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고 지금의 규모를 갖추기까지 약 3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몇몇 상경한 대학생들과 김치장사꾼들이 전부였던 그 시절에 비해 현재는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나 월드옥타북경지회 등 규모를 갖춘 단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조선족 기업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 북경 조선족사회의 역사를 몸으로 익히고 노고의 세월을 이겨낸 산증인과도 같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세계한인무역협회 부이사장이며 북경해륜호텔의 회장인 이광석이다.
인터뷰 과정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갓 이 땅을 밟은 새내기 “북경인”이 보기에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 같았지만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보다 화합되고 하나가 된 오늘의 조선족 사회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배들의 녹록치 않은 수고가 있었을지를 짐작해 보았다.
조선족 사회와 세계 한인사회에서도 입김이 세기로 유명한 전설 속의 이미지와는 달리 기자가 만난 이광석 회장은 따뜻하고 한없이 편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는 차 한잔을 기울이며 까마득한 후배인 기자에게 커다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었다.
베이징 조선족 1세대의 꿈
길림성 길림시 출생인 이광석회장은 하얼빈에서 6년간 군복무를 마친 뒤 그 당시의 제대군인들 그랬듯 꿈과 희망을 안고 수도 북경으로 진출했다. 때는 1986년, 그는 재북경 조선족의 1세대인 셈이다. 가진 것 없고 인맥없는 1세대들이 처음 북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자그마한 식당을 운영하거나 김치장사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광석회장이 처음 시작한 일 역시 “밥장사”였다. 당시 북경의 조선족 인구는 차츰 불기 시작하던 때였고 북경에는 대학생들, 사업을 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업가들, 소상인들, 구직자들이 다양하게 집거하기 시작했지만 변변한 한식집이 없었다.
또한 “연길냉면” 등 조선족의 음식이 라오 베이징인들 사이에서도 인기 메뉴였지만 이 역시 제대로 하는 곳이 적었다. 당시 “시스냉면”이라고 하는 북경사람이 운영하는 냉면집이 있었는데 그 냉면은 말 그대로 찬물에 국수를 담근 “차가운 면”에 지나지 않았다. 고명도 소고기가 아닌 개고기를 얹은 희한한 냉면이었다. 그런데도 낮에 밤을 이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 먹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이런 기회를 잡아 조선족 음식을 팔기 시작했고 장사는 입소문을 타고 하루가 다르게 잘되었다고 한다.
배짱 하나로 사업을 지켜낸 요식업계의 큰손
사업을 이루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고 했던가? 장사가 잘된다고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북경은 전국각지에서 올라온 다양한 사람들로 복잡한 혼돈의 사회였다. 개혁개방의 봄물결을 따라 꿈과 희망을 안고 상경한 사람들도 많지만 동시에 팔도강산에서 몰려온 건달들도 판을 치고 있었다. 할일 없이 돌아다니는 그들이 밥 먹다가 또는 술을 마시다가 눈만 마주치면 싸움박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은 객기를 부린다고 하지만 고래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고 한번씩 싸움이 라도 나는 날이면 가게가 풍비박산이 나는 것은 기본이요, 어디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북경 현지 건달들의 텃세도 어마어마 했으며 툭하면 우르르 몰려와서 공짜로 먹고 갔으니 그 등쌀에 못이겨 잘되는 가게를 접고 다시 고향에 들어간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고 한다.
이광석 회장은 당시를 회억하며 말해주었다. “경찰에게 신고한다고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생기는데 경찰들이 가게를 24시간 지켜줄 수는 없잖아요. 그런 놈들이 닥치는 날에는 밥값은 고사하고 조용히 가주면 그저 고맙게 생각해야죠. 참 그때 사람들 고생이 많았어요. 지금 사람들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죠. 그분들을 잊어서는 않되요. 어려운 환경에서 오늘날 조선족사회의 초석을 다져준 사람들이예요”
그러나 군인 출신에, 피끓는 삼십대였던 이광석회장은 그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어떻게라도 어렵게 이루어낸 사업을 그의 손으로 지키고 싶었다. 악세력들의 손에서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치밀한 전략과 담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백척간두의 위기속에서 이를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호연지기를 익혔고 죽음의 고비도 몇번이나 넘기며 오늘의 사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다음에 인터뷰자리가 아닌 술자리에서 만나면 3일 해도 다 못한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그의 모습에서 느와르 영화 주인공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는 당시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살던 삼원리지역에 부산식당이라고 하는 한식당을 열었고 우리 민족의 가락을 즐길 수 있는 백마강노래방을 열었다. 이어서 고급 타킷의 한식당 경복궁과 조선족 최초의 호텔인 해륜호텔을 세웠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모티브를 얻어 왕푸징 중심가에 나이트클럽을 세우고 연변예술단과 연변에서 내노으라 하는 가수들, 무용수들을 초빙해서 조선족의 가무를 선보였는데 북경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광석회장의 사업을 살펴보면 대부분 조선족의 문화를 북경에 뿌리 깊이 정착하고자한 무던한 노력이 눈에 띄인다. 한식당이든, 클럽이든 모두 중국의 수도라는 이 땅에 조선족의 이미지를 굳히고자 한 사나이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옥타북경지회를 세우고 세계 한인의 무대로 나가까지도 바로 그런 민족의 자존심이 컸던 것 같다.
세계 한인의 무대 속에 우뚝 선 조선족의 이미지
세계한인무역협회 World OKTA(World federation of Overseas Korean Traders Associations 이하 옥타)는 1981년에 세워진, 조국의 무역 증진과 국위 선양을 위한 세계 각국 한인 무역상 조직으로 산업정보 및 회원간의 이익 증진과 협조를 위한 해외교포 경제, 무역단체이다. 옥타는 우리민족의 가장 큰 경제단체로 3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 76개국, 120여개지회, 7000여명여 개 회원기업이 가입되어 있다.
월드옥타 북경지회는 지난 2006년 민족의 시인 김철선생의 발주로 시작되었고 처음 40여명의 초기 멤버에서 현재는 200개의 기업회원과 중국 전역에 19개의 지회가 설립되어 있는 중요한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월드옥타 상임이사 중 13명이 조선족이며 그중 이광석회장은 월드옥타의 부회장을 맡고 있어 세계 속에 조선족의 이미지를 굳건한 지켜왔다.
지난 15년전 그들이 처음으로 옥타총회에 참석했을 때에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당시만해도 중국인들이 출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만나는 사람마다 혹시 타이완에서 왔냐고 물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아직 “공산국가”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한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쳐다봤다으니 “조선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더 무지했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거기에 중국에서 건너간 대표들은 대부분 요식업에 종사하는 기업인들이였으니 미운새끼오리 취급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밖에서 큰소리 치려면 나라가 잘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월드옥타 시카고대회에 참석한 적 있었는데 참가 회원들의 명부를 만들기로 결의했어요. 그런데 내일이면 당장 대회날인데 그제서야 명부에 참가한 조선족 회원들의 명단이 전부 빠졌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 없어서 회장을 찾아가 따졌죠. 그제서야 당시 회장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면서 수천권의 회원명록을 회수해서 다시 찍게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광석회장은 전국을 다니며 옥타를 선전하고 뜻이 있는 조선족 기업인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그의 노력 끝에 옥타 속에는 나날이 우수한 조선족 기업인들일 모여들기 시작했고 다양한 업태의 기업들도 차츰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한인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이광석 회장의 공헌이 아주 크다.
중국 조선족 기업인들 화합의 장을 이룬 옥타
현재 중국에는 234만에 달하는 조선족 동포들이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약 15만 명이 북경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초기의 조선족사회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속에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할 부분이 바로 화합과 단결이라고 이광석회장은 강조해주었다.
월드옥타 북경지회는 현재 북경의 옥타 회원들에게 보다 유익한 정보와 성장 기반을 제공하고 또한 북경에 투자를 희망하는 타 지역의 옥타 회원들에게 도움을 주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옥타에서 매년 주력하고 있는 차세대무역스쿨은 18~35세까지의 한민족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치고 무역공부와 토론, 기성세대의 경영강좌 등을 통해 차세대의 우수한 무역인들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옥타와 하나가 되어 발전해 오면서 이광석회장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중국내 옥타 회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존경하고 도우며 하나로 뭉쳐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외국의 어느 지회에서도 찾아 볼수 없는 형제애이며 월드 옥타라는 세계 무대에서 조선족들이 단시간내에 우뚝 설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꼽는다.
해마다 진행되는 지회 활성화대회가 올해 8월에는 대련에서 있을 것이라며 이광석회장은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말해주었다. 해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서로 배우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옥타가 지향하는 목표라고 한다.
세상은 패자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대선배로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에 대해 묻자 그는 또다시 선배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돈이 전부 아니라 친구를 많이 사귀어라고 말해주었다. 이광석 회장은 “주위 사람 열명 중 일곱명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나는 꼭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꿈과 야망을 가졌다면 끝까지 자존심을 걸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은 패자를 기억해주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똑같은 말로 아들을 교육한다고 한다.
특별히 민족의 부흥과 차세대를 위한 교육에 관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그는 민족사학회에서 진행하는 한글학교 지원, 각종 형태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길림시 아라디향의 고추제, 연변인민방송국의 춘절만회 등 우리 민족의 정서를 알리는 문화행사에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조선민족은 꼭 단결해야 합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가진 민족이 아닙니까? 때문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지요. 조선족들끼리 단결해야 하고 나아가 전세계 한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를 도와줬습니다. 저 역시 제주도에 약간의 사업을 투자했습니다만, 서로 돕고 하나가 되는 한민족 의식, 또 부모님의 고향땅에 한번쯤 사업을 이루고싶은 욕망이 결국 같은 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젊은이들은 참으로 좋은 시대를 만났다며 본인 머리만 좋다면 무엇인들 못해내겠는가라고 그는 되물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결코 크게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젊은이들이 잘 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조선족 사회가 대를 이어 그 영향력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속에 이광석 회장과 같은 많은 선배들의 노력이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었음을 잊지않기를 바란다.
취재.글/ 김매화(본지 편집장, 월간 좋은아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