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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제
- 강경애 -
이 산등에 올라서면 용연 동네는 저렇게 뻔히 들여다볼 수가 있다. 저기 우뚝 솟은 저 양기와집이 바로 이 앞벌 농장 주인인 정덕호 집이며, 그 다음 이편으로 썩 나와서 양철집이 면역소며, 그 다음으로 같은 양철집이 주재소며, 그 주위를 싸고 컴컴히 돌아앉은 것이 모두 농가들이다.
그리고 그 아래 저 푸른 못이 원소(怨沼)라는 못인데, 이 못은 이 동네의 생명선이다. 이 못이 있길래 저 동네가 생겼으며, 저 앞벌이 개간된 것이다. 그리고 이 동네 개 짐승까지라도 이 물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못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무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 농민들은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전설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그들이 믿는 신조로 한다.
그들에게서 들으면 이러하였다---
옛날 이 원소가 생기기 전에, 이 터에는 장자 첨지가 수없는 종들과 전지와 살진 가축들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첨지는 하도 인색하여서, 연년이 추수하는 곡식을 미처 먹지 못하고 곡간에서 푹푹 썩어 내도 근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할 생각은 고사하고, 어쩌다 걸인이 밥 한술을 구걸하여도 그것이 아까워서는 대문을 닫아 걸고 끼니도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몇 해를 거푸 흉년이 들어서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장자 첨지에게 애걸을 하였다. 그러나 첨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고 문간에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몰래 작당을 하여 가지고 밤중에 장자 첨지네 집을 습격하여 쌀과 살진 짐승들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만에 장자 첨지는 관가에 고소장을 들여 이 근처 농민들을 모두 잡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무수한 악형을 하고 혹은 죽이고 그나마는 멀리 쫓아 버렸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아들딸을 잃어버린 이 동네 노인이며 어린것들은 목이 터지도록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혹은 아들과 딸을 찾으며 장자 첨지네 마당가를 떠나지 않고 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고울고 또 울어서 그 눈물이 고이고 고이어서 마침내는 장자 첨지네 고래잔등 같은 기와집이 하룻밤 새에 큰 못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 못이 즉 내려다보이는 저 푸른 못이다.
표면에 나타나는 이 못의 넓이는 누구나 얼핏 보아도 짐작하겠지마는, 이 못의 깊이는 이때까지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못의 깊이를 알고자 하여 명주실꾸리를 몇 꾸리든지 넣어도 끝이 안 났다는 그런 말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이 동네 농민들은 어디서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반드시 쫓아가서 원소의 전설부터 이야기하고 그리고 자손이 나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이 전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애들로부터 어른까지 이 전설을 머리에 꼭꼭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원소에 대하여서 막연하나마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농민들은 무슨 원통한 일이 있어도 이 원소를 보고 위안을 얻으며 무슨 괴로운 일이 있어도 이 원소를 바라보면 사라진다고 하였다.
사명일 때면 그들은 떡이나 흰밥을 지어 이 원소 부근에 파묻으며 옷이며 신발까지도 내다 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정성을 표하곤 하였다. 더구나 그들이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도 이 원소에 와서 빌면 그 병은 곧 물러간다고 그들은 말하였다.
이러한 원소를 가진 그들이건만 웬일인지 해를 거듭할수록 나날이 궁핍과 고민만이 닥쳐왔다. 그래서 근년에는 그들의 먹는 것이란 밀죽과 도토리뿐이므로 흰밥이며 떡을 해다 파묻는 일도 드물었다.
그들의 이러한 아픔과 쓰림은 저 원소라야만 해결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원소를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 원소의 물은 푸르고 푸르다. 흰 옷감을 보면 물들이고 싶게 그렇게 푸르다.
억새풀이 길길이 자란 그 밑으로 봄을 만난 저 원소 물이 도랑으로 새어 흐르고 또 흐른다. 그 주위로 죽 돌아선 늙은 버드나무는 겉보기에는 다 죽은 듯하건만, 그 속에서 새 움이 파랗게 돋아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물매미 한 마리가 탐방 뛰어들어, 시원스럽게 원형을 그리며 돌아간다. 그러자 어디서인지 신발 소리가 가볍게 들려 온다.
신발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더니 산등으로 계집애 하나가 뛰어 올라온다. 그는 무엇에 쫓기는 모양인지 자주자주 뒤를 돌아보며 숨이 차서 달아 내려온다.
계집애는 이 동네서 흔히 볼 수 있는 메꽃 물을 들인 저고리를 입었으며 얼굴빛은 좀 푸른 기를 띠었으나 티 없이 맑았다. 그리고 손에 든 나물바구니가 몹시 귀찮은 모양인지 좌우 손에 번갈아 쥐다가는 머리에 였다가 그도 시원치 않아서 이번에는 가슴에다 안으며 낯을 찡그린다. 그리고 흘금흘금 산등을 돌아본다.
뒤미처 나무꾼애가 작대기를 휘두르며 쫓아온다.
"이놈의 계집애, 깜작 말고 서라!"
소리를 버럭 지르며 다그쳐 오는 속력은 몹시도 빨랐다. 계집애는 가슴에 안았던 바구니를 머리에 이며 죽을힘을 다하여 내려오다가, 그만 푹 거꾸러져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렸다. 바구니는 그냥 데굴데굴 굴러 내려간다.
나무꾼애는 이것이 재미스러워 킥킥 웃으면서 계집애 곁으로 오더니 막아 섰다.
"이 계집애 진작 줄 것이지, 도망질은 왜 하니. 아무러면 나한테 견딜 것 같니. 좋다! 넘어지니 맛이 어때?"
흑흑 느껴 우는 계집애는 벌떡 일어나며 바구니가 어디로 갔는가 하여 둘러보다가 저편 보리밭 머리에 있는 것을 보고야 나무꾼애를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 슬며시 돌아선다. 나무꾼애는 얼핏 뛰어가서 바구니를 들고 왔다.
"이놈의 계집애! 싱아 다 꺼내 먹는다, 봐라."
계집애가 서 있는 앞에 바구니를 갖다 놓고 그는 손을 넣어 싱아를 꺼냈다. 그리고 일변 어석어석 씹어 먹는다. 계집애는 또다시 힐끔 쳐다보더니,
"이리 다오, 이 새끼!"
앞으로 다가서며 바구니를 뺏는다. 나무꾼애는 계집애의 뾰로통한 모양이 우스워서 킥 웃었다. 그리고 계집애 눈등의 먹사마귀가 그의 눈을 끌었다.
"너 요게 뭐야?"
나무꾼애는 계집애의 눈등을 꾹 찔렀다. 계집애는 흠칫하며 나무꾼애의 손을 홱 뿌리치고,
"아프구나! 새끼두."
계집애두 꽤 사납게는 군다.... 나 하나만 더......"
나무꾼애는 코를 훌떡 들이마시며 손을 내밀었다.
계집애는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무서움이 다소 덜려서 바구니에서 싱아를 꺼내 내쳐주었다.
나무꾼애는 떨어진 싱아를 주워 껍질도 벗기지 않고 시시하고 침을 삼키며 먹다가 웬일인지 앞이 허전한 듯해서 바라보니, 있거니 한 계집애가 없다. 그래서 두루 찾아보니 계집애는 벌써 원소를 돌아가고 있다.
"고놈의 계집애! 혼자 가네."
나오는 줄 모르게 이런 말이 굴러 나왔다.
그는 멀리 계집애의 까뭇거리는 모양을 바라보며 그도 동네로 들어가고 싶은 맘이 부쩍 들었다.
"이애 선비야! 나하고 같이 가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내려갔다. 그가 원소까지 왔을 때는 계집애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 데나 펄썩 주저앉았다.
"고놈의 계집애..... 혼자 가네. 고런 어디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한참 후에 무심히 내려다보니, 원소 물 위에 그의 초라한 모양이 뚜렷이 보인다. 그는 생각지 않은 웃음이 픽 하고 나왔다. 그리고 물을 들여다보며 다리팔을 놀려 보고 머리를 기웃거릴 때, 아까 뾰로통해 섰던 계집애의 눈등에 있는 먹사마귀가 얼핏 떠오른다.
"고게 뭐야?"
하며 그는 휙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고놈의 계집애, 정말......."
그는 계집애가 사라진 버드나무숲 저편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따라서 물먹고 싶은 생각이 버쩍 들었다. 그래서 그는 벌떡 일어서며 땀 밴 적삼을 벗어 풀밭에 휙 집어던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넙적 엎디며 목을 길게 늘이어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목을 통하여 넘어가는 물은 곧 달큼하였다. 한참이나 물을 마신 그는 얼핏 일어나며 가쁜 숨을 후유 하고 내쉬었다.
원소를 거쳐 불어오는 실바람은 짙은 풀내를 아득히 싣고 와서 땀에 젖은 그의 겨드랑이를 서늘하게 말리어 준다. 그는 휭 맴돌이를 쳤다.
"내 지게.....?"
무의식간에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자, 그가 계집애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하고 단숨에 달음질쳐서 산등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게 있는 곳으로 와서 낫을 가지고 산 옆으로 돌아가며 나무를 깎기 시작하였다.
나무를 깎아 가지고 지게 곁으로 온 그는 그 지게를 의지하여 벌렁 누워 버렸다. 풀내가 강하게 끼치며 속이 후련해진다. 잠이라도 한잠 푹 자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첫째야!"
하고 누가 부른다.
잠이 사르르 오던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휘휘 돌아보니 이서방이 나무다리를 짚고 씩씩하며 이편으로 온다.
"이서방!"
그는 이서방을 보니 반가움과 함께 배고픔을 깨달았다.
"너 여기 있는 것을 자꾸 찾아다녔구나."
이서방은 나무다리를 꾹 짚고 서서 귀여운 듯이 첫째를 바라본다. 그들의 그림자가 산 아래까지 길게 달려 내려갔다. 첫째는 나뭇짐을 낑 하고 지며,
"날 찾아다녔수?"
"그래 해가 져가는데두! 어머니께 대답질을 하면 쓰나. 후담에는 그러지 말아라."
첫째는 이서방과 가지런히 걸으며 히이..... 웃었다. 그리고 강한 햇빛을 눈이 부시도록 치느끼며 그는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명치를 않았다.
"어머니가 밥 지어 놓고 여간 너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노염을 풀어 주려고 이서방은 말끝마다 어머니를 불렀다.
"밥 했수?"
첫째는 멈칫 서서 이서방을 보다가 무심히 저편 들을 바라보았다. 석양빛에 앞벌은 비단결 같다.
"이서방, 나두 올부터는 김 좀 맸으면......"
이서방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리고 저것이 벌써 김을 매고 싶어하니 어쩐단 말이누 하는 걱정과 함께 지난날에 일하고 싶어 날뛰던 자기의 과거가 휙 떠오른다. 그는 후― 한숨을 쉬며 불타산을 멍하니 노려보았다.
"이서방, 난 김매구, 이서방은 점심 가지고 나헌테 오구, 그리구, 또......"
그는 말만해도 좋은지 방긋방긋 웃는다. 이서방은 '너 김맬 밭이 있냐?' 하고 금방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꿀꺽 삼켜 버렸다. 따라서 가슴속에서 무엇이 울컥 맞받아 나온다.
"그러구 이서방도 동냥하러 다니지 않고 내가 농사한 곡식을 먹구......"
이서방은 그만 우뚝 섰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힘있게 짚었다. 그가 일생을 통하여 이러한 감격에 취하여 보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반면에 차디찬 이 세상을 이같이 원망하기도 역시 처음이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남의 집을 살며 별별 모욕을 받다 못해서 이 다리까지 부러졌지만, 아! 여기다 비기랴!
첫째는 흥이 나서 말을 하다가 돌아보니, 이서방이 따르지 않는다. 그는 멈칫 섰다.
"이서방! 왜 울어?"
첫째는 눈이 둥그래서 이편으로 다가온다. 이서방은 눈물을 쥐어 뿌린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다시 놀린다.
"어머니가 또 뭐라고 했구만. 그까짓 어머니 발길로 차 든져."
눈을 실쭉하니 뜬다. 이서방은 놀라 첫째를 바라보며, 아까 싸운 노염이 아직도 남아 있음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가 무엇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이리도 큰가?
"이애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못쓴단다."
이렇게 말하는 이서방은 이애가 벌써 자기 어머니의 비행을 눈치챔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며, 유서방과 영수, 그리고 요새 같이 다니는 대장장이가 번갈아 떠오른다. 그는 말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밀밭머리 좁은 길로 들어섰다.
"이서방! 오늘 돈 얼마나 벌었수?"
이 말에 이서방은 용기를 얻어,
"이애 돈이 뭐가, 오늘은 저 앞벌 술막집 잔채하는 데 종일 가 있다가, 이제야 왔다."
"잔챗집에..... 그럼 떡 얻어 왔지, 떡 얻어 왔지?"
작대기를 구르며 이서방을 바라본다.
"그래, 얻어 왔다."
"얼마나?"
그는 입맛을 다시며 대든다.
"조금 얻어 왔다."
"또 어머니 주었수?"
"아니 그냥 있다."
이애가 실망할 것을 생각하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눈허리에 벌레가 지나는 것 같았다.
"이서방, 나는 떡만 먹고 산다면 좋겠더라."
그는 침을 꿀꺽 넘기었다.
"내 이 담엔 많이 얻어다 줄 것이니, 이 배가 터지도록 먹으렴."
첫째는 히이 웃으면서 작대기로 돌부리를 툭툭 갈긴다. 이런 때에 그의 내리뜬 눈은 볼수록 귀여웠다.
그들이 집까지 왔을 때는 어슬어슬한 황혼이었다. 첫째 어머니는 문 밖에 섰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저놈의 새끼 범두 안 물어 가."
나오는 줄 모르고 이런 말을 하고도 가슴이 선뜩하였다. 이때까지 기다리던 끝에 악이 받쳐 이런 말을 하고도, 곧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나뭇짐을 벗어 놓고 일어난다.
첫째는 방으로 들어오며,
"나 떡."
뒤따르는 이서방을 돌아보았다. 첫째 어머니는 냉큼 시렁 위에서 떡 담은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잡놈의 새끼, 배는 용히 고픈 게다.... 떡떡 하더니 실컨 먹어라."
첫째는 떡바가지를 와락 붙잡더니, 떡을 쥐어 뚝뚝 무질러 먹는다. 그들은 물끄러미 이 모양을 바라보며 저것이 얼마나 배가 고파서 저 모양일까 하고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첫째는 순식간에 그 떡을 다 먹고 나서,
"또 없나?"
첫째 어머니는 등에 불을 켜놓으며,
"없다, 그만치 먹었으면 쓰겠다."
"밥이라도 더 먹지."
이서방은 불빛에 빨개 보이는 첫째 어머니의 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 어머니는 등 곁에서 물러앉으며,
"애는 저 이서방이 버려 놓는다니, 자꾸 응석을 받아 줘서..... 저 새끼가 배부른 게 어디 있는 줄 아오. 욕심 사납게 있으면 있는 대로 다 먹으려 드는데."
아까 떡 한 개 더 먹고 싶은 것을, 첫째가 오면 같이 먹으려고 두었던 것이나, 막상 첫째가 배고파 덤비는 양을 보고는, 차마 떡그릇에 손을 넣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것을 보니 섭섭하였다.
"이서방, 나가자우."
첫째는 벌써 눈이 감겨 오는 모양이다. 이서방은 첫째 어머니와 이렇게 마주앉고 있는 것이 얼마든지 좋으나, 첫째의 말에 못 견디어서 안 떨어지는 궁둥이를 겨우 떼었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짚고 일어나며,
"나가자."
첫째도 일어나서 이서방의 손에 끌리어 건넌방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 아랫목에 쓰러져서, 몇 번 다리팔을 방바닥에 들놓더니 쿨쿨 잔다. 이서방은 어둠 속으로 첫째를 바라보며, 아까 첫째가 빙긋빙긋 웃으며 아무 거침 없이 하던 말을 다시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나오는 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안방에는 벌써 누가 왔는지,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그의 귀로만 들어오는 듯하였다.
"어느 놈이 또 왔누?"
한숨 끝에 이렇게 중얼거리며, 어느 놈의 음성인지를 분간하려고 귀를 가만히 기울였다.
암만 분간하려나 원체 가늘게 수군거리니 분명치를 않았다. 그저 첫째 어머니의 호호 웃는 소리가 간혹 들릴 뿐이다.
그는 잠을 이루려고 눈을 감고 있으나, 그것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이 홀랑 달아나고, 화만 버럭버럭 치받친다. 이놈의 집을 벗어나야지, 이걸 산담.....? 그는 거의 매일 밤 이렇게 성을 내면서도 번번이 이 꼴을 또 보는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담배를 피워 물고 창문 곁으로 다가앉았다. 뚫어진 문 새로는 달빛이 무지개같이 쏘아 들어온다. 그는 담배를 빨아 연기를 후 뿜었다. 달빛에 어림해 보이는 구불구불 올라가는 저 연기! 그것은 흡사히 자기 가슴에 뿜어 오르는 어떤 원한 같았다.
그는 무심히 곁에 놓아 둔 나무다리를 슬슬 어루만졌다. 그는 언제나 속이 답답할 때마다 이 나무다리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아무 반응이 없는 이 나무다리! 사정없이 뻣뻣한 이 나무다리! 그나마 이 나무다리가 그의 둘도 없는 동무인 것이다.
"고놈의 계집애 정말......"
이서방은 놀라 돌아보니, 첫째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잠꼬대하는 소리다. 이서방은 첫째가 잠꼬대한 말을 다시금 되풀이하며, 저 애가 벌써 어떤 계집애를 생각함에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자기의 생각 같았다. 따라서 첫째를 장성하게 못 할 수만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그를 어린애 그대로 두고 싶었다. 첫째의 장래도 자기가 걸어온 그 길과 조금도 다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첫째 곁으로 바싹 가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씩씩 잔다. 지금 이 순간이 첫째에게 있어서는 다시없는 행복스러운 순간 같았다. 그리고 낮에 "나도 김매고 싶어" 하던 말을 다시금 생각하며 그의 볼 위에다 볼을 갖다 대었다.
첫째의 볼로부터 옮아오는 따뜻한 이 감촉! 그리고 기운 있게 내뿜는 그의 숨결, 자기의 살과 피가 섞여 있은들 이에서 더 따구울 수가 있으랴!
그는 무의식간에 첫째의 목을 꼭 쓸어안으며, '내 비록 병신이나마 나머지 여생은 너를 위하여 살리라' 하고 몇 번이나 맹세하였다.
마침 짜근거리는 소리에 이서방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이 개갈보 같은 년아!"
목청껏 지르는 소리에 지정이 저렁저렁 울린다. 이서방은 문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아이 이 양반이 미쳤다? 왜 이래."
"요년 아가리 붙여라, 이 더러운 쌍년, 네년이 저놈뿐이 아니라 나무다리 비렁뱅이도 붙인다지, 저런 쌍년, 에이 쌍년!"
침을 탁 뱉는 소리가 난다. 이서방은 '병신거지도 붙인다지' 하던 말이 언제까지나 귓가를 싸고돌았다. 그리고 전신이 짜르르 울리며, 손발 하나 놀릴 수가 없었다.
"아이쿠, 이 년놈들 잘한다."
짝짝 쿵 하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영수와 새로 다니는 대장장이와 맞붙은 모양이다.
"흥, 하룻개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게 두고 이른 말이구나. 이 경칠 자식, 그래, 온전한 부녀인 줄 알았냐?"
어떻게나 하는지 죽는 소리를 한다.
"이 년놈들 내 칼에 죽어 봐라."
"아이 저 칼! 저 칼!"
첫째 어머니의 이 같은 소리에 이서방은 벌컥 일어나며 나무다리를 짚고 뛰어나갔다. 안방 문짝이 떨어져 봉당 가운데 넘어졌으며, 등불조차 꺼져서 캄캄하였다.
첫째 어머니는 봉당으로 달아나왔다.
"이거 이거."
숨이 차서 헐떡이며 칼을 쑥 내민다. 이서방은 칼을 받아 들고 부엌으로 나가며 얻다가 이 칼을 둬야 좋을지 몰라 한참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나뭇단 속에 감추어 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왜들 이러슈. 점잖으신 터에 참으시죠들."
서로 어우러진 것을 뜯어 놓으려니,
:이 자식은 왜 또 이래..... 너 깡뚱발이로구나. 너도 한몫 들어 매 좀 맞으려니?"
누구인지 발길로 탁 찬다. 이서방은 팩 하고 나가자빠졌다. 그 바람에 나무다리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암만 찾아봐도 없다. 이서방은 온 봉당을 뻘뻘 기어다니며 나무다리를 찾았다. 그리고 몇 해 싸두었던 원한이 일시에 폭발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꾹 참으며 나무다리를 얻어 짚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전 같으면 밖에 구경꾼들이 얼마든지 모였을 터이나 오늘은 밤이 오랜 까닭인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나뭇가리 곁으로 와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컴컴한 저 불타산 위에 뚜렷이 솟은 저 달! 저 달조차도 이서방의 이 나무다리를 비웃느라 조롱하느라 이 밤을 새우는 것 같았다.
"이서방!"
찾는 소리에 이서방은 휙근 돌아보았다. 첫째가 내달아오며 일변 오줌을 솰솰 내뻗친다. 이서방은 첫째의 버릇을 아는지라 가슴이 뜨끔해지며 저놈이 또..... 하고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곧 첫째 곁으로 와서 그의 꽁무니를 꾹 붙들었다.
오줌을 다 누고 난 그는 울컥 내닫는다.
"이놈들! 이놈들!"
목통이 터져라 하고 고함을 치며 내닫다가 이서방이 붙든 것을 알자 주먹으로 몇 번 냅다 쳤다.
"놔, 이거!"
"이애 첫째야! 첫째야! 너 그럭하면 못쓴다, 응. 이애 매맞는다, 응, 이애."
"매맞아도 좋아, 이놈들."
이번에는 사정없이 머리로 이서방의 가슴을 들이받으며 발길로 차던졌다. 이서방은 또다시 자빠졌다. 첫째는 나는 듯이 지게 곁으로 가서 낫을 뽑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애! 이애!"
이서방은 너무 급해서 벌벌 기어 달려들어가며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이 눈치를 챈 첫째 어머니는 내달아 왔다. 그리고 대문 빗장을 뽑아 들었다.
"이놈의 새끼, 왜 자지 않고 지랄이냐."
"흥, 저놈의 새끼들은 왜 지랄이누."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숙친다.
안방에서는 더한층 지끈자끈하는 소리가 벼락치듯 난다. 이서방은 소름이 쭉 끼쳤다. 안방의 놈들이 이리 기울어지면 어린 첫째는 어디든지 부러지고야 말 것 같았다. 따라서 옛날에 자기가 주인과 맞붙어 싸우다가 이 다리가 부러지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며 그때 그 비운이 오늘에 또 이 어린것에게 사정없이 닥치는 듯싶었다.
이서방은 첫째의 발길에 채어 이리저리 굴면서도 그의 발목은 놓지 않았다. 그때 코에서는 선혈이 선뜻선뜻 흘러나온다.
"첫째야, 너 자꼬 그러면 다시는 떡 얻어다 안 준다."
이서방은 생각지 않은 이런 말이 불쑥 나왔다.
"정말? 이서방!"
첫째는 숨이 가빠서 훌떡훌떡하면서 돌아선다. 이서방은 벌떡 일어나며 그의 목을 꼭 쓸어안았다. 그러자 이서방의 눈에서는 눈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선비 어머니가 뒤뜰에서 이엉을 엮어 나가며, 약간씩 붙은 나락을 죽 훑어서 옆에 놓인 바가지에 후르르 담을 때 밖으로부터 선비가 뛰어 들어온다.
"어마이."
숨이 차서 들어오는 선비를 이상스레 바라보며 그의 어머니는,
"왜 무엇을 잘못하다가 꾸지람을 들었니?"
선비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머니 귀에다 입을 대었다.
"어머니, 저어...... 큰댁 아지머님과 신천댁과 싸움이 나서 큰집 영감이 생야단을 하셨다누."
선비 어머니는 귓가가 간지러워서 조금 머리를 돌리며,
"밤낮 싸움이구나. 그래 누가 맞았니?"
"그전에는 큰댁 아지머님을 따리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은 신천댁을 사정없이 따리데, 아이 불쌍해!"
선비는 무심히 나락 바가지에 손을 넣어 휘저어 보면서 얼굴에 슬픈 빛을 띤다.
"남의 첩질하는 년들이 매를 맞아야 하지, 그래 큰어미만 밤낮 맞아야 옳겠니?"
딸의 새침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올봄부터는 선비의 두 뺨에 홍조가 약간 피어오른다.
"그래두 어마이, 신천댁의 말을 들으니 그가 오고 싶어 온 게 아니라 저의 아부지가 돈을 많이 받고 팔아서 할 수 없이 왔다고 그러던데 뭐."
"하긴 그랬다고 하더라..... 그러기에 돈밖에 무서운 것이 없어."
선비 어머니는 지금 매를 맞고 울고 앉아 있을 신천댁의 얼굴을 생각하며 꽃봉오리같이 피어오르는 선비의 장래가 새삼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어서 가서 무얼 하려무나, 왜 그러고 앉어 있니. 오늘 빨래에 풀하지 않니?"
"해야지."
그는 어머니 말에 어려워 부시시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나락 바가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빙긋이 웃었다.
"어마이, 이것도 찧으면 쌀이 한 되나 될 것 같우, 참......"
"이애 얼른 가봐라."
"응."
선비는 나락 바가지를 놓고 밖으로 나간다. 그의 어머니는 물끄러미 딸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세월이란 참말 빠르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선비도 오래 데리고 있지 못할 것을 깨달으며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는 무의식간에 한숨을 푹 쉬며 손을 내밀어 이엉초를 꾹 쥐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끝은 짚에 닳아져 빨긋빨긋하게 피가 배었다. 그때에 얼핏 떠오른 것은 자기의 남편이다.
남편의 생전에는 비록 빈한하게는 살았을망정, 이렇게 이엉을 엮는 것이라든지 울바자를 세우는 것 같은 그런 밖의 일은 손도 대어 보지 않았다. 보다도 봄이 되면 으레 이 모든 것이 새로 다 되는 것이니..... 하고 무심히 지내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없어지매 모두가 그의 손끝 가지 않는 것이 없고 힘은 배곱 쓰건마는 무슨 일이나 마음에 들도록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집안 살림 명색치고 단 두 간살이를 하더라도 시재 돌멩이 하나 놓일 자리에 놓여야 하고 새끼 한 오라기 헛되이 버릴 것이 없었다.
남편의 생전에는 뜰을 쓸어 치는 비 같은 것이나 벽을 바르는 매흙이나는 그런 줄을 모르고 되는 대로 쓰고 버리고 하였건마는 지금에는 그것조차도 마음놓고 쓸 수도 없거니와 손수 마련치 않으면 쓸 것도 없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이엉초는 또 누구의 손을 빌려 저 지붕에다 올려 펼까 하는 걱정이 불쑥 일어난다. 지붕 해 이을 새끼는 그가 며칠 밤 자지 못하고 꼬아서 네 사리나 만들어 두었고, 이 이엉 엮는 것도 내일까지면 마칠 것이나 지붕 한복판에 덮는 용구새 트는 것이라든지 이엉초를 지붕 위에 올려 펴고 새끼로 얽어매는 것 같은 것은 남정들의 손을 빌려야 할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누구의 손을 좀 빌릴까..... 하고 두루두루 생각해 보다가, 에라 되든지 안 되든지 내가 그만 이어 볼까 하고 흘금 지붕을 쳐다보았다.
작년에 한 해를 건넜음인지 우묵우묵 골이 진 그 새에 풀이 이따금씩 파랗게 보인다. 그는 벌컥 일어나며,
"왜 날 두고 혼자 갔누?"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저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얌전하게 돌아앉은 작은집과 큰집! 모두가 말쑥하게 새로 이엉을 해 이었다.
그 위로 햇빛이 노랗게 덮이었다.
쨍쨍히 내리쬐는 봄볕을 받아 샛노랗게 빛나는 저 지붕과 지붕! 얼마나 저 지붕들이 부럽고도 탐스러운 것이냐!
그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그 지붕들은 점점 더 또렷또렷이 나타나 보인다. 그리고 그 지붕 새로 굵단 남편의 손끝이 스르르 떠오른다. 그리고 임종시까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끼르륵 하고 숨이 넘어가던 그!
그의 남편 김민수는 위인 된 품이 몹시도 착하고 정직하였다. 그러므로 정덕호 앞으로 몇십 년의 부림을 받았어도 일동전 한닢 축내지 못하는 것이 그의 특성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몸이 고달프더라도 덕호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덤벼들곤 하였다.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까지도 민수를 믿어 왔으며 덕호 역시 믿었다. 그러므로 거액의 돈받이 같은 것은 일부러 민수에게 맡기곤 하였다.
이렇게 지내기를 근 이십 년이었던,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 겨울이었다. 바로 선비가 일곱 살 잡히던 때였다.
그날--- 아침부터 함박눈이 부슬부슬 떨어진다. 이날도 민수는 일찍 일어나서 덕호네 집으로 왔다. 그래서 안팎 뜰을 쓸고 소여물까지 끓여 놨을 때 덕호는 나왔다.
"자네 오늘 방축골 좀 다녀오겠나?"
민수는 머리를 굽실해 보이며,
"다녀옵지유."
"좀 이리 오게."
덕호는 쇠죽간을 거쳐서 사랑으로 들어간다. 그도 뒤를 따랐다. 덕호는 아랫목에 놓아 둔 문갑을 뒤져 장부를 꺼내 놓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아니 방축골 그놈이 근 오십 원이나 되네그리..... 자네가 가서 꽤 받을까? 그놈은 몹시 질긴데."
민수는 머리를 숙인 채 가만히 있다. 덕호는 안타까운 듯이,
"가보겠나, 어떻게 하겠나? 가서 받지 못할 바에는 꼴찌아비를 보내겠네, 응 말을 해."
민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이 뻘개지며 머뭇머뭇한다.
"에이그 저 사람! 왜 그렇게 사람이 영악지를 못해..... 좌우간 갔다 오게. 그러구 말이야, 이번에 안 물면 집행하겠다고 말을 똑똑히 좀 해, 그러구 좀 단단히 채여."
덕호는 살기가 얽힌 눈을 똑바로 뜨고 민수를 바라본다.
"가는 김에 명호와 익선이도 찾어보게."
"네."
"그럼 오늘 꼭 가게."
덕호는 다시 한번 다지고 나서 장부를 문갑 안에 넣고 일어선다. 그리고 잔기침을 두어 번 하고 밖으로 나간다. 민수는 곧 그의 뒤를 따라나왔다. 가마 부엌에서 여물 끓인 내가 구수하게 났다.
민수는 여물을 푹 떠가지고 외양간으로 가니 벌써 소는 냄새를 맡고 부시시 일어나 구유 곁으로 나온다. 그리고 더운 김이 뭉클뭉클 오르는 여물을 맛이 있게 먹는다.
여물을 다 퍼 지르고는 민수는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함박눈은 소리 없이 푹푹 쏟아진다. 그는 근심스러운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눈이 오는데......."
이렇게 중얼거렸다.
집까지 온 민수는 신발을 부덕부덕하였다. 선비 어머니는 의아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시려나요, 뭐?"
"음, 저기 돈 받으러."
"아, 뭐 오늘 같은 날에요."
"왜 오늘이 어떤가? 이렇게 함박눈 오는 날이 오히려 푸근하다네."
옆에서 말똥말똥 바라보던 선비는 얼른 일어나 아버지 품에 안기며,
"아버지 나두 가, 응."
머리를 갸웃하고 들여다본다. 민수는 딸을 꼭 껴안으며 밥상에 마주앉았다. 그리고 밥을 좀 뜨는 체하고 곧 일어났다.
"내 가면 며칠 될 것이니 그 동안 선비 잘 간수하게. 불도 뜨뜻이 때고."
"눈 오는 날 가실 게 뭐야요..... 다른 사람의 몸은 몸이 아니고 쇳덩인 줄 아나 베."
선비 어머니는 주인 영감을 눈앞에 그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그 사람..... 별소리 다 해."
민수는 눈을 크게 떴다. 선비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지며 선비의 손을 어루만진다. 민수는 선비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본 후에 문을 열고 나섰다. 눈빛에 눈허리가 시큰시큰하였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내의 인사를 귓결에 들으며 민수는 성큼성큼 걸었다. 한참이나 수굿하고 걷던 그는 선비의 울음소리에 휙근 돌아보니 선비가 눈 속으로 뛰어온다.
민수는 선비를 바라보고 무의식간에 몇 발걸음 옮겨 놓았을 때 선비 어머니는 선비를 붙들어 안으며 우두커니 섰다. 민수는 두어 번 손짓을 하여 들어가라는 뜻을 보이고 돌아섰다.
아까보다 눈은 점점 더 많이 쏟아진다. 함박꽃 같은 눈송이가 그의 입술 끝에 녹아지고 또 녹아졌다. 그때마다 그는 찬 냉수를 마시는 듯하여 가슴이 선뜻하곤 하였다.
길이란 길은 모두 눈에 묻혀 버리고 길가의 낯익은 나무들도 눈송이에 흐리었다. 그리고 그 높은 불타산도 뿌옇게 보일 뿐이다.
민수는 길을 찾을 수가 없어 한참이나 밭고랑으로 혹은 논둑을 밟다가 동네를 짐작하고야 길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 눈에 젖었던 신발은 얼어서 대그럭 소리를 내었다. 이렇게 눈 속에 푹푹 빠지며 민수가 간신히 몇 집을 둘러 방축골까지 왔을 때는 벌써 그가 집에서 떠난 지 이틀째 되는 황혼이었다.
"주인 계시우?"
걸레로 한 주먹씩 틀어막은 문을 열고 나오는 주인은 민수를 보자 한층더 얼굴이 허옇게 질린다.
"이 눈 오는데 어떻게 여기를..... 어서 들어가십시다."
민수는 방 안으로 들어가니 너무 캄캄해서 지척을 분간하는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가만히 떠보니 숨이 답답해지며 차라리 오지 말았더면…… 하는 후회가 곧 일어난다. 그리고 이 저녁거리나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참 이 눈 오는데..... 제가 한목 들어가려고 했지마는 너무 오래 빈말로만 올려서 어디.... 참 오작이나 치우셨습니까."
주인은 어느 것부터 먼저 말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었다.
"여보게 저녁 진지 짓게, 뭐 찬이 어디 있어야지......"
그의 아내는 머리를 내려 쓸며 부시시 일어 나간다.
민수는 정신을 가다듬어 아랫목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누더기 속에서 조잘조잘하는 소리가 자주 들리며 누더기가 배움하고 열리더니 까만 눈알이 수없이 반들거렸다.
그리고 킥킥 웃는 소리가 난다.
몇 아이나 되는지 모르나 어쨌든 한두 아이가 아님은 즉시 알았다.
이 저녁부터는 바람까지 일었는지
바람소리가 휙 몰려갔다가 몰려온다.
그리고 문풍지가 드르릉드르릉 울리며 눈보라가 방 안으로 스르륵 몰려들었다.
민수는 방 안에 앉았느니보다
차라리 밖에 어떤 토굴 같은 곳이 있으면 그리로 나가서 이 밤을 지내고 싶은 맘이 부쩍 들었다
그러나 이 밤에 어디가 토굴이 있는지를 모르고 무턱하고 나갈 수도 없어서 맘을 졸이며 앉았노라니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고,
더구나 이 밤새에 몇 사람의 죽음을 볼 것만 같았다.
첫댓글 아름다운글 수고 하셨네요 좋은시간 되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