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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그는 누구인가?
미당 서정주 (1915~2000)
미당 서정주가 쓴 전두환 예찬시 "처음으로"를 아래에 소개한다
서정주가 이 허무맹랑한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써서 권력에 아부했던 시기는
민주화의 요구가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 오르던 시기였다.
어찌 이런 자들이 호의호식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었는지 개탄해 마지 않는다
학창시절 그의 시들을 배우도록 강요당했다는 사실에 너무나 어이가 없을 뿐이다
하기야 독재권력의 앞잡이를 자처한 그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선진국에서라면 이런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울러 서정주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몇가지 평론 들을 묶어 정리하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고창 김성수 집안의 마름의 아들로 태어나서
김성수가 설립하였던 서울의 중앙학교를 잠시 다녔으며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떠벌이기도 하고
일제말기에는 친일작가로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으며,
해방 후에는 이승만의 똘마니로서 이승만의 전기까지 쓰기도 하였다.
박정희 시대에는 박목월에 밀려 잠시 찬밥 신세가 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월남파병을 찬양하는 등 해바라기의 본질을 버리지 못 한다.
전두환이 권력을 잡자 또 다시 전두환 예찬시를 발표하는 등
출세를 위해서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해바라기처럼 일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친일, 친독재, 친권력의 전형이었던 사람이다
마름으로서 지주의 눈치를 살피며, 소작인들을 착취하는 선봉에 서야했던
그의 아비를 생각해 보면 그의 행적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죽기 전에 자신을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라고 강변했던 사람이다
전북 고창 질마재에 있는 미당 서정주 생가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의 해방 이후의 행적
1946 청문협 시분과 회장
1948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1961 시집 <신라초>로 5.16 문예상 수상
1966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77 한국문인협회 회장
1984 범세계한국인예술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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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이 72세때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쓴 전두환 찬양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1987. 1) /
이른바 친일문학인들은 대체로 이러한 목적의 “내선일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제의 전쟁수행”이 일제가 목표한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 또는 협조 이상의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 * * *
대표적인 예들로서, “최남선”, “노천명”, “서정주”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저간의 행적들은 다음과 같다.
--- 중략 ---
“미당 서정주”(1915~2000)의 경우는
그가 지난 2000년12월24일에 사망하기 이전부터,
그의 친일문인으로서의 행적에 대해서 적지않은 논란이 있어왔더니,
결국 그를 위한 “49재(四十九齋)가 끝나자마자”
그의 제자이자 후배이며 시인이었던 “고은”이
“창작과 비평”의 “2001년 여름 통권 112호”에서
“미당담론”을 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즉, 고은은 그 글을 통하여 미당의 친일문인으로서의 행적 및
해방 이후의 “제1공화국 정권”의 이승만 전대통령의 전기작성과
“제5공화국 정권” 시대의 전두환 전대통령을 위하여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등을
작성하여 발표한 것 등을 비판하였다.* * * * *
결국 미당도 앞서의 노천명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변화상황 등에 따라서,
그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에게 아부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단순 기회주의자”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 문단에서의 미당의 위치는
급기야 앞서 소개한 “미당 논란”까지 불러일으켰을만큼 대단하기 때문에,
미당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좀 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일단 간단히 그의 일제시대의 이력(履歷)을 언급하자면,
현재의 “동국대학교”의 전신(前身)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여
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된 뒤,
몇몇 동료시인들과 함께 "시인부락“(詩人部落)을 결성하는 등의
활발한 시인 활동을 하였던 ”평범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1942년 7월에 평론 ”시의 이야기 -
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매일신보“에 발표한 뒤,
1943년에는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살 된 벗에게“,
”보도행“, 시 ”항공일에“,
”헌시(獻時)“ 및 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을,
그리고 1944년에는 시 ”무제“ 및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죽음을 찬미한
”오장(하사) 마쓰이 송가“ 등을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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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미당 서정주 시인을 두고 언론이 저마다 민족 최고의 시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또다른 역사왜곡이다.
안타깝게도, 그가 일제말기에 다쓰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을 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권하고
일본 군대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는 1942년 친일 어용 문학지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양산했다.
그가 쓴 친일작품은 평론 1편, 시 4편, 단편소설 1편, 수필 3편, 르포 1편 등 10편에 이른다.
그는 조선독립을 위해 힘쓰는 동족을 `불령선인’으로 매도하고
또한 조선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했다.
뒤에 그는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년은 갈 줄 알았다"라고 말했는데,
기회주의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방이 되자 미당은 친일파들이 그랬듯이 우익쪽을 선택해
국내에 정치적인 배경세력이 없었던 이승만을 적극 지원하는 활동을 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불의한 현실에 싸우기 위해 활동했던 `민중문학’의 기세에 맞서기 위해
1986년 <문학정신>을 만들어 사상논쟁을 일으키면서 우익세력을 대변하였다.
지난 1981년에는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젼 지원 연설을 하였다.
또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에서는
`4.13 호언조치’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
국민의 민주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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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미당이 문제인가?
미당은 일생동안 1000여 편의 시와 많은 산문을 남겼고,
그의 시는 한때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10편 가량의 시가 실리는 등
한국 문학계에 커다란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물론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었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 특히 교수, 시인 평론가 등 우리 사회의 지식층에 있다는 사람들은
그를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당 서정주에 대해서는 그의 생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그 논란의 중심에는 그의 친일과 친군부 행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의 시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미당의 친일행위는 1966년 임종국의 ’친일 문학론’에서 그 작품목록이 밝혀졌고
1986년 김병걸, 김규동의 ’친일문학작품선집’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의 친군부행위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전두환을 향한 그의 숭배나 다름없는 찬양의 시들과 행위가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미당 사후 논쟁의 신호탄으로 고은의 ’미당 담론’(창작과 비평사 2001년 여름호)이 발표 된 직후
문정희, 이근배, 이남호씨 등이 미당을 옹호하는 글을 중앙 일간지에 발표했고,
그 후 황현산, 김명인, 김지하, 김진석씨 등에 의해 미당의 정치적 선택과 훼절이
그의 미학적 한계와 밀접한 인식론적 연관성이 있다는 비판적 논의가 발표되면서
미당은 죽어서도 뜨겁고도 슬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미당의 생애와 논쟁이 드러내고 있는
우리사회의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 2. 미당의 일생
미당의 광주학생운동과 등단
1915년 전북 고창에서 대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의 아들로 태어난 미당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안군 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과 편입, 다시 권고자퇴 끝에 만해 한용운의 지인이면서
육당이나 춘원등에게도 큰 영향을 준 석전 박한영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그의 권유로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전에 입학한다.
그후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시인이 되고,
그해 11월 김동리, 오장환 등을 동인으로 한 ’시인부락’ 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된다.
미당은 학생시절을 회상하면서 한때 사회주의에 빠져 학생운동을 했으나,
미당은 그것은 자신이 사회주의에 어설프게 물든 결과였다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후 미당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관련된 예술활동을 비판하게 된다.
미당의 친일
미당은 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발표하고 동인지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42년 최재서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문학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된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매일신보, 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춘추, 수필)>
<인보(隣保)의 정신(1943, 매일신보, 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조광, 수필)>
<항공일에(1943, 국민문학, 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조광, 소설)>
<헌시(獻詩)(1943, 매일신보, 시)>
<보도행(1943, 조광, 수필)>
<무제(1944, 국민문학, 시)>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매일신보, 시)>
미당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일찍부터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친일인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가 72년 자서전에서 밝히는 친일의 이유는 국제정세에 어둡고
일제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또 전쟁에 나가는 조선사람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친일을 인정했음에도 그리고 이미 그의 친일작품이 밝혀졌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83년 자신의 전집에서 연보에는 42,43년을 공백으로 처리하고,
작품연보에서는 단 3편의 친일 작품만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창피한 일이라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행적과 작품소개에는
모든 기록을 남기는 것이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는 길이지 않을까?
더구나 그는 84년 9월까지만 해도
자신이 일제 말기에 민족 정기를 지켰노라고 말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86년 김병걸의 작업으로 자신의 친일 문학 행위의 전모가 드러나자
드디어 언론과의 인터뷰와 자신의 시(종천순일파?)를 통해
공개적으로 친일행위를 인정했던 것이다.
해방과 미당 그리고 이승만
해방이 되었다. 미당이 앞으로 못 가도 200년은 갈 줄 알았다는 일본이 패망했다.
좌, 우의 대립과 새로운 시대를 향한 격동의 시기 미당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미당은 주저 없이 우익 문학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는 해방 후 결성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46년)와
이 단체가 확대재편 되었다는 ’한국문학가협회’(48년)에
각각 시 분과 회장과 시가 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단체들은 출발부터 해산까지
순전히 공산주의 이론과 공산주의 문학이론을 타도하기 위한 단체였다고 한다.
그 후 미당은 자신의 아버지가 한때 마름을 맡아보던 집안의 도움으로
48년 동아일보의 사회부장을 맡았다가 성격에 맡질 않아 문화부장으로 옮겼다.
또한 미당은 당시 이승만 개인의 선전도구로 쓰여졌던 신문 ’민중일보’의 사장인
윤보선의 주선으로 47년부터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시작하였다.
미당은 이승만과 여러 번 만남을 가지면서
그를 통해 새로운 삶에의 용기를 느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작업의 와중에 정부가 수립되자
미당은 새로운 정부를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해 보고자
더 높고 더 좋은 자리는 마다하고
초대 문교부 예술 과장자리를 자청하여 맡았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 그리고...
이승만이 물러난 후 서정주는 박정희에게 기울어지려고 했으나
박정희는 미당 대신 박목월을 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정주는 그 당시에도 월남참전을 앞장서서 고무, 찬양했다.
1980년 전두환이 나타나자 서정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광주학살을 공인하고,
전두환을 단군 이래 5천년 만에 만나는 미소의 인간으로 말하고,
그를 위해 TV지원 연설을 하고,
72세에 56살 전두환의 생일 축시 ’처음으로’를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된다.
서정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정권에 저항하던 민중문화운동을 비난하며
86년 ’문학정신’이라는 잡지를 만들어서 민중문학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민중의 개념을 공산주의와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미당은 또다시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치켜세웠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막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 후 미당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 내가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별 다른 문제 거리로 제기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시집은 그의 나이가 80이 넘어서 까지 꾸준히 발간되었다.
■ 3. 미당 논쟁이 드러내는 우리 사회의 단면들은 무엇인가?
한 인간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의 역사는 그 인간이 살았던 역사적 상황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일제치하, 군부독재 아래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인간은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살지만 현실은 다양한 모습과 과정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삶도 여러 가지 조각들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당은 오래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속에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여러 단면들이 담겨있다.
여기서는 미당이 드러내는 우리사회의 단면에 대해 논해보겠다.
친일, 친독재.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와 친군부 세력이 아직도 득세하는 현실 속에서
미당은 자신의 죄를 쉽게 그리고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미당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가 청산되지 못하고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예술과 사회. 순수하지 못한 순수문학
생명과 영생을 노래한 시인이
동시에 전쟁을 고무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모순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미당이다.
미당이 말하는 순수 문학이란 무엇인가?
거칠게 말해서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의 부재 속에서 추구하는
진리, 영혼 같은 고급의 쾌락과 맞닿아 있다.
저자와 텍스트. 저자 없이는 텍스트도 없다.
저자와 텍스트를 분리시켜서 보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미학론으로
미당을 옹호하려는 일군의 미당의 제자들은 저자와 텍스트의 분리가
어떤 경우에는 물론 가능하지만 미당의 경우는 올바르지 않다는
고은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만해 한용운의 시를 조국의 해방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서정주의 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금관문화훈장, 문학상, 그리고 미당의 제자들. 문화권력의 형성과 그 영향력
미당이 사후에 받은 금관문화훈장과 중앙일보가 제정한 미당 문학상을 보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생각들이
앞서 말한 분리주의 미학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시로만 평가받아야 한다는 미당 옹호론자들은
미당의 가미가제 찬양, 월남전 파병 지원, 산업역군 독려,
그리고 전두환에 대한 숭배의 시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미당의 제자들과 그의 옹호론자들은 어쩌면 미당을 옹호함으로써
자신들의 철옹성안에서 순수 예술, 고급 예술, 책임 없는 예술을 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현재 미당논쟁에 대해 접했던 사람은 얼마나 되고,
그 중에 미당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당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미당에 대한 비판논의가 너무 적은 것이 아닐까?
미당 서정주의 생가 옆 폐교를 개조해 만든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민족문학?
미당에 대한 평가 중에 그가 모국어를 아름답게 했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한국어는 미당으로 인해 축복 받았다 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시인이 언어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 기준을 모국어를 아름답게 했다, 안했다 같은 곳에 두는
그릇된 민족주의의 시각으로는 일제교육을 받은 미당의 시 속에
일본적인 상징표현과 성격이 들어있다는 일면 타당한 주장을 포용할 수 없다.
예술은 국경을 초월할 수 있다.
■ 4. 미당 논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지금 미당에 대한 논쟁과 비판의 글을 쓰지만,
그렇다고 미당의 시를 쓰레기로 매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봐도 미당의 시는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들과는 달리
미당은 정말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점을 황동규 시인은 미당이 정치에 종속되는 샤머니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정치적 실수를 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가 좋다고 주장한다.
물론 나는 이런 이유로 황동규 시인처럼 미당의 죄를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미당이 독특하고 개성있는 성격과 뛰어난 시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또한 위에서 순수문학을 비판하고 저자와 텍스트의 분리를 비판했지만,
인간본성과 인간성을 뛰어넘으려는 순수문학을 인정하고
저자와 텍스트의 분리도 가능하다고 본다.
저자가 범죄자라도 그의 그림이 아름답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이다.
마지막으로 미당의 제자들이 미당을 옹호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감정은 때로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위치와 능력을 고려할 때 그러한 지적인 파탄이 의아할 뿐이다.
미당은 뛰어난 시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지조 없이 항상 이기는 편만 드는 비겁한 기회주의자였다.
이러한 미당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그의 시는 이제야 비로서 올바른 평가작업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화영 교수는 말했다. ’미당의 시에 대한 평가는 이미 끝났는데
사람들은 미당의 삶만을 가지고 문제로 삼지 올바른 텍스트 비평은 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느 누가 세익스피어나 이태백에 대한 평가가 끝났다고 말하는가?
더 이상 살펴볼 곳이 없다면 미당의 시는 유치한 졸작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진정한 미당 비평, 사회와 예술의 분리, 저자와 텍스트의 분리,
민족국가간의 분리의 벽을 부수는 작업은 방금 시작되었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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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당의 친일문학
미당 서정주는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이다.
시인 고은(高銀)이 아직 미당의 시 그늘에 푹 파묻혀 있을 때
그를 가리켜서 말한 ’그는 또 하나의 정부(政府)’라는 수식어가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닐 정도로,
미당의 시인된 이력과 그의 작품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자 살아 있는 ’문학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줄줄 외면서도,
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팔 할이 바람’이라는 <자화상>의 첫 구절은 곧잘 인용하면서도,
그가 일제 말기에 그 눈부신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기꺼이 쏟아부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더러 있었다고 해도,
해방 이후에 일제잔재 청산작업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고,
또 미당이 지금 누리고 있는 문단적 지위와 업적의 광휘,
그리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엄호에 가리어
미처 제대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
이 시는 미당이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그의 대표적인 친일시다.
이른바 ’자살 특공대’로 알려진 - 일제는 그것에다가
옥쇄(玉碎:공명,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음)라는 이름을 붙여 미화했지만 -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행위로 한껏 찬양하고 있는 시다.
미당은 1933년 시 <그 어머니의 부탁>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다 알다시피 그는 등단 초기에 <자화상> <화사> <문둥이> 같은 개성있는 시들을 발표해
문단 일각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동인지 『시인부락』〔동인으로 김동리(金東里), 김달진(金達鎭), 오장환(吳章煥) 등이 참가〕을 주재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시단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친일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년 7월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이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인문사’에 입사해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가 집중적으로 발표한 친일 작품의 목록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수필)>
<인보(隣保)의 정신(1943, 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수필)>
<항공일에(1943, 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소설)>
<헌시(獻詩, 1943, 시)>
<보도행(1943, 수필)>
<무제(1944, 시)>
<오장 마쓰이 송가(1944, 시)>.
미당의 당시 문단 지위나 연배로 보아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당히 많은 양이다.
이 가운데 수필인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와
<스무 살 된 벗에게>,그리고 단편소설인 <최체부의 군속 지망>, 시<헌시> 등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거나 징병의 정당화 내지는 신성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일 작품들이고,
그 외의 작품들도 대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작품들이다.
미당은 또 1943년 10월 18일부터 엿새 동안
일본군 경성사단이 김제평야에서 벌이는 추계 훈련에
평론가 최재서, 일본인 히라누마(平沼文甫) 등과 함께 종군해
그 훈련 참관기를 쓴 「보도행」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훈련 마지막 날,
이 훈련을 견학하기 위해 나온(입영을 앞둔) 조선의 스무 살짜리 청년 수십 명과
미당 일행이 벌이는 수작은 차라리 서글픈 심정이 들만큼 한심한 장면이다.
특히 미당의 몇 가지 미덕 가운데 그래도 높이 사주고 싶은,
우리 토박이말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빚어내는 그 재주를 떠올리면
그 서글픔은 더욱 배가된다.
최재서씨가 먼저 우리들의 신분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이 중에 국어(일본어를 가리킴)를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하고 동석한 교관에게 물으니
"없습니다."
하는 교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부터 그들은 연방 빙글빙글 합니다.
지금 세상에 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는 눈치입니다.
"그래, 명년에는 여러분이 모두 다 병대로서 입영을 하게 되는데
그 감상이나 희망을 말해 주시오. 병정이 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떤지?"
최씨가 이번엔 그들을 향해 물으니,
그 중에 한 소년은 참으로 유창한 국어로써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용산의 어느 내지인 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금년 봄에사 고향으로 왔습니다. 용산에 내 일터가 있던 관계로
나는 늘 병정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는 참 씩씩하다,
나도 한 번 저렇게 되어 봤으면 쓰겠다 하고 늘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던 만큼 우리도 군인이 된다는 기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뛰었습니다.
지금의 감상은...... 감상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입영해서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형. 이것은 결코 제 문장이 아닙니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정되어 있는 어조와 능란한 국어에는
뭐라고 한마디 물으려 했던 나 자신이 주저될 정도였습니다.
〔서정주 「보도행」, 『조광』, 1943년, 12월호
(여기서는 실천문학사의 《친일문학작품선집》2에서 재인용함〕.
● 이승만의 전기를 쓰다
해방이 되자 미당은 문단에도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없이 우익쪽을 선택해 그것도 이승만 노선에 충실한 쪽으로 선회한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활발한 조직활동과 문예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던 좌익쪽에 비해
여러 가지로 열세에 놓여 있던 우익문학 진영은, 그에 맞서기 위해
1946년 4월 조직적 투쟁의 전위 부대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이하 청문협)’를 결성한다.
미당은 이 조직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시 분과 회장을 맡게 된다. ’
청문협’의 강령 중에 한 구절을 보면 ’일체의 공식적 예속적 경향을 배격하고
진정한 문학정신을 옹호함’이란 대목이 있지만,
실제로 이 무렵 ’청문협’에 소속된 문인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우익 진영의 각종 정치단체와 사회단체, 문화기구와 청년단체 등에
기반을 두고 활발한 정치공작을 하고 있었다.
’청문협’은 어떤 단체였는가.
그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곽종원(郭鐘元)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청문협’은 발족한 지 불과 3년 반여 만에 발전적인 해산을 하고 말았지마는,
그 첫 출발부터 해산하는 그날까지, 순전히 투쟁단체로 지속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분쇄하고, 또 공산주의 문학이론을 타도하는가 하면,
저들의 문학단체를 격파하는 데 또한 과감했던 것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감개무량함을 느낄 따름이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해방문학 20년》, 145쪽).
미당은 이 ’청문협’의 시분과 회장을 맡고 있다가 정부 수립과 함께,
이 단체가 확대재편된 ’한국문학가협회(1948)’에서도 시가분과 위원장을 맡는다.
그가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행보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미당은 1946년 최재서와 함께 부산의 ’남조선대학교(지금의 동아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내려가 있다가,
이듬해 『민중일보』 사장이자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이던 윤보선(尹潽善)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전기 집필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온다.
당시 『민중일보』는 그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김동리의 회고를 빌자면,
자신들 스스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이승만 개인의 선전과 그를 위한 여론 형성의 창구 역할을 했던 신문이었다
(돈암장은 당시 이승만이 묵고 있던 택호).
당시 국내에서 활약하던 어느 정치가보다도
조직이나 정치적 배경에서 열세에 놓여 있던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으로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을 더 널리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고,
전기 집필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미당은 나중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는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마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서정주 문학전집》3, 264쪽).
당초 『민중일보』에 연재하기로 했던 이 전기는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0월 ’삼팔사(三八社)’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전작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꼬박 2년의 공력을 들인 이 전기는
출간되자마자 이승만의 지시로 발매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이유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이승만 집안의 어른들에게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제쳐놓고라도,
이미 이 무렵에는 정부가 수립되어 확고한 정권을 쥐게 된 이승만으로서는,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발매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로
전기 출간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노회한 정치가를 향한 미당의 짝사랑은 그렇게 무너져 내린 셈인데,
이쯤 되면 정치가와의 신의나 관계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볼 법도 한 일이건만,
미당은 그렇지를 못했다.
특히 그가 5공화국 때 보여 준 여러 행적은
그를 따르던 문인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만큼 어설픈 것이었다.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한 그의 친여성(親與性)은
딱히 시인된 천품으로서의 천진난만함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은 것이다.
미당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행보에 힘입어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 자리에 앉게 된다.
● 민중문학을 향한 비난과 매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당은 문총 구국대 결성에 앞장서서 후방의 선무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예술원 회원,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관변 문화단체의 중핵 역할을 맡아
이른바 ’순수문학’의 성곽을 철옹성처럼 지키는 역할에 주저함없이 나선다.
미당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조선 백자니 학이니 구름이니 꽃을 벗삼을 때는
그의 시적 미덕이 그런대로 지켜지지만,
이미 일제 말에 경험했던 그 정세에 대한 오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 문제에 달려들기만 하면 그는 거의 예외없이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는 문학가는 현실에 초연해 ’영원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면서도,
민감한 문제가 있으면 언제나 정권의 편에 서서 충실히 그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그 ’영원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일이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던 경우가 바로 1980년대였다.
1980년대는 그 초입에 ’광주민중항쟁’이 있었고,
그 피어린 민중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지긋지긋한 박정희 군사독재에 이어
또다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불의의 현실에 맞서 싸웠다.
그 치열한 문학운동이 이른바 ’민중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퍼지게 되었던 것인데,
미당은 그 ’민중 문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대두되던 1986년에
『문학정신』이란 잡지를 만들어 그 발행인이 된다.
이 잡지가 창간된 자세한 배경과 연유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 큰 힘을 지니고 뻗어나가던 민중문학의 기세에 맞서
보수우익 진영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일단의 시도임은 창간호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정신』은 그 창간호에 ’문학자 50인의 목소리’라 하여
민중문학을 일제히 비판하는 글을 특집으로 싣는가 하면,
이 잡지가 1989년 발행인이 바뀌고 잡지의 편집진과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 전까지
줄곧 미당이 도맡아 쓰던 그 ’권두언’속에서
민중문학에 대한 형언키 어려운 비난과 험담을 늘어놓게 된다.
그 몇 구절을 옮겨 보자.
민족이나 인류의 역사 진행 속에서 한 사람의 문학자가
어떤 사관(史觀)을 가지고 작품을 쓰고 비평을 해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특히 오늘날의 우리 한국 문단의 현상 속에서는 중요한 일로만 보인다. …
사관의 유형 가운데서 아무래도 재고삼고(再考三考)를 요하는 문젯거리는
그 사회혁명파적 사관이라고 보이는데,
이것이 점점 더 파급되어 그 수를 늘여갈 경우에 올 하기(下記)의 두 가지 효과에 대해
나는 문학 외적인 입장에서까지도 심한 우려를 여기 표명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염려되는 효과의 첫째는
아직도 철이 덜 든 학생들이나 공장 근로자의 군중심리를 선동하여
’민주 민족 민중은 아시안 게임도 망국 아시안 게임이라고 몰고 우방 미국까지도 따돌리고 …
때려부수자. 돌이다. 화염병이다. 막 던져라!’의 파괴의 편이 되어,
유사 이래의 새 발전의 여러 계기들이 눈앞에 마련되어 와 있는 민족사적 호운(好運)의 이 시점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요,
그 둘째는 (이것이 더 큰 염려이지만) 그런 일조의 힘이라는 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북한 김일성 일파의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을 고무하여
제2의 6.25의 참변을 이 민족에 다시 가져오는 촉진제가 되면 어찌 하겠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
(「문학자의 사관」, 『문학정신』, 창간호, 권두언).
먼저 문학인의 입장에서보다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에서
근년 우리나라 문단 일각에서 문제되어 오고 있는
그 민중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나 같은 연배의 사람의 사적 식견(史的 識見)으로는
이 민중이란 말은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무산계급 혁명을 이 나라에서 달성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말로 알고 있는데
근년 우리나라 문단 일각에서 써오고 있는 이 말의 뜻이
그것과 다른 것이라면 여기에 대한 해명은 반드시 진실하고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걸로 안다.
만일에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38선 이북에 김일성의 공산주의 체제의 딴전을 두고 있는 우리 자유 민주주의 국민들로서는
더 이상 좌시만 하고 있기는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민중문학 재고」, 『문학정신』, 1987년 1월호, 권두언).
위의 권두언의 내용은 시인의 말이라기보다는
공안 당국의 서슬퍼런 검사의 엄포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6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현대사 민주화운동의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수놓은 바 있는
1987년 초여름의 그 시점에, 한국문인협회는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그 관제어용 단체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어 양식있는 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지만,
바로 그 초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온 나라가 독재정권의 음모에 저항해 싸울 때,
이 노시인은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그것을 꾸짖고 있었다.
우리 겨레의 이 역사적 현시점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노력해야 할 일은
각자 자기가 해온 전공의 일들을 각자가 놓인 그 자리에서 성실히 침묵 속에 꾸준히 이행하여
이 결과의 합계로서 이 민족의 흥융(興隆)을 가져오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일은 접어 두고 전연 불필요한 자유 과잉의 풍조 속에
정권 탈취의 야망의 발산만 음으로 양으로 왼갖 꾀와 폭력까지 다하여 전개하고 있는
식자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으니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거슬리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람들 속셈은 베트남의 말로와 같이 이 나라를 새빨갛게 하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아니라 누구나 이목구비와 건전한 마음 가진 사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뚜렷한 사실로, 우리나라는 지금 유사이래 처음으로
세계경제 속의 흑자 생산 제2연도를 통과하고 있고,
또 여러모로 일대 약진의 계기가 될 게 분명한
세계 올림픽 개최 1년 전의 바쁜 준비기에 처해 있다.
전 국민의 획기적인 합심 노력만이 요청되는 이 중차대한 역사적인 시점에서
왜 무슨 바람으로 등 돌리고 뒤돌아서서 딴전을 보며
힐난과 불화 조성과 혼란과 파괴만 일삼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해 줄 수 없는 일이다.
문학자들이란 특히 민족과 인류의 사회 현상 속에 간절하게 살면서도
그것들이 주는 의미와 느낌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여
여기 역사적 영원성의 가치까지를 부여해야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하는 것인데,
정말 신중해야 될 줄로 안다
(「문학자의 사관」, 『문학정신』, 1987년 7월호, 권두언).
이 글에서, 저 일제 말기에, 천황폐하의 황은을 배신하고
대동아공영의 위업에 찬물을 끼얹으며, 조선 독립과 같은 가당찮은 꿈이나 꾼다고
동족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타매하던 친일인사의 논조와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이
필자 혼자만의 헛된 상상력의 발동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정말 신중해야 했던 것은 정작 그가 아니었을까.
●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논리의 허구성
미당은 다른 친일 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일경력을 비교적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온 바가 있다.
애써 감추고 숨기려는 친일 인사들이 훨씬 많은 사실에 견주어
그 솔직함만은 높이 사줄 만한 것이다.
그는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의 〈부끄러운 이야기〉에서 친일경력을 밝혔으며,
1992년 1월 잡지 『시와 시학』의 대담에서도 솔직히 털어놓았고,
최근에는 『신동아』 1992년 4월호에서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글에서
당시에 시비가 일고 있던 그의 친일경력을 또 한 번 시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기묘한 상황론에다가
죄 없는 조선 사람 전부를 공범(?)으로 옭아넣어
얼토당토않은 합리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자전적 담시집 《팔 할이 바람》속에 있는 〈종천순일파?〉라는 시에서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이때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 속의 또 다수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
친일하게 된 연유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미당의 고백은 그 솔직함과,
또 솔직함 뒤에 놓인 그 우매함 덕에 이제 제법 많이 알려진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일제가 1945년 8월에 패망하지 않았으면
그의 친일행위는 더 연장되었을 것이란 말과 똑같다.
열 발짝을 양보해 그의 말을 다 받아들인다 해도,
그 일제 말의 참혹한 상황에서 설움을 곱씹으며 묵묵히 버텨낸
수많은 우리 민족의 선남선녀와,
징병 가라, 학병 지원해라, 당신 아들 지원병 보내라고 떠들고,
가미가제(특공대)의 자살 놀음을 숭고한 애국 행위로 본받으라 소리 높여 노래하고,
혈서로 군속 지원을 하는 젊은이를 미화시키고,
일본 군대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종군 기사를 쓴 그가,
대체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행위에 감히 ’하늘 뜻에 따라(從天)’라는 변명이 붙을 수 있는가.
겉으로 드러난 말뜻의 꼬리를 잡아 시비를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친일이 하늘 뜻에 따른 것이었다면 당시에 혹독한 탄압을 무릅쓰고
나라 안팎에서 항일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은 ’하늘 뜻을 거스른 사람’들이란 말인가.
시대의 오욕을 참고 견뎌내는 일과,
자의든 타의든 불의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친일행위에 대한 미당의 반성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일제의 존재가 불의인 줄 몰랐거나, 불의인 줄 알면서도
그 힘이 너무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아 굴복하고 말았던 사실,
그것 자체에 국한되었어야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미당이 민중문학자들을 향해 그토록 강조했던
문학자가 지녀야 할 신중함과 글쓰기의 엄중함은,
거꾸로 그의 친일행위와 해방 이후에 그가 보여 준 체제 순응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숱한 발언과 행적을 향한 경구(警句)가 되어야 도리에 옳을 것이다.
미당은 여전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가급의 시인이며,
그 애송시의 보유 숫자로도 으뜸가는 큰 시인이다.
이 점은 아무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언행과 정치적 행보는
그 큰 사랑에 견주면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친일과 해방 이후의 활동이
우리 시문학에 남긴 그의 큰 발자취와 성과를
완전히 부정하는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향력과 명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기있고 진실한 반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글이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 참된 미당의 시인됨을 밝히기에는
처음부터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형국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역사의 엄중함을 신뢰한다면, 그의 시와 시인됨이 온전히 하나로 묶여,
덜고 보탬이 없이 객관적으로 조명받을 때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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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당 서정주라고 말은 많이 들엇는데
알고보니 권력의 하수인 해바라기 같은 암적인
존재 엿군요,, 더구나 친일파 엿다니 분노가 확
치밀어 옵니다 덕분에 잘 배우고 갑니다
그의 문학권력으로 인하여
우리 학창시절에 그의 시가
교과서에 10여편이나 실렸었지요
그 바람에 그의 시가 많이 애송됐구요
과장된 면이 아주 많습니다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지요
그가 교수했던 동국대 국문학과가
문학계를 꽉 잡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국화옆에서와
푸르른날
너무좋아 가끔 읖조리는데
참 안타깝네요!
양비론에 묶여서
두리뭉실 넘어가는 민족혼!
우리민족의 한계아닌가 싶네요.
작금의 격한 분열상도 결국은 처단해야될것을 용서와 화해라는 알량한 사념으로 죄다 놔둬버린 결과물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는 다른 건 다 놔두고라도
전두환에 대한 용비어천가
그 찬양시를 보면 토가 나옵니다
구역질이 나지요
어떻게 그런 시를 쓸 수 있는지
아무나 그런 시 못 씁니다
아니 안 씁니다
박목월도 박정희가 총애했지만
그따위 시는 안 썼습니다
미당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모두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미당 서정주에 대한 그의행적을 샅샅이 파헤쳐 바른역사 세우기를 바래봅니다
행적은 이미 다 밝혀 졌구요
다만 그의 막강한 동국대 국문학과 인맥
문학권력이 그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요
쉽사리 부수기는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