 동안이나 전도를 해서 구원자를 불러 모으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하면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것이 바로 교회 성격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은 갈보리교회라는 이름의 단을 쌓고 여기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어떤 때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가정 제단을 쌓는 말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출애굽을 해서 대 민족 이동을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고 하나님의 임재성을 고백하면서 예배를 드렸던 것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때 비로소 영적 지도자라는 제사장이 생겨서 민중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제도화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고, 그것이 점점 발전하다가 후에 솔로몬 성전이라고 하는 민족 단위의 교회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으로 일 년에 한 번씩 다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대속죄일의 행사를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의 기쁨을 나누고 속죄를 받고 그런 영적인 행사를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원래 이 교회라고 하는 말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명칭이 ‘부름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 무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 자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건물보다도 우리 자체가 교회인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두 가지 형으로 구분합니다. 이 지상에 우리가 몸담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유형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가 또 있습니다. 그것을 ‘무형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교회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불완전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열심히, 왕이 사람들을 동원해서 건축한 솔로몬 성전도 불타서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웅장하던 헤롯 성전도 다 무너지고,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통곡의 벽이라고 있는데, 그 벽도 하나만 남고 무너져서 통곡의 벽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교회인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완전한 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무형교회로서 하늘나라에 있고 지금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 눈으로 확인되지 아니하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무형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우리 신학에서는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역사에 이 불완전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 교회는 기독교가 절대 인정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류 역사에 교회가 교회 이름으로, 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겠습니까? 교회가 너무나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잘못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영적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가끔 교회를 심판하시는가? 잘못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러나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무릎을 꿇고 사죄 성명 발표하는 모습을 온 세상의 언론이 몇 년 전에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 교회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살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저는 현지에 다녀왔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아메리칸 원주민들, 특별히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산속에서 사는 원주민들을 무수하게 죽여 버리고 그 땅을 차지하는 죄를 저질렀고 여러분들 귀에 익은 마녀사냥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죄도 없는 여인들을 괜히 마녀라고 규정해서 죽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죽였습니다. 그렇게 마녀사냥을 했으며 십자군 원정에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는 젊은이들을 전쟁터의 희생물로 삼았으며 개신교 탄압을 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무수하게 죽였습니다. 유럽에 가면 성전 안에서 몇 만 명을 죽인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 다 역사가 쓰여 있습니다. 개신교에 교회가 그렇게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완전의 요소입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흘러온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이 행해졌다는 사실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큰 수치심을 갖고 인정한다.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 신앙의 남용이며 기독교의 진정한 성격의 명백히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사과를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불완전하게 이 교회를 운영해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항상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잘못 가고 있지 않나?’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교회답게 운영해나갈 책임이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어떤 교회 총회에서 목사들이 수련회 강사로 저를 오라고 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다 끝나고 질의응답 하는 시간인데 어떤 목사가 저한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WCC에 대한 이필재 목사의 입장이 무엇입니까?” “네!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인데 옛날부터 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협조해서 훌륭하게 그런 세계교회협의회를 잘 운영해나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답변을 했더니 그 총회 목사들 가운데 몇 사람이 “WCC는 마귀 집단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치 작업하고 있는 목사들 이름을 다 불렀습니다. “누구누구 그 목사는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하고 있는 목사들인데 그 놈들은 다 마귀 새끼들이다.” 막 성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회 강사로 갔다가 마귀가 되어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신학이 잘못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귀라고 생각해서 교회가 다 죽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숫자가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런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겸손하게 항상 주님의 뜻을 찾아야 되는 것이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입니다.
이 교회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소유권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지상의 모든 교회와 또, 무형교회까지 교회는 소유자가 주님이십니다. 누가 창립을 했든 누가 돈을 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 교회라고 주님이 처음부터 선언하셨으니까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주님께 드리는 작업을 항상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 본질이 뭐냐? 에베소서 1장 2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주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골로새서 1장 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 지체라고 고린도전서 12장에 말했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우리는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만들어 가는데 역할을 할 수 있는 청지기라는 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고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몸인 이 교회를 훌륭하게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어떤 때는 순교자적인 믿음을 가지고 희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 사명이라고 하는데 이 사명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뭐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예수님이 지금 세상에 계시다면 당연히 어떤 고난을 당하실 일이 있는데 그것을 내가 대신 당하는 것이 사명이다.” 이렇게 말을 했고, “내가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이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괜찮습니다. “나를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이 땅에 주의 몸인 교회가 훌륭하게 보존되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이다.” 이것이 목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명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나?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명을 위해서 버림을 당하는 순간이 사명의 완수가 되는 진리!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문화와 인종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좀 갈등이 생깁니다.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부분을 기독교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문화와 인종을 가지고 그것을 훌륭하게 보전하는 것을 특수성이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잘 해나가야 교회가 훌륭합니다. 그래서 이 보편성의 진리가 특수성에게 전해질 때는 인종과 문화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초기부터 특성 하나를 살렸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 때문에, 담배 대문에 너무나 가정 파탄이 많고 너무 건강을 해치게 되어서 “기독교는 이 문화권에서는 금주, 금연을 해야 된다.” 총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다 지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집사가 담배 한 대 피웠다가는 가짜 교인이라고 낙인찍혀버리고 어쩌다가 목사가 맥주 한잔 마셨다가는 음주 목사라고 당장 비판합니다. 이게 문화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 가면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문화, 오히려 그런 것을 문제 삼는 것을 문제로 봅니다. 이게 특수성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또 인정해야 됩니다. 여러분! 유럽 여행할 때 보십시오. “우리는 목사들입니다.” “그럽니까? 그러면 목사님들이니까 특별한 와인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서로 눈치 보느라고 마시지는 못했지만 “목사님들이 오셨는데 우리 음식점에서 오래된 특수 와인을 선물할게요.” 그런 적도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그렇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인종과 문화의 특수성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도 주일날 우리가 예배드리는데 주일에 예배 안 드리고 월요일에 예배드리는 개신교가 많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일하고 일주일을 먹고 삽니다. 그러니까 월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의 특수성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19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공백 기간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고려 때 그렇게 번성하던 불교가 조선 시대에 와서 소멸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성계가 불교를 다 없앴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려가 불교였기 때문에 흔적을 다 없애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으로 쫓겨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래서 산 속에서만 불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윤리 도덕 수준인데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다 보니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게 유교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중국에 가서 대학교수들과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것은 당신네 나라가 종교로 만든 것이지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냥 윤리도덕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더구나 그 시대는 한반도가 정치적으로 암흑시대였지 않습니까? 러시아, 중국, 일본 주변 나라에 주권 상실의 역사를 우리가 살게 되고 희망이 없는 슬픈 민족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것을 뛰어넘어서 훌륭한 국가 건설을 하며 우리도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인가? 그게 개화사상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님도 서구 사회에 밀사를 보내서 “당신들이 힘을 가지고 와서 여기서 우리를 좀 구원해 주십시오.” 그래서 밀사 운동을 그렇게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선교사들이, 서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를 세우니까 우리가 다 반가워서 대한민국에서 교회운동 복음전파가 세계의 유래 없는 짧은 역사에 큰 부흥을 가져온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옛날에 갑신정변이라고 하는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 김옥균을 중심으로 했었는데 그때 민영익이 칼을 맞아서 죽을 뻔했는데 아무도 병을 못 고칠 때 알렌 의사가 와서 거뜬히 살려냈습니다. 지혈해 주고 압박 붕대를 감고 진통제를 먹여서 죽어가는 사람을 금방 살려내니까 명성왕후가 “조카 영익이를 누가 살려냈느냐?” “알렌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뭐하는 사람이냐?” “사실은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의사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알렌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한 교회를 갔다 왔습니다. 가서 담임 목사 만나고 감사드리고 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종의 관심을 얻어서 10만 냥의 후원금을 받아서 광혜원이라는 최초의 기독병원이 생겨서 그것이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고 과학적인 의료치료가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 기독교라는 게 뭔가?’ 그래서 우후죽순 몰려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화여자대학이라는 이름은 선교사가 세우고 명성왕후가 지어주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 기독교 교육기관이 아주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이 기독교가 사람 살리는 종교다.” 그래서 불과 200년의 역사에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부흥을 가져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우리나라 미신타파에 공헌했고 문맹퇴치에 노력했고 즉, 세상에 빛이 되는 기독교로서 지금까지 훌륭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를 믿어야 살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러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우리 한국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서 지금 대한민국에는 6만개의 교회가 이렇게 주일날 예배드리는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모습인 것입니다. 미국 언론 기관에서 조사했습니다. “세계에서 교인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들이 어디 있나?” 최고로 교인 많이 모이는 교회 50개를 골라냈는데 25개가 대한민국에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큰 역사가 왜 나왔느냐? 우리나라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계 역사에 없는 축복을 받고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통해서 사회가 발전하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신개념도 성경과 딱 들어맞았지 않습니까? 고산지대 신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다 산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인류가 시작했고, 호렙산이니 시내산이니 갈멜산이니 겟세마네 동산이니 다 하나님의 역사는 산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옛날에 그 산신령이라는 것이 있어서 신을 찾아서 산으로 가는 고산지대 신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성경과 우리가 문화가 맞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화의 특수성에 성경과 아주 잘 맞는 나라가 한국이다.”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받아야 삽니다. 복사상이 얼마나 강합니까? 봄이 되면 복이 들어오라고 “福”이라고 써서 대문에 붙이고 혼숫감에는 숟가락에서부터 이불까지 전부 “福”이라고 써서 붙여야 혼숫감인데 이런 복 개념이 아주 우리나라 문화에 가득 차 있잖아요? 이렇게 문화적인 코드가 성경과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복이 더 많지 않습니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복이고, 팔복이 있는가 하면 들어가도 복이요 나가도 복이요,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복 천지입니다. 이 복 개념의 문화 코드가 우리 한국과 성경이 딱 들어맞아 여러 가지 장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이렇게 큰 복을 받아서 영적으로 부흥하고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한 달이면 수천 개의 교회가 새로 생깁니다. 더러 없어지는 교회도 있기는 해도 그래도 한국 교회 목사들은 개척교회를 얼마나 잘합니까? 모였다 하면 개척교회를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과 교회를 훌륭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세속화, 관료주의, 권위주의, 이단사상, 분열주의 이런 것이 교회를 어지럽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창립주일에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네 가지 교회가 열심히 해야 되는 교회 본질적 성격이 있습니다. 그 원칙만 지켜나가면 됩니다. 다른 거 신경 쓸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 네 가지가 뭐냐? 첫째가 예배입니다. “너희는 모이기를 힘쓰라.” 이 교회에 모인 것은 열심히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우리가 함께 교회에서 예배드립니다. 이게 교회의 기능입니다. 교회 기능의 첫 번째가 예배입니다. 예배가 안 되면 그 다음에 아무것도 안됩니다. 예배가 잘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예배드리고 나서입니다. 예배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능 중의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교육입니다. “너희는 이 말씀을 가르치라.” 그래서 기독교는 교육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오늘로서 우리 건축위원회는 해산됩니다. 10년 동안 교육관 5개 건축하느라고 교인 여러분과 함께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해서 마련했지 않습니까? 이제 이 터전에서 교육은 아주 잘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배와 교육과 그 다음에 선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전파하라. 땅 끝까지!” 이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504명의 선교사를 10년 동안에 외국에 파송했고 170개 교회를 건축해 주었고, 100개의 우물을 파주었는데 이게 다 선교입니다. 지금도 선교사 두 사람이 오셔서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 관계된 선교사분들 한국에 오셔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수술하는 것도 우리가 헌금해서 해주었습니다. 그 다음이 봉사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봉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거기에 필요한 우리 계획을 만들어서 이 원칙으로 나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다른 데다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본질을 잊어버리는 교회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복음으로 가르쳐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충성한 교회! 오늘 말씀에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로 갈보리교회가 영원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냐 사탄이냐?
마 16:13-23 / 강용규 목사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과 사람들이 우리를 아는 것도 다를 것입니다. 본문은 그와 비슷한 맥락을 띠고 있는데,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시몬아 이제부터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음부의 권세가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21~23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과 그곳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막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며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같은 베드로입니다. 방금 전에 바요나 시몬이 베드로이고, 그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탄도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종종 이런 일들을 봅니다.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재정을 담당하던 가룟 유다가 후에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선교할 때 오른편에는 누가가, 왼편에는 데마가 섰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어려움이 닥쳐오자 데마는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도 베드로가 될 수 있고, 사탄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와 사탄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으로 불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가 끝나고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 450년 동안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들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의 종으로 높임을 받던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구약 예언서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이스라엘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운 시기에 40년 동안 예언활동을 한 예언자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대답은 그들이 최고라는 사람과 견주었지만, 예수님을 나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인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입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와같이 정확하게 볼 수 있었을까요? 열 두 제자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지만 이러한 대답을 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 안에 있는 특별한 것, 즉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최고의 장소는 성전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생각들을 내려놓고 이 시간만큼은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애씁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주님과 늘 교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평소에 늘 주님께 집중했기에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순종입니다. 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을 던졌고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사탄이 되느냐? 예수님이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간하여 말하였습니다. 간하다는 말은 야단쳤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육적인 나이를 두고 예수님을 야단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고 말씀합니다. 분명하게 교회가 세워질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쥔 베드로가 사탄으로 전락한 데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부인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을 내세운다면 사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뒤돌아봅시다. 우리는 늘 베드로처럼 살지 못합니다. 때로 사탄처럼 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이 두 가지가 공존함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소리를 들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후에 비로소 예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알았기에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한신의 성도님들! 여러분 믿음의 반석이 되시고, 천국 열쇠를 쥔 베드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 있는 믿음
마 16:13-20 / 이수영목사
전하는 이야기의 시점까지의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1단계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시며 귀신을 내쫓으시고 병든 이들을 고치실 뿐 아니라 몇 덩어리의 떡과 두어 마리의 생선으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두 번씩이나 행하시는 등 예수님의 갈릴리 복음사역은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 전역뿐 아니라 인근 지방과 예루살렘에까지 퍼져서 이제 예수님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시며 물 위를 걸으시는 놀라운 광경도 가까이에서 목격했습니다. 그 정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해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확인해보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모처럼 제자들하고만 조용한 시간을 갖게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 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가 메시아 곧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구원자,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가 우리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유일독특한 관계 속에 계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라는 말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함께 예수님에게 붙여질 때 의미하는 바는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구원자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서 튀어나온 이 놀라운 지식과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짤막한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예수님께서 엄청난 약속으로 응답하신 것으로 보아서도 베드로의 대답이 얼마나 훌륭했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그 의미를 잘 되새겨야 할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먼저 "바요나 시몬아"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요나" 하면 "요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시몬은 요나의 아들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바요나"는 "요한의 아들"이라는 말을 헬라어식으로 압축한 표기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1:42에 보면 안드레가 그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숫가에서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요21:15)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시몬아" 하지 않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하고 부르신 것은 그만큼 그 이름을 부르시며 하신 말씀에 진지성과 무게를 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부르신 다음에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잘 맞추었다", "너 참 잘 알아들었구나", "너 아주 똑똑하다" 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신 것은 범상치 않은 말씀이고 따라서 우리가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바로 알았다는 것은 퀴즈대회에 나가서 문제 하나 잘 풀었다고 칭찬 받고 그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가져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알지 못하면 불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 별로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질문에 잘 대답했을 때에 "네가 복이 있도다" 말하면 어색하게 들릴지 몰라도,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물음에 잘 대답했을 때에는 그야말로 "네가 복이 있도다" 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 물으심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대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신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 속에서 찾습니다. 먼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신 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지식을 갖게 된 사람이 그저 어쩌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그 생명의 진리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지식들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책을 많이 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을 많이 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에게만 주시는 믿음의 지식입니다. 다른 지식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믿음을 가진 이들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문자대로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런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처음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 던지고 있던 베드로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라 너는 이제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1:42) 말씀하심으로써 역시 베드로의 삶의 변화를 예고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존재와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바"는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로서 바위 또는 반석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자 그와의 만남의 초기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던 그 예고대로 그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너는 베드로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젠 됐다. 과연 베드로라 할 만 하다. 이제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주님의 교회의 초석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말씀은 인간 베드로 개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신 18절 말씀에 이어 19절에서 하신 말씀 즉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18:18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복수로 부름)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말씀은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믿음의 반석 위에 서는 것임을 가르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고백한 그 믿음 위에 서있는 교회의 견고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라고 번역된 부분은 다른 곳에서는 "음부의 문들"로 되어있습니다. 성문들은 튼튼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사탄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믿음 위에 선 교회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그러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절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네가 복이 있도다" 하는 말씀을 들을 또 하나의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열쇠를 받는다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천국 열쇠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설명은 뒤따르는 말씀이 해줍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입니다. 열쇠라는 것은 어떤 문을 통하여 사람을 들어가게도 하고 들어가지 못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쇠는 권위의 행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대교를 그 배경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당대의 율법사들은 그들의 율법해석으로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얼마나 규제했는지 모릅니다. 마23:13에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비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횡포에 짓눌려있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으로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주어진 진리만이 유일한 참 믿음과 구원의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판단과 구원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것을 오늘 본문이 요구하고 있다는 데에 유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은 결코 베드로 자신이나 베드로의 계승자로 자칭하는 로마천주교의 교황에게 사죄와 구원의 권리가 위임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제자들 외의 사람들에게는 비밀에 붙이려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야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사방에 다니며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알리면 백성들 가운데는 그를 왕으로 옹립하거나 그를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의 통치에 맞서 유혈투쟁을 벌이려 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달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메시야의 사역을 조용히 감당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아직은 알리지 않으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 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 믿음이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것을 믿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무슨 다른 복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믿음을 얻은 것, 그 믿음을 가지도록 은혜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가장 큰 복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란 그 믿음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 진리 위에 서있는 것이며 그 어떤 세상의 지식이나 인간적 요소들 위에 서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 안에서 자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 어떤 인간적 사고나 수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도 안 되고, 그 어떤 다른 법이나 힘으로 사람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물으심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이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 모두 주님의 이 물으심에 올바로 응답하는 복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마 16:13-20 / 조재호목사
지난 주일은 '하나님의 명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시대의 사울과 같은 한 교만한 지식인이 마음대로 내뱉는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대한 몰상식과 무례와 폄하를 보면서, 저는 이 시대와 사회상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사회의 목소리에 한편 겸허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미국에는 기네스북에 오른 세상에서 제일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근처에 있는 교회인데 목회자를 포함해서 교인이 4-5명이랍니다. 그래서 교회 장의자도 두 세줄 정도 있는 소형교회입니다. 교회가 인형같이 작아서 보러 오는 관광객이 오히려 교인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습니다. 두 교회가 교인 수는 천지차이 이지만 똑 같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이면 드리는 예배 시간의 길이가 통상 1시간입니다. 조금만 길어져도 신경이 쓰입니다. 1시간이 어디나 통하는 정답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모든 교우가 서서 2-3시간의 예배 예식을 집례한다고 합니다. 대단한 인내입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선포(설교)가 예배 시간의 2/5정도이지만, 아프리카 대부분의 교회는 2시간 예배의 반 이상이 몸을 흔들고 춤을 추며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예배 시간이 1시간인 교회도, 3시간인 교회도 다 같은 교회이고, 설교시간이 긴 교회도, 춤추며 찬양하는 시간이 긴 교회도 다 같은 교회입니다. 사람마다 입고 있는 옷이 다르듯이 교회도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는 이단 사이비만 빼 놓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먼저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시고, 그 후에 "그러면 너희는 나는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지금 다시 오시면, 이렇게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 교회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더러는 구제기관, 더러는 연애당, 더러는 봉사기관이라고들 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잘 알지 못하니깐 그렇게 불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곧 바로 이어서 물어 보셨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교회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다니는 교회는 과연 무엇인가요?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이 저는 날이 갈수록 교회의 가치와 소중함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소중함을 깨달으니 부족하지만 더욱 애착이 가고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설렘이 있습니다. 교회의 내일을 바라보면 더욱 큰 설렘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요?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1. 교회는 세상적인 사회 기관이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입니다.
사회적인 기관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아침에 동네 사람들끼리 운동장에 모여 축구하자고 해서 조기 축구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관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탄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하나님의 기관은 두 가지인데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출발이 하나님에서부터라는 점에서 그 뿌리가 같습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누가 주장하거나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정과 교회를 만드실 때 하늘에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위의 교회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이지만 있는 곳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거룩성이 있고, 사회로부터 오는 사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잴 수 없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6개 고을을 구별하여, 도피성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곳은 죄짓고 피해 도망해 와서 죄가 가려지기까지 안전하게 피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피해 있는 사람을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 도피성을 사고 팔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곳이고 하나님이 그 장소에 만드신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교회의 거룩함을 보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어느 옛날 세 왕자가 세상의 신기한 것을 찾아 왕궁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세상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첫째 왕자는 긴 통으로 된 망원경을 발견했습니다. 이 망원경은 세상 어디든지 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왕자는 마술 담요를 발견했습니다. 이 담요는 사람을 태우고 어디든지 날아 갈 수 있습니다. 셋째 왕자는 무슨 병이든 먹기만 하면 다 낳을 수 있는 사과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세 왕자가 한 자리에 다시 모여 각기 자기의 물건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망원경으로 먼 나라를 보니 아름다운 공주가 병이 들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둘째가 마술 담요를 펼치고, 그리고 막내를 태웠습니다. 마술 담요는 엔진 소리도 나지 않고 이착륙 활주로도 필요 없고 안전벨트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먼 나라 그 공주에게 날아가서, 막내의 사과를 한 입 비어 먹였더니 공주의 병이 낫고 건강해졌답니다. 세 왕자중 누가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을까요? 공주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망원경도 필요하고 날아다니는 담요 비행기도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사람을 살리는 사과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시든 영혼 병든 영혼이 건강하고 생기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죽은 영혼을 생생하게 살립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공동체입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산비탈에서 배를 만드는 것을 비아냥거리고 비난했습니다. 비난의 초점은 비도 오지 않는데 왜 미련한 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맑은 하늘 구름한점 없는 하늘에 비는 무슨 얼어죽을 비타령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비 올 기색이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비가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믿고 하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무엇이라고 해도 저는 하나님의 교회를 믿습니다. 교회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룰 수 있는 방주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소중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실 날 까지 존속해야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야 자신들의 우매함을 깨달았으나, 이미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보며 자신의 우매함을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방주로서의 교회를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만이 희망이요, 교회만이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원의 측면에서는 노아의 방주와 같지만,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빛과 소금의 존재인 것입니다. 주님이 간곡히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 5:13-16)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뿐만 아니라 부패되는 것을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 살맛 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밝혀 갈 길을 보여주고 바르고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비춰줍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금욕적인 수양을 쌓는 것이나 종교적인 행사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새로운 종교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성경에는 크게 두 가지 동사가 있다. 하나는 '오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가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있는 자들아 내게로 오라.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주님 십자가 밑에서 구원을 받고 말씀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은혜를 체험하며,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가라' '가정으로 일터로 가라'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보다 사회 속에서의 생활이 더욱 중요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교회 밖에서 맺는 것입니다.
성도는 대부분의 시간을 믿음이 없는 불신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서의 역할이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만 생활하려고 하고 안주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 약해지는 원인이 됩니다. 영적인 에너지가 삶의 현장에서 쓰여져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파숫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백성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