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라고 증거되어 있는 등과 같은 아래의 본문 말씀에서와 같이..
베드로를 통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한 번의 선포로 성전 미문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되고 걷게 되며, 뛰게 되고 찬미하게 되며, 그와 함께 그 지경에 있던 모든 백성들이 함께 기이하게 여기면서 놀라게 된 것은 구주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임해 있고, 바로 그 구주 예수님으로 인해 거하고 누리며 강렬할 수 있고 확장케 되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들 중 일부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 등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어떻게든 성령님과 별개일 수 없는 것으로 다시 말해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인 성령님께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고 누림이 되게 하시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와도 결코 별개일 수 없는 것이고 생각 이상으로 전적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곧 그러한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뜻하시고 계획하시며 약속하시고 예정하시며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심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애초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의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은혜와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 진정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며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고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지고 단절케 되었으며 본질적으로는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고 영적으로는 진노와 저주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어서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과 권한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과 전적으로 직결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위치와 역할과 권한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실상 적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세계, 복음의 세계에 있어 의외로 쉽게 간과하곤 하고,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거나 조금이라도 통찰하지 못하게 될 때 있을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 중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는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거듭남, 하늘나라, 영생에 있어 당연히 필수이고 완전히 직결되는 것임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으나..
실상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과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누릴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누려야 하는 이 땅에서의 구주 예수님과 함께 이미 임해 있고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과 실제들, 생생함과 강렬함들에 있어서도 마땅히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께서 필수이시고 전적으로 직결되시는 것임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거나 제대로 납득이 안 되거나, 아니면 아예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연결 자체에 소흘하거나, 또는 전반적인 통찰 자체가 안 되는 실상 가운데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신앙생활도 하며, 복음도 외치고, 하나님 나라도 강조하고 있는 현실인 것임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는 복음의 능력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의 누림도, 심지어는 기도의 응답 한 번에 있어서도, 어떤 면에서는 신앙생활 자체에 있어서 부터도 충만하거나 강렬하거나 견고하기가, 게다가 갈수록 성장하고 장성하며 강한 군사와 같이 되기가 힘들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기도하면서 잘 분별하고 제대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실제로 여러 모양으로 사모하고 또 사모하며,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더욱 확고히 하면 할수록 유익하고 복되며 실질적인 신앙의 단련과 선한 경주가 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어쨌든 참으로 세상 끝 날에 신령한 몸을 입고 누리게 되는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이든지, 또는 이 세상에 구주 예수님과 함께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이든지 간에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과 통로와 방법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인 것임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우선은 영원한 하늘나라, 진정 요한계시록 21장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의 거함과 누림이 됨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곧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든지, 또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오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고 있든지 간에 어쨌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만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직접적, 실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지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본질적으로는 더 이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의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가 아닌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됨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됨과 함께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이 세상에 임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약의 시대에서처럼 모형이나 그림자로든지, 또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실제와 강렬함으로든지 간에 정말 누리게 됨에 있어서도 결코 다른 방법이나 통로는 달리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오직 한 가지, 곧 마치 옛 사람과 같이 더 이상 나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이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야지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그와 같은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 악한 세력들, 온갖 유혹과 시험들, 한계와 제한들, 시련과 위기들 등과 싸우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 있어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며 참회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갈 때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이 더욱 더 생생하고 강렬하며 풍성하게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조금도 복잡할 수 없는 것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을 위해 순간순간 전심으로 붙잡고 의지해야 하는 구주 예수님이야 말로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인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직접적,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 나라 역사들에 있어 실제와 누림들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도 단적으로 말씀의 영이신 분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말씀이시며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 자체부터가 본질적으로는 절대 진리이자 절대 의이며 완벽한 선이고 완벽한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모든 중심과 근본과 실체인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다스리고 통치하며 말씀대로 나타나고 이뤄지게 되는 나라인 것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인 것이고, 실제로 아래 본문 당시의 베드로에 있어서 부터도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을 때가 아닌 오히려 정반대로 말씀을 사모하고 실행하며 증거함에 있어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을 때였으며 사실상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과 함께 그렇게 까지나 기이한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강렬하게 나타남에 있어 결코 별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3:6~10)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1월 1일(금)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