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료를 정리합니다. 이래서 아래글이 됩니다. 내용이 기니 대강 건너 뛰어 보십시요. 이 글의 아랫부분은 편집자의 피드백이 있습니다. 과감하게 저자 원고를 솎아냅니다. 글쓴 사람으로선 야속하나 책을 만들 때는 편집자를 존중하라는 경귀가 있더군요. 긴 글이 상당한 부분 줄어들었습니다. 책 만드는 과정이니 살펴 볼만 합니다.
크로마뇽 인의 펜과 현대인의 만년필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3만 년 전 원시인의 펜은 물감을 찍어서 쓰며 현대인의 만년필은 잉크가 담긴 저장고가 하나 더 있을 뿐이다. 이 단순한 구조 변경에 긴 세월이 걸렸다. 당장 100년 뒤 인류가 존재할지 걱정인 판에 3만 년 뒤의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모하기조차 하지만 미래의 인간이 쓰는 필기도구 역시 지금처럼 잉크를 만년필 몸통에 채워 촉으로 흘러나오는 구조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밥 먹을 때 쓰는 수저가 몇 만 년이 지난다고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만년필의 뿌리가 되는 아득한 조상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옛날 옛적 크로마뇽 인 가운데 조각가와 화가가 있었다. 조각가는 동물을 새기다가도 여자의 나체도 즐겨 새겼다.
요즘 사람들은 여자의 알 몸뚱이 조각품을 비너스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웃집 아줌마일 수 있고 자신의 아내일 수도 있다. '오동포동' 젖가슴에 '포동포동' 배에다 '푸등푸등' 엉덩판을 강조하여 손에 꼭 잡히는 크기로 만들었으니 그때 그 시절에도 성인용품을 파는 장사치가 있었다는 것인가. 단순히 동료 크로마뇽 남자들을 눈요기 해 주려고 만든 것인가. 이토록 사내들은 예나 지금이나 꼭 그 모양 그 꼴인가. 백번 양보하여 고상하게 봐서 위대한 모신상을 나타낸 것인가. 또 아니라면 건강한 아기의 임신을 보장받기 위한 행운의 마스코트 같은 것인가. 그 대답이 무엇이든, 다른 입상들과 더불어 비너스는 그들이 지닌 사물을 추상적으로 바꾼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늘 관대하지 않은 하늘과 위험에 찬 땅과 인간을 먹이로 삼는 거대한 동물을 종교로 모시는 종교적인 사상의 발상과 연관이 있는 듯이 여겨진다. 고대의 회화는 프랑스의 스페인, 남부 사하라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최초의 화가들은 분명히 종교적이며 주술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으리라.
약 1만 9천년 전에 제작된 프랑스의 동굴 벽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비밀스런 의식을 거쳐 그들의 작품을 깊은 동굴 속에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인류의 본래 생활 방식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마치 일상생활을 메모하듯이 한 무리 사람들이 창을 들고 동물을 잡는 모습을 찰흙에 자연 염료와 동물의 기름을 섞어 손으로 벽에 발라 그림 문자로 메모했다. 이런 그림이 그려지고 나서 기후의 변화로 인류는 새로운 먹이와 조직적인 사회를 이루면서 긴 시간 동안 방황을 하면서 새로운 신을 찾아 떠나야 했다.
빙하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세상은 바뀌면서 기원전 33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메르에서는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수메르 인들은 키쉬, 라가쉬,에리두 등으로 불리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그곳의 사람들은 광범위한 관개수로를 통해 물이 공급되는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곡식을 먹고 살았다. 수메르 상인들은 인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의 사람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어 사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사제들은 모든 회계 업무를 맡아 수메르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록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그들은 나무나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만든 스타일러스 Stylus라는 막대기를 필기 도구삼아 찰흙 판에다가 설형문자를 써서 불에 구워 보전하였다.
설형문자 쇄기 모양으로 생긴 그 설형문자는 작은 흙판 위에 새겨진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수천 점이 남아 있어서 수메르 인의 생활상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집트의 문명은 이미 수메르 문명에 못지않았다. 그들은 글씨를 찰흙 위에 쓰지 않고 그 대신에 파피루스라는 수초로 만든 부드러운 종이에 잉크를 넣은 갈대줄기에 구리 촉을 박은 펜으로 글씨를 썼다. 파피루스 papyrus는 나일 강 유역에서 자라는 수초로서 그 잎을 가늘게 찢어 물에 불린 다음 몇 겹으로 가지런히 펴서 무거운 돌로 눌러 말린 종이이다. 종이라는 뜻의 페이퍼 paper는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비롯하였다. 그들은 썼던 잉크의 주성분은 카본(탄소)이었으며, 동물의 뼈나 뿔 등을 태워 그슬리거나 송진이 많은 소나무 등을 태운 것을 슬래브(slab)라는 벼루에 모아 아교나 기름을 섞고 멀러(muller)로 문질러서 잉크를 만들어서 썼다.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로 그림 형상으로 쓴 글씨
이집트인은 후대의 그리스인이 히에로글리프(神聖文字)라 부르던 상형문자로 아름다운 그림 형상의 글을 썼다. 신성한 새김을 뜻하는 히에로글리프 hieroglyph 는 신의 말씀을 뜻하는 이집트어를 그리스 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 해상로가 기원전 600년까지 상선들로 꽉 차게 되었다. 그리스 인들은 페니키아 인들의 종교 사상과. 조선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알파벳을 배웠다. 글씨를 사용하는 페니키아 인들은 지중해 지역에서 여러 국가와 무역을 하는 뛰어난 상인과 항해사였다. 그리스 인은 그 문자를 빌리면서 문자의 이름까지 그대로 베꼈다.
그리스 유적지 벽면에 새겨진 그리스 문자
그리스 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에도 페니키아 문서는 오늘날 셈 어계의 알파벳처럼 자음만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스 인들은 모음의 필요성에 따라 그것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알파벳'이란 합성어는 그리스 문자의 알파와 베타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제법 글자의 체계를 잡아서 만든 이 알파벳으로 파피루스, 왁스 판, 심지어는 도자기류에도 글씨를 썼다.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했을 때 그들이 가지고 간 것은 보물만이 아니라 그리스 문자를 가지고 가서 제 나름으로 문자의 모양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로마인은 원래 글자에 J.U.W의 부가적인 세 문자를 덧붙여서 로마자 알파벳으로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사각의 대문자를 사용하여 벽에 글자를 새기고, 파피루스, 왁스 판 또는 납 연판, 양피지에는 원형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은 세피아(sepia)라는 오징어에서 분비되는 흑색 색소를 잉크로 사용했다. 이 밖에 은주(황화수은)를 사용한 적색잉크, 러브리카(rubrica)라는 적토(赤土)로 만든 잉크, 뮤렉스(murex)라는 소라고둥을 그늘에서 말리고 나서 그것을 으깨어 만든 자색잉크, 녹청(綠靑)과 식초로 만든 녹색잉크 등이 있었다.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서 새의 깃을 이용한 깃털 펜이 나왔다. 현재 필기구를 '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새의 깃'이라는 의미의 라틴 어 'PENNA'로부터 유래하였다. 이 깃털 펜은 후에 강철판으로 만든 금속 펜이나 흑연을 이용한 필기구가 등장할 때까지 오랫동안 유럽 지역에서 필기구로서 왕좌에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 그리스는 오배자 액으로 만든 잉크를 썼다. 붉나무에 진디의 일종이 기생하여 생긴 혹 모양이 생긴다. 거기에 타닌산이 많이 들어 있는 오배자 액을 만들어 글씨를 쓰고서나서 마르면 철분 약물로 표면을 바르면 글씨가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나중에 중세 유럽에서 애용하였던 오배자철 잉크의 첫 시작품이었다.
서방에선 깃털 펜, 중국을 비롯한 한국, 일본 등 동방에서는 붓을 썼다. 붓은 기원전 3세기경 진(秦)나라의 몽염(蒙恬)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붓촉이 9세기 무렵부터 길어졌으며 이때부터 붓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11세기 중엽 당나라 시대에 무심산탁필(無心散卓筆)이 나왔다. 이것은 털 속에 심재 (心材)를 넣지 않는 붓이었다. 붓 가운데는 족제비의 꼬리 중간부터 끝 부분 털로 만든 황모필, 양 머리에서부터 갈빗대 옆구리 부위의 양모를 이용하여 만든 양모필, 쥐의 수염만을 골라서 만든 서수필, 개의 등에 난 털로 만든 구모필, 심지어 갓난 아이에게서 처음 나온 머리털을 잘라 만든 태모필도 있다.
서방에서 잉크라면 고대 중국에서는 석날(석묵 또는 석탄)으로 글씨를 썼다고 전한다. 석묵으로 쓴 글씨는 흐릿하며 쉽게 지워지므로 석묵에 옻을 섞어서 쓰기도 하고, 옻만으로 쓰기도 했다. 위(魏 서기 220년 ~ 265년)과 진 (晉 서기 265년 ~ 316년)때에 비로소 옻과 소나무의 그을음으로 만든 묵환(墨丸 둥근 먹)을 만들었다. 이 묵환을 물에 타거나 벼루에 갈아 먹물을 만들어 썼다.
로마 시대에 새로 나온 서사재료(書寫材料)는 파피루스와 경쟁적으로 발전했던 양피지였다. 고대의 큰 도서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서고의 책을 늘리기 파피루스를 대량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60년경 로마의 카이사르시대에 각국의 도서관들은 장서를 늘리기에 경쟁적이었다. 자신의 장서를 늘리기 위해 로마 쪽에서 파피루스 공급이 끊겼으나 소아시아에 있는 페르가뭄(지금의 터키)의 도서관은 시민의 도움으로 종래의 짐승 가죽을 개량하여 표면이 부드럽고, 흰 양피지를 파피루스 대신 사용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뒤 양면으로 쓸 수 있고 여러 쪽으로 가를 수 있으며 제본을 해서 책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서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구하기 쉬운 동물가죽인 양피지를 썼다. 유럽에서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무렵부터 파피루스 대용으로 양피지와 벨럼(송아지 가죽)이 주요 글 쓰는 재료가 되어 중세 말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간행본 시대를 맞이하여 종이로 대체되면서 양피지를 사용하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동양에서 종이를 처음 쓴 것은 중국이었다. 기원전 2200년경 중국의 왕조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하, 상, 주였다. 상나라 때 중국 최초로 청동 그릇에는 최초의 문자 한자가 새겨있다. 기원전 1150년경 은나라 주왕 때 우주의 변화를 서술한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여러 사람에 의하여 나왔다. 주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베스트셀러로서 위로 천문을 보고 아래로 지리를 살펴, 천지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고 그 법칙을 인간에 옮겨 생각하는 고전이다. 이 책을 썼던 것은 죽간(竹簡)으로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사용했던 대나무로 만든 필기재료로서 목간(木簡)과 함께 쓰였다. 옛날부터 기록할 필요가 생기면 뼈·돌·금속에 문자를 새기기도 하였고 견(絹)·백(帛) 등의 포(布)에 묵서(墨書)하기도 했으나,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깎아서 기다란 조각을 만들고 거기에 붓으로 묵서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다. 인간 생활이 복잡해지자 죽간, 목간으로는 수요를 채울 수 없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류 사상 최초의 제지 기술로 만든 종이가 나왔다. 종이는 중국 후한(後漢) 화제(和帝)의 환관(宦官) 채륜이 궁정에서 나무껍질·마(麻) 등을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105년 황제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후한서》의 신자열전(宦者列傳)>에 전한다. 제지술이 서방에 전파된 것은 8세기 무렵으로 종이는 더 먼저 실크로드를 통해 신장 각지와 중앙아시아지방에 전해졌으나, 제지술은 싸움에서 패한 당나라의 포로 가운데 기술을 가진 이가 있어 이때 비로소 알려지게 되어 제지술도 서서히 유럽에 전파되었다. 12세기 중엽 유럽 최초의 제지 공장이 스페인에 생겼다. 그곳으로부터 제지 기술은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남프랑스 및 이탈리아에서도 제지가 이루어졌으며, 14세기 말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제지공장이 세워지면서 마침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글을 쓰던 깃털 펜은 1808년 독일의 돈킨이 강철판으로 펜을 개발하여 특허를 얻어 시장에 나올 때까지 10세기 동안 글과 그림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반려자였다. 19세기 말까지는 마음대로 지니고 쓸 수 있는 필기구를 가져본 일이 없는 셰익스피어, 디킨스 같은 위대한 작가 가운데 아무도 필기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하여 글을 쓸 수 있는 행운아는 없었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사람도 초기의 잉크 펜이 사용되던 시기에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를 깃털 펜을 사용하여 양피지 위에 작성하였다. 이런 불편도 오랜만에 점점 끝장을 볼 때가 왔다. 독자적인 잉크공급장치가 있어서 쉽게 잉크를 채워 사용할 수 있으며, 다양한 상황에서도 안정감 있는 필기를 추구하게 되는 때가 드디어 왔다. 수작업으로 만들었던 펜에서 성큼 다가선 반가운 징조는 19세기 초에 대량생산된 철제(steel) 촉(point)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부터였다. 이것은 금속으로 주형을 떠서 찍어냈고 매우 싼 값으로 팔았다. 이 촉들은 여러 가지 모양과 잉크를 모으는 접힘에다가 별난 필기 스타일까지 받아들이는 적응성이 뛰어난 모양을 갖추었다. 필기 자는 단순히 촉을 받침대에 맞추고 잉크병에서 잉크를 찍고서 한 줄 한 줄을 써 내려가면 됐다. 철제 펜의 출현에 자극된 같은 시대 발명가들은 펜을 잉크병에 번번이 찍어 쓰는 불편은 벗어나려고 온갖 애를 많이 썼다. 그들의 작업 결과로 빅토리아시대의 노트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휴대용 책상에 여행용 잉크병과 펜대와 금으로 된 촉이 한 팀을 이루어서 펜과 잉크가 마침내 휴대용이 되었다.
그야말로 문방사우- 종이, 펜, 잉크, 책상이었다.
영국의 존 미첼이 1828년 강철 펜을 제작하는 기계를 발명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영국의 제임스 페리가 더욱 부드러운 강철 펜촉을 만들었다. 그는 펜촉의 중앙에 구멍을 뚫고 위쪽으로 굵은 홈을 절반가량 내고 펜촉 끝까지 가늘게 쪼개어 잉크를 좀 더 많이 먹음을 수 있게 했다. 만년필은 1809년 영국인 프레더릭 B. 폴슈 Fredrick B. Folsch 가 기능적인 잉크 저장탱크가 달린 만년필의 원형을 발명한 것이 최초이며 1884년 미국인 L.E워터맨이 모세관 작용을 이용하여 최초로 쓸 만한 만년필을 만들었다. 이 최초의 모델은 안약을 넣는 고무 관에 잉크를 채운 것으로, 잉크가 계속 적당히 흘러내리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볼펜은 1945년에 처음 시장에 선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항복문서에서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시카고의 프로모터인 밀튼 레이놀즈는 수년 전 아르헨티나에 살던 헝가리인 라즐로 비로가 발명한 볼펜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한다. 레이놀즈의 볼펜은 그리 품질이 좋은 것은 못되었다. 크롬 강철로 만든 볼은 제대로 구르지 않았고 "절대 새지 않는다"라는 카트리지에서는 잉크가 새어 수천 명의 호주머니를 버려 놓았다. 그리고 잉크도 종이에 번지는 경향이 있었다. 고객들은 어렵게 산 물건을 반품해 왔고 볼펜은 잊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볼펜의 결점은 보완되어 새로운 종류가 개발되었다. 우주비행사의 필요에 맞춰 개발한 어떤 볼펜은 무중력상태에서 어떤 자세에서도 쓸 수 있으며 심지어 거꾸로 서서도 쓸 수가 있다. 지상에서는 구태여 그런 볼펜을 쓸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사실 지금 이 우주 펜은 몇 번이나 그럴 기회가 있는지는 몰라도 누워서도 쓸 수 있고 물속에서 쓸 수 있는 탁월한 기능으로 시판되고 있다.
이제는 펜을 가지려고 대나무를 구하려고 대나무 숲을 헤매거나 새의 깃털을 자르려고 거위의 꽁무니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더구나 펜을 쓸 종이를 만들려고 갈대밭에서 갈대를 줍거나 비싼 동물 가죽을 마련할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껏 쓰다 못해 신물 나도록 쓸 수 있는 잉크를 품은 만년필, 볼펜 등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원시 화가가 글씨를 그림을 벽에다가 자신의 펜으로 쓰기 시작한 지 3만 년 만에.
위 글을 출판사 편집자는 아래와 같이 피드백을 합니다. 저도 위 글을 보니 장황하다 싶었지요. 그러나 한 편 위 글이 나름 재미는 있습니다. 편집자의 피드백과 저자의 답변이 함께 있는 아랫글은 책 한 권 내기가 " 에고 어렵다.때려 치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게 됩니다.
1-1. 인류 역사를 기록한 필기도구의 탄생
3만 년 전 크로마뇽 인의 펜과 현대인의 만년필 사이에 차이는 단순하다. 고대인은 나뭇가지에 물감을 찍어서 썼고 현대인은 잉크가 담긴 저장고가 달린 펜으로 쓴다. 이 단순한 구조 변경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만년필의 뿌리가 되는 필기도구의 조상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고대의 회화는 프랑스의 스페인, 남부 사하라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최초의 화가들은 분명히 종교적이며 주술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으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비밀스런 의식을 거쳐 그들의 작품을 깊은 동굴 속에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인류의 본래 생활 방식을 표현하였다 * <※ 편집자 코멘트: *~* 다산을 기원하는 고대미술품에 관한 이야기로 ‘필기도구의 역사’라는 이 글의 논지에서 너무 벗어나 있음. 해당내용을 삭제함.> 그들은 마치 일상생활을 메모하듯이 한 무리 사람들이 창을 들고 동물을 잡는 모습을 찰흙에 자연 염료와 동물의 기름을 섞어 나뭇가지나 손에다 묻혀 벽에 발라 그림 문자로 메모했다. * <※ 편집자 코멘트: *~* 논지에서 벗어나 있음. 필기구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고대인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손’을 사용했음을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손 또는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그 말을 언급하였음 * 기원전 33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메르에서는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편집자 코멘트: *~* 삭제. 필기구 역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에둘러 다른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음. 생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음. 이 책이 실용서임을 생각한다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글쓰기가 더욱 적합함. 삭제함> <※편집자 코멘트: *~* 삭제.삭제함> <※편집자 코멘트: 사제들의 수메르 통제와 기록하는 방법 간의 인과관계가 이해되지 않음. 간략한 추가 설명요함.해당 내용 삭제함> 수메르들은 나무나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만든 스타일러스(Stylus)라는 막대기를 필기 도구삼아 찰흙 판에다가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써서 불에 구워 보전하였다. 쇄기 모양으로 생긴 그 설형문자는 작은 흙판 위에 새겨진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수천 점이 남아 있어서 수메르 인의 생활상을 설명해 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글씨를 찰흙 위에 쓰는 대신에 파피루스라는 수초로 만든 부드러운 종이에 잉크를 넣은 갈대줄기에 구리 촉을 박은 펜으로 글씨를 썼다. 파피루스(papyrus)는 나일 강 유역에서 자라는 수초로서 그 잎을 가늘게 찢어 물에 불린 다음 몇 겹으로 가지런히 펴서 무거운 돌로 눌러 말린 종이이다. 종이라는 뜻의 페이퍼(paper)는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비롯하였다. 그들은 썼던 잉크의 주성분은 카본(탄소)이었으며, 동물의 뼈나 뿔 등을 태워 그슬리거나 송진이 많은 소나무 등을 태운 것을 슬래브(slab)라는 벼루에 모아 아교나 기름을 섞고 막자(muller)로 문질러서 잉크를 만들어서 썼다. <※편집자 코멘트: 문자의 역사가 아닌 필기구의 변천에 초점을 맞출 것!삭제함 > 로마인들은 사각의 대문자를 사용하여 벽에 글자를 새기고, 파피루스, 왁스 판 또는 납 연판, 양피지에는 원형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은 세피아(sepia)라는 오징어에서 분비되는 흑색 색소를 잉크로 사용했다. 이 밖에 은주(황화수은)를 사용한 적색잉크, 러브리카(rubrica)라는 적토(赤土)로 만든 잉크, 뮤렉스(murex)라는 소라고둥을 그늘에서 말리고 나서 그것을 으깨어 만든 자색잉크, 녹청(綠靑)과 식초로 만든 녹색잉크 등이 있었다.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서 새의 깃으로 만든 깃털 펜이 나왔다. 현재 필기구를 '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새의 깃'이라는 의미의 라틴 어 'PENNA'로부터 유래하였다. 이 깃털 펜은 후에 강철판으로 만든 금속 펜이나 흑연을 이용한 필기구가 등장할 때까지 오랫동안 유럽 지역에서 필기구의 왕좌에 있었다. 깃털펜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만들어썼다. 대체로 펜으로 쓰기에 단단했던 거위의 왼쪽 날개에서 깃털이 인기가 있었다. 뽑은 깃털을 깃털이 쓰기 좋을 만큼 부드러워질 동안 물 속에 담궈 놓는다. 물에서 꺼내 말리고 나서 뜨거운 모래로 한 던 습기를 말렸다. 깃의 끝을 비스듬히 잘라서 잘린 부분의 가운데를 세로로 베어내면 바로 만년필 심에 갈라진 부분처럼 모양을 갖춰서 잉크를 머금는 효과가 생긴다. 깃털 끝을 다듬어 부드럽게 하고서 촉을 뾰족하게 만들어썼다. 깃털 펜은 닳으면 다시 손질해서 쓸 수 있는 작은 칼이 함께 있어야 했다.
<※편집자 코멘트: 깃털 펜의 원리, 깃털 펜으로 사용된 새의 깃털의 종류, 깃털 펜의 마모성(깃털 펜 하나로 종이 10장을 쓸 수 있었다 등..), 깃털 펜을 따로 만드는 직업의 사람이 있었는지 사용자가 스스로 만들었는지 등 깃털 펜에 관한 설명이 더 추가되면 좋겠음.>.편집인의 요청에 따른 자세한 자료를 구할 수 없었음. 약간의 자료만 보완함 * <※편집자 코멘트: 다음에 오는 문장과 내용 중복. 삭제. 삭제함.> <※편집자 코멘트: 이런 문장이 들어가야 앞뒤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듯 함 삭제함> <※편집자 코멘트: 삭제> <※편집자 코멘트: 삭제> 위 내용을 삭제함.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글을 쓰던 깃털 펜은 1808년 독일의 돈킨이 강철판으로 펜을 개발하여 특허를 얻어 시장에 나올 때까지 10세기 동안 글과 그림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반려자였다. <※편집자 코멘트: 표시한 두 문장 내용 중복삭제함>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사람도 초기의 잉크 펜이 사용되던 시기에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를 깃털 펜을 사용하여 양피지 위에 작성하였다. <※편집자 코멘트: 깃털 펜의 불편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에야 다음에 오는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음.> 드디어 독자적인 잉크공급장치가 있어서 쉽게 잉크를 채워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감 있는 필기를 추구하게 되는 때가 왔다. 1780년 영국의 S. 해리슨, 현재의 강철제 펜을 발명했으며, 수작업으로 만들었던 펜에서 영국의 존 미첼이 1828년 강철 펜을 제작하는 기계를 발명했으며,<※편집자 코멘트: 펜촉을 설명하다가 잉크를 설명하다가 다시 펜촉을 설명하다가... 혼란스러움. 존 미첼이 만든 펜이 앞서 19세기 초에 대량생산된 철제 촉과 다른 것인지? 앞서 금속 주형을 떠서 펜촉을 찍어 냈다면 대량생산을 했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확인 요함. 글의 순서를 앞으로 기술하여 혼란을 없앰.> 그로부터 2년 후 영국의 제임스 페리가 더욱 부드러운 강철 펜촉을 만들었다. 그는 펜촉의 중앙에 구멍을 뚫고 위쪽으로 굵은 홈을 절반가량 내고 펜촉 끝까지 가늘게 쪼개어 잉크를 좀 더 많이 머금을 수 있게 했다. 이것은 금속으로 주형을 떠서 찍어냈고 매우 싼 값으로 팔았다. 이 촉들은 여러 가지 모양과 잉크를 모으는 접힘에다가 별난 필기 스타일까지 받아들이는 적응성이 뛰어난 모양을 갖추었다. 필기자는 단순히 촉을 받침대에 맞추고 잉크병에서 잉크를 찍고서 한 줄 한 줄을 써 내려가면 됐다. 철제 펜의 출현에 자극된 같은 시대 발명가들은 펜을 잉크병에 번번이 찍어 쓰는 불편은 벗어나려고 온갖 애를 많이 썼다. 그들의 작업 결과로 빅토리아시대의 노트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휴대용 책상에 여행용 잉크병과 펜대와 금으로 된 촉이 한 팀을 이루어서 펜과 잉크가 마침내 휴대용이 되었다. 그야말로 문방사우- 종이, 펜, 잉크, 책상이었다. <※편집자 코멘트: 형태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듯. 위에 있는 설명만으로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음. 잉크 휴대에 관해서는 보완할 필요가 있음. 만년필로 넘어오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봄. 말그대로 휴대용 책상에 잉크병과 펜대와 촉으로 된 세트임. 더 무슨 설명을.. ?>
만년필은 1809년 영국인 프레더릭 B. 폴슈 Fredrick B. Folsch 가 기능적인 잉크 저장탱크가 달린 만년필의 원형을 발명한 것이 최초이며 1884년 미국인 L.E워터맨이 모세관 작용을 이용하여 최초로 쓸 만한 만년필을 만들었다. 이 최초의 모델은 안약을 넣는 고무 관에 잉크를 채운 것으로, 잉크가 계속 적당히 흘러내리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볼펜은 1945년에 처음 시장에 선을 보였다. <※편집자 코멘트: 동일한 연도의 우리의 역사와 함께 설명하면서 연도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을 주려는 저자의 의도는 알겠으나, 핵심(논점)을 향한 집중력을 떨어트리므로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삭제함> 시카고의 프로모터인 밀튼 레이놀즈는 수년 전 아르헨티나에 살던 헝가리인 라즐로 비로가 발명한 볼펜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한다. 레이놀즈의 볼펜은 그리 품질이 좋은 것은 못되었다. 크롬 강철로 만든 볼은 제대로 구르지 않았고 "절대 새지 않는다"라는 카트리지에서는 잉크가 새어 수천 명의 호주머니를 버려 놓았다. 그리고 잉크도 종이에 번지는 경향이 있었다. 고객들은 어렵게 산 물건을 반품해 왔고 볼펜은 잊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볼펜 잉크가 새는 결점은 보완되어<※편집자 코멘트: 어떻게 보완되었는지? 보완함 '새는 결점'으로> 새로운 종류가 개발되었다. 우주비행사의 필요에 맞춰 개발한 어떤 볼펜은 무중력상태에서 어떤 자세에서도 쓸 수 있으며 심지어 거꾸로 서서도 쓸 수가 있다. 지상에서는 구태여 몇 번이나 그럴 기회가 있는지는 몰라도 누워서도 쓸 수 있고 물속에서 쓸 수 있는 탁월한 기능이라며 시판되고 있다. 이제는 펜을 가지려고 대나무를 구하려고 대나무 숲을 헤매거나 새의 깃털을 자르려고 거위의 꽁무니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더구나 펜을 쓸 종이를 만들려고 갈대밭에서 갈대를 줍거나 비싼 동물 가죽을 마련할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껏 쓰다 못해 신물 나도록 쓸 수 있는 잉크를 품은 만년필, 볼펜 등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원시 화가가 글씨를 그림을 벽에다가 자신의 펜으로 쓰기 시작한 지 3만 년 만에.
※ 편집자 코멘트(전체평) 1. 문자의 역사 등 필기구와 관련 없는 내용은 과감하게 삭제하고 필기구를 중심으로 간결하게 정리할 필요 있음. 과감하게 삭제함. 글이 아주 홀가분하여짐. 2. 종이-잉크-펜-서양-동양으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지 못하고 어지러움. 서양으로 한정함. 3. ‘인류의 역사를 기록한 필기도구의 탄생’이라는 주제가 너무 거창하다면, 만년필이 탄생하기까지로 주제를 좁혀나가고, ‘만년필의 탄생’ 등으로 제목을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지? 주제를 좁힌 후 만년필과 유사한 필기도구를 어떤 계층이 사용했는지, 필기도구가 불편해서 필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등의 에피소드를 넣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 한데. 4. ‘인류의 역사를 기록한 필기도구의 탄생’으로 계속 간다면 필기도구가 진화하면서 사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추가된다면 좋겠음. 예를 들어 인쇄술의 발명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와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 운동을 촉진했던 것처럼. 문화와 사회의 발전까지는 장황하겠기 위 수정된 내용으로 가고져함/
따라서 아래와 같이 다듬어졌습니다.
1-1. 인류의 역사를 기록한 필기도구
3만 년 전 크로마뇽인의 필기구와 현대인의 필기구 간의 차이는 단순하다. 고대인은 나뭇가지에 물감을 찍어서 썼고 현대인은 잉크가 담긴 저장고가 달린 펜을 쓴다. 이 단순한 구조 변경에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최초의 필기도구는 사람의 손이었다. 프랑스, 스페인, 남부 사하라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대 회화를 보면 손가락이나 나뭇가지, 뾰족한 돌에 자연염료와 동물의 기름을 섞은 점토를 묻혀 그렸다. 원시인들의 손은 붓이 되어 샤냥하고 열매를 따고 축제를 벌이는 그들의 일상을 기록해 나갔다. 기원전 3,3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룬 수메르인들은 점토판에 계약의 내용을 기록하고 계약 당사자들이 서명을 한 후 점토판을 건조시켜 거래계약의 증빙으로 사용했다. 이 점토판을 가르켜 인류 최초의 주식, 최초의 회계장부라 부른다. 수메르인들은 나무나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든 막대기로 점토판을 꾹꾹 눌러 그들만의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새겼다. 오늘날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일정한 형식을 의미하는 스타일(style)이라는 말은 설형문자를 새기던 이 뾰족한 필기도구인 철필을 라틴어로 ‘스타일러스(stilus)’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점토 대신에 파피루스(papyrus)라는 수초로 만든 부드러운 종이 위에다 잉크를 넣은 갈대줄기에 구리 촉을 박은 펜으로 글씨를 썼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유역에서 자라는 수초로서 그 잎을 가늘게 찢어 물에 불린 다음 몇 겹으로 가지런히 펴서 무거운 돌로 눌러 말린 종이이다. 종이라는 뜻의 페이퍼(paper)는 파피루스에 비롯하였다. 그들이 썼던 잉크의 주성분은 카본(탄소)이었다. 동물의 뼈나 뿔 등을 태워 그슬리거나 송진이 많은 소나무 등을 태워서 슬래브(slab)라는 벼루에 모아서 아교나 기름과 섞고 막자(muller)로 문질러 잉크를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세피아(sepia)라는 오징어에서 분비되는 흑색 색소를 잉크로 사용했다. 이 밖에 은주(황화수은)로 만든 적색잉크, 러브리카(rubrica)라는 적토(赤土)로 만든 잉크, 뮤렉스(murex)라는 소라고둥을 그늘에서 말린 것을 으깨어 만든 자색잉크, 녹청(綠靑)과 식초로 만든 녹색잉크도 사용했다.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서 새의 깃으로 만든 깃털펜이 나왔다. 현재 필기구를 ‘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새의 깃’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penna’로부터 유래하였다. 아무래도 큰 깃털이 펜을 만드는 데 환영받았다. 사람들은 견고한 거위 깃털을 가장 선호했다. 백조털은 귀하고 비쌌으며, 세필용으로는 수탉의 깃털을 최고로 쳤다. 가장 튼튼한 깃털은 봄철 새의 왼쪽 날개 끝에서 다섯 번째 것이다. 왼쪽 날개는 깃털이 안쪽으로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오른손잡이에게 적합하다. 뽑은 깃털은 부드러워질 때까지 물에 담가놓는다. 물에서 꺼낸 깃털은 잘 말린 후 뜨거운 모래로 한 번 더 습기를 제거한다. 깃대의 끝을 비스듬히 잘라서 잘린 부분의 가운데를 세로로 자르면 바로 만년필촉의 갈라진 부분처럼 잉크를 머금는 효과가 생긴다. 마지막으로 깃털 끝을 다듬으면 깃털펜이 완성된다. 깃털펜은 연필처럼 닳으면 다시 손질해서 쓸 수 있는 작은 칼이 늘 함께 했다. 중세 서양에서 대형 성서 한 권의 값은 약 20 리브르로 당시 도시 지역 집 한 채 값이 100 리브르였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가격이었다. 책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필경사들이 양피지 위에 깃털펜으로 오배자 잉크를 찍어서 베껴 쓸 수 있는 양이 고작 하루 3~4쪽이었다. 깃털펜은 후에 강철로 만든 금속 펜이 등장하기 전까지 10세기 동안 글과 그림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반려자였다.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극작가, 소설가, 시인, 철학자로 생전에 많은 책을 집필했다. 보통 문인 스무 사람보다 더 많은 거위 깃털펜을 사용한 볼테르는 거위들의 천적이었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같은 사람도 「독립선언서(1776년)」를 깃털펜을 사용하여 양피지 위에 작성하였다. 르네상스와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교육이 확대되면서 글을 쓰는 일은 더 이상 소수 지식인들의 특권이 아니었다. 지식의 대중화에 따른 필기도구의 수요 증가는 필기도구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1780년 영국의 사무엘 해리슨(Samuel Harrison)이 금속펜을 발명했다. 1828년 영국의 존 미첼이 금속펜을 생산하는 기계를 발명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영국의 제임스 페리(영문 추가)가 더욱 부드러운 금속펜촉을 만들었다. 페리는 펜촉의 중앙에 구멍을 뚫고 위쪽으로 굵은 홈을 절반가량 내고 펜촉 끝까지 가늘게 쪼개서 잉크를 좀 더 많이 머금을 수 있게 했다. 금속으로 주형을 떠서 찍어낸 펜촉은 매우 싼 값에 팔았다. 금속펜촉은 다양한 모양에다 필기자의 별난 필기 스타일까지 받아들일 만큼 적응성이 뛰어났다. 필기자는 단순히 펜촉을 펜대에 끼우고 잉크병에서 잉크를 찍고서 한 줄 한 줄을 써 내려가면 됐다. 단 종이가 찢기지 않게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면서……. 금속펜의 출현에 자극받은 동시대 발명가들은 펜을 잉크병에 번번이 찍어 쓰는 불편을 벗어나고자 온갖 애를 썼다. 그들의 작업 결과 빅토리아시대의 노트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잉크병과 펜대와 금으로 된 촉이 일체화된 휴대용 책상이 탄생한다. 그야말로 문방사우가 한데 어우러진 책상이었다. 1809년 영국인 프레더릭 B. 폴슈(Fredrick B. Folsch)는 기능적인 잉크 저장탱크가 달린 만년필의 원형을 발명한다. 1884년 미국인 루이스 워터맨(Louis Waterman)은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여 최초로 쓸 만한 만년필을 만들었다. 워터맨이 만든 초기 모델은 안약을 넣는 고무관에 잉크를 채운 것으로, 잉크가 적당히 지속적으로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었다. 1938년 헝가리의 신문기자였던 라슬로 비로(Laszlo Biro)는 볼펜을 세상에 내놓는다. 윤전기에 사용하는 잉크가 금세 마르는 것을 보고 라슬로는 만년필에 윤전기 잉크를 넣어봤다. 하지만 잉크 농도가 너무 진해 펜촉 끝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라슬로는 화학자인 동생 게오르그의 도움으로 펜촉 대신 볼을 붙인 펜을 만든다. 볼이 종이와의 마찰로 회전하면서 잉크가 조금씩 흘러나오도록 한 것. 1943년에 비로 형제는 아르헨티나에서 볼펜 발명 특허를 취득한다. 1946년에는 영국 회사가 이들에게 특허권을 사들여 제2차 세계대전 중 공군용으로 볼펜을 생산하고, 1946년 본격 판매를 시작했다. 잉크를 다시 채울 필요도, 흘러나올 걱정도 없는 ‘빅 비로스(Bic Biros)’ 볼펜은 조종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지나친 비약이다 싶기는 하지만, 줄줄 새는 만년필로 곤혹을 겪던 조종사들이 아무 때나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볼펜을 손에 쥐게 된 뒤 중요한 목표물을 바로바로 표시할 수 있게 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해석도 있다. 편리함과 실용성을 내세운 볼펜은 서서히 만년필을 대체해 나갔다.
이제는 글을 쓰려고 대나무 숲을 헤매거나 거위의 꽁무니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더구나 동물 뼈를 태워 송진과 섞거나 오징어 먹물에서 풍기는 악취를 참을 필요도 없어졌다.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껏 쓰다 못해 신물 나도록 쓸 수 있는 잉크를 품은 만년필, 볼펜 등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원시화가가 벽에다가 글씨와 그림을 손가락으로 쓰기 시작한 지 3만 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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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파만파 원문보기 글쓴이: 일파 황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